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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분별력이 필요하다 (느12)
찬송 :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성경 : 느6:10-19절
오늘 찬양의 가사가 전부 좋지만 마지막 이 부분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며 다가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아멘.
오늘까지 라마나욧선교회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생각이 셀 수 없이 많으셨고, 그의 자비가 무궁하셨으며, 날마다 그분의 성실하심이 새롭게 다가왔으며 끝이 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임을 고백하며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린다.
어떤 강사님은 늘 물으신다.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고 ... 그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주님이 하시는 기적이라고 ... 나도 날마다 놀라며 진실로 오늘의 찬양 가사처럼 그분의 생각이 셀 수 없이 많아서 오늘도 이렇게 달려갈 수 있으며, 날마다 새로운 성실하심과 그 끝이 없는 사랑으로 여기까지 이르렀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특별히 오늘 나를 움직이는 단어는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란 구절이다. 인간은 반복되는 일에 감동이 없다. 그런데 주님의 성실은 늘 반복되는 정도의 성실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성실이라고 하시는 이 대목이 오늘 나를 감동케 하신다.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그분의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실하심을 알려주실까? 궁금함과 설렘으로 말씀앞으로 달려간다. 본문에는 성벽공사의 마지막을 방해하려고 산발랏과 도비야가 내부의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음모를 꾸미는 내용이 나온다. 10절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그가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여기 스마야란 사람이 두문불출하여 총독 느헤미야가 그를 찾아갔다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스마야는 성전건축의 중요한 일을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느헤미야에게 스마야는 대적들이 그를 죽이러 올 것이라고 말하고 성전에 몸을 숨기라고 한다. 여기에 느헤미야는 내가 왜 도망을 가야 하느냐고 또 나같은 사람이 어찌 성전에 들어가느냐고 반문하며 거절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2절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느헤미야가 분별하며 보니 스마야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대적들에게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고 비방하려 함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스마야가 느헤미야에게 성소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라고 한 것은 그를 그곳에 가둠으로 성벽 완공을 저지하고, 느헤미야로 하여금 성소에 들어가도록 함으로 그에게 누명을 씌워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느헤미야의 분별력이 오늘 묵상의 주제가 된다. 사단의 계략은 참으로 치밀하고 겉으로는 우리를 위하는 척 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케 된다.
여기서 중요한 분별력의 기초는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첫 번째 근거이며, 두 번째는 자신은 성소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별력으로 그는 스마야를 통한 교묘한 음모에 빠지지 않고 성벽 공사를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벽공사를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또한 자신이 대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라고 성소에 들어감으로 율법을 범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사람이 왜 결정적 순간에 흔들리며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가? 그것은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께서 대적보다 더 강하신 분이란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다가오는 위험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은 내게 물으신다. 너는 어떠냐고 ..
세상은 뇌물과 두려움에 넘어지고 있다. 한 편으로는 뇌물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움으로 협박하는 세상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씀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고 주님은 물으신다.
함께 성벽을 건축하던 이들이 뇌물에 넘어가고 선지자라 일컫는 사람마저 뇌물로 엉뚱한 소리를 외치는 가운데 이것을 분별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성벽건축을 완성한 느헤미야의 모습이 오늘 아침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 있는 느헤미야 신앙의 위대함은 그가 모든 장, 모든 사건속에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14절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인간은 연약하다.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오고, 어느 순간 외롭고, 어느 순간 한없이 흔들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기에 말씀과 기도로 주님을 붙들지 않고 어떤 사람도 이런 상황을 이겨낼 사람은 없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살았고, 날마다 새로운 주님의 성실과 끝이 없는 사랑을 그가 경험했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주님의 날마다 새롭게 임하시는 그분의 성실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주님앞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원수의 모함과 두려움에 떨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을 사노라면 나를 위하는 척 하면서 결국은 나를 넘어뜨리려는 원수의 음모가 날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이런 삶은 느헤미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들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것이다.
사명을 따르는 사람은 그래서 안전을 추구하거나, 편안을 추구하고, 부함과 명예를 추구한다면 반드시 넘어질 수밖에 없다. 사명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찌하든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 어떤 경우에는 사명을 향해 간다고 하면서 주변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집으로 사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다.
기준이 자신이 되면 큰 일이 난다. 항상 깨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참된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뜻인지 사람의 교묘한 뜻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겸손히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이 가슴에 밀려온다. 벧전5:6-8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주님, 이 종에게 귀한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당신의 성실을 나타내심에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저에게 이런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귀한 은혜를 베푸심에 감사드립니다. 겸손히 당신을 신뢰하며 께어 말씀과 기도로 원수의 음모를 분별하며 대적하는 자로 서서 주님의 사명의 성벽을 완성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겸손히 더 겸손히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