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순조~철종대까지 3명의 왕을 거치면서 약 60년 동안 이어진 정치를 세도정치(勢道政治)라 하고 세도정치는 외척정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도정치의 원래 의미는 '정치의 도리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 - 世道政治(세도정치)'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말기의 부정적인 외척 정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순조(純祖) 때부터 안동 김씨(安東 金氏)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정순왕후를 안동 김씨(安東 金氏)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경주 김씨(慶州金氏)가문의 사람이다.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안동 김씨는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안동 김씨인 김조순(金祖淳) 의 딸이 왕비가 된 순간부터이며, 병인경화(丙寅更化)를 통해 정적들을 일소한 김조순은 1808년 4월 군권을 장악하면서 세도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785년(정조 9년) 21세 때 문과에 김조순이 급제하자 정조는 '문정초손(文正肖孫 - 문정공 김상헌의 후손)이 등과했다.'고 반가워하며 '낙순(洛淳)' 이었던 그의 이름을 '조순(祖淳)'으로 바꾸어주고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주었다.
김조순(金祖淳)은 김상헌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영조가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창집의 후손이기도 했다.
이듬해 김조순(金祖淳)은 한림으로서 예문관, 춘추관에 소속된 정9품 검열에 보임되었고,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었다.
그의 재주를 아꼈던 정조는 다른 사람들처럼 지방관으로 파견하지 않고 늘 곁에 두었다. 1792년 김조순(金祖淳)은 정조의 문체반정 당시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정조(正祖)로 부터 그의 글이 매우 솔직하고 뛰어나다며 칭송을 받았고,그에 따라 정조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1800년 정조(正祖)는 세자 이공의 세자빈 간택을 명했고, 이에 따라 2월 초간택에서 김조순, 서기수, 신집, 윤수만의 딸이 뽑혔다. 정조(正祖)는 초간택과 4월에 있었던 재간택에서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극구 칭찬했다.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와 아들 순조의 가례(嘉禮)는 정조 승하 후 1802년 9월 6일에 이루어졌다.노론이 몰락하고 부원군 김조순(金祖淳)이 권력을 잡자 조정의 요직은 안동 김씨로 채워졌고, 그들은 거의 60년 동안 온갖 부패와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金祖淳)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것 같이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과단성 있는 술수가였다.
김조순(金祖淳)은 먼저 군사권을 쥔 후 규장각 인사를 장악하고 이어서 차근차근 국가 최고결의기관인 비변사를 장악함으로써 김씨 세도정치의 발판을 굳혔다.
이러한 김조순(金祖淳)의 전횡으로 순조는 허수아비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런 상태로 재위 10년이 넘어가자 울화병이 도지기 시작해 국사를 돌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순조(純祖)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고, 1827년 19세가 된 효명세자를 내세워 대리청정을 시도했다.
똑똑하고 다정했던 성품의 효명세자(孝明世子)는 책도 즐겨 읽었지만 예능 쪽으로도 아주 재주가 많았다.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만든 음악과 춤은 현재 궁중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효명세자 이영(李旲)이 대리 청정 3년만인 1830년 아깝게 요절하자 조선은 준비된 왕을 잃어야 했고, 아버지 순조는 효명세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리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런 것인가, 아니면 내가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神明)에게 죄를 지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자손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 순조실록 31권 -
결국,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효명세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 순조의 의도는 풍양 조씨(豊壤趙氏)라는 새로운 세도 가문을 탄생시키는 악수로 변하고 말았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요절한 남편과 달리 82세까지 장수하면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고 3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등 뚜렷한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순조(純祖)대에는 거의 20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계속되었고, 순조 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10만 명이나 목숨을 잃을 정도로 참혹한 시대였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조선을 괜찮았던 나라라고 했는가?
이렇게 백성들은 처처에서 죽어나가고 있는데,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세도 정치는 극단의 부패와 매관매직, 그리고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불러왔다.
결국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여러 곳에서 들고 일어나 민란의 시대가 되었으니 그중 가장 컸던 민란이 홍경래의 난이다.
김조순(金祖淳)으로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으로 이어지고, 다시 김좌근의 양자인 김병기에게로 바톤을 넘겨주어 60여 년을 끌었다.
안동 김씨(安東 金氏)들에게 눌려 임금 노릇도 제대로 못해 보고 34년씩이나 왕위를 지킨, 심약하기 그지없던 순조는 다리의 종기가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떴으며, 원손인 헌종이 8세로 즉위했다.똑똑한 정조가 어쩌면 이렇게 변변치 못한 아들을 두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