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호부관아’를 찾아서
문학초등학교에 위치한 인천도호부관아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인천 관교동에 인천도호부와 향교가 있었는데, 이곳이 옛 인천부의 중심지가 된다. 동명의 유래는 관청이 있다는 ‘관’자와 향교의 ‘교’자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그만큼 힘의 중심지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인천 부내’, ‘인천 읍내’, ‘인주’, ‘관청리’, ‘향교리’ 등으로 불렸다.
‘인천도호부관아’의 규모
<인천부읍지>에 의하면 인천도호부에는 객사 20칸, 내외삼문 3칸씩, 동헌 15칸, 내동헌 33칸, 공수 6칸, 사령청 9칸, 향청 13칸, 군·관청 7칸, 훈무당 6칸, 질청 27칸, 옥사 4칸, 별무사청 42칸, 창고 6동, 좌기청 5칸, 수미고 4칸, 군기청 5칸 등이 있었으며, 군기청 옆에는 인공 연못이 있고 연못 중앙에 지소정(知小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화도진도’와 ‘인천도호부청사도’를 보면 매우 큰 규모의 도호부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다만 객사 일부와 동헌 일부만 원래 위치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화도진도에 나오는 인천도호부(1879)
▲인천도호부청사도(이훈익선생님 저서)
▲인천도호부 엽서 사진(화도진도서관 제공)
‘동헌’의 역할과 규모
동헌은 지방 수령이 정무를 보던 집무실로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와 구분되어 그 동쪽에 위치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중앙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1, 2칸씩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은 대청에서 이뤄졌고, 좌우 온돌방은 숙식공간이 아니라 사무공간이나 응접공간으로 사용됐다.
동헌이 33칸(間, 기둥과 기둥사이를 의미)이었다는 것은 정면 11칸 측면 3칸의 집을 의미한다. 현재의 동헌은 문학초등학교를 지을 때 건물의 일부만 옮겨 정면 6칸 측면 3칸, 총 18칸 규모로 축소하여 지었다. 옮겨지은 동헌을 한 바퀴 찬찬히 둘러보면 얼마나 어이없이 이전했는지 알 수 있다.
동헌 정면의 주춧돌들은 다듬은 돌 초석 중 원형(사다리꼴 원통형)초석으로 놓았는데 가장 오른쪽 주춧돌은 어디서 빼왔는지 사각장주석을 사용하여 균형미가 깨졌다. 그리고 동헌의 측면이나 뒷면은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관계로 다듬지 않은 막돌초석을 놓을 수 있지만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다듬은 돌 초석과 다듬지 않은 막돌초석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
건물을 옮겨 축소해 지으면서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이거나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인천도호부 동헌
‘객사’의 역할과 규모
객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지어 사신 일행을 묵게 하거나 접대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암행어사와 같은 중앙관리는 객사에 머물며 지방 수령을 감찰했다. 객사의 기본 구조는 중앙에 전패를 모시는 정청과 좌우에 대칭으로 사신이 묵는 방이 설치된 익사(翼舍)로 되어있다.
당초 20칸이었으나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축소했는데, 중앙의 정청만 남기고 익사는 이 자리로 옮기며 헐어버렸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중앙의 전청에 안치하고, 지방관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려 충성을 다짐하는 삭망례(朔望禮)를 행했다.
그리고 왕이나 왕비의 탄신일과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에 객사 앞뜰에서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며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이런 관계로 객사는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며 관아 시설 중 격이 가장 높아 규모도 가장 컸다.
▲인천도호부 객사 앞 문학초 2회졸업식(1923)
▲인천도호부 객사 앞 가마니짜기(1925)
▲인천도호부 객사
2001년 문학경기장 맞은편에 복원된 인천도호부관아 재현시설물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주말이면 문화체험 등 공연이 열려 여가의 장이 활짝 펼쳐지지만 원래의 도호부 터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지울 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울타리를 만들어 평상시 자물쇠를 채워놓은 것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에 나무들을 심어놓아 건물을 제대로 살필 수도 없고 사진을 찍기도 힘들다. 문화재 훼손이 걱정된다면 최소한 건물 전체를 바라볼 수 있고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게 시급히 주변을 정리하기 바란다.
글 천영기 학산문화원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