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66, 리브가의 기억
그녀의 성은 기억이 안난다. 이름은 말숙,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리브가(구약 창세기 이삭의 아내 이름)이다. 내가 고등학교 졸업반쯤 되었을때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초량12교회'에 출입하면 그녀가 '초량12교회'에 상주하고 있었다.
나는 세칭 동방교의 '사상8교회'에 소속된 신도지만 당시 부산지방의 중심교회가 '초량12교회'이다 보니 자연히 여러 가지 행사와 집회에 참가해야 하는 관계로 '초량12교회' 출입이 잦았다. 가끔 '초량12교회'에 출입하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아직도 졸업하지 않은듯한 그녀가 하얀 얼굴에 단아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거나 성전안의 여기저기를 청소 하거나 주방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밤에도 빈집(세칭 동방교에서는 자기가 살던 집을 그렇게 불렀다)에 돌아가지 않고 성전(세칭 동방교에서는 예배장소를 그렇게 불렀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예쁘장한 그녀가 부러웠다. 나는 언제 빈집에 가지않고 성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하고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는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연히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그후 나는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이 '초량12교회'와 '주학교회'의 전도사를 거쳐 믿음이 출중(?)하여 서울로 부름을 받고 올라가 세칭 동방교의 중심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용산의 '수원정'에 기거하며 오전에는 연단선님 순회자로 오후에는 '수원정'(제일교회)의 제2성전 (용산교회)의 전도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여하튼 그때는 성전에서 생활하는 내 또래의 그녀가 무척 부러웠다.
여하튼 나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로 올라가 한도 원도 없이 성전(?)에서 생활했고 세월이 갈수록 그곳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드디어 탈출,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접어들어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옛일은 깊이 깊이 묻어두고 생활전선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그녀의 소식을 알길도 없고 기억에서도 사라져 버린것 같았다.
가끔 각박한 세월에 지쳐 넋놓고 지난날의 회상에 잠기는 시간이 있을라치면 스쳐가는 기억들속에 그녀가 나타났을까, 세월이 흘러 내 나이 환갑이 가까운 어느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가. 세칭 동방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어느 지인으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염색공장을 하던 부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세칭 동방교와는 인연이 끊어졌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고 이제는 모두 출가시킨 후 기회가 있어 한국에 잠시 나왔는데 수소문해서 지금은 부산 문현동으로 옮겨 가서 일반교회처럼 위장하고있는 세칭 동방교 문현동 한빛교회를 찾아 왔더란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따라 한국을 떠났고 ‘초량12교회’ 와는 인연이 단절되었으니 이단사이비 종교집단 세칭 동방교의 저간의 사정을 알턱이 없었을 것이고 소녀시절의 추억만 아련하게 남아 있었을 터, 수십년 세월이 흘렀으나 부산의 초량이라는 곳이 어릴적 살던 동네이다보니 거리를 더듬어 ‘초량12교회’를 어림짐작으로 찾아갔을 것이고 그 집주인이 원래 세칭 동방교 신도였던지라 거기서 다시 문현동으로 옮겨간 내력을 알아가지고 문현동 한빛교회까지 찾아 갔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게 추리가 된다.
그 당시 '초량12교회'에 출입하던 사람들중에 기억나는 사람을 꼽아보라고 하니 다른 사람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다행히 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안부를 묻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때는 연락이 닿지않아 만나보지 못했다. 40여년이 더 지난 세월인데 그녀의 기억속에 나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던가 보다.
그녀도 나도 아직 스무살이 되지못한 어린 나이였는데 그때는 지나가다 마주쳐도 나에게 얼굴 한번 돌리지 않았고 무심하게 지나치더니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는 나이에 이르러 기억의 한 자락을 꺼집어 내었던가. 다시 한번 한국에 올 기회가 있어 연락이 닿으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리브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