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김명희
마을에는 아직도
한 번 붙들리면, 몬스터처럼 변신하는 낡은 미장원이 있다
공터 한 켠엔 수 많은 삶을 지탱해주던 배들이
폐가처럼 기울어 가고
외로운 사람들은 한두개의 습관을 문신처럼 안고 산다
몇해 전 해남집 여자와 어느 사내에 대한 소문이
아직은 뭍으로 떠나지 못한 듯,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몇 번의 태풍이 사나웠고
몇 번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또한 그러했다
소금기 밴 간판들은
누군가의 마지막 밤을 떠올리듯 쉽사리 바뀌지 않고
어딘가 잘 떠오르지 않는 생각의 원시안 속으로
저녁해가 진 건 아주 우연한 일일뿐
이곳에선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배가 드나드는 일보다 흔하다
톳이나 전복 이곳의 명물은 그러나, 유배다
욕망들의 유배지이며 그리움들의 유배지다
그리하여 세상의 눈 밝은 고기들은 이곳을 들르는 일이 적고
누군가 건져올린 풍어 소식도, 간밤의 꿈일 때가 많다
보길도,
나는 그 유폐되기 좋은 섬을 빠져 나오며
나 자신에게 묻는다
다시는 내 그리움의 안 쪽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무의도
이곳에 이르면
육지에서 온 바람도 관절이 들썩인다
집들이 졸고 있는 사이
하늘에서 마실 온 햇살이 잠시 개펄을 말리고
사람들은 밀물보다 먼저 흘러들어
저마다 가슴속 이야기 하나씩 들춘다
세상에 바다보다 오래된 가족사가 있을까
아득한 갯벌 그 내력만큼이나
짐작할 수 없는 위를 가로질러
바다가 길러낸 식솔들이 여기저기서 기어 나온다
잠적이란 때론 단순하여 작은 따개비, 소라고동 하나의
움직임에도 꼼짝없이 드러나고
저 뭍에 노후된 삶을 방치한 배들은 알까
제 몸 하나가 멈추자 고철의 무게로 처분된 심장과
따뜻한 흰밥이 차려지던 식탁과 구름들
대낮 시장기를 채워 주던 식당 환풍기들의 행방을,
해변가 백열등이 테이블 너머에 있는 밤바다와
취기의 내력을 비워 가는 동안
방금 도착한 낯선 사내 하나 낡은 지퍼를 열어
헤식은 여독을 시원스레 바다로 흘려 넣는다
서건도
제주시 강정도 산1번지에 가면
섬인 듯 곶인 듯 엎드려 있는 섬 하나 있다
문패는 없지만 낡고 오래된 탐라 옛 지도 어디쯤에서
살아왔을 거라 떠올려 본다
썩은 섬이라 했던가, 버려진 내력만큼이나
불러 보는 이름에서 상한 바람이 한 줌 부서진다
새들도 이곳에 이르러서는 희망을 노래하는 법이 없고
바람도, 파도 소리도
이곳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운명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잊히는 것만큼 오래된 부패가 있을까
오래전 잃어버린 편지 한 장을 문득 후회하듯
누구나 한번씩은 뼈저린 과거와 만나게 되는 곳
하루 두 번 부패가 열리고
하루 두 번 모세의 기적이 열리고
하루 두 번 거름이 되어야 할 날들이 열리는,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은 바다로부터 잊히고
하루에 두 번씩은 모든 추억들로부터 버려지기도 하는 섬
발을 빼자,
그동안 견뎌 왔던 내 부패의 알리바이들이 한꺼번에
물컹,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김명희 시집 『빈 곳』
김명희_200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8년 시와시학 신인상. 2011년 나무로 만든 동화 공모전 동화무분 대상. 제2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시집 『빈 곳』, E-BooK 동화『산골친구 미르』, 고려역사장편소설『불멸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