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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환 목사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입니다. 그는 중동 일대를 통일했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의 종으로 삼습니다(1절). 그는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며 열국들을 정복합니다. 메대, 리디아, 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합니다(2절). 그는 싸우지도 않고 무혈입성하여 열국들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이집트로 원정하여 이집트의 보물들을 빼앗아 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한 말씀을 기록합니다. “나는 여호와다.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나, 나는 너를 강하게 해 주겠다.” (5절)
알고 보았더니 고래스가 이렇게 열국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내 종, 야곱 백성을 위함이요, 내가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위함이다.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네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고레스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내가 고레스를 보내어 의로운 일을 하게 할 것이고 그의 일을 쉽게 해 주겠다. 고레스가 내 성을 다시 쌓을 것이며, 포로로 잡혀 간 내 백성을 아무런 대가 없이 풀어 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에스라 1:1-4 말씀에도 똑 같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레스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첫해 의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고레스가 온 땅에 사신을 보내어,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레스가 명령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말한다. 하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이 세상 온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나를 세우셔서, 유다 땅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게 하셨다. 이제 너희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거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 너희는 예루살렘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라. 나머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도와 주도록 하여라. 그들에게 은과 금과 갖가지 물건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지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예물도 주도록 하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도구로 사용
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고레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의 왕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Go, for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그리고, 그 유명한 성 프랜시스코(1182-1226)의 기도문에도 도구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하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셨고, 이사야를 부르셨고,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도구론”입니다. 도구는 연장입니다. 톱, 망치, 끌 같은 연장입니다. 도구를 tool라고 하는데, 때로는 instrument라고 하기도 합니다. Instrument는 도구라는 뜻도 있지만 연주자의 손에 들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악기를 들고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은 도구론을 더 실감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손에 들려 내가 연주하는 대로 소리를 내는 악기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을 받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도구는 다만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될 뿐입니다. 도구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주인이 자기를 들고 사용하는데 싫다고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도구론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의지가 없는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말씀은 참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제가 누구인데 그런 일을 해야 합니까? 제가 왜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야 합니까?” (출애굽기 3:11)
마치 이렇게 말하는 모세는 주인의 손에 들려 있는 망치가 쓰임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은 망치를 들고 못을 박으려고 하는데, 망치는 우스꽝스럽게도 못을 박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도구를 손에 들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지 그것은 순전히 주인의 뜻에 달렸습니다. 바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그가 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본으로 보여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나를 그런 일에 사용하려고 하십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며칠 동안 계속해서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관한다”는 말은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혹은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sovereignty” 혹은 “God’s sovereignty”라고 합니다. 7절 말씀에 “내가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sovereignty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sovereignty를 확실하게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 말씀이 9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 그들은 깨진 질그릇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할 수 있느냐?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사람에게 ‘너에게는 손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아버지에게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는 자녀에게 재앙이 닥친다. 여자에게 무엇을 낳았습니까?’ 하는 자에게 재앙이 닥친다.” 마지막에 나오는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께 ……….라고 종알종알 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sovereignty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내 인생을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뭐,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고 해서 재앙까지 닥칠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거부감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sovereignty를 인정하는 사람, 도구론의 의미를 잘 깨닫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고자 하실 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읽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입니까? 나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내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내 인생이 아무렇게나 길거리에 뒹굴고 있는 벽돌 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한 장의 좋은 벽돌이 되어서 훌륭한 건축물을 짓는데 사용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귀하게 사용된다는 뜻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속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15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정말로 주께서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시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ruly, O God of Israel, our Savior, you work in mysterious way.” 이 말씀이 NKJV에는 “Truly You are God, who hide Yourself, O God of Israel, the Savior!”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이 역사를 자기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쓸 것도 없이, 하나님은 나에 인생에 대해서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숨어서 나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숨어 계신다는 말씀이 참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분이라고 하면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sovereignty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과 결단이 요구됩니다.
아직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모세 같은 사람을 보세요.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모세의 생애는 40년, 40년, 40년, 이렇게 세 등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40년은 나서부터 이집트의 궁전에서 살았을 때입니다. 그 다음 40년은 도망자로 미디언에서 목자로 지낸 세월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보낸 세월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생을 이렇게 디자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생애 속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셨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생애 고비고비마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세기 39:2)”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렇게 요셉의 생애에 주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아시지요? 여러분의 생애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같은 방법으로 개입하십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의 인생 속에 sovereignty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해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끝으로, 16-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한결같이 모욕을 당하며 물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손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 구원은 영원할 것이며, 다시는 이스라엘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왜 우상을 만듭니까?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아 답답하니까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상을 만듭니까?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듭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저에게는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고 숨어 계셔도, 인내하면서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sovereignty를 인정하는 사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으 로 들립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