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蔘栽培歷史의 文化的 考察 Ⅳ
-인삼의 聖地 豊基人蔘을 中心으로-
글 : 영주시문화원 이사 풍기진생영농 조합 김 인 순
5. 인삼산업의 문화적 개념
문화(culture)의 정의는 시대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자연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회구성원 안에서 집단의 생활양식이라 표현하고 있다. 또는 산업사회에서 문화의 원어개념이 경작, 재배의 뜻에서 찾았고 오늘날 교양이나 예술적인 개념으로 발전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인삼이 자연자원 안에서 인간의 필요한 식물로 발견되면서 인삼도 문화의 범주에 들게 되었고 인삼이 일반 가용(家用)에서 약용이나 식용으로 넓게 쓰이고 거래되다보니 산업의 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약술해 보았지만 인삼이 사람과 인연을 맺은 시기가 언제부터인지 꼭 알아야할 이유는 없다. 이미 2천 년 전 일찌기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삼을 유수족상여인형(有手足狀如人形)이라했으니 하늘이 지어줄때 이롭고 가깝게 하도록 사람모양을 닮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인류역사만큼이나 수난이 많았던 인삼이기에 사람에게 이롭고 살리기 위해 생겨난 것이 사람을 죽이게까지 했다는 설로 견리망사(見利忘死)라고 했다.
이로운 것을 이롭게 쓰지 않았고 귀하게 관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인삼을 이용할 자격이 없다. 귀한 만큼 귀하게 쓰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이조왕조시 평균 인삼가격이 약방 약제계량단위로 돈중이라고 했는데 인삼 1돈이 금 1돈과 대충 비슷하게 거래된 사실이 기록에 있다. 오늘의 가치상관관계를 볼 때 금 1돈이 5만원이라면 인삼 1돈은 1천원도 미달될 것이다. 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 된 것이 멀지 않은 불과 1백 년 전의 일이다. 물론 당시의 인삼이 산삼(산양삼)으로 보면 오늘의 재배삼과는 희귀성에서 차별을 둘 수는 있으나 사실 15세기 이래 사실상 재배삼의 통용이 절대적으로 많았다고 보아야한다. 연간 2만근 또는 4만근을 수집했다는 기록이 어떻게 산삼으로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인삼이 국가안위의 외교적인 수단과 약용의 중요성도 컷지만 국가재정(1910년 아래 세표참조)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 없다. 자료에 의하면 조선말기 세입예산 5종(지세, 호세, 관세, 금광세, 인삼세)안에 들었으니 크게 받들어 모셔야할 산물이다. 이렇게 인삼의 위상은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첨단과학으로 증명된 것 보다 인류문화의 범주에서 매우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증명되는 신성한 식물로서 인간과 영원이 함께 살아갈 고귀한 관계로 겸허히 바라보고 이롭게 이용할 때 인삼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고 신이 내린 축복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1910년 人蔘裞表(조선총독부) 1911,5,18자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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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名 |
耕作間數 |
耕作人員 |
査定間數 |
納稅人員 |
稅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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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원) |
京畿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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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北道 |
3,850 |
135 |
1,448 |
89 |
144,800 |
忠淸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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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全羅北道 |
42,479 |
1,379 |
6,587 |
687 |
658,700 |
全羅南道 |
- |
- |
- |
- |
- |
慶尙北道 |
14,684 |
117 |
1,744 |
59 |
174,400 |
慶尙南道 |
1,538 |
81 |
217 |
47 |
21,700 |
黃海道 |
7,571 |
1 |
- |
- |
- |
江原道 |
385 |
6 |
199 |
4 |
19,900 |
平安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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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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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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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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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 計 |
70,507 |
1,719 |
10,195 |
872 |
1,019,500 |
備考 1. 耕作間數 및 人員은 1910年 5月 1日 現在를 記入한다.
2. 査定間數, 納稅人員 및 稅額은 同年中 査定한 것으로 한다. | 6. 문화적 산업의 경쟁력 제고 가. 개삼터 조성
인위적으로 자연생 산삼의 씨앗을 받아 집터나 논․밭으로 옮겨서 가삼재배를 시작한 시원(始原)지는 어디였을까?
국내서도 가삼재배의 시원을 설화(說話)에 근거하여 만들고 구상하고 있다. 역사적 자료근거를 찾을 수 없어서 상징적으로 문화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섣불리 조작하는 것 보다 전통에 의존한 구전(口傳)에서라도 그 타당성을 찾아보고 개삼터는 조속히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디에다 만들 것인가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최초의 인위적인 재배가 관(官)의 주도(主導)로 가삼재배를 시작하지는 않았고, 산삼(山蔘)을 공납(貢納)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민초(民草)들이 지혜(智慧)와 몸부림으로 찾아낸 산물일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代)를 이어 인삼재배를 해오는 경작자를 많이 만나보아도 근거가 될 만한 얘기를 들어 보기는 어려웠다
여기서 전제해 두어야할 것은 가삼재배의 전 단계는 인위(人爲)적으로 장뇌(長腦)라고 불리어지는 산양삼재배 부터 실시했다는 사실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산삼을 캐러 다니다가 도저히 자연삼 채굴의 한계를 느껴서 자연스럽게 산삼 딸(씨앗)을 받아 산에 심어놓았다가 수해(數年)가 지나 삼을 채취해서 산삼으로 이용하던 시대가 매우 오래 전부터 근자에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삼의 역사(歷史)와 전통(傳統)을 이해하는데 가장 긍정적(肯定的)으로 접근해야할 부분이 바로 산양삼인 장뇌(長腦)삼이다. 왕권 전제군주 하에서 통제를 받으며 특별한 약효와 효험을 가진 인삼재배가 자유스럽게 재배권장 되지 않았기에 장뇌삼의 역사는 곧 가삼재배(人蔘)의 역사요 민초들의 애환(哀歡)이었다. 역사적인 정황으로 천 오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터(基)는 소백산에서 가까운 마을이었으며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외딸고 양지바른 골짜기였을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마을까지 내려와 울타리 재배가 알게 모르게 재배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재배되던 시기를 조선왕조중종 신제 주세붕선생의 4년 중임기간이었으며 그 장소는 소백산과 가까운 마을, 인삼재배가 가장 적합하고 재배농가가 많은 마을, 그리고 역사와 전통이 함께 하는 마을, 가업(家業)으로 꾸준히 이어오는 마을, 그곳은 바로 금계(金鷄)마을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전통적 사실은 지명 이름의 구전이다. 신제선생께서 지역의 곡창지였던 서부면 금계리(舊校里)를 자주 순찰하셨고 인삼재배가 적합한 지역을 찾은 곳이 쇠바리 부락을 무릉(武陵)터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무릉은 선생께서 자라신 고향이 경남 함안군 칠곡면 무릉리고 무릉잡고(武陵雜稿), 죽계지(竹溪志)등에서 그 면면을 살펴볼 수 있으며 아호를 신제로 쓰지만 퇴계 이 황선생과 후학들이 남긴 글에서 호를 무릉으로 표기했다. 무릉의 뜻은 무릉도원으로 알려진 중국 도연명의 시에서 천상낙원(유토피아)처럼 살기 좋은 곳의 상징적 지명이다. 오늘까지 전혀 거부감 없이 내려오는 정감록의 제1승지 금계촌의 무릉터, 그 중심이 현 금계중학교인데 설립당시 교가로 작사된 가사(“ 무릉 터전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는...이하 생략”)내용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유심히 살펴본 무릉터, 신제선생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무릉터, 가삼재배의 적지로 선택했던 소바리(小發: 작게 피어나는 마을)가 110년 전 놀랍고 신기하게도 다시 한 번 인삼재배역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개성출신 이풍환(1866~1933년)선생께서 중앙관직을 수행하던 중 아버지 부친(이종식)께서 1883년도 영양군수로 재직하게 되자 아버지의 근무처였던 안동도호부와 영양군을 오르내리며 죽령재를 넘나들다가 소백산의 산세와 풍기인삼재배를 관찰하면서 출신지인 개성보다 내륙 오지지만 환경과 기후조건이 매우 뛰어남을 간파하여 서서히 이주의 꿈을 키워 가던 중 1900년도 말에 풍기에서도 산업의 중심지로 알려 져 있던 당시 풍기군 서부면 금계동 298번지에 아버지와 함께 정착을 결심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사유가 있었겠지만 당시 국가적 상황이 중국(淸).일본(倭)를 비롯해 서양세력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혼란기에 정치적 꿈을 접고 민초의 생업을 돕고자 산업일선에 뛰어 들게 된다. 준비기간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고 국내 최초로 민(民) 주도의 인삼재배,가공,유통의 요람 풍기삼포조합을 설립(융희2년 서기 1908년)하게 되고 21년 간 조합장 직을 수행하였고 기타 산업,교육에 기여한 공노야 말로 시대적인 구세주셨으며 과거 관직과 경륜을 토대로 민초의 중심에서 30여 년간 산업혁명시대로 끌고 갔다. 그 산업의 거점이 금계리 298번지 무릉터였음을 어찌 간과(看過)할 수 있으랴, 우리지역 초기 근대사에 앞장서 오셨음은 하늘이 보내 준 신제 주세붕선생 다음의 선각자였다고 감히 불러 본다. 일생의 중요한 시점에 일제 강점기간도 있었지만 연만한 연세와 과거 중앙관직의 높은 경력 그리고 타고난 지도력으로 풍기지역사회를 이끌어 간 시대적인 선각자였기에 어느 누구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중요한 자료가 대부분 격동의 세월 속에 유실되거나 손상되었으나 다행히 후손 중에 수 십 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어서 문헌적 근거가 확실한 점은 금계리 무릉터가 인삼의 메카로 중심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개삼터 조성의 적지로 전혀 손색이 없음을 피력해 본다.
나. 인삼 전시관 건립
천오백년 전통의 풍기인삼이 누대를 통하여 문화에 앞장서 온 산업문화의 산물이건만 인삼의 종주 지역에 아직 전통적인 역사전시관 하나 마련치 못하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이다.
문화적인 자산 없이 산업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삼국시대부터의 연혁, 농경기구, 재배방법, 약재용도, 유통, 변천과정, 지역,국가간의 비교, 등 일반적인 설화에서부터 오늘날 하이택크 까지 발전과 미래에 대하여 총망라된 인삼문화관을 건립해야 될 시점이다. 비록 늦은 감은 있으나 신제 주세붕선생에 이어 110년 전 개성에서 이주하여 각종 지역산업과 인삼산업을 발전시킨 선각자 구당 이풍환선생의 업적자료 뿐만 아니라 인삼발전의 문화적 잠재력이 어느 지역보다 크고 많은 여건에서 너무 무책임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풍기인삼농업협동조합설립 1백년(2008년)을 앞두고 간절히 기대해 본다.
다. 인삼축제
인삼축제는 20여 년 전부터 실시해 왔지만 시․군 통합으로 몇 차례 건너뛰면서 회수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주제를 설정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하면서 “풍기인삼축제”라는 공식 축제명칭을 매년 활용하고 있다.
1980년대 영풍군 당시 “풍기인삼전진대제”라는 명칭으로 수차례 개최되어 화려한 행사를 연출했으나 계속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5년 전부터 문화관광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지역주민의 성원과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참여로 축제의 규모가 다양해지고 문화제 행사와 병행하면서 매우 바람직하게 발전시켜가고 있다.
조심스러운 것은 문화축제의 분위기보다 지역경제를 앞세워 산업축제에 중심을 두고 가는 느낌이다. 친 인간화, 친 자연화의 슬로건을 걸고 인삼이 준 고마움에 대하여 인삼을 사랑하는 축제가 되어야겠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쓰는 것은 예술(문화)로 인식해서 비용에 집착하지 말고 인심 쓰는 축제 기간이 주어질 때 인삼의 신비는 새롭게 살아나, 소박하고 인삼 내음 처럼 향기와 맛을 돋우는 축제가 되어 우리고장의 정신적인 유산으로 가꾸고 이어가게 될 것이다.
문화는 축제를 통해 진가가 발휘된다. 풍기인삼축제가 풍기인삼의 질적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농가소득과 직접 관련되는 만큼 축제시기만이 아니라 평소 한결같이 양심적인 판매와 친절한 몸가짐에서 소백산이 준 축복의 선물은 더 빛날 것이다.
라. 지역인삼사(人蔘史) 발간
자료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중요한 것처럼 인삼산업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은 인삼 관계자들의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근대화의 1백년에서 인삼산업은 산업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시기였기에 하루 빨리 자료를 찾고 정리하여 기록하는 작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시기(1934~1940년)에 발간된 인삼사(전 7권)는 비록 조선총독부(인삼전매국)에서 작업했지만 아직까지 그 보다 더 자세하고 체계적인 인삼역사서가 없다.
약 7년이란 장기간 전국을 대상으로 지역별로도 총망라하여 현지 조사하였고 우리나라 보존 역사서 왕조실록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비변사 등록등 인삼 관련 문서를 철저하게 찾아 정리한 정치편, 경제편, 재배편, 의약편, 잡기편, 휘공편, 사상편 등 7권으로 완성하였다.
재배편의 기록 내용 중 풍기가 기원최고라는 글이 게재되어 있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연구한 보고서와 각종 인삼관계 서적 그리고 간행물 등을 참고해서 지역인삼사 편찬을 서둘러야 한다.
인삼전시관에 비치해야 할 없어서는 않 될 자료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자료가 없어지고 구전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을 덜어야 한다. 인삼산업의 발전을 문화기준에 두지 않고는 인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인력과 예산의 어려움이 있지만 지역경제나 전통산업의 전승을 앞자리에 둔다면 지역문화 창달과 정통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마. 풍기와 풍기브랜드
시대환경에 따라 문화도 달라진다. 인삼이 약용에 국한되던 시기가 얼마 전의 일이지만 지금은 완전히 식품으로서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상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상표나 디자인에 의해 또는 대대적인 홍보에 의해 인삼의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소비자의 선택이 다양해서 정확한 통계는 어렵지만 인삼브랜드에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측면에서 인삼의 위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삼의 브랜드는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풍기인삼이다. 그러나 풍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풍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상징성을 문화적인 전통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인삼이 풍기라는 지역적 고유명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어떠한 문화적 자산으로든지 소비자의 뇌리에서 친근감을 갖게 해야 한다.
세계제일이다, 최고다 하는 이미지에 귀한 문화적 지적재산은 정감록을 무시할 수 없다. 정감록을 종교적으로 보지 않고 문화적으로 바라볼 때 이 재산의 가치는 엄청나게 큰 것이다. 예언가에 의해 전해오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예언서 정감록의 비결은 바로 풍기가 세계제일의 피난처요 살기 좋은 곳이다. 공교롭게도 현실적 상황에서 틀리지 않고 맞았기 때문이다. 인삼의 생태적 우월성이 어디에 있은가? 바람과 물 그리고 토양(風水地)이다. 그것은 곳 풍수지리설과 직결되는 것이니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지혜로 발전해 온 오늘의 풍기인삼이 제일이라는 데 과학적․문화적으로 증명됨에 결코 이의(異意)가 없다.
신라말 도선선사의 도참설, 국법에 의해 숨겨 지내온 예언서적 이라 원본(규장각보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필서나 사본으로 아직도 많은 분들에게 읽혀지고 또 지켜지고 있다. 정감과 이심의 대화록인 정감록의 예언이야 깊이 마음에 둘 일은 아니나 난세(亂世)의 비결로 회자(膾炙)되는 정감록을 세계제일의 풍기를 알리는데 문화적 측면에서 풍기인삼과 함께 가져볼 수 있다. 인삼재배 역시 최고인삼사(最古人蔘史)의 기록이 있고 정감록은 두말할 여지가 없으니 소백산의 문화적 지적재산을 겸허히 보존해 갈 때 경쟁력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바. 인삼과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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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상황이 인삼산업으로 소득을 향상시키는 데 목적을 둘 수밖에 없는데 인삼의 명성과 질적 효능을 앞세워 수요자들을 우리고장으로 흡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국민소득이 증가함으로서 건강에 대한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수요자가 급증하면서 풍기토종인삼 가지고는 태부족이며 벌써부터 소백산 권역과 충청․강원 일부지역으로 경작지를 옮겨 직접 인삼재배를 하거나 거주민에게 경작요령을 가르쳐 주고 매입하는 상황에 이젠 풍기인삼과 풍기인삼 브랜드는 구별 되어야 한다.
수요자들을 우리 고장으로 끌러 드리는 흡입요건은 인삼의 질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적인 상징성을 앞세울 때 경쟁력에 앞장 설 수 있을 것이다. 대도시 소비자들이 인삼을 구입하기 위해 풍기를 찾아오는가? 아니면 영주의 문화적인 유산을 관광하기 위해 왔다가 풍기인삼을 구입해 가는가? 심충분석하고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금산의 경우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인삼의 유통거점지역으로 널리 알려져서 단순히 인삼구매목적으로 금산을 찾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풍기는 일반 관광을 먼저 앞세워 찾아 왔다가 인삼을 쇼핑하는 경우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인삼의 유통기능을 확대하는 방안은 인삼과 관련한 문화적인 관광요건을 빨리 만들어서 약용과 식용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인삼의 메카를 소비자들에게 알려주고 또 보여 주어야하는 시점에 와 있다 소백산권역의 넘치는 관광자원으로 인삼의 역사와 문화적인 자산을 홍보할 때 인삼과 함께하는 관광이 극대화 될 것이며 접근 요건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인삼관광을 문화적으로 안내하여 인삼의 구심점을 문화의 본질에 끌어 드리게 하는 것이다. 인삼을 구입하러 와서 동시에 관광을 하게 되고, 관광을 하러 와서 인삼을 구입하게 되는 인삼테마여행지의 가장 적절한 장소가 바로 세계제일 정감록의 1승지 풍기이기에 인삼관광의 문화적인 메카, 인삼관 건립과 인삼랜드 조성은 시급한 과제다. 작지만 아늑한 무릉터 한복판에 개삼터를 조성하고 인삼의 요람으로 이 세상에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홍보할 인삼문화관의 건립은 2008년 풍기인삼협동조합 1백주년을 앞두고 깊이 고민해야할 소명이다.
사. 인삼노래(人蔘歌)보급
우리나라 노래방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을 예로 보더러도 노래문화보다 더 빨리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없다. 어느 때부터 우리조상들은 인삼가를 불러 왔다. 1천 오백년 전 중국의 의서와 책에 고려의 인삼의 효능이 뛰어난 약효가 있다는 인삼노래가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그 만큼 인삼을 극찬했고 사랑했음을 알 수 있으며 생활 속에 함께하는 가요로 작사․작곡하여 보급해 봄이 바람직하다. 풍기읍민의 노래나 금산읍민의 노래가사에 인삼이 들어있지만 친 인간화의 필연적인 인연에서 인삼을 사랑하고 가깝게 접근하는 데 일조할 것을 확신한다. 가능하면 풍기인삼협동조합에서 조합의 농협가로 공식적인행사 때 부르면서 파급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1985년 풍기인삼협동조합에 세워진 人蔘像 아래 인삼시(金桂河지음)를 가사로 인삼가를 작곡해 봄도 바람직하다.
人 蔘 歌
만고심산소백산에 진기화 있으니 영초심근 선삼이네 신제선생 울밑재배,
그 역사 오백여년 ,만방인의 불노영약 이 고장 자랑일세,
토산유업 길이 이어 흙과 함께 살아가세.
7. 글 문을 닫으며
풍기인삼에 가까이 접하면서 “풍기인삼 천 오 백년”이 문화적으로 살펴 본 가삼재배 시원의 화두가 되었다. 더 오래일수는 있지만 더 짧을 수는 결코 없다고 자신한다. 인삼이 인삼으로 호칭되었던 문헌적 기록이 천 오백년이 넘었고, 중국 고대문헌에서 參(삼), 葠(심), 蔘(삼)등 6가지 한자가 나오며 우리나라의 경우 쉽게 알 수 있음은 산삼을 심이라고해서 산삼을 발견했을 때 심봤다 라는 말은 지금도 심마니들에 의해 통용되고 있으며 시기와 곳에 따라 한문의 표현이 상당한 세월 속에 변천되어왔다.
삼이 인삼으로 기록되었거나 호칭된 시기가 가삼재배역사와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산양삼 또는 산삼으로 호칭했던 시기에서 인삼으로 바뀌는 과정의 문화역사의 변천기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이다. 상식선에서 인삼을 바라보자. 인삼(人蔘)이 어찌 모양(模樣)이 꼭 사람과 같아서 영물(靈物)겠는가? 은행이 인체내장의 콩팥과 비슷해서 이뇨작용(利尿作用)에 적합하고 호두가 인간의 뇌형(腦型)을 닮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며 인삼은 사람의 전신(全身)과 흡사(恰似)하니 모든 인체에 이(利)로울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농학자 브레크만 교수는 “蔘은 아답토겐(Adaptogen)"이다라고 하여 정상치(正常値)로서 적응력(適應)이 강함을 강조한다. 아무리 많이 복용해도 이롭고 치사량도 없으며 장기복용에서 오는 부작용이 전혀 없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정상치란 주위환경으로부터 오는 각종유해 작용인 누병, 스트레스 등에 대한 방어능력을 증가시켜 생체(生體)보다 쉽게 적응하도록 하는 능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인삼이 영물이라 하여도 사람위에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천부적 특성으로 과학은 끝을 모르고 달려간다. 그러나 초과학적(超科學的) 범주(範疇)를 지나치게 접근해 가는 것도 인간의 교만이 아닐는지 두렵고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현대과학의 힘이 첨단을 가더라도 오늘의 의학(醫學)이 우리의 인체를 과연 얼마나 정복했겠는가, 세계의학자 중에 인체의 중요한 부분인 위장(胃腸)에 관한 전문박사 수가 수 십 만이라 해도 아직 극히 일부분만 위장의 원리를 찾고 기능장애에 대해 치유시킬 뿐이다.
철학자의 말이지만 “우리인간이 알아야할 것이 바다 물 만치 많다면 알고 있는 것은 바다 물방울 정도“라고 했다. 인삼 또한 예외겠는가 ?
과학의 힘으로 인삼성분을 분석하여 각종 난치질환을 치유하는 약제를 개발하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지혜로 발전해 온 신비의 선물 인삼의 적절한 접근은 문화의 발전과 함께 가야 한다. 이즈음 얘기하고 싶은 말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 인삼을 앞에 두고 하고 싶은 말이다. 축복받은 소백산 아래 웰빙(well-being)바람을 타고 세계화의 소리가 들린다. 소백산풍기온천지구에 “웰빙파크타운조성”과 연계하여 인삼랜드가 조성되고 풍기인삼특구가 지정된다.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풍기인삼클러스터(단장 : 고승태교수)가 때를 맞추어 재배, 가공, 유통, 연구등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고 있는데 문화적인 저변확대에도 아울러 지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머지않아 소백산아래 영주를 지구촌 사람들이 떼를 지어 찾아 올 것이다. 인간의 위대한 능력으로 인삼의 신비는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가고 그럴수록 가까워지며 인삼의 신비는 더 매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인삼을 하나의 식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 역사와 미래(未來)를 함께 하면서 문화 속에 공존해 왔음을 깊이 새기고 앞으로도 문화의 중심에 자리를 옮겨 놓을 때 자연은 자연을 사랑하는 문화인에게 기회와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參考 文獻 및 資料
◦ 三國史記 ◦ 謹齊先生文集 ◦ 竹溪志 ◦ 愼齊全書(愼齊集, 武陵雜考) ◦ 錦溪集 ◦ 人蔘史-1930년대(1-7권) ◦ 韓國人蔘史(1,2권) ◦ 開城人蔘開拓小史 ◦ 이시진 : 본초강목(한림출판사 및 영풍문고) ◦ 허 준 : 동의보감(일지사) ◦ 황소연 : 방약합편(1884) ◦ 송지향 : 영주․영풍향토지(1987) ◦ 서정학 : 풍기읍지((1997) ◦ 옥순종 : 교양으로 본 인삼 이야기 ◦ 최진호 : 인삼의 신비(1988) ◦ 이재열 : 인삼과 건강(한림출판사) ◦ 한영채 : 인삼과 산삼 ◦ 최신고려인삼(한국인삼연초연구원) ◦ 전매청 : 외국기자들이 본 한국과 인삼 ◦ 인삼연구논문집(한국인삼연초연구소) ◦ 오세창 : 풍기읍의 정감록촌형성과 이식산업에 관한 연구(79‘석사논문) ◦ 조규호 : 조선후기 인삼재배의 비교분석 연구(99‘석사논문) ◦ 최정규 : 풍기지역의 인삼 및 직조공업의 발달과정(2003‘석사논문) 인삼산업세미나발제자료 : 농업신문사(2004-2006) 동양대학교(2005-2006) 자료협조기관 :(인터넷사이트)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규장각 영주시청 ,영주문화원, 풍기읍사무소, 풍기인삼농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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