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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회.2017.9/22.23)
1.일시: 9/22.23(금.토).08:00시
2.모임장소:압구정역(6번출구)
3.참석자(59명):권호성.김창덕.노태섭.박호봉.엄영섭.오춘식.이도경.허홍외.
4.나들이코스:내연산.부소산성
만나면 반가울 수 밖에 없는 친구들.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여기저기서 반기는 소리로 시끌 벅작하다.
뭐든지 오랜 것들은 소중하다.
역사가 그렇고 우리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도 오래 사귄 정든 동창 친구가 그렇다.
용두열 가을 여행 1박2일 일정
첫날은 내변산(일부는 내소사.곰소항)과 궁항좌수영세트장
둘째날은 채석강과 적벽강을 둘러보고 10시에 격포(대명 리조트)를 출발하여 부여의 부소산성(낙화암 고란사 정림사지 궁남지 박물관)을 둘러본다.
욕심 많은 빡빡한 일정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아직은 청춘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라는 의도라도 있는 것 같다.
나의 만보기에 첫날은 15,000보를 살짝 넘기고 둘째날은 20,000보를 살짝 넘겼으니 많이도 걸었다.
용화 관광버스 2호차 대머리 기사양반은 항상 웃는 얼굴이다.
압구정역 출발시간은 8:15분이였는데 새만금 방조제입구에 오니 10:45분.
2시간 30분 걸렸다.
공주 정안 휴게소에서 잠시 볼일 보고 바로 막힘없이 달려왔다.
새만금 방조제를 버스로 통과하여 찾아간 점심 만찬장
대한민국 원조 바지락죽 名家 죽부인‘변산온천산장’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변산온천산장 뜰에서 코스모스와 꽃무릇을 보니 남도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해물전도 바지락 죽도 산채비빔밥도 아주 좋아요. 역시 남도 음식이다.
하동만 회장 인사말에서
새만금 방조제는 33.9km로 네덜란드의 주다치 방조제(32.5km)보다 1.4km 더 길어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라고 소개한다.
새만금 면적은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로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이르는 면적이며, 간척지 조성으로 인하여 우리 국토 면적은 10만 140㎢에서 10만 541㎢로 0.4% 늘었으며, 행정구역상 간척지 면적은 군산시 71.1%, 부안군 15.7%, 김제시 13.2%를 차지한다고 한다.
군산에서 부안까지 바닷길을 이어서 서쪽은 부안이요 동쪽은 김제다.
그런데 부안군과 김제군은 땅따먹기로 지금도 싸운다고 한다.
오른 쪽 창가로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섬들이 보이는데 고군산 군도 또는 고군산 열도라고 불려오고 있지 않은가.
선유도 오토캠핑장에서 고군산 군도를 돌아보는 야영의 멋을 그려만본지 오래다.
젊은 날 가족과 함께 배타고 가서 묶었던 민박 아저씨가 생각난다.
배재고를 나오고 은퇴하여 낙향했노라고 하시던 분이였는데
지금 하늘 나라에 있을까 아니면 선유도에 있을까....^^
주인 아저씨집 습기 가득한 당신의 골방에서 지내던 어느 여름 날들이 그립습니다.
저두 이제 손주가 둘인 할아버지 되었어요.
명사십리길 해수욕장과 섬과 섬을 이어주는 꿈길 같은 다리들.
그 다리 위에서 보는 서해의 낙조라면 여기 선유도 만한 곳 있을까.
지금은 무녀도까지지만 차량이 갈 수 있고 선유도 다리는 올해년 12월에 개통 예정이란다. 자전거로는 가능하단다.
내변산 코스는 분소에서 재백이고개 갈림길에서 내소사가는 오른쪽 길로는 1:30분이고, 거기서 관음봉을 오르고 내소사로 내려가면 2:00시간을 넘고 가파르다고 탐방안내소원이 손수 설명해준다.
계곡은 온순하다. 시골 개울처럼 부드럽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탐방안내소에서 10분쯤 걸었을까. 숲길이 열리면서 꽤나 너른 터가 나온다. 선인봉 아래 실상사다. 내가 어린시절 앞마당처럼 뛰놀던 남원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와 같은 이름의 절터다.
산 너머 내소사와 이곳의 실상사가 대조를 이루 었을 법 한데,
사찰은 없고 절터만 남아 우람한 느티나무 한그루가 이 절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는 듯 하다.
젊은 날 직소폭포를 왔을 때는 폭포 아래까지 내려 갔었는데 지금은 휴식데크에서 올려다만 본다.
푸른 숲 사이로 30여m 폭포가 하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수량이 많으면 시원한 물보라를 만들 수 있을텐데.....
직소폭포를 지나서 일부는 술판 벌리니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
뒤 따라가던 나머지 일부 8명 (김승호어부인.김창덕.김택동.노태섭.박해관.엄영섭.장경만.하동만)이 앞서게 되었고 지름길을 택한다.
다른 팀은 기여코 관음봉을 정복하고 내소사로 하산하고
우리 지름길 팀은 주막집에 3:40분 도착하니 4:30분까지 내소사 만남은 너무이른 시간이다.
지방에가면 그곳에는 항상 민속주가 있다.
여기 변산 줄포 막걸리도 역시나이며 김치 맛이 좋으니 두부 한모듬이 있었으면 더 좋겠다고 하였으나, 주막집 아주머니 핸드폰 놀이만 하고 들을체 하지 않는다. 두부가 없는 모양이다.
동네 길 감나무에 벌써 홍시가 달려 있고 울타리 넘어로 늘어진 대추가 제법 빨갛게 영글어 있다.
대추 하나 따 먹던 경용이가 달콤하다고 대추 맛을 칭찬한다.
다음 날 향우정에서 사비정식과 수육으로 거나한 점심 만찬 후 할머니 노점상에서 5000냥어치 대추를 사서 나눠준다.
할머니 왈 대추는 남성네들 젊어지는 거라고 한다.
경용이 덕분에 우리들 많이 젊어지게 되었다.....^^.
내소사를 떠나 곰소만 해변을 달리며 차창가 바다가 절경이다.
곰소만 건너편은 김제 넓은 평야가 천혜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변길은 거제도 해안길 같이 고즈넉하다.
서해 낙조를 보러 궁항으로 간다.
궁항은 ‘잔라좌수영셑트장’있는 곳이다.
일몰시간이 18:32분이라고 일정표에 되어 있는데 붉게 물든 서해 낙조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잔라좌수영셑트장이다.
황혼의 우리들이 서해 황혼 낙조를 감상하며 아름다움에 취한다
황혼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인생들이려니.
관리하는 두 젊은이가 활극(?)이라는 제목의 영화 촬영을 준비 중이라고 귀뜸해 준다.
우리들은 줄포에서 곰소망 해변길따라 숙소 대명리조트가 있는 격포로 간다.
대명리조트에 짐을 풀고 빨간 흘림체 글씨가 인상적인 ‘격포식당’에서 회정식 으로 포만 가득 배를 채운다.
모두들 식욕들 왕성하다.
채석강변에서 바다냄새 맡으며 밤하늘 보며 폭죽놀이도 구경한다.
끝없는 대화가 이어지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니 노래방에서 판을 벌렸는데 광란의 밤이였다고 한다.
둘째날 아침 10시까지 적벽강을 둘러 보는 시간이다.
20여분 올라가서 후박나무군락지를 만나고 예상치 못한 코스모스 군락지를 보고 그 크기에 모두들 놀라는 모습이다.
수성당에 심청이 빠저 죽었다는 인당수 전설이 있는데 백령도에서 보이는 황해도 바다 인당수는 어떤 차이인지 모르겠다..
채석강의 끝인 죽막(竹幕)마을을 경계로 북쪽이 적벽강이고, 남쪽이 격포해수욕장을 포함한 채석강(전북기념물 28)이다.
변산해변의 절경을 빚어내고 있는 적벽강은 붉은색을 띤 바위와 절벽으로 해안이 이루어져 있어 맑은 물에 붉은색이 영롱하며, 특히 석양 무렵 햇빛을 받아 바위가 진홍색으로 물들 때 장관을 이룬다. 후박나무 군락 앞 해안의 암반층에 형성된 석물상 가운데 어느 것은 여인의 유방 같고, 또 어느 것은 토끼 모양을 하고 있는 등 바위 하나하나가 만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신당 인근 주민들이나 어부들은 해신과 그의 딸 8자매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정초에 격포(格浦)마을에서는 삼색 실과와 술·과일·포(脯) 등을 차리고 궂은 일이 없고 생기복덕한 제주(祭主)를 뽑아 정성껏 제사지낸다. 제일(祭日)은 정월 초사흗날인데, 근동 어민들이 모두 모여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린다. 당 안에 무신도(巫神圖)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불타 없어졌다.
이 수성당 주변은 성스러운 곳으로 함부로 접근이 금지되었으며,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1960년대 초까지 수성할머니의 영정이 있었는데, 외부인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없어져버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성당 [水城堂] (두산백과)
우리는 흔히 백제를 이야기하며 ‘백제의 미소’라는 말을 접한다.
정겨운 여운을 준다.
부여 박물관 입구에서 ‘백제의 미소’안내글이 반가운데
집에와서 출처를 찾아보니 김원룡의『한국미의 탐구』(열화당.1978))에서 쓰여진 말임을 알게 되었다.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호]모습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역사에 대한 미천한 지식에 부끄러웠는데
집에 와서 마눌님과 아들과 함께 나누던 이야기를 대충 정리해 본다.
글이 매끄럽지 않다.
3국중에서 가장 앞서갔던 백제의 역사를 다시 인식해 본다.
우리나라 고대왕국의 형성은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때 백제는 3세기 고이왕부터다.
율령제정이 왕국을 세우는 바로미터가 되는데
백제는 고구려보다 늦게 고대왕국을 형성했으나, 체제정비를 위한 율령반포를 같은 3세기에 행하여 가장 이른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고구려는 4세기후반 소수림왕때 가서야 율령 반포했다고 한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거서간(신령한 대인)-차차웅(제사장)-이사금(연장자) 칭호를 가진 부족국가의 시기를 거쳐 4세기까지 내물마립간(대수장)때가 되어서야 고대왕국을 형성하려고 율령반포와 불교수용을 했는데 그 때가 6세기 초 법흥왕 때였으며 이는 삼국 중 가장 늦었으며
신라의 전성기는 6세기 중반 진흥왕 이후로 늦게 시작하였다고 한다.
백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신라보다 멀리 떨어져있던 일본과의 교류가 오히려 잦았는데
이는 일본 고대 6세기 아스카문화에 영향을 준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 천왕이 백제의 후손이라는 사실 어제 KBS 다큐에서도 보여주있었다.
백제의 귀족 노리사치계는 같은 시기 일본에 불교 전래하였고.
신라는 이전부터 왜구의 끊임없는 침략과 노략질로 일르 해결하기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하였겠다.
광개토대왕이 원정을 와서 왜구를 격퇴(A.D400)한 기록이 광개토대왕릉비와 호우명 그릇의 유물로 남아있다.
왜구격퇴 사건이 발단이 되어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신라는 이후 발전이 더디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7세기 신라의 팽창을 견제하고자 동맹을 맺기까지 둘 사이는 앙숙 관계였다.
그 이유는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백제 전성기에,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A.D 371)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이를 갈던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막강 화력과 대규모 병력으로 한강유역을 탈환하고자 했고,
고국원왕 전사 약 100년뒤인 A.D 475년, 마침내 장수왕은 서울 아차산성에서 백제 개로왕을 전사시키는 복수를 감행하였다.
이후 한강유역을 뺏긴 백제는 문주왕때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였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애쓴 무령왕 시대를 지나 성왕은(A.D 523~554) 사비(부여)로 다시 천도하였다.(A.D 538)
이 시기는 6세기 중반으로 신라에선 불세출의 진흥왕(540~576)이 왕권을 잡고 화랑도를 기반으로 영토확장을 꿈꿨는데, 진흥왕은 백제에게 장수왕 사후 약해진 고구려를 함께 밀어내면 한강유역을 백제에게 주겠다고 약조했었으나, 비옥한 땅 한강유역을 어디 그리 쉽게 내줄 수 있었겠는가.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주도권 다툼과 패권은 한강유역 탈환에 달려있었다.
A.D 553년, 진흥왕은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탈환한 뒤, 이전에 백제에게 말한 한강유역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파기하며 100년을 이어온 나제동맹을 결렬시켰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키기에 이른다.
이렇게 백제의 웅진•사비시대 중흥 노력은 무령왕과 성왕에서 끝나게 되고,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나날이 커져가는 신라의 세력 아래, 백제는 7세기 무왕(600-641)무렵 익산으로 천도를 꿈꿨으나 실패했고, 이어 의자왕(641-660)이 즉위하게 되었다. 의자왕은 신라를 견제하고자 고구려와 여제동맹을 결성하여 반격, 신라 40여성을 탈환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다했으나, 나•당 연합군의 공격, 황산벌 전투의 패배 그리고 사비성의 함락으로 멸망하고 만다.(660)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부소산성은 세계문화유산이다.
700년 찬란했던 고도다.
소실되어 사라진 백제의 자국들이 많지 않다고 하지만
백제의 미소가 있어서 우리들의 옛 고향냄새가 나는 듯 하다.
부소산성은 올때마다 새롭게 단장되어 가고 있다.
조용한 정취는 간데 없고 제법 시끄러운 관광지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옛 성터 공주와 부여는 나름대로 백제의 향기 가득한 곳 이다.
< 고란초 일화 >
백제 의자왕은 고란사 약수를 좋아했습니다
아침마다 고란사 약수를 떠오라고 명령했습니다 .
문득!
고란사 오가기가 수월치 않은데 아무 물이라도 떠온다면…
신하에게 다시 명하였습니다.
약수에 '고란초 잎'을 띄워서 오너라.
이때부터 '고란초'로 부른답니다.
< 낙화암 이야기 >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 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서기 660연 (의자왕20년) 사비성이 함락되던 때의 이야기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화암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고란사절터는 떠나기 섭섭한 여운을 준다.
어쩌면 산절벽아래 호젓이 자리하고 있는가.
백마강 물 소리들리고 바람불면 고란사 풍경소리가 어디로 퍼저 나갈련지.
백제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바라본다.
부여를 감싸고 도는 금강하구를 왜 백마강이라 부르는가 했는데.
백제의 가장 큰 강이라서 그렇다고 하며 부여를 감싸고 도는 금강하구만을 부여군에서만 백마강으로 부른다고 한다.
망산이 선택해준 덕분이다.
배타고 백마강을 휘돌아 보았으니 오래 묶은 숙제 하나를 풀고 가게 되었다.
비로소 부여에 와서 할 일을 하고 가는 기분이다.
배타고 백마강 유람이 여행의 백미요, 크라이막스라요, 화룡정점이다.
강가 눈치고기들은 가두리처럼 가두어 좋은 것인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강에서 자유로운 데 먹이를 주니까 몰려와 있는 것이라고 한다
구드래 나루터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다.
보라....우리를 부르지 않는가.
사실 지금은 그런 감정이 옅어졌다. 그게 백제라서 쓸쓸한가 보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정림사지 터 기와집하나와 덩그렁이 놓여 있다.
찬란했다는 문화재들을 보니 쓸쓸함과 허허한 감상이 몰려온다.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도 뼈만 앙상하고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골절 기둥만 덩그렁 세워저 있기는 하다.
전란에 소실되고 불타고 부서지고 그래서 어쩌면 저렇게 초라함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궁남지 세 글자는 궁궐의 남쪽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는 주변을 따라 산책하기에 좋다.
궁남지에 연 곷은 7월에 만개하여 축제는 끝났지만 여러종류의 연꽃들이 연못에서 반긴다.
연들의 다양성이 흥미롭다.
백제인들의 소박한 모습 궁남지가 보여주는 듯 하다.
경주의 안압지가 통일신라 궁궐건축의 당당함을 보여준다면 궁남지의 차분한 아름다움은 백제의 단아한 옛 멋을 느끼게 해 준다고도 한다.
궁남지 남쪽 양지바른 언덕에서 선화공주와 서동.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하나 읊조린다.
서동요(薯童謠)
저자: 무왕
선화공주님은(善花公主主隱)
남몰래 사귀어 두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 방을(薯童房乙)
밤에 무엇을 안고 가다(夜矣 夗[卯]乙抱遣去如)
백제금동대향로는 국보287호로 되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모형을 거실 장식장 꼭대기에 올려놓고 보물처럼 30년은 훌쩍 넘었다.
오늘 박물관 상점에서 실물 크기의 모형물 청동으로 만든 것은 170,000냥 금색도금한 것은 300,000냥 가격표가 붙어 있다.
여행길에 구입해온 광개토대왕 비문도 에밀레종도 백제금동대향로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우리 조상들에 대한 숭상이 있어서 아닌가.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이다.
신령스러운 산위 한 마리의 봉황이 궁남지 연꽃 물고 하늘을 나르고.
봉황새 나르니 두 스님이 사바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심심 산골 구곡 산봉우리에 신선들이라도 노니는 듯.
신산에 이름 모를 스물다섯 동물들이 뛰어 노닐고 있다.
대향로속 다섯 악사들이 백제의 부귀영화를 연주하고 있는데
원함.종적.북.거문고.배소 다섯 악기로 화음을 만든다.
향기로운 연꽃이 3단으로 몸을 감싸고 있구나.
향로받침에 용틀임하며 시산을 받치고 있어
향피워서 우리나라 길이 길이 기원하누나.
2017년 용두열 친구들과 함께한 가을 여행.
고맙기 이를데 없으니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다.
용두열 가을여행-일정표
◆ 9월 22일(금)
8:00 압구정 역 출발(용화관H)-새만금 방조제-고군산대교 무침, 부진フ
12:30 점심식사(변산온천
14:00 변산 내변산탐방지원센터 도착(* 등산팁은 내변산등산)
14:30 청자박물관(063 580 3964) 해설사 대동 판람(-1
15:50 곰소항 도착(-16:20분 젓갈 등
16:30 내소사(* 17:00 통산팀 합류)
17:30 내소사 출발
18:00 궁항 전라좌수영 세트장 관람
19:00 저녁식사(격포식당; 회정시)
20:00 숙소(채석강 리조트 063 584 8096 ;
산장 063 584 4874-5: 바지락 죽, 부
5:30)
감상 (18:32 일몰) 및일몰 방 배정은 사전에 알림)
21:00-22:00 화합의 시간(간단한 맥주 파티)
◆ 9월 22일(토)
07:00 기상, 세면, 짐꾸리기
08:00 아침식사(격포식당 063 583 5365: 가정식 백반)
08:30 채셔강, 적벽강(수성 당) 트래깅(간조시간 11:10)
10:00 격포(숙소) 줄발
12:00 부여도착(부소산성 낙화암 고란사 탐방)
13:00 점심식사(향우장 041 835 0085 사비정식 및 수육)
13:30 백제유적 관람(정림사지, 박물관, 궁남지)
16:00 부여 출발
18:30 서울 도착
◆ 상기 일정의 큰 변경은 없으나, 사정상 약간의 변동은 생길 수 있습니다.
변산 [邊山]
높이 : 510m
위치 : 전북 부안군 변산면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절경이 이어지는데 이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변산은 바다를 끼고 도는 외변산과 남서부 산악지의 내변산으로 구분한다.
내변산 지역의 변산은 예로부터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이라고 불렀으며 최고봉인 의상봉( 510m)을 비롯해 쌍선봉, 옥녀봉, 관음봉(일명 가인봉), 선인봉 등 기암봉들이 여럿 솟아 있고, 직소폭포, 분옥담, 선녀당, 가마소, 와룡소, 내소사, 개암사, 우금산성, 울금바위 등이 있다.
내소사 절 입구 600m에 걸쳐 늘어선 하늘을 찌를 듯한 전나무숲도 장관이다. 내변산 깊숙한 산중에 직소폭포는 20여m 높이에서 힘찬 물줄기가 쏟아지고 폭포 아래에는 푸른 옥녀담이 출렁댄다. 이외에 개암사, 개암사, 북쪽에 솟은 두 개의 큰 바위인 울금바위(높이 30m,와 40m),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뻗은 우금산성,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월명낙조'로 이름난 월명암과 낙조대도 명소다.
외변산으로 부르는 이 반도 해안에는 가장 경사가 완만하다는 변산 해수욕장을 비롯해 고사포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 등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여름철 휴양지가 많다. 특히 오랜 세월 파도에 씻긴 채석강과 적벽강은 변산반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다. 변산은 산행과 관광을 즐길 수 있고 여름에는 해수욕을 겸할 수 있다.
인기명산 [43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은 7월의 바캉스를 겸한 바다산행과 내소사 단풍이 곱게물드는 10월에 많이 찾는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울창한 산과 계곡, 모래해안과 암석해안 및 사찰 등이 어울려 뛰어난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국립공원으로 지정(1968년)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산이면서 바다와 직접 닿아 있는 특징이 있음. 직소폭포, 가마소, 봉래구곡, 채석강, 적벽강 및 내소사, 개암사 등 사찰과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 등 희귀동·식물이 서식한다
백마강 전설
부여에서 백마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설명드리겠습니다.
옛날 백제시대에 부여에서 금강을 사자수. 사비수. 백간등으로 불리었으나 당시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가 멸망후 백마강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당(羅唐)연합군의 물밀 듯한 침공에 7백년 백제사직이 무너지고, 망국의 치욕에 떨던 의자왕(義慈王)도 포로의 몸이되어 멀리 불귀의 땅 당경에 끌려가자 돌연 고요하던 백마강에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라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돌풍을 몰아오고 호수와 같던 강물은 마치 바다의 노도와 같이 거세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의 군선과 군병들은 물속에 삼켜졌다.
이런 당병들의 아비규환의 참변이 하루 이틀 계속되기를 거의 한달에 이르렀다.
사비성을 초토화 시켜버렸으니 공주의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소정방(蘇定方)은 이 계속되는 참변의 소식을 듣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관(日官)을 불러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일관은 소정방에게 "아무래도 백마강
의 용신이 된 무왕의 혼이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하고 알리었다.
"뭣이 무왕의 혼이라니?"
"네,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武王)은 원래 소부리의 궁남지(宮南池)에 살던 용이 그 곳 궁녀와 상통하여 낳은 자임으로 죽어서 용으로 다시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음, 그 말이 틀림이 없으렷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괴변이 강에서 일어날리 만무하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묘책이 없겠는가?"
"그 용을 낚아채는 방법이 있사옵니다만."
"아니 용을 어떻게 낚는단 말인가?"
소정방의 귀가 번쩍 들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은 백마의 고기를 가장 즐긴다 하오니, 그를 미끼로하면 틀림없이 용이 걸릴 것입니다."
소정방은 곧바로 소부리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관이 일러준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속에 솟아난 바위에 올라 타고 부하를 시켜서 만들게 한 철사 낚시줄에다 백마의 고기를 끼워 강물속에 던졌다.
한편 용은 백제 사직의 원수 당에 대한 앙갚음으로 매일 백마강 위의 하늘에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오랴, 또 강물에 파도를 일으키랴, 소용돌이를 발생시키느라, 몸이 닳도록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보니 피곤도 하고 몹시 시장기
도 돌았다. 이 때 마침 눈앞에 그렇게도 좋아하는 백마의 날고기가 물 속에 떠내려 왔으니 "이게 웬 떡이냐."하고 용은 얼른 그 백마고기를 꿀꺽 삼켰다.
바위 위에서 낚시줄을 잡고 있던 소정방은 "옳지 걸렸구나!"하고 낚시줄을 당겼다. 놀란 것은 용이었다. 용은 아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소정방은 하마터면 물속에 이끌려 빠질 뻔 했으나, 발에 있는 힘을 다 주고 버티었다.
이렇게 기를 쓰며 당기는 소정방과 이끌리지 않으려는 용 사이에 옥신 각신 필사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소정방이 올라 타고 있던 수중 바위에는 발자국과 낚시줄이 마찰되어 흠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에 걸린 용의 기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가기만 하는데 소정방에게는 힘이 센 부하 장병 수명이 달려들어 가세하는지라 대세는 일변했다.
용은 물 아래 위로 출몰하며 발버둥을 쳤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저항하는 소리를 높이며 낚시줄을 낚아 채었다.
그러나 끝내, 황금 비늘을 공중에 번쩍 빛내며 백마강 동쪽 마을에 떨어져 폭양에 썩기 시작하더니 그 지독한 썩은 내는 멀리 80리 떨어진 공주의 한 마을까지 진동하였으니 이 때부터 그 마을 이름이 「구린내」가 되었고,
소정방이 올라탔던 수중바위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지어졌으며, 또한 용이 낚인 부근의 강 이름도 이 때부터 백마강(白馬江)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부여에서만 금강을 백마강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금강이 흐르는 다른지역은 모두 금강으로 부릅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 부여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 말기의 화강석 석탑.
국보 제9호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석탑 크기 높이 8.33m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좁고 얕은 단층 기단(基壇), 사각형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층 옥개석(屋蓋石)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등이 목조탑파(木造塔婆)의 구조와 비슷하며, 또한 이런 점이 특징이다.
제1탑신(塔身) 4면에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紀功文)이 있어 속칭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각부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부 수법은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이며, 전체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풍겨 후세에 모방품(模倣品)이 많이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고란약수와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 이야기
부여 부소산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약수에는 간난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득한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는 일산(日山:금성산)의 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 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다음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가 없고 간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아차했다. 도사가 한 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간난아기를 안고 집에 들어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善花公主와 薯童 전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미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의 용과 정을 통해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평상시에 마를 캐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고 고운 것이 짝할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마을의 여러 아이들에게 먹이니, 여러 아이들이 그를 친하게 따랐다. 곧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했는데,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궁중에 이르자, 백관이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게(내치게) 했다. (공주가) 떠나려 할 때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소에 이를 무렵,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을 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 따라온 사람을 알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게 (그를) 믿고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라 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 뒤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왕후가 준 금을 내다 (팔아) 생활을 꾸리고자했다. 서동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입니까?”
“이것이 바로 황금입니다. 한 평생(백 년)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땅에 (이것이) 진흙처럼 흩어져 쌓여 있습니다.”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했다.
“이것은 바로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서방님께서 지금 금이 있는 곳은 아신다면, 이 보배를 부모님이 계신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에 금을 채취해서 쌓으니 구릉과 같았다.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을 수송할 계책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저는 신력으로 수송할 수 있으니 황금을 가져오십시오.”
공주는 편지를 써서 황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두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황금과 편지를) 하룻밤에 신라 궁중에 옮겨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변(神變)을 이상하게 여기고, (서동을) 더욱 존경하여,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과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했는데,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다. (그러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출현하였는데, 수레를 멈추고 치경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 땅에 대가람을 짓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허락하고는, 지명 법사가 있는 곳에 이르러 못을 메울 일을 물었다. (그러자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곧 미륵삼존 불상과 전과 탑, 낭무[행랑]를 각 세 곳에다 만들고, 이름을 미륵사[전북 익산군 금마면 용화산에 있던 절]라 했다.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도왔는데,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동요 [薯童謠]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2010. 1. 29., 도서출판 하우)
백제 금동 대향로
완숙한 주조 기술과 정치한 도금술의 최고봉 '백제 금동 대향로'
향로(香爐)는 고대 인도, 중국 등지에서 냄새의 제거, 종교 의식 그리고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웠던 그릇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4천 년 전에 향로가 만들어졌으며, 중국에서는 전국 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한대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전한 무제부터 왕족의 무덤을 중심으로 출토되는데, 왕족을 제후국의 왕으로 봉하는 조치에 따라 왕실에서 만들어진 박산향로(博山香爐)가 각 지방으로 확산·보급되었다. 박산향로의 박산은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산과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상서로운 동물이 살고 있다는 신비로운 세계를 의미하며, 중국에서는 한대와 삼국 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박산향로의 출토는 평양 낙랑 고분인 석암리(9호, 219호분)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 박산향로가 있으며, 이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 금동 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의 출토는 백제의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과 뛰어난 예술적 역량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백제 금동 대향로(국보 287호, 여기서 금동이란 청동 주물에다 금을 입힌 것을 말한다.)의 제작 시기는 함께 출토된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의 명문에서 보듯이 백제 27대 위덕왕(창왕)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는 높이가 61.8cm, 최대 지름 19cm, 무게 11.85kg이나 되는 유례없는 대작으로 중국의 어떠한 박산향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걸작품으로 용과 봉황의 비중이 상당히 두드러져 있다.
이 향로는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향로의 꼭대기에는 봉황 한 마리가 여의주(如意珠)를 턱밑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모습이며, 그 아래로 신선들이 사는 박산(博山)이 있다. 맨 아랫부분에는 한 마리의 용이 살아 꿈틀거리듯 다리 하나를 치켜들고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연기는 봉황의 가슴과 뚜껑에 뚫려 있는 12개의 구멍으로 피어오르도록 고안되어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중국 한나라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전체적인 모티브는 무령왕릉 출토 동탁은잔과 부여외리 출토 산수봉황무늬 벽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 금동 대향로는 우리 고대 문화의 결정체로 그 정교함과 조형미에 있어서 동아시아 금속 공예의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용접 부분이 네 부분밖에 안 되는데 그 정교한 모습을 어떻게 통째로 주조했는지 놀라운 기술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이 향로의 성분을 보면 주석이 14.3%, 구리가 81.5%, 납이 0.07%로 납 성분이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당시 청동기에는 납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비해, 이 향로에는 납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청동에 금을 도금하자면 되도록 납의 함량을 줄여야 수은아말감 도금법(수은에 금을 녹인 뒤 금속 표면에 도금하는 것, 이 경우 적은 열을 가해도 관련 금속은 점성을 띄게 된다.)으로 금을 쉽게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금은 수은에 잘 녹고, 수은은 100℃ 정도로 가열하면 모두 날아가 버린다. 이런 금과 수은의 성질을 잘 파악한 금동아말법(구리로 된 본체에 수은과 금을 섞은 도금액(아말감)을 바른 뒤 가열하면 수은은 날아가고 금만 남게 되어 도금되는 기술)을 이용한 도금 기술은 백제의 하이테크였던 것이다.
일반적인 도금 방법으로는 금만을 사용한 금아말감이나 금·은아말감 기법을 사용하는데 반해 백제 금동 대향로는 금·구리아말감 도금법을 사용한 것에서 그 창의성과 독창성이 발견된다. 금·구리아말감 도금법은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동 대향로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로 미루어 이 도금법이 백제만의 획기적이고 독특한 도금법일 가능성을 한층 더하여 주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에 이러한 아말감 기법을 사용한데 비해 유럽에서는 그 사용 시기가 중세라는 점에서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금속 도금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 시대의 수은아말감 기법은 고려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였는데, 이 시기에 만든 청동거울은 주석아말감 도금법(수은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금속 표면에 도금하는 것)을 응용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조선 시대에도 금동아말감 기법과 주석아말감 기법이 계승 발전되었다.
오늘날에는 보다 안정적으로 금도금을 할 수 있는 전기 분해를 이용한 금도금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듯 신기술이 집약된 백제 금동 대향로는 전체적으로 보아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세부 표현에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또한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 등 동양 사상의 근본 원리를 백제 사상으로 융합하여 완벽한 조형 예술(造形藝術)로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금속 공예 기술면에서도 완숙한 주조 기술(鑄造機術)과 정치(精治)한 도금술(鍍金術)이 이루어 낸 최대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완숙한 주조 기술과 정치한 도금술의 최고봉 '백제 금동 대향로'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 2012. 4. 30., 교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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