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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역사신학적 고찰
I. 개혁주의생명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강조하는 개혁신학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한국교회 성도 수의 급감은 이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교인 수가 늘고 있다는 교회도 교회 간의 수평 이동이 대부분이고 생짜 초신자가 교회에 등록하는 경우는 매우 줄었다. 출산율의 저하로 인해 교회 성도 구성도 역삼각형으로 변해가고 있다.
1970년대나 1980년대만 해도 교회마다 유년주일학교 학생 수가 대단했다. 그 숫자가 중고등부로 고스란히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수의 학생들이 청년부로 올라가며 교회의 기둥들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에서 유초등부나 중고등부가 잘 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신실한 성도들마저도 자녀들의 신앙교육보다는 자녀들의 진학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은 그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자 수의 급감은 우리가 자초한 결과다.
이런 상황과 반대로 오늘날 신학교는 학생들이 넘쳐난다. 우리나라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여러 교파 신학교들은 해마다 수 천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지금껏 배출된 졸업생들 수를 다 합한다면 아마 수 만 명이 될 것이다. 수많은 신학교들에서 해마다 엄청나게 배출하는 신학생들이 있는데도 생짜 초신자 전도는 급감하고 성도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케 하시어 다잡을 작정으로 치시는 것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개혁주의생명신학은 먼저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신학과 다른 신학이 아니라 동일한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이다.
그런데 오늘날 개혁신학은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 성경에 바탕을 둔 신학체계를 수립한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정통주의신학자들의 유산을 이어받아서는 그 신학 내용을 성경보다 더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목회와 신자들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남이 줄어들고 사회 가운데 한국교회의 선한 영향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고 있다. 이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한국교회와 신자들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회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오늘날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풀어야 할 당면 과제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명제다. 본고에서는, 먼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제1명제인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의 주장 배경과 의미를 살핀 후, 그것을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정통주의신학자들이 참된 신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해에 비추어 봄으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의 역사신학적 자리매김을 시도할 것이다.
II.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의 주장 배경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자신과 교회와 온 세상을 개혁하기를 지향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신학 체계를 앞세우므로 그릇된 길로 간 데 맞서서 성경을 신앙과 삶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성경 자체를 가르침으로 교회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회복시켰다.
개혁신학은 우리 신앙과 삶에서 성경에 비추어 보아 그릇된 것은 무엇이라도 고쳐서 바로잡는 신학이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과 교회와 세상의 그릇된 것은 바로잡고 올바른 것은 북돋우려는 이런 개혁신학의 전통을 계승한다.1) 그러므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신학 또는 개혁주의신학과 다른 신학이 아니라 같은 신학이다.2)
하지만 오늘날 개혁신학이 다시금 전통과 교리 중심의 신학에 치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役事)를 놓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과 기도 가운데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지향한다.3)
요한 칼빈(Jean Calvin)을 위시한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a)라는 원리를 제시한 것은 중세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보다 더 신뢰하던 전통에 맞서 성경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우리 신앙과 삶의 최종적 권위가 오직 성경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 전통에 밀려 구석에 밀쳐져 있던 성경의 본래적 위치를 회복시킴과 더불어 그릇 놓인 전통의 위치를 바로 잡았다는 의미가 있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강조하는 ‘오직 성경만이’는 이와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도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중세말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보다 전통을 더 우위에 둔 것이 문제라면, 오늘날 우리는 성경보다 신학을 더 우위에 두는 것이 문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계승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신교정통주의신학자들의 유산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여 지금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신학 내용이 새로운 전통이 되어 성경을 강단에서 밀어낸 것이 문제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을 둔 것이 문제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리의 지식의 총체인 신학을 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선포되고 가르쳐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이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앞에 자복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남이 당연할 텐데, 새로운 전통이 된 신학만 붙들 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승부하는 목회자들이 사라지다 보니 오늘날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성도 수는 급감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장종현 박사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4) 말씀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하는 일은 막아야 하기에 건전한 신학 전통을 익히되 강단에서는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의 귀결이다.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목사 자신이 먼저 성경 말씀의 은혜를 누려 알아야 하기에,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는 목사 후보생인 신학생들에게 성경을 읽고 쓰게 한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 목사님들의 경우, 성경을 읽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기에 성경 읽기와 쓰기를 신학교 과목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신학교들에서는 신학 과목은 많이 수강하지만, 신학생들이 성경을 읽는 일은 뒷전으로 미는 상황이다.
아마 미국이나 유럽의 학교들은 물론이고 한국의 신학교들 거의 모두가 이런 상황이라고 추정한다.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은 수년 전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성경읽기와 쓰기를 정규과목으로 편성했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성경읽기와 쓰기를 정규과목으로 편성하는 커리큘럼 개정이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이제는 이에 더하여 새로 들어오는 신학생들부터는 1학차 수업과 2학차 수업 전에 각각 한 주간씩의 신앙수련회를 필수적으로 참석하도록 만들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성경이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이 성경을 읽고 필사하는 그 자체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 가운데 자신의 말씀으로 받게 되기를 바라 그리 하는 것이다.
신앙수련회를 통해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를 체험할 기회를 제공함으로 신학 수업 중에는 물론이고 목회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사모하는 그런 목회자가 되길 바라 그리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 이토록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신자 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영적 가뭄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점점 위축되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우리 신학자들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신학 교육에 문제가 없는 지, 만약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살피기를 촉구한다. 만약 지금 우리의 신학 교육에 문제가 있다면 그 잘못을 겸허히 시인하고 우리 교회와 신자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기여하는 신학 교육법을 찾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제시하는 현실 파악의 결론임과 동시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다.
III.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1) ‘살리는 신학’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의 의미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명제 속의 두 가지 개념을 밝혀야 한다. 그 둘은 신학과 학문이다.
장종현 박사는 오늘날 신학이 발전한 나라일수록, 그리고 신학자가 많은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교회들이 문을 닫는 일이 더 많아지는 현상의 원인이 신학을 단순히 이성적 학문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며 배우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신학은 하나님을 영적으로 알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이성적으로 분석함으로 그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5)
그래서 그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말씀에 근거해서, ‘살리는 신학,’ 즉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신학”이 있는 반면, ‘죽이는 신학,’ 즉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신학”도 있다고 주장한다.6) 여기서 ‘살리는 신학’이란 성경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성경의 빛 아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개혁하는 신학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스스로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개혁하는 신학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개혁주의신학이다. 이렇듯 개혁주의생명신학은 개혁주의신학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개혁주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믿고 가르치는 개혁주의 정신으로 제대로 살고 있다면,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교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교 졸업생들 중 극소수만이 목회 현장에 뛰어든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불타올라 그 생명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목회자가 나오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신학자들이 개혁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는데 있다. 신학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신학을 지식으로만 공부하고, 그 심령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깨어지고 부서져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불타오르지 않는데 있다. 우리 신학자들의 심령 속에서 성령님의 생명의 능력이 샘솟듯이 솟아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 심령이 지식과 교만과 탐욕과 미움과 시기와 정욕으로 가득 차 있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다름 아닌 학문의 탈을 쓴 쭉정이와 같은 신학인 것이다. 신학생들이 이런 것을 먹고 자라기에 진정한 영적 군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7)
따라서, ‘살리는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스스로를 개혁하는 실천이 있는 신학이고, ‘죽이는 신학’은 이런 실천이 없이 공허한 외침만 있는 신학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 속의 신학이 ‘죽이는 신학’이 아니라 ‘살리는 신학’을 가리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다른 누구보다도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즉 신학자들의 자기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주장이다.
(2) 신학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 속의 학문은 단순한 지적 지식(a mere intellectual knowledge)을 의미한다. 신학(theology)은 그리스어 테오로기아(theologia)에서 온 말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이 말은 원래 ‘신에 대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을 의미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신학’이라고 부르기를 꺼려했다. 즉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신학’이라 부르기를 매우 주저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8)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인격 개념이다.
장종현 박사는 신학이 추구하는 진리가 단순한 사상이나 교훈이 아니라 인격임을 강조한다. 신학의 진리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함은 지성을 사용해서 하나님에 관해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인격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9)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인격체이심을 기억하며, 늘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10)
단순한 지적 지식으로서의 학문의 의미는 철학자들의 지식과 신학자들의 지식을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성경의 하나님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철학자들의 신과는 달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영적이고 인격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신학자와 철학자의 연구 대상의 성격이 이처럼 서로 다르기 때문에 신학자의 연구방법은 철학자의 연구방법과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철학자들의 지식은 이성에 근거해서 스스로 찾아내는 지식인데 반해, 신학자들의 지식의 원천은 신학자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철학자들이 개념이나 정의를 얻고자 하는 목적은 연구대상을 고정시킴으로써 그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를 통해 그 대상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을 추상적 개념을 통해 고정시켜 그분을 통제하려는 행위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비인격적 이미지에 가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2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추상적 개념에 의해 파악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인격적으로 체험한 하나님이시다.11)
따라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생명이시고 인격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고정적이며 추상적인 비인격적 개념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12)
인격은 단순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로마서 11장 33절에 나타나있듯, 하나님의 판단과 방법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우리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분석하려함은 잘못이다.13)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인 우리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이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연구할 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내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는 자세가 요구된다.14)
신학의 대상을 비인격적 개념으로서의 신으로 삼는 경우 신학 작업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필요 없게 된다. 이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신학작업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없이도 가능한 신학은 참된 신학이 아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의 조명 없이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15)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기에 신학자는 하나님 앞에서 늘 마음을 낮추어야 하고 예배와 찬양과 기도의 경건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가 없이는 너무나 쉽게 교만에 빠진다.16)
그 경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학문적 노력으로만 이해”하려는 잘못에 빠질 수 있다.17)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대해 ‘왜 신학이 학문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다. 신학도 학문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이성의 활동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18) 신학 또한 학문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만, 신학은 절대로 학문으로 즉 단순한 지적 지식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신학이 제 자리로, 즉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19)
신학이 학문이 아니라면, 신학은 무엇인가? 장종현 박사에 따르면, “신학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한 신학,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신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학문이 아니라 생명이요 복음이다.
”신학은 “전문적인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다.20) 즉 참된 신학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은 복음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식 개념이 성경적 관점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철학과 일반 학문에서 지식은 개념과 정의를 통해 연구대상을 파악하는데서 성립한다. 진리는 인간 이성과 경험에 의해 파악되는 비인격적 대상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기에 신학의 진리는 비인격적 대상이 아니라 인격이다.21)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신학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지적으로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지식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과 신비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계 3:20). 여기서 ‘아는 것’은 학문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서, 생명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눠주는 신학이어야 한다.22) 단순한 지적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만으로는 인간을 변화시키고 회개하게 하고 새사람이 되어 거듭나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 학문만으로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지 못한다.23) 온전한 지식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영적 체험을 통한 지식이어야 한다.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일반적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그 지식이 우리 삶에서 하는 역할도 달라진다. 그 지식은 생명을 지닌 지식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아는 지식은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내려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고 경배하도록 한다.24)
그 결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변화를 받고 진실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한 주의 종”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이다. 이런 개혁이 일어날 때 개혁주의신학은 죽은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신학이 된다.25) 바로 이런 신학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다. 이런 신학을 지닐 때 개혁주의신학의 사변화로 인해 생긴 교회의 끝없는 분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26)
(3) 참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은 복음이다
인격이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냥 눈으로 읽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체험하고 그분의 인도를 받게 된다.”27)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삶 속에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28)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많은 착한 일들을 이루시며, 무엇보다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신다.29)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오직 성경만이”를 외치며 신학수업의 기초를 하나님 말씀에서 찾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성경에 능통한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30)
장종현 박사에 따르면,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에 많은 신학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이유는 신학자들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 자체보다 학문적 연구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31)
그런 학문적 연구는 지엽적이고 전문화된 분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성도들에게 영적 유익을 가져다주는 “신학의 일차적 목표”를 다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32) 이처럼 성경 자체보다 학자들의 학문적 연구를 더 중요하게 여김은 “각자 자기 기준과 자기 삶의 목표를 중시하면서 하나님을 우롱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자기 기준이나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재단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인격적이기 때문이다.33)
하나님 말씀은 일반 학자들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평범한 텍스트가 아니다. 성경은 인격이신 하나님의 인격적 계시이므로, 우리가 그 앞에서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찬양하면서 순종해야 하는 인격이기도 하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이성이나 지성으로 완전히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34) 따라서 장종현 박사는 신학생들을 향해 “자기 지식을 믿지 말기를 바라고,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대변자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말씀이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조절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비워두어야 한다.35)
이것이 바로 “바른 성경읽기를 통해 바른 신학을 세워갈 수 있는 것이 분명”한 이유다.36) 목회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해 이런 태도를 취할 때 교회를 무너뜨리는 신학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신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이다.37)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한국 교회를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로 만드는 운동”이 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신학회복운동을 실천하고자 한다.38)
요컨대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살리는 신학’ 즉 참된 신학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은 복음임을 천명(闡明)하고 있다. 이것은 점점 더 사변화 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신학에 대한 반성에 근거하여 신학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당위(當爲)적 선언이라 할 것이다.
IV.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
(1) ‘신학’ 용어 사용의 정당성 확보
‘신학’(theologia)이란 단어는 그리스 어원에서 나와 라틴어로 계승된 것으로, 교회교부들이 이교도 저술가들로부터 차용해 채택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에 따르면, 시인들이 “신학자들”(theologians)이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들과 “신성한 것들”에 관해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적 용법을 확대 적용하여, 락탄티우스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예배하는 이들을 신학자들(theologi)이라 부르고 그들의 지식을 신학(theologia)이라 부른다. 더욱이 일찍이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록에 첨부된 제목에서 사도 요한을 “신학자”(Theologus)라고 불렀다.39)
신학이란 용어 자체가 성경적 용어가 아니고 고대 이교도 용어라는 사실은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Protestant scholastics)을 약간 불안하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은 신앙내용 중 성경에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제거하려 했고, 특히 종교개혁 초기 몇 십 년 동안에는 신학 내용을 성경 본문에 기초해 형성하기 위해 중세적 자료들은 물론이고 고전적 자료들의 사용도 피하려 했던 매우 성경적인 운동이었기에, 요한을 신학자라고 부른 초대교회의 서신명이 있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사용한 신학이란 용어를 쉬이 용납할 수는 없었다.
이교도 “신학”은 초자연적 혹은 특별 계시에 접근할 수 없었고, 자연 계시의 진리를 분간함에 있어서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40)
따라서 신학이란 용어의 성경적인 정당화가 필요했는데,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Turretin)은 신학이란 용어와 그 의미를 구분함으로 그 문제를 푼다.
[테오로기아라는 용어]로부터 만들어지는 단순한 용어들이 [성경에] 나오는데, 예를 들어, 롬3:2, 벧전4:11, 히5:12 등의 로고스 투 테우(logos tou theou)와 로기아 투 테우(logia tou theou)가 그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소리(quoad sonum)나 철자들로, 혹은 형식적이며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성경에 의미(quoad sensum)나 의미되는 것(rem significatam)으로, 혹은 실질적이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다르다. ‘신학’은 성경에 전자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후자의 방식으로 나타난다.41)
성경에 테오로기아라는 용어가 고스란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신학의 실질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신학은 하늘의 가르침(doctrina coelestis)을 가리키고,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logia tou theou)이라는 언급 외에도 일련의 동의어들, 즉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 2:7), “건전한 말의 형식”(딤후1:13), “경건에 속한 진리의 지식”(딛 1:1), 그리고 “가르침”(딛 1:9)이 있다고 한다.42)
이렇듯 테오로기아라는 용어가 기독교 신학을 뜻하는 말로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개혁파 정통주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테오로고스(theologos)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테오로기아는, 그 말의 본뜻과 그리스인들의 용법에 기초할 때, “테우 로고스(theou logos) 즉 하나님의 말씀(sermonem Dei)이 아니라 페리 테우 로곤(peri theou logon) 즉 하나님에 관한 말(sermonem de Deo)”을 가리킨다고 한다.43)
이제 테오로기아란 말은, 천문학(astrologia)이 별들의 말이 아니라 별들에 관한 말(sermo de astris)인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말(sermo qui de Deo agit)을 의미하게 되었다.44)
하지만 투레틴은 하나님의 말씀(theou logos, sermo Dei)을 하나님에 관한 말(logos peri theou, sermo de Deo)과 이렇듯 엄격히 분리함은 신학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테오로기아라는 용어는…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말 둘 모두를 가리키며, 이 둘은 결합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채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는 최초에(originaliter)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객관적으로(objective) 하나님을 다루며, 종국적으로(terminative)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당하지 않게 설명한 대로, 신학이 하나님에 의해 가르쳐지고, 하나님에 관해 가르치며 하나님께로 이끈다(Theologia a Deo docetur, Deum docet, et ad Deum ducit)고 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용법은 신학의 이중적 기초(duplex Theologiae principium)를 포함한다. 하나는 존재(essendi)의 기초이신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cognoscendi)의 기초인 그분의 말씀이다.45)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 박사는 비록 투레틴이 논쟁적인 상황 때문에 사실을 인정하길 꺼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퀴나스를 읽고 유익을 얻었음은 분명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과 “하나님에 관한 말”이란 말 둘 다를 통합하는 이런 좀 더 넓은 어원론은 체계를 위한 좀 더 확고한 기초와 그 첫 원리들을 제공했다.46)
이런 식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에서 테오로기아라는 용어 사용의 정당성이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는 두 의미 모두를 뜻할 수 있는 통합적인 용어로 받아들여졌다.
(2)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예배하도록 가르침에 대한 실천적 관심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참된 신학은 매우 실제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황금 사슬」(A Golden Chaine)이 전문적인 신학체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첫 장에서 기독교 신학을 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성경의 본체는 잘 살아가기에 충분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많은 거룩한 지식들을 포함하는데, 그것들 중 하나는 주요한 것이고 다른 것들은 하녀들 또는 종자들이다.주요한 지식은 신학이다.
신학은 영원히 복되게 살아감의 지식이다. 지극히 복된 삶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즉 그리스도)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봄에 의해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신학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된다.47)
멀러 박사에 따르면, 퍼킨스가 참된 신학을 “영원히 복되게 살아감의 지식”으로 정의함은 피터 라무스(Peter Ramus)의「기독교에 관하여」(De religione christiana, 1576)와 더들리 펜너(Dudley Fenner)의 「거룩한 신학」(Sacra theologia, 1585)에 선례가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의 균형은 츠빙글리와 칼빈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퍼킨스가 “라무스주의적” 정의를 선택한 것은 윌리엄 에임스 (William Ames)가「신학의 정수」(Medulla ss. theologiae [The Marrow of Sacred Divinitie])에서 따르고 있는데, 거기에서 신학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가르침”으로 정의된다.
이런 실천적 강조는 대륙의 스콜라주의자들의 저작들, 특히 퍼킨스와 에임스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네덜란드의 스콜라주의자들에 작품들로 넘어간다.48)
에임스, 존 예이츠(John Yates), 존 다운앰(John Downame),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에드워드 리(Edward Leigh)와 토머스 웟슨(Thomas Watson)의 체계들과 논문들의 제목들이 입증하듯이, 영국인들은 “theology”라는 단어보다는 “divinity”라는 용어를 선호함이 분명하다.49) ‘디비너티’는 “신성한”(divine) 것들에 관한 지식 혹은학문(scientia rerum divinarum)을 가리킨다. 에드워드 리는 “divinity”가 “잘 살고 복되게 살도록, 또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신성하게 계시된, 신성한 것들에 대한 참된 지혜”라고 한다. “논리학은 잘 구별하는 기술이고, 수사학은 잘 말하는 기술이며, 신학은 잘 사는 기술이다(Theologia ars bene vivendi).” ‘디비너티’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는 기술이다.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이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규칙들은 ‘디비너티’에서 끌어낸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은 실천적인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제시된 방식으로 알 때
참으로 아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제시되시기 때문이다.50)
그래서 리는 신학은 지식(scientia)보다는 지혜(sapientia)로 정의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지혜(wisdom)라 말하며 지혜는 어떤 일정한 지식을 위한 용어다.
하지만 ‘디비너티’는 신성한 계시에 의해 알 수 있으며 그 첫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둘째 목적이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다른 지혜와는 다르다.51)
리 역시 ‘디비너티’라는 용어를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용어가 모호함을 염려하여 “theology”를 좀 더 정확한 어원을 가진 적당한 동의어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신성한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종교(religion)의 전체 교리를 신학(theology), 즉 하나님에 관한 말 혹은 교리라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이는 참된 종교,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52)
종교의 전체 교리를 신학이라 부르기에, 신학에는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이 있다. 거짓된 신학(theologia falsa)은 고대 이교도들의 것이거나, 신성한 것들에 관해 오류를 범하는 이들의 것이다. 반면, 참된 신학(theologia vera)은 원형(原型)적(archetypa)이거나 모사적(ectypa)이다.53) 원형적 신학(theologia archetypa)은 하나님 자신만이 알고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으로, 그것은 모든 참된 신학의 원형또는 궁극적 모범이다. 모사적 신학(theologia archetypa)은 신적 원형의 반영으로 규정되는 모든 참된 유한한 신학이다.54)
멀러 박사에 따르면, 사실 츠빙글리와 칼빈 그리고 불링거는 테오로기아라는 용어를 정의하지도 논의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종교’(religio) 개념이었다. 종교개혁자들과 정통주의자들 모두 종교라는 단어가 어원론적으로 경건(piety) 또는 하나님을 앎과 경외함의 올바른 방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관심을 두었다.
실제에 있어서, 신성한 것들에 관한 지혜로서의 신학 개념과 하나님을 올바로 앎과 예배함으로서의 종교 개념 사이에 차이는 극히 미미하다. 그래서 신자의 믿음에 대한 꽤 많은 “가르침들”(institutiones)과 다수의 신앙고백 문서들의 제목들이 믿음(fides)이나 신학보다는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관습적으로 신학은 논제들(loci communes)이라는 용어와, 그리고 17세기에는 체계(systema)라는 용어와 짝지어졌고, 반면에 종교는 거의 항상 가르침(institutio)과, 그리고 16세기에는 종종 대요(compendium)나 신앙고백(confessio)과 짝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좀 더 정밀하고 전문적인 가르침, 즉 좀 더 대규모의 가르침 또는 교리(doctrina)는 신학인 반면에, 실제적 그리고 좀 더 기본적인 가르침은 종교라는 점이다.55)
종교가 기본적인 가르침에 관해 사용되는 용어라면, 신학은 충분히 발전된 신학체계 혹은 적어도 종교의 형태와 내용의 교리적 정교화에 관해 사용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츠빙글리와 칼빈 그리고 불링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신학보다 는 종교, 즉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예배하도록 가르치는 좀 더 실천적인 가르침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에 대한 체계적인 고찰은 초기 개혁 신학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한 교리 연구의 자연스런 결과였다. 종교는 참될 수도 있고 거짓될 수도 있으며, 성경적일 수도 있으며 우상숭배적일 수도 있으며, 계시의 산물일 수도 있으며 헛된 망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츠빙글리는「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에 관한 주석」(De vera et falsa religione commentarius, 1525)에서 차후 정통주의 체계에 있어서 종교에 대한 논의를 위한 양식뿐만 아니라 참된 신학과 거짓된 신학에 대한 논의를 위한 양식 또한 제공한다.56)
츠빙글리는 종교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경건, 즉 믿음, 삶, 율법, 예배 그리고 성례”를 포함한다고 여긴다. 그는 “참된”이라는 말과 “거짓된”이란 말을 붙여 종교와 미신을 구분한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 말씀의 샘으로부터 끌어내어진” 것인 반면, 거짓된 종교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다. 그래서 츠빙글리는 이교와 이단을 거짓된 종교의 형태라고 하나로 묶으며, 그 둘 모두가 인간 본성의 부패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참된 종교는 은혜와 계시의 산물이며 기독교와 동일시된다. 이에 반해, 거짓된 종교는 주로 교황권에 의해 기독교에 가해진 남용들과 동일시된다.57)
칼빈 또한「기독교 강요」초판의 부제에 자신의 책이 경건의 총체적 개요와 필수적인 구원 교리를 동시에 담고 있다고 표현했다: “경건의 전체적인 개요 그리고 구원 교리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거의 포함하고 있는 기독교 강요(綱要): 경건을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읽을 만한 매우 가치 있는 저작, 최근판.”58) 경건의 개요가 구원 교리에 대한 지식과 대등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기독교 강요」의 ‘기독교’가 ‘Christianity’가 아니라 ‘Christian religion’이란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종교’라는 표현이 어색하므로, ‘religion’의 다른 의미를 살려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기독교 강요」는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될 만한 요점’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앙과 직결된 지식과 예배의 양식으로서, 그리고 신학의 정교화에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종교에 대한 조직적인 접근은 칼빈의「기독교 강요」초판뿐만 아니라 잇따른 판들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난다. 더군다나, 멀러 박사에 따르면,「기독교 강요」의 확장,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다섯 장이 더해지거나 일종의 서언으로 발전되는 것은, 도입부에서 신앙(religion), 경건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주된 강조를 뒷받침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59)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예배하도록 가르침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실천적인 관심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게 계승된다. 멀러 박사에 따르면, 개신교가 정통주의 시대에 진입하고 신학적 또는 종교적 연구가 체계의 충분한 발전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종교에 대한 논의는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예비적 관심이 더 이상 아니었고, 체계는 종교를 논하기보다는, 신학 체계에 상응하는 서언으로서 신학의 정의를 다루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라는 점에서 정의된 종교는 신학의 관심으로, 즉 교회의 좀 더 이론적인 진술과 관련한 교회의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신학과 밀접하게 관련된, 신학 체계의 서론에 있어서의 하나의 논제로 남았다.60)
퍼킨스의 주장처럼, 만약 신학이 “영원히 복되게 살아감의 지식”이라면,61) 종교는 “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agnitio)”과 “적법한 예배”의 실행이다.62) 종교는 “하나님을 앎과 예배함의 올바른 양식”으로 정의할 수 있고,63) 참된 종교(vera religio)는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을 앎과 예배함의 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64)
폴라누스(Amandus Polanus von Polansdorf)는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를 구분하며, 참된 종교는 경건(pietas)이며 단지 내적이거나 또는 내적이며 외적 둘 다인 예배 행위들에 존재한다고 하며, 내적으로는 참된 종교가 “구원하는 신앙,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하나님께 대해 신실함, 하나님께 대한 소망, 하나님께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두려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그리고 인내”에 존재한다고 한다.65)
멀러 박사에 따르면, 종교가 신학의 기본적 주제라는 진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이 신학의 고유한 대상이라는 전형적인 개혁파 정통주의의 선언과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원이 증명하듯이, 신학은 말 또는 가르침이며, 마찬가지로 그 어원에 의해 정의되듯이, 종교는 무언가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무언가에 바쳐지는 준수 또는 실행이다. 둘 모두의 동일한 궁극적 대상이 하나님이시지만, 종교는, 실제적으로 모든 정의들이 그것을 예배(cultus)일뿐만 아니라 지식(cognitio)이라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임을 나타낸다.
실제에 있어서, 신학이 그 대상의 올바른 묘사와 정의를 통해 안내하고 육성하는 것은 종교의 실천이다.66)
(3) 실천적 신학 지향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이 중세 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논쟁들 중하나는 신학의 특성과 목적이 이론적인가 또는 실천적인가 하는 것이다.67) 로버트 킬워드비(Robert Kilwardby)에서 시작해서 겐트의 헨리(Henry of Ghent)를 거쳐 둔스스코투스(Duns Scotus)로 이어지는 신학의 원인들과 목적들에 관한 논의의 결과들 중 하나는 신학이 사색적인 분야인가 실천적인 분야인가(whether theology was a speculative or a practical discipline) 하는 문제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이었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은 도미니크수도회 신학은, 신학을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 알 수 있는 한에서, 지식(scientia)의 이론적 혹은 사색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프란체스코수도회 신학은, 지식의 언어에 대한 불신과 함께, 신학의 실천적 국면을 강조하는 경향이었고, 스코투스의 저작에서는, 신학이 하나님 안에서 인류의 궁극적 목표를 지향하는 분야임을 고려할 때 본질적으로 실천(praxis)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68)
중세와 17세기 스콜라주의자들 둘 다는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이라는 두 말을 그것들의 기본적인 어원론적 의미에서 이해했다. “보다”라는 그리스어 동사[theorein]에서 유래한 ‘테오리아’는 보여진 어떤 것을 가리키고, “행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prassein]에서 유래한 ‘프락시스’(praxis)는 염두에 둔 목적을 위해 행해진 것 또는 착수된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테오리아는 관조(contemplatio)나 사색(speculatio)과 동의어로 무엇인가를 단순히 바라봄을 가리킨다. 스콜라주의적 사고에는, 보이는 것을 봄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바라봄이라는 이런 개념은 사람이 하나님을 봄(visio Dei)과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향유함(fruitio Dei)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프락시스는, 이와 상반되게, 목적으로 이끄는 행위를 가리킨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그 자체 너머의 목표, 즉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여질 때, 그리고 올바른 삶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이바지하도록 의도되었을 때, 실천적이라 이해할 수 있다.69)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는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기독교 신학(theologia Christiana theoretico-practica)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vivendi Deo per Christum)을 가르치는 교리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6장 2~4절을 인용한다.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또한 마스트리히트는 디모데전서 마지막부분(6:20-21)에서 바울이 다시 디모데에게 참된 신학을 하도록 촉구하고 거짓된 신학을 피하도록 명령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거짓된 신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건전한 말씀을 전달하지 못하고 싸움과 미움을 야기하는 가르침이기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또한 경건에 따른 가르침(doctrina, quae est secundum pietatem)이다.
그러므로 참된 신학은 실천을 가진 이론(theoria cum praxi), 즉 경건을 가진 교훈을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설명되어야만 한다.70)
멀러 박사에 따르면, 이론과 실천의 균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개혁파 정통주의는 이론적 측면보다는 실천적 측면을 선호했다. 순수하게 실천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케커만, 코케이우스, 부어만, 백스터 그리고 하이데거와 같은 예외들과는 별도로, 그리고 학문의 이론적이며 사색적인 측면에 대한 베르미글리의 토마스주의적인 강조와 는 별도로, 다수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스트라스부르의 토마스(Thomas of Strasbourg)를 따라, 신학의 사변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그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했다.71)
신학의 궁극적 목표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실천이다. 모든 신비들이 행위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행위를 향해 명령하고 있다. [신학에서] 아무 것도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예배를 가져오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이론적이고 실천에서 멀리 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론이 실천과 관련이 없으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요 18:17: 고전 13:2; 딛 1:1; 요일 2:3, 4; 딛 2:12.72)
멀러 박사에 따르면, 신학의 체계를 실천적인 것에 대한 강조를 가진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묘사하려는 이러한 주요한 결정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암시들과 일치한다.
개혁신학은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노선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나 “영원히 복되게 사는 것”에서 중생한 의지의 활동에 대한 강조와 함께 지성과 의지의 균형을 취하였다. 이렇듯 개혁신학에 있어서 신학은 실천적이거나 자발적인 요소에 대한 강조를 가진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지성적이고 자발적인 것이다.73)
하지만, 벤델린(Marcus Friedrich Wendelin)이 말한 것처럼, “참된 신학은 그 목표가 하나님의 영화와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다.”74)
개혁신학은 이론과 실천의 균형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중 다수는 참된 신학은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V. 맺는 말: 개혁신학의 신학관에 비추어 본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테오로기아 즉 신학이라는 용어 사용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그 용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말”이라는 두 의미 모두를 뜻할 수 있다고 했다. 신학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든, 하나님에 관한 말이든 두 경우 모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는 올바른 수행이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신학의 두 의미 중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를 좀 더 강조한다.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신학이 드러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인격이시기에 그분을 고정적이며 추상적이며 비인격적 개념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학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추상화하고, 고정시키며, 상대화시키는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영국 신학자들이 “theology”라는 단어보다는 “divinity”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신학보다는 종교, 즉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예배하도록 가르치는 좀 더 실천적인 가르침에 관심을 두었고,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실천적 관심이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게 계승된 것을 볼 때,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신학을 통해 종교의 실천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신학이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사변화를 경계하여 “divinity”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신학보다는 종교에 관심을 두고, 신학을 종교의 실천이라 여겼던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입장에 서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혁신학은 이론과 실천의 균형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중 다수는 참된 신학은 그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돌림과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명제는 영혼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는 ‘살리는 신학’ 즉 참된 신학은 단순한 지적 지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은 복음임을 천명하고 있다.
‘죽이는 신학’은 이런 실천이 없이 공허한 외침만 있는 신학인 반면, ‘살리는 신학’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스스로를 개혁하는 실천이 있는 신학이다. 따라서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실천적 신학을 지향했던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과 동일하며, 점점 더 사변화 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신학에 대한 반성에 근거하여 신학이 마땅히 서야할 자리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당위적 선언이다.
끝으로, 본문 중에 인용했던 퍼킨스의「황금 사슬」의 내용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 강조하며 그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앎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그것을 다시 곱씹으며 글을 맺는다. “신학은 영원히 복되게 살아감의 지식이다. 지극히 복된 삶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각 주
1)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정관” 중 ‘학회 창립 취지,’ 「생명과 말씀」3 (2011): 257.
2) Jong Hyun Chang, “Reformed Life Theology,” Life and Word 1 (2010): 10.
3)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정관” 중 ‘학회 창립 취지,’ 257.
4) Jong Hyun Chang, “Theology Is Not a Mere Science,” Life and Word 2 (2010): 9-22.
5) Jong Hyun Chang, “Reformed Life Theology,” 10.
6) Jong Hyun Chang, “Reformed Life Theology,” 11.
7) Jong Hyun Chang, “Reformed Life Theology,” 11-12.
8) Jong Hyun Chang, “Reformed Life Theology,” 16.
9) 장종현,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 「생명을 살리는 교육」(서울: 백석대학교 백석신학연구소, 2008), 156-157 & 159.
10)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벧후 1:20-21)” (제3회 개혁주의생명신학 포럼 자료집, 2010. 10. 25), 17.
11) 이경직,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기독교대학”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제42차 교수회의 발표 자료집, 2011. 6. 18), 63-64.
12)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생명을 살리는 교육」, 238-239.
13)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육」, 241-242; 그리고 idem, “성경이 답이다!,” 12.
14)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백석정신아카데미, 2011), 17.
15)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7 & 22.
16)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 18 & 33.
17)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sola)에 대한 해설」(백석정신아카데미, 2011), 7.
18)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2.
19)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3.
20)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4 & 20.
21) 이경직,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기독교대학,” 66.
22)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248.
23)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에 대한 해설」, 5.
24) 이경직,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기독교대학,” 66-67.
25)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241-242.
26) 장종현, “영원한 생명수 예수 그리스도” (제4회 개혁주의생명신학회 정기학술대회 자료집, 2011. 5. 21), 8.
27)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생명을 살리는 교육」, 211.
28) 장종현, 「개혁주의 5대 표어에 대한 해설」, 12.
29) 장종현, “착한 사람 바나바,”「생명을 살리는 교육」, 168.
30)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27.
31)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237.
32) 장종현,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 해설」, 18.
33)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242.
34) 이경직,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기독교대학,” 67-68.
35)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245.
36)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0.
37) 이경직,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기독교대학,” 68.
38) 장종현, “성경이 답이다!,” 11 & 15.
39)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Prolegomena to Theology, 2nd e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3), 152. 이후 이 책을 인용할 때는 ‘PRRD, 1:면수’로 적을것이다. 그리고 Richard A.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이은선 역 (서울: 이레서원, 2002), 141 참조. 참고로, 이 한글판은 PRRD [1st ed.]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7)를 번역한 것이다. 제2판은 초판보다 면수가 90면 가량 늘어날 정도로 증보(增補)되었다. 본고에서는 제2판을 인용하되, 가능하면 그에 상응하는 한글판 면수를 참고로 적는다.
40) Muller, PRRD, 1:153;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2 참조.
41)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3 vols.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1992-1997), I.i.2 (1:1); 그리고 Muller, PRRD, 1:153과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2 참조. Turretin의 책 영문판에는 참고 성구가 ‘벧전 4:11’로 수정되어 있는데, Muller, PRRD의 인용문에는 ‘벧전 4:10’로 적혀 있고,「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에는 ‘벧전 4:11’로 수정되어 있다.
42)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I.i.5 (1:2); 그리고 Muller, PRRD, 1:153과 Muller,「종교개혁후 개혁주의교의학」, 142-143 참조.
43) Franciscus Gomarus, Disputationes, I.i, in Opera theologia (Amsterdam, 1644); Muller, PRRD, 1:154 에서 재인용;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3 참조.
44) Antonius Walaeus, Loci communes, I, in Opera omnia (Leiden, 1643), p. 114; 마찬가지로, Abraham Heidanus, Corpus theologiae (Leiden, 1686), I (p. 1); Muller, PRRD, 1:154에서 재인용; 그리고 Muller, 「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3 참조.
45)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I.i.7 (1:2); 그리고 Muller, PRRD, 1:154와 Muller,「종교개혁후 개혁주의교의학」, 143-144 참조.
46) Muller, PRRD, 1:154;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4 참조.
47)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e, I, in The Works of That Famovs and Worthie Minister of Christ, in the Universitie of Cambridge, M. W. Perkins (Printed by Iohn Legat printer to the Vniversitie of Cambridge, 1603), p. 1, left column.
48) Muller, PRRD, 1:155-156;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50-151 참조.
49) Muller, PRRD, 1:156. William Ames,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 (London, 1642); John Yates, A Modell of Divinitie, Catechetically Composed (London: John Legatt, 1623); John Downame, The Summe of Sacred Divinitie briefly and methodically propounded; (London: W. Stansby, 1625; 1628); James Ussher, A Body of Divinitie (London, 1645); Edward Leigh, A Treatise of Divinity (London, 1646)와 A Systeme or Body of Divinity (London, 1654); 그리고 Thomas Watson, A Body of Practical Divinity (London, 1692)의 제목들을 참조하라.
50) Leigh, Body of Divinity, prolegomenon (p. 2); Muller, PRRD, 1:157에서 재인용.
51) Muller, PRRD, 1:157;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5 참조.
52) Muller, PRRD, 1:157. 여기서 멀러는 Leigh, Body of Divinity, I.1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5-146 참조.
53) Muller, PRRD, 1:158-159;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47 참조. 여기서 멀러는 Amandus Polanus von Polansdorf,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1609), Synopsis Libri I을 인용하며, Johannes Wollebius,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ae (1626), praecognita, I.i을 참조하고 있다.
54) Richard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s.v. “theologia archetypa” and “theologia ectypa.”
55) Muller, PRRD, 1:165-166;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58 참조.
56) Muller, PRRD, 1:166;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59 참조.
57) Ulrich Zwingli,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eds. Samuel Macauley Jackson and Clarence Nevin Heller (Durham, NC: The Labyrinth Press, 1981), 56-57; 그리고 Muller, PRRD, 1:166 참조.
58)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Embracing almost the whole sum of piety, & whatever is necessary to know of the doctrine of salvation: A work most worthy to be read by all persons zealous for piety, and recently published [1536 edition], trans. Ford Lewis Battle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ds Publishing Company, 1986).
59) Muller, PRRD, 1:167;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59 참조.
60) Muller, PRRD, 1:168.
61) Perkins, A Golden Chaine, I, in Works, p. 1, left column.
62) Festus Hommius, LXX disputationes theologicae, (Oxford, 1630), I.i; Muller, PRRD, 1:170에서 재인용.
63) Franz Burman, Synopsis theologiae et speciatim oeconomiae foederum Dei, 2 parts (Geneva, 1678; Den Haag, 1687). I.ii.4; Muller, PRRD, 1:173-174에서 재인용.
64) Marcus Friedrich Wendelin, Christianae theologiae systema maius (Cassel, 1656), I.i; Muller, PRRD, 1:174에서 재인용.
65) Polanus, Syntagma theologiae christianae, Synopsis Libri IX; Muller, PRRD, 1:169에서 재인용.
66) Muller, PRRD, 1:171-172;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167-168 참조.
67) Muller, PRRD, 1:340;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05 참조.
68) Muller, PRRD, 1:94;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85 참조.
69) Muller, PRRD, 1:341;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06-307 참조.
70) Muller, PRRD, 1:353;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53 참조. 멀러는 Petrus van Mastricht, Theoretico-practica theologia, qua, per capita theologica, pars dogmatica, elenchtica et practica, perpetua successione conjugantur, praecedunt in usum operis, paraleipomena, seu sceleton de optima concionandi methodo, 2 vols. (Amsterdam, 1682-1687; Utrecht, 1714; 1724), I.i.2를 인용하고 있다.
71) Muller, PRRD, 1:353;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21 참조.
72)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I.vii.15 (1:23); 그리고 Muller, PRRD, 1:354. PRRD, 1:354의 각주 182에는 “I.vii.25”라 적혀있는데, 오기(誤記)다.
73) Muller, PRRD, 1:354;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22 참조.
74) Alexander Schweizer, Glaubenslehre der Evangelisch-reformirten Kirche, dargestellt und aus den Quellen belegt von Dr. Alexander Schweizer… (Zűrich, 1844-1847), I, p. 145에 인용됨; Muller, PRRD, 1:354에서 재인용; 그리고 Muller,「종교개혁 후 개혁주의교의학」, 322 참조.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논평 김용국 침례신학대학교
I. 내용 요약
1. 개혁주의생명신학의 목적과 장종현 박사의 신학 이해
본 논문의 주제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추구하는 신학함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백석대학교 설립자이자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지도자인 장종현 박사의 신학 이해와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를 비교 분석하였다. 저자는 먼저 신학생 졸업자들은 초과 공급되지만, 성도 수는 줄어들고 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인 현상은 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교육이 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한국교회의 신학이 건전하게 나아가도록 돕고 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추구하는 바를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모토가 가장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보고 논문의 제목으로 삼았다. 저자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의 의미는 모든 신학과 행습의 최종적 판단자요 권위는 성경이라고 믿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성경보다 전통과 교리에 더 중점을 두고, 성령님의 역사(役事)를 평가절하 하는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신학 이해가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성도 수도 급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의 예로 성경 읽기와 쓰기를 정규과목으로 운영하며, 1, 2학차 수업 전 1주일 간 열리는 신앙수련회에 전 학생들을 필수적으로 참석시키는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을 소개했다. 또한 장종현 박사가 주장하는 ‘살리는 신학’을 설명하였다. 즉 신학이 발전하고 신학자가 많은 나라들이 교회가 약화되는 현상은 신학을 이성적인 학문으로만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신학’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신학자의 개혁은 절실한 것이며, 한국교회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논문은 장종현 박사의 신학 이해를 분석하는 데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였다. 장 박사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이성적 파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아는 지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지식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많은 선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 형태라고 하였다. 그리고 신학을 순수 이성적 학문으로만 여긴다면 성령님의 역할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장종현 박사는 신학을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한 신학,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신학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그러한 신학이야 말로 교회를 세우는 신학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2.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
본 논문의 두 번째 부분은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를 다루었다. 저자는 ‘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고대 이교도에서 먼저 사용하였던 것이지만,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경을 토대로 신학이라는 단어를 기독교에서도 사용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고 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투레틴은 신학(테오로기아)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말’을 의미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그것은 곧 신학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논문은 이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실천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즉 신학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예배하도록 가르침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요한복음 17장 3절, 이사야 53장 11절에 기초하여 “신학은 영원히 복되게 살아감의 지식이다”라고 하였고, 윌리엄 에임스는 “신학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영국인들은 신학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인 “divinity”를 “theology”보다 선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츠빙글리, 칼빈, 불링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을 ‘종교’(religio)의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종교는 하나님의 지식은 참된 예배와 경건으로 이끄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저자는 자신의 지도교수이자 세계적인 개혁주의 역사신학자인 리처드 멀러 교수의 연구를 참조하여 개혁파 정통주의도 신학의 실천적 측면을 선호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는 실천적 신학을 지향했던 개혁파 정통주의 입장과 동일하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학이 지향해야 할 “당위적 선언”이라고 결론지었다.
II. 공헌도 및 의의
1. 본 논문은 한국교회와 신학교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부분을 시의 적절하게 제시하였다. 보수주의, 개혁주의 신학이 주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가 최근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것은 성경과 성령님보다 교리와 신학에 지나치게 경도된 것이 한 원인이라는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신학은 늘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성령님의 활발한 역사하심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장종현 박사와 같은 대표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학함의 올바른 태도를 주장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한국교회를 위해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한국교회를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논평자 역시도 평소에 교회를 살리는 신학을 추구하였는데, 본 논문이 논평자의 입장과 동일하여서 깊은 공감을 느꼈음을 밝힌다. 참되고 건전한 신학은 교회 생명력의 기초가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교회 역사에서 분명하게 입증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점을 다시 새겨야 할 것이다.
2. 본 논문은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신학 이해를 기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개혁신학의신학 이해와 비교 설명함으로 학문성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에 관한 주제는 한국에서 최초로 소개한 것으로 여겨진다. 본 논문은 신학함에 대한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주장이 개혁파 정통주의의 입장이 같다는 것을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입증함으로써 새로 시작된 개혁주의생명신학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공헌을 하였다.
3. 논문에는 저자인 임원택 박사의 논문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지식이 잘 드러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의 실천적 의미를 중시 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기독교’가 ‘Christianity’가 아니라 ‘Christian religion’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제안사항
1. 논문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포함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합리적 명제와 이성적 변증을 신학의 목적으로 보았던 중세 가톨릭 신학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선포한 루터의 사상은 본 논문과 아주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2. 본 논문은 신학 이해와 관련하여 개혁주의생명신학과 개혁신학의 주장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논문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욕심을 더 낸다면 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신학과의 연관성에 대한 교회 역사적 고찰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지면상의 이유로도 이 주제를 포함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주제에 대해 혹시 임원택 박사가 다음 기회에 논문을 발표하면 한국교회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으며 기대해본다.
논평자는 본 논문을 읽으며 개혁신학의 신학 이해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특히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귀중한 논문을 써 주신 임원택 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임원택 백석대학교
논평 김용국 침례신학대학교/http://blog.daum.net/hopeyard/7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