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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영숙의 난정뜰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정
폴란드 아슈피치 수용소의 惡魔들
악마들의 희롱에 神은 눈을 감았다!
글 김광한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장소
우리가 잘 아는 위대한 영웅이란 자들의 뒤에는 수많은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찍기 알렉산더 대왕이나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를 피로 물들였던 사막의 유목민 징키스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들어섰을 때 양주(楊州)땅에서 겪었던 참혹한 주민들의 학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난찡(南京) 대 학살, 그리고 몇십년전에 전세계인들을 경악케 했던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의 국민 대학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범죄가 저질러졌다.
그 가운데 아돌프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태인 말살 정책으로 인한 6백만명이 넘는 유태인 학살, 그곳의 중심지였던 폴란드 땅에 있는 아슈비치 수용소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살인 만행이었다. 1940년부터 45년 사이에 히틀러와 그의 심복인 하인리히 히물러, 그리고 부관인 루돌프 헤스, 그들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서 유태인 말살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실행했던 아돌프 아히히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헤스, 이들이 저지른 역사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그곳에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은 없으나 그 흔적이 남아있어서 보는 이로하여금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우리 자신이 인간이란 것에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극악한 범죄를 보면서 과연 인간이란 것이 동물 가운데 가장 잔혹한 존재라는 것을 여실하게 느끼게 해주었다.동물은 동족을 결코 죽이지 않는다.인간만이 무슨 법을 만들거나 무슨 이상한 주의를 들고 나와서 같은 종족인 인간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죽이고 그 죽음을 즐긴다.
아슈피치 수용소의 정문에는 "노동은 자유를 준다"라고 써있다. 그러나 그 노동이란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했다.노동의 신성함을 합리화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노동의 결실은 기쁨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오직 죽음 뿐이었던 것이다.
*지옥의 현장
아슈피치 수용소는 수십개의 군대 막사로 되어있었다. 양쪽으로 배치된 붉은 벽돌건물 사이와 맨 처음 입구는 화장장이었다. 지금도 그 당시 처럼 굴뚝은 하늘을 향해있었다.그때와 다른 점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막사는 각기 숫자를 붙여놓고 유럽 전국에서 압송한 유태인들을 수용했다. 삼층으로 침대가 있고 그 침대는 협소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독립국가를 형성했지만 당시에는 유럽을 비롯해서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은 일정한 땅이 없었고 이렇다할 생계를 꾸려갈 기반이 되어있지 않아서 주로 상업에 종사하거나 고리대금 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신성한 노동에 의한 정당한 수입을 가치로 알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이런 유태인들의 생활방식은 어쩌면 미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 유태인들을 말살할 정책을 세우기 위해 참모진을 소집했다. 그 참모진의 하나가 아돌프 아히히만이었다. 아히히만은 자신이 수용소를 책임지고 괸리하면서 유태인 말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있게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곧 수용소를 짓는 일이었다. 여기에 루돌프 헤슿란 수용소장이 등장을 한다.그는 1900년에 태어나서 1947년에 교수형을 당할 동안 15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실로 인도해서 죽였다.그럼 왜 히틀러가 유태인을 극도로 증오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우선 그 자신이 정통적인 게르만인인가 하는 점이다. 학설에 의하면 그의 할머니가 유태인에게 강간을 당해서 아버지가 태어났고,(오스트리아) 모계사회였던 오슻트리아에서는 할아버지 존재보다 모계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여러명의 여자와 난잡한 관계를 맺었고 툭하면 아들인 히틀러를 학대 했으며 그 어머니는 유태인과 놀아났다는 이야기가 있다.그러나 그런 것보다 그는 정권을 잡으면서 늘 소련을 비롯한 좌익 세력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되겟다고 생각햇다. 소련의 레닌 역시 유태인이었고 유태인은 곧 좌익이란 공식이 성립되었으며 그들이 고리대금이라든가 비합법적인 상업에 의해서 독일인들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인종청소를 통해서 역사에서 유태인들을 없애버리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많은 국가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부하들에게 유럽 여러나라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한곳으로 모아놓기로 했던 것이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불가리아 등 그들 국가로 파견된 부학들과 주민들에게 유태인들을 신고할 것을 권했고 신고 당한 유태인들은 학력의 고하 재산의 유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조리 아슈피치와 그외 여러곳에 흩어져잇는 수용소로 집결 시켰던 것이다.
유태인들은 가족과 함께 나치가 명한 제한된 물건만 들고 들어와서 수용소내에서 집단 노동을 강요받았다. 그것은 자시늘이 잇을 수용소 시설을 짓는 것이었다. 감독은 충성스런 나치를 따르는 유태인이었다. 우리말로 소작인 감독, 마름이었던 것이다. 제한 된 가방안에는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돈과 금부치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수용소 직원들에게 압수가 되었다.그리고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다가 영양 실조로 죽거나 가스실에서 집단 학살을 당했다.
*3톤이 넘는 머리카락과 신발들
수용소안의 막사에는 재판소가 있고, 이 재판은 모조리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일에 게으른 자, 교수 학생 등 유식한 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태인들은 이 재판정에서 잠깐 서다가 곧 탈의실로 가서 옷을 홀딱 벗고 목욕을 시켜준다는 말에 따라서 가스실로 갔다.
옷을 벗은 채로 가스실로 간 유태인들은 커다란 방에 가득찬 사람들틈에 끼어서 시원한 물이 나올것을 기대햇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꽉 막힌 공간에 천장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뚫렸다. 치클론 B란 일산화 가스를 내 쏟을 공간이었던 것이다.마침내 이 가스가 분사가 되자 사람들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가스가 얼마나 독한지 죽기 전 30분 동안 너무 고통 스러워서 상대의 살을 뜯었고 이를 깨물어서 혀가 잘려져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30분 후에는 축늘어진 시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 괸리자는 이들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입을 벌려 금잇빨을 뽑거나 팔목에 찬 시계 등을 빼갔다. 잘려진 머리카락은 독일인 직물업자에게 넘겨졌다. 머리카락으로 신사복의 안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실제로 우리가 본 머리카락 저장소에는 수만명의 머리에서 잘려나간 머리카락으로 가득찼는데 모두가 하얗게 변색이 되어있었다. 가스의 독 때문이었다.그리고 유태인들이 신고온 신발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모두가 구두, 여자의 경우 하이힐이 많았다. 그 신발들의 숫자가 4만개가 넘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은 어린이들이 앙증맞은 신발들이었다. 이들은 어린이까지 무참하게 학살했고 어린이들을 생체 실험용으로 사용을 했던 것이다.그리고 어린이들 가운데 남자 아이들의 성기를 산채로 절단했다. 유태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 사진이 걸려있어서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엄청난 고통을 주는가. 그 순간에 신(神)은 어디가 놀고 있었는지. 예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아무도 없었다. 있다면 악마들의 농스럽고 죽음을 장난으로 여기는 자들의 즐겁고 유쾌한 얼굴들이었다.
의족(義足)과 보온병
우리의 눈을 끌게한 것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의족들과 또 다른 방에 쌓여있는 보온병들이었다.의족은 지체 장애인들이 보조로 달고 다니는 다리를 말한다. 나치 살인자들은 이런 불구자들을 의족을 떼어내고, 떼어낸 의족들을 산차럼 쌓아두었다. 물론 그 의족의 임자들은 한줌의 재로 하늘로 날아갔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우유를 주기 위한 보온병, 그 당시 보온병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만큼 유태인들은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그들에게는 불구자도 소년도 노약자도 없었다. 유태인이라면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이라면서 죽음의 대열에 세워두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이었고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악마들이었다.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또 다른 방에는 유태인들이 들고온 가죽 가방들이 역시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 가방안에는 앞서 말했듯이 돈과 보석들이 들어잇었다. 유태인들에게는 전재산이나 다름 없는 귀중한 가방이었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들어올때 물품의 무게를 제한 시켰기 때문에 귀중한 것들만 갖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 가방의 겉에는 누구의 것이라는 이름들이 적혀있었고 혹시나 분실했을 때 찾기 쉽게 전화번호까지 먹글씨로 쓰여있었다.그러나 그 가방의 임자들은 다시는 가방을 찾지 못했다. 수용소 관리자들의 손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거나 아니면 수용소 소장이 특별히 관리하는 장소에 재산으로 보관했기 때문이다.아이들의 젖병과 옷가지들이 널려있는 방에서는 금방이라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한줌의 재로 사라졌던 것이다. 남녀노소를 불문, 얼굴이 잘생겼거나 미녀이거나 이곳에서는 하나의 벌레밖에 되질 않았다. 수용소 직원 가운데는 유태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에 충성하면서 어떻게든지 목숨을 부지 하려고 동족을 배신한 자들이었으나 그들 역시 얼마후에 화장장의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다.화장장의 굴뚝에서는 24시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연기는 유태인을 비롯한 폴란드 군인들과 러시아, 체코 등지에서온 사람들이었다.그리고 같은 게르만 민족이라도 유태인의 피가 섞인 자들은 똑같은 운명을 맛보아야만 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포로가 되면 이곳 수용소로 와서 힘든 노동에 영양실조에 걸려 3개월 이내에 목숨을 버려야만 했다.
아사(餓死)감방
지하 일층에는 아사감방, 즉 굶겨서 죽이는 감방이 있었다. 10명씩 수용한 감방에서 탈옥한 자가 한명이라도 잇으면 훈련소장의 호명에 따라서 한명이 차출이 되어서 지하 일층의 아사감방으로 보내졌다. 이 감방에서는 한톨의 곡식도 나오지 않았고 미음조차도 없었다. 며칠후에는 뼈와 가죽만 남은 시신이 되어서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면 간수는 이 시신을 화장장으로 옮기는데 인부는 유태인이었다. 자신의 동족을 시신으로 옮기면서도 자신만은 살줄알았던 유태인들, 그들을 일컬어서 회색분자라고 했다. 간수보다도 이 회색분자들이 더 무섭던 것이다. 이들은 동족의 사정을 너무나 잘알기에 수용소장이 일부러 감시책으로 만들얺은 것이다. 옛날 머슴을 감독하는 마름과 같은 자들이었다.
폴란드 가톨릭 신부 막시밀리언이 나치에게 체포되어서 이 수용소로 왔다. 유태인은 아니지만 당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가장 영향력이 잇는 계층이 신부였기 때문에 붙잡혀 들어온 것이다. 콜베 신부응 매일 힘겨운 노동에 시달렸는데 어느날 밤에 동료인 수용자가 한명 탈옥을 햇다. 간수는 같은 방의 수용자를 집합시켜서 제비를 뽑아 아사감방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선발이 된 사람이 폴란드 육군 중사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의 처지식이 기다리고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콜베 신부가 나서서 자신이 대신 죽기를 자청했다. 간수가 콜베 신부를 바라보면서 어이없다는듯이 다른 사람들은 살려고 애우너을 하는데 당신은 죽기로 작정했냐면서 정신이 나간 것으로 치부했다.그러나 콜베 신부는 자신은 처자식도 없고 신부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다고 했다.그래서 그는 아사감방으로 갔고 일주일동안 살아있자 병원의사들이 페놀주사를 놓아 목숨을 끊었다. 그 콜베신부가 있던 방의 창틀에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 콜베 신부는 지금 성인(聖人)으로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앙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다.
질식(窒息)감방
또 다른 방은 질식 감방이라고 해서 숨을 못쉬게[만들어 죽이는 방이 있다. 두어평 되는 방에 수용자들을 몰아넣고 읹지도 못하게 만들고 결국 숨이 막혀서 죽게 만드는 지옥같은 방이었다. 마치 성냥통안에 든 성냥개피처럼 꼼짝도 못한채 서서 잇으니 누가 먼저 죽는지도 몰랐다. 이 시신들은 끌어내어서 화장장으로 데려가 태워버렸다. 화장장 곁에는 이른바 악명높은 총살의 벽이 있었다. 벽 앞에 수용자들을 끌어다가 총살을 시키는데 하루에도 수백명씩이나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하도 많은 총을 쏘아대면서 부터 그벽에는 많은 구멍이 생겼고 지금도 그 구멍속애서는 화약냄새가 난다고 했다.실제로 다가가서 보니 많은 총탄 구멍이 육안으로 보여서 당시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목숨이 이 장소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있었다. 폴란드 인 50만명의 목숨이 이렇게 사라졌다.
가스실을 당시의 사정에 맞게 재현해 놓은 방도 있었다. 천정에 뚫린 구멍으로 가스가 내려오면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막히고 참을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서로의 살과 혀를 물어 뜯어가면서 죽어간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 되어있었다.또 다른 방에는 빈 가스통들이 가득 놓여있었는데 하나의 깡통으로 2천여명의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이 독가스는 아히히만이란 자가 고안해논 것이라고 했다. 아히히만은 전쟁 종전후 잡혀 감옥에 수감됐다가 탈옥, 나중에 이스라ㅏ엘 모하드 조직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고 화장이 됐다. 하루에 수천명이 죽어나가면서부터 화장장의 가동은 24시간이 됐다. 그 냄새가 코를 뚫고 들어와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고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폴란드에서 행복하게 살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겪은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장래가 촉망이 되는 피아니스트인데 전쟁이 나자 피아노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는 독일군에게 끌려가 아슈비치 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중노동을 강요받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작업장 바깥에서 친근했던 여배우를 목격하고 사람을 놓아서 그 여배우와 남편에게 접근, 탈출을 하게 된다. 그 탈출 기간동안에 가족들은 모두 몰살이 되고 남은 것은 자신만이었다. 어느날 빈집에서 숨어있던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이 되어 다시 수용소로 가게 될 즈음 그 장교가 상대가 피아니스트란 것을 알고 그를 보호해준다. 그후 얼마 안있어 러시아군이 진입, 전세가 역전이 되어 독일군은 폴란드에서 철수하고 주인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후였다.
또 한편의 영화가 오래전에 있었다. 안네 프랑크란 소녀의 일기를 영화화한 것이 그것이다. 이밖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가 있었다.이 모든 영화들은 제작자가 유태인이거나 아니면 내용 자체가 유태인의 시각에서 쓴 것이다.그럼 왜 히틀러는 유태인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였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홀로 코스트를 먼저 알아야한다. 홀로 코스트는 전쟁의 피해자란 말인데 또 다른 의미는 대량학살, 불에 의한 살인 등을 말한다.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는 그가 1933년 1월 30일 총리가 된 지 1개월 만에 시작되었다. 유대인 소유 기업은 배척받아 곧 파산했으며 유대인은 지방정부와 법원,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3~38년에 이루어진 일련의 법령·몰수·대학살로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나치 독트린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유대인 혈통을 가진 수천 명의 독일 그리스도교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른크 법에 따라 유대인은 시민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다른 독일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탈 나흐드(1938. 11. 9~10) 대학살 결과 독일에 있는 모든 유대교 예배당과 유대인 기관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뒤 수천 명의 유대인이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고 독일 유대인의 재산 대부분은 가혹한 벌금과 기타 강제징수로 몰수되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은 더이상 시민이 아니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었으며 실제로 사업을 하거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또 토지를 가질 수도 없었고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는 사귈 수 없었으며 공원이나 도서관, 박물관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게토'(유대인 거주지역) 안에서만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1년 12세가 넘는 유대인 남자는 군수공장에 징집되었으며, 전화와 모든 공공 수송시설의 사용을 금지당했다. 또 6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은 '다윗의 별'이라 씌어진 노란색 배지를 달아야 했다.
여러 선전활동이 성공을 거두자, 나치는 반(反)유대주의가 모든 유럽 국가로 진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38년 9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는 독일의 반유대주의 종족법을 본보기로 반유대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1938년 오스트리아,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합병해 이들 나라의 유대인을 종속시켰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헝가리도 1938년 히틀러의 법을 모델로 하여 처음으로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했다. 곧 국왕 카롤 2세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1939년 11월 루마니아 유대인의 1/3 이상이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이 조치로 루마니아 유대인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유대인을 비롯해 유럽의 다른 억압받는 소수민족을 후원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회·정치 세력들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중부 및 동부 유럽 학생들은 오랜 전통에 따라 자유주의자와의 제휴를 거부했다. 자유주의 정당들 자체도 분쇄되거나 억압당했다. 교회의 저항이 있루마니아의 반유대주의는 1937년 12월 옥타비안 고가가 총리가 되어 일련의 나치 반유대주의 법률을 지지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었으나 무력했고 효과적이지도 못했다. 몇몇 신자와 고위 성직자들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 스스로 모색한 자구책으로 그들의 입지는 다소 나아졌다. 대다수가 이주를 희망해 1931~41년 미국에 간 사람이 16만 1,26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여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켜주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초 독일군이 연승을 거두자, 유럽에 거주하는 대다수 유대인은 나치와 그 위성국 치하에 들어갔다. 대서양에서 볼가 강,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적 권리를 빼앗겼다.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들 대부분이 게토와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당시 나치는 이미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함락한 뒤인 1940년에 구상된 '마다가스카르 계획'은 마다가스카르 섬을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관할 아래 수백만 명의 유럽 거주 유대인들을 재정착시키는 특별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국과의 평화 없이는 결코 실시할 수 없는 것이었고 독일이 러시아를 침략한 뒤에는 실용성이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그뒤 악명높은 반제 회의가 열렸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의 그로센반제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비롯한 15명의 나치 주요 관료가 모여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SS) 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주재로 '유대인 문제의 마지막 해결책'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 취해진 결정은 모든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동부에 있는 수용소로 이주시켜 그들을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일부는 철저하게 학살될 것이며(그러나 학살이나 처형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음) 그밖의 유대인은 거대한 노동부대로 편성될 것이지만, 소모적인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그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거나 집단학살수용소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대량학살 방법은 특별히 만든 가스실에서 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는 인근 화장터로 옮겨졌다.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400여 만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트레블링카·헤움노·소비보르·벨제크 등의 집단학살수용소에서 죽었다. 전쟁 기간에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 수는 총 575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특히 나치의 잔학행위에 의해 간접적으로 희생된 사람, 반(半)유대인, 유대인으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량학살계획은 효율적으로 실행되었기 때문에 만성적인 기아와 질병으로 기력을 잃어가던 희생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들이 가스실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유대인들은 소극적·적극적으로 저항했다. 덴마크·프랑스·이탈리아·불가리아 등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던 나라에서는 유대인을 숨겨주고 위조서류를 만들어주기도 하며 중립국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해줌으로써 상당수의 유대인을 구했음이 밝혀졌다. 즉 덴마크 유대인의 대다수는 비밀리에 스웨덴으로 집단이주했으며, 일부 프랑스 유대인은 스페인·포르투갈·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동부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농민의 반유대주의 전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유대인은 일반대중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한편 적지 않은 수의 비독일인이 학살운동을 실행하는 데 가장 야만적인 앞잡이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젊은 유대인은 폴란드·소련·리투아니아·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다양한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과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 유대인 게릴라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부대를 편성했다. 프랑스에서도 '마키'라는 특수 유대인 부대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점은 바르샤바·비아우이스토크·빌뉴스 등 폴란드의 주요 게토에서 엄청난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바르샤바에서는 한때 거의 40만 명까지 수용했던 게토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6만 명이 독일의 퇴거 명령에 불응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거의 무장도 안 된 상태에서 화염방사기와 장갑차, 탱크로 무장한 독일 정규군에 대항해 거의 1개월 동안 저항을 계속했다(1943. 4~5). 불행하게도 연합국 정부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함으로써 유대인을 구하는 데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쟁의 전기간을 통해 대부분 국가의 문은 소수의 피난민을 제외한 모든 유대인에게 닫혀 있었다.
유럽에서 전쟁은 1945년 5월 8일에 끝났다. 그뒤 몇 년이 흐르자 개인의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되었으나,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 사회가 겪은 피해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유대인의 희망은 이스라엘의 건설과 그 유지, 그리고 나치 전범의 재판 회부에 쏠리게 되었다. 홀로코스트 추모일은 이스라엘에서는 니산 27일, 그밖의 지역에서는 4월 19일 또는 20일이다. 이 날짜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시작된 날을 기념해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국민백과 참조)
전쟁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연합군은 뉘렌베그란 독일의 도시에서 전범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슈비치뿐만이 아니라 많은 수용소에서 무고한 유태인을 학살한 자들, 수용소장을 비롯한 히틀러의 후계자 괴링을 비롯해서 장관인 루돌프 헤스, 히물러 등 전쟁 당시에 서슬이 퍼런 살인마들이었다.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이들 모두가 가정에 충실하고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은 모범적 가장이었다는 점이다. 그럼 왜 이들이 끔찍한 범죄를 태연하게 저질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