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3-4/190129]사모곡-엄마의 追憶(1)
인자(이제) 세상 어디에서도 어머니를 볼 수도 없고, 그 친숙한 스킨십을 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땅 속에서 영원히 주무시고 있기 때문인 것을 왜 모르랴. 그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먹먹하다. 이 먹먹함은 대체 언제까지 갈 것인가. 어느 心理學者가 그랬다고 한다. 부모를 잃고 반 년이 넘도록 헤매면(멘탈 붕괴) 精神科治療를 받아야 한다고. 아-, 人間은 忘却의 動物이련가? 그럴 것이다. 歲月이 藥이라는 말이 어디 폼일 것인가. 하여, 나는 일부러라도 어머니와의 追憶을 생각하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소가 되새김질하듯 억지로라도 끄집어내 볼 작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헛헛함을 어찌 消化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어머니나 엄마라는 呼稱이 사실 낯설다. 내가 즐겨 부르는 호칭은 무조건 ‘어머이-’였다. ‘이-’ 다음을 길게 늘어뜨리지 않고 짧게 끊어야 제맛이다. 우리 어머이하고 언제 처음 만났을까? 記憶이 확실치는 않아도 네댓 살 때가 아닌가 싶다. 큰방에 놓인 베틀에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교대로 베를 짜고 있었다. 나는 베틀 밑에서 뒹글뒹글하며 저릅때기(껍질을 벗긴 삼대)를 갖고 놀고 있었다. ‘북’이 한번 왔다갔다하며 ‘철거덕’하는 소리가 나의 최초의 자장가였음이 틀림없다. 그 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그 다음은 언제였을까?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새벽, 어머니가 63년생 막내를 앞방에서 낳으셨는데, 눈을 뜨니까, 아버지가 새끼을 꼬며 새끼줄 중간중간에 검정숯을 끼고 계셨다. 이 두 가지 記憶은 정말 확실하다. 그러니까 그게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그 새끼줄(금줄)을 솟을대문에 걸쳤다. ‘이곳은 神性한 곳이니 雜鬼 등 삿된 것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無言의 象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나에게만 설빔이나 추석빔을 해주지 않았을 터인데, 예쁘장한 얼굴에 ‘꼬까옷(새 옷)’을 입혔다. 여동생 세 명이 ‘꼬까오빠’라 불렀다. 지금도 한 동생은 휴대폰에 ‘꼬카오빠’라고 내 번호를 저장해놓아 나를 感動시켰다. 당시는 農酒를 일꾼이나 머슴들을 위하여 집안에서 담갔다. 어느 때에는 누가 신고하여 團束이 나오는 바람에 罰金을 문 적도 있다. 단속반원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부엌앞 구정물통에 다 된 술을 아깝게 붓기도 했다. 그런데, 4∼5학년 즈음에 學校에 다녀오면 어머니는 나를 불러 술맛을 봐달라고 했다. 싱거운지, 물을 더 쳐야 되는지. 형들은 당시 중․고등학생들이라 客地(全州)생활을 해서 그랬을 것같긴 한데, 유독 나에게 맛을 보게 한 것이, 오늘날 나를 ‘술꾼’으로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원초적으로 엄마가 원인 제공을 했거나 엄마 잘못이라고 치부하는 ‘못된 버릇’인 엄마 탓하기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일곱 명을 낳았지만, 자식들을 살갑게 예뻐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원래는 애기들을 무척 예뻐하시는 분이었는데, 당신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 부족함을 할머니가 다 메워주셨다. 당신의 자식과 다름없는 일곱 손주들을 사랑으로 키워내셨다. 여름철 복숭아 장수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면, 보리쌀을 한 되박 내어 복숭아를 사주시곤 했다. 저녁 무렵 논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애들 버릇 나빠진다고 할머니에게 지청구를 주었다. 보리쌀은 반찬 등을 사야 할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한없이 야속했다. 할머니는 머리카락을 모아서, 다 떨어진 흰 고무신을 주면서 엿을 사먹으라고 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졸업식때 어머니가 ‘장한 어머니상’을 받고 부상으로 작은 鏡臺 하나를 받았다. 그때 얼마나 어머니가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예쁘기도 미스코리아를 뺨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를 비롯하여 동생 셋도 시골 초등학교에서 전주로 4∼5학년때 전주로 轉學을 해 都市살림이 시작되었다. 반찬 등 부엌살림을 대느라 어머니의 허리가 몇 배 휘어진 세월의 연속이었다. 왜 그 고마움을 모르겠는가. 보따리, 보따리, 보따리의 大行進이 시작된 것이다. 오죽하면 보따리 싸는 어머니 머리를 컴퓨터라고 했을까. 평생 동안 몇 개를 싸셨을까? 질리지도 않았을까? 자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싸고, 男負女戴, 주야장창, 通學汽車로 실어날랐다. 오직 자식들의 먹을거리를 위하여.
어머니는 말 그대로 ‘鐵女’처럼 일을 하셨다. 밤을 낮 삼는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고, 하루 25시간 일을 하셨던 것같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캄캄한 밤에도 뽕잎을 훑으려 가셨다. 뽕잎이 이슬을 맞으면 누에에게 줄 수 없으니까.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하셨을까? 족히 20가지는 되었으리. 돼지에게 구정물을 주면서도 “어서 먹고 빨리빨리 커 새끼들 많이 낳아다오” 혼잣말을 달고 다니셨다. ‘벼는 주인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큰다’는 말처럼 어머니는 막 익어가는 나락들에게 끊임없이 말 거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어머니는 형제 중 유독 나를 밭에 많이 데리고 다녔다. 논일은 ‘재사리(사고)’만 저지르는 ‘유월버섯’으로 烙印이 찍혀서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심부름이 재미있었다. 꺼렝이에 재를 담아 상뜸에 있는 솔밭에 뿌리는 것이 내 담당이었다. 솔은 부추가 표준말이겠고, 경상도에서는 정구지라 한다. 낫으로 솔 밑둥이까지 싹 베어내면 어느새 또 그만큼 자라는 게 신기했다. 핵교에 갔다오면 소 풀을 뜯어먹이거나 돼지에게 먹이려고 또랑 옆에 무성한 고마니를 망태에 가득 담아 오는 것도 내 일 중의 하나였다.
어머니의 소원은 아주 심플했다. 자식 중 한 명이라도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는데. 모두 선생이라는 직업을 마다했다. 오직 ‘7번’인 막내딸이 교육대학을 졸업해 선생님이 되었다. 나 역시 처음에 사범대학을 갔는데, 어거지로 1년을 다니다 서울의 모 대학 문과대학으로 編入을 했다. 77년 등록금이 30여만원일 때였다. 아버지는 “좋은 일이지만,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할까?” 한숨을 쉬었고, 어머니는 밤새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무슨 수로 가르친단 말이냐”며 눈물을 지으며 서울행을 극구 말겼다. 그렇게 나는 成人이 되어 어머니 품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