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 포 도
--- 이 육 사 ---

내 고장 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 육 사 <시인·독립운동가>
경북 안동 출생<1904.4.4~1944.1.16>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본명은 원록(源祿).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따왔다.
이황(李滉)의 14대 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대구 교남학교를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그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고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 수감 이후 10여 차례 투옥됐다.
한편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 중 베이징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됐으며,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을 맞이했으며,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시인의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됐으며,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또한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육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04년 7월 시인의 출생지인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건립해 "암흑속에 찬란하게 빛나던 이육사의 문학세계가 자랑스럽게 보존"되며 알려지고 있다.
청포도의 7월, 당시 시인의 배경을 떠올려보면 “은쟁반, 모시수건” 등의 시어는 밝고 청초한 필과 주렁주렁 열린 청포도 열매를 통해 끊임없는 향수와 기다림, 미래를 향한 그의 염원을 잘 표현했다.
이육사의 청포도 시는 1939년 8월에 발표됐으며,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첫 시 ‘말’을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했다.
/김승하 바다시인이자 대표기자
내 고향 아일랜드<초도>향수를 ...
첫댓글 청포도 같이 신선한 신문사 되시길....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쿨하게?아주많이요.
청포도가익어가는계절처럼
싱그럽고맛있게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