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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란 살아가는데 나타나는 길과 같은 것인가? 봄비가 처절히 나린 완도를 해마다 가는 것은 늘 만나는 인연의 자락때문에 해무가 가득담긴 다도해 넘어 완도 다섯봉우리 종줏길을 비몽사몽 다녀왔다.
인생은 기나긴 항해에 비교한다. 가다가 멈추는 것은 단 한순간 뿐이다. 인생을 멈추는 것뿐이다. 큰 배를 띄울려면 충분한 깊이의 물이 있어야하고, 먼곳으로 항해하려면 같이 기는 소중한 동료도 있어야한다. 같이 잘가는 방법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아야한다. 내 주변사람들이 잘되어야 본인도 잘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혼자의 힘으로 되는 일은 없다.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는 독단으로 애플을 운영하다 자기 회사에서 쫏겨났다. 넥스트, 픽사등의 회사를 전전긍긍 하다가 애플에 복귀하여 아이팟, 아이폰으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달라진 점은 과거의 결과는 남의 모든 것을 독차지 하는 경영에서 , 자신의 성공과 업적을 우리 모두의 힘으로 일군것이라 늘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인화라는 것을 장착하고 돌아온 천재는 무서운 무기를 가지면 성공은 더욱 넓어지는 것이다. 이따금 관리자가 점심이나 저녘회식 자리에서 밥값이나 술값을 대신내고 사라지는 것을 종종본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단체의 양호한 실적을 남긴다.
좋은 인맥이란 물론 성공의 길잡이가 되지만 소중하지 않는 관계는 없다. 자그마한 볼트하나가 큰 다리를 지탱하듯이 모든 관계는 의외로 세상의 좁은 곳에서 나타난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은 다 자신의 쓰임새가 있는 법이다. 성인군자는 사람을 버리는 법이 없다. '논어'에 '안연편' 에는 "군자는 사람의 좋은 점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나쁜 점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한다. 소인배는 그 반대다." 남의 나쁜점을 부각하고 동참하는 이는 당연히 자신도 침물하는 배가 되는 것이다. 다른 이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주위분들이 발전하고 잘되면 저절로 자신은 좋은 곳에 사는 것이다.
늘 녹차 마시는 절간에 계시는 스님은 동자
童子출가出家 하신분이다. 대단한 분이다.
어릴때 절간에 들어갔는데 삼형제가 같이 들어갔는데 혼자 절에 남고 두형님은 속가로 돌아 왔다고 한다. 동자출가는 모든 스님들이 원하는 일이지만 쉽게 되는 것도 마니다. 우리는 늘 핑계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는 푸시킨의 시구는 무수히 들어왔는데 인생이란 끝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완벽해지길 바라는 것은 환상이다. 요새세상은 힘들다한다. 연애, 결혼, 출산등을 포기하는 N포시대라는 것이다. 주위의 환경을 탓하는 것은 바보의 짓이다. 절간 스님은 혼자서 큰 절을 이루었다. 정말 남의 도움이나 기왓장하나 라도 자기의 돈으로 이루었다.
끊임없이 빗으로 이루고 갚아가다보니 이제 세월이 다되었다한다. 늘 부처님에게 감사를 들인다고 한다. 녹차를 오십년전부터 만들고 된장 간장 경옥고등 만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한다. 이름난 공사현장에 가서 제를 무수히 지냈다고 한다. 이름난 대통령 돌아가실때 가서 제를 주관도 하고 하였다.
늘 앞으로 가는 일만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산꾼이다. 아무리 험한 산을 넘고 넘어도 가야하는 산길이다. 가지못하면 돌아온다.
그 곳에서 머무는 것은 죽음이다. 물론 집값도 비싸고 교육비도 만만치 않고 취업도 고도성장시 처럼 일자리가 남아돌지도 않는다. 모두 늦게 결혼하고 살아가는 것이 순탄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래에 투자하고 가야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성실히 하고 있으면 세상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좋은 일은 다가온다.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진리이다. "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아인슈타인 의 말처럼 한가지 방법을 쓰다가 안되면 미련없이 하였는지 돌아보아야한다. 공자는 ' '술이편'에서 "子曰,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공자왈, 나아가는 자와 함께하지만, 퇴보하는 자와는 함께할 수 없다." 끝까지 하가나 다르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 가야하는 산꾼 같이 길이 정해지면 가야한다.
우리는 산꾼이다. 옛 선조들은 산을 다녔을까? 산이란 도인들이 거처하는 신성한 곳이기에 산을 간다는 것은 상류층의 일부분이 하는 일이다. 좋은 말로 산수유람
山水遺覽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그기다가
한량이라는 멋진 명색을 가진다. 누가 금강산이고 지리산이고 물 맑고 산 좋은 곳을 머슴들이나 짐꾼들을 앞세워 몇달이고 걸어서 산하나 보고 시하나 둘 남기고 풍류라는 것을 즐기다 사는 것은 상류층이나 하는 짓이 었다. 물론 산을 타는 심마니나 화전민들도 물론 있었지만 산은 극히 높으신분들이나 가는 곳이 라는 것이다.
지리산 반야봉을 오른이들이 남긴 시가 꽤된다고 한다. 그 유명한 황진이도 서경덕 의 제자로 들어가서 마음을 얻어려다가 제자의 연을 끊고 전국 산수유람을 하여 그 시절의 파란을 일으킬 정도 였어니 지금 산은 다니는 모든 분들은 비교하기는 무엇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풍류를 즐기는 것이다. 산이란 즐기는 곳이라 하면 자신도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 옛날 중국의 신선이나 도인들의 삶은 산이 없어면 존재가 불가하다.
이태백이나 왕유같은 당나라 시인들도 이름난 산을 풍류로 남긴 전설은 참으로 대단하다.
당시唐詩는 참으로 대단한 문화이다. 이백의
'망여산 폭포 ' 라든지 왕유의 종남산 '종남별업' 을 읍조리면 참으로 풍류란 대단하다. 우리도 지금 산을 다니는 좋은 풍류객이라 할수있다. 오늘도 좋은 산을 찻아다니는 우리 산꾼은 멋진 풍류객 양반들의 후손인지 모른다.
" 내 장례식에 오지 않을 사람의 의견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사람은 평균적으로 150 명과 관계를 유지할수 있으며, 최대 225명까지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친하다고 할만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하면 복잡해진다. 18세 이상으로 29세 이하는 하루 평균 5시간 이상을 전자기기에 메달리고 30세에서 49세이하는 하루 5시간 정도, 50세 이상은 4시간 미만이라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지신의 삶을 노출하고 공유하는 것에 숙달되어 간다.
단점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삶은 허상이다. 대중들에게 보일려는 마음에 가득차면 모방은 단순한 무언가를 원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경쟁심을 낳으며, 타인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시기심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그 시기심은 매우 강력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욕망하려면 본보기, 즉 자신이 원한다는 이유로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사람이 있어야한다. " 라고 심리학자 버기스는 말한다. 지금 우리는 주변상황을 자세히 볼수있는 고해상도의 렌즈를 발견해야 한다. 모방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이다. 지금의 세상을 바로 살기는 힘들다. 모든 것을 노출하고 같은 삶을 원하는 시대이다. 소외되는 착각에 같아질려는 나약함에 모방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건강한 심신을 가지고 적당한 인간관계로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베풀고 누군가가 어려움을 나눌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한다. 미디어기를 버리고도 자신의 일을 할수있는 날들을 만들어 보는것만으로도 좋은 하루이다.
" 재미의 세계가 넓어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 러셀 의 말대로 노년은 재미를 추구하면 심심하지 않게 살수있다. 노자가 도덕경을 남기고 간곳을 알수도 없듯이 자신의 즐거움을 찻지 못하면 인생은 외로움이라는 극약을 먹는수 밖에 없다. 외로움이란 하루에 담배를 열다섯개를 피우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극약이다. 무엇을 하든 주체는 내가 되어야한다. 만약에 보시를 하든 베풀든 그것은 결국은 자신이 느끼는 만족감은 대단하다. 산꾼이 죽자 살자 산을 힘들게 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 본인의 재미이다. 누구든 재미있게 살겠다 마음만 먹는다면 온통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나이에 맞게 맞추는일이 지혜이다.
오르지 못하면 바라만 보아도 즐거운 것이 산꾼의 생리이다. 물론 젊은 날처럼 가장 선호하는 거짓말인 날라다니면 좋지만 멈추고 바리볼때가 어찌보면 좋은 일이 된다. 나이가 드는 것도 배워야한다 고 한다. 공자님은 배우는 것을 멈추는 것은 군자의 삶이 아니라 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배우는 것은 젊어지는 것이다. 남에게 부담을 주지않는 일들은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런 제제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가장 후회하는 일은 젊어서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멀리하고 똑똑한척 길에서 얻은 경험을 자랑삼아 남들에게 가르칠려고 하는짓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지금은 시간을 내어 가장 먼저하는 일이 책이 있는 도서관 근처로 이사와서 책보는 일이다. 새벽에 하는 운동과 근처 절에서 스님과 녹차먹는 일이 우선이다.
주말마다 가는 산길은 언젠가는 그만두겠지만 사실은 산을 가지못하면 즐거움은 산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대신 즐거워 질것 같은데 모르는 일이다. 그때는 그때가 정답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각자가 좋아하는 일들이 다 다르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경우는 없다. 즐거우면 그만이다. 춤을 추던지 노래를 좋아하든지 술을 즐기든지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무엇에 빠지는 것은 각자의 삶 이다.
지금도 친한 친구들은 나보고 미친놈이라 한다. 산에 가는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자연은 결함이 없고, 완전한 양태
樣態는 자연밖에 없다고 한다. "자연 안에서는 그것의 결합 탓으로 돌릴수 있는 어떠한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 고 했다. 자연은 항상같은 것이며 어디에서든 하나이며, 그것이 작용하는 역량은 다 같기 때문이다. 첫번째, 자연은 균등하다. 두번째, 자연은 인위적이지 않다. 세번째, 자연에는 우열이 없다. 인간은 식물보다, 동물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식물이 위대한 종인지 모른다. 지구에서 모든 종을 살리는 산소를 만들고 , 움직일 필요조차 없이 진화한 것인지 모른다. 인간은 지구에서 무익한 존재이다. 우리가 이룩한 문화라는 것도 동식물에게는 아무런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다. 니쳬는 "선과 악이라 이름붙인 모든 이름은 이미지 일뿐이다 " 라고 했다.
이미지는 표현을 쓴것이다. 완전히 사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이 자연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자연이다.
나이가 들면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구의 어느 것 하나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 뿐이다.
죽음도 부모도 꽃과 나무도 새들조차 다른 변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죽는 것은 없다. 삶도 죽음도 또 다른 종으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나왔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는 무한하고 무無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유有라는 것이다. 불교의 사상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일 뿐이다. 자연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변하고 변하는 것뿐이다. 생각도 의식도 문화도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 제일이고 그 속에서 변하는 것이다. 짧은 인간의 언어나 사고思考너머는 무한하다. 존재의 끝은 무한하다.
인간은 아직 완전한 인간이 아닌 인간화가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한다. 에릭호퍼의 '인간의 조건'에 나와있다. 인간은 동물보다 못할 때가 많다. 인간도 한때 동물 같았고, 진화 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이것은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중이다.
인간이 발전할수 있었던 이유가 '놀이 ' 라는 것이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 유희하는 인간 이라는 뜻으로 인간의 본질은 놀이라는 매개를 통해 창조 활동을 했다고 한다. 호퍼는 원시시대에 인간이 다른 야수들을 제압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나타내는 것은 '놀이' 로 본다는 것이다. 고고학에서 활, 바퀴, 망치등은 가지고 놀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흥미 만큼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없다는 것이다. 러셀은 세상을 바꾼 이유는 웅대한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재미로 딴짓을 하다가 발견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이나 빌 게이츠나 스티브쟙스나 어릴때 가지고 놀던 생각이나 공상이 커가면서 진정한 발전이 있었다 는 것이다. 흥미나 즐거움이 없어면 발전도 없다는 것이다. 호퍼가 호기심과 흥미를 인간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어른 속에 있는 아이들의 성향 '놀이터' 가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대부분은 학창시절 공부에 흥미나 즐거움을 잃어 버렸다. 건강한 사회는 학생들 보다 어른들이 더욱 공부에 흥미를 느낄때 이루어 진다고 본다. 아는 만큼 시야나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배움의 놀이터를 잃어버린 세대는 지금 전쟁과 폭력, 범죄가 여전히 맹목적인 사고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진화 되어가는 미완의 시기이다. 여론화나 줄서기나 숫자놀음에 빠진 맹신적인 한쪽으로 만 가고 있는 어리석은 짓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은 배운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양성해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배우는 사회이며, 그 곳에서는 조부모도 부모도 자식도 모두 학생이다. ᆢᆢ" 호퍼는 진화하는 인간들의 방법을 말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왜! 사느냐? " 하고 물어보는 오면 당황한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진정한 자신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깊은 자기 성찰없이 이뤼지는 기계적인 일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의식하지 못한채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이를 '직접성' 이라 하고, '무 매개성' 을 의미한다. 반역자나 혁명가처럼 군중과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 조차 사실은 자신의 가치관이 반영된 새로운 대안사회 (보편적인 삶의 방식) 을 창조한다고 한다.
자기를 상실한 사람들은 군중들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그들의 평균점과 비교하며 자기의 삶을 평가한다. 우리는 은밀하게 지배하는 군중의 독재속에서 세속적인 가치들에 눈이 멀어 '진정한 자기'를 외면하고 살아간다. 자신의 고유명사를 상실하고 군중이라는 일반명사나 익명의 숫자로 살아가는 나약하고 비겁한 안식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즐긴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 혹은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다. 인간은 무한성과 유한성의 종합, 영원성과 시간성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종합은 그들의 관계이며, 그렇게 보자면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는 책의 시작이다. 아직도 '왜! 사느냐' 에
대한 답을 모른다. 이 사회를 떠날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발전하는 이유는 심심한 까닭이라 한다. 하루에 숨쉬는 만큼 생각한다고 한다.
생각은 각자가 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 블레즈 파스칼의 명언은 학창시절 단골이다. 생각이란 여러분야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철학자 는 생각의 논리 구조를 비롯해 생각과 다른 심적영향의 관계를 탐구한다. 심리학자 는 우리의 사고력을 뒷받침 하는 과정이 교란될수 있는 경로를 연구한다. 신경과학자는 생각의 신경 기체를 탐색하고, 인류학자는 사고방식의 문화적 편차를 조사한다. 언어학자는 생각과 언어의 관계를 살펴보고, 인지동물행동학자는 인간이외의 종의 하는 생각을 연구하며, 컴퓨터과학및 인공지능분야의 연구자는 생각을 생물계 밖에서 구현하는 방법을 연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각자는 이 생각이 어떻게 내 속에서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단지, 반응하는 것은 각자의 영역이라 불가사의한 일이다. 인간은 심심하면 안되고
또 심심해야 된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생각을 하는 것이 살아있다는 존재이다. 불안은 발전하는 증거이고, 갈등은
선택의 기쁨을 준비하는 단계이고, 슬픔은 감정을 청소하는 단계이고, 미움은 사랑으로 가는 준비단계이고, 사랑은 인간으로 가는 성숙의 이정표이다. 인간이라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지구에 던져진 이유이다. 생각하지 않어면 그날은 지구를 떠나는 날이다. 생각하지 않는 방법은 없다.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무엇인가? 우리는 협의와 만장일치로 이루려는 중립이라는 말은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공동체주의적 진리라는 가령 모두를 잘살게 한다든지,
어느 한쪽이 진리인양 나서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오만할 뿐아니라, 극도로 위험하기 까지 하다. 대표로 뽑은 자가 마치 무소불위의 행위로 권력을 휘두르는 민주주의 라는 허울도 다수의 행포인지 모른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위험하고 중립적으로 쌍방의 영역이 조화롭게 돌아갈리 만무하며,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살아가라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실마리는 구체적인 공동성이 아닌 되레 적대 관계를 인정하는데 있다.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추구할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유토피아 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지만 바라는 것도 소아적인 사고방식 일지 모른다, 가장 달콤한 것이 몸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되고 가장 빠른 지름길이 가장 위험한 함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공동체 내에서 양보힐 마음이 전혀없는 사안을 두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저항하게 된다. 실존하는 세상은 아름다운 무지개 나라가 아니기에 매일같이 갈등과 비명이 난무한다. 그러기에 그러한 갈등요인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소리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는 누군가가
공동체적 진리가 있다는 허울에 갇힌 지옥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암세포가 침묵의 평화를 가지는 심신이 되면 티협보다는 박멸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늘 시끄러운 것이 세상이다. 방법은 사회에 사는한 한쪽으로 가는 편한 산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 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 이무불위ᆢ도는 항상 함도 없고 하지 않음도 없다. " 도덕경의 道의 마지막장 37장 에 나오는 글이다. 인간의 본성은 무위 자연이고 본래 태어나는 곳도 자연이다. 도는 등불이라 등은 이빛의 몸이고, 빛은 이 등의 작용이다. 도는 자체가 등불이니 몸도 마음도 이미 도로써 하지 못하고 하고하는 분별이 없다. 방법이란 있고 없고 하는 것 모두가 방법인 것이다. 일에도 실패와 성공은 없고 단지 하고 안하고 밖에 없다. 이루지 못하는 것은 끝까지 하지 못한것이고 이루었다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일 뿐이다. 마음이란 본래 우리생각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같의
경계에 의하여 스스로 하는 가상의 헛것이다.
도道란 스스로 돌이켜서, 자신이 어떤 경게에 처하여 있는지 관조關照하는 것이다. 버리고 구하는 것은 모두 심성에 쌓이는 더러운 때일 뿐이다. 도를 딱는다는 것은 무명無明만 키우는 헛것이다. 마음이란 본래 무위자연이니 가만히 보면 고요함을 아는 것 뿐이다. 오고 가는 것은 마음에 이는 바람과 같다. 방법이란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맞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고는 때가 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아는 것 뿐이다.
마음은 안정을 찻어연 모든 것은 이루어지는 원점으로 가는 것이 우선이다. 지혜는 몸이고 무지는 마음이라 마냥 아는 것보다 바라보는 것이 나은 방법일수도 있다 .
해무가득 담은 다도해에 잠긴 섬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봄 안개 깔린 백운봉 능선은 담긴 봄꽃들이
저리 피고 지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길가에 때가 되면 한떨기 야생화들이 저리
봄비에 잠겨 피는 것은 하늘의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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