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 18:21).성경에는 비방하는 자들을“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악을 도모하는 자”,“무정한자요 무자비한 자,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들과 말질하는 자들을 동류로 취급하였다.
(롬 1:30, 31, 29).
교육 7장. 품성의 형성.(2)
231p
오류는 진리에 섞이든지 또는 진리에 붙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멸망을 가져왔으며, 선악이 섞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오늘날 남녀의 멸망을 초래케 한다.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는 사람은 조만간에 과오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각 개인이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의 사고력(思考力)은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이 잘 계발되고 다듬어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고 하신다. 하나님께 의존함으로 우리는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사 7:15) 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모든 가르침에 있어서 개인 지도는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지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훈련하실 때에도 개인적인 접촉과 교제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사람의 청중을 앞에 두고도 당신의 가장 귀한 교훈을 개인적으로 베푸시는 일이 아주 많았다. 감람산에서 있었던 존경받던 랍비와의 심야 토론과 수가의 우물가에서 만난 천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감동을 받을 만하고, 그들의 생각이 열려 있으며, 진리의 보화를 받아들일 만한 정신이 있음을 그들에게서 보시고 입을 열어 값진 진리를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번 그리스도를 따라 몰려온 군중들도 그리스도에게는 무분별한 군중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마음에 직접 대화하듯이 말씀하시고 각 사람의 진심에 호소하셨다.
예수님은 청중의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말씀하신 그 진리가 그들의 심령에 감응을 일으켜서 얼굴빛이 밝아지고 감동의 빛이 떠오름을 보시게 되면 공명하는 즐거움으로 깊은 감동을 받으시곤 하였다.
232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있는 가능성들을 식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겉보기에 기망(期望)이 없어 보이는 일로나 또는 바람직하지 못한 개인의 환경 때문에 사람을 제쳐놓고 돌아서시는 일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마태를 시장의 세금 받는 곳에서 택하시고, 베드로와 그의 형제들을 고기 잡는 배에서 불러 제자로서 그에게서 배우게 하셨다.
오늘날 교육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개인적인 관심과 개인적인 배려가 개인의 발달을 위해 필요하다. 겉보기에 유망해 보이지 아니하는 청소년들 중에도 천부적으로 많은 재능을 부여 받았으며 아직 이를 계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교육자들이 교육적인 이해가 부족한 탓으로 인하여 저들의 재능은 계발되지 아니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는 잘 다듬어지지 아니한 돌처럼 덜 매력적으로 보이는 많은 소년과 소녀들에게서도, 믿음의 큰 시련과 억압 속에서라도 능히 견고하게 견디는 귀중한 자질들이 있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
참된 교육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학생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그가 지도하고 있는 학생들의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 각 개인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학생의 모든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완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는지 모르나, 학생들로 하여금 올바른 원칙들이 이행되도록 모든 노력이 주어지고 격려되어야 한다.
모든 학생들은 근면의 힘과 필요성을 배워야 한다. 성공의 여부는 천부적 능력이나 재능보다도 이 같은 근면에 훨씬 더 많이 달려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이러한 근면이 없으면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러나, 보통의 평범한 재능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하게 될 때에는 놀랄 만한 일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놀랄 만한 세상의 업적을 이룩한 천재들도 거의 예외 없이 지칠 줄 모르는 집중적인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인 것이다.
청소년들은 적성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저들이 지닌 모든 지체의 기능들을 계발하고 발달시킬 것을 목표로 공부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저들의 적성에 부합하는 일에만 그들의 연구를 제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233
우리는 이러한 잘못에 주의해야 한다. 천부적인 적성은 평생 동안 이루어야만 하는 교육의 방향을 가리켜 주는 것이며,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주의 깊게 계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균형진 품성을 건설하는 일과, 모든 일에 효율성을 가져 오는 일은 모든 지체와 기능의 균형지고 충분한 훈련에 의한 고른 발달의 결과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도 또한 기억해야 한다.
교사는 항상 그의 지도가 단순하고 효율적이게끔 유의해야 한다. 교사는 주로 실례를 들어 가르쳐야 하며, 나이 먹은 학생들을 취급할 경우라 할지라도 설명은 모두 간단하고 명료하게 해야 한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큰 학생이라도 이해력에 있어서는 작은 아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교육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열심(熱心)이다.
이 열심의 원리에 대하여는 일찍이 어느 유명한 배우가 한 말 가운데 유용한 교훈이 있다. 한번은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한 배우에게, 무대의 배우는 가상적인 일들을 말하는 일로도 청중으로 매우 깊은 감동을 받게 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참을 말하면서도 청중을 별로 감동시키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이며 어째서 그러냐고 물었다.
그 배우는 대답하기를, “송구한 말씀이오나 용납하신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이유는 열심의 힘에 있습니다. 무대에 선 우리는 가상적인 일을 마치 진실인 것같이 진지하게 열심히 말하지만, 강단에 서시는 목사님들은 참된 것을 말하면서도 가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교사는 교육 사업에 있어서 “참”을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들의 실재(實在)와 중요성을 앎으로 생기는 모든 힘과 열정을 다하여 그것들을 학생들에게 말해야 한다.
교사마다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이 명확한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늘 확인해야 한다. 어떤 과목을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교사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그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34
교사는 어떤 과목을 가르칠 때에 학생들이 알아야 할 함축된 원리들을 이해하고, 그 진리들을 깨닫고, 그리고 자기들이 배운 것을 명백히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만족해서는 안 된다.
교육의 큰 목적을 생각할 때, 청소년들은 저들의 가능성이 미치는 한, 높고 깊이 발전하도록 격려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보다 높은 전문적인 학문의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학생들로 하여금 초등의 기초 학문을 완전히 익히도록 해야 한다.
이 일이 너무 자주 등한시되고 있다. 많은 고등 교육 기관과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학문의 일반적인 기초 지식이 크게 결핍된 이들이 많다.
많은 학생들은 간단한 산수(算數)도 할 수 없으면서 고등 수학에 시간을 쏟고 있는 일이 있으며, 웅변술을 습득하기 위하여 발성법을 공부하는 학생들 가운데는 명료하고 감명 있게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
문장의 수사학을 이수한 많은 학생들 가운데에 일반적인 편지의 문장이나 철자법도 바로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기도 하다. 학문의 기초 지식을 완전히 익히는 일은 상급 학교 진학에 필요한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학문의 계속성과 보다 깊은 연구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 된다.
어느 분야의 교육이든지 간에, 단순한 기능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학생들이 달성해야만 하는 교육의 목적이 있게 된다.
언어를 예로 들어 보자. 외국어를 습득하는 일보다는 먼저 모국어를, 그것이 현대어든 또는 고어(古語)든 간에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쓰고 말할 줄 알도록 익히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높은 언어 연구의 중요한 일은 문법적인 지식의 교육만으로는 얻어지지 아니한다. 언어 공부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235
언어의 가장 중요한 요구 조건은 순결하고 친절하고 진실되어야만 하는 것이며, 이는 곧 “속마음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고 하셨으니, 만일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면 표현도 또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는 최상의 학교는 가정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이 일이 매우 등한히 되어 있으므로, 옳은 말의 습관을 기르도록 학생들을 도와야 하는 일이 교사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교사들은 가정과 이웃, 그리고 사회에 화(禍)가 되는 악한 말의 습관 곧 훼방하고 말질하며 비열한 비평을 하는 습관을 버리게 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하여 수고를 아껴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악한 말들은 교양이 부족하고 세련미가 없으며 마음에 참된 선량함이 부족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일은 이 세상의 참으로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들의 사회를 위해서나 또는 하늘의 거룩한 분들과의 교제를 위해서도 마땅치 않다는 사실을 학생들로 명심 시켜야 한다.
우리는 식인종이 아직 그 살이 덥고 푸들거리고 있는 희생자의 고기를 먹고 있는 몸서리 치는 광경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무서운 결과는, 진심이 잘못 전하여지고 훼손되는 비판을 받으며 품성을 난도질 당하는 비판을 받음으로부터 오는 고뇌와 파멸이다.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아래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 18:21). 성경에는 비방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들과 말질하는 자들을 동류로 취급하였다.
(롬 1:30, 31, 29).
236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인 것이다(롬 1:32). 하나님께서 시온의 시민으로 여기시는 사람은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들이다(시 15:2, 3).
성경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가까운 실없는 말이나 지나친 말도 역시 죄로 간주한다. 현대 사회와 실업계에 편만한 허위적인 찬사, 진실한 말을 회피하는 일, 침소 봉대격의 과장, 상거래 상의 거짓말 같은 일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잠 26:18, 19).
험담이 되는 또 다른 말질은 슬그머니 암시하는 일 곧 교활한 풍자이다. 마음에 담겨진 불순한 생각을 공공연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경우 풍자로써 표현하려는 것으로, 청소년들은 이런 행위에 대하여 마치 문둥병자를 피하듯이 피하도록 교육 받아야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노소(老少)를 물론하고 범하기 쉬운 가장 큰 과오는 경솔하고 참을성 없는 말이다. 저희는 “생각 없이 말을 하고는 사실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고 하면 넉넉한 구실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일을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지 아니한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조급하고 감정적이며 주의성 없는 말로 인하여, 일순간에 우리는 일생을 두고 후회할지라도 이를 취소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