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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딴 곳에 보내지 아니하시고 이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저와 여러분들이 영광의 삶을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날마다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를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 집사의 설교임과 동시에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스데반 집사는 거짓 선동자들에 의해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문을 받았던 곳이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대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을 신문했던 가야바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가야바와 공회원들이 있는 그 앞에 서 있는 스데반 집사의 모습 충분히 당황할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지만, 그의 모습 가운데는 당황하는 모습, 두려워하는 모습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을 향해서 원망하거나 증오의 표정을 같지도 않았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누가 증언합니까?
그곳에 둘러앉아 있던 공회원들이 그를 주목해 보니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그들이 증언을 해주었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의 표정 속에 성령의 충만, 믿음의 충만함으로 인해서 얼마나 평안함이 있었는지, 그 선포하는 그 말 한 구절 구절들이 얼마나 담대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죠. 그의 표정 가운데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는 거예요.
1절에 보니까 대제사장은 대적들의 거짓 증언을 듣고 스데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딱 한 가지 질문이에요.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냐라는 이 질문 속에 내포되어져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너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한 일이 있느냐 또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른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해보아라라고 묻는 것이죠.
이 질문에 스데반은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변론하기 시작합니다. 즉 설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과 함께 포함되어져 있는 7장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서 이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나누게 될 터인데 오늘은 스데반의 설교 서두에 나타난 하나님 이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스데반 설교 서두에 나타났던 하나님은 첫 번째 따라갑시다. 영광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2절 말씀 큰소리로 한번 읽어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구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스테반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누가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데 그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해야 됩니다. 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소개할 때 영광의 하나님을 이야기했을까 스테반의 의도가 있지 않겠어요?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당시 유대인들은요. 성전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유일한 장소로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절기만 되면 어디로 가요? 예루살렘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 성전에 갇힌 하나님을 만들어 내 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며 거룩한 장소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스데반은 이 영광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성전에만 국한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성전 밖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담대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어디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으로 임하셨다는 거예요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어디니까 이방 땅이잖아요. 어쨌든 예루살렘이 아니잖아요. 이방 땅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 갇히는 분이 아니시라. 어디나 나타나시는 분, 어디에서나 임재하시는 분으로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선포해 주었다는 거예요.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전통적인 성경 중심의 신앙을 뛰어넘어서 그 영광이 언제나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이 영광의 하나님을 언급한 이유 이걸 잘 생각해 보면 유대 지도자들이 지금 잘못된 영광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전통과 그리고 참된 영광 을 어디에다 비춥니까?
성전 이 화려한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그렇게 집착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영광은 바로 하나님 본체이시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광의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적용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는 거예요.
첫 번째 우리도 영광의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스테반의 설교처럼 하나님은요 특별한 장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교회에 계시죠. 교회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쩌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가장 좋아하실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은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그 과정 속에서의 만남을 가장 좋아하실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성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의 일터에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교회 생활과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는 열심히 하나님을 신앙으로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세상 가운데서는 하나님 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요셉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버지 품에 있을 때에도 형들에 의해서 보디발 장군에게 팔려갔을 때에도, 보디발 장군의 아내 음해로 인해서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와 늘 함께하셨다. 그래서 형통한 자였다고 성경은 증언해 주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그 믿음을 가지고 코람데어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상의 작은 삶 속에 이 영광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그와 함께 동행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영광의 하나님이 내 살렘에 동행하시는 거 이걸 놓쳐서는 안 돼요. 구석구석 삶의 자리자리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잊지 않을 때에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언제나 돌보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3절에 보니까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오늘 땅으로 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요. 갈데아 사람의 땅을 떠나서 하란에 고합니다.
하란에 거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서 너희가 지금 사는 땅, 지금 공연들한테 이야기하는 너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옮기셨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지,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따라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필요를 따라서 적절할 때 공급하셨고, 위험할 때 하나님께서 건지셨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날마다 날마다 도우시면서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여정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루아침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하루하루 이어갔던 그의 여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여정 가운데 아브라함은요 실수할 때도 있었습니다. 부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아내를 누이라 속이니까 그 생명을 부지하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살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그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그를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피로를 아십니다. 할렐루야
코로나 이후에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죠. 힘듭니다. 물가가 왜 이렇게 오르고 하루하루 밥 먹고 살기도 힘들고 참 힘든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돌보아 주셨기 때문에 에벤에셀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더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때론 우리가 연약하여 실수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이 자리까지 다 대 감사하지 않으면 내 생명이 지금 존재하고 오늘의 제가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감사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 중에 하나님 한 번도 찾지 않았는데, 나는 주 중에 하나님 한 번도 찬양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만들어주시고 나를 불러주시고 은혜 주셨다.
여러분 이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작정하시고 사랑하시며 돌보신다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신뢰함으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낙심할 일이 많지만 낙심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며 전진해 나가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거예요.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이유는 여러분 영광의 하나님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순간순간마다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그의 성품에 맞게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진실된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순간을 함께하십니다. 할렐루야
그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것을 믿는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중요한 말씀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인데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요한복음 1장 14절 큰 소리를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다. 그렇게 증언해 줍니다. 이 과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영광을 비춰주셨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영광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죠. 즉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온 천하에 알려주시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그걸 알고 믿는 것이죠. 또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 가운데 이제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사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사십니까?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요? 우리에게 예수를 보내주셨기 때문에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잖아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이 땅에 오셨다 했으니 어떻게 해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지만 말씀을 펴셔서 그 말씀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고백할 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 비춰지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여러분 은혜와 진리가 이 독생자의 영광 가운데 충만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죠. 이후의 말씀을 보면 율법은 바로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 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이죠. 우리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호위와 자비를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것이다. 자격 없는 우리에게 그냥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따라서 예수가 바로 은혜입니다. 다른 은혜를 찾기에 앞서서 여러분 예수를 통해 은혜를 느끼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우리를 이끄는 진실함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바로 진리인 것이죠. 즉 예수님은 은혜를 통해서 죄인 된 저희들을 자비와 용서로 베풀어주셨다. 더불어서 동시에 진리를 통해 참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셨다. 따라서 이 구절을 다시 정리하면 영광의 본체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로 이끄시는 구원의 하나님, 그 구원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베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불어서 우리 안에 예수 안에 있던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도 충만해져서 세상 가운데 예수의 은혜와 진리가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스데반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두 번째, 스데반 설교에 나타난 하나님을, 따라 합시다.
언약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우리 본문 4절 5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음에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위협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 약속하셨으며 약속하셨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8절을 읽어봅시다. 8절 읽습니다.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12 조상을 낳으니라
보신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약속과 율법이라는 단어를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고 있는 그러니까 율법을 이루시는 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이렇게 되짚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이 약속과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져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특별히 스데반은 아브라함에게 맺은 할례의 언약을 언급하면서 이 약속의 신실하심을 강조해 주었다는 것인데, 여러분 아브라함은 자신이 처한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잖아요. 믿음으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8일 만에 할례를 허락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죠.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땅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 하신 약속을 오늘 4절 5절, 8절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거 여러분 4절 5절에 기록된 하나님이 그 땅으로 옮기심으로 시작했다. 하나님이 옮기기 시작하셨다는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앉아서 지금 이렇게 있는 이 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 약속하신 것을 차츰차츰 이루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또한 8절에 기록된 이삭이 야곱이 12 조상을 낳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후손들을 이루어 가시는 그 약속이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12 아들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이스라엘 대표를 이야기하자 이스라엘이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즉 스데반은 이를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지키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을 메시지로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언약 안에는 매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에 대한 언급 이 언약을 언급했지만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리가 누굽니까?
따라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죠.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셨고 구원 계획이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죠.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잖아요. 예수를 배척했잖아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이 유대인들이 구약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징시키면서 예수가 바로 그 약속의 성취로 오신 메시아다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지금 밝혀주고 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언약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시되 인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단시간 내에 해결된 것이 아니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브라함을 시작해서 그의 아들 이삭, 그의 아들 야곱 두 자녀들을 통해서 요셉 흘러흘러 모세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여러분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인내하시면서 풀어가시는 사건이고, 우리의 입장에서도 그 언약을 생각할 때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해서 만들어가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성도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라는 거예요.
특별히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듯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도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반드시 성취된다. 아직 우리의 삶 가운데 도달하지 않았지만 주님 오시는 그날에 반드시 온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기대하고 고대하는 마음속에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하루 살아갈 때에 사니까 사는 거지 생명이 있으니까 사는 거지. 그렇게 살지 마시고 주님 주님 오신 날을 기다립니다. 그 주님을 사모합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 내가 오늘도 인내하면서 그 날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는 존경하신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기다릴 때에 주님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는 온전한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문을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구약의 구원의 약속이긴 하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우리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성취하신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어떻게 해야 돼요?
그 성취하신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감사, 내일도 감사, 할렐루야 그리고 오늘도 예배, 내일도 예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우리의 삶을 드리는 삶이 되어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신앙의 여정 가운데 날마다 감사하고 날마다 예배자로 살아가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 스데반 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따라 합시다.
심판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6절 7절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400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여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노예 생활을 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결국 그들을 구원해내시겠다. 그리고 종 삼았던 자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에 심판하시겠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이를 통해 스데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는 거예요.
스데반은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 중에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구원을 동시에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하는 이 사람들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너희가 이스라엘을 압재했느냐 그러면 공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심판 생각하면 여러분 심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잖아요. 구원의 과정 속에 있는 하나의 일부 공유의 표현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공의와 심판하셨음을 공의로 심판을 하셨음을 기억하고 그 공의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에 그때만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이 아니죠.
오늘을 살아가는 너희에게도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불신과 불순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선민사상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면 너희들 역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누가 개척했어요?
유대인들이 배척했잖아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거부했잖아요. 과거에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내리신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담대하게 왜 선포했을까요?
그걸 알고 돌아오라. 스데반은 지금 유대인들 지도자들에게 돌아가는 예수가 진짜 복음이고 예수가 생명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 그 놀라운 역사가 그런 너희들 예수를 따라와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처벌이나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애굽은 심판을 받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해방의 역사를 보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회복으로 찾아오는 놀라운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때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무엇입니까?
바로 심판의 때가 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재림의 때에 구원의 심판 구원과 심판을 약속하셨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불신과 죄악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구원의 그날을 하루하루 바라보면서 언제나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이 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시오.
여러분 세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영광의 하나님 두 번째 오신 하나님의 두 번째는 약속의 하나님 세 번째 심판의 하나님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고백과 같은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찾아 또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잖아요.
뭐 보내주셨습니까?
언약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마지막에는 심판하시겠다. 그러나 그 심판 가운데 그대로 있으시다.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람함에 있을 때 먼저 그에게 나타나셔서 영광의 하나님으로 찾아와 주셨다. 그래서 특정한 장소, 시간 조건에 국한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에나 누구에든지 영광이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 날마다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여시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서 있는 자리자리마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운데 드러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후손들에게 그 언약을 성취하시겠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언약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눠져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인내하시고 때가 되었을 때 성취하셨던 거죠. 우리도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아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주는 것이 그날을 인내하고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나 신뢰함에 놓쳐서는 안 된다. 저와 여러분들이 약속을 신뢰하며 하루하루 인내하며 승리하는 자가 되시고, 스데반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과 그 결과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불의한 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무관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을 날마다 보고 계세요.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기억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좀 진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그런 의중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