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 아래 두 번 멈춘 아이
― 엄춘길의 「장명등」과 두 겹의 주체성
― 윤동재
눈이 몹시 오는 밤이었습니다.
엄마 약을 사러 아이는 집을 나섰습니다.
먼데 장명등이 하나 켜져 있습니다.
아이는 그곳에까지 와서
손을 펼쳐 장명등 밑에 내어 들고
꼭 쥐고 온 돈을 고쳐 세어 보았습니다.
약을 사가지고 오던 아이는
또 장명등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아무래도 잊어버리고 온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옳지, 몇 알씩 먹는다더라.”
아이는 돌쳐 약국으로 갔습니다.
― 엄춘길, 「장명등」 전문(박목월, 『동시의 세계』, 서정시학, 2009, 133~134쪽)
눈이 몹시 오는 밤, 한 아이가 엄마 약을 사러 집을 나선다. 엄춘길의 「장명등」은 이 짧은 밤길을 두 연에 담은 동시이다. 박목월의 『동시의 세계』(배영사, 1963)에 소개되었고 2009년 서정시학에서 다시 펴낸 판본에도 실려 있으니, 늦어도 1963년에는 독자와 만난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두 겹의 주체성을 읽는다. 하나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작품 속 아이의 주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 행동의 뜻을 스스로 찾아내는 작품 밖 어린이 독자의 주체성이다. 60여 년 전의 동시가 이 둘을 함께 품고 있다는 점을 이 글에서 밝혀 보려 한다.
스스로 세고, 스스로 돌아가는 아이
우리 동시에는 어린이를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고 풀이하는 흐름이 있었다. 이른바 ‘짝짜꿍’이란 말로 대표되는 작품들은 어린이의 귀여운 말과 몸짓을 보여 주는 데 힘을 쏟았고, 어린이의 실수는 어른을 웃게 하는 소재가 되곤 했다. 그런 작품에서 어린이는 시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자기 행동과 그 뜻을 정하는 주체로 서지 못한다.
「장명등」의 아이는 다르다.
꼭 쥐고 온 돈을 고쳐 세어 보았습니다.
“옳지, 몇 알씩 먹는다더라.”
아이는 돌쳐 약국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약국에 가는 길에 손에 쥔 돈을 다시 센다. 약을 사서 돌아오다가는 무언가 빠뜨렸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약을 몇 알씩 먹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약국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과정 어디에도 아이를 일깨워 주는 어른은 없다. 아이는 제 행동을 스스로 확인하고,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를 풀려고 가던 길을 바꾼다.
물론 약을 사 오는 일 자체는 어른이 맡긴 심부름일 수 있다. 작품은 아이가 어떻게 집을 나서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일을 맡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돈을 다시 세라고, 약 먹는 법을 다시 물어 오라고 시킨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일을 맡은 뒤 그 일을 해 나가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눈여겨볼 것은 이 작품이 아이를 실수 없는 존재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는 중요한 것을 잊는다. 그러나 잊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바로잡는다. 이 작품은 어린이의 주체성이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데 있지 않고,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할 일을 스스로 정하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낮추지 않는 말씨, 닫지 않는 결말
아이의 주체성은 서술 방식에서도 뒷받침된다.
눈이 몹시 오는 밤이었습니다.
아이는 돌쳐 약국으로 갔습니다.
이 작품의 바탕 문체는 하십시오체(합쇼체)이다. 하십시오체는 듣는 이를 가장 높이는 말씨이고, 동화가 어린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오래 써 온 말씨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십시오체를 썼다는 사실만으로 어린이를 존중하는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존중은 문법 형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씨가 어떤 서술 태도와 만나는가이다.
「장명등」의 화자는 아이의 행동을 기특하다고 칭찬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우스갯거리로 삼지도 않는다.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차분하고 정중하게 들려줄 뿐이다. 어린이의 작은 행동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만한 일로 대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하십시오체는 작품 속 아이와 작품 밖 어린이 독자를 함께 존중하는 말씨로 읽힌다.
이 태도는 결말에서도 이어진다. 작품은 아이가 약국으로 돌아가는 데서 끝난다. 엄마가 약을 제대로 드셨는지, 병이 나았는지, 아이가 칭찬을 받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아이의 행동을 효성이나 사랑이라는 말로 묶지도 않는다.
이 생략이 독자의 자리를 만든다. 작품 속 아이가 제 행동을 스스로 정하듯, 작품 밖 어린이 독자는 그 행동의 뜻을 스스로 헤아린다. 아이가 행동의 주체라면 독자는 해석의 주체이다.
박목월의 읽기, 어린이 독자의 자리
박목월은 『동시의 세계』에서 이 작품을 읽으며 눈 오는 밤 약을 사러 갔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작품 속 아이를 눈앞에 그려 보는 독자는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고 풀이한다. 그는 “‘어린 날이 그립다’는 말을 지은이가 외치지 않고 읽는 사람이 외치는 것”(박목월, 앞의 책, 136쪽)이 그림을 그리듯 쓴 시의 묘미라고 했다.
감정을 작가가 말하지 않고 독자가 느끼게 한다는 이 설명은, 「장명등」이 해석을 독자에게 맡긴다는 앞의 논의와 통한다. 다만 무엇을 보는가는 다르다. 박목월은 약을 사러 가는 아이에게서 지나간 어린 시절을 보았고, 나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아이를 본다. 돈을 다시 세고 약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정겨운 옛 풍경이기 전에, 아이가 제 앞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 가는 과정이다.
누가 읽는가도 다르다. 그리움은 어린 시절을 지나온 어른의 감정이다. 지금 이 작품을 읽는 어린이에게 어린 시절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이다. 어린이 독자는 그리워하기보다 작품 속 아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어떤 독자는 거기서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을 읽고, 어떤 독자는 제 일을 스스로 점검하는 태도를 읽을 것이다.
동시는 어른에게 어린 시절을 돌려주는 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지금 어린이로 사는 독자가 제 경험과 생각을 넓혀 가는 문학이어야 한다. 박목월이 말한 것이 독자가 스스로 ‘느끼는’ 효과라면, 나는 독자가 스스로 ‘해석하는’ 주체가 된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싶다.
같은 자리, 다른 확인
장명등(長明燈)은 대문 밖이나 처마 끝에 달아 두고 밤에 불을 밝히는 등이다. 오늘의 어린이에게는 낯선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 장명등은 시대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장명등은 두 번 나온다. 약을 사러 가는 길에 아이는 그 아래에서 손을 펴고 돈을 다시 센다. 약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같은 자리에서 다시 멈춘다. 이번에는 돈을 세지 않고 기억을 더듬는다.
멈추는 자리는 같고, 하는 일은 다르다. 갈 때의 불빛이 손에 쥔 것을 보여 준다면, 올 때에는 그 불빛 아래가 아이에게 제 기억을 돌아보는 자리가 된다. 이 되풀이를 거치며 장명등은 조명 이상의 것이 된다. 아이가 제 행동을 점검하고 다음 행동을 정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장명등이 아이의 문제를 풀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장명등은 그 자리를 밝히고 있을 뿐이다. 돈을 세는 것도, 빠뜨린 것을 떠올리는 것도, 약국으로 돌아가기로 정하는 것도 모두 아이다. 비추기만 하는 등불이 있기에 스스로 움직이는 아이가 더 또렷이 보인다.
오늘의 어린이가 읽는다면
오늘의 어린이에게 장명등 켜진 밤길은 낯설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있고, 어린이가 돈을 쥐고 혼자 약국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오늘의 어린이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 작품에 공감하지 못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학 작품이 오래 읽히는 까닭은 작품 속 생활이 지금도 이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독자가 낯선 시대의 경험에 비추어 지금의 제 삶을 새롭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맡은 일을 해내려 하고, 빠뜨린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바로잡으려고 움직이는 모습은 오늘의 어린이에게도 낯설지 않다.
동시를 쓰는 사람에게
이 작품에는 ‘사랑’, ‘효성’, ‘걱정’ 같은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자는 그 마음을 안다. 눈 오는 밤길을 나서고, 돈을 다시 세고, 약 먹는 법을 물으러 되돌아가는 행동이 그 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동시에서는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보여 주느냐가 중요하다.
시적 발견이 기발한 상상이나 낯선 비유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장명등」은 운율이나 비유를 앞세우지 않고 짧은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준다. 그 대신 장면을 고르고, 되풀이하고, 뜻풀이를 생략한다.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줄여 보면 그 구성의 힘이 드러난다. 눈 오는 밤 엄마 약을 사러 간 아이가 돈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약 먹는 법을 잊었음을 깨달아 약국으로 돌아갔다. 줄거리는 남지만 시는 사라진다. 같은 등불 아래 두 번 멈추는 되풀이도, 두 확인 사이의 차이도, 독자가 그 차이를 스스로 찾아내는 즐거움도 없어진다.
그러니 산문처럼 쓰였다는 이유로 동시의 가능성을 낮추어 볼 일은 아니다. 산문 문장도 장면의 선택과 배열, 반복과 생략을 거치면 동시의 자원이 된다.
맺으며
「장명등」이 끝내 묻는 것은 어린이를 어떤 존재로 그릴 것인가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보호와 가르침만 기다리는 미숙한 존재가 아니다. 실수도 하고 모르는 것도 있지만, 제 앞에 놓인 상황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 작품은 그런 어린이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눈 오는 밤 약을 사러 가는 평범한 아이를 보여 줄 뿐이다. 그 평범한 행동에서 어린이의 주체성이 빛난다. 장명등은 밤길을 밝힐 뿐이다. 그 빛 아래에서 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아이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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