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 2일, 우리들의 천국 / 박선애
장면 1. 초록색 세상으로 자전거 여행
금요일, 종례가 끝나고 다시 모였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앞 새로 난 길을 달린다. 식영정까지는 너무 가깝다. 애들을 이끄는 학생부장 쌤은 옆 동네 앞 정자나무 둘레를 돌더니 길 아래 들판 사잇길로 다시 학교 앞까지 갔다가 목적지로 향한다. 차 한 대 안 보인다. 자전거를 아직 못 타는 아이 두 명을 태우고 책과 음료수를 실은 영어 쌤 차만 천천히 뒤따른다. 날씨는 맑고 알맞게 따뜻하다. 바람은 시원하고 부드럽다. 사방이 반짝이는 초록색이다. 영산강 강변도로는 한산하다. 그래도 안전이 최고다. 자전가에서 내려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강물을 가까이에서 옆에 끼고 달린다. 금방 도착한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니 시야가 확 트인다. 영산강이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 산이 보인다. 언덕 아래는 초록색 풀밭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양귀비꽃 붉은빛이 더 선명해서 아름답다. 산도 들판도, 정자 주변 나무도 다 초록이다. 정자에 올라 음료수를 마시며 한숨 돌린다. 이 정자는 나중에 지은 쉼터인 것 같고, 식영정은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다. 가운데에 방 한 칸이 있고 삼면에 마루가 있다.
장면 2. 옛날 선비처럼, 다시 오늘의 학생으로 책 읽기
식영정은 한호 임연 선생이 1630년에 무안에 입향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려고 지어 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와 교류하던 곳이라고 한다. 400여 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도 김성호의 《생명 감수성 쫌 아는 10대》를 들고 이곳에 왔다. 세 모둠으로 나눴다. 여학생 네 명은 위에 있는 식영정 마루에 자리 잡았다. 남학생 여섯 명인 우성이네는 그늘진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남학생 다섯 명인 성원이네는 처음 모였던 그 정자에 머물렀다. 책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예측한 내용을 활동지에 써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이 끝난 모둠은 돌아가며 한 쪽씩 소리 내어 읽는다. 책 읽는 소리가 듣기 좋다. 잔디밭에 비스듬히 눕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예쁘다. 나는 행복이 가슴에 가득 차 눈, 입매로 흘러넘친다.
오전에 시험 보느라 머리 썼으니 금요일 저녁과 밤에는 많이 놀게 해 주겠다고 했다. 내 마음까지 읽을 줄 아는 현이가 그래도 독서 캠프니 책을 조금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한 시간을 계획해 놓았으나 놀다 보니 시간이 없어 30분만 읽었다.
토요일은 본격적으로 책을 읽었다. 모둠끼리 모여서 한 사람이 한 쪽씩 소리 내어 읽는다. 모둠을 나눈 효과가 있다. 자신이 읽을 순서가 금방 돌아오니 멍때리는 시간이 적다. 두 쪽 읽겠다고 욕심을 내기도 한다. 우성이는 자기 모둠 친구가 존다고 세워 놓았다. 내가 하던 대로 따라 한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더 조심해야겠다. 모르는 낱말, 새롭게 알게 된 것, 인상 깊은 부분, 질문 등을 활동지에 쓰려면 읽으면서 줄을 긋고 작은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하라고 일렀다. 몇 명은 착실하게 잘 따라 한다. 활동지에 바로바로 쓰느라 읽는 데 집중을 덜 하는 아이도 있다. 이도 저도 안 하고 읽기만 했다가 나중에 활동지 쓰면서 여기저기 뒤적이는 아이도 있다.
토요일 점심 전까지 다 읽기로 한 목표를 두 모둠은 이루었다. 성원이네는 조금 덜 읽어서 점심 먹고 쉬는 시간에 읽었다. 150여 쪽의 책 한 권을 모두가 끝까지 읽었다. 내가 제일 뿌듯해하는 것 같다. 오후에는 활동지를 쓰고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책이 청소년을 앞에 두고 말하듯 쓰여 친근한 데다 내용도 쉽고 흥미롭다.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고 나름대로 감동받은 부분도 있다. 생명을 대하는 자신의 생각, 태도가 이러저러했는데 어떻게 바뀌었다는 말을 들으며 아이들이 하루 만에 큰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장면 3. 먹는 즐거움
그동안 혼자 독서 캠프를 진행할 때면 점심은 식당에 가서, 저녁은 모둠별로 만들어서, 아침은 빵으로 간단히 먹었다. 이번에는 2학년 담임인 영어 쌤이 같이해 주겠다고 했다. 일을 아주 날쌔게 처리하는 데다 돕고 나눠 주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작년에 학교 행사하면서 도시락을 배달해서 먹었다. 크고 작은 플라스틱 찬통이 여러 개여서 쓰레기가 문제였다. 그때 크기에 맞게 착착착 포개서 양을 줄이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얼마나 야무지게 지도하던지 아이들이 꼼짝 못 하고 깨끗이 처리했다. 제대로 가르쳐 놓아서 그 후로도 잘하고 있다. 나는 그때부터 착착착 이** 선생이라고 부른다. 메뉴를 정하고 주문해서 사 오는 것까지 내가 힘들어하는 일을 다 맡아 주었다.
금요일 저녁 메뉴는 쭈삼이다. 양념한 주꾸미를 볶다가 대패 삼겹살을 넣어 익힌다. 아이들 열다섯 명에 졸업생 세 명, 영어 쌤과 나까지 스무 명의 식사를 척 해낸다. 애들은 맵다고 하면서도 국물에 볶은 밥까지 싹싹 긁어 먹는다. 토요일 아침, 영어 쌤은 미리 사 놓은 순대국밥을 집에서 가져온 큰 전기솥에 올린다. 다 같이 산책하고 왔더니 그 사이에 적당히 끓었다. 한 그릇 먹고 더 달라는 아이도 여럿이다. 점심은 서울 반점에서 먹기로 했다. 작은 면에 있지만 짜장면, 짬뽕, 탕수육 맛이 좋아 멀리서도 찾아온다. 이름값 한다. 영어 쌤은 먼저 집에 가면서도 식당에 전화로 미리 주문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장면 4. 캠프파이어, 놀이
저녁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운동장에서 영어 쌤은 화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피웠다. 나무를 산에서 주워다가 쌓아서 모닥불을 피우던 모습과 달라졌다. 학교 주변에 마른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도 장작은 사 오고, 그것을 앙증맞은 화로 안에 넣고 불을 피운다. 거기에 오로라 가루를 뿌려 불꽃 색깔을 꾸며 놓고 의자에 앉아서 바라본다. 불멍이라나. 앉아서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영어 쌤이 나눠 준 불꽃놀이 막대에 불을 붙여 노느라 신이 났다. 마시멜로를 막대에 끼워 구워 먹는다. 영어 쌤 덕분에 아이들이 새로운 것을 많이 해 본다. 그래도 모닥불 피워 놓고, 땅바닥에 앉아 노래 부르고 이야기하던 그때가 그립다.
누군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자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일어선다. 술래인 희성이는 운동장 앞쪽 끝에 있는 구령대 벽에 얼굴을 묻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나서 얼굴을 휙 돌린다. 반대편 끝에서 아이들은 술래가 보지 않을 때 살금살금 움직이다 고개를 돌리면 시치미 뚝 떼고 멈춰 있다. 어둠이 깔리는 운동장에 애들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고 정겹게 퍼진다. 귀하고 아름답다. 한 동네에 이만큼, 열다섯 명만 있어도 좋겠다.
어두워졌다. 어느새 하늘에 별이 많이 떠 반짝인다. 영어 쌤은 돗자리를 갖다 깐다. 아이들은 머리를 가운데 모으고 누워서 별자리를 찾느라 과학 시간에 배운 지식 자랑에 빠졌다. 나도 옆에 누워 본다. 등이 따뜻하다. 이렇게 별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불이 더 활활 타오르면 좋겠다. 작년 가을에 은행나무 잔가지를 쳐서 모아 놓은 것이 있어서 가져다 올렸다. 생각과 달리 있던 불도 꺼지려고 한다. 은행나무는 불땀이 나쁜 줄을 몰랐다. 포기하지 않고 박스를 찢어 부채질하는 아이도 있다. 나무는 타는데 불이 위로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 우성이와 다시 가서 이번에는 마른 향나무 가지를 찾아와 올렸다. 불꽃이 키보다 높이 피어올랐다. 누군가의 “우리 강강술래 해요.”라는 말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불 주위로 손을 잡고 선다. 가락은 안 맞아도 소리지르며 한바탕 뛰어놀았다.
도서관에 들어와서는 30분 책 읽고 또 놀았다. 남학생은 휴대전화로 하는 게임을 조금 했다. 휴대전화를 걷으니 아쉬워하면서도 여학생들과 도서관 한쪽에 있는 온돌방에 모여, 앉아서 하는 놀이를 한다.
장면 5. 마무리
마지막으로 1박 2일 책 읽기 활동을 한 소감을 짧게 말했다. 친구, 선후배와 놀고 함께 자면서 친해져서 좋았다. 밥이 맛있고 캠프파이어하고 논 것이 재미있었다. 다섯 명쯤이 계속 이런다. 2학년 은이가 좋은 책 한 권을 읽어서 뿌듯하다고 한다. 고맙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말하는 사람은 책과 관련된 활동이 좋았다는 말도 끼워 넣는다. 서로 행복을 느낀 장면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1박 2일이 천국이었다.
첫댓글 이렇게 멋진 분이 제가 아는 분이라서 기쁩니다.
1박 2일의 활동, 말은 쉽지만 정말로 힘들었을 겁니다.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서도 오롯이 기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