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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7
4월26일 [부활 제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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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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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fhM4mUW2pE&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3&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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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찬례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활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감명깊은 엠마오 길의 두 제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부분 한 부분이 다 소중하지만, 엠마오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떼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장면, 빵을 손에 받아든 제자들이 ‘앙!’하고 크게 한입 떼어먹자,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뵙는 장면이 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엠마오에서의 식사를 일상적인 식사 차원을 뛰어 넘는 높은 차원에서의 식사, 결국 성찬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빵의 뗌’은 곧 성찬의 거행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복음 24장 30절)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지만, 성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형상으로 현존케 합니다. 따라서 성찬례는 주님 부활의 가장 큰 표징이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시고 현존하신다는 가장 큰 표징입니다.
성체성사는 주님의 죽으심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도 기념합니다. 따라서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교회 공동체와 함께 머무르시는 것은 성체성사 안에서입니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는 성경과 성찬례!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들의 무뎌진 마음에 불을 지폈으며, 성찬례는 그들의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없애 주었습니다.
성경 말씀들이 부활 사건에 비추어 풀이되고, 성찬의 식사가 거행될때,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활 불타오르게 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 특별한 장면은 이천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방방곡곡에서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쉼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고귀한 몸인 성체는 오늘도 나눠지고 쪼개어져 우리 손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게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친히 빵을 떼어 나눠주신다 생각하고, 지극히 정성스런 몸과 마음으로 영성체에 임해야겠습니다.
무관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양한 분심이나 불신 속에 성체를 영한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는 그야말로 돼지 발의 진주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저 한 조각 밋밋하고 영양가없는 빵 한조각뿐일 것입니다.
굳센 신앙으로, 확고한 믿음의 마음으로, 이 성체가 그분 현존의 표지이자 그분 자체임을 굳게 믿으며, 이 성체가 나를 거룩한 영적 존재로 변화시키고 성장시켜줄 영약으로 여기며, 정성껏 영성체에 임할 때, 2천년 전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체험했던, 그 뜨거움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눈이 활짝 열려 우리 인생 여정 가까이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시는 주님의 존재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동료 이웃들 안에 항상 숨쉬고 살아계시는 주님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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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youtu.be/XkhL87bkOak
<성경공부는 스승이 전부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버스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흰 터번을 두른 시크교인 차장이 할머니를 부축하여 빈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시선은 차장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자 할머니는 내릴 때가 되었고 차장이 다시 할머니를 부축해 드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차장에게 인사하며 안쓰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얼마나 아플꼬. 그 머리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구려!”
어쩔 수 없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외도한다고 믿어버리면 모든 것이 그 증거로 보입니다. 그러니 부활한 예수님도 믿어야만 보고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나요? 어디서 예수님을 보셨나요? 바로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매일 만납니다. 그런데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아직 부활의 기쁨을 충만히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성체가 예수님임을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알 뿐, 믿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이미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알기는 해도 만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성경 말씀을 설명해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큼 당신 부활에 대한 확신을 지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성경을 통해 부활의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줄 스승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하시는 성경 말씀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 자체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것과 함께하신다는 ‘공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이 이전에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반발합니다. 이에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양대산맥은 스위스의 츠빙글리는 예수님께서 “기념하라!”라고 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냥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하면 된다는 ‘기념설’을 주장합니다. 성만찬을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에서 벗어나 그저 하나의 상징물에 불과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둘을 합의시키려 노력한 인물이 칼뱅입니다. 그는 “이는 내 살이다.”에서 “이다”에 집중하였습니다. 현재형이기 때문에 현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영적 임재설’이라고 말하며 둘의 중간에서 이 예식을 기념할 때 역사의 예수님께서 현재에도 영적으로 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경만으로’라는 기치로 가톨릭교회를 나온 대표적인 소위 세 개혁자들도 처음부터 성경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대립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성경을 해석할 만큼 완전히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이 스승이 된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성체가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하기는 하지만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뜨거워진 가슴으로 성찬례 때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례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빗나간 스승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제 나라의 환공이 어느 날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윤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들고 있다가 몽니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습니다.
“한 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습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어찌 바퀴를 만들고 있는 목수 따위가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은 대답했습니다.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바퀴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멍에 바큇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의 ‘수레바퀴 깎는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운 진리가 글 안에 다 담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글을 쓰신 분이 살아계셔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때야만 그것이 죽은 자의 찌꺼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로 성경공부도 스승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실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예수님의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죽은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보다 그 성경을 해석해주는 참 스승인 교회를 올바로 찾아야만 합니다. 그 성경해석자는 분명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스승이어야 합니다. 성경해석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해석을 통해 성체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끌어주는 스승이 곧 그리스도를 닮은 성경해석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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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오늘 전례에서도 파스카의 의미를 신앙의 빛에 비추어 알아들으려 하는 노력하고 그 부활체험을 증거하여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 즉 성령강림이 주님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한다. 즉 주님이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께 올라가 성령을 부어주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의 도달점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그것이 성경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알아듣고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 예로니모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예언하고 준비하는 구약성경 안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를 구약성경의 메시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 권위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시다. 부활 날, 두 제자가 실망에 가득 차 엠마오로 가면서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동행하며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때 제자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모두 무너져 침통하다는 말을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형당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나’ 되었다는 것은,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다(21절). 두 제자와 다른 모든 사람이 어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나타나고 있다. 강력한 메시아를 기대하였지만, 십자가의 일은 정반대의 일이었다. 여기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경이 어떻게 예언하였는가를 깨우쳐 주신다(25-27절).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 하느님 계획의 일부였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의 옳으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인들과 제자들은 성서의 말씀을 왜곡하고 편리하게 해석하여 참 의미를 외면함으로써 멋대로 해석하였다는 것을 꾸짖고 계신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성경의 참된 의미를 되찾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성경의 본래 의미가 되살아난다. 이렇게 신앙의 메시지로서 성경의 말씀은 오직 ‘믿는 마음’을 통해서만이 그 풍부한 의미를 다 드러낼 수 있다.
예수께서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절).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절)고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야기가 ‘그들은 그분이 빵을 떼어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신앙은 인간에게 파스카 신비를 열어 보여줄 뿐 아니라, 신앙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그 행위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부활과 만남을 전제하면서 동시에 그 부활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활의 원인이며 또한 결실이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8, p. 332).
우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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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유다인들이 봄 추수를 감사하며 하느님의 율법 수여를 기념하는 오순절에, 약속된 성령을 받은 직후 베드로 사도가 행한 첫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신앙을 요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시어 죽음의 힘으로부터 벗어나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약속된 성령을 부어 주셨음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복음 속 엠마오의 두 제자도 베드로의 이 확신에 찬 설교를 전적으로 지지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사실상 파스카의 첫 외침인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과 함께 공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어 그들 마음이 타오르는 체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제2독서를 통하여 우리 믿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뜨거운 체험과 약속된 성령을 받아 가지게 된 담대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침통한 표정과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 뻔하였던 지상의 나그네살이를, 마음이 타오르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희망이 되게 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부활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 일생 전체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하게 이야기해야 할 이유를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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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심정은 무척 복잡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19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것이라고(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21절) 그런데 예수님이 너무도 허망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큰 기대’가 ‘큰 실망’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제자가 믿음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왜 메시아가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고,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만일에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면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냥 “속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서 답답해한 것은, 그래도 아직은 믿음과 기대가 어느 정도 남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자들의 증언입니다.(22절-23절) 두 사람은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정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까?”라는 ‘반신반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를 바라는 희망과 믿어지지 않는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과 아직 확실한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한 마음이 섞여 있는 복잡한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두 제자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희망하면서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놀라운 소식이어서 그 소식을 믿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믿고 싶어 했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설명해 주신 다음에는 ‘머리로’ 믿기 시작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는 완전한 믿음을(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모습은, 막연한 기대감에서 희망으로, 희망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확신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나타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두 명’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두 제자는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 체험은 한 개인의 사적인 체험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한 공동체의 체험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증언은 공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제자들이었을까?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오백 명이 넘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어 하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신앙인을 상징한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8-2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여기서 “어찌 이리 굼뜨냐?” 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이해력이 부족한 것을 나무라시는 말씀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라는 말씀의 뜻은, “너희는 왜 성경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입니다. 성경 말씀을 믿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해력이 부족한 것 자체는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성경을 많이 읽었을 것이고,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아마도 그들은 ‘믿음 없이’ 읽었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은 안 믿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잘못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신 일은, 그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 주신 일이 아니라,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해 주신 일로 해석됩니다.
성경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만일에 ‘믿음 없이’ 성경을 읽거나 단순히 지식을 쌓을 목적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옛날이야기를 읽는 것이 될 뿐입니다. 또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해서 안 믿는다면, 그것도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아닙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도, 먼저 믿으면, 또는 ‘믿음으로’ 읽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데,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말씀들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두 제자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일을,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게 해 주는 최고의 체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을 깨닫고 믿었다면,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게 됩니다. 두 제자는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인도되었고, ‘사랑’을 통해서 ‘주님 현존 체험’을 했고,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확신’이 되었습니다. (두 제자의 체험은 오늘날에도 신앙인들 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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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배현하 안토니오 신부님]
<부활의 의미>
오늘 복음은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부활체험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부활 대축일을 지낸 지도 어느덧 2주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에게 부활이 무엇인지 다시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부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 사실에, 이 사건에 기뻐하고 있습니까? 잠시 여러분 각자가 이 물음에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의미! 저는 이번 부활축일을 지내며 이러한 물음을 제 자신에게 던져 보았고 다음과 같은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영원한 삶을 사는 존재'라는 메시지입니다.
단순히 70세, 근력이 좋아야 80세를 살고 그만두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세상 안에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존재이기에 세상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존재이기에 세상 것들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내 자신은 세상 안에서 그러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됩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 그러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사람은 세상의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분께서 세상 안에서 자유로웠듯이 우리도 그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고 부활의 선물이 아닌가 합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늘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삶이 세상적인 것 안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주님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이고, 부활의 선물을 제대로 누릴 수도 없을 것이며, 그분이 주시는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무덤 안에 묶여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세상 안에서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세상 안에서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증언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나눔입니다. 빵을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마치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주님을 뵙듯이 말입니다.
부활 - 자유 - 평화 - 증거
이것이 모두 하나인 것을....
주님 부활의 기쁨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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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김 새서 떠났다가 김 넘쳐 돌아오다.>
어느 집에 새 어머니가 들어왔는데 딸과 두 살 차이였습니다. 그러니 딸이 어머니라고 부르질 않습니다. 새 엄마는 의붓딸에게서 어머니 소리를 듣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딸과 잠을 자다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바지를 바꿔 입으면 딸이 ‘그게 내 바지고 이게 어머니 바지요’라고 말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바지를 바꿔 입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니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흐뭇해하며 딸이 깨기를 기다렸는데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딸이 한다는 소리가, “그게 내 바지고 이게 그 바지요.” 하더랍니다.
딸이 어머니를 어머니로 인정해야 비로소 어머니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 토마스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인정해야만 비로소 나의 구세주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스승님의 죽음은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에게서 한 자리 차지하려다가, 막말로 출세를 하려다가 맥없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만 김이 팍 샜습니다.
며칠 후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공천에서 떨어진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래서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분을 못 알아봅니다. 왜 못 알아봤을까요? 지나가는 나그네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스승이려니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동행자에게 함께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묵자고 하고 식사 대접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빵을 떼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니 그들이 비로소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은 네카타의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이라는 글입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꿈을 꾸었네. 하느님과 함께 긴 해안을 걷고 있는 그런 꿈을. 하늘 저 편에는 내 살아온 인생행로가 영상 되어 흐르고 있지.
장면마다 나는 보았네.
모래 위의 두 발자국을.
하나는 내 것, 하나는 하느님의 것. 내 인생의 최후의 장면이 나타났을 때 나는 돌아다보았네.
두 발자국을.
아!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모래 위의 발자국은 하나뿐이니...
나는 하느님께 말씀드렸네. 하느님 저는 모르겠나이다. 제가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하느님께서 저와 동행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련의 때에 그것도 여러 번 모래 위의 발자국은 하나뿐이니!
하느님은 말씀하셨네. 나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여, 시련의 때에 나는 결코 너를 떠난 일이 없단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하나뿐일 때는 내가 너를 안고 간 때문이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 인생의 동반자이시지만 세상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진다는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제자들처럼 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고 자선을 행하며 빵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는 꼭 미사 순서와 같습니다. 말씀의 전례와 봉헌과 성찬의 전례입니다. 그들은 실망과 좌절로 김샜었으나 이제는 김 넘쳐,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세속에서의 좌절과 상처받음, 힘들었던 것을 미사를 통해 주님을 모심으로써 떨쳐버리고 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 예화의 의붓딸처럼 하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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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용감 안젤로 신부님]
<행복하세요~!>
까르투시안 수도회는 1084년 브루노 성인에 의해 세워진 이후 현재까지 단 한 번도 개혁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수도회로 유명합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결코 변질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 수도회 수사님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 때부터 가졌던 수도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동경이 이끌어 낸 입회, 철저한 봉쇄 생활 중 자주 찾아들었던 답답함, 그리고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만들었던 희망과 그 희망의 근거가 되어 준 예수님의 손길에 대한 이야기.
결론식으로 던졌던 마지막 한 마디 “그래서 지금 행복합니다”라는 확신은 함께 있던 저를 전율시켜 버렸습니다.
부러움을 뛰어넘어 저 역시 그렇게 살고 싶게 만드는 어떤 영적인 교만함도 묻어있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찬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보았고 말씀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따르던 그분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22-24절) 사뭇 자신이 없는 듯 ‘~라고 하더랍니다’라는 식으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전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의 마음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알아보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린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 타오른 마음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하루 종일 걸어 멀어졌던 예루살렘으로 곧바로 돌아가 확신에 차서 동료들에게 그 소식을 나누기에 이릅니다.
그 동안 자신을 짓눌러왔던 모든 의심을 벗어버리고, 확신에 차서 목소리를 높여 남이 추하게 보건 말건 상관없이 벅차오르는 행복을 나누는 그 모습 말입니다.
한줄기라도 빛이 비추면 어둠은 순식간 자취를 감추듯 이제 사도들에게는 그들이 따랐던 예수님에 대한 의심의 빛이라곤 이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해 버리게 됩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분명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곳은 그들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 드러나는 바로 행복이 넘쳐흐르는 모습에서 일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든 적게 했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 많이 알든 적게 알든 상관없이, “지금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가”라는 질문은 2000년 전 제자들에게도,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신앙인으로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가치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자주 이 질문 스스로에게 던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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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자부심(自負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 또는 자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그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은 16강은 물론 4강까지 진출했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응원단을 보았습니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계 축구의 변방이었던 한국 축구가 강팀을 이기고 4강까지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함께 외쳤던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이라는 응원 구호도 생각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나라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 모델로 한국식과 중국식을 이야기합니다. 중국식은 완벽한 통제와 봉쇄였습니다. 한국식은 선제적인 검사, 투명성, 개방성, 자발성이었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으로 세계는 한국식 모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외국에 살면서 한국이 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이탈리아에 사는 교민들이 전세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탈리아는 확진자가 많고, 사망자도 많았습니다. 정부는 교민들을 위해서 전세기를 보냈습니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기 위해서입니다. 불안하고, 위험한 지역에서 가족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온 교민들은 자부심을 느꼈을 겁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받아 줄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까? 국민들도 정부의 정책과 감염 대책을 신뢰하고 있으며 돌아오는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는 안전하고 정확성이 높다고 합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가 한국의 진단키트를 수입하거나, 인도적으로 지원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단키트가 코로나19의 확산을 저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들으니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자괴감(自愧感)’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라고 사전은 정의합니다. 중독으로 고생하며 가족들에게까지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박, 게임, 술, 마약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한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괴감을 느낄 겁니다.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리옷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길로 예수님을 따라오게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다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배반하였습니다. 스승을 배반했다는 자괴감에 빠진 유다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있습니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심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회환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가슴 설레는 ‘엠마오’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지만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와 무덤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말을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자괴감에 빠져있던 제자들의 마음은 조금씩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사라졌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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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먹고 먹히다>
루카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먹고 먹히다>
먹겠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먹히시겠다는 그분이 오시니
먹히겠다고 사람들이 따랐지
먹히시겠다는 그분은
먹히겠다고 따르던 사람들에게
먼저 먹으라고 당신을 내어주셨지
먹히는 이를 먹음으로써 비로소
먹히는 이가 되어 먹힘으로서
먹히는 세상을 만들라 하셨지
먹히시겠다는 그분이 막상
먹겠다는 사람들에게 먹히니
먹히겠다고 따르던 사람들은 달아났지
먹히시겠다는 그분은
참으로 먹히시고 싶으셨고
먹히심으로써 당신을 드러내셨지
먹히시겠다는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은
함께 먹히겠다고 했으나 다만
여느 사람들처럼 먹고 싶었을 뿐이었지
먹히셨기에 없으셔야할 그분께서
먹히지 않으려 달아나던
먼저 먹었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지
먹히셨기에 영원하신 그분께서
먹혀 없어짐을 두려워하던 이들에게
다시 또 다시 기꺼이 먹히셨지
먹히지 않으려 달아나던 사람들은
먹히심으로써 영원하신 그분을
먹음으로써 마침내 먹히러 나섰지
먹히시고자 먹히셨던 그분을 먹고
바로 그분처럼 먹히고자 나선 사람들이
먹음의 세상을 먹힘의 세상으로 바꾸고 있지
먹는 사람 먹히는 사람 모두가 굶주린
먹음의 세상을 먹힘의 세상으로
먹히는 사람 먹는 사람 모두가 배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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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시인이 젊은 시절 파리에 머물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매일 정오에 젊은 여인 한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할머니가 항상 동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손만 앞으로 내밀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돈을 주면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것을 챙겨 넣을 뿐이었습니다. 릴케와 함께 산책을 하는 여인은 항상 동전을 준비하고 있다가 그 할머니에게 건네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릴케는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평소 따뜻한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여인이 이를 궁금하게 여겨 릴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저 할머니가 불쌍하지 않으세요? 왜 아무것도 줄 생각을 하지 않죠?”
릴케는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저 할머니의 손에 돈을 쥐어 주지만 나는 저 사람의 가슴에 무언가를 주고 싶소.”
며칠이 지난 뒤, 여느 날처럼 나온 릴케의 손에는 하얀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윽고 할머니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머니의 손에 장미를 조심스럽게 쥐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장미를 쳐다보았고 릴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 그의 손에 입을 맞춘 뒤 장미를 챙겨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할머니는 며칠 동안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동냥을 시작했습니다. 릴케의 연인은 할머니가 동냥을 하지 않은 며칠 동안 어떤 힘으로 먹고 살았을까 궁금해 했습니다. 이에 릴케가 대답했습니다.
“장미의 힘으로!”
하얀 색 장미는 꽃 가게에만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장미입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가 받은 장미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장미였습니다. 이 안에는 릴케의 따뜻한 애정과 사랑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릴케는 이 장미에 다음과 같은 마음을 담아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동냥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 뜻을 할머니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동안 눈이 가려져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릴케가 장미에 담아낸 애정이 할머니의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떠나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이들이 천사의 발현과 시신이 사라졌음을 증언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찬찬히 설명해주십니다. “내가 바로 그 예수다.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다그칠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제자들이 점차 주님을 알아보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저녁때가 되어 식탁에 함께 앉으시는 순간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식사 자리에서 마침내 극적인 사랑의 표지가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이 빵은 이전까지 그들이 먹어 온 평범한 빵이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 몸소 생명을 바친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즉 자신의 몸을 직접 떼어 나누어주시는 극진한 사랑의 징표인 것입니다. 이 만남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작용하시는 예수님의 활동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한 순간 강렬하게 들어오지 않고 천천히 우리의 마음을 적셔준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선언하지 않고 성경 전체의 역사를 눈이 가려진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모습이 이를 증언합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치 유령처럼 우리 삶과 동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의 주변에 계십니다.
주님이 느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의 한 복판, 때로는 주님을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이 가득한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사랑을 나누어 주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주님의 이러한 사랑이 미사의 성체성사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가 미사 안에서 행하는 의무적 관례가 아닌 주님의 몸을 직접 나누어 받는 사랑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사를 통해 다시금 신앙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이 초라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은 완벽한 해피 엔딩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손수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신앙을 일깨워 주시는 예수님,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며 신앙의 눈을 다시 뜨게 되는 제자들. 이 말고 더 이상 행복한 결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의 곁에 계시고 우리는 지난 어려운 시간을 보낸 뒤 이렇게 다시 모여 주님의 몸을 나누어 받을 수 있으니 어찌 오늘 기뻐하며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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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프랑스의 발명가 조제프 몽골피에가 세계 최초로 열기구를 하늘에 띄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 최초로 하늘을 나는 도구였지만, 불과 8분 정도만 창공에 있을 수 있었고 3km의 거리만 비행했기 때문입니다.
쓸모없는 곳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열기구의 발명을 심하게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 열기구가 대단하게 쓰일 것이라며 극찬을 한 것입니다. 몽골피에보다 훨씬 더 유명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었기에 사람들은 다시금 열기구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열기구가 도대체 어떻게 쓰이게 될지를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묻습니다.
“저희가 보는 관점과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열기구는 도대체 어떻게 쓰일까요?”
그는 대답합니다.
“그건 모르지만,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것입니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어떻게 될지를 아는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실제로 이 열기구가 있었기에 100년 뒤에 라이트 형제의 무동력 비행기가 탄생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섣부르게 판단하는 ‘판단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잘 들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으시고자 말을 거십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제자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지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기록에 관해 설명해 주면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때 두 제자는 비록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마음이 타오르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 말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아 주님으로부터 빵을 떼어 받을 때 비로소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만약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주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면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계속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라고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초대하지 않게 되면 주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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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의 영성>
헨리 나우웬(1932-1996) 신부님은 가톨릭 사제이며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이분의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심리를 다룬 그의 영성은 사제를 준비하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유명 대학에서 강의했고 또 많은 저서를 통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제일 자신 있고 또 많은 시간을 사용했던 가르침의 길에서 행복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은 교수가 아니라 봉사라고 생각해서, 캐나다 토론토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십니다. 이곳에서 환우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도와주는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이런 삶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공과 권력이라는 외로운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만 걸었습니다. 오르막길에서는 성공과 칭찬에 둘러싸여 ‘나’만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환우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내리막길에서 훨씬 성숙해진다는 것을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내리막길의 영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코 쉬운 삶은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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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여정>
-대화, 공부, 증언, 희망, 성사-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여정입니다. 목표 뚜렷한 하느님을 향한 여정입니다. 하여 요즘 참 많이 강론 주제로 택한 여정입니다. 오늘 엠마오 여정의 제자들과 동반자이신 주님을 보면서 택한 강론 주제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여기에 꼭 한 말마디를 추가한다면, ‘더불어together’를 붙여 ‘더불어 구원의 여정’이라 하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구원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나이 들어 가면서 자칫 잘못하면 ‘괴물怪物(?)같은’ 노추老醜와 노욕老慾의 노년도 되겠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품위있는 노년이 아니라 하루하루 여정의 삶에 충실한 열매가 아름답고 품위있는 노년일 것입니다.
어제 읽은 세상 떠난 어느 자매의 유언도 생각납니다. 맑은 정신으로 요양병원 침상에 누워있다가 세상을 떠난 자매입니다. 그 자매가 남긴 유언은, 1.나 죽으면 울지 마라! 기쁘게 하느님 나라 가는데 울 필요없다, 2.부조금 받지 마라! 이 늙은이 가는 길에 인사하러 달려온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다는 건 인사가 아니다, 3.태워서 자연 속에 뿌려다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겠다!, 셋의 유언입니다.
평생 이런 유언의 정신에 따른 충실한 삶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요즘 계속되는 부활시기 연이어 피어나는 온갖 봄꽃들, 그리고 점차 짙어져 가는 신록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어제는 신록 아름다운 배밭사진을 전송하며, 몇몇 지인들에게 “신록의 합창 들으시고 행복하세요!‘란 덕담의 인사도 나눴습니다.
참 웅장한 심포니, 신록의 합창을 연상케 하는 장관의 배밭 풍경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단 하나 소원’이란 글도 나누고 싶습니다.
-“단 하나 소원은 4월의 아름다이 폈다 지는
싱그럽고 향기로운 봄꽃들처럼
아름다이 선물로 살다가 아름다이 선물로 떠나는 것
그리운 추억으로 남는 것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봄꽃들은 피어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떨어질 때의 낙화落花도 아름답습니다. 선물같은 피어남이요 선물같은 떠남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더불어 구원의 여정이 충실하는 것입니다. 결코 비상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루하루 일과표의 시스템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다음 다섯 요소에 충실하면 됩니다.
첫째, 대화對話입니다.
형제 도반들과의 대화요 영원한 도반 주님과 기도의 대화입니다. 대화없이 살 수 없습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참 오랫동안 대부분 사람들이 마스크를 하고 다닙니다. 그동안 불필요한 말을 많이 배설하여 분위기를 오염시켜 공해가 되게 했으니 이제 말을 삼가라는 표지처럼 생각되는 마스크입니다. 아마 마스크 안할 때보다 말도 훨씬 줄었을 것입니다.
침묵중에 잘 들어야 대화입니다. 진짜 대화는 혼자 ‘독백monologue’도, 둘만dialogue’도 아닌, ‘셋의trilogue’ 대화라 합니다. 바로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도반 제자들이 그 모범입니다. 영원한 도반 주님을 사이에 두고 셋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둘만이 대화라 해도 반드시 함께 계신 영원한 도반 파스카의 예수님을 의식한다면 참 격조있고 결실있는 대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역시 하느님과 소통의 대화입니다. 사랑의 소통, 생명의 소통이 되는 대화의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정말 침묵중에 잘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대화의 기도가 잘 될 때 형제들간의 대화도 잘 될 것입니다. 새삼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대화가, 대화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우리가 카톡을 통해 나누는 정보 역시 관계를 깊고 풍요롭게 하는 대화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공부工夫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 학생인 우리들에게 평생 공부는 필수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평생 공부요 이래야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래서 성서 공부요 성서의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은 성서공부뿐입니다.
아무리 세상 공부에 능통해도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공부라면 헛 공부입니다. 지식은 아무리 쌓아 놓아도 지혜가 되지 못합니다. 성서공부를 통해 하느님과 나를 깨달아 알아 갈 때 비로소 지식은 지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공부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실의에 차 있었지만 성서공부의 열정은 여전합니다. 마침내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 사이에 개입하시어 이들이 성서를 깨닫게 하십니다. 다음 두 제자들의 진솔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바로 주님의 현존이자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성령의 은총이 우리 일상의 모든 공부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특히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서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로 성서 공부에 항구함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셋째, 증언證言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대화의 기도는 그대로 증언이 되고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고백, 사랑의 고백, 희망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공부하고 체험했으면 역시 증언으로, 고백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과 글과 삶은 모두가 주님의 증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역시 공적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입니다. 오늘 제2독서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얼마나 담대하고 열정에 넘치는지요. 그대로 베드로의 믿음이, 베드로의 전 삶이 담겨 있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증언입니다. 결론 부분만 인용합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 우리 모두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 살게합니다.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끊임없이 주님을 증언하면서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넷째, 희망希望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으면 내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진 절망의 어둠이 바로 지옥입니다. 거짓 가짜 희망이 아닌 진짜 희망을 말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참 희망입니다.
오늘 제2독서 베드로 1서 말씀의 주제도 ‘희망에 합당한 거룩한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거룩한 삶이요, 깨어있는 삶이요, 차별하지 않는 삶이요, 품위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베드로가 그 희망의 소재를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없고 티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하느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심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영원한 이정표가, 인도자가 되시는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예견하며 바쳤다는 시편은 그대로 ‘예수님의 기도’이지만 우리의 ‘희망의 기도’로 바쳐도 무방하겠습니다. 화답송 후렴에도 나오지만 아름답고 은혜로워 다시 인용합니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
그러기에 내 마음 기뻐하고 영혼은 봄놀고,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내 영혼을 지옥에다 버리지 않으시리이다,
썩도록 당신 성도를 아니 버려두시리다.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당신을 모시고 흐뭇할 기꺼움을
당신 오른편에서 영원히 누릴 즐거움을 보여 주시리이다.”(시편16,8-11)
다섯째, 성사聖事입니다.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평생 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입니다. 성사의 일상화, 성사의 습관화, 생활화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성체성사 미사의 중요성입니다.
‘성찬례 미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교회의 모든 교역이나 사도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한다. 실제로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파스카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신다.’(교리서1324).
오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 보고 그 마음이 기쁨과 희망에 가득할 수 있었음도 바로 성체성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과 함께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에 무지의 눈이 열려 파스카의 예수님을 알아봤다니 얼마나 은혜로운 사건이자 기적인지요. 새삼 인생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은 이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 코로나 사태로 두달만에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의 성체를 모신분들 대다수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합니다. 그러니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끊임없이 거행되는 미사에 참여하는 것보다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더불어 구원의 여정중에 있는 도반들이자 형제들입니다. 필수적 다섯 요소, 즉 ‘1.대화, 2.공부, 3.증언, 4.희망, 5.성사’를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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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망을 잃었을 때>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쫓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에게도 전화를 많이 받게 되었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신자분들에게 알려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 하잖아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십니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당신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능하신 분이 큰일을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분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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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점점 더 굳건해지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옵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침통한 표정."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잘 드러내 주는 단어입니다. 그들의 실의와 열패감, 두려움과 절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안 그들을 채웠던 기대감이나 우월감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구심점이시던 주인을 잃은 그들은 불안하고 초라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비록 눈이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과 함께 걸으며 말씀으로 차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집도 절도 없으면서도 마치 주인의 위치라도 된듯, 낯선 이를 환대하는 모습이지요.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루카 24,33)
그분이 빵을 떼어 나누실 때 눈이 열리어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길을 되돌립니다. 빵을 나눈 기억이 그들을 일깨웠고, 그 안에 깃든 사랑의 기억이 그들을 돌려 세운 것이지요.
제1독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부분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사도 2,14)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사도 2,14)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사도 2,29)
잡히시던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치고,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십자가 형장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이의 변화가 느껴지십니까? 베드로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확고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예수님 제자 시절 세속적 욕망과 기대에 들떠 자리싸움 할 때의 자만심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확신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렇게 변화된 베드로가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1베드 1,17)
베드로 사도가 권고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은 징벌을 휘두르시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하느님의 무자비한 심판 앞에서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비겁한 처세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거대한 사랑 앞에 섰을 때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는 경외심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경외심은 충만한 믿음과 확신에 찬 희망을 양분 삼아 자라나지요.
엠마오 제자들이나 베드로에게서 드러난 믿음과 확신의 변화는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성장시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변화를 눈여겨 봅니다. 복음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시종일관 물흐르듯 막힌 데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가까이 가시고, 그들과 걸으시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실패를 경청하시고 그들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시지요. 마치 주인이라도 된듯 예수님을 붙든 그들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시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주인이라도 되신 듯 식탁의 기도와 나눔을 주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 곁에서 당신의 본질을 하나씩 드러내시는 사이, 제자들은 원인도 모르면서 점점 더 눈이 열리고 마음은 뜨거워지고 확신이 차오릅니다. 그들은 차츰 충만해지는 중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정화된 자신감으로 차올라 점점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사이,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을 내주고 또 내주시다가 마침내 "온전한 비움"이 되어 물리적 실재를 거두신 것입니다. 마치 어미가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거두며 살찌우고 성장시키는 사이, 본인은 작아지고 쪼그라들다가 육신의 흔적조차 스러지듯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신비로운 "주고받음"이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입니까!
부활 시기가 무르익어가는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한 제자들의 확신에 찬 음성과 태도는 그런 스승의 피와 살, 말씀과 기운을 먹고 차오른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점점 더 확고해지고 스승은 점점 더 빈 상태가 되다가 사라지신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영과 육의 실존을 안고, 세속 안에서 영과 육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이 신비에 동참하라고 초대합니다. 더 충실한 주님의 제자, 더 사랑스런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더 채워야 할 것, 더 비워야 할 것이 저마다 있겠지요.
잘 채워나가고 잘 비워나가면서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일치하는 신앙의 여정 되시길 축원합니다. 실의와 절망으로 시작된 엠마오의 길은 그래서 참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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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부활 3 주일 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2,24)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7)이라고 고백합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약 30년이 지나서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며”(1베드 1,28),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셨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당신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곧 당신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켜내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섬세하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사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당신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 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 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이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찾아오시어 길을 함께 걸으시며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절망과 슬픔에 빠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사실, 그들은 일어난 일의 표면만 보고서 절망에 빠져,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졌을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희망, 우리의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하고 청하자,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토록,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곧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심”은 ‘읽기’(lectio)를, “마음이 타오르게” 하심은 ‘묵상’(meditatio)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청함은 ‘기도’(oratio)를,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 그들의 눈이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하심은 ‘관상’(contemplatio)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말씀의 경청으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lectio),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meditatio),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응답하고(oratio), 마침내 그분을 뵈오며 일치를 이룹니다(contemplatio).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붙드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감동적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당신을 쪼개어 나누어주시며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의 깊고 깊은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동행과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꿰뚫어 본 사도 바오로는 이를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1코린 2,14-15)
오늘 우리도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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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 당신 빛 안에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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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엠마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제자 둘이서 엠마오로 가면서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오셔서 걷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 기억하게 하시는
행위를 보고 비로소 알아봅니다.
옆에 와 계십니다.
바로 내 삶의 자리, 엠마오에 와 계십니다.
이제 어둠 근심을 치워버리고
밝은 태양의 기쁨을 안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두팔 벌려 꼬옥 안아주십시오.
"나야"라고 말을 건널 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처럼,
"저와 함께 머무르소서.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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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 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루카 24, 35)
가장 가까운
일상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상의
부활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주님께 맞닿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감사만이
함께 하는 빵의
기쁨이됩니다.
빵을 떼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일상입니다.
또 다시
빵을 떼어 주시는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일상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십니다.
울림이 있는
일상은 계속하여
나눔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눈동자에 비친
일상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고
가장 따뜻한
나눔이 있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쁜
부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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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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