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 보살님... 어찌나 잘 맞추는지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해.
동진 강회장댁 큰아드님 이번에 국회의원 배지 단 것도 다 그 보살님 덕분이라던데,
당선은 맡아 놨다고 무조건 출마하라고 했다잖아. 아주 장담을 하더란다.
그래서, 동진 강회장님 사모님께서 직접 감사하다고 찾아갔더니,
문앞에서 바로 쫓겨 났다잖아. 정치나 잘하라고 그라면서 말이지.
정말 난 사람이라니깐... 동진을 누가 감히 함부로 대해....
재계 5위안에 드는 댁 사모님을 그렇게 막 대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되겠냐고. 안그래들? 그소문 듣고 요즘 정계, 재계에서 알아주는
인사들도 많이 찾아가는 모양인데, 문밖에서 바로 쫓겨나는 인사들도 많다잖아.
참, 그 보살님 미인대회 출신이라며? 누고. 그..제일 곽사장댁에서 며느리감으로
눈독 들인다는 소문이 파다해. 요즘이야 옛날처럼 직업에 귀천이 있길하나
더군다나 영국 옥스퍼드 나왔다면서...
미모에 학식에 언변에 3박자가 제대로 맞잖아. 눈독 들일만 하지? "
이 모임에 입김 쌔기로 소문난 한진 박여사가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얘기꽃을 피운다.
"석우대 총장님 조카라던데, 우리 김박이 그러더라고.."
명진병원 이여사도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맞아. 나도 그소문 들었어. 집안 좋아 인물 반반해 거기다 명문대 출신이겠다.
나도 아들이나 있었으면 어떻게 해 볼텐데...참, 김여사.. 현우, 아직 학생이지?
요즘은 연하도 괜찮다잖아... 한번 생각 해 봐.
이나이에 어디가서 낳아 올수도 없고 아쉽네"
오랜만에 모인 듯 할 말들이 넘치고 넘친다.
한참 수다삼매경에 빠져 얘기꽃을 피우고 있는 사모님들.
그때, 용비가 문을 열고 들어 온다.
"다녀왔습니다."
일제히 현관으로 눈을 돌리고,
현자씨가 놀란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용비 곁으로 간다.
"왔니. 이리와서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김여사...누구?"
"응, 우리 막내. 일전에 얘기했잖아. 집에 들일꺼라고..."
"아!! 그 애"
"오~~ 그래. 인물이 훤하네. 정사장님 닮았나?"
"아닌데, 현우가 닮았지. 아무튼 김여사. 정말 대단해. 나 같으면 집에는 커녕
같은 하늘아래 있는 것조차 소름끼칠 것 같은데...김여사야말로 난사람이라니깐"
한진 박여사 말에 현자씨가 발끈하며
"무슨 소리야. 애 듣는데... 그만 올라가 봐라"
다시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용비.
"어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아무리 애라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들어오길..."
"김여산. 정말 마음 비우고 사나 봐. 이쪽에선 소문 자자하잖아.
김여사같은 사람이 어디 흔해. 근데, 애 얼굴이 좀 어둡네.
괜히 집안에 안 좋은 일 생길라...자기들 그얘기 들었나 몰라,
강동 이사장님네 얘기.
후처가 낳은 아들 집안에 들였다가 한달만인가, 그댁 장남 교통사고 나고
사모님은 바로 혈압으로 쓰러지고 어디 그뿐이야... 집에 강도까지 들어
지금 초상집이잖아...이건 내노파심에서 하는 소린데, 김여사도 조심해.
재수없으면 남의 집얘기가 내얘기가 된다니깐..."
분위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이번에도 박여사가 교통정리하러 나선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고... 우리 이러지말고 언제 그보살님이나
찾아가 보자고. 어디 속시원히 얘기 좀 듣게..."
"왜 일어나? 김여사"
"쟤 먹을 것 좀 갖다 주게. 한참 먹을 때잖아."
"아서~~아줌마도 있는데, 왜 그런 걸 직접 해. 자꾸 해다 바치면 저런 애들은
지 잘난 줄 안다니깐... 처음부터 잘 잡아야 해..아무튼 김여산 마음이 너무 좋아"
"먹을 거라도 좀 더 내 올까..아줌마.."
억지로 웃으며 말하는 김여사. 현자씨.
"아니야, 우리도 그만 가야지"
2층으로 올라 온 용비는 빌려 온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는다.
거실에서 하는 얘기을 고스란히 듣는 동안 누군가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누르는 듯 숨조차 쉬기 어려워 귀를 막았었다.
이런 일들이 있을꺼란 예상은 했었다. 아니 더 심한 일도 있을 꺼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쏟아 내는 비수같은 말들이 가슴에 하나하나 문신처럼 새겨지는
지금 이순간 만큼은 자신이 정용비가 아니길 바란다.
고통을 이기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내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
멍하니 창문밖을 쳐다 본다. 눈을 감는 순간, 더욱더 선명해지는 비수같은 말들
더이상 참기 어려워 밖으로 나가기 위해 다시 1층으로 내려가는데,
나오지 말 것을...
거실에서 들리는 현자씨의 목소리
"맞아.. 한참 얘기하고 있는데 들어 오더라고 얼마나 창피하던지, 얼굴이 다
화끈거리고..그 말 많은 여자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야.
거기다 또, 소문은 얼마나 퍼지겠어. 내가 앞으로 얼굴 들고
다닐 수 있을까 몰라... 뭐? 그래. 니말도 맞다. 눈으로 확인들하고 갔으니,
아무튼 밉다밉다 그렇게 미운 애는 처음이라니깐..그래. 그래야지.
일단, 불러 들이긴 했는데,
어쩜.. 생긴게 지엄마랑 꼭 같은지. 내가 꿈에 봐도 돌아 눕는 얼굴인데,
이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얼굴 보고 살아야 하니 아주 피가 마른다.
그래. 그얘긴 만나서 하자. 끊어"
오늘은 다들 작정을 하고 용비를 끝없이 추락시키는 날인가 봅니다.
한꺼번에 쏟아내듯 줄줄이 이어지는 비수같은 말들.
요며칠 보여준 큰어머니 현자씨의 행동. 그모든 것이 다 가식이였다니...
더이상 갈 곳을 잃은 듯 계단 한가운데 멈춰 서 있는 용비...
그렇게 서 있는 용비를 발견하곤 자지러지게 놀란다.
"너...어..........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
할 말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입안에서만 맴돌 뿐
용비는 현자씨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슬픈 눈으로... 아픈 눈으로...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자씬 다시 한번 비수를 용비 가슴에 꽂고야 만다.
"너.....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니가 들었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걸 어떡하겠어... 내 맘이 어떤 지 잘 알았을 테니 되도록
내 눈 앞에 나타나지마...난 너 그림자만 봐도 진절머리나니깐...
알았으면 올라가"
현자씨 앞으로 와 무릎을 꿇는다.
"....제가 아니 엄마랑 제가 큰어머니께 상처란 거 압니다. 너무 염치가 없어서..
죄송하단 말도 못 했습니다. 앞으로 저 잘 할께요. 그러니깐,
다음부턴 저만 욕하세요..부탁드립니다. 큰어머니껜 나쁜 사람일지 몰라도
저에겐 하나밖에 없는 엄마였다구요...제발 용서 해 주세요...부탁드립니다."
"허....뭐라고.....너한테 하나밖에 없는 엄마. 내 젊은 시절을 고통과 눈물로
보내게 했던 여자를 지금 니엄마라고 내 앞에서 감히 용서해 달라고....
너 당장 나가! 꼴 보기 싫으니깐...내 눈앞에서 사라져.....어서!!!!!!!!!!!!!!"
의정부.....
"해주야~~~내일 7시 30분까지... 알지?"
"그럼. 알지. 은란아~ 잘가~~~"
멀어져 가는 은란이의 뒷모습을 한참 서서 보고는 돌아서 가는 해주.
다음주에 있을 시험때문에 컴퓨터학원에서 늦게 끝나 이제야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오늘따라 어두운 골목엔 가로등마저 나갔는지 꺼져 있고 빛이라곤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빛 뿐인지라 조금은 겁도 나고 을시년스럽다.
'왜 이러지... 하필 이럴 때 그 무서운 무당집이 생각 나는 건 뭐야..'
"어두워도 밝은 달빛이 있어 괜찮아요...무서운 사람이 와도 괜찮아요...♪♬"
현우가 알려 준 노래를 즉흥적으로 개사해서 부르며,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걷는 해주.
조금 전부터 뒤에선 누군가 따라 오는 듯.. 발자국 소리만 들리고...
'얼마전 뉴스에 복면한 괴한이 골목길을 가던 여고생을 붙잡아 돈이 없다고 하자
재수없다며 면도날을 씹어 얼굴에 뱉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어느새 그 괴한이
우리동네까지 왔나...아니지 혹시, 뒷골목 건달들이면 어떡해..
나를 납치해서 덜커덕 사창가에 팔아버리면 어쩌나...그것도 아니면
아, 모르겠다.'
아까 그 발자국 소리는 가까이 온 듯 더욱 크게 들리고...
'하느님, 부처님, 교황님, 알라신, 단군님 살려주세요...
그리고 작가님, 제가 혹시나 잘못 되면요..
귀가 도중 괴한에게 습격 당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했노라고 우리가족에게
알려주세요.' (아주 생쑈를 해라..넌 역쉬 타고 난 연기자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해주를 껴 안는다.
'이런......변태!!!
나 정말로 죽나 보네..... 어무이~~~'
두려움에 두눈을 꼭 감는 해주.
이미 손과 발에는 혈액 공급이 멈춘 상태고, 서서히 뇌를 자극하는 세포들.
이제서야 소리 지르라고 아우성이다. 세포! 니들 나가 있어!!!!
"살.....려.........."
"보...고...싶었어....."
이 목소리는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내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목소리.
용비다.
그러나, 예전처럼 울고 불고 할 해주가 아니지요...
조용히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용비손을 두 손으로 벌리더니,
바로 밀어 버린다.
"야!!!!! 너... 나 죽는 꼴 볼려고 그래...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 지 알기나 해.
머리속으로 별의 별 상상 다 하면서 유서까지 쓰고 난리도 아니였다고...흐흐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너! 정말 나뻐...흐흐흐
나는 너랑 이런 식의 재회는 상상도 못 했다고... 이 나쁜 놈아~~~~"
(이런! 해주 우네)
해주가 미는 바람에 벽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던 용비가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울고 있는 해주를 다시 한번 안아준다.
"미안하다"
"어휴~~~술 냄새! 대체 어디서 얼마나 마신 거야. 넌 아직 학생이라고..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냐. 대답 좀 해라...권용비!"
"나, 이제 권용비 아닌데, 정용비야... 다시 불러 봐. 어서"
어이 없다는 듯 웃는 해주.
"그래. 정용비. 됐어?"
".......... 그런데, 해주야... 나 다시 권용비할래. 나 다시 권용비로 해주라..
너무 힘들다...그래서 술 마셨어. 미안해. 그냥 몰래 예전처럼 그렇게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놈에 술때문에 이렇게 되버렸네..미안. 나 갈께"
돌아서 가려는 용비를 아니 용비손목을 잡는 해주 그리고는 자석이 붙듯이
용비에게 착 안긴다.
"가지마...용비야. 나 다 알아. 그니깐. 아무말 안해도 돼.
난 니가 권용비든 정용비든 상관 없어. 그냥 니가 좋아.
사랑해!!!가지마!!가지마!!"
용비를 안고 있는 해주도, 해주에게 안겨 있는 용비도 모두 우네요.
"사랑해....나도 너 사랑해....사랑해서 미안해...그래서, 정말 미안해..."
"아무말하지 말라니깐.....술냄새 난다고..."
용비가 웃으며 해주머리를 손가락으로 민다.
"넌 지금 이상황에 그얘기가 하고 싶냐?"
"그래"(해주야, 이건 내가 생각해도 아니다...)
"해주 많이 컸다?"
"그걸 여태 몰랐냐... 니가 우이동에서 다친 날 두고 그냥 가 버렸을 때
그충격으로 변했다. 왜?"
눈물을 닦으며 입은 웃고 있는 해주...(잘 한다.. 울다가 웃다가)
"그래. 너 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치고 해라. 간다. 늦었다. 들어가"
아쉬운 듯
"우리집에 가자. 영주도 너 보면 좋아할 텐데..."
"됐네. 너도 수지누나만큼 말 많은 거 같아서 싫다. 간다"
"이 나쁜 놈아....그냥 갈 꺼면 왜 왔어..."
"말했잖아.... 그놈에 술때문이라고....다음에 보자. 그땐 웃자. 그땐 꼭 웃자!
해주야...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만 기억해. 알았지?
그것만 기억해죠....부탁이다...내마지.......막.."
"그래. 우리 다음엔 웃자. 웃으면서 만나자. 어.......흐....ㅎ...."
'무심한 놈 그냥 가네'
버스정류장으로 온 용비.
우이동 가는 12번 버스가 오자, 무의식적으로 탄다.
버스에 앉자마자 유리창에 기댄 채 잠이 든다...
갑자기 브레에크 밟는 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버스기사가 화가 난 듯 버스에서 내려 버스앞에 널부러져 있는 취객에게로 간다.
취객의 멱살을 잡으며
"x새꺄.. 누구 밥줄 끓어지는 꼴 보고 싶어!!!!! 술을 마셨으면 곱게 마시던가
집에 가서 엎어져 자던가 아님 술이 깰 때까지 가만히 있던가
누굴 잡을라고 뛰어 들어.....너 죽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