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명 칭 |
: |
연곡고택(延谷古宅) |
|
소 재 지 |
: |
용문면 제곡리 449 (원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449) |
|
건 축 주 |
: |
권성익(權聖翊) |
|
건축시기 |
: |
1795년 |
|
중건시기 |
: |
2000년 |
|
문 화 재 |
: |
시도민속자료 제103호(경북), 1993. 11. 30 지정 | |
건축 배경 |
|
연곡고택은 『연곡유집(延谷遺集)』1권에 있는 상량문에 의하면 안동권씨 저곡마을 입향조인 야옹 권의의 8대손 연곡(延谷) 권성익(權聖翊)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
건축 구성 |
|
건물의 구성은 정침, 사당, 대문채의 3동이 일곽을 이루며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에는 주거 공간인 정침이 전개되고, 오른쪽에는 제향 공간인 사당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조선 후기 경북 북부 지방의 보편적인 반가(班家)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면 양끝이 좌우로 한 칸씩 돌출되어 있다. 정침 정면 중앙의 중문간을 통해 안뜰과 안채로 출입하며, 여성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안뜰에 면해 자리 잡고 있다. 안채 평면은 정면 중앙에 3칸 너비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안방과 정지, 안대청을 두고, 오른쪽에 마리고방과 마루방, 상방, 상방부엌, 책방을 둔 형태이다. 안채는 지붕이 높은 홑처마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지붕가구는 덤벙주초 위에 각주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는 삼량가이다. 대들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천장은 마루만 연등천장이며, 온돌방은 종이반자로 마감하였다. |
문중 이야기 |
|
- 안동권씨(安東權氏) |
우리나라에 지체 높은 씨족이 심히 많으나 그 가장 성한 가문은 그 수를 가히 헤아릴 만하니, 안동권씨가 그중 하나다. 권씨는 본시 김씨 성이었고, 신라 왕족이다.
태사(太師) 권행(權幸)이 고려 초 백성에게 큰 공이 있어 지금의 성을 받았다. 이에 안동으로 적을 하니, 이분이 시조가 되었다. 권의의 동생 권벌(權橃, 1473~1548)은 1506년(중종 1) 진사가 되고, 장령, 도승지 등을 거쳐 기묘사화 때 삼척부사로 이에 연좌(連坐), 15년 동안 전리(田里)에 퇴처(退處)해 있다 뒤에 복직, 다시 한성판윤 등을 역임한 뒤 우찬성으로 원상(院相)을 역임한 중신이었다.
그러나 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태천, 삭주 등지로 유배된 끝에 마침내 배소(配所)에서 죽었으며, 선조 때 신원(伸寃)되어 좌의정 추증과 함께 시호까지 내린 문신으로 안동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특히 그가 종계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지춘추관사 및 세자우빈객 등을 역임한 사실을 보면 그의 학식과 덕망을 짐작할 수 있다. 권성익(權聖翊, 1735~1821)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 자는 문서(文瑞)다. 아버지는 권중두(權重斗)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로 형환(亨煥)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7세에 사륙부를 지었고, 14~15세에는 『사서』와 『육경』을 통하여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끝내 등과하지 못하였고, 향리에 있으면서 천명설과 성리설을 깊이 연구하여 「성지위천명(性之爲天命)」,「성리설변(性理說辨)」 등을 지었는데,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중심으로 하여 그 변화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늦게 후진을 모아 효제를 가르치고, 풍속의 순화에도 힘썼다. 저서로는 『연곡유집(延谷遺集)』2권이 있다.
|
관련이야기 |
|
- 연곡고택 |
연곡고택(延谷古宅)은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에 있다. 용문면은 예천군의 1읍 11면 중의 하나로 군의 서북쪽 끝에 위치한다. 저곡리는 용문면의 동쪽에 위치하며,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대저리와 하학리, 서로는 능천리, 남으로는 상금곡리와 예천읍 생천리, 북으로는 하리면 율곡리와 접한다.
저곡리는 ‘맛질’이라고도 하는데, 저곡이라는 한자어를 훈자한 것이다. 맛질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한천을 경계로 동쪽의 ‘큰 맛질’, 서쪽의 ‘작은 맛질’로 나뉘며,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큰 맛질은 대저리, 작은 맛질은 저곡리다. 연곡고택은 작은 맛질에 위치하며, 큰 맛질은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문계천을 경계로 위쪽의 저상, 아래쪽의 저하 마을로 나뉜다. 예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맛질’은 ‘금당실’과 함께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예천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오는 “금당•맛질은 반(半)서울이다”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반서울’이란 말 그대로 하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이는 산골 마을인 금당실과 맛질에 대하여 ‘서울과 비교해도 크게 모자랄 것이 없다’는 예천 사람들의 자긍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두 마을이 예천의 대표적 명문가의 세거지로 예천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두루 배출했기 때문이다.
|
관련인물 |
|
- 권성익 |
권성익(權聖翊, 1735~1821)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 자는 문서(文瑞)다. 아버지는 권중두(權重斗)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로 형환(亨煥)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7세에 사륙부(四六賦)를 지었고, 14~15세에는 『사서』와 『육경』을 통하여 학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끝내 등과하지 못하였고, 향리에 있으면서 천명설(天命說)과 성리설을 깊이 연구하여 「성지위천명(性之爲天命)」,「성리설변(性理說辨)」 등을 지었는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중심으로 하여 그 변화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늦게 후진을 모아 효제(孝悌)를 가르치고, 풍속의 순화에도 힘썼다. 저서로는 『연곡유집(延谷遺集)』2권이 있다.
|
|
|
- 권의 |
권의는 용문면 저곡리 작은 맛질 사람으로,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이다.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권벌의 형이며, 정암 조광조의 제자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의흥 등 두 고을의 현감을 역임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스승 조광조와 더불어 향약 시행에 대하여 깊이 상의하였고, 의흥현감 때는 향약을 군민에게 권장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기도 하였다. 안동 도촌에서 작은 맛질로 옮겨 살면서 후손이 일가를 이루었다. 아들 권심언은 아버지를 위하여 야옹정을 작은 맛질에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힘쓰기도 하였다. 권의의 무덤은 하리면 주초리 함포산에 있고, 시 등의 원고가 남아 있다.
|
예천 > 용문권 > 저곡리 |
|
|
- 저곡리. |
저곡리는 용문면소재지에서 직선상 동북쪽으로 3㎞ 정도 떨어져 있다. 용문면 소재지가 있는 ‘금당실’에서 14번 군도를 따라 동북쪽으로 4.5㎞ 정도를 가면 춘우재 고택이 위치한 저곡리 ‘맛질’이 나온다.
저곡리는 예천군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소저동과 백학동 일부를 병합하여 용문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저곡리는 ‘맛질’ 또는 ‘맏일’이라고도 한다. ‘맛질’이란 지명은 이곳에서 마(藷, 산약)가 대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 미도(味道)라는 한자에서 유래하여 맛길(味道)이 되었는데 경상도 지역의 사투리로 ‘길’을 ‘질’이라고 하기 때문에 ‘맛질’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맛질 저곡리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1545년 안동 서후면 도촌리 출신으로 작은 맛질에 정착한 권의(權檥)가 4형제 중 맏이였기 때문에 맏길(맛질)이라 하였으며, 또한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싼 가운데 큰 들이 펼쳐져 있어 맏일이라 불렀다고 한다. 맛질은 한천(漢川)을 경계로 동쪽의 ‘큰 맛질’과 서쪽의 ‘작은 맛질’로 나누어진다. 행정구역상으로 큰 맛질은 대저리, 작은 맛질은 저곡리이다.
맛질은 상금곡리 ‘금당실’과 함께 예천을 대표하는 양반마을인 동시에 인재의 보고였다. 문경송씨가 터전을 개척한 이후, 밀양손씨 사위에게 물려주었고, 밀양손씨가 후사가 없어 안동권씨 권의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금당·맛질 지역은 이들 성씨들과의 혼인 관계로 얽히고 설킨 인척관계를 맺어 왔다. 그래서 이들 지역은 지금까지 함양박씨·원주변씨·안동권씨, 그리고 예천권씨·의성김씨 등이 각기 집성촌을 이루며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가고 있다.
예천 사람들 사이에는 “금당·맛질은 반(半) 서울”이란 말이 전해진다. 이 말의 의미는 두 마을이 ‘서울의 절반 정도는 된다’는 뜻인데 번화함, 권세, 규모, 짜임새 등 여러 가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당·맛질’을 함께 묶어 얘기한 것은 두 마을을 한 마을처럼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마을은 4㎞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러나 금당실 앞에 펼쳐진 ‘배날들’과 맛질 앞의 ‘저곡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상 이웃하고 있는 마을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