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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의 서문에서 전해 주었듯이,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천지를 창조하셨던 말씀께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신다. 복음사가 요한이 마지막 장인 제21장에서 진술하는 발현 기사들은 바로 하느님께서 여신 선천(先天)에 이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후천(後天)을 여시는 서막을 보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결문인 이 장을 제1장의 서문에 맞먹는 비중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더욱이 이 장의 24절에서 엮은 이의 맺음말이 나오는데, 이 ‘엮은 이’가 요한 사도가 아니라 요한 사도가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묵시록을 써서 보냈던 수신인이기도 한 소아시아의 일곱 공동체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실상과 묵시록에 대한 주해 및 묵상도 덧붙였다. 그리고 묵시록을 쓰기에 앞서 세 통의 편지도 썼으므로 이 장에 대한 해설, 즉 “말씀께서 교회를 창조하시다” 하는 대목은 요한계 문헌에 대한 총체적인 해설이 되었다. 요한은 소아시아 에페소에 와서, 서간을 먼저 쓰고 묵시록을 쓴 후에 유배에서 풀려난 처지에서 복음서를 썼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서문 이후 제1장에서 제20장까지 요한이 보도한 본문을 한 문장으로 간추리자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3년의 공생활 동안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21장에서 결문의 성격으로 진술하려는 바는,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창조와 복음화의 장을 상징하는 갈릴래아 호수에 모인 상황에서 향후 사도직의 풍성한 성과를 목격하였고, 특히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신앙과 사랑을 예수님께 고백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열한 사도를 주축으로 한 교회가 세워졌으니, 말씀에 의한 교회 창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에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페 4,24),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불림 받아 새 인류로 진화되어 나갈 것이다. 이 과정이 요한의 편지들과 묵시록에 진술되어 있다. 말씀이 창조하신 교회의 목표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이다.
일곱 가지의 표징으로 당신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교회 안에서 사기지은으로 당신의 부활하심을 드러내신다. 말씀으로 창조된 교회에 불리운 신자들은 부활 신앙으로 힘을 얻어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리라.”(요한 1,50; 5,20; 14,12)고 보증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야흐로 실현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부 출신 제자들로 하여금 예전에 물고기를 잡던 갈릴래아 호수에로 가라고 일러주시고 나서(마태 26,32; 28,7.10) 실제로 그곳까지 찾아가시어 나타나신 데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풍어기적에 그 의도가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사기지은에 의한 은총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창조된 교회에 의해서 선포될 복음이 어떠한 선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를 보여주시는 또 다른 표징이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과 사랑을 겸한 고백이 의미하듯이, 이러한 풍요로운 선교 성과가 가능해 질 수 있는 기반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20장의 보도에서 본 바와 같이 마리아 막달레나, 열한 제자와 토마스에게 발현하신 데 이어서, 일곱 제자에게도 발현하셨고 그 중 베드로에게는 독대하기도 하셨다. 이번에는 티베리아스라고도 불리우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발현하셨는데, 이는 그 제자들이 사도로서 선교 활동에 나서도록 독려하기 위한 뜻과 함께 그 사도단을 이끌 베드로의 지도력을 세워주시기 위한 뜻도 있었다.
21.1. 풍어의 기적(21,1-11): 선교 훈련
“제자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고기잡이에 나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 제자들이 어째서 다시 고기잡이 생활로 돌아갔느냐고 물어볼 만하다(大 그레고리우스). 제자들이 회개 이후에도 생업을 계속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아우구스티누스, 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당신이 누구인지 천천히 드러내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비유적으로 풀이해서, 그들은 옛 계약의 그림자와 예형들 아래서는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지만, 의로움의 태양께서 오시자 그물이 가득 찬다(암모니우스). 예수님께서는 자녀를 부르듯 제자들에게 ‘얘들아!’ 라고 하신다. 제자가 된 이는 자녀의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클레멘스). 그들은 주님께서 처음 부르셨을 때 곧바로 순종했듯이,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물을 던졌고, 말씀이 선포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급속히 늘어나듯이 많은 물고기가 걸려 올라왔다(아우구스티누스). 주님을 먼저 알아본 것은 열정적인 베드로였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두 사람 다 그분께 당신이 누구시냐고 감히 묻지 못했다. 그분께서 하느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히에로니무스).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그분을 알아보자 값진 진주를 손에 넣으려 물에 뛰어드는 사람처럼 호수로 뛰어들었다(시리아인 에프렘). 제자들이 뭍에 내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육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또다시 그들과 함께 물고기를 드심으로써 부활을 입증하신다(히에로니무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구워 주신 물고기는 그들이 잡아들인 것들의 맏물이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나 그레고리우스 교부의 문제의식을 이어가자면, 제자들이 티베리아스 호수로 가서 물고기를 잡은 일은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 다시 예전의 생업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한 이상 이제 더 이상 말씀을 듣기만 하는 제자가 아니라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가 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제자와 사도의 차이가 부활 신앙 여부에 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사도로서 행할 훈련을 받아야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있는 상처까지 확인한 토마스가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는 언급(요한 21,2)이 이런 정황을 뒷받침해 준다. 동료 중 어느 누구보다도 강직했던 그가 이제는 더 이상 의심을 버리고 예수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고,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면서도 미심쩍어 하던(마태 28,17) 그런 부류의 동료 제자와는 달랐다. 그는 성품이 강직해서 처음엔 의심을 품었다가도 그 의심이 풀리고 확신을 하게 되면, 더 이상 미적거리지 않는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그런 그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부활 신앙을 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부활 신앙에 따라 사도로서 분명한 의식을 지닌 채로 동료들까지 데리고 그곳에 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발현 기사는 앞선 발현 기사들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려고 또 다시 발현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 훈련을 시키시려고 나타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발현 기사를 보도하면서 갈릴래아 관련 내용을 생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빈 무덤을 지키고 있던 천사들을 통해 그들을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셨는데, 이를 마르코과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해준 바 있다(마르 16,7; 마태 28,7), 그 다음에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풍어기적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풍어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그들이 밤새 허탕을 치고 만 것도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개입하신 결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경험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못 잡은 상황에서 잡을 수 있게 한 일이 필요했던 기적이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못 잡게 만드는 일도 필요했던 기적이다.
이때에도 예수님은 겉모습을 바꾸어 낯선 사람으로 나타나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 발현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듣고서는 그들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곧바로 순명하였다. 그분께서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듯이,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하고 물어보신 것이고, 못 잡았다고 하니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요한 21,6)이라고 훈수를 두실 수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 제자들이 정작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나서 물고기가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 다음이었다. 요한이 먼저 이 풍어성과가 스승께서 일으키신 기적임을 알아차렸고, 이를 베드로에게 알리자, 베드로는 속옷이나 아래옷만 걸치고 있다가 뭍에 서 계신 예수님께 가려고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요한은 물고기가 153마리였다고 기록하는데, 이 수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베드로가 다른 민족들 모두(100)와 이스라엘의 선택된 사람들(50)을 그리스도께 바쳐 삼위일체(3)를 영광스럽게 한다는(암모니우스) 점에서 이는 성령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받는 은총의 충만함을 상징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런가 하면 이 수는 소수(素數) 17을 활용한 기하학적 삼각형을 이용하여 세상의 종말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물이 터지지 않은 것은 세상의 압력에 부딪혀도 부서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교회를 상징한다(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께서는 요동치는 세상을 상징하는 호수에서 단단한 뭍으로 오셨다(大 그레고리우스). 그런 다음 베드로에게 교히를 맡기셨다. 베드로는 잡은 물고기를 안전하게 뭍으로 끌어 올리는 이기 때문이다(大 그레고리우스). 뭍은 참된 안식이 있는 곳이다(大 그레고리우스). 공생활 초기에 물고기를 잡을 때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하신다. 교회는 오른쪽에 있는 이들이 죽은 뒤 내세의 해안에 안전하게 닿을 때까지 평화의 잠을 자도록 지켜 준다(아우구스티누스).”
이 풍어 기적 기사는 루카도 전하고 있는데(루카 5,1-11), 차이가 있다면 루카는 공생활 초기에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느라고 일으키신 기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부 출신 제자들을 사도로서 훈련시키시느라고 일으키신 기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복음사가가 모두 물고기가 많이 잡힌 정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에 “배가 가라 앉을 정도”(루카 5,6-7)라거나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는 정도”(요한 21,6ㄷ)라고 하고 있으니 표현의 차이는 약간 있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요한만이 잡힌 물고기의 수효를 밝히고 있다.
그리스어로 쓰인 요한복음서 원문에서 ‘백쉰세 마리’의 153이라는 숫자는 수효를 나타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처럼 뜻도 가지고 있다. 즉, 각 알파벳이 숫자를 겸하는 그리스어로 따지면 153은 ΙΧΤ(‘익트’)가 되는데, 이는 물고기를 뜻하는 ΙΧΤΨΣ(‘익투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문의 각 단어 첫 글자를 모아 놓은 것을 다시 줄여 쓴 약어이다.
그림 그리스어 ‘물고기’(ΙΧΤΨΣ)의 숨은 뜻
<출처: 이태형, The Science Times,
http://www.welcomehomeoc.com/thefish.htm>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153은 1에서 17까지를 모두 더한 숫자인데, 10은 십계명을 뜻하고 7은 성령칠은을 뜻한다고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물에 잡힌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선교의 결과로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 십계명을 지키고 성령칠은을 받게 될 사람들이라는 뜻이 된다. 또한 그리스어처럼 히브리어도 각 알파벳마다 숫자를 겸하는데, 153은 ‘베네이 하 엘로임’(בני האלהים)으로서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뜻인데, 뜻이 대동소이하다.
수학에서도 153은 특별한 수이다. 1과 5와 3의 세제곱을 합한 수인데, 이 수치대로 모형을 만들면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다 똑같은 정육면제(Cube)가 되는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지성소는 가로와 세로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로 만들었다(2역대 3,8; 에제 41,4). 그래서 유다인들에게 153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또한 1부터 17까지 더한 수이기도 한 153이라는 숫자에서 17은 10과 7을 더한 숫자이고, 그 당시에 10은 이방인들이 사용하던 십진법에서 완전한 숫자로 썼고 7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진법에서 완전한 숫자로 썼으니, 153은 완전에 완전을 더한 충만한 숫자가 된다. 그래서 153이라는 숫자에는 신기함과 완전함을 갖춘 수라는 의미가 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사도들이 전개할 사도직 활동으로 세워질 교회의 모습이다.
21.2. 성체성사(21,12-14): 전례 훈련
“의인들의 육체가 음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원해서 먹듯이, 예수님께서는 물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권능을 더 이상 그들에게 가리지 않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들이 물가에서 먹은 음식처럼, 고난받고 돌아가신 그리스도는 구운 물고기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일곱 제자가 참여한 이 식사는 모든 것이 완성에 이를 미래의 종말론적 잔치를 나타낸다(大 그레고리우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나타나셨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발현 횟수가 아니라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세 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모든 발현 사화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더욱 고대하게 만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일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음식을 드셨는데, 이번에는 물고기를 구어 오도록 해서 함께 음식으로 드셨다. 그레고리우스 교부가 일깨워주듯이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참여한 이 식사는 종말론적 잔치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거행하는 성찬례를 뜻한다. 성찬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관이시며 동시에 제물이시다. 사제와 신자들은 미사 중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이다.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이 굶주리게 되자 일으키셨던 빵의 기적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과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음식으로 드셨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그 기적이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 때는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었고, 지금은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육신의 허기만이 아니라 영혼의 허기, 즉 거룩한 가치에 대한 영적인 갈망을 예수님으로 채워주는 일이 성체성사이다.
그래서 성찬례를 주례하는 사제는 빵의 기적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순서대로(요한 6,11), 먼저 감사 기도를 올리고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며 신자들에게 나누어준다. 축성 기도에서 사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 때에 하셨던 그 말씀을 그대로 신자들에게 들려주는데, 강조해야 할 부분은 이것이다;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것이며, 이 계약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남기신 이 말씀에 교회는 두 가지 지향을 덧붙였다. 하나는 재림이요 나머지는 평화이다. 성체성사가 주님의 재림인 이유는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체성사가 주님의 평화인 이유는 성변화에서처럼 영성체를 한 신자들도 거룩한 변화를 지향하여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룩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림과 평화라는 이 두 가지 영적인 가치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현존이 의미하는 것이다. 이 현존이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다고 교회는 믿고 희망한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을 나누기 전에 다시 한 번 이런 의미를 기도하는 순서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 즉 ‘아뉴스 데이(Agnus Dei)’이라고 부르는 찬송이다. 여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또 그분을 닮으려는 메시아 백성의 사명이 겹쳐서 들어있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그분이 자비를 베푸실 때 신자들이 그분을 닮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그분의 평화를 받게 될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의 풀이대로, 이 모든 과정이 우리 신자들이 부활하는 현실이요 그 과정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교회가 하느님께 예배드리며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종교적 생활과, 성찬에서 받은 기운으로 세상에 평화를 건설함으로써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회적 활동에 대해 공생활 중에 예견하신 바 있다.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루카 22,28-3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생활과 그 뜻대로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활동이, 하느님을 모르는 생활을 하며 평화를 해치는 활동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적 기능을 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21.3. 교계제도 설정(21,15-19): 사목 훈련
공관복음사가들과 달리 베드로의 배신을 제18장에서 의도적으로 축소 보도했던 요한 복음사가는, 이 21,15-19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베드로를 조명하였다. 예수님과의 관계라든지, 베드로가 해야 할 역할이 이 본문에 강조되어 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베드로가 수행한 역할을 조명하는 데에는 요한의 이 보도가 적절하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훈련을 시키시고자 갈릴래아 호수로 찾아오셔서 풍어 기적으로 선교 활동의 성과를 미리 보여주신 후에, 베드로와 따로 독대하셨다. 공생활 중에도 제자들 중의 수제자로 임명하시고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기도 하셨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려는 이때 사도들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맡은 책임과 역할을 분명히 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한 일을 언급하지도, 그간의 일을 두고 그를 야단치지도 않으시며 온화하게 대하신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세 번 믿음의 고백을 한다(히에로니무스). 이로써 그는 과거의 죄를 씻고 세 번에 걸쳐 지위를 회복한다(암브로시우스). 베드로는 착한 목자에 의해 지위를 회복하며,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목자들과 함께 자신의 양들을 먹이도록 불린다(아우구스티누스). 그 양들이란 어린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며 이들은 장차 성장하여 성숙한 양이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양들도 보살피도록 불렸다(테오도루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사랑을 보이는 길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며(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착한 목자라면 하느님과 양들에 대한 사랑에서 그렇게 할 것이다(아프라하트). 사목자들의 우두머리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목자의 임무를 맡기실 때 그와 모든 사목자에게, 그 양 떼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임을 잊지 말 것이며(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잘못을 잊지 말고 양 떼에게 자비로우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신다(로마누스).”
교부들이 주목하는 대목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가 세 번의 질문과 세 번의 응답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는 다분히, 예수님께서 대사제로부터 재판을 받으시던 그 밤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죄과에 대한 보속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그를 처음 만나 제자로 부르시고 나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건만(마태 16,18), 이번에는 첫 질문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요한 21,15ㄴ) 하고 부르셨다. 이는 무슨 뜻이겠는가? 당연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 하고 묻지 않으시고, 다른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질문의 맥락에서 베드로의 죄책감을 달래주시려는 배려심이 물씬 묻어나는 물음이다.
사실 요한을 빼고는 모든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외면하였다. 그나마 도망친 다른 제자들과 달리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재판이 이루어지던 대사제 관저 마당을 얼씬거리다가 자신도 연루될까봐 겁이 나서 엉겁결에 스승을 부인했던 것이다. 비겁함에 있어서는 분명히 스승을 배신한 죄라 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아예 멀리 도망쳐 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조금 더 나았다. 이른바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처럼 알량한 자존심까지도 배려해 주시는 스승이 고마워서 더욱 몸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5ㄷ)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서야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ㄹ) 하시며 사목의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것이 사도단이 교계제도로서 설정된 기원이었다. 사목 직무란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신앙 고백을 전제로 해서만 부여받을 수 있는 책임이요 권한인 것이다.
“불안에 떨며(히에로니무스) 더욱 조심스러워진 베드로에게(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지 두 번 세 번 물으신 다음 그와 모든 제자, 곧 사목자들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세 번에 걸쳐 지시하신다(테오도루스). 그리스도의 양들을 돌보는 것은 그분을 믿는 이들의 신앙을 적절한 사목적 자세로 보살피는 것이다(베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그에 따라 세 번 믿음을 고백한 것은,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성화하고 강건하게 하기 위해 집전하는 세례 때 세 이름으로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과 통한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주님의 물음과 베드로의 사랑 고백은 자기 자신보다 하느님과 이웃을 더 중히 여기는 이타적 사랑이라는 사명으로 마무리된다(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는, 주님께서도 그러셨듯이 자신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어도 양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로 불렸다(아우구스티누스). 목자인 우리는 우리가 하도록 불린 일에서 그분과 똑같은 식으로 몸 바치지 않을 수 없다(大 그레고리우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진 이 사목적 대화는 같은 물음과 같은 응답이 세 번이나 계속되었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의 신앙이 궁금하셔서 물어보셨던 과거와는 달랐다(마태 16,15). 이번에는 그가 지난 번에 스승을 세 번 부인했던 죄과를 씻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물어보신 것이었다. 마음의 부담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시려던 배려였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와 사목의 직무는 그저 진리만을 선포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시켜 주는 돌봄이라는 점을 강조하시려던 뜻도 있었다. 진리는 듣는 이들이 깨달을 때라야 비로소 선포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자가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언하는 행위만으로 사목이 종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눈높이를 청중의 수준까지 낮추어서 복음의 청중이 진리를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진리의 내용인 자비와 사랑이 체험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몸소 솔선수범하신 바였으나, 그 당시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만 배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도가 되어 예수님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하므로 이런 사목적 대화를 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받기를 갈망한다.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 그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테오도루스). 예수님을 부인한 죄를 눈물로 씻은(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는 죽음을 맞을 것이다. 죽음은 사목자와 그들의 목자들이 받을 궁극적 승리의 관이다(시리아인 에프렘). 베드로는 바오로 사도와 같은 시기 로마에서 네로 황제에 의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을 때 그 일을 완수한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일찍이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약속했ㄷ가. 그는 주님의 수난 때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나 자신의 구원자를 위하여 순교로 넘겨졌을 때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켰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전에는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지만 지금은 두려움 없이 실제 사명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아우구스티누스). 베드로는 이 부름에 응함으로써 예루살렘은 물론 온 세상의 교사가 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공생활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현장 실습도 두 번이나 시키셨고(마태 10장; 루카 10장) 복음선포란 십자가를 각오해야 하는 길임을 세 차례나 강조하신 바 있었다(마르 8,31-3; 9,30-32; 10,32-34).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목의 십자가란 수난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임을 더 명백하고도 구체적으로 강조하여 가르치셨다. 부활로써 죽음을 쳐 이기신 예수님이시니만큼, 그리고 스승의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하게 된 지금에서는 복음선포의 현세적 장애 중 가장 큰 장애인 죽음에 대해 가르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부활은 현세의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차원의 삶을 지금 여기서부터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21.4. 증언하는 임무(21,20-23)
베드로에게 순교를 각오하고 사목할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 것과 달리, 요한에게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에 비해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그것은 진리를 증언해야 하는 임무였다. 요한은 예수님께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은 이 요한복음서를 남겼으며, 에페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신자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의미에서 사목적인 서한과 종말에 담긴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묵시록을 남겼다.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셔야 하는 특별 임무도 부여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열한 사도들이 일생을 바쳐 선교하고 순교한 것과 달리, 요한은 가장 늦게까지 박해를 받으며 선교하다가 생을 마쳤다. 에우세비우스 교부는 요한도 순교자였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테오도루스 교부의 증언을 비롯한 교회의 기록과 전승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사제요 순교자, 교사였으며 지금 에페소에 잠들어 있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베드로는 이후의 역사에서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을 요한의 미래에 대해 묻는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 단락은 우리가 아는바, 주님께서 요한을 사랑하신 사실과 더불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사랑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장차 올 삶에서 실현될 사랑의 그림자일 뿐이다(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 또다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이번에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고통받고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요한은 예외인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순교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아우구스티누스). 이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측이 있었다(테르툴리아누스). 그러나 요한이 저서들은 그가 그런 약속이 있었다고 믿은 적이 없으며 그런 헛된 희망을 품은 적도 없음을 알려 준다(암브로시우스). 요한의 친한 친구 베드로는 요한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는 요한이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뒤에도 일흔세 해를 더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평화롭고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준다(테오도루스).”
21.5. 요한계 공동체의 증언인 요한복음(21,24-25)
“요한은 복음서를 여러 권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권만 썼다(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이 복음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사랑과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며, 그 사랑 때문에 복음서를 썼다고 밝힌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이 마지막 구절은 다른 사람이 덧붙였을 가능성이 있다(테오도루스). 아무튼 요한이 아첨하기 위해 복음서를 쓴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기적 사례를 뺀 반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은 일들도 기록하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기록할 수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너무 대단하고 그분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너무 많아 책 한 권에 다 담을 수 없었다(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그래서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와 함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저 위 도성의 문에서 서로 만날 날을 기다린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모든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이 복음서를 세심하게 연구하고 여기서 배운 것을 실천하자(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령의 수금(竪琴)인 거룩한 신학자 요한 사도의 복음서 주해가 이제 그 끝에 이르렀다.”
이 맺음말(요한 21,24-25)은 요한 복음사가가 쓴 것이 아니라, 요한이 지도하던 공동체 즉 요한계 공동체가 그의 복음서를 엮었음을 표시하는 서지(書誌) 사항인데, 이를 끼어 넣고 복음서를 마감하였다. 그들은 이 복음서가 자신들이 엮었으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즉 사도 요한이 쓴 증언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인데, 그 자신은 복음서에서 이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는 표현을 썼다. 겸손함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이름이다. 우리도 여기서 요한복음서의 역사와 신학을 간추려서 소개한다[출전: G. Segalla, 새로운 성경신학사전].
요한복음서는 28~30년에서 1세기 말 사이에 팔레스티나를 시작으로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에서 쓰여졌다.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예루살렘 공동체를 맡고 있다가 순교한 큰 야고보의 동생이다. 열두 제자 중에 가장 어린 막내였고 90~100세까지 살면서, 자신이 목격하고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되 자신이 깨달은 직관적 신비로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여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이것이 요한 전승이다. 해석의 초점은 두 가지인데, 신성을 반영한 예수님의 인격을 ‘말씀’으로, 신적 권능을 발휘하여 신성을 드러낸 예수님의 기적은 ‘표징’으로 해석하였다.
요한복음서의 역사: 요한 전승에 따라 이 복음서는 그리스어 생활권으로서 소아시아 최고의 수도였던 에페소에서 저술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개척하고 티모테오가 이어 받은 에페소 공동체를 물려받은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살면서 에페소 공동체를 커다란 공동체로 성장시키는 한편, 주변의 여섯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다. 그리고 이 일곱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유다인 출신이건 이방인 출신이건 그리스적 사유방식에 물들어 있었고, 디아스포라 유다인 회당과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고 있었던 데다가 영지주의적 이단들의 영향도 받고 있었으므로, 요한은 공관복음서들과 대동소이한 체계를 이어 받으면서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유다인들의 히브리적 사유방식을 바탕으로 하되 그리스적 사유방식을 구사한 것이 그것이다. 특기할 것은 강생의 신비를 부인하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용하는 이원론 개념을 복음화시켜 채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표현을 주제로 삼았으니 그것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그리스식 토착화 시도였다고 하겠다.
요한복음서의 신학: 요한 전승에 대한 해석의 초점이 ‘말씀’과 ‘표징’이라면, 이를 해석하는 관점은 세 가지로서 첫째 선재성(先在性), 둘째 초월성(超越性)이며 셋째 교회에 대한 창조적 전망이다. 첫째와 둘째 관점은 말씀에 대해서, 셋째 관점은 일곱 가지 표징에 대해서 적용되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으며(선재성),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세상으로 파견되신 분이시다(초월성). 세상에서 사시면서도,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시기 때문에”(요한 14,10-11) “한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요한 1,2)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계시하실 수 있다(요한 1,18). 그래서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하고 선언하실 수 있었다. 이러한 선재성과 초월성을 전제한 요한의 그리스도론은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앞세운 파스카의 신비를 역사적으로 전개한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론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으로서 격이 훨씬 더 높다.
교회에 대한 창조적 전망은 선재적이요 초월적인 말씀이 일으키신 표징들이 보증하는 것이다. 즉, 말씀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창조하시는 새 인류가 교회이다. 예수님의 표징들은 일회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선포될 복음이 성령의 사기지은을 통하여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인 영적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당신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되리라고 장담하셨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이 창조적 전망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부활하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여기에 요한의 교회론과 성사론이 담겨 있는데, 교회의 성사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성령의 사기지은에 따라 재현하고 계승하는 일이며, 이 성사들로써 교회가 새 역사를 창조하는 새 인류로 성장한다. 세례의 성사적 가치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데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그리고 성찬례의 성사적 가치는 세례의 완성으로서, 서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공관복음서가 성찬례의 기본적인 순서를 보도한 데 비해 요한복음서에서 이 순서를 생략하고 세족례를 보도한 뜻이 바로 이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이상으로 요한복음서 본문에 대한 주해를 마무리하는 하면서, 장을 바꾸어 요한복음을 엮은 요한계 공동체와 요한복음 전에 쓰여져서 기초 자료가 된 요한계 문헌인 요한 서간과 묵시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