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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6-11
참 권위를 존중하라 / 이병각 목사
무엇이 위기인가?
솔로몬왕은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고, 국가적으로 성대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성공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솔로몬 통치의 말년은 백성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중다한 세금과 강제 노역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 대로 피폐했습니다. 솔로몬의 영화는 앞으로는 화려했지만 뒤로는 어두운 면이 많았습니다.
르호보암이 나이 41세에 솔로몬의 왕위를 계승합니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솔로몬의 학정을 시정해 줄 것을 간곡히 간청합니다.
“왕이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왕을 섬길 것이나이다(왕상12:4).”
백성들의 간청은 진실하고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왕으로서는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르호보암은 지도자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과연 백성들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백성들을 더욱 압제하고 왕의 권위를 보여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에게 삼일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르호보암은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원로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백성들의 의견을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왕에게 백성들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나라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성장한 젊은이들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백성들을 더욱 강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정반대의 의견을 냈습니다.
르호보암은 젊은이들의 의견을 따라서 백성들에게 더욱 강압적인 정치를 할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백성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맞이해서 북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통일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가 무엇입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80년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강하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다윗왕국의 축복을 계승하는 길입니까?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불만을 현실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초창기에 신앙의 대장부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통치 후반부에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압제와 학정을 일삼았습니다.
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이 자처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영적인 총체적인 위기를 물려받았습니다. 솔로몬의 잘못을 답습해서 안 됩니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이것이 아닙니다.
왕의 지도력 문제입니다.
이런 위기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왕의 권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왕의 권위를 지키는 것인지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기였습니다. 눈에 나타나는 현상보다 더 큰 위기는 지도력과 권위의 문제였습니다. 권위가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가정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입니까?
부부간에 뜻이 맞지 않는 것입니까?
성격 탓입니까?
그것보다 더 큰 위기는 아버지의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집안에 어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원칙이 무엇인지, 누구를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바른 방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이에 격분한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칼로 쳐서 복수합니다.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야간도주합니다. 야곱은 가정이 위기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제안합니다. 식구들은 야곱의 말을 따릅니다. 세상적인 것은 잃었지만, 아버지의 권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야곱의 가정은 다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가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화합과 안정이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지도력입니다.
국가의 권위입니다.
지도자의 말을 믿고, 국가를 믿고 따를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국가가 방향을 잃고 표류한다면 난국을 수습할 수 없습니다.
6.25 같은 전쟁이나 IMF 같은 환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나라의 권위와 지도자의 권위가 살아있다면 능히 난관을 극복할 것입니다.
나라의 법이 있으면 뭐 합니까?
권위에 복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있으면 뭐 합니까? 기꺼이 따라야 합니다. 자기 목소리 내고 우기면 들어주고, 그렇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손해보고 당한다면 안 될 일입니다.
권위의 남용
이스라엘의 왕은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왕이라도 일반 백성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전제군주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들의 안전과 복리 증진을 위해 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내 백성이 나를 버린 것이라고 서운해 하시면서, 조건부로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의 왕과 달리 철저하게 선한 목자이어야 하고, 백성들을 섬기는 왕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르호보암왕은 권위를 남용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솔로몬이 권위를 남용하여 백성들을 압제하였는데,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권위를 남용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나쁜 것은 닮고 있습니다.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왕상12:11).”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왕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르호보암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군이 범하기 쉬운 죄가 무엇입니까? 권위의 남용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의 직분을 맡긴 것은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권리를 행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대접받고, 남들보다 높아지고,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오래도록 봉사한 분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겠다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일 잘한다고 인정을 받고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더욱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독수리처럼 놀라가야 하지만, 섬기는 일에는 더욱 낮아져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고 지시하기 보다는 많이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오십부장과 백부장과 천부장을 세워서 그들로 행정과 재판을 돕게 합니다. 모세가 아무리 위대한 종이라고 혼자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기업이 권위주의적이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와 고객을 존중해야 합니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던 행정 기관이나 공무원의 세계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민원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관공서에 직원도 변했습니다. 직원보다는 계장이 친절하고, 계장보다는 과장이 친절합니다. 이전과는 반대입니다. 높을수록 덜 권위적입니다. 권위주의적인 생각으로 직책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말단 직원 중에 불친절하고 막무가내인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책임이 있고 권한이 클수록 사람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파트 관리실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 관리소장을 찾았더니, 전화를 받은 직원이 하는 말이 ‘오늘 소장님 심기가 불편하셔서 다음에 하라’ 합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주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할 사람의 사고방식이 이것 밖에 안 된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 소장은 다음에 전화받을 일 없을 것입니다. 집에 갔을 것입니다.
권위의 상실
권위를 남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권위를 거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고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원로들은 다윗 때부터 솔로몬왕까지 몸으로 섬긴 분들입니다. 행정을 아는 분들이고, 백성의 마음에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 충신들입니다.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호보암에게 백성을 위로하고 압제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듣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백발은 면류관이라고 했는데, 왜 노인의 지혜를 외면합니까?
노인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늙은 노인들이 무엇을 안단 말인가? 늙은이들 시대를 모르지! 백성이 힘들다고 그 애기 다 들어주면 어떻게 정치를 만한 말인가? 강압적으로 불복시켜야 정치를 할 수 있지? 자기 소견대로 생각했습니다.
르호보암은 불행하게도 이 젊은이들의 말을 듣고 더 강압정치를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노인의 충고를 달게 받아들인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권위가 있습니까?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는데, 과격한 학생들이 몰려가서 물리적으로 학위수여식을 막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의 주장은 대략 이렇습니다.
이건희 회장에게 철학박사를 주는데 철학과 교수들과 상의가 되지 않았다는 점과 삼성이 노조를 탄압하는데 어떻게 명예박사 학위를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삼성에게 학교 발전 기금 400억을 받았으니까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것이 아니냐? 돈으로 학위를 판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론은 학생들이 너무 경솔하고 심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권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학생들이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사장에서 물리적으로 실력 저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총장과 보직교수는 뭐가 됩니까?
학교는 뭐가 됩니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뭐가 됩니까?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물리적으로 막을 만한 권한이 학생회에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일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나아는 우리들을 막을 권위는 아무 것도 없다. 최고의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에 총장도 교수도 없습니다. 자기 목소리 내는 운동권만 권위자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랜 동안 권위를 파괴하고 부인하는데 광적이었습니다.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권위주의는 파타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를 지켜야 합니다. 대통령 알기를 통반장 보다 못하게 여깁니다.
반상회 불참하면 3000원을 냅니다. 엘리베이터에 불참자 명단을 크게 써 붙이고 벌금 내라고 하면 경비실로 즉시 내야 합니다. 무섭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내라고 하면 3000원도 안 낼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공적은 냉정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했던 잘못했던 대통령 직책의 권위는 항상 인정되어야 합니다. 대법원이나 헌법 재판소의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불리하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선동합니다. 일선 파출소는 허구한 날 난장판이 됩니다. 죄지은 놈들이 경찰을 폭행하고 행패를 부립니다.
교회의 권위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권위는 권징에 있습니다.
권징이 어떻게 시행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권징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오늘 처음 듣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어기고 교회의 법을 어기면 합당한 절차를 밟아서 징계하는 것이 권징입니다.
교회의 3대 표징이 무엇입니까?
말씀 선포와 성례의 시행과 권징입니다.
권징은 교회의 표시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찬을 금할 자에게 성찬을 금해야 합니다. 책벌할 자를 책벌하고, 출교할 자를 출교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에는 권징이 사라진지 오래됩니다. 무슨 애기 하면 하품하고, 팔짱을 끼고, 눈감고 졸다가, 그래도 안 되면 여기 밖에 교회 없나? 안 오면 그만이지 하고 돌아섭니다. 교회는 많습니다. 어디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범법자가 교회를 판단하고 마음대로 갈 권리는 없습니다. 이명서를 다 받아서 가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 앞에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겸비해야 하는데, 교회가 성도들 앞에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 맨다면 권위는 해체된 것입니다.
교회의 법을 어긴 자가 다른 교회에서 훈장을 받는 공로자로 둔갑한다면 말이 됩니까?
바울은 마가를 데려 오라. 그가 나에게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마가는 한 때 선교 여행을 무단으로 이탈해서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바울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회개하여 회복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회개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는 것은 안 됩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길 권위자
우리가 존중이 여길 권위자는 누구입니까?
가정의 부모입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어느 현명한 어머니가 들려주는 탈무드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네가 만일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떠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녀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너를 하녀처럼 취급할 것이다. 만일 네가 콧대를 너무 세워서 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한다면 그는 완력을 써서 너를 하녀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네 남편이 그의 친구를 방문할 때면, 그로 하여금 목욕을 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나가게 하라. 그리고 남편의 친구가 집에 놀러 오거든 성의를 대해서 극진히 대접하라. 그렇게 하면 남편은 너를 소중히 생각해 줄 것이다. 항상 가정에 마음을 쓰고 남편의 소지품을 소중히 다루어라. 그러면 그는 네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줄 것이다.”
어머니의 교훈을 존중히 여기는 딸은 복이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아버지의 책망도 가볍게 여겼습니다.
요즘 좋지 않은 말이 들리는데 그게 사실이냐?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느냐? 하나님께 드린 고기를 하나님께 드리기도 전에 마음대로 먹는다는데 그세 사실이냐?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엘리의 아들들은 계속 악행을 저질렀고, 아버지 엘리도 더 이상 엄하게 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때,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에게 탈취당하는 비극을 당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번제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은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자신이 번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순종했습니다. 아버지를 존중이 여기는 이삭이 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삭에게, 이삭의 축복이 야곱에게, 야곱의 축복이 열 두 아들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버지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길 권위자는 선생님입니다.
탈무드에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교훈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랍비가 북쪽 마을을 시찰하기 위해 두 명의 랍비를 시찰관으로 보냈습니다.
두 랍비가 그 마을에 가서 말했습니다.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조사할 일이 있소.”
그러자 그 마을의 경찰서장이 나왔습니다.
“아니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이번에는 수비대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두 랍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것은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아니라 학교의 선생님이란 말입니다. 경관이나 군인은 마을을 파괴할 뿐입니다. 교육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우리에게는 존경받는 선생님이 얼마나 있습니까?
존경할 선생님이 없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길 권위자는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할 때, 교인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이 말을 한 후에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바울을 에베소에서 복음을 잘 가르쳤고, 생활에도 모범을 보였습니다.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행20:32-33).” 영적 지도자의 수고를 기억합시다.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아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을 사람이었습니다. 말로만 존경이 아니라, 생명까지 내어 놓을 만큼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길 권위자는 나라의 지도자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핍박을 받아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눈물을 유리병에 담을 만큼 힘들고 괴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다가 굴에서 잠들었습니다. 다윗은 잠자는 사울왕을 죽이려고 칼을 뺐다가 옷자락만 베고 다시 칼을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왕을 내가 어찌 죽인단 말인가?
하나님이 세운 종, 하나님이 거두실 것이다. 신앙의 양심이 그를 찔렀습니다. 다윗은 옷자락을 벤 것조차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신앙입니다. 독재자나 포악한 지도자를 존경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국가의 지도자를 대할 때 신앙의 양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히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2:1-2).”
위로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가 불행합니다.
잘못하면 불경하고 패역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습니다.
위로 부모와 선생님과 영적 지도자와 존경할 나라의 지도자가 없이 사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고아나 외톨이가 됩니다.
경솔한 언행과 실수와 시행착오로 큰 낭패를 당합니다.
공경하는 분들이 많으면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통해 많은 유익과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하고, 좋은 부하나 충성스런 일군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경할 만한 분들을 많이 만아야 합니다. 위로 좋은 관계를 가져서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