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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물 문화재 인디아나존스들 (21회~25회[한국 국보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21. 세종시 나성동 유적 발굴한 이홍종 고려대 교수
- 1600년 전에도 호수공원이…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찾았다
24일 세종시 나성동에서 이홍종 고려대 교수가 백제 도시유적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5세기 백제 도시의 기반이었던 금강이 보인다. 세종=김경제 기자
“1600년 전에 거대한 호수공원이라니….”
2010년 10월 초 충남 연기군 나성리(현 세종시 나성동) 발굴 현장. 밤새 내린 가을비로 유적이 물에 잠겼다는 보고를 듣고 부랴부랴 현장을 찾은 이홍종(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58)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백제시대 도시 유적 한가운데 U자형의 거대한 호수가 주변 언덕 위 집터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비가 내리기 전에는 한낱 구덩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유구였다. 1.5m 깊이의 호수는 최대 너비 70m, 길이 300m에 이르렀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꼴이 마치 현재의 경기 고양시 일산호수공원을 연상시켰다.
[출처]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21회~30회)Ⅲ[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작성자 ohyh45
고지형 분석 결과 나성리 도시유적 내 토성을 둘러싼 옛 물길과 금강, 제천이 일종의 해자로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홍종 교수 제공
출토 양상도 이 구덩이가 도심의 경관용 호수라는 판단을 굳히게 했다. 당초 그는 이곳을 강물 근처 단구(段丘)에 있는 저습지로 보고 목간 같은 쓰레기가 잔뜩 쌓였을 걸로 봤다. 그래서 발굴조사원들에게 “유기물질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는데 정작 구덩이 속에서는 토기 조각 몇 점만 나왔다. 이홍종은 “도시의 핵심 경관인 만큼 호수를 깨끗하게 관리한 것 같다”고 말했다.
24일 그와 함께 답사한 나성리 발굴 현장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일부로 변한 지 오래였다. 상가건물들이 대거 들어선 가운데 도시유적 위로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지금껏 발굴된 백제 유일의 지방도시 유적은 그렇게 사라지고 있었다.
○ 도로, 빙고(氷庫) 등 도시 기반시설 즐비
나성리 유적은 백제의 지방 거점도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의 경우 폼페이나 헤르쿨라네움 등 여러 지방 도시가 발굴됐지만 우리나라는 발굴로 전모가 드러난 고대 도시유적이 별로 없다. 고고학자들이 지방도시 유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도성-거점도시-농경취락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수도 이외 지역 귀족, 서민들의 생활상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성리 유적이 흥미를 끄는 건 넓은 부지에 도로망을 먼저 설치한 뒤 건물을 지은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도로 유구 안에서 건물터가 깔려 있거나 중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나성리에서는 너비 2.5m(측구 제외)의 도로뿐만 아니라 귀족 저택, 토성, 고분, 중앙호수, 창고, 가마터, 빙고, 선착장 등 각종 도시 기반시설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이 거대한 도시유적을 지은 주체가 백제 중앙정부인지 혹은 지방 유력층인지를 놓고 학계 의견은 엇갈린다. 박순발(충남대 교수)은 나성리가 풍납토성의 구조와 흡사한 점을 들어 백제 중앙정부가 건설을 주도한 걸로 본다. 예를 들어 고지형(古地形) 분석 결과 풍납토성과 나성리 모두 토성 주변 수로와 옛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판 흔적이 발견됐다.
반면 이홍종은 “출토 유물이나 묘제가 백제 중앙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은 지방 유력층이 주도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세기 백제 중앙의 통치력이 영산강 유역까지 온전히 미치지 못했다는 임영진(전남대 교수)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제 중앙정부에 점차 복속됐으나, 일정 기간 지방 수장들이 반(半)자치를 누렸다는 것이다.
나성리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백제 토기. 이홍종 교수 제공
○ 첨단 ‘고지형 분석’으로 도시유적 찾아내
사실 나성리 도시유적의 존재는 발굴 5년 전인 2005년 9월 고지형 분석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고지형 분석이란 항공사진과 고지도 등을 통해 유적 조성 당시 옛 지형을 추정해 지하에 묻힌 유적 양상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연사된 항공사진들의 낱장을 비교하면 겹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를 3차원(3D)으로 재연하면 세부 지형의 높낮이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랜 침식, 퇴적으로 사라진 옛 물길(구하도·舊河道)이나 구릉의 위치를 알아내 주거지 유적의 존재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홍종은 고지형 분석을 통해 나성리뿐만 아니라 공주, 논산, 청주에도 백제 도시유적이 묻혀 있을 걸로 예상한다.
재밌는 건 고지형 분석을 통해 규명한 옛 물길을 따라 지진이나 싱크홀이 빈발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물길은 암반층이 상대적으로 얇아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고베 지진 당시 사망자의 97%가 구하도와 습지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학계는 5세기에 건립된 나성리 도시유적이 약 100년가량 존속한 뒤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6세기 중반 이후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쇠락의 원인으로는 고구려 남진과 자연재해 등이 거론된다. 이홍종은 “인근 곡창지대인 대평리 유적에서 강물이 범람한 흔적이 발견됐다”며 “홍수로 도시의 식량 기반이 사라진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김상운 기자]
22. 광주 월계동 ‘장고분’ 발굴 임영진 전남대 교수
- 열쇠구멍 닮은 ‘장고분’… 고대 韓日교류 비밀의 문 열까
일 광주 월계동 ‘장고분’ 1호분 앞에서 임영진 전남대 교수가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직사각형 모양의 구멍이 석실 입구다. 광주=박영철 기자
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장고분’. 사진기자가 띄운 드론이 1호분 위로 날아오르자 열쇠구멍 모양의 봉분이 모니터에 잡혔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봉토가 연결된 일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닮았다. 무덤 길이가 45m에 이르다 보니 지상에서는 모양을 가늠하기 힘들다.
장고분은 5세기 말∼6세기 초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고분을 발굴한 임영진 전남대 교수(61)는 “20여 년 전 처음 왔을 때 이곳은 농가와 논밭으로 둘러싸여 주민들도 무덤의 실체를 잘 몰랐다”고 회고했다.
○ 장구마을의 비밀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진행되던 1992년 12월. 지표조사에서 무덤 석실이 발견된 ‘장구촌(杖鼓村)’으로 임영진과 제자들이 현장조사를 나갔다. 전통악기 장구처럼 생긴 언덕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장구촌이었고, 임영진도 고분 이름을 한자 발음대로 ‘장고분’으로 지었다. 그가 목격한 장고분의 파괴 상태는 심각했다.
“봉분은 이미 절반쯤 사라졌고 그 자리에 민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석실은 남아 있었는데 오른쪽 벽 일부가 뚫려 있더군요.”
석실 내부에는 집주인이 가져다 놓은 감자 등이 저장돼 있었다. 여름에 석실 안이 시원해 농산물 창고로 주로 활용했던 것. 당시 집주인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 도굴이 돼 내가 살기 시작했을 때 석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미 도굴된 폐고분이었지만 학술적 가치는 높았다. 당시 한반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임영진은 발굴보다 보존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산업단지 시행자인 당시 한국토지공사 부사장이 이전 복원을 요구했지만 그는 “1600년 전 조성된 장고분의 역사적 가치를 지키려면 현지 보존이 원칙”이라며 버텼다. 결국 보존으로 결정돼 이듬해 5월 3일부터 발굴이 시작됐다.
○ 저습지에서 건진 보물
보존구역을 설정하려면 정확한 유구 범위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발굴팀은 봉분부터 파지 않고 주변에 트렌치(시굴갱)부터 팠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대박’으로 이어졌다. 봉분으로부터 7∼15m 떨어진 외곽에서 무덤 주위를 둘러싼 구덩이가 발견된 것. 고대 무덤에서 종종 보이는 주구(周溝·고분 주위를 두르는 도랑)였다.
9일 드론을 띄워 공중에서 촬영한 광주 광산구 월계동 고분(위 사진). 열쇠구멍 모양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다. 오른쪽에 있는 큰 고분이 1호분이다. 고분을 둘러싼 주구에서는 원통 모양의 분주토기(아래 사진)와 분주목기가 발견됐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임영진 교수 제공
주구 주변은 개흙투성이여서 발굴이 쉽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개흙이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해 나무 같은 유기물질이 썩지 않았던 것. 1.5m 깊이의 주구에서 다양한 목기(木器)들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토기와 목기의 형태, 색, 무늬 모두 독특해 또 한번 놀랐다. 특히 바닥이 뚫린 원통형 토기는 당시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봉분 주변을 장식하는 토기)와 거의 같았다.
“이 토기와 목기들은 일본 하니와를 한반도에서 재현한 겁니다. 장고분의 독특한 구조와 더불어 무덤 주인이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죠.”
○ 장고분 주인은 한민족인가 왜인인가
학계는 장고분 주인을 놓고 왜와 교류한 토착세력, 왜에서 파견된 유력층, 백제에 파견된 왜인 관료 등 다양한 학설을 제기했다. 임영진은 일본 내 정치 변동으로 인해 한반도로 망명한 왜인으로 본다.
그는 장고분을 비롯한 한반도 전방후원형 고분의 입지와 구조를 주목하고 있다. 5∼6세기 당시 영산강 유역의 중심은 나주 반남 고분 일대인데, 왜계 전방후원형 고분은 이곳에서 떨어진 외곽에 여기저기 흩어진 단독분 형태로 존재한다.
입지나 규모로 봤을 때 이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지배층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고분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어 교역 목적으로 일본에서 파견한 왜인으로 보기도 부자연스럽다.
임영진은 이 무렵 일본에서 야마토(大和) 정권과 이와이(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월계동 고분 등이 북규슈 무덤의 석실 구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한 마한은 북규슈 세력과 오랜 교류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망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라며 “다만 왜인들의 세력화를 막기 위해 각지로 분산시킨 것 같다”고 분석했다.
[광주=김상운 기자]
23. 경주 손곡동 유적 발굴한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
- 경주 경마장 부지에서 신라 숯-토기가마 무더기로 쏟아져
23일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에서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이 가마터 발굴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64기의 숯가마와 토기가마가 무더기로 나왔다. 경주=김상운 기자
23일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 경작 행위를 금지한다는 마사회 표지판 너머로 대나무와 억새가 수북이 자란 구릉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가마처럼 완만한 경사였다. 주변은 온통 황량한 겨울 벌판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답사에 나선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56)이 손가락으로 구릉을 가리켰다. “저기서 신라시대 숯가마와 토기가마가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당초 경마장 용지였던 이곳은 우리나라 발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가마터(요지·窯址)가 발견돼 200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이로써 1992년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던 경주 경마장 건설 계획은 취소됐고 유적은 보존됐다.
○ 미묘한 ‘흙색 변화’ 놓치지 않아
1997년 8월 초 손곡동 발굴 현장. 경주 토박이로 현장 책임자였던 이상준이 꽃삽과 대칼을 잡았다. 지표로부터 30cm 아래서 노랗게 변색된 흙이 동그란 형태로 발견된 것. 그는 순간 굴뚝임을 직감했다. 통상 가마 내부 벽체는 불에 닿은 정도에 따라 회흑색→노란색→빨간색 순으로 색깔이 바뀐다. 발화가 일어나는 가마입구(화구·火口)는 회흑색이 나타나는 반면에 연기가 나가는 연도(煙道)나 굴뚝은 불에 직접 닿지 않아 노랗거나 붉게 변색되기 마련이다.
[출처]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21회~30회)Ⅲ[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경북 경주시 손곡동 유적에서 발견된 ‘숯가마’(위 사진). 나무 장작을 넣는 측구가 길게 늘어서 있어 피리를 닮은 구조다. 근처 토기 폐기장에서는 동물 혹은 춤추는 사람 모양의 토우(아래 사진)들이 출토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지하식 가마는 굴뚝과 화구의 위치를 정확히 잡아내는 게 관건이다. 자칫하면 굴뚝과 화구를 잇는 중간 몸체(요체·窯體)를 발굴 과정에서 훼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는 굴뚝 크기와 형태를 감안해 2주에 걸쳐 주변 흙을 조심스레 파낸 끝에 검게 그을린 화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화구와 굴뚝을 중심으로 요체까지 신라 토기가마 1기의 전모를 드러내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 가마(47호 토기가마)는 손곡동에서 발견된 47기의 토기가마 중 유일하게 땅 밑에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반(半)지하식 가마들이다. 이상준은 “47호는 이례적으로 가마 지붕이 붕괴되지 않은 채 발굴돼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최고의 유구로 꼽았다.
이 가마가 제공한 정보는 다양했다. 우선 가마 내부 온도가 높아도 바닥이 굳지 않고 무른 이유를 알게 됐다. 가마에 들어간 토기들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 뿌린 모래가 화염이 바닥에 닿는 걸 차단한 것. 또 토기들이 가마 안에서 서로 엉겨 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 토기 받침을 넣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 가마 변천사 종합전시장
경주 손곡동 유적은 숯가마(탄요·炭窯)를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발굴 당시 전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숯가마는 울산 검단리와 경주 천군동 등에서 발견된 4기뿐이었다. 이들은 토기가마와 달리 평평한 데다 내부에서 토기가 발견되지 않아 숯가마로 추정됐을 뿐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손곡동 숯가마 안에서 숯이 발견된 것이다.
학계는 신라시대 손곡동에서 생산된 숯이 인근 경주 황성동 제철유적에 공급됐을 걸로 본다. 손곡동에서 발견된 숯은 백탄(白炭)으로, 흑탄(黑炭)에 비해 화력이 떨어지지만 연소 시간이 길어 제철작업에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손곡동에서는 숯가마와 토기가마뿐만 아니라 채토장, 공방, 토기 폐기장, 건조장, 도공 주거지 등이 한꺼번에 확인돼 고대 생산기술사 복원에 핵심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폐기장에서 출토된 100여 점의 토우(土偶)가 눈길을 끈다. 두 손이 뒤로 묶인 죄수 토우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 표현돼 있다. 또 같은 얼굴에 동작만 다른 10여 점의 토우는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주 노서동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제195호 ‘토우장식항아리(장경호)’에 달린 토우와 비슷한 것들이 손곡동에서 발견된 것도 주목된다. 이상준은 “토우장식항아리는 손곡동 가마에서 생산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격이 높은 기와건물터가 발견된 걸 봐도 이곳은 국가가 관리한 대규모 가마터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곡동 토기가마는 5∼7세기에 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200년에 걸친 시대별 토기가마 양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일본 나가노 현에서 손곡동의 7세기 중반 토기가마와 유사한 게 발견됐다. 이상준은 “신라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토기 제작 기술을 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24.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전용호 학예연구사
수세식 공중화장실-화려한 정원… 절터 아래 펼쳐진 백제 왕궁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가운데)과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오른쪽), 전용호 학예연구사가 9일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 내 백제시대 ‘왕궁 정원 터’를 둘러보고 있다. 이들 발아래에 있는 직사각형 돌이 석축 수조로, 조경용 괴석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이곳에 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번째 사진은 당시 정원을 상상 복원한 그림. 익산=박영철 기자
9일 찾은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은 이름에 걸맞은 위용을 자랑했다. 축구장 20배 크기(21만 m²)의 부지에 홀로 우뚝 솟은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이 멀리서도 보였다. 석탑 주변엔 1400년 전 궁궐터와 절터 흔적을 보여주는 초석과 적심(積心·기둥을 올리기 위해 밑바닥에 까는 돌)이 숱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을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60),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 전용호 학예연구사(43)와 함께 석탑과 금당, 강당을 거쳐 후원(後苑)으로 들어갔다. 사찰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옛 백제의 화려한 왕궁 정원이 펼쳐졌다.
얕은 구릉의 정원 터에서는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괴석(怪石)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길을 따라가자 직사각형 모양의 석축 수조가 나온다. 졸절 흐르는 물이 괴석을 지나 수조에 넘쳐흐르는 공경은 상상만으로도 운치를 더 했다. 최맹식은 “1992년 3월 왕궁리 유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왕궁 정원은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 백제시대 ‘수세식 공중화장실’ 발견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구.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곡식이 썩었더라도 이 정돈 아닐 텐데… 희한하게 구린 냄새가 참 심합니다.”
2003년 여름 발굴팀은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했다. 구덩이 밑 유기물 층에서 나무막대와 씨앗, 방망이 등이 출토됐는데 유독 냄새가 심했다. 발굴팀은 곡식이나 과일을 저장한 구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자문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이홍종 고려대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구 양상이 일본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며 유기물 층에서 흙을 채취해 생물학 분석을 의뢰했다.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확인됐다. 삼국시대 공중화장실 유구가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된 것이다.
조사 결과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고, 내부 벽을 점토로 발라 오물이 새지 않도록 했다는 게 확인됐다. 특히 왕궁리 화장실은 첨단(?) 수세식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화장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경사를 이용해 오물을 석축 배수로로 빠지도록 한 것.
이와 관련해 ‘자’로 추정된 나무막대기가 실은 대변을 본 뒤 뒤처리용이라는 사실이 이주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른바 ‘측주((치,칙)籌)’라고 불리는 나무막대기로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된 도구였다. 왕궁리 화장실 터는 백제인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이 검출되지 않은 반면,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주로 감염되는 회충이나 편충이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2004∼2007년 발굴된 정원도 왕궁리 유적 중 백미로 꼽힌다. 특히 2006년 11월 발견된 어린석(魚鱗石) 2점은 이름처럼 물고기 비늘을 닮아 신비한 느낌마저 주는 조경석으로 유명하다. 어린석을 발굴한 전용호는 “무르고 연해서 처음에는 흙을 뭉친 걸로 착각했다”며 “각력암 계통인데 워낙 희귀해 백제 왕실이 중국에서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사찰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 있었다
전북 익산시 왕궁리 유적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박영철 기자
왕궁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28년 동안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우리나라 최장 발굴 유적이다. 그만큼 규모가 큰 데다 백제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도 지대하다. 오랫동안 발굴된 곳답게 유적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발굴 초기엔 유일하게 남은 지상건조물인 오층석탑의 영향으로 사찰을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됐다. 왕궁리가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遷都)를 단행한 증거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소수설에 불과했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익산에 세운 보덕국 터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왕궁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백제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3년 8월 최맹식의 목탑 터 발견이었다. 그는 당시 오층석탑 동쪽, 지표로부터 1m 깊이에서 목탑을 올리기 위해 목봉(木棒)으로 땅을 다진 흔적을 찾아냈다.
이어 목탑 터 아래서 백제시대 왕궁 건물 터를 추가로 발견했다. 왕궁을 지은 뒤 어느 순간 이를 폐기하고 목탑을 올렸다가 또다시 이를 허물고 석탑을 지었다는 얘기였다. 최맹식은 “왕궁 건물 터를 파괴하고 중심부에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걸 감안하면 통일신라 이후 사찰이 조성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왕궁리에서 궁장(宮墻·궁궐을 둘러싼 담장)과 더불어 2000년대 이후 대형 정전(正殿) 터와 정원, 공방,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잇달아 발굴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 조성된 사실은 확실히 굳어지게 됐다.
익산=김상운 기자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5.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 남한 최초 발굴된 구석기시대 집자리… 日 식민사관 잠재우다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가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깃발이 꽂힌 장소가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로 1964년 1호 구덩이가 있던 곳이다. 공주=홍진환 기자
이달 18일 충남 공주시 석장리 유적. 나뭇가지로 엮은 막집 뒤로 수려한 능선과 강줄기가 뻗어 있다. 멀리 강가 공터에 ‘한국 구석기 첫 발굴지’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남한 최초 구석기 유적(1964년 발굴)으로 국사 교과서와 공무원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석장리 유적이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시리즈 기획취지에 따른다면 석장리 발굴을 주도한 파른 손보기 선생(1922∼2010)을 인터뷰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고인이 됐다. 그 대신 파른의 제자로 1969년(당시 연세대 3년생)부터 5년 동안 발굴에 참여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와 현장을 찾았다.
48년 전을 회상하던 그가 강가 나루터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지금이야 번듯한 박물관까지 들어섰지만 그땐 도로조차 없어서 발굴 장비랑 식자재를 매일 배로 실어 날랐어요.”
○ 3만 년 전 구석기 집자리 발굴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파른 손보기 선생의 생전 모습(위 사진). 아래는 이곳에서 1968년 남한 최초로 출토된 주먹도끼. 석장리박물관 제공
1970년 4월 석장리 발굴현장 1지구 51번 구덩이. 삽으로 흙을 파내려 가던 연세대 박물관 발굴팀이 갑자기 긴장했다. 주변 흙과 색깔이 다른 토층이 발견된 것. 변색된 흙은 범상치 않은 동그란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기둥자리 흔적이었다.
현장을 지키던 파른의 지휘 아래 박희현 등 조사원들이 달라붙어 주변을 파자 총 5개의 기둥자리가 드러났다. 불을 뗀 자리도 같이 나왔다. 남한에서 구석기시대 집자리(막집)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막집에 살던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긁개와 밀개, 새기개 등도 한꺼번에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굴포리 유적에서 구석기 집자리가 발견됐다.
집자리는 수렵 이동생활을 영위한 구석기인들이 머문 공간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석기만 발견되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 집자리 위치와 내부 유물의 출토 양상을 통해 구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장리 1호 집자리 안에서 발견된 오리나무 재질 ‘숯 조각(목탄·木炭)’이 특히 중요했다.
파른은 국내 고고학계에서 처음으로 목탄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실시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측정 결과,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3만690년 전’ 유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0년대 석장리가 구석기 유적이 맞느냐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일단락됐다.
앞서 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고고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인 1962∼1963년 이곳을 답사한 앨버트 모어 부부였다. 이들은 마침 홍수로 무너진 금강 주변토층에서 뗀석기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연세대 방문교수였던 앨버트 모어는 1964년 봄 파른과 함께 석장리를 답사했다.
○ 식민사관 극복한 ‘한국 고고학 선구자’
“일본인의 식민사관에 의한 선사(先史) 편년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연세춘추 1964년 12월 7일자 기고문)
파른은 1964년 석장리 1차 발굴을 마친 직후 연세대 학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식민사학 극복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일제강점기 대학교육을 받은 파른은 민족의식이 강한 역사학자였다. ‘한반도엔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실 이미 1934년 함북 종성군 동관진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흑요석 석기, 동물 뼈)이 발견돼 1941년 나오라 노부오(直良信夫)가 논문까지 발표했지만, 일본 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선사시대 역사 왜곡은 비단 1930, 40년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2000년 전모가 드러난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의 구석기 유물 조작사건이 대표적이다. 후지무라는 1981년 미야기(宮城) 현에서 4만 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지만 거짓으로 밝혀졌다.
일본식 학술용어에서 벗어나 뗀석기 용어들을 한글화한 것도 파른의 공이다.
“발굴 기간 내내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조사에 몰두할 정도로 열정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1974년 석장리 발굴에 참여한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기억하는 파른이다. 파른은 본래 조선사를 전공했지만 석장리와 인연을 맺고 나서 선사 고고학자로 거듭났다. 영어와 일본어,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파른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해외 고고학 원서들을 섭렵했다. 목탄 수종(樹種) 분석과 꽃가루 분석, 토양 산도 측정,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 다양한 자연과학 분석을 국내 발굴 현장에 최초로 적용한 것도 그의 중요한 업적이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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