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43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킨 영월
동강을 지난 물길이 영월읍에 닿는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다. 온순하고 인정이 많다고들 한다.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영월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다. 영월의 옛 이름은 내성군(奈城郡)이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선 태종 원년에 충청도에서 떼어내 강원도로 편입하였다.
정추는 영월에 대하여 “칼 같은 산들은 얽히고설키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에 달이 비치고 비단결 같은 냇물은 맑고 찬란한데 풀과 나무에는 연기가 잠겼다”라고 하였고, 이첨은 “성곽이 쓸쓸하고 돌길은 비꼈는데, 민가와 아전의 집이 반반씩 여남은 집 살고 있네. 물방아 찧는 소리, 밤 도와 급한데 날이 장차 새려 하고 벼랑 위의 벌꿀에 가을이 깊어지니 국화가 한창이라네. 풍속은 때때로 옛 늙은이에게 묻고, 관가에 일이 없으니 아침의 아참(衙參)을 폐지하였네. 작은 고을을 누워서 다스리고, 그대는 박하다고 하지 마라. 어린이들이 대말 타고 맞이함이 또한 지금 할 만하네”라고 하였다.
『택리지』에는 “두 강 안쪽에 단종의 장릉(莊陵)이 있다. 숙종이 병자년에 단종의 왕위를 추복(追復)하고 능호를 봉하였던 것이다. 또 이보다 앞서 육신(六臣)의 묘를 능 곁에 지었으니 매우 장한 뜻이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월 땅에는 비운의 임금 단종의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이 2년 만에 병사하자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3년 후인 1455년에 첫째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 즉 세조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를 비롯한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을 임금의 자리에 다시 앉히려고 꾀하다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의금부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들에게 둘러싸여 영월군 남면 광천리 태화산 아래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났다.
청령포 관음송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되었을 때, 이 소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단종을 유배지로 인도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세조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 왕방연이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를 감싸고 흐르는 서강의 물을 보고 그의 괴로운 심정을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라고 노래하였다.
단종의 자취가 서린 곳은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는데 서면 광전리에 있는 고개는 단종이 유배를 올 때 넘었다고 해서 ‘임금이 오른 고개’라는 뜻으로 군등치(君登峙)라 불렸고, 서면 신천리에 있는 고개는 오랫동안 흐리던 날씨가 단종이 넘으려고 하자 개어 단종이 하늘을 향해 절을 올린 곳이라 해서 배일치(拜日峙)라고 불린다. 또한 단종의 유배를 슬프게 여긴 사람들이 통곡을 했다는 우래실(울래실) 마을이 서면 신천리에 있다.
영월 청령포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다.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 표현했다고 한다.
단종이 귀양을 와서 머물렀던 청령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지고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였으며 한쪽은 벼랑이 솟아 배로 건너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절해고도와 같은 곳이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그해 여름에 청령포가 홍수로 범람하자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갔다. 단종은 이곳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누각인 자규루(子規樓)에 자주 올라 구슬픈 자신의 심정을 시로 읊었다. 자규루는 현재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지만 그 무렵에는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서 두견새가 찾아와 울 정도였다고 한다. 단종이 이곳에서 지은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자규시(子規詞)」는 구중궁궐을 떠나 영월 땅에서 귀양살이하는 자신의 피맺힌 한을 표현한 것이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우는 달빛만 희고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봉래산 자락 영흥리의 벼랑에는 단종에 얽힌 사연이 이렇게 전해온다. 단종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의 다섯째 작은아버지인 금성대군이 풍기에서 그를 다시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을 꾸몄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단종은 1457년 음력 10월 27일 저녁 17세의 나이에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세조가 보낸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져온 약사발을 마시려고 하는데 화득이라는 사람이 뒤에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다. 그다음 날 단종을 모시던 몸종 열한 명이 봉래산 아래쪽 벼랑에서 동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사람들은 백제 멸망의 한을 품고 죽었다는 백제 궁녀의 전설이 어린 낙화암의 이름을 따서 그 벼랑을 낙화암이라고 부른다. 현재 그 위에는 금강정(錦江亭)과 그때 함께 죽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 민충사(愍忠祠)가 있다.
자규루단종이 영월 관풍헌으로 옮겨가 유배 생활을 할 당시 동쪽의 자규루에 자주 올라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준 「자규시」를 지었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지만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주검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때 영월의 호장인 엄흥도가 어둠을 틈타 강에 뜬 단종의 송장을 몰래 건져서 동을지산에 묻었다. 그것을 지켜본 일가붙이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앞을 다투어 말렸는데도 듣지 않고 “선(善)을 행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였다. 그 뒤 엄흥도의 충절을 높이 여긴 우의정 송시열이 현종에게 건의하여 엄흥도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고, 영조 때는 죽은 엄흥도에게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졌던 단종의 무덤은 중종 11년에 되찾게 되었고, 숙종 때인 1698년에야 임금 대접을 받아 단종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의 무덤도 ‘장릉’이라는 이름을 받아 임금의 무덤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해마다 한식이면 이곳 장릉에서 한식제를 지내게 되었다. 한식제는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어서 이 지방의 향토문화제가 되었으며, 매년 4월 15일 무렵 단종제가 열릴 때는 영월군 사람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속담에 ‘중매쟁이는 한 말이면 그만이고, 풍수는 두 말이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중매쟁이는 ‘혼처가 좋다’는 한마디면 그만이고, 풍수는 ‘명당자리다, 아니다’ 두 마디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장릉은 한마디로 진짜 풍수지리상 길지 중의 길지라고 널리 알려졌다. 그런 연유로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은 영월읍 영흥리 동을지산 기슭의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서쪽인 소나기재 쪽을 향해서 구부러진 것이 많아 서울을 그리던 단종의 넋이 소나무에 배어들어 그렇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릉 옆에 있는 창절사(彰節祠)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이다. 이곳에서는 사육신 여섯 사람의 신주와 함께 생육신인 김시습, 남효온과 충신 박심문, 엄흥도의 신주를 모셔두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단종이 머물렀던 옛 집터는 기와집으로 새 단장을 하였고 단종의 귀양 생활을 지켜보았을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으며, 강 쪽으로는 이끼가 낀 비석이 서 있다. ‘청령포금표(淸泠浦禁標)’라는 한자가 쓰인 이 비는 단종이 죽은 지 270년 뒤인 영조 2년(1726)에 세워진 것이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마라’라는 출입 금지 푯말인데, 단종이 이곳에 유배되었을 때도 이처럼 행동에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의 배텃거리에서 남면 연당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각한(角汗)재 또는 각한치라고 부르는데, 쇠뿔에서 땀이 날 정도로 험하고 경사가 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영월군 북면 덕상리에 있는 배거리산은 천지개벽 때 이 산 꼭대기에 배가 걸렸다는 곳이다. 또는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다는 곳이다. 배거리산에 있는 배거리굴은 10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며, 굴 안에 종유석과 조개껍데기가 붙어 있다.
옛날 한두만이라는 관포(官砲)가 나라에 바치는 짐승을 많이 잡았다고 하고 첨재라고도 부르는 영월군 무릉도원면 두산리의 두만동에 있는 초치(初峙)는 원주시 신림면 송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세 고개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 고개라고 한다. 바로 근처에 있는 한치재는 두덕골에서 도원리 말구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매우 준험하여 이 고개를 넘으려면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치재라고 한다.
영월에서 서강이라 불리는 평창강이 남한강에 합류한다. 길이가 149킬로미터에 이르는 평창강은 평창군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속사천이 되고, 평창군 대화면과 봉평면 경계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홍정천을 합하여 남쪽으로 흘러, 대화면 하동미리에서 대화천을 합하여 평창강을 이룬다. 평창읍을 지난 강물은 영월군 서면 신천리에 이르러 서북쪽에서 오는 주천강과 합쳐져 영월읍 남쪽에서 남한강에 합류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동강, 서강이라 부르지 않고 암강, 수강이라 부르는 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서면의 신암마을에는 서강이 휘돌아가면서 빚어낸 절경인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
한반도마을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 서면의 신암마을에는 서강이 휘돌아가면서 빚어낸 절경인 한반도를 닮은 지형이 있다.
또한 영월군 주천면에는 술이 나오는 돌, 주천석(酒泉石)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내용이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천현의 남쪽 길가에 돌이 있으니 형상이 반 깨어진 돌 술통 같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서천가에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마시는 자에게는 넉넉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읍의 아전이 술을 마시려고 거기까지 왕래하는 것이 싫어 현 내로 옮기고자 하였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옮기니 갑자기 크게 우레가 치고 돌에 벼락이 내려서 부서져 세 개로 나뉘어 한 개는 못에 잠기고, 한 개는 있는 데를 알 수 없고, 한 개는 곧 이 돌이라.”
성임은 주천석의 샘물을 놓고 이렇게 노래하였다.
술이 있어 샘물처럼 흘렀다네
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져 바윗돌 사이로 흘러드는가 하였더니
어느새 철철 넘쳐서 한 통이 다 찼다네
술 빚은 것이 누룩의 힘을 의지한 것도 아니고
그 맛은 자연 그대로라네
한 번 마시면 그 기분이 맑은 하늘 위에 노니는 것 같고
두 번 마시면 꿈속에서 봉래산 빈터에 이르게 되니라
줄줄 흘러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니
다만 마시고 취하는 대로 만족할 뿐 어찌 값을 말하랴
당시에 고을 이름 붙인 것도 다 뜻이 있었으리
마침내 산속의 귀신들이 우레와 폭풍우로
한밤중에 술 샘을 옮겨버렸네
옥검(玉檢)을 위하여 깊은 동학(洞壑)에 폐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금단지에 저축하여 깊고 깊은 연못에 감추었으리라
감감하고 비어서 남은 자취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오직 끊어진 돌 조각만 길가에 가로놓였네
내 하늘을 되돌려 옛날 샘의 맥을 돌려놓고자 하거니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군침 흘리지 말게 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천도복숭아를 안주 삼아 밝은 신 임금께 바치고
한 잔을 올리면 천년의 수(壽)를 하려니
일만 잔 올린다면 다시 만만세를 기약하리니
길이 법궁(法宮)에 납시어 신선과 만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