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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한 몸을 이루시고 거하실 성전이 됨(2)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설 교 >
주 안에서 되어가는 교회
엡 2:19-22 / 김광일 목사
목회 잡지 Pulpit(강단)을 창간하고 40년 동안 편집한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는 2백 교회 이상을 방문하고 ‘살아 있는 교회와 죽어가는 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예배실, 교실, 주차장이나 공간이 늘 부족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공간이 항상 남아있어 염려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교회는 항상 무엇인가 하기 위해서 변화한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늘 변함없이 똑같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이들과 학생, 청년들의 목소리로 늘 시끌벅적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죽은 듯이 조용하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일꾼이 부족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일이 없기에 일꾼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예산을 초과하기 때문에 은행잔고가 거의 없다. 그러나 죽어 가는 교회는 언제나 은행에 잔고가 많다. 살아 있는 교회는 새 가족들이 많기 때문에 이름을 알기가 어려워 애를 먹는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해를 거듭해도 그 사람이 늘 그 사람이다. 살아 있는 교회는 선교 사업이 활발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움직인다. 살아 있는 교회는 주는 자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티내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믿음위에 운영된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인간적 판단 위에 운영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늘 배우고 늘 전도하며 봉사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늘 무사안일하며 편안하고 한가롭다. 살아 있는 교회는 활발하게 전도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회는 점점 굳어져 석회화되어 간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서신 가운데 ‘교회’라는 단어가 60여회 이상 나옵니다. 본문 21절의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에서 ‘되어가는’은 ‘아욱세이’라는 원어입니다. 이는 현재시제 동사로 교회가 완성을 향해 계속 건축 중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교회 건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존재와 성장의 기반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지체인 성도들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튼튼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다만 완전한 교회가 되어져 갈뿐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져 가도록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되어 가는 교회’는 과연 어떻게 세워져야 합니까?
첫째로 성경이 터이어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 중에 서로 대조가 되는 것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과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 있습니다. 두 건물을 비교해 보면 건물의 터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큰 바위를 기반으로 기초공사를 잘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사의 사탑은 기반이 약한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1174년 착공이래로 현재 5.2미터 기울어져 붕괴의 위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터를 잘 닦는 것은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터에 지어야지 흔들리는 터 위에 지으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진정한 터는 무엇입니까?
본문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여기서 ‘사도들과 선지자’는 원어로 ‘아포스톨론 카이 프로페톤’으로 선포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이고, 사도들은 신약에서 예수의 복음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이들 개인은 터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계시인 말씀을 공식적으로 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들 스스로가 그들이 전한 그 터 위에 머물고 있기에 교회의 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일한 터는 오직 성경입니다. 사람이나 전통이나 역사, 재정 이 아닙니다. 그 무엇도 성경을 대신하여 교회의 터가 될 수 없습니다. 건물이 크고 교인 수가 많다고 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성경적 증언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만약 잘못된 터 위에 교회를 세우려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의 터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가 모퉁잇돌이어야
뉴욕의 어느 교회가 예배당 전면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붙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담쟁이가 자라 “십자가에 못 박힌”이란 글자를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한다”만 남았습니다. 또 세월이 지나면서 담쟁이는 “그리스도”라는 글자도 덮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한다”는 말만 남았습니다. 어느 날 담임 목사가 “우리는 무엇을 전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담쟁이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덮어버린 것을 비유하면서 그리스도가 빠져 있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고 경고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여기의 ‘모퉁잇돌’ 은 ‘아크로고니아이오스’로서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모퉁잇돌은 건물의 각 부분을 하나로 견고하게 짜 맞추는 주축이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세운 교회의 기초일 뿐 아니라 교회가 그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라고 증거합니다. 교회가 예수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며 예수를 통해 결속되고 보존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지탱하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각 지체를 연결시키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 어떤 존재도 예수를 대신하여 모퉁잇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재정도, 전통도 아닙니다. 오직 교회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만 섬기고 예수께 복종하는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되어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도로 연결되어야
캘리포니아의 삼나무(Redwood)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2-30미터에 불과한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나무가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는 함께 하면 할수록 놀라운 힘이 생긴다는 교훈을 줍니다. 함께 하는 것이 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함께 연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건축 재료가 널려 있다고 하여도 저절로 건물이 되지 않습니다. 재료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어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어 가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건물이 연결되어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한 사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지어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외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권속’은 원어로 ‘오이케이오스’인데 ‘가족, 식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에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가족이어야 합니다. 서로 갈등이 없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을 합해 미래를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되어져가는 교회가 됩니다. 자기중심이나, 끼리끼리 문화가 교회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예수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마다 예수 중심이 되어야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뉴욕에 가면 리버사이드 교회(Riverside Church)가 있습니다. 예배당이 웅장하여 명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품위가 있으며, 역사의 기념이 될 만한 예배당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가 헌금하여 지은 교회입니다. 그는 예배당을 봉헌하는 날,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한 마디만 했습니다. “주께 받은 것, 주께 드렸을 따름입니다.” 청교도들은 만날 때마다 이런 신앙고백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 그것은 곧 지나가리.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행한 모든 것만이 영원히 남을 수 있나니!”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동등한 헌금을 드릴 수는 없으나, 누구든지 동등한 희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 최대의 축복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머무시며, 우리를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거룩한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 바람직한 건축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된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성전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를 크게 축복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권속들이 모여 하나님을 섬기는 처소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교회의 터로 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되어가는 교회’를 세워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
엡 2:19-22 / 양인순 목사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던 아무개 씨는 전통적인 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조금 교회생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해서 교회 임원의 역할도 해보고 싶은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줍니다. 교회 짬밥이 군대 짬밥 못지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힘듭니다.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 안에서도 싸움하는 소리가 가끔은 들려옵니다.
아예 발을 쑥 빼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다른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마침 크지 않은 교회가 있어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등록을 하자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 줍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인가? 이 교회는 이제야 보배를 알아보는구나! 으슥해졌습니다. 목사님과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목사님을 도와 내가 바라던 그 아름다운 교회를 이제 만들어 봐야지. 그런데 웬걸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사님도 이 사람이 내 목회에 걸림돌이구나 실망을 합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서로에 대한 상처도 큽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시 옮겼습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 실망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 일로 부부 싸움이 잦아 졌고 부부가 합의하여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도 몇 주 드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래도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좋은 교회가 있겠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 용서가 있는 교회, 은혜와 감동이 있는 교회, 자기 마음에 그려보고 있는 그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오늘도 헤맵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제가가 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초대교회 공동체처럼 온전한 교회는 없었습니다. 항상 부족함 속에서 건강한 교회로 발전되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지금도 공사중입니다. 교회는 천국과 같아야 하지만 천국은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병원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고통 받는 영혼들이 교회에 나아와 치료되고 회복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해도 교회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이 씻은 물이 더럽다고 물을 버릴 때 아이와 함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는 건져놓고 더러운 물만 버립니다. 교회가 아무리 잘못되었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버릴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복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요 등불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하면 십자가가 달린 건물을 생각합니다. 건물은 예배당이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벽돌 한 장 쌓으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이 곧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46년 동안 걸려 지은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교회의 머리요, 핵심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모퉁이 돌은 보잘 것 없는 돌이 아니라 corner stone입니다. 기준이 되는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즉 예수님은 모든 교회의 기준이요 중심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진리의 말씀이 기준이 됩니다.
교회는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까요?
주후 318년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통하여 교회를 다음과 같이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고백을 바르게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교회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하나이어야 한다.(Oneness)
교회가 하나여야 한다는 것은 모임의 숫자가 하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파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영국 성공회, 개신교로 나누어져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그 속에 수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말은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주님의 뜻을 함께 이루어가는 하나의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둘째,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Holiness)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냄새를 풍길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목욕탕과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상하고, 지친 심령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때로는 인간적인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우리들이 허물이 없고,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거룩하다고 인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존재로 불러주시고, 인정해 주셨기에 우리는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셋째,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한다.(Universal)
우리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와” 라고 고백합니다. ‘공교회’ 는 원래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가톨릭과 구별하기 위하여 ‘유니버설(universal)’ 이란 단어를 씁니다.
교회가 보편적이란 의미는 교회는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없어야 합니다. 지역이나 계층이나 학력 등에 따른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넷째,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Apostolic)
교회가 사도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교회는 사도들이 전한 신앙을 따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말씀을 따라 신앙의 기준을 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사도들의 신앙고백을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아무리 분파가 많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피 값을 지불하시고 구원해 주셨기에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공동체가 되고, 사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날마다 든든히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사역은 무엇일까요? 보통 교회는 5가지 중요한 사역을 행합니다.
첫째, 예배입니다.(Leiturgia)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총 앞에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최고의 것을 준비해서, 정성을 다해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결코 예배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둘째, 교육입니다.(didache)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곳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
우리는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쳐야 합니다.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배우기에 힘쓰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야 합니다.
셋째, 봉사입니다.(diakonia)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축복으로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은 봉사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말씀을 배워도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지 않으면 영적 비만에 걸립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더욱 힘써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지역사회를 섬기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을 아름답게 세워가는 비결입니다.
넷째, 친교입니다.(Koinonia)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말씀하십니다.
원래 우리의 신분의 진노의 자녀요 불순종의 자녀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풍습을 따르던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됐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주의 백성이 됐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 모든 성지가족들이 서로를 더욱 귀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선교입니다.(kerygma)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사역은 모두 생명을 살리는 전도와 선교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16일 월요일에 서울 정동에 있는 성공회 예배당에서 뜻 깊은 장례 예배가 있었습니다.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여 평생을 헌신한 고 대천덕 신부의 아내였던 현재인 사모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아처 토레이는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 청년이었습니다. 부인 제인 토레이는 당시 퀸즈 칼리지의 메이퀸에 뽑힐 정도로 미모를 지닌 미술학도였습니다. 그들은 젊은날 열정과 사랑과 꿈이 있었습니다. 1957년 결혼 후에 그들은 당시에 땅 끝이라고 여긴 대한민국에 왔습니다. 첫 발을 디딘 한국은 당시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절망과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8년 후인 1965년에 이들은 당시 한국에서 땅 끝으로 여겼던 태백시 하사미리의 외나무골이라는 산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바로 영성 훈련의 요람인 예수원의 시작입니다. 대천덕 신부와 현재인 사모는 평생을 그곳에서 헌신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 됐습니다.
대천덕 신부와 현재인 사모는 세상의 영광이 보장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땅 끝인 한국으로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 시절에 다시 땅 끝인 강원도 산골짜기로 갔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논리, 힘의 논리,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우상을 타파하는 ‘아이돌 브레이커(Idol Breaker)’로서 천국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복음송 가수 이무하 씨가 현재인 사모의 평생 신앙고백이 담긴 “땅 끝에서” 라는 조가를 불렀습니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내 주님께
비바람 앞을 가리고 내 육체는 쇠잔해져도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내 사모하는 내 주님께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안고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안고
땅의 모든 끝 찬양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
땅의 모든 끝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그들의 선택은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드렸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 땅을 떠났지만 그들은 땅 끝에서 주께 드릴 열매를 가득안고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다 내려놓고 땅 끝까지 복음 들고 이 땅에 온 그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 바톤을 이을 차례입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순교의 피가 흘러서 그 씨앗의 열매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었고,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땅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생명의 열매를 가득안고, 영광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들이 제자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계속 이뤄가라고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의 본받아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로 든든히 자신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에 힘을 쓰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와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교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선교하는 일입니다.
이 거룩한 뜻을 이루라고 성지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을 성지교회 공동체로 불러 주셨습니다. 내가 가야할 땅 끝은 지금 어디 입니까? 예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바로 내가 가야할 땅 끝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강원도 땅 끝으로 나아갔던 대천덕 신부와 현재인 사모처럼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땅 끝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바로 그 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내 사모하는 내 주님께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안고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안고
땅의 모든 끝 찬양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
땅의 모든 끝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땅 끝에서>라는 복음송의 가사처럼 우리의 삶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채움으로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더불어 세워가는 공동체
엡 2:19-22 / 이규헌 목사
본문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알아야 신앙생활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교회 안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다양한 형태의 은유를 사용해서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 가정들이 모여서 큰 가족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녀가 되었고,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의 집에 모인 형제들이 모인 가정이라는 개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혈통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피로 묶인 공동체입니다. 예수의 피는 공동체를 묶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혈육으로 된 가족도 강하지만, 혈족은 이 세상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그 피로 언약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은 현세부터 영원까지 한가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는 가족들은 혈육이기 때문에 가깝고 정이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거리감이 있습니다. 가치나 삶의 목표,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편안합니다. 누구도 내치지 않고 부족하고 허물이 있어도 끊임없이 받아줍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는 뒤집어지고, 화장을 지운 얼굴에 옷도 구겨졌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어색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조직은 긴장감이 많지만, 가족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가정은 어떤 사람이라도 받아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 아버지의 집은 품이 굉장히 넓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19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외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두 소속된 사람입니다. 호텔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지만, 자기 목적을 성취하고 나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 호텔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호텔이 아닙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면 끝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요즘 큰 교회에서는 등록을 해도 심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배만 드리며 지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교회의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이 본 하나님의 교회의 그림은 가족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관계에 관심이 많고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이지만,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 완벽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하지만, 수평적으로 따뜻한 관계가 없을 때 완벽한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이 하와와 관계를 맺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요즘에는 소통이라는 것이 사회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소통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은 ‘식구’의 개념입니다. 식구는 늘 같이 밥을 먹습니다. 식탁에서 함께 교제하는 관계입니다. 요즘 가족의 해체위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밥을 같이 먹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족은 밥을 같이 먹어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식탁교제를 많이 하셨습니다. 초대를 거절하신 적이 없고,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 많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부터 가나의 혼인 잔칫집의 일들을 보면 예수님이 식탁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그는 나로 더불어 나는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고, 마지막 성만찬에서도 “받아 먹으라”고 했습니다. 진짜 친한 사람은 같이 먹습니다. 중국은 시(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집에 초대 받아 밥을 먹는 것은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관계를 무시하고 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먹으면서 정이 드는 것입니다. 잘하는 사랑방을 보면 먹는 것을 잘합니다. 밥을 같이 먹자는 것은 친해지자는 의미입니다. 신자가 된 것은 식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적으로 예배만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삶을 함께 하는 관계여야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모두가 이 가족관계 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내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모두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관계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가족끼리는 갈등도 일어나고 싸움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가정 안에서의 싸움이지 적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 보면 별것 아닌 시시한 것으로 싸웁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시비가 붙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같이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싸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싸워도 원수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관계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는 곳을 찾지 마십시오. 지상에서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미운 정 고운 정 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큰 병이 있습니다. 외로움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자동이고 풍요로운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관계를 맺는 법을 잘 모릅니다. 요즘 아이들도 기계문화에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친밀한 관계는 못 맺습니다. 컴퓨터에서 게임을 하지만 기계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릅니다. 나와 이것의 만남에서는 진정한 친밀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와 너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아는 사람은 너무나 많지만 정작 내가 필요할 때 전화 걸만한 친밀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행복은 관계 안에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의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좋은 음식을 먹으면 뭐합니까? 홀로 있다면 소용없습니다. 최고로 좋은 운동은 함께 하는 운동입니다. 최고로 맛있는 음식은 함께 먹는 음식입니다. 함께 가는 곳이 가장 좋은 곳입니다. 혼자 골프를 치다가 홀인원이 되었는데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재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친밀함을 원하지만 동시에 친밀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즘 노인들이 치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친밀한 관계가 있으면 면역력이 높아집니다. 성경적인 교제는 친밀함을 나누는 가족관계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처럼 큰 교회는 사실 이런 것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복잡함 때문에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의도하셨던 교회를 추구하려면 우리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소그룹 안에 들어가서 바울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권속, 식구로 삶을 함께 나누는 신앙의 공동체를 통해 결속감을 가질 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력 있는 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력한 파워입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남겨 놓은 신약과 구약의 성경이 교회의 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르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주일 예배도 상당한 부분이 설교이고, 많은 프로그램 중에 가르치는 사역이 중요합니다. 교역자가 많은 것도 말씀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도 사도들이 해야 할 많은 사역 중에 말씀과 기도하는 것에 힘쓰라고 한 것은 말씀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친목회가 많고, 모임이 재미있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신앙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신앙이 늘 제자리걸음을 걷게 됩니다. 교회의 많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초를 놓는다면 신앙생활이 재미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신앙이 다져지고 그 위에 점점 쌓이면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 교회생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퉁잇돌을 말합니다. 요즘에는 콘크리트로 집을 짓지만 이전에는 기초돌을 놓았습니다. 특히 모퉁잇돌이 중요한 것은 어떤 돌을 놓느냐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방향, 형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돌을 쌓는데, 예수님이 모퉁잇돌이 되고 양쪽에 쌓는 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끼리 모여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코너에서 중심을 잡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와 연결된 또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랑방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여 결속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는 연결된 것이 특징입니다. 몸과 몸이 연결되었을 때 생명력이 있습니다. 손이 손대로 있으면 그것은 몸이 아닙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부정할 수 없고 모두 한 몸으로 인정할 때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의 연합은 우리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교회들과 함께 연합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노력들은 사실상 소그룹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방 안에 들어갔을 때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 붙어있을 때 주시는 축복은 굉장히 큽니다.
또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21~22절에서 “서로 연결하여”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함께, 서로’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함께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대가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홀로 있으면 성숙할 수 없고, 완성이 안 됩니다. 함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고, 함께 할 때 교회가 됩니다. 우리는 함께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옵니까? 함께할 때 옵니다. 모든 치유와 회복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할 때 이루어집니다. 사실 함께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성전을 지을 때는 생김새가 다양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성전을 지을 때 정으로 돌을 쪼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돌의 모양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끼워 맞춰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돌담도 그렇습니다. 다양한 돌들을 끼워서 멋지고 가지런하게 담을 쌓은 것을 보면 참 멋있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성격이나 배경, 경험, 기질,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해나 반응, 은사도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절망이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된다”라고 고린도교회에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기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어서 사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돌담을 만들 때도 큰 돌만 있으면 돌담이 안 됩니다. 튀어나온 돌이 있으면 다른 돌이 들어가면 됩니다. 서로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의 원리입니다. 물은 컵에 맞게 담깁니다. 물이 자기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컵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줏대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고집과 방식, 주장을 일관되게 고집한다면 미성숙입니다. 자기 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절제는 공동체에서 함께 하는 태도입니다. 성가대는 내가 노래를 잘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함께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외톨이가 됩니다. 외톨이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교회는 더불어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바꾸려고 몸부림치며 상처받고 깨지다가 결국은 ‘안 바뀐다’로 결론짓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상대가 바뀌어 있습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문제가 없는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희한한 사람들이 있어도 품어주는 교회가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태종대 바닷가에 가면 자갈길이 있습니다. 그 자갈들을 보면 모가 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돌고 돌면서 서로가 엉켜 깎아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는 모나고 까다롭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신 것은 나를 다듬어가시는 것입니다. 모난 사람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나도 모가 났다는 것입니다. 둥글둥글한 사람은 모두와 잘 어울립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교만한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실망하지만 도전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보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내 안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저 정도의 사람도 품지 못하는구나, 이 정도의 문제도 극복하지 못하는 수준이구나 하면서 내 연약함이 보이고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기 변화를 하는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거부한다면 편안할지는 몰라도 성숙과는 멀어집니다. 함께 하면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방 안으로 깊이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21~22절에 “성전이 되어가고”,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진행형이고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물로 치면 준공검사가 되지 않은 공사판과 같습니다. ‘공사 중’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낙석을 조심하시오’ ‘먼지가 많이 나니까 통행에 불편을 드려 매우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아직 공사 중입니다. 우리로 인해 머리가 깨진 사람도 있고, 상처받은 사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공사 중’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교회는 미완성입니다.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을 보면 압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싸움과 갈등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들이 점점 덜 유치한 것으로 발전하고 고상해져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변화입니다. 속도가 너무 느려서 절망할 때도 있지만, 교회를 세워나가는 건축자는 그리스도이시고, 건물을 완성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주 안에서”입니다. 완성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교회를 보면 미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언젠가 완성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족함이 많고 엉성하고 실망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상의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가족 같은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된 교회, 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로 조금씩 발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그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완의 부끄러움을 털고 영광스러운 완성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공동체 안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모험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해 무관심한 것보다 교회 안에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통해서 상처도 오지만,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회복도 됩니다. 상처가 되어 떠난다면 더 이상 회복의 길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소외되고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발전되고 있지만, 개인주의는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립되고 외로움을 더 겪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기막힌 선물인 그리스도의 공동체 없이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해 생명을 공급하고, 세상을 이길 능력과 사랑을 공급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헌신합니다. 그 때 공동체 안에서 내 영혼이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개인은 약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강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열두 사도로 출발했지만 기독교의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지금도 온 세상에서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고 실망도 하지만 주님은 오늘도 불완전한 교회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에 제가 다녔던 교회들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안타까움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만약 이런 교회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그 교회를 사용하시고 지상에서 그 뜻을 이루시며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가십니다.
오늘도 그저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분이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해 동기부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모두 가족입니다.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십시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힘겹고 어려운 믿음의 길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며 기댈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친밀한 관계가 없는 이 시대에서 강력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방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수영로교회의 가족이 되시고,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믿음의 삶을 살 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주님의 임재를 느낄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홀로 걷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약하고 모순이 있고 실망스러운 공동체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해 보이지만, 홀로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지상의 유일한 곳입니다. 교회만큼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남겨놓으신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삶은 관계입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친밀함은 우리 삶의 행복의 핵심입니다.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축복과 은혜를 함께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갑시다
엡 2:19-22 / 조영태 목사
지난 주중에 몇 가지 물건을 싣고 그레이트 노이다에 비전센터 건축현장에 가보았습니다.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 이었습니다. 생각보다 건물이 크고 수련회나 신앙교육 등의 여러 용도로 잘 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책임지고 맡아하신 분들이 “정말 수고를 많이 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든지 작든지 건물을 짓는 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인도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건축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건물을 지을 때 돌을 그냥 쌓는 다고해서 건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설계를 해야 하고 땅을 파야 되고 기초를 세우고 벽을 쌓고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 모퉁잇돌입니다.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돌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벽을 그냥 쌓는 다고 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퉁이 돌로 그 벽을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튼튼하게 지어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각 지체인 성도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되고 상합될 때 튼튼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가 한 사람이 되어 에베소 교회를 이루었듯이 성격도 출신도 다르고 신앙배경도 다른 우리들이 임마누엘 교회를 통해서 한 통일체를 이루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닙니다.
제가 1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자세히 보시면 바로 위엣 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과 본문을 이어가면서 11-12절에 그리스도와 멀리 있던 절망적인 상태와는 반대되는 회복된 이방인의 영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던 이방인들은 이제 외인이 아닙니다. 외인은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외부인이라는 말이죠. '외부인'이라는 단어 속에 이미 차별하는 뉘앙스가 실려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외부인이 얼마나 불편한 지 잘 압니다. 일부 환경은 편할 수 있을 수 있지만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당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웃으면서 다가오면 왠지 나에게 사기 치는 건 아닌지? 해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두려움이나 걱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외인도 아니고 또한 더 이상 나그네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전혀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자기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이방인 성도 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성도들의 삶의 여정을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11장13절에서는“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그네는 어떤 나그네입니까? 히브리서 본문에서의 나그네는 세상에 대한 나그네라는 뜻입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터전이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이 땅의 우리의 삶은 나그네며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임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바로 14절 이후에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오늘 본문에서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서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인도에서는 나그네이지만 임마누엘 교회에서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 아버지의 집입니다. 여러분 오늘 남의 집에 오셨습니까? 아버지 집에 오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Owner' 라고 부르십니까? 'Father' 라고 부르십니까?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일한 시민인 동시에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은 특별하지 않습니까? 크게 허물하지 않고 다 용서하지 않습니까? 더울 때 런닝 셔츠만 입고 있을 수 있고 식사하다가 좀 흘려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46년 전 사진에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대통령 데스크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집무실 카페트 위를 기어 다니는 장면을 본적 있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일까요? 네 케네디 대통령의 아들 존입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놀이터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자격도 없고 허물도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들, 딸로 다 양자 삼아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뭐 내세울 것 있습니까? 그냥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 아니었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다 예수님 덕택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안 믿고의 차이는 참으로 엄청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면서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 하는데 참으로 몰라도 한참 모르는 분입니다. 사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밥도 나오고 때로는 떡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아무리 주먹이 세도 코 끝에 호흡이 끝나면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역발산도 죽었고 박치기왕 김 일도 죽었습니다. 엄청난 권력과 돈을 가진 자도 갈 때는 말없이 두 손 펴고 관에 갇혀서 갑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른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생명을 얻습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과연 무엇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꿔줄 수 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인 줄 믿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아멘이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권세는 이미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진 특권은 그들의 사역과 믿음의 터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45절에 보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친구인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구약성경에 기록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록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27절에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로 시작하여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과 그 분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12장 3절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약속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며,
22:18절에서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에서 네 씨는 단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진리논쟁을 하면서“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멀리서 보고 즐거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에 발견하고 실제적으로 1,600년도 초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때 역사가 400년 남짓 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후부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청교도 정신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역사가 130년 밖에 안 되지만 짧은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베푸신 은혜는 너무나도 크고 위대합니다. 최초의 대통령으로 골수 기독교인 대통령을 선출했고 삼일운동 민족 33인 대표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독립투사들의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 뿌리 속에서 일제시대를 견디고 공산주의와 투쟁하여 이 나라를 지켜 낸 것입니다. 물론 일제치하 때 그들의 회유와 핍박에 견디지 못해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하면서 넘어갔지만 그 때 마다 강직한 성도들을 세우셔서 신앙을 계승시켜 주셨습니다.
신앙의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실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트레이드 마크 중 내적인 특징이 믿음의 강직함이라고 한다면 외적인 특징은 교회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영국과 유럽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한 기독교인들이 처음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 다음에 학교, 그리고 자신들의 집을 세웠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건국의 기초가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습니다. 독립운동을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기점으로 반공세력과 반대하며 싸웠습니다. 그 핵심에 청년 이승만이 있었고 월남 이상재 선생님, 이준열사 등의 국가의 유수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제 여전도회원들에게 카톡으로 소개한 동영상 대한민국의 기적 이라는 동영상을 관심 있게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건국과 근대사에 끼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세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델리 임마누엘교회가 거의 20년이 되었습니다. 이후에 우리 구르가온 임마누엘교회와 벵갈로, 하이드라바드 지역에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벌써 7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현지 교회 두 개를 개척했고 두란노 아카데미 장학회, 아킬풀 프로젝트 등의 큰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비전센터가 완공되면 신앙교육과 영성훈련 그리고 선교센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은혜 속에서 담임목사님의 지도와 목회 아래에 많은 성도들의 헌신과 눈물, 그리고 기도 속에서 교회가 성장한 줄 믿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위해서 애를 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느 한 사람만 잘해서 이룰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 13절을 보면“한 지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도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 말씀했고 이어서 17절에서“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21절에서“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 하면서 교회 의 모든 성도들은 지체이며 어떤 부분이든지 귀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건물의 모퉁이돌이 되셔서 우리들이 전부 연결되게 해주십니다. 우리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이 됩니다. 1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그 성전을 건물을 짓듯이 성도들이 한 명 한 명 연결하는 것입니다. 물론 달란트와 직분에 따라서 양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만 특정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세우는 것이며 나도 그 속에서 지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지어 가는데 소홀히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다룬 성경인데 40장 중에 3분의 1 이상을 성막에 대한 명령과 만드는 이야기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전기라고 할 만큼 다윗을 초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데 7:1절을 시작하면서“여호와께서는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삼하 7:1)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에서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은 왕에 유다지파의 지지로 왕으로 올라 7년6개월 동안 유다를 통치합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분열과 내전이 계속 됩니다. 그러나 반역을 일으켰던 아브넬은 암살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피살됨으로써 이 모든 내란이 종식되고, 다윗은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통일왕국의 왕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다윗은 국가적인 통일을 이루었고, 여부스 족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탈환한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았으며 강력한 대적인 블레셋을 물리치고 외부의 적을 평정했습니다. 그리고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옮겨옴으로써 국내외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한 시점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다윗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삼하7장 2절에서“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든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다윗은 자신이 왕으로서 안정이 되고 궁에 평안히 살게 되자 하나님의 궤가 휘장 가운데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성전을 지어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통일왕국을 시작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을 튼튼히 함으로 더 큰 왕국을 만들고 그의 위엄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고 성전 건축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 다니셨고 누구에게도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그 마음 여호와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네 가지 약속하십니다.
첫째,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둘째, 이스라엘을 한 곳에 거주하게 하고 원수에게서 벗어나 쉬게 하리라. 셋째,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몸에서 날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넷째,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네 씨에서는 빼앗지 않고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자신의 왕권, 왕국, 영달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마음이 쓰인 다윗, 그 중심에는 성전을 향한 사모함 하나님을 잘 모시고 싶다는 신앙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진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제가 학생시절에는 많은 설교자들이 성전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셨고 건축을 할 때에도 성전건축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교회당 자체를 성전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후에는 반대개념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배당이지 성전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모인 자체 또는 내 몸이 성전이라는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 한 쪽으로만 치지다 않는다면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몸은 성전이라는 말은 내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한 말이지 보이는 건물이나 우리가 교회로 쓰는 예배당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여러분 가정을 이야기 할 때 가정은 건물이 아니니 우리 식구들만 잘 살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시부한인교회에 있을 때에는 교회가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전기, 선풍기, 에어컨 등 교회를 잘 살필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크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점차 저도 담임목사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랑 아닐까요? 그러나 제 짧은 소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현실은 교회를 렌트해서 쓰고 있고 교회도 자주오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주일만 쓰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애착이나 책임을 덜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좀 수리하고 바꾸면 좋을지 교회가 어떻게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기도하며 찾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 기물이 파손이 되 있는 것을 보고 망가졌구나 하고 지나가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것이나 지금 우리 교회가 성당측과 이야기를 잘해서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데 아이들 문제로 컴플레인을 받고 있습니다. 그냥 컴플레인을 받고 있구나 하고 넘기기 보다는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을 어떻게 잘 지도해서 재밌게 놀면서도 주의를 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것 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교회 간의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임마누엘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들을 위해서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지금 담임목사님은 첸나이 열방교회에서 설교하시고 내일부터 양일간 서남아시아 한인교회 연합을 위해서 스리랑카를 방문할 계획입니다. 주보를 보면서 목사님이 출타하셨구나! 하고 그치기보다는 아! 서남아시아 한인교회 연합을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시구나 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요? 오는 3월 1일에는 봄맞이 음악회가 있습니다. 저도 오자마자 성가대원으로 참석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성가대에서 찬양을 불러보니 너무 재미도 있고 음악회에 대한 기대를 갖게됩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steps of blessings(대심방)을 갖습니다. 여성구역 중심으로 하되 부부구역은 구역별로 원하시는 가정은 언제든지 심방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부부구역 중 남성들 구역별 모임이 있습니다. 잘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되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잠시 휴가차 한국에 들어갔다가 제가 전에 섬기던 고현교회에서 목사님을 뵙고 기도하면서 부르심을 받아 필리핀에서 12월 말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2주 준비하여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특별히 여쭈어 본 것도 없습니다. 성도는 몇 명이나 되는지? 구르가온은 어떤 곳인지?
부족하지만 기도하면서 주신 사명을 따라 교회를 세우고 행복한 교회와 예배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성장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일에 한 분 한 분이 함께 동참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십자가의 신비
사 53:5-8. 엡 2:16-18 / 이기복 목사
성도 여러분, 그동안 주 안에서 평안하셨습니까? 기도해 주셔서 북아프리카 모로코 왕국의 선교사들과 한인성도들 영성집회를 은혜 충만한 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 세계에서 네델란드 다음으로 가장 오랜 왕국의 나라이고 모슬렘이 99,9%인 나라입니다. 다행이 다른 모슬렘 나라와 달리 복음을 전하는 일만 금하고 개인 신앙생활에는 큰 제제가 없는 나라이며 아프리카에서 그래도 잘 사는 나라 중의 하나가 모로코입니다. 전 지역에 온 선교사님들 가족과 수도 라바트에 있는 한인감리교회 성도들이 프랑스교회가 운영하는 수도원에서 합숙을 하면서 마음껏 은혜를 받는 집회였습니다. 특히 어린이들 집회도 병행하여 더욱 의미 있는 집회였습니다. 귀한 집회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도해 주시고 후원하여 주신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며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경건생활을 힘쓰고 하루에 한 끼 이상 금식을 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에 함께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 가장 신비한 능력을 가진 표상이 있다면 두말 할 것이 없이 십자가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로마제국 당시에 가장 흉악한 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형틀이 사람의 영과 육을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1.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요1서 4:8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말씀하는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은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극치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 15:13-14)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입니다.
2. 십자가는 죄사함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는 죄사함의 신비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크고 무서운 것은 죄입니다. 죄 때문에 이 땅에 온갖 비극이 벌어 졌습니다. 죽음도, 가난과 질병도, 서로 불목하고 원수가 되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단에 피를 뿌림으로 인간이 죄사함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회성에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하였습니다.
행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십자가는 화목의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둘로 하나가 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원수와 같이 멀어지고 인간은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의 원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친구 간에도 원수가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형제와 자매간에도, 심지어 부부간에도 죄를 지으면 관계가 멀어지고 원수와 같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와 같이 갈라진 사이는 서로 연결하고 화목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만 잘 믿고 교회를 잘 다니면 누구나 형제와 자매요 한 가족과 같이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 되면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둘째는 인간과 인간이 서로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관계 뿐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를 서로 화목하게 합니다. 예수 믿으면 십자가로 누구와도 하나가 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신앙을 기지면 서로가 하나가 됩니다. 나라와 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이웃과 이웃이 하나가 됩니다.
셋째는 다른 피조물과도 회목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생명을 사랑합니다. 자연이나 다른 피조물과도 서로 화목 하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과 회목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4. 십자가는 승리와 능력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과 능력을 가진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함으로 영원히 승리한 줄 믿었지만 오히려 영원히 패배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죄를 정복하였고, 사탄 마귀를 정복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극치이기 때문에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사랑을 이기는 힘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고전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가장 강한 힘입니다.
첫째, 사탄 마귀를 정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멸망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 마귀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를 정복하고 물리칩니다.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기적을 행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둘째,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성을 이길 힘은 십자가 보혈의 능력입니다. 역사 이래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준 종교나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셋째, 자기 자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자기를 이기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무능함에 빠졌습니다. 그는 고백하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5.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기는 비결은 십자가의 신앙뿐입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경건생활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서 십자가 신앙을 회복합시다.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합시다. 십자가 신앙으로 사탄 마귀를 정복하고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는 성도가 됩시다. 대한민국교회의 사명이 어느 때 보다도 소중하고 시급한 시대입니다.
270.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1.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다 찬양을 합시다 주님을 만나볼 때까지
4.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
머리에 면류관 쓰고서 주앞에 찬양할 때까지
후렴. 예수는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주시니
그의 피 우리를 눈보다 더희게 하셨네
함께 되어감
엡 2:14-22 / 이병일 목사
우리는 누구든지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일상에 묻혀서 살다보면, 그 꿈을 잃어버려고 허무해 하는 경우도 종종 보지만, 너무 힘들거나 생의 중요한 전기에 있어서는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는 것은 자기의 꿈입니다. 여기에서 꿈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직업이나 직업 외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는 그 일들을 하면서 추구해야 하는 목표나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준 인사말 중에는 “꿈을 이루세요” 라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올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이제부터는 목사로서 살게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라 무엇을 하든지 화두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 목사로 산다는 것, 나에게 평생 따라다닐 직분이 목사라는 것, 목사는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시무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 ...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해야 했는가? 예수님의 그 꿈이 언제부터 그에게 들어갔는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세 장면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서에는 같은 사건이나 일화를 두고 다양한 시각에서 묘사를 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수세장면입니다.
마가복음에는 1:10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누가복음에는 3:21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고, 22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마태복음에서는 3: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그에게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시는 것을 보셨다. 17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수세장면은 없고 세례요한의 증언만 있습니다. 1:32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 34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너는, 너를”)가 예수님 자신에게 들린 것으로 묘사를 하고, 마태복음은 하늘소리(“이는, 그를”)가 주위에 몰려든 무리들에게 들린 것으로 묘사를 합니다. 복음서 공동체의 서로 다른 정황과 의도에서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다르니까 어느 것은 취하고, 어느 것은 버리는 방법보다는 각각의 정황과 의도를 파악해서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면 되겠죠.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는 것,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이러한 체험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개인적으로는 이후의 모든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그를 이끌어 가는 지향점이 되고, 공동체적으로는 그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하게 합니다. 이러한 체험을 원체험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크든지 작든지 이러한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성령을 받습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세례는 중요한 예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너무 남발하는 경향 또한 있습니다. 특히 군대에서 치러지는 진중세례식이나 학교에서 영문세례증서를 교부한다고 해서 세례받은 사람이 다시 받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남은 삶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커다란 사건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한다.” 여기에서 ‘사랑하는’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으로, ‘기뻐한다’는 ‘인정한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하나님]의 아들’은 당시에 굉장히 위협적인 호칭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에게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의 종인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이 구절을 찾아보면, 시편 2:7과 이사야 42:1에 나오는데, 그 구절들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왕, 고난의 종으로 선택된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장엄하고 결정적인 장면이 그려집니다.
마가와 누가에서 그 소리는 예수님 자신에게 들립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며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단의 시기였습니다. 때가 되어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으로 나왔습니다. 세례는 공적인 그의 생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세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확신의 시기였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궁극적이고도 확고부동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길에 대한 불확실함과 그 길에 대한 시비의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상황에서 세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확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사건은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어느날 매주일 듣는 설교 중에서도 가슴에 사무치게 파고 들어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교회 청년 중에서 몇 년 전에 목사님의 “교회의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설교를 듣고, 주변에서 맴돌다가 더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하게 된 이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역시 좋은 설교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군’ 하고 몇 시간 후면 잊혀지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날은 그 말씀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내 가슴을 치며 다가와서 며칠이 지나도 계속해서 마음에 자리잡아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는 정도로 결정적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늘소리는 주위에 몰려든 무리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무리들에게 들립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생애는 모인 무리들에게 공포됩니다. 예수의 사명에 대한 공동체의 외적 증언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메시아로서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과 나눕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세례는 깨달음의 순간이었으며, 동시에 자기 봉헌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인 무리들을 위해 가야 하는 그 길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희생적인 봉사가 필요한, 그리고 인간의 죄를 위한 제물로서 자신을 헌신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깨달음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의 짧지 않은 생을 통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계속해서 만나야할 무리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깨달음은 그들을 위한 헌신, 자기 희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순간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잡으십시오. 그것은 예수님의 세례와 같이 정해진 때에 일어날 수도 있고, 우리가 사는 동안 매일 마주치는 사소할 것 같은 일상에서도 일어납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는 자기만을 위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서 전체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임하심은 개인에게 일어나서 공동체를 향하게 합니다. 공동체에서 필요한 일을 맡기기 위해서 개인이 선택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깨달음과 동시에 자기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나 감동받은 것에서 몸의 움직임,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교단이나 다른 교단의 약간 진보적이라고 하는 교회의 대부분은 지적으로는 사회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부분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에 참여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몸의 실천이 뒤따르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하여 그렇습니다. 이것을 관념적 진보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그의 공생애 첫발을 딛습니다. 이 때에 받은 성령과 하늘소리는 그의 생애 전체와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증명됩니다. 하늘소리를 다시 번역하면 “너는 사랑받은 나의 아들이고, 나는 너를 인정한다.”, “이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나의 아들이다. 그에게서 내가 기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의 근거가 되는 삶을 예수는 살아 낸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들고, 자기의 생명을 봉헌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늘 소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하늘 소리는 그의 삶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과 죽음을 후대의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 시간에 에베소서를 읽어 가는데 이 구절이 계속에서 가슴에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평화, 화해,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때때로 몸싸움과 욕설, 그리고 레디컬한 가르침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는데 예수님이 평화라니. 우리의 평화를 만드는 길에서 예수님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여기에서 평화[ε?ρ?νη]는 “합하다, 연결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평화, 일치, 조화”를 말합니다. 바울 공동체에서 교회 내적인 평화는 유대계 크리스챤과 헬라계[이방인] 크리스챤의 조화와 일치를 말합니다. 둘 사이를 갈라놓는 장벽인 율법을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폐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라는 말은 이기심과 좁은 마음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조화롭게 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그 가능성을 열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달도록 내어 줌으로써 갈라져 원수된 이들을 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또한 화해는 “완전히 화해시키다, 은총을 회복하게 하다”를 말합니다. 외식적인 악수가 아니라 둘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하나로 끌어안아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화해와 평화는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는 전제입니다. 다른 생명과 원수처럼 지내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갈라진 이들을 하나로 일치시켜 평화와 화해를 전하신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 달게 내어주었습니다. 한 공동체의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를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누군가’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결국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 공동체의 평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나는 아니겠지’ 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비유합니다. 그 건물은 예언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님이 그 모퉁이 돌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비유 중에 이와 비슷한 비유가 있죠. 롬 12:12-31 [엡 4:11-12]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과 많은 지체들”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과 직분을 강조합니다. 할 일이 많은 공동체에서 역할과 일의 분담은 당연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에 따라 그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면서, 다른 직분을 맡은 사람과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적절한 역할의 분담과 각각의 직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건물의 비유는 어떠한 직분을 맡았든 그 직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가져야 할 태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고 우리 모두는 그 건물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건물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어떤 모임에서 ‘나는 머리니까 사업을 계획하고, 궂은 일이나 드러나지 않는 일은 손발인 네가 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건물의 비유는 이러한 사고와 행위를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 건물의 터는 예언자와 사도입니다. 올바른 교회는 어느 목사 어느 장로 어느 집사의 건물이 아니라, 예언자적 정신으로 가득 찬 가슴을 가진 사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만물에게 전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 되어갑니다. 또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실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예전의 우리 교회의 모습이나 업적보다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화려한 모습일지라도 예전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에 의하여 평가됩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남으로써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되어 가는 현재진행형에는 자족이나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되어감에는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성이 필요합니다. 되어감에는 건물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누구 하나 빠지거나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혹은 자기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청년시절의 꿈을 얼마나 이루면서 살고 있습니까? 혹시 그 꿈은 잠 속에서 헤메이다 어느 순간인지도 모르게 사라진 것은 아닌지요? 다음 주면 강남향린교회 창립 8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가 강남향린교회에 처음 왔을 때, 가졌던 신선한 충격이나 새로움을 향한 결단이 ‘이 정도면 됐어’ 하는 자족에 묻혀 스러진 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의 선교를 우리 몸의 활동을 하나님이 인정할지 돌아볼 시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이런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강남향린교회를 시작하면서 갖은 첫 번째 수련회에서 앞으로의 교회의 방향에 대해 토의하고 교인 전원이 합의한 내용을.
선교하는 교회 - 예수님의 목회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 복음의 목회, 해방을 선포하는 메시아적 목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목회였습니다. 우리는 교회 자체의 확장을 위한 것보다는 이러한 예수님의 목회를 우리들의 제일 우선하는 선교의 목표로 삼고자 합니다. 교회 자체를 위한 소비보다는 이웃들과 함께 하며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도록 구원과 해방의 선교를 향하여 교회의 총력을 다하고자 합니다.
민중, 민족과 함께 하는 교회 - 기독교가 우리 땅에 들어온 지 100년, 200년이 지났는데도 기독교는 아직 서양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우리의 것들을 통해 신앙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특히, 우리민족이 처한 분단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민족의 문제와 함께 하며, 동시에 이 땅의 민중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서로가 존경하고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과 함께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입체적인 선교 -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교회는 이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과 삶의 전 영역을 통해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민주적인 교회 -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신도들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나가며 평신도 한사람 한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에큐메니칼한 교회 - 타 교파, 타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고 열린 미음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의 신앙이 중요하듯 남의 신앙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하여 지역사회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교회, 일주일에 한 번 예배보고 닫아놓는 교회가 아니라 주중에도 계속해서 지역사회의 유익한 모임들을 위해 교회 공간을 개방하며 민주시민들을 위한 모임들이 계획되어 가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성차별이 없는 교회 - 여성 목회자나 여성 장로의 안수, 여성의 예배의식 참여 등 남녀의 성차별은 물론 모든 면에서 차별 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항상 젊은 교회 - 항상 갱신하는 자세로 건전한 의견을 향하여 열려있는 교회, 젊은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가족적인 공동체 - 대교회주의를 배격하고 가족적인 공동체를 이루어가며 교인정원을 500명으로 하여 그 이상이 출석할 때에는 분가의 방식으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교회와 우리 교우 모두가 전 삶의 과정을 통하여 전 삶의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꿈입니다. 우리 강남향린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우리를 언제나 돌아볼 수 있는 모퉁이 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꿈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갈라진 것들을 잇고 조화롭게 평화를 만들어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꿈을 이루어 가면서 모든 생명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사도와 예언자를 터로 삼고 모퉁이 돌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된 한 건물임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의 가족 – 화목한 가정
엡 2:14-22 / 손상률 목사
이상적인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의 가정입니다. 본문 말씀 19절에 우리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가정에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33:3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하였습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오늘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가정의 요체(要諦)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은 참새의 집과 제비의 보금자리처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면서 최상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시 84:3).
1. 화목의 신비(神秘)
가정은 온 가족이 화목해질 때 행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도 가족끼리 불화가 계속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구조적으로 다른 사람과 화목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1) 개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고 그 사이에서 나는 자녀와 형제가 연결되어 가족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모두가 다 혈통으로 연결된 가족 공동체가 되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정을 남자와 여자라는 다른 개체가 연합해서 둘이 한 몸을 이룬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창 2:24). 이것은 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이론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바울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고 하였습니다(엡 5:31-32). 아무리 가까운 혈육관계라 하더라도 각각 다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마음을 같이 하고 화목을 이룬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2)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 가운데 자기와 생각이 같고, 가치관이 같은 사람끼리만 만난다고 하면 결국 자기 혼자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부부나 가족이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사람마다 성장 배경이나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서 여러 가지 유형의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하기가 어렵습니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서
우리나라에도 점차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언어와 습관,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끼리 같은 마음을 가지고 화목을 이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부부간에 갈등과 가족 간에 불화로 인하여 이혼을 하거나 결손가정이 생기게 되는 것도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
3)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고 또 자기 나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가족이 되었을 경우 어떤 형태로든지 이를 극복하며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마음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32). 그렇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일 경우,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이를 극복하고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권속)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4:3에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2. 화목의 요건
사도 바울은 부부의 신비를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엡 5:22-33). 거기서 오는 행복의 비결도 교과서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설명이 안 되는 신비적 요소가 있습니다.
1) 사랑하는 것입니다.
화목의 기본적인 요소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라면 아무리 화목을 도모하려 하여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이해관계나 또는 억지로 강요해서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 자식과 형제자매의 관계로 맺어진 가정은 우선 보기에 혈연으로 얽혀져 있는 것 같으나 그보다는 거짓 없는 사랑이 작용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르곤 합니다. 가족 간에도 조건을 제시하는 사랑이라면 이상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αγαπη)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보다도, 이적을 행하는 신비로운 역사보다도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고전 13:1-2).
2)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화목은 가족끼리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나는 지식이 있어서 많은 것을 알고, 또 사리에 밝아서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해는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볼 때 가능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정당하고 옳은 일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이 저와 같이 생각하지 않거나 다른 길을 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때 화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23-24).
3) 섬기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서로 섬기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 또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말이 통용되었는데, 이는 이교 사상에서 온 잘못된 관습입니다.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거나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개념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5:22-33에 나오는 부부의 도리는 서로 섬기는 개념입니다. 아내를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가정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며 남편이 아내를 자기 몸 같이 아끼라고 한 것도 사랑으로 서로 섬기게 한 것입니다(갈 5:13). 부부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사이에, 또는 형제나 가족 모두가 서로 짐을 나누어지며 다른 가족을 위해서 몸으로 수고하며 섬길 때, 가족 간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행복을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화목케 하시는 예수님
인간의 집단은 어디에도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모두가 다 자기 중심의 생각을 하고 또 자기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하여 살기 때문에 겉으로는 화합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분쟁과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에는 화목이 있습니다.
1) 본질이 평화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민 6:25-26).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기록하면서 성도들에게 축복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1:2).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됩니다.
2) 역할이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본문 말씀 16절에도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Cross)는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지점입니다. 곧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화목케 하는 원리를 뜻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예수님을 노래하면서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눅 1:79).
3) 결과는 완전한 평화를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미가 4:3에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어디에나 마귀가 지배하는 곳에는 다툼과 분쟁이 있고, 죽음과 공포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사랑과 평화가 자리잡게 됩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무덤 사이로 헤집고 다니던 군대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맑은 정신으로 평정을 찾았습니다(눅 8:35). 갈등과 대립으로 반목하던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사랑과 평화의 천국으로 바뀌어 집니다. 예수님의 평강이 가정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공동체
엡 2:14-18 / 이동원 목사
한 시인은 "현대인들은 필요한 다리는 놓지 않고 아직도 벽을 쌓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그래서 베르린의 벽은 무너졌지만 이 시대 곳곳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 한자 사이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사이에, 지배자와 지배 당하는 자 사이에,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사이에 아직도 견고하고 높은 벽들이 쌓아 올려지고 있습니다. 이 땅 에서도 아직도 무너질 낌새가 없어 보이는 남 북한의 벽, 정치의 계절마다 재론되는 동서편견의 지방색의 벽,그리고 남한 자체내의 보수와 진보의 벽, 오늘의 경제 번영을 이룬 가는 세대와 새 시대를 담당할 오는 세대사이의 시대를 읽는 이념의 벽은 우리 사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는 우리 사회의 여전한 불화의 벽으로 쌓아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 시대에 존재하는 벽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만큼 견고한 벽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고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에 대한 최대의 욕은 할례받지 못한 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해산하는 이방 여인들을 보면 절대로 돕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 받을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이 아기를 낳으면 저주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늘어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당시의 그리스 로마를 대표하는 이방인들 사이에는 유대인들은 야만인중의 야만인이요 되도록이면 이 땅에서 멸종시켜야 할 인종이라고 믿은 소위 반 유대정서가 이미 확고하게 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두껍고 견고한 벽을 무너뜨린 새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믿는 신약교회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어느날 교회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나란히 함께 앉아 하나님을 예배하는 상상할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본문 16절에서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했고 선행하는 15절 말씀에서는 "--이 둘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새사람이 바로 교회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계층과 계층사이에서 그리고 오늘 이 땅의 허리를 단절한 남북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벽사이에서 과연 다시한번 평화의 공동체로 쓰임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그렇게 평화의 중보자로 쓰임을 받기위해 할 일은 무엇이라고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까?
1.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도록 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을 누구로 소개하며 그가 하신 일을 어떻게 증언하십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예로부터 평화 곧 샬롬이었습니다. 일찍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이땅에 탄생하시기 700여년전 그의 출생을 예언하며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사9:6)했습니다. 여기서 평강의 왕은 좀 더 엄격히 번역하면 "평화의 왕자"라는 말입니다. 이 평화의 왕자이신 주께서 유대인의 이방인 사이의 벽을 허신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 소위 헤롯성전에는 성전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이곳과 내부를 단절하는 벽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접근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이 이 시대의 성전터를 발굴하다가 글자판을 발견했는데 이렇게 라전어와 그리스어로 쓰여 있었습니다."어떤 외국인도 이 곳을 지나 회랑축대나 난간안으로 향하지 말지니 이를 위반하고 잡히는 자는 죽음으로 다스릴 것이니라" 그런데 이 구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새 공동체인 교회안에서 폐기된 것입니다. 그 어느날부터 교회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앉아 나란히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정치가 못하고 사회운동이 못한 일을 예수께서 해내신 것입니다. 왜내하면 그분이 평화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먼저 할일은 이 평화의 주님을 사람들이 영접하게 하는 일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이 세상에서 일어난 별난 일들을 기록한 백과사전에 의하면 영국 스콧트랜드에 살던 미혼 독신 노처녀 자매가 어느날 우연히 삼위일체로 신학논쟁을 벌리다가 마음이 상하여 그들이 살고 있던 원룸 아파트 두 침대 사이에 선을 긋고 부엌도 화장실에도 선을 긋고 그 이후 일체 대화를 나누지 않고 평생을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 이야기를 끝맺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었다면 "해 질 때까지는 분을 품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평생을 화해 못한 그들을 어떻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5:23-24)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평생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을 거절한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기독교의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고 그냥 교회만 나오는 사람들 또 교회 오래 나오다 보니 직분도 얻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명목상의 교인들 말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입니다. 당신은 진실로 예수를 당신의 주님으로 영접하셨는가 입니다. 그가 주인이시라면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만이라도 정말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면 이 세상을 바꾸는 기적이 시작될수 있다고 믿습니다. 남북의 갈등도 동서의 갈등도 예수께서 주님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는 평화이십니다. 당신이 먼저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사건의 시작입니다.
2.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피스 메이커의 삶을 살려면 나 개인이 평화의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제 우리는 능동적으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평화가 올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우리는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추구하면서도 평화하지 못한 것인가라는 물음입니다. 그 성경적인 대답은 그것이 인간의 죄문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가신 이유-그 십자자가에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복음은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해결할수 없었던 죄문제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새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소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져야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일본과의 진정한 화해도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화해노력은 피상적일수 밖에 없습니다. 한일사에 있어서 아마도 우리 한국인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잊을수 없는 가장 가슴 아픈 에피소드는 아마도 유명한 제암리 교회당 사건일 것입니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일어 났을때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4월15일 오후 2시경 일본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일단의 일본 군경을 이끌고 제암리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통보할 소식이 있다고 제암리 교회당에 모이게 했습니다. 대부분이 교인들이었던 약 30명이 주민이 모이자 그들은 교회당 출입문을 폐쇄하고 문을 잠근다음 교회당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창밖으로 기어 나오는 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명했습니다. 한 부인이 어린아이를 창밖으로 내놓고 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소리치자 사격에 이어 어미와 아이를 함께 창으로 찔러 댔습니다. 절규소리, 찬송소리가 잦아들면서 교회당은 마침내 한줌의 잿더미로 변했고 이날 교회당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습니다. 이어서 제암리 마을 31호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만일 이 와중에서 여러분과 저의 가족중 남편과 아내가 또 내 자식이 죽어 갔다면 어떻게 화해가 그리고 용서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1970년 일본의 오야마 목사 일행의 속죄기금으로 이곳에 기념 교회당이 건립되어 봉헌되던 날 이날 예배에 참여한 일본인 그리스도인 대표들과 한국 그리스도인 유족 대표들 사이에는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아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예배의 절정에서 일본 대표의 사죄와 유족 대표의 뜨거운 눈물의 용서가 고백될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교회가 세워지고 일본인의 기금을 받는 것에 대하여 일부 불신자들은 격렬하게 반대를 한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 날 교회당 안에서 선포되고 실천된 용서는 오직 복음 때문에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재무장을 막는 길이나, 일본인들이 진정한 평화의 민족이 되도록 돕는 것은 정치나 시민운동, 국제적인 압력이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금도 일본인 가운데 과거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은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만 찾아 볼수 있는 일입니다. 복음이 해답입니다. 북한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할수 있는 한 인도적으로 북한을 돕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화해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한 이 모든 노력은 피상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복음만이 해답입니다. 복음만이 민족의 항구하고도 본질적인 평화통일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기도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노력할 것은 복음전파입니다. 동구 구라파의 해방, 러시아의 평화해방의 결정적인 전기는 복음선교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평화의 공동체로 평화의 중보가 되기 위해 할일은 무엇입니까?
3. 평화의 성령으로 교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평화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 평화의 주님을 영접하고 평화의 복음을 전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종종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평화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양상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 아직도 잔존하는 죄성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도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정신과 방법으로 교제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 기분과 느낌,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 판단과 이익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파가 생기고 교회내에도 파벌이 생기고 교인들끼리도 적대하고 불화한 모습들을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교회가 어린이 주일학교를 위해 주일마다 여러 대의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버스마다에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한분씩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관찰하니까, 버스에서도 항상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따로 따로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한 분이 아이들을 앞에 놓고 일장 설교를 하며 우리의 피부 색갈은 결코 우리가 나뉠 수 있는 이유가 못된다고 말하면서 사실 잘 보면 우리 중에 완전한 흰색이나 완전한 검은 색 피부를 가진 사람은 없다고 역설하면서 아이들보고 따라 하라고 했답니다. "우리의 피부색은 검은 색도 백색도 아니다. 우리는 사실은 다 회색이다. 우리는 별 차이가 없다. 우리는 다 비슷 비슷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시 다짐을 주고 나서 버스에 태웠는데 뒷 쪽에서 아이들중 대장 격인 아이의 교통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 오더랍니다."밝은 회색은 이쪽에, 어두운 회색은 저쪽으로" 그 만큼 우리는 편견과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여름철 수련회에 가서 성령 충만하자 더 이상 서로를 나누는 벽이 사라졌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열쇠는 성령 충만입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안에서만 하나되어 아버지께 나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다시 엡2:22에서 역설합니다.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21절에 의하면 성령께서 우리 하나 하나의 건물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을 떠나면 언제라도 안 믿는 자처럼 시기하고 질투하고 벽을 쌓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흔히 목사님들이 축도하실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화 감동, 인도 혹은 내주 축복이 함께 하시도록"기원합니다만 성경에는 내주 ,인도, 감동, 감화, 축복이라는 말이 일체 없고 오직 '교통'이라는 말만 사용됩니다. 성령의 공동체내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바로 성령의 교통케 하시는 사역인 것입니다. 부부교제의 행복의 비밀도 성령의 교통입니다. 부모와 자녀사이의 의사소통의 비밀도 성령의 교통입니다. 교회내 평화의 비밀도 성령의 교통입니다.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의 비밀도 성령의 교통인 것입니다.
평화의 성령으로 교통하는 것을 배우는 날-비로소 우리 민족의 진정한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 교회는 평화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중보자로 기도하고 평화의 중보자로 전도의 책임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화평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엡 2:14-18 / 문강원 목사
직장생활이 힘들다고 많이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하는 일이 어려워서 힘들다고 하는 분들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사람 사이에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 할지라도 그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상사가 동료가 비인격적인 대우를 한다면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반대로 보수도 적고 힘이 많이 들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가 화평하면 즐거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어렵다 해도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들간에 화평이 넘치면 어느 가정보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많은 소유가 있어도 가족간에 화평이 깨어진다면 불행해 집니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이 전쟁과 재앙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Ⅰ.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이 멸망의 원망인 깨어진 화평을 회복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가게 하시는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던 담을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막힌 담을 헐고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화평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회고해볼 때 육신적인 면에서는 결코 평안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그 심령에 평안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평안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평한 관계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와 자매이지만 원수처럼 지내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원수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픔 일입니까? 그러나 제일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기만 하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화평을 깨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게 하고 죄의식에 빠져 고통을 받게 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빼앗아 버립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러면 죄로 인해 깨어진 화평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 죄의 값을 치룰 수 있는 자격자가 그 죄값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대표적인 개념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양입니다. 속죄제물을 드릴 때, 제물인 어린양의 머리 위에다가 죄인은 손을 얹고 회개기도를 합니다. 즉 사람이 지은 죄를 양에게 전가시키는 의식으로, 회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양을 그대로 잡아서 제단에 불을 지릅니다. 이것은 죄인 대신 양이 죽는 의미로써, 예수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장소가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를 들라 하면 역시 지성소를 들게 됩니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일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속죄의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를 가리우고 있는 큰 휘장을 지나서 그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죄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와 고통을 당하시다 운명하시는 그 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지성소와 성소를 막아 놓았던 것이 열린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졌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평강의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수 없었고, 하나님 앞에도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듯이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아감을 입었습니다. 예수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휘장을 지나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Ⅱ. 사람들간에 화평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본 절의 '화평'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 감정의 중지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주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시고 화평하게 하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 담은 역사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와 이방인의 뜰 사이를 분리하는 성전난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유대인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었던 자들을 이방인이라 했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으로 구원받을 소망도 없고 이 세상에서도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민족 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롬10:12)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도 이 화평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다른 이들에게도 화평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항상 화평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구원받은 자라면 구원받은 증거인 하나님과의 화평을 통하여 심령에 충만하여 넘치는 화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우리 주님으로 구원받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역사가 아니고는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가 될 수가 없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관계만 회복되면 평화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화평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 평안이 없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심령에 평안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평안을 끼치는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2. 우리들이 이웃에게 화평을 전할 때 우리들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뭡니까?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직후에 사단이 찾아와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의 자녀됨은 우리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6절에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너무나도 확실하고 분명한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갈 4:6에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3. 오늘날 성탄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화평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천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짧은 생애 동안에 평화를 실천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사이를 화평하게 만드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소식은 도저히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도저히 화평할 수 없는 형제와 이웃들과도 성령의 강권하시는 역사로 화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화평의 역사야말로 성탄절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하나님앞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경건한 삶을 사노라고 해도 형제와 화평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조차 받으실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미움과 다툼이 가득한 채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을 때 우리 마음에 평안할 수 없습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온다고요?" 아닙니다. 심령에서 인심이 나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화평하면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작은 과자 한 봉지라도 평소에 서먹 서먹했던 이웃집에 문을 두드려서 화평의 손을 내미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도록 막혀 있는 담을 헐 수 있도록 그 심령에 회개의 영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심령에 사랑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님의 제자다운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성탄절을 즈음하여서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과의 화평과 이웃과의 화평의 축복을 함께 누리시는 복되신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
엡 2:14-22 / 김용국 목사
오늘 본문은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고, 교회가 어떤 모습을 추구해야 되는지를 말씀해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를 통해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공동체, 즉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공동체이며, 그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다 한 형제이고 자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건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도들 가운데에도 교회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어떤 사람들은 '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런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교회가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공동체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평강... 이런 모든 것들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도 당연히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모여서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교회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된 공동체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12-13절에 보면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상 사람들은 딱 두 종류로 구분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지키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 민족,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나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지 모릅니다. 거의 안하무인격입니다.
그래서 방금 읽은 말씀에도 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언약 밖에 있는 사람', '소망이 없는 사람', '하나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결코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함께 할 수 없는 마치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런 대립의 관계는 더욱 더 첨예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에베소 교회 안에서도 이와 똑같은 양상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로서 이방인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어떻게 감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느냐? 라는 식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조차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그릇된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잘못된 신앙생활에 빠져 있는 에베소 교회를 걱정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제는 '나는 유대인, 너는 이방인' 이렇게 편을 갈라서 서로 갈등하면서 미워하거나 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음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믿어질 때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피로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끊으려고 애를 써도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끈끈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어떤 힘으로도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똑같은 것입니다.
호적을 옮긴다고 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흔히들, 부자간에 혹은 모녀간에 화가 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어버리자!'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끊어질 수 있습니까? 절대로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예수님의 피로 가까워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이런 엄청난 관계를 무시하거나 아예 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는 저런 사람들과는 함께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저런 형편없는 사람들하고는 신앙생활을 같이 할 수 없어.'라고 우쭐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왜 이런 마음이 생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해서입니다. 보혈의 능력 즉 십자가의 능력을 제대로 체험하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면 절대로 내 자신을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서로 다른 모습, 서로 다른 성격,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꼭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결코 끊을 수 없는, 서로 외면할 수 없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화평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14-15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교회는 화평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각각 다른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둘을 하나로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있는 벽을 없애버림으로써 완전히 하나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막힌 담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서로 마음껏 교통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화평을 유지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화평이 깨어지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헐뜯으면서며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십자가의 공로로 화평을 이루는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잘못된 환상 때문에 아예 신앙생활을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환상이 뭡니까? 교회는 '착한 사람들, 깨끗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라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교회가 그들의 환상처럼 착하고 깨끗한 사람들로만 꽌 차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생각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가지고 있는 가치관도 다릅니다.
우리가 교회 안을 유심히 살펴보면 때로는 교회가 시험에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아예 실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렇게 믿느니 차라리 안 믿는 게 낫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내가 완벽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내 자신에게 더 솔직한 모습 아닐까요?
사실 우리들 중에 완벽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완벽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안에 때로는 미운 마음이 듭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충돌도 생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포기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고 미련한 행동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비록 우리에게는 화평케 할 능력이 없지만, 예수님에게는 세상 모든 만물을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 힘으로는 너와 나 서로 화평을 이룰 수가 없지만 그 화평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방인의 입장에서 율법이 뭔지를 생각해 보셨나요? 사실,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이런 갈등의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바꿔 놓았습니다.
혹시 우리들 중에 교회 안에서 서로 얽힌 감정으로 인해 갈등관계에 놓여 있는 성도들은 없습니까? 혹시라도 있다면 화평케 해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면 얼마든지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담이 있다면 그 담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더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완벽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들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려고 노력하면 반드시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교회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꼭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 입니까? 남이 못 가진 것을 얻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그런 마음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서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화목하게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해질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조사에 따르면 첫째는 가정의 화목이 59%, 둘째는 자아실현 그리고 건강, 경제적인 부 이런 순서였습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거의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답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모릅니다. 가정의 화목도, 자아 실현도, 건강도,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것도 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근거하고 있는 행복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행복을 말하면서 나를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내 마음이 편하고, 내 마음이 편해야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과 내가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과연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것이 내 인생 전체가 행복해지는 길임을 알고 교회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내 공로로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피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지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교회가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요?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교회의 모습으로 세워져가야 합니다. 그냥 세워진 교회로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함께 계속해서 지어져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 함께 세워져가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먼저는, 생명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생명을 나누어주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는 곧 그분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피로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주는 교회로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주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구원의 기쁨을 서로 나누는 것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뭡니까? 나만 구원받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에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에 보면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누리게 하려고 왔다."라고 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가 하나임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나누기 위해서 그야말로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맛보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 영생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화평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눔이 있을 때 화평케 하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 것만 채우려고 한다면 절대로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나눔이 있어야 합니까?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누실 때에 하나님이 가지신 것 중의 하나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나의 전부를 너에게 준다. 나의 사랑도 주고, 내 몸과 마음도 몽땅 다 너에게 준다. 이 모든 것을 독생자를 통해서 줄 테니 너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이런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그 은혜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님은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나의 장례식은 길게 치르지 마십시오. 내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야기는 다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내 마지막 날에는 마르틴 루터 킹이라는 사람이 남에게 봉사한 일만 말씀해 주십시오.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주려고 노력했다는 것만 말씀해 주십시오. 인류에게 봉사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있다고만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만으로 기쁩니다. 그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나눔을 실천함으로 더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가 이 시대에 힘들어서 쓰러져 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 예배가 회복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인인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친밀해질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의 부흥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에게 진정한 나눔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가 회복되어져 가고 있습니까? 예배의 회복이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 회복임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계속해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로 세우신 그 교회의 모습을 본받아서 불완전한 내 모습을 그분에게로 맞춰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모습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들도 있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 해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했든, 신앙생활한지 오래 되었든 우리는 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야 할 지체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된 모습으로 서로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품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화평케 해주신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사랑도 나누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도 나누십시오.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의 참된 모습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엡 2:14-18 / 이종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샬롬’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에서 ‘화평’으로 번역한 단어의 히브리 식 의미는 ‘샬롬’입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15절과 17절 등 모두 4번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샬롬은 한글 성경에서 평화, 화평, 평안, 평강으로 번역됩니다. 다양한 번역만큼 샬롬의 뜻도 다의적입니다. 전쟁 없는 평화가 샬롬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도 샬롬이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또한 육신의 샬롬이고,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의 상태가 곧 정신적 샬롬이고 이것을 평강이나 평안으로 번역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샬롬이라는 인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만큼 힘들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사는 “진지 드셨습니까?”였습니다. 그 만큼 먹고 사는 게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남쪽은 애굽을 중심한 나일 문명이, 북쪽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충돌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애굽에 붙을까 바벨론에 붙을까가 이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기에 이스라엘이 그리는 이상 세계는 소박합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거하며 자기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왕상5:25, 미4:4).
그래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도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부른 찬양의 주제도 평화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평화! 이 시대 최고의 가치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반도적 위치 때문에 총 930여 회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거의 1-2년에 한번 꼴로 크고 작은 전쟁을 경험한 것입니다. 6.25 한국 전쟁은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 중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공식,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남북한 군인들, UN군과 중공군 그리고 민간인 희생자(사망, 부상, 실종)가 약 470만에 이릅니다. 전쟁의 상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 60년 넘게,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분단과 반공이라는 괴물이 도덕과 정의라는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갈등하고 분열하는 모습은 단지 휴전선을 경계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사회 내에의 갈등 지수는 이미 위험수위에 달했습니다. 영호남의 지역 갈등,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갈등, 노동자와 사용자의 노사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및 자영업자의 경제적 갈등, 강남과 비강남으로 대표되는 불평등, 젊은 세대와 어른 세대의 세대 갈등 등 정말 불안하고 불편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신문이나 TV를 보기가 두렵습니다. 아예 정치면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은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갈등을 더 증폭시킵니다. 가장 고상한 것과 삶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소위 고등 종교 간의 갈등은 또 어떻습니까? 기독교와 불교 간의 갈등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는 교황 방문 이후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가톨릭에 반대하는 운동도 일었습니다. 한중일 동북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족 간의 갈등은 또 어떤 무서운 결과를 빚어낼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조금도 양보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나 있고 자기 것만 주장하며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가치는 평화입니다. 어떤 신념이나 주장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 평화입니다. 6,70년대의 주요가치가 ‘경제성장’이고 7,80년대가 ‘민주화’였다면 2천 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대가치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은 영어로 ‘피스메이커’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 사회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민족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이루는 것이 현시대 교회의 최대 사명입니다.
평화의 사람, 예수
우리 주님은 평화를 만드는 자로 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다주신 분이십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화해할 수 없는 원수 관계였습니다. 바로 죄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 관계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 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까지 인류는 하나님 앞에 가면 무서워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고, 그 분의 심판 앞에 두려워하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빛 중의 빛이십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가 감히 그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 무서운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릅니다.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덮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주님은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오늘날의 남북 간의 갈등이나 일본과의 갈등보다 더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죄 가운데 있다하여 식사마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죽어가도 못 본 척했습니다. 오히려 율법 없이 죄 짓고 사느니 죽는 게 났다는 태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모세는 우리 이스라엘을 침투할 수 없는 울타리와 청동 장벽으로 에워쌌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방 민족들과도 교제를 나누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몸과 영은 깨끗했고 어리석은 신앙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그 율법을 철폐하셨습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율법도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만 한다면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새 사람을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새 인류의 창조입니다. 단순히 경계를 허문 정도가 아니라 교회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개혁이나 변화가 아니라 창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민족의 경계, 가족의 경계, 신분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인 새 사람입니다.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 콜라가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는 자들의 몸속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해야 될 민족은 있지만 국경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창조된 새 인류가 이 세상과 우주로 확대되어 가는 것 그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고립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어떤 종류의 불평등이나 차별을 철폐하고 평등하고 하나 된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기독교는 국경, 혈통, 인종, 신분, 문화의 장벽을 부수며 인류를 하나 되도록 만드는 운동입니다. 제국주의의 위험성도 있지만 그 안에 사랑과 평등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태초의 목적으로 돌아가 인류가 한 형제가 되는 바람직한 이상의 실현입니다. 인류 문명은 바로 이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여러 성품 중 우리가 닮아야 할 최고의 성품은 평화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듯이 우리도 또한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갈등이 생기고 불만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내 맨눈으로 보면 정죄하고 가르고 이용하려는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배우거나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하니 판단하게 되고 그것이 공동체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상대방을 본다는 것은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용서하셨고 의롭게 받아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옳다 인정하셨으니 우리는 정죄할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평화나 사랑은 상대방을 마땅히 존중받을 대상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린 것처럼 취급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명확히 구분됩니다. ‘다르다’는 다양성의 문제라면 ‘틀리다’는 진리의 문제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마치 오른손잡이만 옳고 왼손잡이는 틀리고 비정상으로 생각합니다. 통계적으로 10-20%가 왼손잡이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왼손잡이는 4%에 불과합니다. 외국은 15%가 왼손잡이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나 빌게이츠, 아인슈타인이 모두 왼손잡이입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런 다양성을 받아들일 포용성이 부족한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평화와 함께 가는 것은 정의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것을 엉거주춤 덮는 것을 위장 평화라 하고, 강제로 이룬 평화를 굴종이라고 합니다. 모두 평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선지자들도 비판했던 것들입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4)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은 정의와 상식의 문제인데 이것을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나 다양성으로 미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마저도 진보 보수 갈등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갈등이 있더라도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는 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에서 정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과 ‘옳음’이라는 두 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평화의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들어야 할 것이고 설득해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그들을 향한 존중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평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삽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세상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 기준과 식으로 모든 문제를 판단합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발생합니다. 그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단순히 자기 이익을 좇아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이익이라는 것은 집값이 올라 갈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 내 사업이 잘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겠지요. 단순히 옛날 하던 방식대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념이나 경험보다 앞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형제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려면 자기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자기 것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평화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비전 중 하나가 민족화해와 북한선교를 꿈꾸는 교회입니다. 아니 민족까지는 가지 않을지라도 우리 교회 성전 마당만 밟아도 평화가 임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벽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생각과 과거,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다 포용이 되고 받아들여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차별 없이 받으셨고 존중하셨습니다.
관계의 병을 치유하라
엡 2:14-22 / 박인걸 목사
서울 사람과 안동 사람이 국수와 국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국어 학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국수(밀가루) 국시(밀가리), 밀가루(봉지), 밀가리(봉다리), 봉지(가게), 봉다리(점빵), 가게(아주머니), 점빵(아지매), 아주머니(아기업고), 아지매(얼라업고), 아기(엎어져자고) 얼라(뒤비져자고), 엎어져 자는 것은(벽을 보고), 뒤비져 자는 건(비럼빡보고)자는 겁니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입니다. 관계가 좋으면 행복하고 나쁘면 불행해 지니다. 성령은 관계를 화목하게 하고 사탄은 관계를 깨트립니다. 사탄의 사역은 분리, 분열, 이간, 결별, 파벌을 조성합니다. 교회에서도 분열이 생기면 교회가 갈라집니다. 가정도 사탄이 틈타면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분열하고 원수가 됩니다. 저는 부모와 자식이 원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수십 년이 되어도 서로 오고가지도 않습니다. 국가도 분열됩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70년째 둘로 갈라진 채 원수관계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좋은 관계가 되어야지 나쁜 관계가 되면 서로 피해를 입고 인생을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 『너와 나』라는 책에서 관계를 셋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첫째, 나와 그것(물질) 둘째, 나와 너(인간) 셋째 나와 하나님(god)입니다. 관계에서 물질을 우선순위에 두면 물질주의가 됩니다. 유다와 게하시, 아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질을 삶에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우선순위에 두면 인본주의가 됩니다. 휴머니즘입니다. 현대인들 대다수가 인본주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휴머니즘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면 신본주의가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제일주의를 주장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관계가 바르게 이뤄집니다.
리챠드 니버는『응답적 책임』이라는 책에서“역반응의 인간과 응답하는 인간”을 역설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치유가 이뤄지지 않은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항상 역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삶을 보십시오. 모두 역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성애, 가정 해체, 자살, 각종 범죄 모두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창1:28)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된 인간은 순종과 책임을 다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가 모두 병들었거나 허물어졌습니다. 원수관계가 되어 대적하거나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에 존속 살인 즉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일주일 한 건 이상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실로 무서운 일 아닙니까? 특히 부모의 재산을 노리거나 보험을 타 먹으려고 그런답니다. 사탄은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혼돈스럽게 하고, 분리시키며, 원수가 되게 합니다. 오늘은 관계병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많은 병들이 있지만 관계의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심리적인 병이며 사회적인 병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어떤 병들이 있으며 어떻게 치유 받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본문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는 인간들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갈라진 둘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원수 관계를 십자가로 해소하였습니다. 평안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각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정상적인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못된 관계의 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몇 가지로 연구해 보며 함께 은혜 받기로 합니다.
1. 무관심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병들이 있습니다. 고독의 병, 외로움의 병, 허전함의 병입니다. 최인호 작가가 며칠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타인의 방』이 있습니다. 한 아파트에 3년을 함께 살았지만 한 사람이 도둑으로 의심을 받게 됩니다. 현대 사회의 심리를 아주 잘 묘사한 소설입니다.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고독을 잘 그렸습니다. 아파트는 산업사회의 결과물이면서 공동체 사회를 가로막는 비인간적인 현실이 존재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독합니다. 외롭습니다. 허전합니다. 사람은 많은데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삶입니다.
제프 윌리엄스(Jeff Williams)라는 분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외관상의 사교성과는 달리 내면적인 고립감에 답답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격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홀로 있으면 괜히 마음이 불안하고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친구를 불러내거나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고 합니다.
성경에도 관계의 병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삭개오입니다.(눅19:1-10) 그는 세리장입니다. 부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나 홀로 인생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이웃이 없었습니다.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람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이 그를 찾아 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무관심하였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그는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의 잘 못 된 삶을 청산하였습니다. 재산을 팔아 이웃을 구제하였고, 율법을 어긴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관심은 한 영혼을 살렸습니다. 우리는 나의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입니다.(요4:1-42)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었고, 현재의 남편도 그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은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지저분하게 살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항상 고독하였고, 외로웠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에서 비켜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여인에 대하여 주님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와 깊은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와 심층적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의 영적 고민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는 거듭났습니다.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성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고, 이 여인은 관계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반대 개념을 무관심으로 말하기도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이웃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합니다. 엊그제 방송에 보니까 한 할머니가 쪽방에서 죽은 지 6년 만에 백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옷을 아홉 겹이나 껴입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 난방이 안 돼서 결국 한 겨울에 얼어 죽은 것으로 추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최첨단 정보화 사회로 전환된 후 이웃의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경쟁의 대상이며,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선 내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원수 관계입니다.
관계의 종류로는 첫째, 부부관계, 둘째, 혈연관계, 셋째, 사회적 관계, 넷째, 교우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어떤 일로 틀어지면 원수가 됩니다. 부모와 자식도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는 금전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 배반과 배신, 의견대립과 이념이 다른 경우에 적이 되거나 원수가 됩니다. 원수관계가 되면 가족이나 부모도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소위 존속살인입니다.
새누리 당 강기윤 의원(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은 2013년 9월 29일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 존속 살해 범죄는 287건 발생했으며 이는 한 해 평균 57.4건으로,1주일에 한 건 꼴이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기간 부모를 폭행하는 존속 상해 범죄는 2,193건이나 발생했습니다. 올해는 8월말 기준 존속 살해 33건, 존속 상해 229건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부터 지난 8월까지 존속 살해·상해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 지역은 서울(495건)이었고, 경기도(473건), 경남(195건), 경북(162건)이 뒤를 이었습니다. 강기윤 의원은 “최근 발생한 ‘인천 모자(母子) 살인사건’ 처럼 패륜범죄의 상당수는 금전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며 “특히 취업난을 겪는 청년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정부가 청년실업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황금률은 관계 우선의 법칙입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 하여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됩니다. 둘째, 자신과의 관계를 잘 갖도록 해야 합니다. 앤드류 매튜흐는“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셋째, 이웃과의 관계를 잘 갖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예배 보다 화목이 먼저라고 했습니다.(마5:23-24)
예수님의 사역은 복음을 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과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치유하는 일 가운데 마태복음 4장 23절에 보면“각종 병을 고치시고”라고 하였고, 마가복음1장 34절에도“각종 병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 각종 병중에는 관계의 병이 포함됩니다. 육체의 병과 정신적인 병 가운데 정신적인 병들은 거의가 관계에 의하여 발생한 병들입니다. 굴욕, 무시, 배신, 억울함, 공포, 간섭과 통제, 따돌림, 냉담, 버림받음, 거부당함, 좌절과 멸시받음, 금전적 손해나 손실, 직장 해고당함 같은 것들이 관계의 병입니다. 이런 관계의 병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해를 끼쳐 원한이 맺힌 관계가 원수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화해 할 수 있는 분은 주님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들과 우리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신 분입니다.“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 2:14, 16-17)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관계를 화목하게 하러 오셨고, 그 일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들은 그 안에 십자가의 은혜가 넘쳐 어떤 원수라도 사랑하게 되며 막힌 담을 헐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며, 화해 할 때 우리 마음에 주의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눅17:21)고 했습니다. 여기 너희는 우리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관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원수 관계를 맺고 살면 마음이 지옥이고, 화해하며 살면 마음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관계를 맺고 살면 오그리고 잠을 자고 화해하면 발을 뻗고 자는 것입니다. 원수 없이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또 어떤 관계 병을 치유 받아야 할까요?
3. 깨진 관계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목장이 좁아지면서 삼촌과 조카 사이가 깨졌습니다.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만 것입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부자지간이었으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암논의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아들이 아버지 군대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관계도 아주 좋았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맨토였습니다. 1 차 전도 여행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일로 인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깨졌고, 이후 사도행전에 바나바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주 깨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의 관계가 아들 이방원이 권력욕에 빠져 왕자들을 살해하면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함흥에 은둔한 이성계는 이방원이 보낸 차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함흥차사”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영영 깨지고 말았습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는 역시 피해, 손해, 상처, 실망, 배신과 같은 것들 때문입니다. 이런 문재가 발생하면 아무리 좋던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원수가 됩니다. 깨진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음의 7가지 제의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① 하나님께 화해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② 상대방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주인이 먼저 탕감해 주었습니다. ③ 상대방의 감정을 공유해야 합니다. ④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먼저 고백하십시오. ⑤ 상대방에게 변명하거나 공격하지 말고 칭찬하십시오. ⑥ 화해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 하라.”(롬12:18)고 했습니다. ⑦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화해에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① 먼저 전화를 하십시오. ② 혹은 문자를 보내십시오(카카오톡도 좋습니다.) ③ 통화가 되면 안부를 물으십시오. ④ 식사나 한번 하자고 제의하십시오. ⑤ 만나게 되면 다음의 내용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입보다 귀를 사용해야 합니다. 2) 진솔하게 대화하십시오. 3) 끝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4) 그날 당장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5) 하나님께 화해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관계 병의 치유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인간관계(human relations)를 원활하게 하여 성공적이며 품위 있는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원리를 따르라는 글이 있습니다. ① 기분 좋게 웃으라. 웃음은 자신과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합니다. ② 항상 산뜻하고 깨끗해라. 단정한 사람과 같이 있고 싶습니다.③ 화(anger)를 내지 말라. 호를 내는 사람은 점점 고립됩니다. ④ 상대방과 논쟁을 피하라. 언쟁은 이겨도 져도 친구를 잃습니다. ⑤ 상대방의 단점을 보지 말라. 보면 지적하게 되고 그 사람과의 관계는 틀어집니다. ⑥ 뻔뻔스런 사람이 되지 말라. 공손하고 고마움을 표시해야 합니다.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바뀌기가 쉽지 않습니다. ⑦ 말하고 싶다고 전부 말하지 말라. 자신의 말만 늘어놓으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합니다. ⑧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말라. 돈이 관계를 상하게 하거나 갈라놓습니다. ⑨ 새로운 일을 반대하지 말라. 새로운 일에 반대하는 사람은 진보가 없습니다. ⑩ 거만하지 말라. 거만하면 친구는 모두 떠나갑니다. ⑪ 거짓말을 하지 말라. 자신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⑫ 남을 놀리거나 빈정대지 말라.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관계를 잘하고, 좋게 갖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아랫사람은 사랑하고, 동료에게는 베풀고, 윗사람은 존경과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 가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8-20절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관계 병이 치유되어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화해를 만드는 사람들
에베소서 2:14-16 / 인명진 목사
요즈음 한국사회 현상을 압축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헬조선’이라는 단어입니다. 20, 30대 젊은 세대들이 만들어 낸 ‘헬조선’은 지옥과 조선을 뜻하는 합성어입니다. 즉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입니다. 어린시절부터 지독한 입시경쟁을 겪고 대학시절 스펙을 쌓느라 힘들게 노력해도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 또 취업을 해도 대다수가 비정규직 근무로 연애, 결혼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을 비꼬다가 생긴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수저계급론'이 화제였습니다. 수저론은 원래 서양귀족들이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은으로 된 수저, 곧 silver spoon을 사용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청년들은 이 수저론을 바탕으로 부모의 재산과 직업, 영향력에 따라 자신을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으로 구분 짓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수저계급론은 청년들이 계급 체계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쯤 있는지를 타인의 시선으로 검증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와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도저히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사회 경제적 현실에 대해 체념하고 무기력해하는 사회병리적 현상입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학부라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대학교 한 학생이 자신의 수저계급을 비관하여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들의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다. 21세기 들어 신자유주의 경제의 글로벌화로 전 세계가 경제적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이념은 모든 사람들은 물론 민족과 나라를 무한경쟁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벌 차원의 빈익빈부익부가 횡행하고, 국가와 사회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공동체가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야기했던 국가주의의 망령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화당의 트럼프 현상, EU에서 탈퇴한 영국의 브렉시트,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 일본의 평화헌법개정 움직임 이 모든 것들이 국가주의 유령들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동지역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로 전쟁과 테러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시리아의 내전과 IS의 창궐은 국제사회에 난민 문제와 유럽에서의 심각한 테러의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급기야 전 세계는 도처에서 자살과 폭탄 테러로 평화가 상실되고, 수많은 희생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7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치적 군사적 대립,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고착된 분단현실이 우리 가운데 내면화되고 일상화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북한 핵개발과 미국에 의한 사드배치 문제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무한경쟁의 사회, 분열과 분쟁의 사회 그리고 전쟁과 테러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창세기 32장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32장은 우리가 잘 아는 야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어려서부터 매우 명석한 두뇌를 지닌 소년이었습니다. 반면에 형 에서는 우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정이 즉흥적인 형 에서는 어느 날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떡과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팝니다. 그리고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명분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장자권은 모든 재산과 권한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빼앗은 이 사건은 아무리 형제간이라 해도 이제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결국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가 분노하여 동생 야곱을 죽이려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20년간 라반을 위하여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결국 라반의 딸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많은 재산을 증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라반에 집에 야곱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사역을 위해 다시 야곱을 부르십시다. 창세기 31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특별한 부르심이요, 선택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야곱은 라반과 헤어져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 모두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야곱만이 하나님의 역사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실 야곱은 이름 그대로 속이는 자입니다. 간교하고 욕심과 결함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25장을 보면 에서가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 장자권은 단순히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상속받는 권한이 아닙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이 장자권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한다는 약속입니다. 그를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경홀히 여기는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나라를 사모하는 야곱을 자신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성도 여러분! 제가 아는 갈릴리 교회는 수많은 한국교회들 가운데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교회입니다. 갈릴리 교회 25주년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군부독재가 절정에 이르렀던 1986년 6월 1일 인명진 목사님과 8명의 성도들이 이 땅에 또 하나의 십자가를 세우는 교회가 되지 않겠다는 고백 하에 세운 교회입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던 격동의 시기에 이 민족의 구원은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소망이라는 신앙고백 하에 교회를 세웁니다. 이 분들은 모든 세상의 악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만이 우리 민족을 이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으며, 이 나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역사의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겠다는 특별한 신앙적 소명 하에 갈릴리 교회 공동체를 만듭니다. 역사의 소명,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명을 귀하게 여기고 설립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여겼던 야곱을 택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역사 현실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새로운 교회 모델을 제시하였습니다.
갈릴리 교회는 비록 큰 교회는 아니지만, 부자들의 교회는 아니지만 설립된 지 30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교회의 아주 중요한 모범적 교회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이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되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작은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 대한 긍휼을 베푸는데 교회의 역량을 집중하였습니다. 교회 예산의 50%를 이주노동자와 해외선교 등 사회선교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30년이라는 짧은 교회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주목하는 아주 특별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갈릴리 교회와 인명진 목사님의 사역을 재평가하여 작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인명진 목사님께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수여해주었습니다. 올해에는 독일 교회가 갈릴리교회와 인 목사님의 목회사역을 너무도 독특하고 학술적 연구의 가치가 많다고 판단하여 기금을 출연하였습니다. 이 기금으로 독일의 마인츠 대학과 장로회신학대학교, 그리고 제가 있는 숭실대학교가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독일교회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국인 신학생에게 장학금과 마인츠대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하였습니다.
갈릴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갈릴리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갈릴리교회의 신앙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가야할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명으로 인하여 여러분들을 선택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갈릴리교회의 신앙과 역사전통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야곱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먼저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의 분노와 미움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와의 화해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매우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합니다.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축적한 재산을 뇌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에서의 분노가 뇌물로도 통하지 않으면 도망을 가고자 종들을 먼저 에서에게 보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아직 화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하기 전 먼저 압복강 나루터에서 화해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면해야 했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야곱은 저녁에 얍복강 나루터에서 느닷없이 그림자처럼 나타난 존재와 생사가 걸린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야곱은 처음에 검은 그림자처럼 나타난 존재가 하나님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이 존재와 씨름을 하고, 싸움에서 이긴 다음에야 야곱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는 설명을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화해 과정에서 그저 조정자로 나타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화해의 주체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화해를 생각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는 화해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압복강 나루터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날이 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하면 형 에서와의 화해를 이루어주시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화해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요셉과 그 형제들 사이의 이야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과 이방나라들의 이야기들은 사실상 모두 화해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화해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이 인류와 화해하시는 화해의 이야기들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하나님의 화해사건을 바울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고린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서 이 하나님의 화해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글들 속에서 하나님의 화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 4권 화해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종말론적인 화해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에 나타난 이 화해의 이야기는 복음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요, 핵심적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의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세계교회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1907년에 있었던 대부흥운동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 하디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디는 한국에 선교사로 와 여러 해 동안 선교활동을 해도 열매가 없던 자신의 사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보이지 않게 한국인들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선교에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철저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인들에게 간증하였습니다.
이 하디의 회개의 사역은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한국인 목회자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07년 평양에서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길선주 목사의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이 압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대면한 것처럼, 각자의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갖가지 죄들을 철저히 고백하고, 회개와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과 화해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부흥운동 화해사건으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택받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차원의 화해입니다. 이러한 화해의 체험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신앙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오늘 본문 야곱의 압복강 나루터 이야기는 화해는 새로운 삶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긴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가 이를 뜻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를 위해 이전에 시도했던 인간적인 전략을 포기하고, 담대히 형 에서에게로 나아갑니다. 형 에서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자신이 가장 먼저 형에게 나아갑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화해를 체험한 사람은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 화해자로 나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은 이중적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셨고, 수평적으로는 인간과 인간 사이, 나아가 인간과 자연사이의 화해까지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화해를 체험한 사람은 분쟁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에 화해자로 나서야 합니다.
동서독의 통일 후 독일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화해한 것을 근거로 살아가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화해한 자로서 우리는 여러 민족과 문화와 종파와 서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화해하는데 이바지하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갈릴리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과의 화해사건을 근거로 이웃과 사회의 화해사역에 헌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는 온통 갈등과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인하여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소수의 재벌기업들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구조 하에서 대다수 중소자영업자들이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로 젊은이들이 헬조선을 외치고 있습니다. 부모의 직업과 경제적 영향력이 자식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수저계급론이 판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지역주의와 이념논쟁, 그리고 세대갈등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71년간 이어져 온 분단체제로 인하여 남북의 갈등과 긴장이 항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쟁과 갈등의 시대, 분열과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사명, 곧 세상을 화해시키는 사역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화해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분열과 갈등으로 신음하는 이 사회에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적 가치인 화해는 관계의 회복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충만함을 전망하는 가운데 모두의 마음들, 영혼들을 치유하며,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키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을 보면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소외된 사람들, 절대적인 가난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상처 난 심령을 위로해 주는 선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인간의 약탈과 파괴로 인하여 신음하는 자연을 돌보고 치유해야할 선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갈릴리 사람들이 이 관계회복과 치유의 사역을 담당하길 원하십니다.
또한 화해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우리 민족은 안타깝게도 남과 북이 분단된 지 올해로 70년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분단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지금도 ‘잠시 중단된 전쟁’으로 인하여 한반도에는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미가서 기자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해야 할 때”(미 4:3)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갈릴리 교우들은 평화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바랍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한 십자가
시편 18:16-18, 에베소서 2:14-18 / 이성희 목사
일본의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를 사람들은 ‘소설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일본 근대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이쇼(大正) 시대의 걸출한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 가운데는 ‘화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소설 이상의 소설이라고 격찬했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주제는 자신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화해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소설에서 “불화의 원인을 쓰려면 한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주인공이 아버지와 충돌하면서 격앙되고 번민하다가 마침내 화해라는 매듭을 짖게 됩니다. 시가 나오야는 오랫동안 꼬이고 꼬인 일신상의 문제인 아버지와의 불화가 1917년 8월 30일 갑작스레 풀리므로 부자는 진심으로 화해하게 됩니다. 이 화해의 감동이 생생한 9월 초부터 펜을 잡고 단숨에 작품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잦은 출장 때문에 아버지와의 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3세 때부터 조부모의 양육을 받았습니다. 13세가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차게 되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극적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원수 된 것을 다 없이하고 먼 사이가 가까운 사이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15에는 최초의 ‘메시야 예언’이 나타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와와 뱀은 타락과 에덴에서 추방되므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뱀을 용서와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은 불 뱀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물게 하시고 물린 자가 다 죽게 되었지만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원수를 소멸하시고 이미 다 이기셨습니다.
화해란 타자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철학자 헤겔은 화해란 일종의 근본적인 덕으로 중시하였습니다. ‘법률용어사전’에는 화해란 “분쟁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 사이의 분쟁을 종지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화해는 분쟁을 종식하는 일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입니다. 화해란 결국 원수 된 것을 없이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모형을 보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무거운 휘장이 길게 쳐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쫙 찢어졌습니다. 더 이상 막힌 담이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소멸하셔서 담이 없게 하시고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십자가로 소멸하고 원수를 친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셨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에게도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몸으로 허시고,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무거운 담을 헐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힘입니다. 원수가 사라지고 친구가 되는 것은 십자가의 힘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이, 우리와 다른 사람 사이의 담이, 우리와 자연과의 담이 다 헐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육체로 막힌 담을 허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4에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는 화해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근본이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세요. 누가복음 2:14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합니다. 갈기갈기 분열되고 깨어지고 찢긴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려고 평화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세요. 이사야 53:5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죄악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고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세요. 마태복음 28:9에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의 평안이었습니다. 평안이신 주님만이 주실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분리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임마누엘입니다. 분리된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하나 되게 임마누엘을 이룬 것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에 막힌 담을 육체로 허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땜질입니다. 결합입니다. 혼인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선지자입니다. 그는 사울과 다윗 두 왕을 친히 기름을 부어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사역은 ‘평화’였습니다. 사무엘상 7장에는 사무엘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땅을 찾습니다. 그리고 7:14에는 그의 사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화해란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가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화해는 서로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다”란 말의 헬라어는 ‘상태를 되돌려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란 뜯어진 것을 다시 꿰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항하는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싸늘히 식은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처음 상태인 임마누엘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사적 인물들을 볼 때도 화해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국민의 갈등의 요인인 종교 문제 즉 이슬람과 힌두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무던 애를 썼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매일 아침 읽었다고 전해지며 산상보훈에 기록된 무저항주의를 늘 주장하였습니다.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가였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흑백갈등을 해소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주도하던 워싱턴의 평화행진은 문자 그대로 평화를 위한 행진이었고 비폭력 행진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미국 남북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흑인해방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다음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맙시다.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읍시다.” 전쟁이 끝난 직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이런 화해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암살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을 주어 화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해결’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화해’는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화해에 초점을 맞출 때 문제는 그 중요성을 잃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관계에 초점을 맞출 때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잘 부르는 복음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은 금년 WCC 10차 부산총회에서 부르게 될 찬양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각양의 인종과 교파와 신학이 있지만 십자가 안에서 헐리지 않을 담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모든 담을 헐게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이 하나 되게 하신 화평의 징표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육체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려고 원수된 것을 소멸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6에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원수라는 딱지를 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다’ 라는 선포입니다.
죄란 하나님과 원수된 것입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소멸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된 것인데 이 원수를 소멸해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뱀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될 것이고, 뱀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죄를 지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응하여 사람은 원수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 된 것을 소멸하였습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닙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닌 것은 죽음이, 마귀가 원수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넉넉히 원수를 이기시므로 원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이미 화해하여 원수를 친구로 바꾸셨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의 표입니다.
출애급기 15:6에는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수시는 원수란 현실적으로는 이방나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부수시어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사탄이 왜 사탄이 되었습니까? 타락한 천사의 무리가 사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던 타락한 천사들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던 못된 무리들입니다. 타락한 영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방해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든 장본인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천사가 타락한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편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4:4에는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과 벗이 될 수 없고 원수가 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17:33에는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 신도 섬겼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1에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려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입니다. 원수인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런 원수 됨을 소멸하는 힘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알면 더 이상 세상의 편이 되지 않고, 세상과 짝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성경은 여러 번 경고합니다. 구약에서는 ‘네가 나를 버렸다’고 합니다. ‘이방 신과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나를 버리고 네 길을 갔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원수 됨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큰 아들은 포도원에 간다고 하고서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인 불의한 청지기’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서 자기의 뜻대로 하는 탕자’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화해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친히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체를 드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모든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원수 갚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신의 이름으로 할 때가 가장 치열합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기독교 전쟁 같은 전쟁은 없습니다. 유럽의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에서 시작하여 정치전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던지 독일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고, 이 전쟁으로 유럽 대륙은 황폐하게 변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원수 갚는 방법은 어떠했습니까? 죽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살므로 원수를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십자가를 통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이깁니다.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이기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항상 원수에 대하여 좋은 말만 하는 링컨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원수는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링컨은 웃으면서 “옳습니다. 없애야 하구 말고요. 저도 바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버리는 걸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친구로 만드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는 더 이상 원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원수를 이겨서 없애고,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원수를 없애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27년간 로빈 섬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넬슨 만델라는 출옥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변함없는 국민의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억압한 사람들에게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만델라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원한을 가질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소멸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결 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병원에 한 젊은 남자 환자가 에이즈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소년시절 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문제아로 취급되었던 사람입니다. 부모도 그를 찾지 않을 정도로 막된 삶을 살았습니다.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고 폭력조직에도 가입하였습니다.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에이즈에 걸려 온몸이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집을 뛰쳐나와 거리생활을 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이 준비되지 않아 눈을 감지 못합니다. 병원의 원목 목사님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의 손을 잡고 눈으로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 환자에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환자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수소문하여 아버지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병실에 들어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들아, 사랑한다”고 아버지는 나지막하게 속삭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라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아들의 그 말에 아버지는 “아들아, 이미 용서했다”라고 화해의 말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얼마 후 조용히 아버지의 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와 화해한 아들이 평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용서와 화목은 십자가의 영원한 힘입니다.
칼 메닝거는 많은 정신병이 용서와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면 전 세계 정신병원의 70%가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정신병을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병을 다 고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육신의 병을 고칩니다. 정신의 병을 고칩니다. 영혼의 병을 고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막힌 것을 헐고, 원수된 것을 다 소멸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의 삶을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의 삶
엡 2:13-22 / 박조준 목사
지난 시간 우리는 그리스도 밖의 삶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육 체로 이방 사람이요, 언약에 대해서는 의인이요, 무할례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요, 세상에 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의미도 없이 보람도 없이 살았습니 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육신적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그때 라는 말은 그리스도 밖에 살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이제는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이제는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와 이제 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 밖에 살던 때와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몸은 같은 몸이지만 그 영혼이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살 때는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까? 우리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 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믿음 없이 소 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사는 생활을 거듭해 왔었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하 나님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불행하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전에는 우리가 멀리 살았었습니 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소위 이방인으로 멀리 살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멀리 살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살던 우리가 이제는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 워졌습니다.무엇으로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의 피가 어디서 흘렀습니까? 십자가에서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서 흘리신 피로 인해서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었나요? 대답은 간단합니다.인간이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 와는 나무 뒤에 숨어서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고 도망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는 멀어집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화목의 제물로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전을 보아도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소와 양을 잡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은 성소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 고 성전 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차별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 그리스도의 피가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까워지게 했다 고 했는데 어떻게 가까워지게 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보세요.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교통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인간은 죽음 의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전에 올림픽 훼밀리 아파트의 5천 세대 2만여 주민이 난방이 안되어서 이 추위에 고생을 했 었습니다. 지난 여름 지역 난방을 했는데 원인을 알 수 없이 난방이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습 니다. 더운 물이 들어와야 할 때 더운 물이 들어오지 않으니 영하의 추위에서 떨 수밖에 없고 모 두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계되는 사람들이 원인을 알 수가 없어 며칠 동안이나 헤맸 습니다. 나중에 발견된 것은 더운 물이 오는 파이프에 철판이 막혀서 통하지를 않은 것이었습니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면, 죄의 담이 있으면 교통이 단절되고 인간 은 어두움과 사망, 무의미와 불행 속에 지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 에 막힌 이 죄의 담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이 아예 완전히 헐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둡게 살았던 우리가 밝게 살게 된 것입니다.추위에 떨던 우리가 따뜻하게 지내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담대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불안하게 지내던 우리가 주안에서 행 복하게 살게 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 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아무런 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아주 복잡할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다른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무 때나 은 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직접 하나님 앞에 아뢰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 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이보 다 놀라운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살리셨습니다.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멀리 있던 우리가 가까워지게 되었 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되어 화친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막혔던 담을 완전 히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차별이 없이 되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많 습니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습니다.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있습니다. 인도 같은 데는 여러 가 지 계급이 있어서 최고의 계급에 있는 사람과 밑에 있는 계급의 사람은 결혼도 할 수가 없습니 다. 과거 우리 나라도 봉건제도하에 있을 때 양반과 상민의 차별은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모든 담도 헐어버리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는 양반도 상민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되었으면 그 이상의 양반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그릇이 하나 내려왔습니다. 그 그릇 안에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 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 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말이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은 내가 언제 든지 먹지 아니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하늘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는데 마침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 의 백부장이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 사도를 모시러 왔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 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 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화평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만든 높은 담도 헐어버리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흰 사람 검은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 민족 저 민족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차별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주 님의 뜻이 아닙니다. 1871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돌 하나가 있는데 거기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이 든지 이방 사람은 이 담 안에는 들어오지 못함. 만일에 들어오게 되면 죽을 것임. 그러나 그 책 임은 본인에게 있음 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이렇게까지 이방 사람이 하 나님의 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담을 막아 놓고 경고문까지 써서 붙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둘로 하나 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지성소에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을 헐어버려 누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 사람의 담을 헐어버리셔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신령한 이스라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담은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 사람은 헬라 사람대로의 담이 있습니다. 그 당시 헬라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아예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헬라인과 야만인의 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국가와 국가 사이에 담이 없습니까? 민족과 민족 사이에 담이 없습니까? 백인과 흑인 사이에 담이 없습니까? 교회와 교회 사이에 담이 없습니까? 지방과 지방 사이에 담 이 없습니까? 이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제가 듣는 대로 어떤 교회는 어느 지방 출신이 주로 모 인다 는 말을 듣습니다. 서울 사람만 모이는 교회, 영남 사람만 모이는 교회, 호남 사람만 모이 는 교회, 이북 사람만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 담이 없 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담을 헐어버리셨는데 우리가 다시 이 담을 쌓지 마십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 마음에 어떤 담도 쌓지 마십시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만, 자기 민족끼리 남과 북으로 아직도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우리뿐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이 얼마나 민족의 비극입니까? 이 담을 헐기 위해서 우 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담도 헐어주셔야 이 땅이 통일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담을 헐어버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신 말씀 14절을 보세요.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 문입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란 말이 신약 성경에 169번이 나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리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워집니다. 옛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됩니다. 옛날 욕망이 변하여 거룩한 하늘의 욕망으로, 세상의 명예와 물질의 욕망이 거룩한 것으로 변합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여기 새 것이 되었다는 말은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 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주인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 욕구는 그 속으로부터 온전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본성의 변화를 의 미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돼지를 깨끗이 목욕시켜서 말쑥한 옷을 입히고 아름다운 리본을 달고 진주 목 걸이를 하고 여러분의 안방에 들여놓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깐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아 까 그 돼지는 자기 우리로 뛰어 들어가 있을 것입니다. 왜요? 아무리 돼지를 목욕시키고 옷을 입 히고 장식품을 달아 놓았지만 결국은 그 본성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욕은 시켰어도 돼 지 본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진주 목걸이를 걸었어도 여전히 돼지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문화 주택에 살면서 갖은 문화시설을 이용하며 지내지 만 그 속 사람은 돼지나 개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환경은 변했지만 사 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과거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혹은 교육적으로 노력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이 환 경의 변화나 교육적인 훈련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사 람되기 원하는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에게 새로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 하는데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말씀하사 전에는 새 사람이 되는 가능성이 있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그러기에 학식 많고 경험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니고데모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 새 사람이 되려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까?
니고데모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 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새 사람이 되는 진리를 몰랐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습니까? 먼저 내가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 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멀리 떠났던 아들이 이제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처럼 두 손 들고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악하고 더러워도 우리를 영접하시고, 우리의 죄 를 다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 사람으로 창조하여 주십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어떤 방면으 로 나타납니까? 1. 우리의 생활이 새로워집니다. 골로새서 3장 9∼10절에 보면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 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 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이 되어 어두운 생활, 더러운 생활은 벗어버리고 밝고 깨끗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생활의 열매를 보면 새 사람이 된 증거를 알 수 있습니다. 생활뿐만 아니라 그 지식에까지 새로워집니다. 옛 습관, 옛 사고에서 벗 어나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위엣것을 찾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 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 시니느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새 사람은 위엣것을 찾습니다. 위엣것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찾느냐, 그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 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 다 고 했습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했습니다. 사랑의 강권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남편 을 섬기는 것이 법에 의해서입니까? 아니면 사랑에 의해서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우 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봉사를 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은 내게 돌아오는 것을 생각해서 그만큼 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일하는 사람은 이해 관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보통으로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봉사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 사람의 열매를 맺습니다. 옛 사람의 열매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목하며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