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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혁명의 아름다움
이형권(문학평론가)
1. 러시아의 시인이자 혁명가 마야코프스키는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지리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리라/ 생명을/ 주관하는 자는/ 암흑의 혹성 저 너머로/ 마지막 태양의/ 마지막 빛까지도 불사르리라.”(「인간」 부분)라고 썼다. 그의 온 생애는 시와 혁명을 위해 바쳐졌고, 서른일곱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혁명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마야코프스키처럼 전격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시인은 크고 작은 혁명을 부단히 추구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먼저 언어의 혁명을 꿈꾸는 존재이다. 시인은 언어의 혁명을 통해 시의 새로움을 갱신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언어의 혁명이 없이는 시의 혁명도 있을 수 없기에 시인은 언어의 혁명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 혹은 새로운 표현을 위해 언어의 사막을 방랑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또한 자기의 혁명을 꿈꾼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대한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비로소 타인의 혁명을 유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시인은 현실의 혁명을 꿈꾼다. 시인이 바라는 사회의 혁명은 물론 정치인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면 시인은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감각의 분할을 통해 혁명을 꿈꾸는 존재다. 시인은 이러한 언어, 자기, 현실의 혁명을 통해 시와 삶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혁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명이란 지엽적이고 완만한 변화가 아니라 전체가 급격하게 갱신을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이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 부분)고 쓴 것은 그런 어려움을 호소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혁명”은 1960년의 4.19혁명을 의미하고, “방”은 당시의 국민이 처한 상황을 상징한다. 이 시구는 당시 4.19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몰아낸 국민들은 기쁨이 진정한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것이다.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박재학 시인도 이렇게 노래한다.
세상은 내게 얻는 것만 가르쳤다
남보다 앞서 가는 것만 가르쳤다
나는 배운 대로 규칙을 무시하면서
오르려고 기를 썼다
저며지는 칼이 없다면 자르는 칼을 휘두르면 되지
안주할 곳 없는 시간이 생을 감싸고 있어도
혁명을 하려고 세상을 관찰했다
기형처럼 커가는 욕심이 영혼을 짓밟으며 달려들었다
혓바늘 돋은 입으로 헛헛한 공복을 채우는 법만 배웠다
얻어 보려고, 앞서 가려고 버티고 버틴 몸이
골다공증으로 부서져 내리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젠장, 혁명을 하려고 허기를 때웠다(「실패한 혁명」 전문)
이 시는 한때 세상의 부정과 부조리에 동참했던 “나”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첫 번째 연에서 속악한 “세상”의 법칙대로 “얻는 것”과 “앞서 가는 것만”을 위해 “규칙을 무시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잘못된 삶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극복하고자 “혁명”을 생각해보았지만 “기형처럼 커가는 욕심”이 방해를 하고 나서는 것이 현실임을 느낀다. 그러나 “나”의 “혁명”에 대한 의지는 그런 현실 앞에 굴복을 하지 않는다. “나”는 “얻어 보려고, 앞서 가려고 버티던 몸이/ 골다공증”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혁명을 하려고 허기를 때웠다”고 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타락한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통로로서 자기로부터의 “혁명”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비록 시인은 “혁명”을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혁명” 정신을 끝까지 사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 의지로 인해도 “혁명”의 가능성은 언제나 살아있는 것일 터, 이 시집의 시편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의 서정적 기록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삶의 상처를 응시하고, 세상의 타락을 비판하고, 이상적 세계를 꿈꾼다.
2. 시집을 열면, “나비의 날개짓이 아프고 서러웠다”(「시인의 말」 부분)라는 문장이 맨 앞에 나타난다. 이어서 그동안 시를 쓰고 살아오면서 겪은 “차디찬 시간”과 “투병한 불안”을 회억하고, “쇳소리를 내며 신음하는 꿈들/ 그 꿈들을 엮어 날개를 달아 세상에 보낸다”는 선언이 앞을 가린다. 이 문장들에는 박재학 시인이 그동안 시를 써오면서 느낀 소회와 아쉬움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자신의 시가 “신음하는 꿈들”이라고 한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갱신하려는 시인의 의지와 그것을 방해하려는 것들과의 불협화음이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시인의 꿈꾸기 혹은 시 쓰기를 방해하는 요소들은 가까이는 자기 자신의 나태함에서부터 가장으로서의 의무감, 일상에서의 비루함, 직장에서의 과도한 업무 등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건재한 우리 사회의 부정과 반칙, 불공정, 비정함, 고루함, 물신주의, 성공지상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시인의 시 쓰기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온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던 운동화가 아프다
엄지발가락을 밖으로 밀어낸다
굴곡진 길을 따라 나비 한 마리 걸어간다
바람에 날아온 낡은 풍경이 걸어간다
입을 벌리고 토해내는 붉은 목마름
늙은 시간이 괄약근을 조이며 굴러간다
블랙홀 속에서 숨을 참고 살다가
봇물 터지듯 향기가 솟구친다
나는 발목을 잡아끄는 굴곡진 길을
득도한 사람처럼 걸어간다
길 끝에 운동화를 두고 멀리서 바라본다
끝내 재생 불가 진단을 내린다(「멀리서 본다」 전문)
이 시의 “운동화”는 마치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등장하는 신발의 상징을 닮았다. 즉 “닳아 빠져나온 신발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에는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배어있다“(「예술작품의 근원」에서)는 문장의 ”신발도구“와 다르지 않다. 이 시의 낡은 “운동화”는 시인의 “굴곡진 길을 따라 나비 한 마리 걸어간다/ 바람에 날아온 낡은 풍경이 걸어간다”에 드러나듯이, 시인의 고달팠던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고달픈 삶이라고 하여 그것이 비루하고 수동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생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일 고달픔의 “블랙홀 속에서”도 “숨을 참고 살다가/ 봇불 터지듯 향기가 솟구친다”고 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득도한 사람처럼 걸어간다”는 시구로 미루어 보건대, 시인은 고달픈 삶의 과정 속에서도 허투루 살아오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함께 한 낡은 “운동화”를 “멀리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러한 삶의 과정을 관조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마치 “진실을 말해도 잔소리가 되는 꼰대의 길”(「꼰대의 길」 부분)을 가는 시인의 서러움과 맞닿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달픔이나 서러움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굴곡진 길”을 걸어온 “낡은 운동화”는 진실한 삶을 살아온 시인의 삶의 여정과 그 내면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삶이 고달픈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이 “내 몸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온전히 서서/ 상처 아물기를 기다리며 아픔 때문에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별자리에 인사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하여 사실은 울고 있었”(「그날 밤 느티나무 사건」 부분)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집의 시편들에 의하면 일차적으로 유년기의 가난이라든가 실존적 차원의 고독 등과 관련된 사적, 내면적인 차원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정이나 부조리와 같은 공적인 차원이다.
여름이 얇아지고 가을이 두꺼워지는 때
항아리에 감을 넣고 노래를 부르며
막걸리를 붓는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에너지를 얻어야 하는
무산소 호흡 생물들이 유기물 분해를 위하여
다른 유기물을 만들기 시작하고
효소작용에 의하여 쉴 새 없이 발효를 시킬 것이다
김치와 된장을 넣어 비빔밥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치즈를 먹으며
나는 세상의 발효를 생각한다
썩어버린 과일을 보고
세상의 부패를 생각한다
같은 곳에서 탄생하여 자라난 부패가 발효보다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지는 이유를 생각한다(「발효와 부패」 전문)
이 시는 “부패”한 세상에 대한 고발장이다. 시인은 고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부패”의 문제를 “발효”와 대비시킨다. 생화학적 차원에서 “부패”는 유기물들이 썩으면서 인간에게 해로운 것으로 변하는 일이고, “발효”는 유기물들이 분해되면서 인간에게 이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같은 유기물일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는 “부패”가 되고 다른 하나는 “발효”가 된다. 이 시에 등장하는 “막걸리”, “김치와 된장”, “포도주”, “치즈” 등은 “발효”된 것들이다. 모두가 인간의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되는 유익한 음식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썩어버린 과일”은 “부패”하여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패”는 썩어서 악취를 풍기지만, “발효”는 효소 작용으로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시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실 그러한 유기물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문제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 사회에서 “부패가 발효보다/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정작 필요한 존재는 “발효”된 인간인데, 실제는 “부패”한 인간이 세상에서 더 많은 권력과 물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이 점에 대해 비판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시에서도 부패한 사회에 대한 고발은 이어진다. 가령 “차디찬 물 속에 가라앉은 후에도/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 했는데/ 비도덕적이고 부패에 강한 사람들은/ 여전히 밖에 있다”(「안에 있으면 안전한가」 부분)에서는 세월호의 비극과 관련된 “부패”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사실 세월호는 인명 경시 풍조와 막무가내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부패가 낳은 극단적인 비극의 사례이다. 부패의 더 심각한 모습은 “청렴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무기로 물질을 탐하고/ 다시 청렴을 강조해야 하는/ 모순의 세계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청렴을 다단계 판매하는 사람들”(「은밀한 거래」 부분)에 드러난다. 사실 “청렴”을 내세워 부패를 일삼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부패한 사람들보다 더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다. 시인은 우리 사회에 “청렴”이라는 이름의 부패가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가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의 가치관과 그로 인한 인간 소외 문제도 시인이 혁명을 꿈꾸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빈익빈부익부라는 말이 이제는 비판적 기능마저 상실한 채 너무도 자연스러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삶의 여정은 고달프기만 하다.
삼백 원짜리 라이터를 사서
담배를 피며 새벽 속으로 간다
화단의 붉은 다알리아처럼
오늘은 활짝 피어야 한다
꽃잎 떨어지는 신음을 들으며
인력사무소 처마 밑에 서 있다
삼백 원짜리 라이터를 꺼내
담배를 피며 한낮 속으로 간다
한 모금 남은 미래도
온전히 내 몫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밥을 위한 수고로움이
손 흔들지 않고 지나가고 있다(「밥을 위하여」 전문)
이 시는 일용노동자의 하루 일과를 그리고 있다. 하루벌이로 살아가는 일용노동자는 “삼백 원짜리 라이터”로 불을 붙인 “담배를 피며 새벽 속으로 간다”고 한다. 그의 소망은 “붉은 다알리아처럼/ 오늘은 활짝 피어야 한다”는 것, 즉 부디 노동의 기회를 얻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다. “꽃잎 떨어지는 신음”이 암시해 주듯이 그에게 노동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다시 “삼백 원짜리 라이터를 꺼내/ 담배를 피며 한낮 속으로 가”고 있다. 그는 “한 모금 남은 미래도/ 온전히 내몫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데에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밥을 위한 수고로움” 즉 노동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이 일용노동자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고달픈지를 일려준다. 이러한 노동자 문제와 비슷하게 도시 철거민의 문제도 우리 사회의 문제적 국면이다. 가령 도시철거민 문제를 다룬 “핏빛으로 재개발 지구를 흐르는 하천에/ 떠나지 못한 자들이 앉아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삶’이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비용’이다”(「감정적 분노」 부분)는 시구도 관심을 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은 성격이 조금 다를 뿐 일반적인 직장인들이라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직장 생활은 “익숙해진 잣대로 가로, 세로, 높이를 재고/ 이마에 점수를 붙이고 죽어가는 순서를 정하고// 오늘도 점수 따러 가”(「평가 시스템」 부분) 일이다. 번듯해 보이는 직장에서도 노동자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는 무한경쟁의 “평가”라는 미명 하에 착취를 당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난과 소외와 착취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와 샐러리맨들, 이들의 삶이 더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삶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가난의 대물림, 그것은 가진 자들의 독점 욕망과 관계 깊다. 즉 “날아오르는 일은 권력이다/ 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날려고 기를 쓴다/ 네발짐승들이 날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날아다니는 것들은/ 진흙 속에 주둥이를 박고 음흉하게 웃으며/ 깃털을 문지른다”(「날아다니는 것들의 오만함」 부분)는 시구는 그러한 상황을 드러낸다. 우리 사회의 독점 “권력”과 독점 자본이 가난과 소외를 부추기는 것이다.
잃었는데 또 잃을게 있을까
마르고 마른 이름이 머무는 비루한
지하 단칸방
새벽 다섯 시 알람이 울리면
망가진 어제는 잊어버리고
반복해서 찾아오는 아침을 시작하지
고장 난 선풍기 위 젖은 양말을 향해
부채를 부치며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가늘고 여린 밤이 흐르는 지하 단칸방
아침에 가져갈 엑스캘리버는
구두도 신지 못하고
상처투성이로 수직으로 서 있고(「소묘」 전문)
이 시는 기득권 세력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 차단된 우리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시의 주인공은 더운 여름날에도 “지하 단칸방”에서 “고장 난 선풍기”로 인해 “흐르는 담을 닦아내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늘 고달픈 삶을 시작하는 “아침”이 반복해서 찾아오지만, “엑스캘리버”는 “상처투성이로 수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엑스캘리버”는 원래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명검으로서 ‘왕이 될 아이’의 상징이지만, 요즈음에는 스케이트보드나 시계 등의 상품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시의 문맥으로 볼 때 “엑스캘리버”는 스케이트보드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서왕이 명검을 자신의 능력과 행운으로 획득하여 왕이 되는 신분상승의 상징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즉 이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우리 사회는 가난하고 불우한 처지에서 성공의 “엑스캘리버”를 뽑아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구에서 스케이트보드가 “상처투성이로 수직으로 서 있”는 상황은 벗어날 길 없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시의 주인공의 처지를 암시해 준다. 다른 시에서도 우리 사회의 이러한 문제점을 “이제 용들은 개천에서 자라지 않는다/ 돈으로 오염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승천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용, 개천에서 죽다」 부분)라고 비판한다.
3. 고달픈 삶을 성찰하는 일, 부정한 사회를 비판하는 일은 시가 견지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이다. 문제는 성찰과 비판 이후이다. 성찰과 비판이 진정한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앞날에 대한 희망 섞인 전망이 요구된다. 그러한 전망을 위해서는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보았듯이 혁명 정신이 필요하다. 시인은 혁명이 비록 현실적 상황으로 인하여 실패로 귀결될지라도, 아니 시인의 혁명은 이상적인, 너무도 이상적인 것이므로 언제나 실패를 동반하는 것일지라도 혁명적 시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시인의 혁명은 실천적, 정치적 행동 이전의 정신적, 정서적, 언어적 차원의 것이다. 아래의 시를 보건대 박재학 시인은 그러한 혁명적 시심의 소유자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흙인 채로 또는 불인 채로 꿈틀거리는 몸놀림으로
혁명을 꿈꾸고 있다. 내재된 언어의 탄생을 바라보는
치솟아 오르는 의지와 끝없는 저항과 역류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야합하지 않는 끊임없는 사유와, 왜곡하지 않는 극한의
우뚝 서 있는 양심. 정의보다 더 정의롭게 양심보다
더 양심적인 언어의 절대적 탄생
나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소통을 생각한다
침묵하는 욕망보다 포용하는 실체를
언어가 전진하는 무차별적인 시간을
어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중략)…
저항을 하며 거슬러 오르던 기억이 독재자처럼 내려다본다
하늘이 열리던 날을 기억하는 나는, 열리기 이전의 세상에서
끔틀거리는 몸놀림의 혁명을 생각한다
역류하는 시간을 되돌리며 천지를 울리는 북의 탄생을 생각한다
이는 죽기를 각오한 언어의 의지다(「탄생」 전문)
이 시에서 노래하는 “탄생”은 언어의 혁명과 관계 깊다. 시인은 첫 연에서부터 “내재된 언어의 탄생”을 위해 “혁명을 꿈꾸고 있다”고 선언한다. 시인이 꿈꾸는 “내재된 언어”는 두 번째 연에서 말하는 “야합하지 않는 끊임없는 사유와, 왜곡하지 않는 극한의/ 우뚝 서 있는 양심. 정의보다 더 정의롭게 양심보다 더 양심적인 언어”와 상통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러한 “언어”의 “절대적 탄생”을 염원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소통”과 “포용”과 “전진”의 표상이자 “어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일출”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언어”는 오늘날 삭막하고 비인간적인 “언어”가 남발하는 사회에서 “혁명”과도 같은 일이다. 물론 과거의 불통과 아집과 퇴행과 “어둠”의 관습에 얽매인 “기억의 독재자”가 그러한 “혁명”은 빙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혁명을 생각한다”면서 혁명의 꿈이 “죽기를 각오한 언어의 의지”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혁명”에 대한 절박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때 시인이 지향하는 언어의 “혁명”은 우리 사회의 “혁명”이자 시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혁명을 계절에 비유하면 봄이다. 이 시집에서 빈도 높게 등장하는 봄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생명의 계절로 묘사된다.
하늘이 하루를 숨기는 시간
네가 사라진 별자리 속으로
나를 집어넣는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별똥별이 빗금을 치며 사라진다
찬란하였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꽃을 피우는 부드러운 힘
너를 보내고 소슬한 방안에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들
네가 있어 견딜 만 했다(「봄」 전문)
이 시는 “봄”의 계절과 “너”라는 사람을 동일시하고 있다. 물론 “너”가 “봄”을 의인화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그렇게 읽어도 둘 사이의 동일시는 똑같이 성립한다. 둘의 동일시는 “나”가 처한 시련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하늘이 하루는 숨기는 시간”은 곧 밤의 시간일 터, “네가 사라진 별자리”는 그러한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이 공간이다. 그곳에 “나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너”가 존재하는 “별자리”의 세계와의 동일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별자리”와의 동일화는 지난한 것이어서 “바람”의 시련이 앞을 가리고 “별똥별이 빗금을 치며 사라”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우는 부드러운 힘”의 시간이 “봄”을 기다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봄”이 “너”와의 새 생명과 같은 만남이 전격적으로 살아올 시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봄을 향한 의지는 다른 시에서도 “오늘 나는 봄을 꺼낸 자리에 겨울을 밀봉하네”(「겨울을 밀봉하다」 부분), “수선한 세상을 이곳에 가져와/ 적적하게 사는 것들/ 깊은 곳으로 스러져 가는 것들을/ 자맥질하는 바다에 던지리라”(「접도 봄날」 부분) 등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봄의 계절감과 함께 시인인 꿈꾸는 것은 마음의 혁명이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타자를 배려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상생의 원리가 살아있는 순수한 생명의 세계 혹은 자연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는 속악한 현실에 얽매여 사는 인간의 마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만한 것이다.
오랫동안 무심했던 화분에 물을 주면서
뿌리가 물을 먹고 줄기에 나누어 주는 소리를 듣는다
흙먼지 날리던 줄기마다 물소리가 들린다
텅 비었던 줄기는 물이 차올라 수족관이 된다
어떻게 뿌리는 중심을 잃지 않고 물살을 역류시켜
줄기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수족관을 채우고 넘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지지대를 잡고 일어선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온
줄기마다 수족관의 물이 넘실대는 저녁(「사라지는 저녁」 전문)
삶의 파도가 잠잠해질 때 돌아보면
그리운 것들은 나무와 같이 있다
그림자가 자라나는 오후의 숲으로
나무 잔등이에 쉬고 있는 고양이 머리 위로
수북하게 쏟아지는 햇볕에게
속내를 말하는 유쾌한 나무의 수다가
안부를 묻는 것 같다
비가 어깨를 치고 발등을 통통거리며
두드리는 날에는 마음을 털어 놓는
나무의 소리가 들린다
나무들의 수다가 달콤하다(「나무들의 수다」 전문)
앞의 시에서 “물”은 생명의 에너지이고, “뿌리”는 그것을 “줄기에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는 물론 이러한 생물학적 현상을 노래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뿌리”는 선한 생명들이 가지고 있는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속성을 표상한다. “뿌리”로 인해 “텅 비었던 줄기가 수족관이 된다”고 표현했듯이 “뿌리”는 건강한 생명의 세계를 지탱해 주는 근원적 요소이다. 이때 “줄기” 속의 수맥을 “수족관”이라고 하는 비유는 약간 비약적이기는 하지만, “수족관”을 물고기의 입장을 고려하여 생명수라고 생각하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의 주인공인 “나”가 “그러한 ”수족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지지대를 잡고 일어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뿌리”의 생명력은 “나”가 절망적 현실을 넘어서 본연의 생명력을 자각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나”는 “뿌리”를 통해 이타적 생명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뒤의 시에서도 현실에서 비루한 “삶의 파도가 잠잠해질 때” 화자는 생명의 본성을 깨닫는다. 그 본성은 앞의 시에서 깨달았던 이타적 생명들이 상생의 원리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오후”라는 시간의 설정은 앞의 시에서 “저녁”이라는 시간의 설정과 유사하게 사색과 침잠을 하기에 잘 어울린다. 그 시간에 “햇빛”은 “숲”과 “고양이”를 비추고, “나무”는 “햇빛”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수다”를 떨고 있다. 이러한 광경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자연 현상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자연의 모습이다. 대자연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상호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것이다. 더구나 화자는 “나무들의 수다”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상생의 자연 원리를 삶의 원리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화자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나무들의 수다”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마음, 우주의 기운을 읽어내는 존재이다. 그는 분명 견자로서의 시인일 터, 시인 중에도 자연과 함께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삶은 도시의 속악한 욕망에서 전면적으로 벗어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4. 이 시집에 의하면, 시를 쓰는 일은 혁명을 꿈꾸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박재학 시인은 혁명을 향한 꿈을 지속적으로 꾸어온 시인이다. 가령 “나는 꿈을 발굴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끝내 발굴하지 못한 꿈을 재워두고/ 의자에 앉아 점점 가벼워지는 꿈들을 바라보며/ 햇볕을 쬐고 있다”(「꿈을 발굴하다」 부분)고 고백한다. 그 꿈이 현실에서 실현되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꿈의 진정한 의미는 부조리하고 부정한 현실 너머의 세상을 지향한다는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꿈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의 일시적인 실현보다는 부단히 “꿈을 발굴”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꿈은 일단 현실에서 실현되는 순간 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진정한 꿈은 그 실현의 성패와 무관하게 현실의 결핍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영속성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왜 꿈은 내 몸에서 떠나지 않았을까/ 내게 친절히 다가왔더라면 허우적거리며/ 먼지처럼 날아가지는 않았을텐데/ 나비처럼 날아 저 삭막한 땅에 / 붉은 꽃 하나 피워 왔다 간다는 표시 남기고”(「나비 날다」 부분)에서처럼, “꿈”은 잠시 “붉은 꽃”을 피우고 “나비”처럼 “날아”갔을 지라도 “내 몸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꿈이 실패로 끝날지라도 그 실패마저 감싸 안고 다시 꿈을 꾸는 일이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 시를 앞세운 시인의 혁명은 언제나 실패하기 마련이다. 시인은 언제나 현실적 혁명보다는 이상적 혁명을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기존의 시 작품에 대한 혁명적 진보를 이루기를 소망하지만, 그것은 완전하게 성공할 수 없을 뿐더러 비록 성공한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것이다. 시인은 또한 자기 자신과 속악한 현실에 대한 혁명적 변화를 꿈꾸지만 그것이 실현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 시대는 혁명 혹은 혁명 정신이 죽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득권 세력이 갖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견고한 카르텔로 인해 혁명은 그 싹을 틔울 가능성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혁명을 소망하는 시인이 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커피를 마시고
고요를 깊숙이 숨겨둔 후
바람의 길을 열어 주려고 창문을 연다
컵 위에 양파를 얹고 싹이 트는 것을 보려고
하루 내내 지켜보는 혁명 같은 일
그러나 바라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컵속의 물만 줄어드는 숨겨진 고요
가끔 낯선 곳을 경험한 불순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고요로 채색된 오후의 편안함
컵에 물을 부어주고 창문을 닫는다
바람에 뭉개진 들꽃이 굴러간다(「오후의 고요」 전문)
이 시의 핵심은 “컵 위에 양파를 얹고 싹이 트는 것을 보”고 싶은 소망이다. 이 소망을 위해 화자는 “바람의 길을 열어 주려고 창문을 연다”고 한다. 이는 환기를 충분히 시켜줌으로써 새싹이 트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화자는 아마도 이러한 일을 몇날 며칠을 열성적으로 실천했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싹”이 틀까 노심초사하면서 어느 날은 “하루 내내 지켜보는 혁명 같은 일”을 실천하기도 했다. 문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양파”의 “싹”은 돋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라던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컵속의 물만 줄어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컵에 물을 부어주”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비록 “양파”의 “싹”을 틔우는 것과 같은 언어의 혁명, 자아의 혁명, 사회의 혁명을 이루지는 못했을지라도, 다시 그것을 위한 꿈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실패한 혁명일지라도 다시 혁명을 꿈꾸는 일, 그것은 역설적으로 언제나 성공의 가능성에 다가가는 일이다. 새“싹”처럼 싱그러운 생명의 세계,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향한 부단한 소망은, 그 자체로 이미 우리의 타락하고 속악한 세상을 그러한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고무하고 추동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