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雞林歷史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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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고도 서라벌 순례 낭산 구황동 폐왕릉지
浮雲 추천 0 조회 6 26.06.05 04:35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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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6.12 19:05

    첫댓글 1400여년 전 신라 왕릉의 대형 석물들이 경주 낭산 기슭에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낭산 동북쪽 황복사터 부근의 경작지에서 발굴된 신라 왕릉급 무덤의 대형 석물 40여점을 옛 원형대로 아귀를 짜맞춰 이어놓았다. 잘게 깬 돌들을 펴놓고 그 위에 복원한 석물들은 신라 왕릉의 얼개와 축조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지름 22m에 달하는 왕릉의 전체 규모는 물론 탱석, 면석, 지대석, 상대갑석 등 봉분 둘레를 싸면서 망자의 혼을 지켰던 신라 석물들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치밀한 수학적 곡률 계산에 따라 면석과 상하대 갑석의 앞면을 부위에 맞춰 둥그런 원호의 곡면으로 다듬는 ‘라운딩 기법’을 구사하여 배치하였다.전체 석물들이 다 수습된 것은 아니지만, 발굴된 석물들을 맞춰 보니 봉분을 지탱하는 탱석과 둘레를 싸는 면석이 각각 36개씩 딱 들어맞게 짜인 것으로 드러났다. 고도의 수학 지식이 뒷받침된 신라인의 건축·토목 기술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작성자 26.06.06 03:47

    이 석물들은 신라 34대 효성왕(737~742)의 왕릉을 두르려고 만들었던 호석 시설의 일부로 보인다. 공사가 중단되면서 한동안 방치됐으며 이후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 관청 등의 건물 기반재 용도로 달리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자였던 효성왕이 유언대로 유골을 화장함에 따라 왕릉 공사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무덤을 조성하려 한 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애초 석물이 발견된 유적 옆 공터였던 현재 복원 현장을 왕릉 터로 지목하고 조사했으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했다. 개당 1톤에서 1.5톤에 달하는 무거운 석물들을 먼 곳에서 옮겨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유적에서 좀더 동쪽에 있는 보문들 어딘가에 만들다 만 왕릉 터가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 작성자 26.06.06 03:47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전(傳)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동쪽으로 약 135m 떨어진 지점의 논 경작지를 조사한 결과 홍수로 파괴된 신라왕릉과 면석, 탱석 등 관련 석재유물이 오래 전부터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 신문왕릉이나 성덕왕비의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 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의상대사의 탑돌이와 관련있는 절인 황복사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요 유적지다.

  • 작성자 26.06.12 19:06

    추정 고분지에서 확인된 석재 유물은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이다.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너비 16~17m 도로 등이 드러났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도깨비 기와, 신라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은 추정명문)’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점이 출토됐다.

  • 작성자 26.06.06 03:48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계산한 왕릉의 지름은 약 22m다. 전(傳)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다.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다가 축조공사를 중단한 가릉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의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742)으로 추정된다.

  • 작성자 26.06.12 19:06

    가릉 주변에서 조사된 건물지는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다.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았고 관청명인 듯한 ‘습부정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체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수도 있다.

  • 작성자 26.06.06 03:49

    도로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에서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다.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16~17m 정도이므로 왕경의 방리(坊里) 구획에 따라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 즉 절이 차지하고 있는 구역이나 왕릉을 조성하려고 미완성 대형 석재를 이동시키는 특수 목적으로 가설됐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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