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흥미로운 이단인 성상파괴주의입니다. 말 그대로, 성상은 우상이라고 보고 십계명에 따라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성상파괴주의는 소아시아 민중의 지지에 힘입기는 하였으나 그 채택은 황제인 레온 3세의 강력한 의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단이 아래로부터 이루어진 것과 달리, 성상파괴주의의 발현은 크킹3의 개종처럼 지도층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죠. 로마 교황은 이에 반발해 반란을 부추겼고 황제는 군을 보내 교황을 체포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교황이 사망하면서 애매한 상황이 되고, 콘스탄티노플 내에서도 내분이 극심해지면서 되려 교황은 비잔티움의 영향권에서 점점 벗어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분쟁은 증손자인 콘스탄티노스 6세가 10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절정에 달했습니다. 섭정을 맡은 어머니 이리니(에이레네)는 그리스 출신으로 열렬한 성상숭배주의자였으며, 공의회를 열어 성상파괴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녀는 군사적인 재능은 별로 없어서, 시칠리아 총독이 독립을 선언해 버렸고 이슬람과는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어야 했습니다. 성상파괴주의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하자 하느님이 이들을 벌했듯이(출애굽기 32장) 이런 실패는 성상숭배 때문이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 성상파괴주의자들은 콘스탄티노스 6세를 중심으로 반란을 꾀했으나 이는 발각되어 황제는 감금됩니다. 그러자 소아시아의 군대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 황제를 구출하고 이리니를 폐위시킵니다. 그러나 성상파괴주의자의 희망과는 달리 콘스탄티노스 6세 본인도 졸전을 거듭했고, 인기가 점점 떨어지면서 792년 이리니는 복권되고 797년 아들을 전격적으로 붙잡아 눈을 뽑고 유폐시키게 됩니다. 그는 곧 죽었고 이리니는 단독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 잔인한 행위에 민심은 떡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은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내리며 비잔티움 제국에 도전하기에 이릅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하나로 합쳐 진정한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 이리니에게 청혼하나, 백성들은 프랑크의 야만인에게 제위를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리니가 청혼을 진지하게 고려하자 비잔티움의 귀족과 민중은 그녀를 폐위시키고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보냅니다.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결혼 때문에 유배된 그녀가 레즈비언의 어원이 된 이 섬에 유배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 평하죠.
그녀를 폐위시킨 니키포로스 1세도 성상옹호주의자여서 분쟁이 끝나나 싶었으나, 그가 불가리아 크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참수되어 두개골이 크룸의 술잔으로 쓰이는 엄청난 굴욕을 당하는 사태가 터집니다. 심지어 아들인 스타브라키오스도 척수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어 곧 죽었고 니키포로스 1세의 사위였던 미하일이 제위에 오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상파괴주의는 다시 부흥합니다. 이리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상파괴주의자는 성상숭배로 인해 이런 재앙이 닥쳤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힘입어 아나톨리아의 총독이였던 레온 5세가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능력과 별개로 그의 즉위과정은 대단히 비열했습니다. 크룸에 맞서 아나톨리아 군대를 이끌고 황제와 함께 싸우다가 갑자기 후퇴해 패전을 야기한 것입니다. 패전으로 민심이 떡락하자 황제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의 군대를 달래기 위해 성상파괴주의를 채택했고 제국을 안정시켰으나, 즉위 과정이 이방원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통성이 없어서 인기가 있을래야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즉위 7년 뒤인 820년 크리스마스에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미하일 2세는 원래 레온 5세의 황실 경비대장이었습니다. 그가 반란을 꾸몄다는 죄목으로 82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수감되자 친구들은 다음 날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던 레온 5세를 찔러 죽였고,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꺼내왔습니다. 크리스마스여서 족쇄를 끊을 대장장이가 없는 탓에, 황제는 졸지에 족쇄를 차고서 제위에 올라야 했습니다.
뭔가 나사빠진 즉위과정과 달리 그의 치세는 생각보다 안정적이었으며, 성상파괴주의 역시 힘을 잃어갑니다. 성상파괴주의가 득세했던 아시아의 영토는 이슬람에게 넘어갔고, 이슬람의 교리와 비슷한 성상파괴주의는 의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하일 2세는 일단 성상파괴주의를 공식적으로 유지하였으나, 성상 숭배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미하일 2세는 50년 만에 아들에게 평화롭게 제위를 물려주는 황제가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아들 테오필로스는 꽤나 강경한 성상파괴주의자였으나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는 성상 옹호자였고, 몰래 성상을 가지고 성상에 기도를 드린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습니다. 테오필로스가 급사하면서 성상파괴주의는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섭정을 맡은 테오도라가 843년 공의회를 소집했고, 공의회가 성상파괴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죽은 테오필로스 황제 역시도 파문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요구가 시메온 주교 등 강경파를 중심으로 공의회에서 제기되었습니다. 테오도라는 뇌물로 이를 무마해보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그녀는 황제가 죽기 직전 성상을 청해서 자신이 손에 작은 성상을 쥐어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끈질긴 설득에 시메온도 누그러들었고 꿈에 죽은 황제가 나타나 자신을 너그러이 보아 달라 간청했다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테오필로스는 파문된 성상파괴주의 이단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죠. (Dvornik, Francis (1953). The Patriarch Photius and Iconoclasm 참고)
게임 내에서 성능은 정교회와 유사하나, 수도주의 대신 우상 파괴 운동 원리가 붙어 있는 정도입니다. 위에 쓴 기나긴 역사를 고려해서인지 비잔티움 백작령을 차지하고 있는 영주는 세계 총대주교좌를 파괴하고 성상파괴주의 총대주교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성능을 보기 위해 테스트해 보겠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는 작동하며 성상파괴주의 총대주교는 내 봉신이 됩니다. 2에서처럼 파문을 아무데나 쏠 수 있나 봤는데, 기본 기피가 -50이고 나를 향한 의견에 따라 보너스를 최대 +100까지만 받을 수 있으므로 아무데나 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때 정교회는 세계 교회주의 원리를 박탈당하고 대신 성상파괴주의가 세계 교회주의를 얻으므로, 정교회 믿는 비잔티움에 마음대로 성전을 날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 제국 해체하고 싶을 때 전략적으로 채택할 만한 듯 싶습니다.
우상 파괴 운동(사원 건물/봉토 건설 시간/비용 -33%), 영지주의(봉토 하사 시 스트레스 해소, '절제하는'이 미덕, 다른 영지주의 신앙을 정의로운 신앙으로 간주, 관리력 -2 학습력 +2), 사그라지지 않는 믿음(기량 +4, 신앙 적대도 유리함 +2)이 붙어있는 바오로파입니다. 650~872년까지 아르메니아와 비잔티움 일대에서 퍼졌기에 정교회 이단으로 분류합니다.
소위 영지주의라 함은 악한 물질세계와 선한 영적 세계를 대비시키는 견해로, 이들은 그리스도가 육신(=물질)을 취하지 않았고 영의 형태로 왔다고 보았습니다. 또 구약은 악한 물질세계의 신에게서 온 것이라 하여 거부하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음을 이유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등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단적인 견해는 비잔티움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성상파괴주의를 끝장낸 섭정 테오도라는 군대를 보내 약 10만 명을 학살했으며, 867년 스타팅의 황제이기도 한 바실리오스 1세 역시 군대를 보내 탄압했습니다.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탄압하지 않았어도 이들의 매력 없는 교리가 멀리 퍼지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화를 불렀다고 혹평합니다. 박해로 인해 아르메니아 일대가 이슬람과 단합하는 역효과를 낳았기 때문이죠.
이후 9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불가리아 국경 전선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바오로파 역시도 동유럽으로 퍼져나갔고, 보고밀파나 카타리파 등의 다른 이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나 콤니니는 페체네그의 공격을 막는 국경수비대로 부리기 위해 이주시킨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게임 내에서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이단 1이다. 우상 파괴 운동 원리가 하등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종교 권위 낮을 때 창궐했던 크킹2와 달리 크킹3의 정교회는 으뜸 교구정 원리 때문에 열성을 잘 유지해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영지주의에 탁발승, 평화주의(성전 및 약탈 불가능, 평화주의자 의견 +10, 최소 2년 이상 평화 상태이면 신앙도 월 +1)가 있는 보고밀파입니다. 10세기 불가리아 서부의 사제였던 보고밀이 창시한 종교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는 마니교와 결합된 바오로파라 칭했습니다. 972~990년 사이에 쓰여진 <Discourse against the Heresy of Bogomil>에서는 보고밀파가 등장한 것은 성직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억압에 있다고 비판합니다. 불가리아가 봉건화되는 과정에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농민을 탄압했고, 불평등이 악신에게서 나왔다는 영지주의적인 보고밀파가 쉽게 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불가르인의 학살자'라 불리는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래 비잔티움의 통치도 가혹했으며, 보고밀파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1087년 보고밀파와 연합한 페체네그족은 약 8만 명의 규모에 달하는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켰고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 황제는 돈을 주고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오흐리드(Ohrid)의 대주교는 '피흘리지 않고 승리'했다며 낯부끄러운 칭찬을 하죠. 이어 알렉시오스 1세는 또 쳐들어온 페체네그족을 쿠만족과 연합해 격퇴하고, 보고밀파 지도자를 원형 경기장에서 공개 화형시키는 등 개종을 거부하는 보고밀파를 강력하게 탄압하게 됩니다. 딸 안나 콤니니는 이런 아버지를 '열세 번째 사도'라 칭송하면서, 정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투쟁하였다고 평합니다.
이로써 비잔티움 내 보고밀파는 쇠퇴하였으나 보스니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정복 전까지 명맥을 이어갑니다. 게임 내에서는 이러한 역사와 맞지 않게 평화주의 원리를 달고 있는데, 그로 인해 처참한 성능의 이단 2가 되었습니다. 성전을 선포할 수는 없는데 일방적으로 맞아야 하는 상태이니 말입니다. 바오로파와 마찬가지로 잘 안 나타납니다.
첫댓글 오늘날에는 더욱 더 많은 개신교파 계열의 이단들이...
정리를 잘해주셨군요! 게임 내 효과와 총평에 관해서도 더 잘부탁드립니다!
한국의 개독교는 게임에서 무슨 특성을 넣어주면 되는거지...?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