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잘 다녀왔다.
제주 한바퀴 200K 울트라 마라톤.
제한시간 36시간.
나는 32시간 33분에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3월 13일의 제주도 그리고 심야의 해안가는 무척 추웠다.
그리고 2번의 밤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계속 달리는 서바이벌 대회였기에 엄청 졸립고 힘겨웠다.
극심한 고통과 추위 그리고 수면욕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고행 없이 어찌 심신의 수양과 감사가 있으랴.
그렇게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즐겁게 완주했다.
모든 일정을 잘 마치고 귀가한 지금, 나는 걷는 것조차도 무척 힘겹다.
그러나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자동차에 연료가 떨어지면 자동차는 바로 선다.
다른 방도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더 이상 한방울의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는 절대고갈.
그런 상황 속에서 육체와 영혼이 낱낱이 분리되고 해체되는 변곡점을 지날 때였다.
계속 기도하며 한 발 한 발 가다보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어디선가 밝은 빛이 내 앞길을 비춰주는 듯한 느낌을 받곤했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는 런너스 하이와 진한 감동, 그것은 극한의 처절함으로 말미암아 주저앉기 직전에 내 가슴 속에서 윤슬처럼 반짝였던 영혼의 인도였다.
그 덕분이었을까.
뜨겁게 박동하는 심장의 소망을 담아 이미 곤죽이 된 육신이었지만 한번 더 힘겹게 파이팅을 외칠 수 있었다.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 그 어느 비등점에서 새로운 영혼의 에너지를 불태우며 까닥까닥 전진할 수 있었던 그 지경과 극한의 한계를, 나의 짧은 필설로 어찌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표현 불가였다.
그것은 육신 너머의 신비로운 영적 세계였고 가슴 박찬 전율이었다.
이 점이 바로 사람과 기계의 차잇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였을까?
어둡고 추운 바닷길을 고독하게 질수할지라도 밤하늘의 별들과 쉼없이 철석였던 바다를 바라보며 감사와 찬미를 연방 고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건강이 있다는 것, 새벽 04시에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힘내라는 전화가 왔다는 것, 이틀 동안 "아빠! 사랑해요! 꼭 완주하세요"라는 아이들의 귀여운 메세지가 큰 힘이 되었다는 것, 제주가 품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온 폐부로 온전하게 느끼며 호흡할 수 있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겐 과분한 축복이었고 감사였다.
더 이상의 바람은 욕심일 터였다.
살다보면 누구나 가끔씩 어렵고 힘든 상황을 접하게 된다.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런 상황에 봉착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생 동안 어찌 좋은 날들만 이어지겠는가.
그게 인생이다.
그런 질곡을 피하지 말고 긍정적인 스피릿으로 통과하자고 기도했다.
그래야만 평소의 내 삶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것인 지를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았는 지를 다시 한번 뒤돌아 볼 수 있게 된다.
편안한 침대와 따뜻한 실내에선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삶의 보편적인 지혜다.
새끼발가락이 문드러지고 피가 터져 흰 운동화를 붉게 적실지라도 그런 처절한 고행의 문턱을 넘고자 애쓰는 이유는,
그런 고행 속에서 삶을 반듯하고 올곧게 인도해 주는 별빛 같은 감동과 준칙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그건 차라리 내 정신에 새겨지는 서원이자 값진 신념일 터였다.
그런 무형의 축복은 풍성한 식탁과 푹신한 소파에선 좀처럼 체득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힘들고 거친 광야로 나가야만 비로소 온 몸에 스며들게 되는 생의 은총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무튼 내겐 그랬다.
어쩌면 제왕의 처소에선 그런 시원적인 축복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말이다.
나만의 개똥철학이겠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전하는 무언의 인생 교훈이자 가르침이기도 했다.
"편안함을 구치 말라"
말로 가르치려 들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게 뻔했다.
부지런한 부모의 발자국으로, 의연하고 투명한 부모의 뒷모습으로, 말보다는 행동중심(무언의 가르침)으로, 적어도 20년 이상을 솔선수범으로 심어줘야 한다고 믿었다.
꼭 운동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식을 양육하는 부모의 입장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믿음과 실천으로 임했다.
어쩌면 자녀들 보다는 내 자신을 위한 더 갈급한 기도였고 간증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 땅을 떠나는 그 날까지 가능한 한 편안함을 구치 말며 아전인수가 아닌 헌신과 배려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
기도를 꼭 예배당에서만 하는 건 아니다.
100K는 일박이일 동안(토요일 오후 출발, 일요일 아침 대회종료), 200K는 이박삼일 동안(금요일 저녁출발, 일요일 아침에 대회종료), 깨어서 달리는 내내 외롭게 갈구했던 나만의 기도였고, 간절한 묵상의 시간이었다.
도전자의 심정과 겸손한 몸짓으로 스스로를 광야로 데려가는 삶.
그런 여정속에 신의 동행과 임재가 함께 할 것임을 믿는다.
GO OUT, GET BUSY !!!
오늘 하루도 힘차게 파이팅하시길.
아자 아자.
2004년 3월 15일.
제주 200K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