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여인의 자화상, 보리밭의 이브"
<이브의 보리밭-몽환>, 112x145.5cm, 순지5배접, 암채, 2010
보리밭에 전라의 이브가 누워 있습니다. 몽환적인 표정의 이브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 당당하게 화면밖의 관람자를 바라봅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 역시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이브를 바라보면서도 민망한 생각 없이 덤덤하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브의_보리밭-바이올렛_환타지>,_97x130.3cm,_순지5배접,_암채,_2007
이숙자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몽환적이면서도 에로틱합니다. 그러나 바라보는 사람의 육체를 달아오르게 하는 그런 에로틱함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이성을 건드리는 창백한 표정의 표징입니다. 어떤 존재도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않은 고독하고 강인한 영혼의 여성적 자아입니다.
<이브-봄_축제_II>,_97x130.3cm,_순지5배접,_암채,_2011
꽃이 피는 모습을 본 적 있으세요? 무심히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부드러운 속살을 열어 천천히 개화(開花)하는 꽃이 그저 예뻐 보이고 고을 뿐입니다. 꽃에게도 슬픔이 있으랴. 그런 느낌이겠지요. 꽃은 사력을 다해 거듭나는 순간인데 말이예요. 그런 싯귀절이 있지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은 연약하고 가냘픕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려는 차디찬 의지때문에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합니다. '저만치 홀로' 존재하는 이브의 표정에도 꽃과 같은 강인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꽃과 이브는 동격입니다.
<청맥-노란 유채꽃>, 130.3x162.1cm, 순지5배접, 암채, 2012
아득하게 넓은 보리밭 사이로 봄바람이 넘실거립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삶의 애환을 함께 했던 보리밭은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자란 보리는 쌀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던 사람들에게 희망이자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올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한맺힌 생을 마감해야 했는 지 모릅니다. 청맥(靑麥)이 익어 황맥(黃麥)이 될 때까지 얼마나 애타게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는지요.
<혼야(婚夜) 4-색동>, 120x90cm, 순지5배접, 분채, 1972
이숙자가 처음부터 보리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데뷔초에는 오방색이 주조를 이룬 정물화와 민예품을 즐겨 그렸습니다. 박생광 천경자 등 채색화로 이름난 스승에게 그림을 배워 사실적인 화풍의 채색화를 그렸습니다.
<군우 3-1>, 181.8x227.3cm, 순지5배접, 암채, 1987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황소를 클로즈업시켜 추상성이 느껴지는 작업도 재미를 느꼈습니다.
<망초꽃이 있는 청맥>, 100x200cm, 순지5배접, 암채, 1995
그러나 1980년 <맥파-황맥>으로 중앙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후 보리밭 화가로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보리밭 화가로 알려졌지만 이숙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입니다. 작가가 처음 보리를 만난 건 10살 무렵입니다. 6.25 전쟁으로 피난을 간 옥천에서 생전 처음 보리밭을 발견하고 초록빛으로 출렁거리는 보리밭의 생명력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포 보리밭 사계>, 181.8x227.3cm, 순지5배접, 암채, 2010.
그러나 가난한 집 11남매 장남과 결혼하여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던 작가는 보리밭을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그런 어느날 시동생이 있는 경기도 포천의 자취집을 찾아가다 다시 한 번 보리밭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힘들게 고갯길을 오르다가 까마득히 펼쳐진 삼천여평의 보리밭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바람의 흐름을 타고 출렁이듯 넘실거리는 보리밭을 보는 순간 사느라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그녀로 하여금 붓을 들게 했고 30여년동안 보리밭에 빠져 살게 했습니다.
<황맥벌판 I>, 162.1x130.3cm, 순지5배접, 암채, 2003
보리가 익어 가고 햇볕이 따가워지면
<황맥벌판 II>, 162.1x130.3cm, 순지5배접, 암채, 2001
누런 보리밭은 까실까실한 보리수염넘어 탱글탱글한 알맹이를 가득 연 채 겨우겨우 서 있습니다.
<이브의 보리밭 89>, 150x200cm, 순지5배접, 암채, 1989
이숙자는 80년대 내내 보리를 그렸습니다. 잔잔한 희망이 담긴 청맥과 탐스런 결실이 익은 황맥을 때론 부드럽게 때론 거친 바람을 배경 삼아 줄기차게 그렸습니다. 보리밭가에 핀 엉겅퀴, 개망초, 유채꽃 등도 함께 들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비를 그려넣을 때도 있었습니다. 10여년동안 보리밭만을 중점적으로 그리던 이숙자는 1989년 8월 ‘서울미술대전’에서 보리밭에 누드 여인이 등장하는 '보리밭의 이브'를 출품하였습니다. 보수적인 화단에서 발가벗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인의 누드가 가져온 파장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함께 시기, 질투를 감당해야했습니다.
<백두산의 새벽>, 162x390.9cm, 순지5배접, 암채, 2000
이숙자 작가는 소품을 거의 그리지 않습니다. 대작이 많습니다. 도톰한 보리알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돌과 보석가루를 아교에 섞어 바르는 암채(岩彩)기법 으로 채색합니다. 정교함을 필요한 작품을 대작으로 한다는 것. 왠만한 작가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은 중노동입니다.
<청맥-보랏빛 엉겅퀴>, 130.3x162.1cm, 순지5배접, 암채, 2012
올 해 칠순(70)이 된 이숙자 작가는 지금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보리밭을 그립니다. 지금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02-720-1020)에 가시면 평생을 보리밭에 빠져 산 작가의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시회는 4월 1일까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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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원문보기 글쓴이: 조정육
첫댓글 살아 숨쉬는 듯
뛰어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의 표현력
바람이 살아있는 것 같지요?
대단한 작가입니다.
생명력, 생동감,,,,고창 보리밭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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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림그리시랴 고생하셨겠는걸요. 멋진 그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에 17시간씩 보리알을 그렸답니다.
나중에는 팔이 고장이 나서 큰 고생을 하셨구요,
수천 수만번의 터치를 통해~~()()()
수천 수만번의 염불을 통해~~()()()
예전에 전시회에 가서 그 생생하고 꿈틀대는 듯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작의 작품들 앞에서 감동을 체험한 추억이 떠오릅니다.
도록에 있는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을 오려서^^
책상 앞에 붙여 놓고 감상한 적이 있어요.
화가의 가슴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풍경들이
삶을 살아가시면서 더욱 체화되고 향기로와져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 됨을
느끼며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합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2000년에 백두산 천지를 그린 대작앞에 서서 입이 딱 벌어진 적이 있어요.
수행이 따로 없습니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보살행이 이런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살아있는 그대로의 보리밭입니다.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작가가 보리밭에서 느낀 감동을
보는 우리도 똑같이 느낄 수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