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
명품과 행복
법적으로는 공평하고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보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전례가 없는 불평등한 사회 모순을 초래하였다. 일부 학자들 외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으면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를 알지 못한 채, 마치 누구든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성공할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성공 신화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기성세대를 더는 따르지 않는다. 사회 구조의 모순을 보지 못하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기성세대의 비난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몇몇 소수 이외는 누구나 성공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욕구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다. ‘행복 추구’다.
일부 학자들에 의하면, 더 이상 자본의 이익 추구가 한계에 도달하자 ‘행복 사업’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진단한다. 소위 행복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해야 해!’ ‘행복할 수 있어!’ ‘부러우면 지는 거야!’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인사도 ‘대박 나세요!’, ‘돈 많이 버세요!’에서 ‘행복하세요!’, ‘행복해야 해!’로 변했다. 그러나 현대인의 행복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한 ‘행복’이 아니다.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말씀하신 ‘행복’이 아니다. 현대인의 행복은 ‘외제 차’, ‘명품 가방’, ‘유행을 잘 따르는 패션’ 등으로 성취된다. 거리에서 다니는 아이마다 롱패딩을 입은 것을 보면서 끔찍한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 롱패딩이 없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원룸에서 신혼을 시작한다. 옛날 같으면 ‘제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시작하련만, 요즘엔 어차피 집은 포기하고 외제 차부터 산다. 명품 가방을 산다. 심지어 대출을 받아서라도 명품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걸친다. 어떻게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며 ‘나도 행복해!’라고 외친다. 지금 당장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행복한 척한다. 그러니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모두 행복한 척, 괜찮은 척, 잘살고 있는 척하느라 분주하다. 행복의 분주함 속에서 고립되고 외롭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린아이 같은 인류에게 ‘공평과 자유’를 주었으니, 다 자기가 잘난 줄 안걸까? 게다가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니 ‘다 성공을 꿈꾼다.’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에 성공에 대한 꿈까지 얹혔으니 ‘행복’은 좋은 상품이 될 조건을 갖춘 것이다. 성당과 가정에서 누렸던 단란하고 정 깊은 내적 ‘행복’은 시시해졌고, 화려하고 멋진 세상이 주는 ‘행복’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나’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어렵게 의미 부여하고 가치를 느껴야 하는 ‘행복’이 아니라, 그냥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감각’을 충족시켜주는 ‘행복’이 손쉽고 효과도 바로 나타나는 매우 효율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행복’에 열광하며 추구하지만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너무도 많은 젊은이가 세상에 자리매김하기도 전에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을 찍힌다. 경제적 파탄에 빠져 소생할 의지도 상실한 채, 많은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등지기도 한다. 젊은 부부가 경제적인 이유로 너무도 이른 이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많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사랑으로 충분히 양육되기도 전에 부모를 잃는다. 엄마와 아빠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조부모에 의해 길러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제적 실패자, 패배자로 좋은 심성의 아버지가 우울증에 빠져 폭력적인 가장으로 변해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경제력과 가정폭력은 이미 주요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난한 가정일수록 가정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부의 편중과 물질주의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는 셈이다. 돈 때문에 멀쩡했던 사람들이 좀비처럼 악마가 되어간다.
지식인들? 종교인들? 한결같이 돈에 사로잡힌 포로 모양새다. 말도 안 되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부끄러움도 감수하고 권력에 아첨한다. 작은 힘이라도 될 만한 것들은 모두 돈 앞에 굴복했다. 그러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까?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잃어버린 군상(群像)들, 넘치고 화려한 불빛 속에서 흥청망청하면서 구원이 어디에 있느냐며 소리 지른다. 그들에게 구원은 돈과 권력을 쥔 자신의 손에 있다고 믿는다. 반대편에 권력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 그들 또한 짝퉁이라도 들고 ‘부러우면 지는 거야!’라며 ‘나도 행복해!’하며 울부짖는다. 누구도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불행한 사람이 없다. 모두가 행복하다고 소리친다.
그때에 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루카 3,10 이하)
대림절, 구세주 오심을 기다림이다. 우리에게 구원이란 뭘까? 어린이 미사 때 “장래 희망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한결같이 돈 많이 벌고 싶단다. 왜 돈을 벌고 싶냐고 또 물으면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잖아요.’ 하며 왜 묻냐는 듯이 힐끗 쳐다본다.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많다고 설명하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괜히 물어 봤구나’ 하는 생각이 덮쳐온다. 옛날에는 당연했던 이야기인데, 이제는 이마저도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면서도 영성체 시간에는 천진난만하게도 웃으며 공손히 성체를 모신다. 아이들만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며’(필리피 4,4)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