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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절 한강선 방어
1. 작전개요
가. 인민군의 작전기도
개전 4일째인 6월 28일 새벽, 국군에 의해 한강교가 폭파되고 이어 서울의 마지막 미아리방어선이 무너지자 인민군은 국군 주력을 서울 일대에서 포위 섬멸하려는 기도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적 제1군단(중장 김웅)은 제105전차여단(소장 유경수)과 함께 한강 도하지점을 페쇄하는 한편 전략목표인 시내의 주요기관, 즉 중앙청, 육군본부, 방성국, 마포형무소 및 서대문 형무소 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적은 서울 점령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정부를 대전으로 이동하여 국군의 항전이 계속되고 유엔군 개입(해/공군)이라는 예상 밖의 상항에 접하자 유엔군 지상군의 참전을 의식하여 그전에 남한을 석권하려는 기도하에 미리 계획된 남진명령을 하달 하였다.
따라서 인민군은 미육군이 도착하기 전에 한강을ㄹ 강습 도하하여 남한의 주력을 격멸 소탕한 후 평택-충주-율진 선의 지역을 점령하며, 이르 위해 주공을 영등포-수원-평택 방면으로 지향하는 동시에 다른 몇 개의 방향에 대해 조공으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에따라 한강을 도하하여 평택방면으로 진출한 적 제1군단은 주공인 제4사단(소장 이권무)을 신촌에서 영등포 방면으로, 조공인 제3사단(소장 이영호)을 용산-한남동일대에서 말죽거리로 지향하ㅕ 도하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무산 쪽에서 합류한 제6사단(소장 방호산)은 수색부근에 집결하여 이미 김포비행장까지 진출한 제14연대의 전황을 지켜보면서 그에 대한 지원태세를 갖추었고 제1사단(소장 최광)은 예비로써 제3/4사단을 후속할 준비를 하고 제105전차여단은 시가지 경계와 ㅗ병의 도하를 지원하면서 도하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인민군 제1군단은 서울을 점령하자 그들 공군이 제공권을 거의 상실하고 미군의 참전이 우려되어 도하를 서두르게 되었고, 한강선 돌파에 선두부대가 된 제3,4사단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울 점령시 나타나리라 예상헸던 군중들의 환영궐기도 없고 한강 도하를 위한 도하장비를 갖추지않았으며 발빠르게 움직이는 유엔군의 참전가능성에 여러가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한편, 중동부 전선의 인민군 제2군단은 제2사단이 가평을 거쳐 용인방면으로, 제12사단(소장 최충국)이 홍천을 장악한 후 서부전선과 보조를 맞추어 중앙선을 따라 남진하고 그 뒤를 후석하는 구단예비인 제15사단(소장 박성철)은 장차 여주-장호원 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동해안 방면의 적 제5사단(소장 마상철)은 국군 제8사단의 철수로 무주공산이 된 동해안을 따라 삼척을 점령한 후에 동해가도를 따라 남진하고, 정동진ㄴ,임원진에 상륙하여 강릉-삼척간 도로를 차단한 비정규전 부대 제766부대(총좌 오진우)와 제549부대는 내륙으로 침투를 기도하였다.
나. 국군의 도하철수
체계적인 철수계획이나 통제계획이 전무한 우리는 적의 압력이 가해지자 공포와 혼란에 휩싸이고 서울 이북지역으로부터 피난민이 유입되어 서울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사울-수원간 국도에서도 국ㄴ경이 피난민을 텅제할 수 없으니 모든 도로상에서 군 수송작전이 방해를 받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월 28일 아침 한강을 건너 철수하기 시작하는데 교량을 이용할 수 없으니 야포, 차량 박격포등 중장비를 모두 한강 이북에 남기고 병력만 소총을 휴대핮 채 땟목이나 나룻배를 이용하여 소대단의 또는 개인별로 도하하였다. 이중 광나루부근에서 철수한 병력은 곧장 수원으로 집결하고 서빙고와 한남동 뚝섬을 이용한 병력은 시흥과 수원으로 마포와 행주대교 이산포로 도하한 병력은 시흥으로 28일 밤과 29일 아침에 집결이 끝났다.
병사들은 거듭된 전투와 철수로 말미암아 극도로 피로한 산태였고 수습된 병력도 1개연대의 규모가 잘해야 1개 대대규모 밖에는 안되었다. 여기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인원이 반으로 군 병력이 1/3로 줄었다는 사실과 무려 1,318대의 파량들이 보급품을 실고 한강 북쪽에 갇혀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더욱이 통신망의 두절로 상하는 고사하고 인접부대와의 연락마저 곤란하여 지휘통제 및 협조체계가 마비 되었다.
당시 국군으로서는 아무런 대응책을 강구할 겨를이 없었고 다만 적이 국부국도로 주공을 지향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병력이 수습디는대로 노량진 방면에 투입하는 것 뿐이였다.
다. 한강방어선 형성
한강은 강폭이 700m에서 1,500m, 수심이 평균 3m에 달하였으며 안양천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한강 남안 24km의 정면에 방어 편성에 들어 갔다. 하지만 제대로된 건재를 가진 부대가 없기에 혼성 편성하여 500여명이 되면 대대로 급조하여 한강변에 내보내는 격이였다.
한강교량 폭파시 인도교와 하행선 철교 및 광진교는 모두 절단 되었으나 경인 상행선 철교와 경부선 철교가 완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적은 도하장비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진출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반면에 우리는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을 철수한 이후에 수원의 농업시험장으로 육본을 이동하여 지휘소를 개설하고 육군 차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 하였다.
김홍일 소장은 일지기 1918년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 강무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군ㅇ,로 할동하다 한국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1925년에 장개석이 이끄는 국부군에 가담하여 사단장을 역임하였으며 광복군 참모장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에 1950년 6월에 육군참모학교 교장으로 재직중 전쟁을 맞이하는데 그는 당시에 국군 간부 중에 사단급 이상 대부대의 지휘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김 소장은 보병학교가 있는 시흥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을 혼성제7사단장으로 동작리-대방리방면,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을 혼성수도사단장으로 신길리-양평리(안양천),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을 혼성제2사단장에 임명하여 신사리-동작리를 방어토록 하여 안양천에서 광진교까지를 최대한으로 고수한다는 것이였으며 29일에 가서야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특히 김 소장은 제7혼성사단에 방어중점을 두고 적이 노량진 방면으로 교량을 이용하여 도하하지 못하도록 방어편성을 서두른 결과 7개 대대로 노량진-영등포간, 노량진-동작동간의 주요지대를 점령하였으며 혼성수도사단은 3개대대 병력과 1개 잔ㅇ갑대대 그리고 57mm 대전차포 2개소대로 김포방면과 영등포 방면에 각각 배치하여 적의 도하에 대비 하였다.
이날 혼성제2사단은 신사리-말죽거리일대에서, 김포지구에서는 총 2천여명의 병력으로 김포지구사령부가 배치되었다. 혼성제3, 제5사단은 수원에서 낙오병을 수습하였으며 이산포 및 행주에서 도하 철수한 제1사단은 시흥사의 예비대가 되었다.
그 밖에 중부전선의 제6사단은 춘천-홍천에서 적과 교전하여 충주로 철수하고 있었고 동부전선의 제8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대관령에서 제천 방향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동해안 축선은 사실상 거의 방어 공백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시흥사는 사단이라고는 하나 거의 1개연대 규모의 병력에 불과 했고 장비도 사실 중장비는 없이 소총에 의존하고 겨우 연대당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정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지휘통제도 시흥사에서 관악산을 두고 동쪽편을 지휘통제할 능력이 못 되었고 김포사도 독자적으로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2. 미국의 지원 확대
가. 지상군의 투입결정
우리 정부는 대전으로 이동하기 전에 미국과 유엔에 대해 즉각적이고도 효과적인 지원을 공식 요청하였고 유엔안보리는 6월 27일까지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군사행동이 계속되자 28일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미 대통령은 미 지상군이 투입(7월 1일)되기 전까지미 해,공군의 참전을 결정하였다.
당시 한국에 상주하고 있던 미 극동군 사령부 처치 준장이 미 지상군 투입을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하였고 이로인해 6월 29일 맥아더가 직접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였으며 비행도중 그는 '38도선 이북에 대한 폭격'을 명령하였다. 그는 피닌민과 군인들이 늘어선 국도를 따라 한강방어선의 혼성수도사단 제8연대 제1대대 진지(현재 신길동 우신초등학교 인근 영등포 시민공원으로 추정 됨)까지 나아가 강건너 서울을 정찰하고 돌아가 전선시찰 보고서가 워싱턴에 보고 되고 6월 30일에 지상군 투입이 결정되었다.
나. 지상군 전투부대의 전개
맥아더 장군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이 결정이 되자 지체없이 제8군사령관에게 주일미군 중 규슈에 주둔한 제24사단을 파견토록 명령하였다.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제24사단장 딘소장에게 대대장의 지히하에 2개 소총중대와 4.2인치 박격포 2개 소대, 75mm 무반동총 1개소대로 지연임무를 수행토록 먼저 편성하여 공수로 부산에 도착한 후전방 통제소에 있는 처치 장군에게 보고하고 명령을 받도록 하고 나머지는 함정으로 이동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선견대롤 지명된제21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출동하여 7월 1일 08:45분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기차로 20:00에 이동하여 7월 2일 08:00에 대전에 도착 하였다. 처치장군에게 보고하고 평택 오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차로 다시 이동하였으며 대대 지휘소를 평택에 설치하고 4일에는 사단 포병 제52대대잘 페리 중령이 A포대를 인솔해 와 합류하였다.
이 선견대에 후석하여 일본 사세보항을 출발한 제24사단 주력은 제34연대가 7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으로 이동하고 뒤이어 제21연대(-), 제19연대순으로 4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3. 한강-수원선 방어작전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제1군단은 6월 28일, 29일 양일간 한강대안의 국군의 방어선을 탐색하면서 산발적인 포사격을 실시하는 한편, 주공 제4사단을 여의도 방면으로, 조공 제3사단을 흑석동 및 신사리 방면으로 도하시킬 부대정비를 완료하였다.
인민군은 29일 밤부터 먼저 전차포와 화포의 집중적인 지원하에 정찰대를 투입하여 탐색전을 전개하였으며 결국 밤섬과 흑석동 차안에 중대규모의 병력으로 도하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과정에서 수도사단 57mm대전차포 소대는 여의도로 추진하여 적을 급습하려다 적의 집중적인 포화를 받아 전원이 전사하였다.
혼성수도사단은 30일 미명부터 밤섬에서 야의도로 진출하련,ㄴ 적 제4사단의 수차례 공격을 혈전으로 격퇴하였다. 적은 정면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경부 상행선 복구를 시도하였다.
반면에 적 제3사단은 흑석동 차안상에 마련한 도하지점을 발판으로 30일 밈명에 흑석동 일대와 신사리 방면으로 본격적인 도하를 개시하였다. 일부는 수영으로 일부는 20~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뗏목과 나룻배 등을 이용하여 도강을 시도하였으며 신사리 일대가 도하를 허용하게 되었다. 신사리에 배치돈 기갑연대 제2기병대대가 돌파 되고 지원부대인 제3연대(-)마저 위태롭게 되어 결국 혼성제2사단장은 방어에 용이한 말죽거리 일대에서 적을 저지하길로 하고 재편 중인 제5, 제16연대를 95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제3연대(-)는 예비로 과천으로 전환하여 남태령-우면산-95고지를 연하는 선에서 적을 저지 하였다.
적의 도하공격 이틀째인 7월1일에는 영등포 대안의 적 제4사단이 아군복장을 한 편의대를 1개소대 구성하여 아군을 교란하면서 마포와 하중리 일대에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나 혼성수도사단의 분전으로 실패에 들어가자 이날 밤 철도선로원과 시민을 강제 동원하여 은밀하게 경부선 철교 복구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날 육군 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일권 소장이 전항을 분석하고 말죽거리-수원선을 고수하도록 강조하였다.
같은 날 말죽거리 정면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적 제3사단 제8연대가 신사리로 한강을 도하하여 이미 판교로 진출한 병력을 따라 후속하게 되면서 제5연대의 저지선이 돌파되고 말죽거리 95고지로 진출하였다. 때마침 7월 2일 사령부에서 주력이 철수하게 될 1번국도를 엄호하기 위해 말죽거리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그 후방 금곡리에 배치된 혼성제3사단이 말죽거리-판교축선을 방어하게 된다.
적의 도하작전 나흘째인 7월 3일 미명부터 적 주공인 제4사단이 7월 1일 야간부터 은밀하게 복구작업을 실시한 경부선 상행선의 철교를 이용하여 이날 04:00 최초로 전차 4대가 도강하게 되고 후속 병력이 영등포에 진출함으로써 아군의 방어선이 돌파되게 되었다. 뒤이어 열차편으로 전차 13대와 병력이 남안으로 진출함으로써 영등포가 실함위기에 처하게 되고 신사리와 흑석동 일원에서 부분 침투한 병력으로 국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영등포-수언간 축차진지에서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전을 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압력으로 7월4일 새벽 제105전차여단 소속의 전차들이 경수가도를 따라 남진하여 아군은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이 무너지고 결국 정일권 총참모장은 7월 4일 14:00에 시흥지구 사령부를 평택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4. 한강선 방어선 전투지역 탐사 및 탐문결과
안양천으로부터 광진교에 이르는 24km구간은 사실 지금 그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이미 올림픽대로가 건설되고 주변은 한강권 개발로 그 흔적조차 없다고 봄이 옳다. 그러나 제1한강교 남단에서 동양중학교에 이르는 구간, 동작동 현충원일대, 신사리의 95고지, 노량진의 사육신 묘소, 성남고 뒷산 용마산지역에는 아직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묻어 준 나팔병을 찾아주오!"
특히 현충원은 실제 참전했던 고양시에 살고 계시는 혼성제7사단의 천봉희용사님이 직접 현장에 와서 나팔병으로 전사한 고, 이경의등 2명의 전사자 매장 장소를 증언해 주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얼마전까지 사용 되었던 현충원장 공관자리 인근이다. 그러니 공사를 하면서 이미 그당시의 개인호나 교통호의 흔적이 훼선되어 시신과 나팔은 사라져 버렸다고 봐야한다.
용사님을 모시고 그 산의 줄기를 따라 올라서니 서달산 꼭대기다. 그 주변에 서달사가 있고 거북바위가 있는데 군데군데 남아있는 개인호의 흔적이 그당시 것인지 아니면 그후에 현충일 행사시마다 VIP경계를 위한 병력의 호인지 사실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현충원장 공관의 바로 뒤에는 한강을 바라보는 아주좋은 전망위치인데 이곳에는 6.25당시의 호로 추정되는 분대규모의 호가 남아 있어 우리는 굴토를 해보았으나 성과는 없었다. 용사님의 증언이 서달산에서 바로 관악산으로해서 수원으로 내려가 재편성되었다 한다.
"내가 묻어논 권총이 있고 철모도 있다. 많이 죽어서 있었고 묻혀졌을 것이다."
그런 어느날에 나는 노량진 사육신 묘소를 탐사하러 갔다. 묘소입구에서 어느 어르신이 보자고 한다. 무슨일인지 물어보니 우리 유니폼에 유해발굴단이라 되어 있어서 불렀다고 한다.
"어르신 연세가 얼마 되시는지요?"
"그런거는 묻지말고 내가 여기서 직접 전쟁을 겪었고 저 묘소 자리 뒤에 교통호가 파져서 그곳에서 숨바꼭질하고 놀았던 장본인이니 잘 듣고 한번 찾아보쇼"
"알겠습니다."
"한강철교가 쿵하고 나가떨어지는 충격에 잠이 깨어 나와보니 비가 내리는데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피난민과 차량들이 섞여서 난리야. 그때 내 나이가 13세인데 겁이 별로 없었지. 피난을 떠나니 우리도 짐싸들고 피난을 떠나 부산까지 갔다가 서울 수복이 되면서 다시 올라왔어요.
1.4후퇴시는 안성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처음에는 그대로 있었지. 그런데 동네에 있던 거정뱅이들이 날뛰면서 호구조사니 집에 있는 모든 재산을 조사하니 날뛰고 다니는데 안장차고 가관이야. ."
"그럼 중공군은 보셨어요?"
"무슨 소리야. 중공군과 북한군하고 함께 한 1개월 그놈들하고 집에서 살았지 뭐야. 그래도 그놈들 못된 짓은 못봤어."
"그런데 사육신 묘에 유해가 그때까지 남아 있었나요?"
"우리가 처음 피난갔다 들어오니 사람들이 군인들이 엄청 죽어있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이곳에 올라와 보니 교통호라고 하지. 길게 파 놓은 것을. 그곳에 시체가 가득해. 저기 야산에는 철모며 수류탄 등이 널려 있는데 별로 겁도 없고 어린 마음에 그저 몇몇이 모여 이곳에와서 총싸움하고 놀고 숨바꼭질하고 시체가 썩어가는데 냄새가 진동하잖아. 그래도 그냥 놀았어. 부모들이 가지말라고 혼을 내도 우린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몰라. 이곳에서 저기 넘어가면 성남중고등학교가 나오고 공군총장 관사인지 나오는데 그 당시는 다 야산에 밭에 논에 별거없었어. 여기저기 시신이 뒹굴고 큰 허벅지뼈들고 칼싸움 했다니까."
"그럼 혹시 마지막에 시신을 본적이 언제쯤 됩니까?"
"그건 정확하게 잘 몰라요. 국군이 있다가 다시 내려가면서 치우고 갔는지 아니면 겨울에 중공군이 내려와 한 3개월 머물고 갔는데 그때 치워졌는지는 몰라요. 왜냐면 내가 미군들 구두닦이 소년으로 평택에 있는 미군부대에 있었거든."
"그럼 어떻게 권총도 보고 묻어놓았다고 하시는지..."
"그 후에 내가 군대를 갔어요. 군대갔다 와서 옛생각에 한번 올라보니 지금 저기 박물관인지 기념관인지 세워진 곳 있잖아. 바로 그 밑이 서울 수경사, 그러니까 지금의 수방사 헌병들인지 건물이 있는데 그 위에서 발로 개인호를 깔짝깔짝하니 뭐가 묵직하길래 파보니 총이 나오고 철모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그냥 묻어버렸어. 저기 사육신 묘가 있는 곳은 가보니 어릴 때에 뛰어다니던 교통호가 없어지고 그 많던 총탄이며 수류탄 시체들이 하나도 없어졌어."
"그러니까 전쟁후 한 10년이내에 다 현상들이 사라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렇지."
또 다른 제보자 김태운(시흥거주)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본인이 직접 6.25 전쟁당시에 노량진 사육신 묘 맞은 편에 살았고 전쟁이 나서 피난갔다 돌아오니 사육신 묘 산 정상일대에 교통호도 있고 개인호도 있는데 국군 전사자가 널려 있는데 30~40여를 교통호에 매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 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린 사육신묘 일대를 다 발굴해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 한명의 제보만이 아니라 실제 공병이면서 이곳에서 전투한 분도 있었고 몇몇 지역주민들이 발굴과정에 참여했지만 찾지 못했다. 전 김영삼대통령 사가가 있는 국사봉일대도 사실 많은 전투가 있었고 시신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나중에 뼈만 굴러 다녀 어린 나이에 남학생들이 그걸 들고 병정놀이를 했다고 한다. 노량진동 신동아 아파트나 우림 아파트 일대가 당시는 야산으로 그런 곳이였다고 한다.
성남고 뒷산 용마산도 20여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어 2차례에 걸쳐 굴토를 했으나 찾지 못했고 다만 현재 공군참모총장 서울 숙소, 그러니까 용마산 줄기에 콘크리트로 경계벽이 설치 되어 있는데 그 안쪽부분이 실제 전투 지역으로 판단이 되는데 그곳은 아직 정밀조사를 해보지 못했다. 이곳은 1번국도를 따라 철수하는 아군의 축차진지를 구축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다음에는 바로 관악산의 서측인 삼성산과 안양 수원으로 내려가는 단계별 방어진지가 구축된 곳이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는 이후에 국군은 서쪽의 수리산 자락에서 관악산, 청계산, 남한산성을 두고 급편 기동방어를 하면서 대전으로 부산으로 정부가 이전해 내려가고 군은 지연전을 하면서 미군의 투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탐사활동간 구룡산에서 내려와 판교로부터 수원에 이르는 전투지역을 확인하는 과정에 서울 내곡지역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서고 있는 공사장을 찾아가 혹시나 땅을 굴토하면서 뭔가 나온 것이 없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공사현장에 들어가 목적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신원동 마을회관에 가면 그 당시에 이곳 일대에 살던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신원동 마을회관으로 이동했다. 때는 2012년 10월의 어느날이었다.
"말탄 군인들이 북한군을 탄약고를 기습하였고 한강나루에는 수천명의 부상병이 죽었다."
강익현(78세)외 다수의 증언이다.
전쟁이 났나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 앞에 논이며 밭으로해서 도망치는데 북한군이 이어서 들어왔다. 이 동네는 그렇게 못사는 동네가 아니라 빨갱이는 설치지 않았다. 그런데 갑짜기 청계산쪽에서 말탄 군인들이 나타나 북한군 탄약보급소를 습격하였다.
"아니 전쟁초기라면 북한군이 탄약보급소를 만들 여유가 없었고 혹시 9월달 다시 국군이 진격하면서 공격한 것 아닌지요?"
무슨 소리요. 우리가 똑똑히 보았는데 국군보다 우리는 북한군을 먼저 보았어요.
"이 사실에서 나는 전사에 나와있는 북한군이 신사리 방향에서 먼저 은밀침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고속도로변이 그 당시는 개울가인데 아군 시체가 줄줄이 널려있었어요.
강익현(78세)의 증언이다. 그리고 그 위치에서 2명의 군인이 발굴 되었다.
당시에 부역자들이 많이 죽어서 묻혀졌다. 누가 죽여서 묻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십명이 운터골 일대에 붙들려와 죽었다. 우리 밭에는 지금 택지개발이 진행되고 있는데 군인 2~3명이 죽었고 이걸 부역자들이 묻었다.
내가 전후에 동네사람들 치질 치료를 위해 직접 뼈를 캐서 불에 태워서 민간요법으로 사용했다. 당시 논바닥에는 지프를 타고 온 사람이 쫒아온 북한군에게 죽었는데 그냥 방치하여 동네 개들이 물어 뜯고 다녔다. 모두 미친개 되었다.
석문환(73세)의 증언이다.
우리 형이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엿으나 휴가와 있다가 전쟁이 나서 복귀했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DNA감식은 아직 안했는데 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 전쟁 당시에 이곳에는 아군이 3명 죽었고 우리 밭에 북한군 4명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권총도 빼서 쏘아봤고 나중에 국군에 다 반납했다.
어느날 형 친구라는 군인이 찾아왔었는데 군인들이 부상을 많이 당해서 차에 싣고 한강나루까지 왓는데 북한군이 바로 쫒아오고 있어 할 수 없이 강가에 아군이 죽여서 묻고 후퇴했다고 한다.
"여기 관련 제보는 또 있다. 노원구 중계3동에 사는 김기용('08년도 제보)이라는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때 김포 개화리에 살았고 6월전쟁 당시에 행주나루 근처에 갈대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국군 전사자 수십구를 직접 목격 했다는 것이다. 그후 군 전역후에는 건설업체에 근무하며 현재 아현동 굴레방 다리 근처 신촌고개에 국군 및 북한군 사체를 본인이 직접 매장하였다는 것이다.(현재 크리스탈 건물 뒤편) M1소총도 있었으나 버려버렸고 유해는 피아가 섞여 있었다는 제보로 현장을 우리는 정밀 탐사했으나 지형이 이미 변하여 발굴 자체를 할 수 없는 곳이였다. 하지만 행주나루관련 제보는 의미가 있어서 주기적으로 현장을 가서 조사해 보곤 했으며 행주외동에 가서 지역 주민 간담회를 하여 실태를 알아보려 했으나 주요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제1사단 후퇴는 행주나루와 이산포 지역으로 다른 참전용사증언(인천 이경수 등 다수)과도 일치하며 많게는 2,000여명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그 일대를 정밀 탐사하고 지역주민을 상대로 탐문을 해봤지만 2,000이라하면 산더미같은 숫자인데 그건 아닌 것같고 일부는 그렇게 되었으리라 판단 되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그동안 홍수나 자연재해로 모든 현상들이 개벽이 되어버렸다."
"혼성제2사단장 전속부관 추모비"에 묵념하다.
나는 혼성제2사단과 혼성제7사단의 주력이 빠져 나가는 사당동에서 과천, 의왕-군포선을 따라주변 탐문과 청계산, 관악산, 수리산-모락산-광교산(백운산, 바리산), 불곡산 자락 일대를 시간나는대로 수시 탐사 및 탐문을 실시해 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군포 산본동의 태을봉을 탐사하러 토요일에 혼자서 올랐다. 이곳은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이 오르는 수도권 등산지역이다. 산본 전철역에 내리어 걸어가는데 앞에서 지긋하게 나이드신 분이 손으로 오라해서 갔더니 어디서 얼굴을 본듯하다며 이야기를 하시는데 내가 TV에 낭 못을 긱하시는 것이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다.
"혹시 어르신 이곳에 오래 사신 것 아닌지요?"
"6.25이전부터 줄곧 살아왔지요. 지금 구포역부근이 전쟁터야. 그때는 몇이 죽어 있었지."
나는 연락처를 확인하고 태을봉에 올랐다. 정상에서 수리산 정상방향으로 일부 개인호가 있는데 남쪽이나 주로 길방향으로 굴토된 모양으로 봐서 중공군이 굴토한 흔적으로 추정된다. 사실 수리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이 1.4후퇴이후 미군이 재 반격작전간 엄청난 전투를 '51.3월초에 벌였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눈이 휘날리기 시작한다. 첫눈이 내리는 것이다. 물론 기상관상대 관측과 나의 판단은 다르다. 낵 첫눈이라 함은 현장에서 눈을 맞은 것을 말한다.
묘한 분위기속에 전철역을 향해 가는데 아침에 만났던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이, 이과장이요"
"네 맞습니다."
"그럼 당신 과천 청사 앞에 국군 제2사단 사단장 전속부관 추모비를 알고 있는가"
"모릅니다. 인접에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구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사실 바로 찾아가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몇일 후에 정식 탐사일정을 반영하여 이곳에 다시 나와서 그 추모비를 추적해 보았다. 원래 주 남태령로 길옆에 있었던 것이 길이 확장 되면서 옮겨졌다는 주민의 제보를 확인하고 찾아 나섰다.
여기서 그 지역주민이 알려준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추모비가 왜 옮겨졌어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길을 넓힌다고 비를 어디로 치워버렸다가 주민들이 나서서 지금 이곳에 다시 세우게 됐지요. 그 이유는 여기 전속부관이 그 당시에 사단장이 이한림인가 그런데 북한군 포탄이 떨어지는데 그걸 안고 전사하여 사단장을 살린 장본인이라며 후세들이 꼭 기억해야 한다는 중론에서 풀속에 버려진 비를 다시 찾아와 세우게 되었고 합니다."
우리는 깊은 묵념을 올리고 자리를 떠나 군포시 6.25참전용사회를 찾아가려 하는데 마침 길 옆을 지나던 분이 우리를 보고 한마디 던지셨다.
"군인양반들, 저기 청계산에 1개소대가 죽어 있는데 찾아갔소?"
"네? 무슨 말씀인지 처음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고 탐사만 완료 하였습니다."
"무슨 소리요. 그 당시에 이곳에서 국군이 포위되어 청계산으로 도망가다 1개소대가 고스란히 한곳에서 적에게 죽어 얼마전까지도 시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
"저희에게 접수된 어떤 내용에도 그런 사실은 없고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기 입니다. 상세히 다시한번 말씀해 주시고 저희가 확인하게 되면 연락드릴 수 있도록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더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연락할 필요 없어요. 갑니다."
이렇게 그 제보자는 떠나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의문점을 안고 청계산의 주요 등산로를 따라 탐사와 주요 고지인 응봉, 옥녀봉, 매봉, 이수봉, 국사봉 등 일대를 탐사 및 탐문 했으나 현재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우리는 군포역으로 가서 6.25당시의 전투지역과 실상을 파악해 보았다. 지난번 제보한 어르신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역사 공사중 확인 미상 유해 몇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발굴을 할 수 있도록 한결과 20대 초반으로 판단되는 유해 3구를 발굴 하였다.
"직영고개에서 내 전우를 밟고 다녔소!"
제1사단 제12연대 참전용사 최충진님의 증언이다. 김포반도로 철수하여 후퇴과정에 김포군 직영고개 일대에서 북한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고 전우 3명도 이때 전사하여 인근에 가매장하고 떠났다고 한다.
직영고개는 지금의 고촌읍 신곡리일대로써 신곡지구 개발사업이 활발한 곳으로 올망졸망한 야산들과 한강 차안에 천호산과 한강에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백마도가 있는 곳이다. 실제 행주나루인근으로 많은 인원이 도하를 감행하고 장단반도에서 철수해 오는 병력이 빠져나가는 길목으로 지금 김포대교가 관통하고 있다. 이곳에 산들은 모두 다 올라가 보았으며 흔적이 일부 있긴 하지만 그당시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로 전투없이 바로 김포비행장쪽으로 병력이 이동해 나갔다고 한다.
경인 아라뱃길을 건너면 바로 개활지로 당시에 갈대숲이 우거졌던 전호리고 그 위가 개화산이 있다. 바로 제1사단의 도하병력들이 살았다고 올라서니 벌써 인민군이 저 개화산 밑까지 포위하고 있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하여 지금 개화산 남쪽 미타사 위에 위령비까지 있다.
그러니 고촌과 개화동 일대는 얼마간의 피해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된다. 그러나 이곳도 개화산은 그후 미군의 레이다 기지 건설로 훼손되고 개화동은 지하철 터널 공사로 훼손 되고 지금 고촌은 신곡지구 아파트 단지가 한창 건설 되고 있다.
다음 혼성수도사단 57mm 대전차포 1개 소대원이 전원 전사한 여의도는 그 흔적이 아예없다.
그 앞의 밤섬은 지금 철새도래지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조그만 야산도 있고 전투가 심했으며 피난민들이 수없이 엉켜서 살다가 정화사업으로 모두 나가고 섬도 최초와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신사리-말죽거리 구간의 지금 도곡동 95고지에는 당시의 개인호가 존재하고 있지만 지역 주민들이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원주민은 모두 이주하였거나 찾을 길이 없었다.
남태령에서 우면산-대모산에 이르는 구간에도 간헐적인 개인호는 남아 있다. 지금 국정원 뒷산에 오르면 개인호가 철조망 울타리를 끼고 십여개 이상 집중적으로 고지정상에는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린 국정원의 협조를 얻어 현장에 들어가 직접 확인을 해보았다. 그러나 대모산에서 남태령에 이르는 구간에 집중적인 호나 교통호의 굴토흔적은 없다. 능인선원에서 구룡산에 올라서면 306m의 고지 꼭지점이다. 이곳에도 주변에 겨우 십여개의 개인호만 남아 있다. 우면산과 남태령에 이르는 구간 또한 군데군데 몇개의 호는 남아 있지만 그렇게 집단적인 호는 식별하지 못했다.
안양천이 끝나는 양천구와 영등포구의 교접지역인 가양동과 양화동 일대도 우리가 전투흔적을 찾지 못했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가 싸웠다는 김포 하성면의 애기봉 전망대가 있는 조강나루터 부근, 월곶면이 문수산성, 장기동의 운류산에서 운양동의 대촌에 이르는 구간, 통진읍 오리정의 외국어고교 일대 야산등 우린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강선 방어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운류산 일대에 있었던 그래도 가장 많은 수십개의 개인호도 장기지구 개발과 더불어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오리정의 밤나무 산에 남아 있던 개인호는 팬텍산업단지 개발에 따라 그나마 지역주민의 제보에 따라 확인된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5. 기억 되어야할 문제점
그렇다면 전사에서처럼 방어선이 형성 되었다면서 왜 개인호가 없을까?
나는 한강선 방어에 있어서도 그 앞의 전투에서 벌어진 여러 문제점들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역시나 지휘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병력의 축차투입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한강 이북에 유기되어 없었으니 관악산이나 청계산같은 장애물이 있는 경우에는 아예 통제가 불가하여 지역 지휘관이 임무형 지휘를 할 수 밖에 없고 군수지원이나 병력보충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또한 이미 무너져내린 군기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적에게 계속하여 포위되고 다시 포위되고 하다보니 패배의식이 팽배하여 전투의지가 부족하여 조그만 적의 압력에도 바로 뒤로 물러나 인접하는 부대와의 상호 협조적인 방어전선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병사들은 겁에 질리고 지휘자는 한번 무너진 기강을 확립하려해도 어떤 전환점이 없다보니 그들 또한 무기력한 지휘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만 볼 한강선 방어는 아니였다.
이미 한강을 헤엄이니 판자 또는 쪽배로 건너온 병력이 죽을지 알면서 다시 시흥이나 수원에 집결하여 재편서 거ㅘ정을 거처 혼성부대로 한강변에 방어를 담당하고 때로는 육탄공격대로 여의도에 기습도 하고 했던 그 과감한 용맹성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강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대도 우리 용사님 대다수는 이탈하지 않고 다시 군복과 소총을 들고 전선에서 싸웠다. 비록 야전삽이나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여 교통호나 개인호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곳에서 물러나지않고 죽을 각오로 버텨주었기에 미군이 들어오는 시간을 벌었다고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