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
🌱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 창립
1920년 3월 20일 오늘 조선여자교육협회 창립 | |
🌱23년 방정환, 월간잡지 ‘어린이’ 창간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비둘기와 같이 토끼와 같이 부드러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면서 뛰노는 모양 고대로가 자연의 자태이고 고대로가 하늘의 그림자입니다.
거기에는 어른들과 같은 욕심도 아니하고 욕심스런 계획도 있지 아니합니다. 죄없고 허물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하늘나라! 그것은 우리의 어린이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까지든지 이 하늘나라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 세상에 사는 사람사람이 모두, 이 깨끗한 나라에서 살게 되도록 우리의 나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위하는 생각에서 넘쳐 나오는 모든 깨끗한 것을 거두어 모아 내는 것이 이 '어린이'입니다…"
- '어린이' 창간호에 쓴 창간사 '처음에'의 일부 -
1923년 3월 20일 소파 방정환(1899∼1931)이 어린이들을 위한 월간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신조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으며 이 문구는 매호마다 독자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이 처음 만들었다.
그 때까지는 동몽(童蒙), 아동, 소년 등으로 불렀다. 방정환은 어린이라는 말에 ‘늙은이, 젊은이와 동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았다. 기존의 윤리에 얽매여 어른들에게 종속되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
🌱29년 길림성 조선혁명당 조직(남경에서는 한국혁명당 결성
1929년 3월 20일 오늘 길림성 조선혁명당 조직(남경에서는 한국혁명당 결성) | |
🌱43년 소설가 현진건(1890-1943) 세상 떠남 | |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 5월6일 무기휴회
1946년 3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미국 대표 아놀드 소장(왼쪽)과 소련 대표 스티코프 중장이 개최 전 담소하고 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해방 후 곧 삼팔선을 기준으로 남측은 미군이 북측은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12월 16일 미국,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외무장관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2월 27일 4개항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1)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2)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4)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는 곧 대한민국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좌우익 모두의 반탁운동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좌익은 1946년 1월부터 당초의 주장을 뒤집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수용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46년 1월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을 거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됐다. 미국측은 아놀드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 중장이 대표를 맡았다. | |
🌱46년 한국독립당(30년1월25일 창당) 개편(위원장 김구, 부위원장 조소앙) | |
🌱52년 미 상원, 대일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비준안 승인
2차대전이 끝났어도 동아시아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에서까지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점령지 일본을 반공거점으로 삼아 소련과 중국에 대항할 반공벨트 구축에 나선 미국은 일본을 하루속히 전범국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국교를 회복하려 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1951년 9월8일 미국의 주도로 48개 연합국과 일본이 조인한 대일(對日)평화조약(일명 샌프란시스코 조약; 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이다. 각국의 의회 승인을 거쳐야 했지만 이는 형식일 뿐 미 의회 승인 만이 실질적인 효력이 있었다.
Treaty of San Francisco: September 8, 1951
1952년 3월20일 미 상원이 찬성 66표 대 반대 10표로 조약 비준안을 승인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은 승전국과 패전국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전환된다. 4월28일 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돼 일본은 6년 8개월 만에 연합국의 군사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쿠릴열도, 남사할린 등을 그들의 영토에서 제외시켜야 했고, 오키나와를 미국의 군사점령지로 계속 남겨야 했다.
조약이 발효되는 순간(일본시간 오후 10시 30분), 일본 전역에 사이렌이 울렸고 사원에서는 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출처 : 조선DB) | |
🌱56년 시인 박인환 세상 떠남 🌱58년 서울-제주간 비행항로 취항 🌱59년 육군 군단장급회의, 정군 방침 결정 🌱63년 윤보선 허정, 서울시청 앞에서 군정 연장 반대하는 산책 데모 | |
🌱64년 조중변계조약 (북한 vs. 중국) 발효
1712년 청나라는 서남쪽으로 정복전쟁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런데 '천지에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발원지를 경계로 삼는다'고 기록해 놓았다. 바로 이 '토문강의 발원지'가 분쟁의 씨앗이었다. 토문강은 청나라 사람들이 송화강 상류로 보는 발원지여서 두만강과 구분되었다. 토문강 발원지를 분계로 본다면 간도 일대는 조선령이 되는 것이다.
조선과 청나라는 1880년대에 백두산과 그 동쪽의 국경을 명확히 획정하기 위한 감계(勘界) 회담을 가졌으나, 회담은 모두 결렬되었다.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에 쓰여진 '토문(土門)'을 두만강의 동어이자(同語異字)라 주장, 조선측에 실제적인 증거를 들어 간도는 마땅히 토문강 이남, 즉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회담은 3차에 걸쳐 개최되었으나 청나라측은 자기의 불리함을 알고 마침내 이를 결렬시켰으므로 아무런 성안(成案)을 보지 못하였다.
1909년 9월 4일,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청나라와 일제(日帝)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여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를 그 상류의 경계로 정하였다. 간도협약은 당사자 자격 등에 있어서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무효인 조약이지만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조약의 효력을 물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국이 새로이 국경선을 정하기 위해 1962년 10월 12일 이 평양에서 체결된 조약이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다. 조중변계조약은 1964년 3월 20일 베이징에서 양국이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