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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뜻을 설명해 놓은 여러 사이트를 아래에 올려놓았습니다. 두레의 뜻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의미를 명확히 하여 덧붙이면 두레는 군대조직이었습니다. 기를 세웠다는 것에서 풍물을 이용했다는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농사와 군대를 병행한 것 잘 아실 것입니다.
두레
두레는 우리 나라 삼한 시대 이래로 존재해 온 공동 노동을 위한 마을 성년 남자들 간의 작업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두레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강정택은 두레는 윤번의 뜻을 나타낸다고 하였고, 이병도는 두레의 어원이 원주(圓周)의 뜻인 '둘레', '둘려'에서 나왔다고 보고, 이것은 마치 영어에서 원주의 뜻을 가진 circle이 도당, 조직의 뜻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았다. 또, 그는 우리 나라에서 결사의 명칭인 도(徒), 접계(接契), 사(社)가 모두 둘레의 한역어라 하였다. 신용하는 "두레는 '두르다'의 고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명사이며 그 부사인 '두루'의 '전체'를 나타내는 명사"라고 하였고, '두레가 공동체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보았다. 김용덕은 신용하의 설에 전반은 긍정하고 후반은 부정하고 있다. 즉, 두레가 공동체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때 공동 행사를 의미하는 "두레났다."라는 말이나, 2~3인이 협동해서 하는 물푸기를 뜻하는 '두레질'이 곤란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http://khistory.new21.org/home/stu_da/sd2/2-34.htm)
향도와 두레
향도는 전통 시대의 여러 가지 공동 목적 달성을 위한 조직체이다. 본래는 불교 신앙 활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신도들의 결사체를 의미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향촌 공동체적인 조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향도는 자연촌을 기반으로 조직되고, 회음 의식(會飮儀式), 장례시의 부조 행위 등이 주된 활동 내용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향도의 향촌 공동체적 성격이 향촌 질서와 결합되고, 또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됨에 따라 조선 초기에는 국가 권력이 공적으로 향도를 단위로 역을 징발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두레는 한 마을 사람들이 협력하여 농사를 짓던 공동 노동 조직이었다. 두레에 의한 공동 노동은 모내기, 물대기, 김매기, 벼배기, 타작 등 경작 전 과정에 걸친 것이었고 특히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거의 반드시 두레가 동원되었다. 두레에는 기가 있었으며, 인접한 촌락의 두레와 두레 사이에는 조직의 선후와 세력의 우열을 따져 선생 두레, 제자 두레 혹은 형두레, 아두 두레라 하여 기로써 표시하였다.
(http://khistory.new21.org/home/stu_da/sd5/5-49.htm)
두레와 황두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 새로이 나타난 노동 조직으로 두레와 황두가 있었다. 두레는 농법의 변화에 따라 생겨났다. 즉, 남쪽 지방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이앙법을 하게 되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앙법은 집단적 모내기 노동력을 요구하였으므로 물을 댈 수 있는 일정한 시기에 한꺼번에 모를 내지않을 수 없었으므로 집중적인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김매기도 더운 철에 집중되기 때문에 뙤약볕 밑에서 한꺼번에 많은 논을 매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집중적인 노동력 투입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이 같은 이앙법은 단기간 내에 모내기와 김매기를 연이어 끝내야 했으므로 시간적인 긴박성 때문에도 품앗이류의 공동 노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 조직이 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자소작 농민들은 노동력 투입이 고도로 집약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두레를 강화, 발전시켜 나갔다. 대지주도 두레의 노동을 빌리지 않고는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없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농민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건갈이(乾葛)는 남쪽의 이앙법에 대칭되는 북쪽 서북 지방 특히 청천강 일대의 농법인데, 이 곳에는 공동 조직으로 황두 조직이 있었다.
황두 조직이란 마을당 김매기에 능숙한 장정 20∼30명이 작업 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만 수행하는 공동 조직인데, 이 중에서 신망 있고 경험 많은 황두꾼이 계수(좌장).부계수 등의 임원이 되어 황구꾼과 함께 노동하였다.
(http://khistory.new21.org/home/stu_da/sd6/6-42.htm)
두레
한국 농촌사회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공동노동(共同勞動) 가운데 하나. 주로 모내기나 김매기 때와 같이 단기간 내에 대규모의 노동력을 집약적으로 투입해야 할 때 관행(慣行)되어 왔다. 한국과 같은 수도경작(水稻耕作) 중심의 농촌사회에 있어서 교환노동(交換勞動)과 공동 노동은 농경활동에 가장 보편적인 노동관행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국의 농업노동상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두레는 품앗이와 함께 공동노동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품앗이의 경우, 일반적으로 노동의 교환형식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원초적인 의미는 <품〔勞力〕 앗이〔受〕>에 대한 <품 갚음〔報〕>, 즉 증답(贈答)의 관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두레는 공동적 내지 공동체적이고, 1년을 통해서 농번기 중에서도 가장 바쁜 이앙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명칭〕 두레는 지역에 따라 구성이나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여, 농사(農社)·농계(農契)·농청(農廳)·농악(農樂)·농기(農旗)·목청(牧廳)·갹사(醵社) 및 동네 논매기나 길쌈·돌개기음 등으로 불리었다.
〔유래〕 고대 농촌공동체의 경우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물론, 집단과 생산수단과의 관계도 견고한 결합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토지소유관계의 변화에 따라 점차 약화되었지만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립될 때까지는 잔존하였다. 따라서 공동노동조직으로서의 두레는 공동체적 유제(共同體的遺制)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집단성과 강제성을 농후하게 지닌다. 아마도 두레는 고대의 씨족공동사회에서 지역공동체의 호칭이었다가, 점차 인위적인 공동체로 변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구성〕 두레의 임원구성은 지역에 따라 상이하지만 대체로 전체 통솔자인 행수(行首)와 행수의 보좌격인 도감(都監), 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 규약에 따라 두레꾼의 행동을 감시하는 조사총각(調査總角), 기록과 회계를 맡은 유사서기(有司書記) 및 방목지의 가축을 돌보면서 논밭을 보호하는 방목감(放牧監)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행수와 도감은 덕망있는 사람 가운데서 선출되나, 그 밖의 임원은 소작농 혹은 머슴 중에서 뽑히게 된다.
〔종류〕 두레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성별, 발생의 선후, 세력의 우열, 세대별, 크기 등에 따라 구분된다. 즉 성별에 따른 남자두레와 여자두레, 발생의 선후에 따른 선생두레와 제자두레, 세력의 우열에 따른 형두레와 아우두레, 세대별에 따른 청년두레와 장년두레 및 크기에 따른 작은두레와 큰두레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작은 두레의 규모는 6∼10명 정도에 불과하다.
〔의의〕 두레는 협력의 합리성을 강조한 제도이고, 품앗이는 증답과 교환관념에 비중을 둔 제도이다. 나아가 두레에는 마을 성원들의 능력에 대한 평등관이 깔려 있기도 하다.최호
(http://yunli.pe.kr/윤리학습/다-라/두레.htm)
두레꾼
농촌에서 농사일을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기 위해 부락이나 이(里) 단위로 조직된 동회(洞會) 동제(洞祭)와 마찬가지로 씨족 사회 유풍의 하나로 보이는 이 조직은 주로 농번기의 모내기에서 김매기를 마칠 때까지 시행된다.
두레의 조직은 부락 내의 장정(壯丁)이 주가 되며, 참여 자격은 노동 능력에 따라 두레의 역원이 재가(裁可)한 후에 가입이 허락된다. 역원의 구성은 통솔자인 행수(行首) 1명, 그 보좌역인 도감(都監) 1명, 두레 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 1명, 두레 규약을 감시하는 조사 총각 1명, 유사(有司) 1명, 방목지의 가축으로부터 전답을 보호하는 방목감(方牧監) 1명으로 되어 있다. 행수, 도감은 자작 농민 중에서 인망과 역량이 있는자를, 그 외에는 소작농이나 머슴 중에서 선출 하였다.
두레 노동은 동네 전체의 이앙(移秧) 관개(灌漑) 제초 수확 등의 주요 작업에만 한정되는 수가 많았다. 작업에 앞서 수총각이 논두렁에 농기(農旗;두레기)를 세우고, 농악에 맞추어 작업에 들어간다. 농악은 일꾼들의 피로를 덜게 하는 동시에 서로의 일손을 맞춰 준다. 두레에 딸린 이 농악대는 작업이 있기 전 미리 마을을 돌며 전곡(錢穀)을 거둬들여 출역(出役)에 따라 분배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가 교량 가설 야학 시설 농악기 구입 등에 쓴다.
두레가 끝나면 풍농을 기원하고 술 노래 농악으로 마을 전체의 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공동 작업 조직도 현대에 들어와서는 개인주의적인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원래의 성격이 차차 없어져 가고 농촌의 공동 경작의 일부에서 약간 그 유풍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http://education.chonnam.ac.kr/~kimsi/study/두레꾼.htm)
두레
농촌에서 서로 협력하여 공동 작업을 하는 풍습, 또는 이를 위하여 부락이나 이(里) 단위로 구성한 조직. 부락·이 단위의 모임은 만두레라고 한다. 동회(洞會)·동제(洞祭)와 같은 씨족사회 유풍이다. 주로 농번기의 모내기에서 김매기를 마칠 때까지 시행된다. 두레의 조직은 부락 내의 장정이 주가 되며, 참여 자격은 노동능력에 따라 두레의 역원이 재가(裁可)한 후 가입이 허락된다. 역원의 구성은 통솔자인 행수(行首) 1명, 보좌역인 도감(都監) 1명, 두레작업의 진행을 지휘하는 수총각(首總角) 1명, 두레규약을 감시하는 조사총각 1명, 유사(有司) 1명, 방목지의 가축으로부터 전답을 보호하는 방목감(放牧監) 1명으로 되어 있다. 두레노동은 동네 전체의 이앙·관개·제초·수확 등의 주요 작업에만 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업에 앞서 수총각이 논두렁에 농기(農旗:두레기)를 세우고, 농악에 맞추어 작업에 들어간다. 농악은 일꾼들의 피로를 덜게 하고 서로 일손을 맞추어준다. 두레에 딸린 농악대는 작업이 있기 전 미리 마을을 돌며 전곡(錢穀)을 거두어 출역(出役)에 따라 분배하고, 일부는 적립하였다가 교량가설·야학시설·농악기 구입 등에 사용한다. 두레가 끝나면 풍농(豊農)을 기원하고 술과 노래, 농악으로 마을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http://www.history21.co.kr/kooksa/국사색인/용어설명/두레.htm)
풍물굿의 수난, 단절
다음 글에서 두레와 군대의 밀접한 관련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풍물굿의 수난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도 상상하듯이 대표적인 예가 일제시대일 것이다. 물론, 봉건시대에서도 풍물굿의 수난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풍물굿이 갖고 있는 공동체적요소 때문에(모여서 자신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보기에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위협하는 굿들을 항상 감시하고 지켜봤던 것이다.
1937년 원경하(元景夏)가 호남別遺御史로 임명되어서 전라도 부안에 들렀을 때, 두레의 농기(旗)와 풍물기(器)가 민중들의 반란시에 군용물(軍用物)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농기와 풍물기들을 몰수한 적이 있고, 1838년 '암행어사 남태량(南泰良)'이 두레에 대하여 임금께 보고를 하자. 임금이 "왜 농민들은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우의정 송인평(宋寅明)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할 때는 모두가 그 악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농악에 대한 국왕의 물음에 암행어사는 들에서 일을 할 때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어 사기를 올려 일을 하게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 임금이 두레의 농기(農旗)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냐고 묻자, 호남 암행어사는 농기와 풍물기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으로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나마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풍물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또 조선왕조의 지배층이 두레와 풍물에 대하여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민이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양반들은 농민들을 조종하여 세뇌하려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풍물을 하게하여 쌓였던 불만을 발산시켜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제시대 때에는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농민들이 단합하게 되는 풍물을 금지시켜 한국인의 공동체를 해산시킨 데 목적을 두고 벌어졌다.
1910∼1945년의 일제 강점기에는 화폐경제가 농촌사회에 가일층 침투하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영향으로 변화를 겪게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두레의 쇠퇴와 소멸, 공동체적 두레의 변질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수의 두레와 풍물이 쇠퇴하고 소식민지 정책의 압력하에서도 강인하게 존속하였다. 그 예로서 충청도 홍성군의 경우 1915년 197개의 두레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중 풍물을 하는 곳이 164개였고, 풍물을 하지 않는 두레는 33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전후부터는 한국의 장년들을 징용하고, 청년들을 징병했으며 곡물을 공출케 하였고 풍물기(징, 꽹과리, 나팔) 등을 헌품하게 하였으므로 풍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박탈되어 버렸다. 또한 6.25동란의 여파로 계속 사회적 불안과 서구문화의 영향 그리고 농촌의 생활환경 변화로 두레가 없어져 버림으로 풍물굿이 삶과 점점 유리되었다.
(http://e3000.hallym.ac.kr/~han/sunan.html)
첫댓글 두레는 수학에서 플랑크상수와 같은 것이라고볼 수가 있고 음악에서는 평균률의 기본상수음과 같은 것이고 수에서는 무리수에 해당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두레!!!여러 뜻이 있군요!!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