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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2년 나해 2월 성모신심미사 -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중국 고대 신화에서 인류를 처음으로 창조한 신은 ‘여화’라고 하는 여신입니다. 성경에서도 물론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창조하셨지만, 그 창조를 도운 ‘지혜’가 있었는데 신학에서는 그 창조 때부터 있었던 지혜를 마리아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여자로부터 태어나야 하기에 마리아는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가 됩니다.
여화라고 하는 여신이 마치 아담이 그렇게 태어났듯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신의 도리를 따르지 않게 되자 신들이 노하여 큰 홍수를 일으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가 연상됩니다. 그 홍수로 모든 인류가 다 죽고 난 뒤 박 속에 숨어 물에 둥둥 떠다니던 두 남매만 남게 됩니다. 오빠가 ‘복희’이고 동생이 최초의 인류를 창조했던 여신의 이름과 같이 ‘여화’입니다. 그리고는 노아의 방주에서부터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듯이 복희와 여화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태어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마리아께서 교회의 새로운 아버지 어머니가 되심과 같습니다.
여기서 동생 여화는 오빠 복희가 다시 인류를 일으키자는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산에 올라가 연기를 피우니 그 연기가 하나로 합쳐지고, 산 위에서 각자 맷돌을 하나씩 굴리니 그것이 합쳐지는 것을 보고 신의 뜻이라 하여 둘은 하나가 됩니다. 만약 근친상간을 이유로 동생이 오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인류는 새롭게 시작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성자의 사랑인 성령님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새로운 인류 ‘그리스도인’은 태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조의 ‘지혜’로서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가 되는 동시에, ‘교회의 어머니 (Mater Ecclesiae)’가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 몸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우리 모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인류의 어머니이시자 구원받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오늘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마치 여화가 그랬다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될 수 없었던 것처럼, 인간 구원은 시작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먹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열매는 제자들마다 각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 좋은 씨앗을 받고도 끝내 마귀가 되어버린 가리옷 유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받아들임의 차이입니다. 씨를 뿌리는 땅의 차이입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세상에 말씀이 사람이 되는 열매를 맺게 되신 것입니다.
창세기엔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2장 4절부터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사실 그 앞에 나오는 칠일 간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입니다. 늦게 쓰여진 것이 제일 앞에 나오고 가장 먼저 쓰여진 것을 뒤에 놓았을 뿐이지 시간상으로는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먼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시지 않고 그 땅을 갈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땅 안에 이미 물이 있었습니다. 그 물이 땅을 진흙으로 만드니 하느님께서 그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첫 번째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나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내용과는 사뭇 다릅니다.
앞에 나오는 세상의 창조와는 다르게 땅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오직 그 안에 습기만 차 있습니다.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상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나온 물도 마찬가지고 예수님께서 직접,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 오라. 내가 생명의 물을 주겠다’... 그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라고 요한이 말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땅에 벌써 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죄로 인해 저주받게 된 땅에 비가 내리는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실 때입니다. 그 이후로 땅은 다시 생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의 비가 내리기도 전에 물이 땅에 충만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물을 주시러 오시기 이 전에 이미 생명의 물인 성령님으로 충만했던 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라고 인사할 때, 이미 성모님에게 성령님의 은총이 가득했음을 말해줍니다.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성모님이 동정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남자가 없었는데도 그 땅에서 아들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선 처녀는 아들을 잉태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처녀만이 아들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의 씨는 오직 처녀지에서만 그 열매를 맺습니다.
처녀라는 의미는 순결함, 즉 죄가 없음을 의미하고 성모님은 진정 원죄까지도 없는 완전한 처녀이고 그래서 아들을 잉태하기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 분과 한 몸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이 죄의 그림자도 없는 순결한 처녀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죄를 짓는 백성을 ‘간음하는 여인’으로 표현됩니다. 성모님은 죄가 없으셔서 은총이 가득 하셨고 그래서 순결한 말씀의 신부로 새로운 그리스도를 낳으신 우리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묵상 2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며칠 전 눈이 많이 오는 날 어머니께서 넘어지셔서 팔목과 허리를 다치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금요일 저녁에 미사도 없고 시간도 남고 해서 어머니께 가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성체를 영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봉성체 준비를 해서 성당을 나서려고 하는데 중고등부 교사들이 저를 붙들었습니다. 몇 주 뒤에 중고등부 신앙학교를 가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데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제가 ‘미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사실 교사들조차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눈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보다도 하느님의 일이 우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애정이 하느님의 뜻에 우선한다면 가족들 앞에선 하느님의 종은 아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은총을 잃고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을 가장 높이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는데도 그 말씀 보다는 유혹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사람은 그 뜻을 따르는 사람의 종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혹자의 말을 따라 그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외에 어떤 것에도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는 한 때 제가 보좌신부로 있는 성당에 오셔서 사무실에서 저의 어머니라 하시며, “삼용이, 여기서 말썽 안 피워요?”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신부님인데 말썽 안 피우냐는 어머니의 말씀에 신자 분들이 웃으셨다고 합니다.
위신을 너무 세울 필요도 없지만 이렇게 위신이 일부러 깎일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저는 어머니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제가 있는 성당에 오시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사제가 되면 이제 신자들의 목자가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어머니가 성당으로 저를 찾아오시면 마마보이가 되는 것도 같고 신자들 보기에도 좀 그러니 성당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제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내려갈게요.”
어머니도 이 말씀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사제관에 있는데 핸드폰이 왔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당에 저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쯤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앞으로도 낫겠다싶어 전화로 그냥 돌아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고 다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니 저도 가슴이 아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꾸 찾아오실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밀쳐낼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성모님 또한 요셉과 약혼한 상태이면서도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즉 성모님은 자신의 약혼자가 있으면서도 그를 모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요셉 성인이 들었다면 매우 기분이 상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드님을 잉태하시고도 그 사실을 요셉 성인에게 한 말씀도 안 하시고 곧바로 엘리사벳을 만나러 떠나가십니다. 요셉은 성모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희생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성모님 또한 하느님의 뜻을 위해 인간의 애정에 매달려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주님의, 주님의’ 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종이 되기 위해서 성모님을 밀쳐내십니다. 성모님께 인간적인 애정을 주지 않기 위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기적을 청하실 때, “이것이 당신과 나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한 부모를 떠나 사라져서 3일 동안이나 부모가 찾아 헤매게 해 놓고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며 반문합니다. 또 한 번은 당신을 찾아온 성모님을 만나주지 않으면서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까지 “여인이여, 이 사람이 당신 아들입니다.”라고 하시며 마리아를 요한에게 보내십니다.
사실 이렇게 밀쳐내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갖게 되어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잊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해야 할 대상은 마리아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충실한 종이시지 마리아의 종이 아니십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하여 요셉을 밀쳐냅니다. 마리아는 요셉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바라보면 자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등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종이 된다는 그 집에 속하게 된다는 뜻인데 종이 되어야 그 집에 속하게 됩니다. 주님의 종이 되면 주님의 집에 거하게 되는데, 주님의 집이란 하느님나라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먼저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나라에 거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를 세상에 데려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먼저 하느님을 향하실 줄 아셨기에 요셉이 성가정의 가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아버지의 종이 되실 줄 아셨기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저도 예수님께 먼저 향할 줄 알아야 저의 어머니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사제인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은총을 입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그 은총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불이 붙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그 불을 붙여줄 수 없습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세상엔 잠깐 섭섭함을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모두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한 사람을 바라보면 다른 사람을 등지게 된다는 말씀...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