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6기 문화재청 블로그 기자 황이새입니다! 이번 달에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고 시작되는 노래가 있습니다. 임을 찾아다니는 한 여인을 나타낸 가사를 담고 있는 노래인데, 2절에서는 ‘서울, 대전, 광주, 목포 찍고’라고 시작됩니다.
위에 나온 도시들은 모두 경부선과 호남선을 지나는 주요한 도시로서 특히 주목되는 도시는 바로 대전입니다.
대전은 경상도로 가든 전라도로 가든 꼭 들르게 되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전을 ‘대한민국 철도 교통의 중심지’라고 알고 있지요. △대한민국 철도노선도
이밖에 여러분은 대전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신가요? 1993년 열렸던 대전 엑스포, 대덕연구단지가 있겠죠.
그리고….
목포하면 세발낙지, 부산하면 어묵, 대구하면 막창이 있듯이 대전…. 사실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대표음식도 없고 그렇다고 막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명소도 없는 곳,
그래서 대전은 사람들이 늘 기차 안에서만 스치고 지나가는 곳이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대전 엑스포의 마스코트 꿈돌이 / △대전 엑스포공원 내 엑스포다리와 한빛탑
제가 이렇게 대전을 소개하는 것은 대전을 깎아 내리고자, 별 볼일 없는 도시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전이 대전만의 음식이 없고, 대전만의 명소가 없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대전의 성립과 관계가 있고 대전의 역사와 관계가 깊습니다. 저는 이번 기사를 통해 대전의 성립과 역사,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대전의 근대 문화유산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100여 년 전 탄생하게 된 근대도시 대전으로 한 번 떠나볼까요?
1. 근대 도시 대전의 성립
대전은 서울, 부산 등 일반적인 도시들과 그 탄생이 다릅니다. 서울을 이야기 하자면, 서울은 고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몽촌토성, 경복궁 등 지역의 역사를 느끼게 해주는 문화재들이 많습니다. 행정구역으로서 ‘서울시’가 되기 이전부터 도시가 되기 위한 준비를 갖췄던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대전은 그 배경이 다릅니다. 오늘날 대전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공주목의 일부였습니다. 대전이라는 공식적인 지명이 본격 등장한 것은 갑오개혁기인 1895년으로 회덕군 아래 ‘대전리’라는 말단 행정구역으로 정식화된 것이 최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대전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지요.
갑오개혁기 당시 대전은 현재 대전시 중동, 정동, 원동 일원으로 대전천 주변의 너른 벌판이었습니다. 이렇게 근 100년 전 조성된 도시에 대표음식이나 문화재 따위를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대전은 큰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작은 행정구역이었던 대전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철도 때문이었습니다.
철도부설로부터 대전이라는 도시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황량해 보이는 대전 시가
2. 철도부설과 함께 시작된 모던 시티 대전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해 1901년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경부선 철도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애초 계획에는 경부선 노선에 대전이 포함되지 않았으나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빨리 공사를 마쳐야 했고, 그러기 위해 충청도 지역 중 보수성과 지방색이 적은 대전을 선정해 철도를 건설해 나갔습니다.
철도 건설이 시작되면서 대전에는 철도 부설을 위해 대전역 일대로 철도와 관련된 기술자와 인부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조선에 정착하고자 일본에서 온 이주민(조선인과의 대립을 피하고자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대전 원동, 중동 일대로 이주)이 대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정착했던 현재 대전 원동, 중동 일대는 당시 조선인보다 일본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대전이 지정면(指定面)이 된 1917년 통계를 보더라도 조선인이 1,813명, 일본인이 5,080명으로 일본인이 약 2.8배 많았습니다. 때문에 대전에는 일찍부터 일본인 거류민회가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종 도시계획과 기반 시설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거류민회는 대전의 성장을 위해 각종 로비를 벌였고, 결국 이들은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시키는 것을 성사시키기에 이릅니다. 작은 행정구역이던 대전이 충청남도의 중심도시가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약 100년 전 대전역의 모습. 2층 규모의 목조건물이다. 건출 당시에는 지방철도역으로는 대구와 함께 부산, 신의주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역사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3. 근대 도시 대전을 걷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근대도시 대전의 탄생은 철도부설과 그와 함께 유입된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지요.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거주 기점이었던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대전역에서 지금의 인동·효동으로 이어지는 인효로를 본정통(本町通), 반대쪽 삼성동 방향 길을 영정통(榮町通)이라 불렀으며, 다시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사로 이어지는 중앙로를 춘일정통(春日町通)이라 했습니다. 이 세 도로가 근대 대전의 축으로 현재의 원도심을 이루었습니다.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전통시대 동(洞)과 리(里)의 명칭은 모두 정(町)과 같은 일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역까지의 대전 원도심 지도. 본정통, 영정통, 춘일정통의 거리 구분이 명확하다.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100년 전 대전,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한국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다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어서 그 시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는 건물들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100년 전 본정통, 영정통, 춘일정통의 위치에 조성되어있던 근대 문화유산들, 각각의 거리를 걸으며 만나봅시다.
(1)본정통(本町通) △약 100년 전 대전 본정통과 현재 대전 인효로
일본어로 ‘혼마찌’라 불렸던 본정통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제일 거주지에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잘 알려진대로 서울에서는 충무로가 혼마찌로 불렸습니다. 대전의 혼마찌는 지금의 인효로로 대전역에서 인동, 효동으로 이어지는 거리입니다. 현재는 예전만큼의 대전 중심 지역은 아니지만, 대전 중앙시장이 이곳까지 미쳐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약 100년 전 일제 식민지배의 아이콘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의 모습과 오늘날 민간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같은 건물의 모습
혼마찌를 걷다보면 조선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1922년 12월 준공된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등록문화재 제98호)을 마주하게 됩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의 관할 구역은 충청남북도 전역은 물론 무주와 익산 등 전라북도 일부를 포함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은 부산과 목포, 대전 단 3곳이며 부산과 목포 지점은 현재 근대사 박물관으로 사용 중입니다. 하지만 대전 지점은 위와 같이 민간에 의해 상업시실로 쓰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약 100여 년 전 주식회사 대전전기 제3발전소 모습과 오늘날 한전대전보급소로 쓰이는 같은 건물의 모습
동양척식회사를 지나 더욱 인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주식회사 대전전기 제3발전소(등록문화제 제99호)에 도착하게 됩니다. 주식회사 대전전기는 1911년 5월 5일 본정 2정목 86번지에 설립되었습니다. 주 사업은 전등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었지만 전력기계 및 기구들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일을 겸하였으며, 토지 매매와 임대업 등의 부동산업에도 손을 댔습니다. 대전전기는 광복 후인 1961년 주식회사 한국전력 충남지점이 되었고, 이 건물은 ‘한전대전보급소’라는 이름으로 2004년 등록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영정통(榮町通) △약 100년 전 대전 영정통과 오늘날 대전 815길
영정통은 대전역에서 삼성동 쪽으로 난 길로, 현재 대전로 815길입니다. 대전 초기 시가지 발전은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남북축으로 본정(本町)과 영정(榮町)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1930년대 충남도척이 이전되면서 도시의 발전축이 춘일정(春日町) 쪽으로 옮겨 갔지만, 영정(榮町)은 대전 초기부터 일본인들과 주요 시설들이 들어섰던 곳으로 여전히 대전의 중심 시가 중 하나였습니다.
(3)춘일정통(春日町通) △약 100년 전 대전 춘일정통의 모습과 상업시설이 대규모 밀집되어 있는 대전 원도심 으능정이 거리의 모습
일본어로 ‘카스가마치’라 불렸던 춘일정통은 지금의 중앙로를 따라 이어지는 동네로, 대전역에서 서대전 네거리까지 이릅니다. 초기 대전 시가의 주축은 지금의 인효로인 본정통과 대전역에서 삼성동 네거리로 이어지는 영정통이었으나, 도청 이전을 전후로 목척교를 관통하는 동서 방향의 새로운 축이 강조되면서 차츰 춘일정통의 주요성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춘일정통은 광복 후 중앙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현재까지도 대전 원도심의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 △약 100년 전 조선식산은행의 모습과 오늘날 안경원 건물로 쓰이는 같은 건물의 모습
과거 춘일정통을 걷다보면 대전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 중 가장 수려하다는 평가를 받는 조선식산은행 대전지점(등록문화재 제19호)를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식민금융자본으로 1918년 설립되었습니다. 르네상스양식을 차용한 이 건물은 식민자본의 위엄과 화려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조선식산은행은 광복 후 한국식산은행으로 개칭되었으며, 1954년에는 한국산업은행에 합병되었습니다. 현재는 대전에서 온전히 보전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근대건축물이지만, 현재 안경원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약 100년 전 대전 목척교와 오늘날 목척교의 모습
조선식산은행을 지나면 이윽고 목척교를 만나게 됩니다. 목척교가 처음 가설된 것은 1912년으로 대전 주둔 일본수비대의 병기를 수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다리의 길이는 70m, 폭은 5m로 총 공사비는 4천 6백 원이었습니다. 1917년 한 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고, 1929년 충남도청을 염두하고 콘크리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는 대전 원도심의 대표적인 다리가 되었습니다. △약 100년 전 대전 부청사의 모습과 오늘날 삼성화재 건물로 쓰이는 같은 건물의 모습
목척교를 지나 옛 충남도청사 쪽으로 더욱 걸어오다 보면 과거 대전부청사(府廳舍)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대전부’란 일본식으로 광역시를 일컫는 말입니다. 대전이 작은 ‘리’에서 어느새 광역시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대전부청사 건물은 1936년 준공되어 부청 사무실과 함께 대전 상공회의소로 쓰였습니다. 건축 당시 현관 입구 양쪽에 대형 원형창을 만들고, 2~3층 전면에 커다란 통창을 두어 시원하고 모던한 입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잠시 미군정청에서 사용했으며, 그 뒤 대전시청과 대전상공회의소에서 사용하였고, 1976년에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보시다시피 삼성화재 건물로 쓰이고 있습니다. △약 100년 전 충청남도청사와 오늘날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같은 건물의 모습 철도부설과 함께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전이 다시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계기는 바로 1932년 충남도청 이전이었습니다. 옛 충남도청사(등록문화재 제18호)는 1932년 8월, 충남도청을 소재하던 공주 주민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준공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 정부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고요. 건립 당시에는 2층의 벽돌조 건물이었으나 1960년 무렵 넓은 창을 낸 모임지붕 형태로 3층 부분이 증축되었습니다. 세워진 지 70년이 넘은 도청 건물로서 또한, 우리 근·현대를 겪어 온 건축물로서의 상징적 가치가 큽니다. 2012년 충남도청사가 내포신도시로 이전함에 따라 현재 건물은 대전근현대사전시관, 대전시민대학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약 100년 전 충남도지사 관사와 모습과 오늘날 같은 건물의 모습
충남도청사를 지나면 인근에 충청남도지사 관사(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9호)가 있습니다. 충청남도지사 관사는 1932년 4월에 착공하여 그해 9월에 준공되었습니다. 이후 충남도시가들의 거처와 연회장소 등으로 쓰였습니다. 내부는 일본풍으로 설계되었지만 동선을 중시한 서양식 배치에 아르데코 양식을 차용하였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로비하우스’나 낙수장으로 불리는 ‘카우프만 하우스’ 같은 느낌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관계자외 출입을 금한다며 문이 굳게 잠겨있습니다.
이렇게 100년 전 근대 도시 대전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전하면 볼 것 없고, 즐길 것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생각보다 근대 문화유산이 참 많지 않습니까? 소개해 드린 근대 문화유산 외에도 삼성초등학교 교사, 관사촌 등 이밖에 많은 유산들도 있습니다.
저는 100년 전 대전의 시가지를 걸으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근대 문화유산들이 거리를 따라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어서 관심을 가지면 어렵지 않게 근대 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거리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100년 전 모습을 비슷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였고, 남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을 먼저 탐험한 것 같아 짜릿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 지점으로 쓰였던 건물의 오늘날 모습 (좌) / △근대 문화유산을 관광하기 쉽도록 구성한 군산시 '근대문화 역사의 거리 지도' (우)
위의 좌측 사진은 전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입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팻말이 있지만 보시는 바와 같이 근대 문화유산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군산은 근대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사람들이 보기 좋게 꾸며놓고 있습니다.
두 도시의 문화유산에 대한 활용과 관심이 느껴지는 대목인데요, 좌측 사진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씁쓸한 마음까지 듭니다.
일본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이 땅에 만들었던 건물이나 시설들은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모두 우리의 역사를 담고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근대 문화유산에 대해 무관심하게 사는 것은 36년간 이 땅의 역사를 무시하고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행여나 근대 문화유산을 왜색(倭色)이 짙은 식민잔재라고 치부하여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행동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대전은 부정할 수 없이 일제에 의해 발전하게 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전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이를 통한 대전의 문화 발전이 시작되었스면 좋겠습니다. 민간 상업 시설로 쓰이고 있는 근대 문화유산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굳게 문을 잠궈둔 건물들은 이제 그만 문을 열어 시민들에게 개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대전역에 근대 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는 지도를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활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군산처럼 대전도 이제는 특색있는 도시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를 지키고 활용해 나가는 대전의 모습을 기대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제6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황이새 기자(dlto0909@naver.com)
<참고문헌> 『근대도시 대전, 그 100년의 역사』, 대전시립박물관 대전근현대사전시관, 2013년
『모던대전』, 대전광역시, 2013년 |
출처: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