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303) / 독일
베를린 모더니즘 주택 단지(Berlin Modernism Housing Estates; 2008)
베를린 모더니즘 주택 단지는 베를린에 있는 6개의 모더니즘 주택 단지로 구성되어 있다. 베를린이 사회적・정치적・문화적으로 발전하던 1910~1933년까지 특히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혁신적 주택 정책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도시 계획, 건축, 조경 설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도입하여 저소득층의 주거와 생활환경을 개선한 주택 개혁 운동의 우수 사례이다. 주택 단지는 또한 새로운 도시・건축 형태의 훌륭한 사례로 새로운 설계 디자인과 기술적・미학적 혁신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으며, 세계 주택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 마르틴 바그너(Martin Wagner),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등의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였다.
베를린의 공원 도시와 대규모 주택 단지 건설자들은 적합한 주택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베를린 시골 외곽 지역에 대지를 확보하였다. 외곽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도시 경제와 기반 시설이 전제되어야 했다. 협동조합과 비영리 기관들이 주도하여 건축하였으며, 새로운 주택 단지는 통근을 용이하게 해주는 역들의 인근에 건축하였다. 건물로 빼곡한 예전의 폐쇄적 주택군은 공원 시가지로 조성된 개방적 주택 단지로 바뀌었다. 회랑 같은 거리와 광장을 위한 예비 공간을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새로운 건축 개념은 19세기적 도시 개발에서 최고의 전환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바이마르공화국의 건립과 사회 정책뿐만 아니라 베를린 시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시 개발 계획의 작업 조건은 1918~1919년에 독일이 공화국으로 탈바꿈함에 따라 크게 변하였다. 지역・지방 의회에 적용되는 민주적 선거법은 사회적인 개발・계획 정책으로 길을 열었다. 이와 아울러 이러한 새 질서는 오랫동안 미뤄 온 행정 구조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전 지역에 통일된 계획 원칙을 적용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베를린은 시의 투자를 받은 전기 기술의 발전으로 경제적 확장을 이루었고, 그 덕분에 주요 도시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시 계획 작업은 베를린 중앙 행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주택 정책과 도시 개발 지침은 시 의원인 루트비히 호프만(Ludwig Hoffman)과 마르틴 바그너(Martin Wagner)가 정했다. 사회 민주주의자이자 건축가인 바그너는 주택 단지의 개선을 추진하였다. 베를린에서는 전쟁에 따른 주택 부족이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경제적 상황 아래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새로운 건축법이 통과되면서 민간 주택 건축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지만 소규모 공동 주택 수요는 10만~13만 단위에 이르렀다. 물가 상승과 화폐 개혁 후 주택건축은 1924년에 도입한 주택 저당 세금을 통해 마침내 다시 활성화되었다. 1925년에 발효된 건축 개선 규정은 새로운 사회 주택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주거 지역에서 건물 밀도는 줄어들었고, 각각의 구역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도시는 여러 개발 구역으로 나뉘어 건물 밀도가 높은 도시 중심에는 5층 건물을 허용하였지만 외곽으로 갈수록 넓은 주택 단지가 형성되었고 건물 높이도 2, 3층으로 제한하였다. 건물 밀도 역시 줄어들어 십자형 건축물이나 측면 부속 건물은 금지되었다. 이는 베를린 시에 신건축 양식[neues bauen]에 기반을 둔 주택 개발이 실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4~1931년까지 7년 동안 146,000동의 공동 주택이 만들어졌다. 당시 건축 총량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1950년대에조차 갱신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양이었다. 바그너는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 베를린의 비영리 주거 복지 부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도시 개발을 위해 다핵(多核) 모델[polycentric model]을 만들어 도시와 시골의 괴리를 없애고자 했다. 베를린에서 주거 밀도가 높은 내부 지역은 환형 철도 노선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노선의 녹색 지역 안에 개방형 다층 건물의 주거 지역들을 조성하여 도시 구조의 한 부분을 채웠다. 주택 저당 세금 실시 초기부터 주택 정책의 주요 초점은 교외 지역에 1가족 소규모 주택 단지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정책 담당자들은 노동자 공동 주택의 부작용을 해소하고, 인간-집-자연의 사라졌던 연계를 되살리려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주택 단지 거주자에게 자급적 식량 생산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 주택 저당 세금의 수입이 줄어들자 베를린 시는 자체 재정을 동원하여 리본 형태의 다층 건물 단지들을 조성함으로써 여전히 주택 부족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1928~1929년의 경제 위기는 주택 건축의 걸림돌이었으나 베를린 시는 1929~1931년에 시 소유지에 대규모 단지를 2개 조성하였다.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베를린 시의 조직과 임원 구조가 대폭 바뀌었고, 사회민주주의・좌익적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영향을 받아 온 민주적 주택 개발은 중단되었다. 마르틴 바그너 역시 담당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나치의 건축 정책은 기존과 다른 예술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근대성과 신건축 양식은 더 필요치 않았다. 브루노 타우트, 마르틴 바그너, 발터 그로피우스 등 모더니즘 주택 건축가들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주택 단지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큰 변화를 겪지 않았으며, 전쟁에 따른 파괴도 거의 없었다. 전후에 실시된 초기 개선 작업을 통해 이따금 외관을 바꾸곤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 원래 설계를 재건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이러한 작업 중 많은 부분이 기념물의 원래 모습을 재건하는 작업으로 대체되었다. 1950년대의 개선과 현대화 작업을 통해 브리츠(Britz), 실러파르크(Schillerpark), 바이세 슈타트(Weisse Stadt), 서베를린의 지멘스슈타트(Siemensstadt) 주택 단지의 기본 구조가 유지되었는데 이 작업들은 복구・보존 원칙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가르텐슈타트 팔켄베르크(Gartenstadt Falkenberg), 본슈타트 카를 레기엔(Wohnstadt Carl Legien) 등 동베를린에 속한 주택 단지에서는 개선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를린 서부에서는 1980년대에 복구 작업이 대폭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업들은 시 당국, 보존 전문가, 주거 공동체, 고용된 건축가들이 긴밀하게 협력해서 실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독일이 통일된 1990년대부터는 동부에서도 개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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