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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10
모범이 필요합니다 / 김진철 목사
오늘은 요단강 서편에서 두 번째로 제비뽑기를 통해 땅을 분배받는 이스라엘 지파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 1절부터 4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곁 요단 곧 여리고 물 동편 광야에서부터 나아가 여리고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산지를 지나 벧엘에 이르고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사람의 경계로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서편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사람의 경계에 이르러 아래 벧 호론 곧 게셀에 미치고 그 끝은 바다라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
두 번째로 가나안 땅 분배에 참여한 지파는 요셉의 자손들인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이들이 차지한 지역은 가나안 땅의 중앙 지역입니다. 동쪽으로는 요단강이 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위치합니다. 남쪽으로는 단과 베냐민 지파와, 북쪽으로는 아셀, 스블론, 잇사갈 지파와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인 요셉의 자손이 유다 지파에 이어 두 번째로, 더구나 가나안의 비옥한 땅 중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는 창세기 49장에 기록된 그 복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요셉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이 아버지인 야곱의 유언축복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복에 대한 약속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후손들에게 가나안의 비옥한 땅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본문에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잠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요셉의 삶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마음에는 요셉의 삶에 대한 흠모함이 있습니다. 기왕에 믿음생활을 하는 우리들도 요셉처럼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천 만금 억 만금을 받아 누리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모든 분들은 이러한 저의 생각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보다 물질에 대한 욕구가 더 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결코 그렇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최대의 관심은 역시 '하나님' 그 분입니다. 그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의 희열이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러한 삶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증거를 볼까요? 잠시 창세기 39장으로 가보겠습니다(p. 60). 창세기 39장에서 꼭 관심을 가져야 할 세 절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먼저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계속해서 23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할렐루야!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말씀은 우선 반복적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셉이 '형통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2절, 3절, 23절 세 절의 말씀에서 요셉은 계속해서 '형통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형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어느 정도는 의아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의 인생을 잠시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라고 하는 단어가 과연 그의 삶에 적합한 표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사통팔달의 길'과 같은 것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도무지 막힘이 없고, 문제가 없고, 아무런 탈도 없이 8차선 고속도로를 달리듯 달려가는 인생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입니다. 그럼 과연 요셉의 삶이 이러한 '형통'의 의미에 부합합니까? 아니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멀쩡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사람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 던져지는 것이 형통입니까? 한 가정의 사랑 받는 아들로 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노예신세가 되는 것이 형통입니까? 하지도 않은 일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형통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형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어떻게든 맞추어 보려해도 도무지 맞출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게 굴곡 지고 우여곡절이 많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놓고 '형통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봉독한 2절과 3절 말씀을 보세요. 그 말씀이 언제의 기록입니까?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가 되어 애굽에 팔려와서의 일입니다. 또한 23절 말씀은 언제의 기록입니까? 요셉이 최선을 다한 인생의 결과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큰 신뢰를 얻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지요. 이 유혹을 뿌리치자 요셉에게 남은 것은 누명이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감옥에 갇히는 죄수의 신분이 되고 맙니다. 바로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된 이후의 기록이 23절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형통'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러한 가운데서도 요셉은 형통한 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믿거나 말거나 성경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힘주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은 '하나님' 그 분만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의 변화에 그는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그 분에게만 소망을 두고 그 분만을 바라보며 인생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저 두시겠습니까? 우리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인정하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그 분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어렵고 힘든 여건이지만 그 속에서 요셉으로 하여금 형통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같은 믿음생활을 하는 입장에서 요셉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부러움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 입장이었다면 과연 우리는 요셉처럼 할 수 있었을까요?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사노라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관심으로 채워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 역시 요셉처럼 형통한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요셉의 삶에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요셉 당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증거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다시금 본문을 돌아갑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요셉의 후손들이 두 개의 지파로 나뉘게 된 것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입니다. 5절 이하의 말씀은 그 중에서 에브라임 지파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에브라임 지파의 지경 내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성읍들의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설치되었던 실로, 이스라엘에 의해 최초로 정복되었던 가나안 서편 성읍인 여리고, 그 외에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브라임 지파도 어제 보았던 유다 지파 못지 않게 가나안의 요지를 두루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에브라임 지파 역시 유다 지파 못지 않게 하나님 앞에서 남다른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불행하게도 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한 가지 중대한 실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보세요. 에브라임 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중대한 실수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게셀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기 경내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사로잡아 아예 종으로 삼았다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마치 연상작용처럼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장인 여호수아 15장 63절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우리는 어제 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아쉬움을 남긴 유다 지파'라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장자의 축복'을 부여받은 지파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다른 많은 지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 지파에게는 축복의 권리뿐 아니라 책임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 분배의 역사에 선봉으로 참여한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속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럼 이 일이 여기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본문 16장 10절 말씀에서 유다 지파의 잘못이 그대로 재현되는 현장을 보게 됩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보다 먼저 제비를 뽑아 가나안 땅을 차지한 유다 지파에게서 직통으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오히려 유다 지파보다 한 술을 더 뜹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게셀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으로 삼는 적극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의 말씀제목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범이 필요합니다' '모범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새벽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제목입니다. 모범이 무엇입니까?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이 기꺼이 배울 수 있거나 따라 할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모범입니다. 모범적인 삶은 저 세상에서도 종종 논의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구요. 사회적으로는 지도자들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에서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집니다. 믿음 안에서도 모범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우리에게 '세족식'으로 알려진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과연 내 발을 씻어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서로 적당히 외면하고 있는 식사자리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친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어주셨습니다. 그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2절부터 15절 말씀입니다(p. 170). 함께 봉독합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보세요. 우리 주님께서 세족식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방관자처럼 섬길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꼭 필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을 가까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상대방으로부터 좋은 신앙적인 삶을 배우고, 어느 샌가 그것이 나의 삶에 배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이렇게 체득된 좋은 신앙생활은 또 다른, 나를 가까이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들 역시 '나'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 모범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범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꼭 모범이 필요합니다. 유다 지파는 이 문제에서 실패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영광을 얻었지만 자신들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분배받는 여러 지파들에게 모범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모범적이지 못한 삶을 가르쳐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삶을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정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이 전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먼저 믿은 분들이 나중에 믿는 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직분자들이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분들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와 같은 삶을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