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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한 몸을 이루시고 거하실 성전이 됨(3)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설 교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삶
엡 2:13-18 / 박조준 목사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의 우리의 삶이 어떠했던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 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육체로 이방 사람이요, 무할례인이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 요, 언약에 대해서도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미 없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적이 아니라 영적인 의 미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삶을 살게 되 었나 하는 것을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11절과 12절에 보면 그때에 하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때 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살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 13절을 보세요. 이제는 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이제는 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와 이제 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스도 밖에 살던 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게 된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가 있게 된 것입니 다.비록 몸은 같은 몸이지만 그 영혼이 옛 것은 지나가고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행복이란 이처럼 불행과 대조할 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먹고 사는 데 별 어려움 없 이 사는 사람도 만족을 모르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감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날 에 가난해서 먹고 입고 사는 것 때문에 고생하던 생각을 하게 되면 지금의 생활에 대하여 만족 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월남하신 분이 계시면 빈 손으로 피 난 오실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은 다 부자가 된 셈입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병들고 약했었는데 이제 건강하면 감사할 것입니다. 더구나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그래 서 소망도 없이 살았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 가운데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 니까? 에베소서 2장 11∼12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우리의 형편이 그랬습 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 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 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까? 우리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해서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믿음 없이 소극적으로, 부정적으로 살면서 실패의 생활을 거듭해 왔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을 보십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전에는 우리가 멀리 있었습니다. 할례 받 은 유대인에게 비하면 할례 받지 못한 사람으로 멀리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그리스 도 밖에서 멀리 살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 이방인으로 멀리 살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이, 하나님도 없이 멀리 살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살던 우리가 이제는 가까워졌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졌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어디서 흘렀어요? 십자가에서 흘렀 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하나님과 멀리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로 인해서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 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다음에 하나님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멀리 도망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보아도 둘째 아들은 아버 지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아버지를 멀리 떠나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죄를 범한 상태를 멀리 있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 심으로 우리가 하나 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이방 사람들이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령 성전을 보아도 대 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소와 양을 잡아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유 대인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은 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고 성 전 뜰에나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차별을 했었습니다.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까워지게 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했어요? 본문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 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보혈이 아예 완전히 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담은 구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지성소, 성소, 성전 뜰 같은 것이 따로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하나 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아무런 담도 있을 수가 없습니 다. 인간적인 모든 절차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이제 다른 복잡한 절 차가 필요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직접 하나님 앞에 아뢰게 되 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이보다 놀 라운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셨습니다.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멀리 있던 우리를 가까워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 던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셔서 화친케 하셨습니다.중간에 막혔던 담을 완전히 헐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차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많이 있습니다. 인도 같은 데는 여러 가지 계급이 있어서 최고의 계급에 있는 사람과 하급의 사람과 는 결혼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우리 나라도 봉건제도 하에 있을 때 양반과 상 민의 차별이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담을 완전히 헐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 리스도 예수 안에는 양반도 상민도 없습니다. 다 양반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상고하게 되면 본래 북한은 형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유배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까 말하자면 상민들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의 사람들이 예수를 빨리 받아들이고 교회가 왕성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양반을 만들었습니다.그 다음에 한국 동란 이 일어나 북한에서 예수 믿던 양반들을 이 남한으로 내려 보내서 남한의 양반들에게 예수를 전 하게 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데 비몽사몽 간에 하늘이 열리며 그릇이 하나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그릇 안에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것을 내가 언제든 지 먹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자 그때 하늘에서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 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었는데 마침 고넬료라는 군대의 백부 장이 사람을 보내 베드로 사도를 모시러 왔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 환상의 의미를 깨닫고 고넬료의 집에 가서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 의 화평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만든 높은 담도 다 헐어 버리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흰 사람, 검은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 민족, 저 민족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차별 대우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1871년 예루살렘에서 발견된 돌판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이방 사람은 이 담 안에는 들어오지 못함. 만일에 들어오게 되면 죽 을 것임. 그러나 그 책임은 본인에게 있음 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이렇 게까지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담을 막아 놓고 경고문까지 써서 붙였던 것 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 셨습니다. 사도행전 21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히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무 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이방 사람인)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이렇게 이방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지도 않았지 만,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를 데리고 들어간 줄 알고 바울을 잡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재판을 하다가 결국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고만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성전의 담이 이렇게 무서웠 습니다. 절대 불가침이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헐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지성소에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우리가 다 받았습니 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막혀 있는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담을 헐어 버 려 누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 사람의 담을 헐어 버려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신령한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자 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담은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 사람 사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헬라 사람은 헬라 사람대로의 담이 있었습니다. 그때 헬라는 문화의 중심이었습 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예 야만인으로 취급해서 사람처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과 야만인의 담이 있었습니다.오늘날은 없습니까? 국가와 국가 사이에, 민족 과 민족 사이에, 백인과 흑인 사이에, 교회와 교회 사이에, 지방과 지방 사이에 담이 있지 아니 합니까? 이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제가 듣기에 이북 사람만 모이는 교회가 있고 그 중에서도 함경도 사람만 모이는 교회가 있으 며, 서울에서도 서울 본토 분만 모이는 교회, 호남 분만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담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피로 무너뜨린 담을 우리 인간이 다시 쌓지 마십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 마음에 어떤 담도 쌓지 마십시다. 우리 나라에도 남북의 담이 얼마나 높이 쌓여 있습니까? 비극입니다. 이 담을 헐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담도 헐어 주셔야 이 땅이 통 일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담을 허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 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15절을 보십시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 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여기 의문에 속한 계명을 폐지하 셨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유대인에게는 수천 가지의 의문(儀文)이 있지 아니합 니까? 그 의문에 속한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유대인 중에도 6천 명 바리새인밖에는 없었다고 합 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문에 속한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종교가 어떻게 많은 사람을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의식이 필요 없고 계명을 쓸데없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 정신이 중요하 지 의문이나 계명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의 사랑으로 모든 의문과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 니라 완성케 하기 위해 왔다 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기독교는 의문이나 율법 에 매여 있는 종교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선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이 문 제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타작을 했으니 안식일을 범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 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먹고 뒤로 나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의문, 계명, 율법, 규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면 바리새인의 오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의문과 계명대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계명을 완 수하심으로 구원받아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옛사 람은 완전히 죽어 장사되어 버리고 하나님은 새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 었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새사람 된 우리는 새 마음, 새 삶, 새 비전, 새 사랑, 새로운 꿈, 새 욕망, 새 목적, 새 헌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신 일입니다. 1. 나 이제 주님의 새생명 얻은 몸옛 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 고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2. 주 안에 감추인 새생명 얻으니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 다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3.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새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주님을 모신 맘 새하늘이로다4. 주 따라 가는 길 험하고 멀어도찬송을 부르며 뒤따라 가리라나 주를 모시고 영원히 살리라날마다 섬기며 주 함께 살리라(후렴)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새사람이 된다는 말은 유대인이 이방인이 되고 이방인이 유대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말은 모양이 달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대로 있지만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새사람이 되었으면 서로가 화평하게 지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헐어 화평케 하십니다. 16절을 보세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 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새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평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십자가로 이것을 소멸했습니 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이 벗어집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 다. 원수를 만나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할 때 우 리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성전에 있는 휘장이 갈라졌다고 하는데, 여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고,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는 것은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터놓으신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직접 가까이 나 아갈 수 있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다른 중보가 필요 없습니다. 누구를 거쳐서 하는 것이 아닙 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더 많은 분이 기도하는 대열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주 님께 기도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며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끝으로, 17∼18절에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통일이 되고, 인간과 하나님이 통일이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혔던 담도 무너지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휘장도 찢어져서 하나님 께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에게 무슨 담장은 없습니까? 이 담장 을 다 헐어 버리고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화평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Peace Maker
엡 2:13~18, 고후 5:18~21 / 조상호 목사
여호수아 리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쓴 <마음의 평안>(Peace of mind)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한 젊은이가 어떤 노인에게 찾아가자, 그 노인은 그에게 묻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젊은이가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 재물이고, 셋째는 미모이며, 넷째는 재능이고,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소원을 말하는 청년을 가만히 보고 있던 그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 것도 즐길 수 없다네.”
그렇습니다. 건강이 있고, 재물이 많고, 미모가 출중하고, 재능과 권력, 등 이 모든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그러한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 어떠한 것들보다 평강이 필요합니다. 평강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 평강을 원하지 않는 분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도 중요한 평강의 삶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인 윌(Will)박사와 아리엘 듀란트(Ariel Durant)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3,5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기간은 286년 밖에 되지 않는데, 전체 인류역사에서 92%의 날들이 전쟁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또 전쟁사를 연구한 나이트 교수는 1480년에서부터 1940년까지 약 46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있었던 전쟁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에 세계가 평온했던 시기는 단 3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연구 결과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우리 인류의 역사는 평화의 역사가 아닌 싸움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화해의 역사가 아닌, 반목과 갈등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무엇보다도 평화를 갈망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NIV 영어 성경에는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가 누구를 통하여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화평을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평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Peace Maker'로 오셨습니다.
한국의 이동원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건축>이라는 제목의 짧은 연극 한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연극은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어느 낯선 섬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섬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또한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까’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갑자기 섬 한구석에 잔뜩 쌓여 있는 건축자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건축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건축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씨가 더우니까 먼저 ‘수영장’을 만들자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비라도 오면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까 먼저 ‘집’을 짓자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비는 맞아도 되지만, 음식이 썩으면 안 되니까 음식을 저장할 ‘창고’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건강을 위해서 우선 ‘병원’부터 건축하자고 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이 섬 바로 옆에도 또 다른 섬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저 섬에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군요. 방금 저 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걸 들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평온하던 분위기가 긴장과 공포의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옆 섬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왜 거기에 사는 걸까?" ”혹시 우리 섬에 쳐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라는 등의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아무래도 그 건축자재를 가지고 우선 성벽부터 건축하자고 누군가가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벽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청년 한 사람이 접근해 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청년이 하는 말이 “나도 건축가입니다. 여러분들을 이 섬에 오게 하신 분이 나를 보내셔서 건축을 돕게 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설계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 곳까지 오게 하신 그분의 의도를 모른 채 다른 것을 짓고 있군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건축해야 옳습니까?” “여러분과 나를 이곳에 오게 하신 분은 당신들이 옆 섬의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반대로 벽을 쌓고 있군요.” 이때 갑자기 섬사람들이 의혹의 눈초리로 이 청년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은 저 사람이 수상하다고 말합니다. 적이 보낸 스파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한 사람이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죽여라! 죽여라!”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들어서 이 사람에게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천둥소리가 울리고 전기가 갑자기 나가면서 사방이 캄캄해졌습니다. 잠시 후, 불이 켜지자 돌팔매질을 당하던 그 청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Peace Maker'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13절부터 18절을 보면, 주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제가 읽을 때 그 단어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화평’, ‘화목’, ‘평안’이라는 단어입니다. 화평이 두 번, 화목이 한번, 평안이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세 단어 모두 똑같이 ‘Peace'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화평은 이중적입니다.
1)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셨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놓으신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다리 놓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기 22장 21절에서는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있다면, 결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입니다.
어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적군들이 총공세를 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여야 하는데, 본부와의 교신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전선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적군들은 몰려오고 사태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끊어진 전선을 연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한 통신병은 자기의 오른손과 왼손으로 끊어진 선을 잡았습니다. 결국 본부와 교신을 하게 되어 지원부대를 요청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지원부대로 인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검게 타죽은 통신병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여기 검게 타죽은 병사의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화목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었지만,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화평을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던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2) 사람사이의 화평을 이루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놓으신 화평은 ‘사람사이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할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무너진 관계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 “전에 멀리 있던 너희” 라는 말은 구원받기 전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진단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갈등과 분열의 상태, 이것이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고슴도치에 대해서 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 영하 20도의 추운 겨울 밤, 넓고 큰 그릇에 고슴도치를 담아 밖에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릇에 담겨져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 마리 두 마리 한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몸이 따뜻해지면서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몸에 붙어있는 가시가 상대방을 찌르게 되니까, 몸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하며 아픔을 느꼈습니다. 고슴도치들은 너무 아프니까 다시 흩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가 없으면 또 다시 몰려들고, 가까이에 몰려 있다보면 다른 고슴도치의 가시가 찌르기 때문에 다시 흩어지고, 이렇게 수십 번 하다보니 날이 밝았습니다. 결국 아침이 되었을 때 고슴도치는 다 죽어 있더랍니다. 절반은 얼어서 죽고, 절반은 피를 흘려 죽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고슴도치 이야기가 세상의 인간관계를 잘 표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혼자 잘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담을 쌓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 내 가족, 내 친구, 내 교회, 내 회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클레이’라는 신학자가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이기주의와 독선주의로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하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연료로 삼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말하였다. ... 심지어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을 받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것도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만일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하거나 또는 유대인 처녀가 이방인 청년과 결혼을 하면 그들에게는 장례식이 치뤄졌다. 이방인과의 교제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이처럼 유대인과 헬라인의 관계는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향해 ‘전에 너희들은 서로 멀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15절에서 ‘원수’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단순히 관계가 서먹서먹한 상태가 아니라, 서로 원수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의 그 높은 담이 헐렸습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를 그렇게 굳게 갈라놓았던 장벽이 베를린 장벽 무너지듯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그 장벽을 헐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라는 한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14절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는 말씀에서 이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담벼락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예루살렘 성전은 몇 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맨 안쪽으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 안뜰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 바깥뜰이 있었고, 또 그 밖에는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개의 뜰은 벽으로 나뉘어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곳곳에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성전은 제사장과 일반인,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을 철저하게 구분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담을 다 헐었습니다. 총이나 칼과 같은 무력으로 헐어버린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피로 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담을 헐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 할렐루야!
이처럼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장벽을 다 허물어 버린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종과 계층과 남녀차별 등의 세상의 모든 담을 다 허물어 버린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견고하게 쌓인 담을 허물었습니다.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모든 담들을 이미 허물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갈등을 없애고, 분열을 없애고, 적개심을 없애고, 원수가 되었던 관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하여 흘린 ‘평화의 피‘입니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찬양의 가사처럼,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가 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께서 힘들게 허물어버린 담을 자꾸 다시 쌓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 찢기시며 피 흘리심으로 어렵게 허물어버린 담을, 사람들은 목숨 걸고 다시 쌓으려고 합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돈 많은 사람들끼리,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어울리며 자꾸만 담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같은 피부색이라는 이유로,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꾸 편 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그러한 행동은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교회 안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담을 쌓고 당을 짓는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 쌓인 담이 있습니까? 허물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그 담을 허무시기 바랍니다. 잘 잘못을 따지기 전에, 정의와 불의의 잣대를 갖다 대기 전에, 먼저 담을 허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 되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3) Peace Maker가 되라고 하신다
진정한 Peace Maker가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Peace Maker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을 영어로는 ‘Peace maker’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평화를 기다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평화를 지키는 자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평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을 원어로는 '에이레네 포에오에' 라고 읽을 수 있는데, 여기 '포에오에' 라는 말은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실천하는 사람, 평화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즘처럼 서로 불신하고 대립하고 있는 현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 ‘피스 메이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피스 메이커'보다 ‘트러블 메이커'를 더 영웅시합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한국 영화 중 "주유소 습격사건"에 대한 줄거리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때 크게 히트를 쳤던 영화로서, 아마 학생들이나 청년들 가운데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몇 명의 젊은이들이 놀다보니 심심했습니다. 재미난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주유소를 털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유소를 습격하여 난동을 부립니다. 주인과 기름을 넣으러 온 사람들을 인질로 잡고 서로 때리게 하고 기합도 주고, 전화기를 고장 낸 후에는 다시 고치도록 강요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심심해서 주유소에 들어가 난동을 부린다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코미디라는 것입니다. 그냥 관객들을 하여금 한바탕 웃기려는 목적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이 영화가 코미디입니까? 이유 없이 폭행을 가하고, 소중한 재산이 파괴되고, 힘에 의하여 약자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코미디입니까? 이것은 코미디가 아닙니다.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싸우고 때리고 부수는 것을 코미디라고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오히려 정확하게 구분하면 폭력영화입니다. 실제로 그 영화가 상영된 후로 젊은 학생들이 그 영화를 모방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나쁜 짓을 많이 일삼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이 시대가 ‘피스 메이커'보다 ‘트러블 메이커'를 더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조용하게 사는 사람이나 싸움과 갈등을 풀기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시대입니다. 반면에 얄팍하게 머리를 굴리며, 그럴듯한 말을 꾸며대는 사람이 잘 나가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지금 이 시대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피스 메이커가 되겠습니까? 누가 이 일을 해야 합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로 인해 가정에 평화가 오고, 교회에 평화가 오고, 나아가서 이 사회에 평화가 온다면 바로 그 사람이 ‘피스 메이커'이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바로 화평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도 화평입니다. 고린도후서5장 18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직책입니까? 화평케 하는 직책입니다. 우리는 모두 화평케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각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힘써야 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화평케 하는 사명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은 인간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거미형 인간’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은 하지 않으면서 거미줄을 쳐놓고 거기에 걸린 곤충들을 잡아먹는 거미처럼, 남을 해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개미형 인간’이 있습니다. 개미는 거미와 달리 성실하고 부지런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남에게 유익도 되지 않는,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로 ‘꿀벌형 인간’이 있습니다. 꿀벌은 다른 벌들과 단합하는 조직력이 강할 뿐 아니라, 부지런하여 열심히 꿀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꿀을 자기가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 남에게 그 꿀을 나누어 주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 세상에는 ‘있어서 안 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있어야 될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디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어서는 안 될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개미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까? 저는 이 자리에 거미 같이 문제를 일으키며 남에게 해를 주는 ‘트러블 메이커'가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꿀벌처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피스 메이커'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을 이간질시키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있어서는 안 될 ‘트러블 메이커'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을 살맛나게 하는, 꼭 있어야 할 ‘피스 메이커'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화목
엡 2:13-18 / 조재호 목사
교회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어떤 사람은 4가지 유형의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덤 같은 교회: 생동감이 없고 활동성이 없는 교회입니다. 모일 뿐 생기가 없고 행함이 없는 교회가 무덤같은 교회입니다. 실제로 이런 교회가 존재합니다. 야고보서2:26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박물관 같은 교회: 박물관에 가면 과거의 물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추억과 과거와 전통만 남아있는 교회입니다. 변화와 발전이 없는 교회입니다.
공연장 같은 교회: 공연장에서는 소수의 배우만 움직이고 바쁘지 관람객은 그들을 보고 즐깁니다. 공연장과 같은 교회는 몇몇 사람만 활동하고 대다수는 바라보고만 있는 소수 주도형 교회입니다.
가족 같은 교회: 아기가 태어나듯이 예수 믿고 거듭나는 사람이 있고, 아이가 자라듯이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가며, 가족들이 각자 제 할 일 잘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듯이 성도들이 각자 역할을 잘 감당하며, 가족이 서로 위로하고 화목하듯이 위로와 화목이 있는 교회가 가족 같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큰 가정과 같고 성도는 큰 가족과 같은 구원 공동체입니다.
"고척교회는 안으로는 사람을 나누고 밖으로는 선교를 실천하는 좋은 교회"되는 것 즉 안으로 사랑하고 화목한 행복해지는 교회, 밖으로는 제 할 일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고척교회의 존재목적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을 나눠지게 하고 오해하게 만들고 시기하게 하고 미워하게 만들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하나되게 하고 서로 이해하게 만들고, 위로하고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1. 이 세상과 사람에게는 담이 존재합니다.
첫째 세상에는 보이는 담과 보이지 않는 담이 존재합니다.
부산에서 지난 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아파트 102동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엘리베이터 내려오기를 기다리던 홍씨가 참다못해 방구를 뀌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이씨가 "아저씨 방구도 잘 뀌시네요"라고 대꾸했는데 그 말을 들은 홍씨가 "아니 내가 방구 꾸는데 네가 보태준 것 있냐"며 마구 폭행해서 두 사람이 영도경찰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방귀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쌓인 막힌 담이 있어서 방귀로 불이 붙은 것입니다. 덕수궁 돌담 길이 운치가 있고 낭만이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높은 담은 미움과 단절을 의미합니다.
둘째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히 담을 쌓고 이방인을 배척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개와 돼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수로보니게 이방 출신인 여인이 예수님께 딸을 고쳐 달라고 간곡히 매어 달릴 때, "밥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들을 향해 높은 담을 쌓아 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담을 허물어뜨리시려고 오셨습니다.
2. 사람들 마음 속에는 세 종류의 담이 있습니다.
첫째로 죄의 담이 있습니다.
벽돌 공장에서 흙으로 벽돌을 자꾸 찍어내듯이 죄는 벽돌을 자꾸 찍어냅니다. 그 벽돌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 우리와 우리 사이에 담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 때는 벽돌이 없어 담을 쌓을 수가 없어서 당장 숨기 위해서 큰 나무를 찾았습니다.
죄의 벽돌은 붉은 색 벽돌입니다. 붉은색 벽돌로 쌓은 담 뒤로 사람들은 숨습니다. 높은 담은 사람들을 숨겨 줍니다. 그리고 왕래와 교류를 단절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흐르는 것입니다. 기로 막히면 단절이 되고 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높이 쌓여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것이 흘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둘째는 불신의 담입니다.
사람 사이에 불신은 쌓을 벽돌을 자꾸 찍어냅니다. 불신의 벽돌 색깔은 검은 색입니다.
경비행기에 조종사 한 사람과 그 친구 두 사람 총 세 사람이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오르기 전에 유사시를 대비해 간단하게 낙하산 시험을 보여주며 "이렇게 메고 줄을 잡아 당기면"된다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 참 비행하다가 엔진 고장이 나서 조종사는 뒤를 보며 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은 세 명, 낙하산은 두개 뿐이라고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친구가 낙하산을 메고 먼저 살겠다고 뛰어 내렸습니다. 남은 사람은 조종사와 그 친구. 서로 네가 메야 한다고 양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종사가 가만히 보니까 낙하산 두개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아까 그 친구는 낙하산을 맨 것이 아니라 배낭을 매고 뛰어 내린 겁니다.
불신의 검은 색 벽돌 속에 살면 양심이 검어지고 삶이 빛을 잃고 검어집니다.
셋째는 미움의 담이 있습니다.
미움은 사람 사이에 쌓을 벽돌을 자꾸 찍어냅니다. 미움의 벽돌은 붉은 색과 검은 색을 합한 검붉은 색 벽돌입니다. 어둡고 무섭습니다.
아이들 방에 벽지를 바를 때 검은 색으로 바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지개나 꽃과 같이 아름다운 색깔로 바릅니다.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하고 그런 사람 그런 인생으로 되어 가라는 마음으로 밝은색으로 벽지를 바릅니다.
미움의 벽돌 속에 갇혀서 살면 검붉은 사람이 됩니다. 어둡고 파괴적인 사람이 됩니다.
미움은 시기와 질투로 이어지며 더 발전하면 분노와 증오로 발전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 4:26)
어느 시골 동네에 꽤 부자가 살았습니다. 부자지만 인심을 잃고 못되게 살았습니다. 논밭을 다 팔아 돈을 보따리에 쌓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여관에 들어 잠을 청하는데 돈 보따리가 불안하기만 합니다. 안내에 있던 총각의 눈빛이 의심스럽고 오가는 사람들이 의심이 나서 잠이 잘 오지 않자 잠결에 다락문을 열고 올려놓았다. 편히 자고 아침에 일어나 다락 문을 열고 돈 보따리를 찾았보니 없었습니다. 그 문은 다락문이 아니라 창문이었습니다.
불신과 미움은 부메랑과 같아서 자기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우리는 불신과 미움 보따리를 싸서 버려야 합니다.
3. 담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는 큰 망치와 같아서 담을 허물어 뜨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불과 같아서 죄를 소명시킬 수 있고 자석과 같아서 서로 가까이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알퐁스 뒤랑이라는 프랑스 음악선생님이 있었습니다. 7명의 아이들 이름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로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한 명을 더 낳자 마지막 이름을 '옥타브'라고 지었습니다. 각자의 이름이 다르고 소리가 다르지만 화음을 이루면 최상의 소리가 됩니다.
둘째 가정도 가정과 같기를 원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번째 진리는 이름도, 모습도, 생각도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다면 고척교인이라는 것과 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진리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잘 조화하면 최상의 화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것을 가능케 합니다. 막힌 담을 허십니다. 죄를 소멸시키십니다. 그리고 가까워지게 만드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십자가의 화목의 능력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 죄 용서와 화목을 이루는 십자가입니다.
운명의 변화
엡 2:13, 5:8 / 김명혁 목사
저는 오래된 신자들도 좋아하지만 새 신자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며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삶을 사는 새 신자들을 바라보면 너무너무 기쁘기 때문입니다. 회장 보살 한 분이 저를 만난 지 6개월 후에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변화된 삶을 사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과 죽음 때문에, 저주 받을 운명이 구원 받은 운명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 중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의 운명이 변화된 이야기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 세상을 등지고 불행하게 살아가던 부도덕한 한 여인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정오 시간에 우물에 와서 물을 길어가곤 하던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삶과 운명이 변화돠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행로에 피곤하여 지친 매우 인간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지쳐서 쓸어진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요4:6). 우리가 누군가를 찾아가서 만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여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까지 그 여자가 우물로 물 길러 오는 시간에 맞추었습니다.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라고 했는데 유대 시간으로 제 육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낮 열두 시 즉 정오를 가리킵니다. 수가성 여인은 사람 만나기를 꺼리면서 사람들이 우물로 오지 않는 정오 시간을 택해서 우물로 찾아 오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정을 감안해서 정오 시간에 피곤한 모습으로 우물가에 와서 주저 앉아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자가 우물로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요4:7).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건네며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4:7). 피곤한 사람은 말을 하기를 싫어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사람들과 말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건네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매우 퉁명스러웠습니다. 불만과 원망이 가득한 투로 대답을 했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게 생긴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다 달라고 하시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거만한 태도에 개의치 않으시고 친절하게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누구임을 가리켜 보여주셨습니다. “여인이 만일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귀한 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여인과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여인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요." 그 여자는 예수님의 말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생수” 라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여자는 여전히 따지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누구 시길래, 나에게 생수를 주실 수가 있다는 말이요? 당신이 이 우물을 판 야곱 보다 더 큰 사람이란 말이요?” 마음 한 구석에는 약간의 관심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반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부를 당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 우물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마음에 이상한 느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를 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 여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달라고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이제 할 말을 제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하신 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 즉 “물 좀 달라”는 말을 그 여자가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런 물을 내게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셨고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여자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에 너무나 당황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숨겨 오던 사실을 그대로 지적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가성 여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실 직고 했습니다. “선생님,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여자의 마음을 몽땅 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자는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즉시 주님을 향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런데 주님. 메시야가 곧 오신다고 했는데 메시야가 언제쯤 오시게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그 여자에게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할 때 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그로라 내가 바로 메시야니라.” 예수님께서는 수가성 여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이제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죄를 사하시고 생명의 물을 부어 주시는 메시야를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자의 몸과 가슴과 영혼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자기 몸과 영혼에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생명의 강물이 온 몸에 출렁거림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평안과 감사가 넘쳐 흘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운명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8-29). 삶의 변화와 운명의 변화는 행동에서 마무리 됩니다. 메시야를 만난 사마리아 여자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자기의 부끄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들어내어 보여주시고 그리고 자기에게 생수를 부어 주신 주님을 큰 소리로 증거했습니다. “나를 좀 보시요. 나는 메시야를 만났소. 그 분은 나를 변화시켜 주셨소. 내 마음에 강물이 넘칩니다. 여러분들도 메시야를 만나 보십시요.” 생수는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 넘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수가성 사람들이 수가성을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나왔습니다.
둘째로 죄인인 한 여자의 운명이 변화된 이야기를 합니다.
눅 7장에 보면 갈릴리 어느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마 길거리의 창녀와 같은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죄악뿐 아닌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져있던 사람일 수도 있었습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비난과 정죄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시몬이라는 사람도 그 여자를 멸시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에게로 달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초청을 받고 시몬의 집에 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 여자는 시몬의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눅7:36,37).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그 여자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었고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여자는 언젠가 군중들 틈에 끼어서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라는 말씀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여자는 그 말씀을 듣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의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초청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달려왔습니다. 회개와 감사와 존경과 사랑의 힘은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니 눈물을 쏟았습니다. 진실한 회개와 감사와 존경과 사랑은 눈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자기가 빠져있는 모든 죄악을 바라보시면서 책망과 정죄와 심판의 말씀을 하시지 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시몬을 향해서는 책망의 말씀을 하시고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죄악투성이인 자기를 향해서는 부드러운 칭찬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시몬과 그 여자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각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7:44-50). 죄인인 그 여자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칭찬의 말씀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서 아마 기절할뻔했을 것입니다. 그 여자의 마음과 생각과 가슴에는 생기의 폭풍이 불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온 몸에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섬겼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눅8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여자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죄인인 그 여자는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는 봉사자로 탈바꿈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죄인인 한 여자의 운명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셋째로 세리장 삭개오의 운명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눅19장에 보면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 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직업을 이용해서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뭇 사람들로부터는 죄인이라는 칭호는 받으며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개 취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장 삭개오는 아마 누군가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면서 자기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삭개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기특하게 보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도 가지고 갈릴리로도 가시는데 지금 여리고로 향해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눅19:1).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뽕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19:2-4). 세리장 삭개오는 강도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여!” 라는 말 한 마디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죄인인 여자처럼 달려가서 눈물을 쏟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여 뽕나무에 올라간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세리장이라는 체면을 내려 놓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겸손의 자세를 취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품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회개의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정식으로 신앙의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뽕 나무에 올라가 있는 자기를 우러러보시면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삭개오는 너무 놀라서 뽕 나무에서 떨어질 뻔 했을 것입니다. 자기의 하인들 이외에는 모두 자기를 ‘개’라고 부르는데 지금 예수 라는 분이 자기의 이름을 부드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누군가가 자기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준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라고 부르셨고 오랜 후에는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삭개오는 “삭개오야!” 라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부드러운 음성에 그만 온 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온 몸에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급히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면서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기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수군거렸지만 삭개오는 그런 수군거림에 개의치 않고 주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그 동안 남의 돈을 토색한 것을 사배로 갚겠다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구원의 축복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운명이 변화된 이야기를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6-9). 여리고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삭개오의 운명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넷째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한 강도의 운명이 변화된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예수님의 좌우 편에 강도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강도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국법으로 판결하거나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판결할 때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강도는 죽어가면서 자기 옆에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시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한참 바라보았을 때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분이 행악자들이고 강도들인 우리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고 있을까? 그런데 저 분의 모습에는 분노와 저주 대신 부드러움과 평안이 나타나 있을까?” 그분을 향해서 비방하며 욕을 하는 다른 강도 한 사람을 향해서 자기도 모르게 꾸짖는 말을 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23:40,41). 아마 자기 평생 처음으로 그런 옳은 말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그 강도는 분명한 회개의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고 분명한 신앙의 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실 구원을 얻으려면 분명한 회개의 고백을 하여야 하고 분명한 신앙의 고백도 하여야 하며 세례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강도를 향해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강도의 운명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강도의 마음과 생각과 가슴에는 생기의 폭풍이 불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온 몸에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강도가 낙원에 즉 천국에 이르렀을 때에는 더욱 더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자기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브라함과 베드로를 바라보았을 때 그 강도는 너무너무 놀라서 기절할 뻔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베드로와 신앙의 선배들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고 또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또 돌렸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강도의 운명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섯째로 강변교회 새신자 몇 사람의 운명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강변교회가 시작하려고 할 때 조춘국이란 사람을 만났습니다. 조춘국씨는 50평생 남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온 불교 신자였습니다. 단정하고 빈틈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견디기 어려운 가정의 불행을 겪으면서 미움과 저주에 사무쳐 눈물과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유방암에 걸려 유방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하였습니다. 조춘국씨는 유방암과 척추암이라는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때 제가 조춘국씨를 만났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게 그 분을 대했습니다. 그분의 아픔과 고통에 동정을 표했습니다. 결국 조춘국씨는 제가 인도하던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죄 사함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전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고 방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미움의 감정이 사라지고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잠 못 이루던 밤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기쁨에 못 이겨 여기 저기 뛰어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는 빌리그래함 박사가 말한 대로 변화된 사람의 삶입니다. 조춘국씨는 3년 동안 뛰어 다니면서 자기 친구들 20여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척추암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때문에 때때로 자리에 드러눕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녀를 방문하고 그녀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렇게도 극심하게 그녀를 괴롭히던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해 주시면 아픈 것이 다 없어져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저 신기하다고만 했습니다. 조춘국씨는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고 그리고 3년 동안 마음껏 전도의 사명을 다한 후 수년 후에 가족들과 몇몇 성도들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녀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 준 담임 목사가 그녀를 위해서 기도한 후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조춘국 집사를 생각하면 마음에 아련한 슬픔과 함께 진한 기쁨을 느끼곤 합니다. 조춘국 집사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의 삶과 운명이 새롭게 변화된 아름답고 보배로운 성도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강변교회의 초기에 박달안이라는 회장 보살 한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나자마자 그 분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보살님, 참 훌륭하십니다. 보통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를 위해서 사는데, 보살님은 진리를 위해서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보살님은 참 훌륭하십니다. 불교에도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진리가 더 많습니다.” 저는 6개월 동안 그 분을 만났습니다. 한 번은 그분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저는 그분을 찾아가서 위로하며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결국 그 분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분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감사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학습을 받고 나중에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찰에 전화를 걸고 자기의 이름을 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언제나 감사를 지니고 살게 되었고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도는 빌리그래함 박사가 말한 대로 변화된 사람의 삶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제가 장례를 해 드렸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보람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전도는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절한 관심과 따뜻한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변화된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박달안 권사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의 삶과 운명이 새롭게 변화된 아름답고 보배로운 성도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변교회 후반기에 제가 전도한 또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박종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하나님도 싫어했고 교회도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강변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새 신자 반에 참석하면서 믿음이 생기게 되었고 2002년 3월 31월 세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이해옥 집사는 너무 기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18년 만에 남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남편은 목사님이 세례를 주실 때 눈물이 복받쳐 올랐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은혜 받은 증거라고 말해주었어요. 만일 그 자리에 조금만 더 계속 있었다면 울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정말 부럽다고 했습니다, 나도 다시 세례 받으면서 그런 감동을 받고 싶다고요. 남편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아왔고, 저의 신앙생활도 많은 제약이 따라 다녔답니다. 낮 예배만 겨우 다닐 수 있었지요. 교회라면 머리를 흔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강변교회에 잘 다니게 되었습니다. 강변교회에 와서도 세례니 뭐니 나에게 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가족반 성도들을 통해서 교인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교인은 말이 많고 아집이 많다고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거든요. 새 가족반 성경공부를 하면서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은 것을 잘 적었다가 회사에 나가 직원회의에 그대로 전합니다. ‘종교를 가지라, 교회에 나가보라’ 하면서 이제는 정말 전도자가 되었어요. 저는 예전에 ‘하나님, 남편을 저는 못 바꿉니다. 정말 내 힘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해 주세요’ 이렇게 엎드렸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18년 만에 놀랍게 변화시켜 주셨어요. 지금 저보다 감사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강변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목사님을 만난 것을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제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 목사님 강변교회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후 박종서씨는 교회에서는 집사로 남전도회 회장으로 열심히 봉사했고 그가 회장으로 있는 회사에서는 변화된 삶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의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회사와 회사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따라서 강변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서씨를 통해 강변교회에 나와서 교인으로 등록한 가정이 여섯 가정이나 되었습니다. 전도는 변화된 사람의 삶입니다. 박종서씨는 늘 얼굴에 웃음을 지니고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박종서 집사 부부가 가끔 저의 사무실을 찾아서 저와 저의 아내를 만납니다. 9년 동안 들으며 익숙해진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박종서 집사는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의 삶과 운명이 새롭게 변화된 아름답고 보배로운 성도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저주 받은 운명을 구원 받고 축복 받은 운명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운명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대단한 회개의 고백을 하지 못해도 대단한 신앙의 고백을 하지 못해도 그저 주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은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기만 해도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됩니다. 순수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만 해도 됩니다. 주님이 보고 싶어서 뽕 나무 위에 올라가기만 해도 됩니다. 그렇다고 분명한 회개와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설교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운명도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질도 바뀌어질 것입니다. 못된 기질이 착한 기질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들의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므로 여러분들의 삶에 놀라운 운명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화해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엡 2:13-18, 고후 5:17-19, 골 1:20, 시 133:1-3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화해’란 주제로 ‘화해’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 ‘화해’를 이루는 것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서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겨서 성문에 진열하던 앗수르 사람들과 화해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백여 년 이상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노예로 부려먹던 애굽 사람들과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라를 빼앗아 점령하고 그 나라의 총독이 예수님을 잡아 죽인 로마 나라와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를 합방하고 36년 동안 착취하던 일본과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6.25 전쟁을 일으키고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북한과 화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미움과 적대와 대결이 가득한 이 세상에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를 통해서 이 세상에 화해를 가져오셨습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6).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시고 그리고 그 둘이 함께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늘과도 땅과도 자연 만물과도 화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런 불가능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여기 ‘화목’이란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은 ‘화목’이란 말을 모두 ‘화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모두 reconcile 또는 reconciliation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저는 ‘화목’이란 말 대신 ‘화해’란 말을 사용합니다.
‘화해’란 단어는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고귀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공부할 때 어떤 교수님 'reconciliation’ 즉 ‘화해’란 말을 너무 강조했을 때 좀 불만이 있었습니다. ‘구원’이란 말을 더 강조해야지 ‘화해’란 말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인본주의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구원’과 ‘화해’는 동전의 앞 뒤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구원’과 ‘화해’는 꼭 같은 것입니다. ‘구원’이 곧 ‘화해’입니다. ‘화해’는 너무너무 중요한 말이고 너무너무 고귀한 말입니다. 미움과 적대와 불화가 가득한 이 세상에 십자가의 피가 가져다 준 고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제부터 “화해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에 나타나 있는 화해의 이야기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33:3,4에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창45:1-5에 요셉과 그의 형들이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이렇게 야곱과 에서같이 요셉과 그의 형들같이 서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방성대곡하며 화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행10:23-28에 유대인 베드로와 로마인 고넬료가 화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튿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사실 유대인 베드로가 개나 되지 같이 취급하던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유대 법에 어긋나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강권에 의해서 고넬료의 집으로 갔고 거기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는 이방에 대한 그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 베드로가 로마인 고넬료와 화해했습니다.
둘째, 손양원 목사님의 화해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는 아마 교회 역사상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제가 만 4년 전인 2003년3월9일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란 제목으로 설교한 설교의 일부를 여기 그대로 옮깁니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는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습니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손목사는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 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한신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서울 이태원 외국인 아파트 경비의 일을 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둡게 살다가 1979년 12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손동희를 찾았습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손동희 권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젠 이런 것, 저런 것, 슬픔도, 미움도 한갓 꿈에 본 듯 잊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떠나려는 그의 옷자락 붙들고 우리는 목을 놓아 소리 높여 울었다. 한이라도 풀듯이…미움이 애처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여전히 울음 섞인 음성으로 나에게 자기의 진실을 말했다. '동희야,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 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련다.' 그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난 그는 정확히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지금쯤 저 천국에선 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빠와 재선 오빠가 손에 손을 잡고 이 시간 집필하는 내 모습을 지켜 보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
이것이 제가 만 4년 전인 2003년 3월 9일에 한 설교의 일부였습니다. 이 보다 더 아름답고 보배로운 용서와 사랑과 화목과 화해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모두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과 화해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랑과 화해는 오직 십자가의 피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그리고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져다 줍니다.
셋째, 부족하지만 저 자신의 화해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거의 모든 교파와 모든 계층의 사랑들과 화해를 이루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해를 심는 일들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9일 화해를 주제로 진보와 보수의 교계 및 정치계 지도자들을 우리 강변교회에서 초청해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을 가지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우리 사회 안에 화해와 상생을 심으려는 화해와 상생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화해에 관심을 가지고 화해를 힘쓰게 된 배경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저는 본래는 교제와 사귐을 폭넓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내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가서 처음 몇 년 동안은 몇몇 한국 학생들과만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Faith 신학교와 Westminster 신학교에 다닐 때는 김상복, 손봉호, 백병건, 김의환, 박희천, 한의신, 한기범 등 친한 한국 학생들과만 교제하며 지냈고 주로 공부만 했습니다. 일본 학생들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일 대학교와 아이오와 대학에 가서 공부하면서 교제와 사귐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삶의 가치관의 변화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공부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공부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다음에 목사가 되어서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성도들을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만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저들을 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일 대학교와 아이오와 대학에 다닐 때 지나가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인사를 먼저 건네고 그들에게 교제의 손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내가 살고 있던 작은 방에 몇몇 외국인 학생들이 모여서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박한 음식도 대접했습니다. 저는 그 때 남을 위해 돈을 쓰는 즐거움과 남을 대접하는 즐거움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오와에서는 내가 한인 유학생들을 불러모아 놓고 운동회도 하고 야외 소풍도 했는데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한인회가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한인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그 때 이미 인생은 만남이고 나눔이고 기쁨이란 사실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식사비를 내가 먼저 내는 습관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학위와 연구를 모두 마치고 미국 동부 뉴 헤이븐에서 서부 파사데나에 가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뇌수정으로 태어난 생후 2,3 개월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아들 철원이가 로스안젤스 췰드런즈 호스피탈에서 뇌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하는 의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아기가 수술을 받은 후 장애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들 철원이가 수술 후 장애아가 된다면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Yes 라는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며칠 후 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철원이가 장애아가 되어도 그를 얼마든지 사랑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철원이가 나의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고의 변화는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못난 사람, 모자라는 사람, 병든 사람, 예쁘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물론 지금도 약간은 그렇지만, 잘난 사람, 온전한 사람, 건강한 사람, 예쁜 사람들을 주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시각에 변화가 생긴 다음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네가 무슨 권한으로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하는 여러 종류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차별한다는 말인가!" 저는 그 음성에 항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1974년) 8월 후암교회의 교육 목사로 부임한 다음 후암동 109번지의 제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애정을 쏟게 된 것도, 폐결핵으로 쓰러져서 마산 결핵 요양소로 간 원의숙 학생을 비롯한 불치의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돌보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의 변화는 그 후 나로 하여금 강자보다는 약자 편에 서게 했고, 부유한 사람들보다는 불우한 사람들 편에 서게 했고, 여당보다는 야당 편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차츰 흑인 편에 서게 되었고, 북한 동포 편에 서게 되었고, 조선족 편에 서게 되었고, 최근에는 모슬렘 편에도 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변화였습니다. 이와 같은 나의 시각의 변화는 나로 하여금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과는 물론 진보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타 종교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에게 대한 이해와 포용의 폭이 점점 넓어졌습니다. 정치와 문화와 종교가 다를 찌라도 그들의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고귀한 인성과 영성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화해의 폭이 점점 더 넓어진 것이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제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일본 사람들과도 친밀한 교제와 사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을 받아드리게 되었고 일본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와 일본 교회가 우호 관계를 맺고 이를 증진하는데 제가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한경직 목사님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제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게 되었고 북한 동포 돕는데도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손양원 목사님의 영향과 스티브 린튼 박사님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또한 제가 처음에 많이 비판하던 강원용 목사님이나 조용기 목사님과도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들을 인정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참으로 한국교회의 귀한 어른들인데 부족한 저의 말을 잘 들어주셨고 저를 많이 믿어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은 마지막에 저를 많이 기억하시고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저서의 추천을 저에게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한 때는 경동교회의 박종화 목사님을 많이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와 가장 가까운 몇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박종화 목사님과 자주 의논을 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KNCC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분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작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준비하면서 그분들과 친밀한 협의를 하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헤쳐 나아갔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불교 스님들과도 가까이 지내고 천주교 신부들과도 가까이 지냅니다. 물론 저의 신앙은 성경적이고 복음적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기도나 예배는 타 종교인들과 함께 드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연 은총의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친교는 우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저와 이중표 목사님과의 친밀한 화해와 친교는 우리 두 사람에게 애인 사이 같은 깊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송명희 시인과의 관계도 애인 같은 깊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과의 사랑과 애정의 사귐은 저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에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나 유대인들에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사람 고넬료에게도 향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그리고 반 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였던 로마에까지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생애를 거기서 마무리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신학적으로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이방인들과의 화해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과의 화해부터 논해야 할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끼리의 화해부터 논해야 할 것이고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과의 화해를 논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먼저 한 교단과 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끼리의 사랑과 화해를 먼저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시133을 읽으므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의 복이로다"(시133:1,3). 한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이 연합하여 함께 있으면서 친밀하게 사랑하고 친밀하게 화해하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 라고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복을 명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의 복이로다." 화해에는 선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생의 복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교제와 화해의 모델이었는데 빌립보 교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에게 화해의 기쁨과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도 화해의 기쁨과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저에게 화해를 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화해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그리스도
엡 2:13-18 / 이삼규 목사 / 낙양교회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양떼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할 때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 어떤 가치를 가질까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思考)의 능력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굶주림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상상력을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이 굶주림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미지(未知)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신성(神性)의 깊은 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으로 이 심연을 건널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지성을 무조건 거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 그것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기이한 것들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창조된 피조물은 이 땅에서 오직 인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인간이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그의 사고력과 지혜로써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 작용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는 시도는 완전히 헛된 노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사고력으로 그분께 접근하거나 그분과 동등한 사고를 하거나 그분의 수준에 맞게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신학을 공부해도 지식적으로는 채워질지 모르지만 그분을 향한 굶주림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에 만족하는가?
우리는 종종 “주님, 거룩한 글 너머에 계신 주님을 찾습니다.”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찬송한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과 상관없이, 성경과 모순되게 그분을 찾는다는 의미로 이런 찬송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성경을 찾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신자들은 성경을 소유하고, 큐티를 하고, 성경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성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체험이 주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신자의 체험이 성경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있지만 체험이 없다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주 큰 부자가 죽으면서 유서를 남겼습니다. 이 유서에는 그의 막대한 재산을 그의 외아들에게 물려준다는 말이 써있습니다. 이 아들은 이 유서를 변호사에게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헐벗고 굶주리며 노숙자로 살아갑니다.
누군가 그에게 “불쌍한 사람아, 꼴이 말이 아니구나, 창백하고 쇠약하고 병색도 도는구나.”라고 말하자, 그는 거칠게 반응하면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라. 내게는 평생 쓰고도 남을 재산이 있다.”라고 쏘아 붙입니다. 그런 다음 자기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품에서 비닐 종이에 쌓아둔 유서를 꺼내서 읽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아들 개똥이에게 내 주식, 증권, 은행 예금 및 부동산 일체를 모두 물려준다.”
이 개똥이라는 사람은 유서 자체에 지극히 만족합니다. 유서를 소중히 여기고 늘 갖고 다닙니다. 하지만 그는 유서의 내용이 집행되도록 조치를 취하지 않고, 유서의 검인을 받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지도 않으며, 유산에 대한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실제로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단지 유서라는 종이 한 장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에베소서를 손에 꼭 쥐고 다니지만 자기가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려 창백하고 쇠약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목회자가 “당신은 영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사십니까?”라고 말한다면 그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받는 분’ 안에서 이미 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그분의 기업을 얻을 자가 아닙니까?”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유서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유서에 보장된 부(富)를 손에 직접 넣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에 따라 영적인 복을 누리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지성소로 들어가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빛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영혼이 소생케 되어야 하고 또 이런 영적 소생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하는데,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아주 탁월한 상징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정하신 순서에 따라 대제사장은 바깥뜰에 들어서는데, 바깥뜰에는 지붕 같은 덮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거기에 들어서면 햇빛이라는 자연광이 그의 걸음을 밝혀줍니다.
바깥뜰을 통과한 대제사장은 휘장을 젖히고 성소로 들어갑니다. 성소에는 자연광이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인공적인 등불을 계속 켜두어야 했습니다. 성소에서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자연광도 없고 인공적인 불빛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쉐키나 영광만이 있었는데, 이것은 시은좌로부터 비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빛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오면 거기에는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인간적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는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촛불도 없고, 어떤 성직자의 나즈막한 기도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으로서 섬기도록 선택된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룹들의 날개 사이에 있는 불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을 알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분이 무수한 속성을 지니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분이 그 존재의 깊이를 다 알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후에도 말씀드리겠지만 그분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서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깥뜰에는 그를 돕는 빛이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의지하는 우리의 교회와 교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등대가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성소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자연적인 빛도 인공적인 빛도 없었고, 오직 초자연적인 빛만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에게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고,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가지고 들어간 피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혼자였습니다. 그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돕는 자가 있다면 그가 지성소로 들어갈 때 휘장을 젖히는 것을 도와줄 뿐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뒤로 물러서야 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피를 가지고 그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피가 그를 지켜주지 않으면 그는 불 속에 던져진 나뭇잎처럼 불에 타버렸을 것입니다. 지성소에서 그를 안심시키거나 도와주거나 그에게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등을 두드려주거나 그에게 성경본문을 보여줄 사람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혼자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가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일대일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군중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분과의 만남은 일대일의 만남입니다. 그분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내어 자신의 도장을 찍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불러내어 한 번에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매금으로 회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남에 있어서는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원해야 합니다. 다른 것들로 눈길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법적 방해가 제거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법적인 요인들을 모두 제거하셨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방해하는 법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영광스러운 복음의 핵심입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은 중간에 막힌 담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원하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법적 방해물들이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를 막는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의 깊은 곳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이제 다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고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마음으로 그분을 영원히 믿고, 그분을 소리쳐 부르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자아의 진흙 구덩이에서 빠져 나와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님 안으로 초대하실 때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구이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을 쏟아버려라. 너를 내게 바쳐라. 너를 비워라. 네 질그릇을 비워서 내게 가져와라. 어린아이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내게 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하나님의 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아의 진흙 구덩이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릴 것이고 결국에는 우리 자신에게서 건짐을 받아 오직 하나님만을 찾게 될 것입니다.
12해를 혈루증으로 알았던 여인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원들을 찾아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돈만 허비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많은 무리들이 에워싼 가운데 거칠게 미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그분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래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분은 고개를 돌려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분께 “예수님, 그런 질문은 말이 안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누가 나를 만졌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누가 나를 믿음으로 만졌느냐? 누가 나를 사랑으로 만졌느냐?”라는 뜻으로 물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밀었지만, 이 연약한 여인은 믿음과 사랑과 경탄으로 그분을 만져서 병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소박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떠들고 즐기느라 주님께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가 무리와 여건과 전통에 개의치 않고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에게 나아와 온전히 치료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그분을 갈망하고 찾아라!
성경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친구들이 그분을 얼마나 애타게 갈망했는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바울이 어떤 점에서 우리와 다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더 이상 그분을 찾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구약의 아가서를 보면, 젊은 목자와 사랑에 빠진 젊은 여자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심지어 왕이 그녀에게 반해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만 그녀는 그녀의 연인인 소박한 목자에게 충실합니다. 이 목자는 밤이슬을 맞으며 백합을 모아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찾아와 격자창을 통해 그녀를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목자는 예수님을, 젊은 여자는 성도를, 왕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애쓰지만,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고 돌보십니다.
아가서에서 목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아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 5: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뭐라고 말합니까?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술람미 여인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리하여 목자는 슬퍼하며 가버립니다. 하지만 마음에 가책을 느낀 여자는 침상에서 일어나 그녀의 연인을 찾아 나섭니다. 연인을 찾아 헤매는 그녀를 본 그녀의 친구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아 5:9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그녀는 “아, 그 사람은 아주 멋있다. 그가 찾아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를 따라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그녀는 “나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의 연인은 슬퍼했지만, 멀리가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사랑받는 분’(the Beloved)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계시어 우리가 그분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두드리는 그분의 노크소리가 들리십니까?
아 6: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아 6: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하셨습니까? 술람미 여인의 고백처럼 사랑하는 자 예수님께 속하셨습니까?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
엡 2:12-22 / 이윤재 목사
오늘은 추석명절이 시작되는 10월 첫날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의지하고 사는 것은 역시 가족인 것 같습니다. 추석은 가족과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주고 받는 것이 선물입니다. 어느 가정에 나이가 조금 든 부부가 있었는 데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여보, 내 생일인데 선물 없어요?” 남편이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때 선물 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선물은 공원묘지였습니다. 그래도 나이 들어 어떻게 될지 몰라 상당히 비싼 공원묘지 하나를 분양받아 아내에게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1년을 지나가더니 이번에도 생일이 되니까 또 선물달라고 합니다. 남편이 조금 기분이 나빠 한 마디 했습니다. “선물? 작년에 준 선물도 아직 안썼잖아?”. 어떻습니까? 여러분, 받은 선물은 그때 그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추석날이 되어 아버지와 아들이 모처럼 함께 목욕을 갔답니다. 아버지가 먼저 목욕탕에 들어가며, "아! 시원하다. 너도 들어와“. 했습니다.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정말 시원해요?" 아빠가 말했습니다. "그래. 어서 들어와. 어, 시원하다". 아들이 목욕탕에 들어갔는 데 너무 물이 뜨거워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했습니다. "세상 믿을 놈 하나도 없네". 이때는 조금 웃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추석을 맞아 우리 가정을 돌아볼 때 에배소 2장이 참 좋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세 가지로 배웠습니다. 먼저 “그 은혜를 인하여”, 은혜가 시작입니다. 모든 좋은 일은 은혜로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은혜가 원인이라면 믿음은 수단입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목적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우리는 선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선하기 위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세 요소를 말한 다음 바울은 예수님이 하신 구원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설명합니다. 14절입니다.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이 하신 구원의 핵심은 화해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를 허시고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화목, 화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핵심은 하나님과 화목이고, 구원받음으로 우리가 받은 축복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입니다. 그래서 에배소서의 이 구조를 보셔야 합니다.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하나님 예수님 교회 성령 가정, 일터 세상
1장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말합니다. 2장은 그중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를 허물어서 생긴 것이 3장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 교회가 5장으로 가면 확장됩니다. 그것이 가정이요 일터입니다. 6장으로 가면 더 확장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생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화해
먼저 13절입니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우리에게 가까워졌다고 말합니다. 가까워졌다는 말은 본래는 멀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무엇이 멀었다는 것입니까? 두 종류의 관계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이 두 관계를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다음은 사람과도 가깝고. 가까워지고. 왜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과 사람과 멀리 지낸 것일까요? 죄 때문입니다. 엡2: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과 죄가 나옵니만 둘은 조금 다릅니다. 허물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는 데 나도 모르게 실수한 것입니다. 죄는 의도적인 잘못입니다. 허물은 실수입니다. 죄는 악행입니다. 허물은 사람앞에 지은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앞에 지은 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도 막히고 사람과도 막히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밖으로 나오고 이스라엘 밖으로 나오고 약속으로부터 밖으로 나왔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하나님 구속을 안 받은 것 같고 내 마음대로 살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힘들어 돌아가야 하겠는 데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그때 도와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입니다. 다시 13절입니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신 일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죄허물과 죄의 담을 헐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던 우리가 가깝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화해입니다. 서로 다른 둘을 연격하는 화해의 다리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다른 사람간의 높은 담을 헐어 서로 사랑하게 하고 화해하게 하는 다리입니다. 14-15절입니다. 엡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통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통하자 우리와 우리사이도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피는 혈관을 통해 온 몸을 통하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화해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남성중심의 신분사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시작되자 여자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중에는 교회 지도자가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 로마교회의 집사 뵈뵈, 빌립보교회의 루디아, 고린도교회의 브리스길라가 그 예입니다. 초대교회는 노예를 부리는 사회였습니다. 노예와 주인은 도무지 함께 살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믿고 구원받자 노예는 해방되고 주인은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도 노예였지만 훗날 에배소교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누가도 본래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믿고 자유를 얻자 평생 바울을 도와 선교에 공헌하고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나라 초대 장로가 머슴출신이라는 것은 아십니까? 우리 나라 초대목사도 머슴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 나라 초대 장로, 목사가 다 머슴이었습니다. 신분상승 때문에 장로, 목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머슴이고 종이더라도 예수믿으면 누구나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의사가 백정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평양에 백정의 아들 백동렬이라고 있었는 데 어느날 그 아들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포삼열 선교사가 고종 황제의 시의였던 애비슨에게 그를 보내 치료하게 했습니다. 왕을 고치는 의사가 백정의 아들을 치료하는 사건이 생긴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 박씨가 감동하여 개종하여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장티부스에서 살아난 그 아들이 훗날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박동열입니다. 교회는 한국사회의 신분의 장벽을 허는 화해의 공간이었습니다. 13절,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교회는 십자가로 이룬 화해의 터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그래서 교회가 생겼는 데 교회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19절입니다.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가족이란 피를 나눈 사람들입니다.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뿌리가 같고 DNA가 비슷합니다. 물론 성격이나 인격은 다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열의 차이는 없습니다. 가족중에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고, 잘날 자, 못난 자가 있지만 약한 자가 더 사랑받고 못난 자에게 더 불쌍한 곳이 가정입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존 웨슬리의 어머니는 19 남매를 길렀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머니로서 어떤 자식을 가장 사랑합니까?” 웨슬리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 하느냐고요? 아픈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사랑하고 집 나간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사랑합니다. 그것뿐입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테드 쿡이란 사람이 부모를 정의한 마음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부모는 일생 중 절반은 자식이 자라 언제 밖에 나갈 것인지를 걱정하고, 나머지 절반은 자식이 언제 돌아올지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부모는 평생 자식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자녀들이 명절에 모였습니다. 그 가정은 아들만 셋이 있었는데 세 아들이 다 다릅니다. 큰 아들은 서울대를 다닙니다. 둘째는 지방대를 다닙니다. 셋째는 삼수해서 대학 떨어지고 집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째를 무시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큰 아들이 서울대 다닌다고 막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막내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서로 말조심하면서 막내 눈치를 살핍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최근 실직해서 집에서 놉니다. 아내는 어느 학교 교감입니다. 그렇다고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으니 아제 쉬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직장생활한다고 남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또한 교회입니다. 세상은 서열과 능력에 움직이지만 교회는 서열과 계급이 없습니다.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차별대우받지 않습니다. 교회는 부자라고 더 대접받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무시당하지도 않습니다. 하나s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16-17절입니다. 엡2:16-17.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교회는 가족이기 때문에 특별히 가까운 사람도 특별히 먼 사람도 없습니다. “가깝거나 멀거나 평안을 전하시고”. 가족간에 있어야 할 것은 평안입니다. 교회 가족도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멀거나 가깝거나 평안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서로 평안을 나누는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이 쓴 시가 있습니다. “벗 하나 있었으면”이라는 시입니다.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좋은 벗을 만났습니까? 만나려고만 하지 말고 내가 좋은 벗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좋은 가족이 없나 찾지 말고 내가 좋은 가족이 되면 어떨까요? 그래서 시편 133편은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교회안에서 가족처럼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노래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아론의 머리에서 수염 타고 흐르는,
옷깃으로 흘러내리는 향긋한 기름 같구나.
헤르몬 산에서 시온 산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내리는 이슬 같구나.
그곳은 야훼께서 복을 내린 곳, 그 복은 영생이로다
교회안에서 가족으로 사는 것의 행복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머리에서 흐르는 올리브 기름의 향기와 같고 눈덮힌 헬몬산의 이슬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생활 잘 하기 7가지 성경적 지침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말하라. 어떤 문제든 주장이든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여물어 이야기할만하면 그때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라. 교회 모인 사람들이 다 남입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됩니다. 내가 누굽니다.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 많은 말을 줄이고 잘 들어주라. 누구든 잘 들어주는 것이 관계의 시작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면 됩니다. 넷째. 상대방을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고백하라. 사람들은 누구도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상대방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나오면 들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고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도 못하는 데 누가 누구를 훈계합니까? 다섯째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그가 가진 문제점을 이야기하라. 문제와 문제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문제를 가진 존재지 그 사람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를 가진 사람과 그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문제는 고치되 사람은 상처줘서는 안됩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일이 내가 성공하는 일임을 알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가 잘되는 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내가 그에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득됩니다. 마지막 문제의 해결보다는 관계를 더 중요시하라. 문제가 잘 안 풀려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먼저고 사람이 우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이 모든 교회에서 우리가 대할 태도입니다.
어느 교회 집지에 한 교인의 간증이 실렸습니다. 이 분은 여류 문학가입니다. 이 분이 하는 일은 집에서 시간나면 글쓰는 일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키우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다가 교통사고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충격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고 절망에 빠져 세상을 멀리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치료받아도 차도가 없고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나봐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폐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중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 데 그가 보다 못해 권유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났는 데 이 분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병원다니고 여행다녀도 안 낫던 병이 어떻게 나았는지 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교회에서 어떻게 했길레 병이 나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교회 목장에 들어가 일곱, 여덟명과 함께 가깝게 신앙생활을 했는 데 그 목장이 그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모일 때마다 그들은 나를 끌어 안고 울었습니다. 자식잃고 버림받은 불쌍한 나를 끌어 안고 말없이 울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이상했지만 점점 그들의 진심에 마음을 열었죠. 그렇게 몇 달 서로 울다 보니 내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가족은 긴 말이 필요없습니다. 설교도 훈계도 필요없습니다. 같이 끌어 안고 울면 됩니다. 울다보면 풀리고 치료되고 회복됩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서로 가족처럼 지내려면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 모인 곳이라면 가정은 육신의 가족이 모인 곳입니다. 가족이 모였다는 점에서 가정은 작은 교회요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과 교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는 똑같이 가족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라도 없으면 못 사는 곳입니다. 오래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다섯이나 둔 어떤 사람이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었답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친구가 “자네는 복도 많네. 아들이 다섯이나 되니 말이야. 그 중 하나만 내게 줄 수 없겠나?” 물었답니다. 아들 다섯 둔 사람은 웃으면서 “그래, 그렇게 하지. 우리 사이에 그것이 문제인가? 다섯 아들 중 하나를 줄 테니 자네 아들로 삼아 잘 키워보게나”.
그리고 집에 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가 펄쩍 뛰며 “말도 안돼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라며 완강히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친구와 약속했으니 지켜야 한다며 우기며, 아들들이 잠자고 있는 방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어떤 아들을 줄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답니다. 한 명씩 쳐다보면서, 첫째 아들은 장남이라서 안 되겠고, 둘째 아들은 다섯 아들 중에 제일 똑똑해서 안 되겠고, 셋째 아들은 제일 잘 생기고 일류대학에 다녀서 안되겠고, 그리고 넷째를 보니 그 아이는 늘 몸이 약해서 아픈 데서 많아서 불쌍한 생각이 들어 못 주겠고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도저히 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친구를 만나 “미안하네. 하나 하나 뜯어보니 줄 수 없을 것 같네. 미안하네” 했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이 많다고 하나쯤 줄 수 있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금쪽같은 자식들입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어떤 잡지에 부부싸움에 대한 설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권에 사는 30-50대 기혼 남녀 171명 대상으로 조사했답니다. 부부싸움을 해 보았습니까? 95.9%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조사는 참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잘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싸우냐 했더니 자녀문제 40.9%, 시댁문제 37.4%, 늦은 귀가, 음주문제 35.1%, 돈 문제 26.3% 순서로 나왔습니다. 어느 정도 싸우느냐 했더니 끝까지 말로만 싸운다 73.6%, 심한 욕을 하기도 한다 13.2%, 욕하고 물건을 던지거나 부수기도 한다 4.2%, 싸워서 아내에게 매맞는 남자도 상당히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부부싸움 후 누가 먼저 사과하느냐? 했더니 남편45.1%, 주로 아내 17.7%, 남편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부부 싸움의 문제도 남편쪽에 많고 사과도 남편이 많습니다. 사과할 때 주로 쓰는 말이 무엇인가? 했더니 미안해가 제일 많습니다, 56명, 사랑해 15명, 잘못했어 12명, 싸우지 말자 6명, 잘하자 5명, 영화 보러가자 5명, 삐졌어? 3명.
마지막으로 부부싸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했더니 “별로 잘한 것 같지 않다. 참을 것을 그랬다. 후회된다”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잘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부부나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짧고 우리는 늙어갑니다. 조그만 참으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누가 한 사람 아파 눕거나 먼저 가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사람이 당하는 슬픔중에 제일 큰 것이 아내나 남편의 죽음입니다. 가난할 때 결혼해서 여기까지 고생하고 살았는 데 조금 살만하니까 죽은 것입니다. 그때는 땅을 치고 통곡해야 소용없습니다. 있을 때 잘해야 합니다. 다같이 “있을 때 잘해”. 제가 좋아하는 <인생은 미완성>이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우리가 가족으로 만난 것은 다만 잘 살기위해서가 아닙니다. 18절입니다.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가족은 함께 사는 공동체일 뿐 아니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좋은 분이라면 우리 다 함께 그 분에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이 좋은 곳이라면 모든 가족이 함께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같이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그래서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려 세우셨습니다. 가정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정, 이 둘을 합쳐서 하나님의 가족, 예수님이 세우셨습니다.
함께 지어져갑니까?
엡 2:11-22 / 오정호 목사
교회(敎會)는 혈연(血緣), 지연(地緣)공동체와는 달리, 한 세례 한 성령의 은혜를 받은 신앙(信仰)공동체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과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고백(告白)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개인적인 이기심으로 그 공동체성(共同體性)이 약화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비극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아픔과 어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교회가 개인의 편견, 오해나 이기성에 기초한다면 공동체의 힘은 반드시 약화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 공동체로서 은혜를 따라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소위 예수 믿는 성도의 ‘각성(覺醒)의 3단계’입니다.
본문말씀에 나타난 시점(時點)을 나타내는 세 단어,“생각하라”(11절),“이제는”(13절)“그러므로 이제부터”(19절)를 가지고 우리 삶의 공동체성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11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11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과거 모습은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고, 복음을 받을 수도 없었던 이방인(異邦人)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형편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12절). 하나님도 없는 자는 파산한 인생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약속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 없이(without Christ), 소망 없이(without Hope) 살아온 존재라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과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습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계시는지 조차도 모른 체‘아웃사이더(Outsider) 인생’으로 살아왔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없을 때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 같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과거의 삶을 되돌아 보면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새로운 신분과 직분을 기억해야합니다(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주님은“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하셨습니다(14~15절).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나를 위해서 과거에 어떤 일을 이루셨는가를 잘 아는 것이 좋은 신앙이며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힌 장벽을 허시고 화평하게 하시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역할을 하셨습니다.“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절). 과거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지만 이제는 그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 졌습니다.
옛 모습 새 모습
1. 그리스도 밖 그리스도 안
2. 이스라엘 밖 거룩한 나라
3. 언약 밖 언약의 백성
4. 소망 밖 소망의 백성
5. 하나님 밖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옛 모습은 그리스도 밖에, 이스라엘 밖에, 언약밖에, 소망밖에, 하나님 밖에서 아웃 사이더로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새모습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나라로, 언약의 백성, 영원한 소망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라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게 것이 무엇임을 잘 아는데 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찬송가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존 뉴톤(John Newton)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기억함과 동시에 오늘날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비로우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했습니다.
셋째,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하나님의 권속(眷屬)’이란 말은 하나님의 가족(The Family of God)이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신분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영광스런 단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말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방인처럼, 방문자처럼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새 신분을 부여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세상의 어떤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고 오직 신앙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존중하고 계십니까? 주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오해받거나 왜곡될 때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취하십니까? 남의 일처럼 방관적인 태도를 취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일처럼 대표성을 가지고 대처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 때 나를 향하신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손님’처럼 살아선 안 됩니다. 이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손님처럼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1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성전(聖殿)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하나님의 가족’이란 개념과‘하나님의 성전’이란 개념이 우리의 신분을 묘사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당시에 에베소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지는 아데미(Artemis)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의 위엄과 웅장함을 익히 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전이다”는 말은 생생히 이해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이미 우리 주님께서 우릴 성전 삼으셨지만 성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함께”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함께 성장하기를 원하십니까? 교회의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십니까 아니면 연명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에베소 교인들은 우리보다 더 열악한 형편에 있었지만‘함께 지어져 가고’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주님 앞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두려움을 제거해야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전에 소극적이었던 사람이 남들의 이목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때 함께 세워져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신분을 올바로 수용하는 성도만이 두려움의 장벽을 복음의 능력으로 너끈하게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②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에베소서 3:1).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에베소서 3:1).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투옥되는 것을 겁냈다면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가 복음을 받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로서, 먼저 믿은 자로서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의 미래는 상실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빚진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③ 가시적인 교회 생활에서 열매를 남겨야 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는 일들에 있어 가시적인 열매를 남겨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추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다면 공동체성은 강화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일터에 적용되는 영성과 주님사랑으로 보이는 교회공동체의 성장을 위하여 기여합시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敎會)야 말로 이 시대 가정과 사회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단순하게 자신 혼자 예수 믿고 응답 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공동체성(共同體性)을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더불어’잘 살아야 하며‘더불어’성장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강해지기 위해 예수님 없이 살아왔던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직시합시다. 현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은혜와 축복들을 기억합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담대하게 믿는 자로서의 대가를 치르면서 가시적인 교회생활의 열매를 남김으로 하나님의 성전으로“함께 지어져”가는 새로남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함께”의 축복
주님과 함께라면
두려운 것이 없고
성도와 함께라면
찬양소리 끊이지 않네
단절되고, 깨어지는
우리네 삶의 초상화 가운데
함께의 신비를 깨닫는자의
영혼에
평안함이 깃드네
이 땅에서
함께 주님을 높이는자
하늘에서도
함께 주님을 찬양하리라
이 땅에서
함께 복음을 위하여
땀 흘리는자,
저 천국 주님 앞에서
주님의 영광을 높이며
함께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하나되게 하시는 은혜
엡 2:11-22 / 윤영택 목사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먹던 자리에서 시작하신 성만찬의 의미를 유월절에서 찾아봅니다. 애굽을 탈출하던 밤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족들이 한 집에 모여 양과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었고 그 집의 문에는 어린 양의 피가 칠하여져 있었습니다. 그 밤에 온 애굽 땅은 바로의 궁궐에서부터 시작하여 맷돌을 가는 종의 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에 처음 난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른 히브리인들의 집은 그 죽음이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출12:13) 약속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죽음의 사자들이 온 애굽을 치던 그 밤에 장자 죽음의 재앙을 만난 바로는 더 이상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붙들어 둘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온 집이 죽음의 공포로 떨며 부르짖던 그 밤에 히브리인들은 드디어 400여 년 동안 머물렀던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으로의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밤이 애굽인들에게는 죽음의 밤이었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해방과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한쪽은 죽음을 당하였지만 다른 한쪽은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애굽은 처음 태어난 자녀들을 잃은 슬픔으로 통곡하였지만, 이스라엘은 해방의 기쁨으로 그 땅을 훌훌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든 애굽을 떠나던 날 밤에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던 그 사건을 기억하고 예식을 행하라 명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유월절 예식입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따라 매년 1월14일부터 한 주간 동안 유월절, 다른 말로는 무교절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굽을 떠나던 밤에 하였던 것처럼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온 가족이 집에 모여 그 양을 불에 구워 누룩이 없는 떡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예식입니다. 훗날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묻거든 ‘이것은 유월절 제사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시고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음을 기념하는 것이다’(출12:27) 라고 가르치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지켰던 유월절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는 성찬예식과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인가 질문하던 것처럼 우리도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이 예식이 무슨 뜻인가 질문해 봅니다. 성찬식은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을 드시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주시고 그 뜻을 알리신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예식을 행하므로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을 준비를 하게 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셨습니다.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 받아 먹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기도 하신 후 또 나눠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이니 너희가 다 받아 마시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행하셨던 이 예식은 훗날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신약의 성도들이 예배하러 모일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성만찬 예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오늘날까지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 예식을 행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약속의 음식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내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이 음식을 먹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자녀들이 어른들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묻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께서 남기신 말씀을 반복하여 전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절인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참 주인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주님은 유월절 축제가 진행되는 기간에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 피로 죄인들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간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넘어가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표시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을 먹고 마시라 하셨습니다. 이제 구약의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유월절 예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이 되었고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을 행합니다.
본래 구약의 유월절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구별된 예식이었습니다. 이방인과 타국인들은 유월절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한 가지 예외 조건이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나 타국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은 사람은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이 되어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 같은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는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이 된다는 약속의 예식이었습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있는 너그러운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따라 이방인도 타국인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유월절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주가 나오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 비로소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의 십자가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유월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으며 구원을 감사드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모여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예법대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어린 양의 피가 히브리인들에게는 구원의 표시요 보증이었던 것처럼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피는 곧 나의 죄를 씻으심이요 영원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의 은혜에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격이 할례였다면, 주께서 주신 성찬에 동참하는 자격은 세례가 되었습니다. 할례는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속으로 들어온다는 믿음 고백을 전제로 했다면, 세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사함을 입었다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 전에 죄인으로 살던 나의 삶을 청산하고 나의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는 주와 함께 다시 태어난 새 사람으로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순간 우리의 죄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았고, 주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의 죄악된 옛 사람은 이미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연합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에는 이방인이었고 할례가 없는 백성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한 시민이 되었고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분명하였습니다. 할례를 통한 혈통적 이스라엘만 언약의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었고 그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아 언약의 백성으로 가입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국적도 혈통도 빈부와 노소의 차이도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를 건물로 비유할 때 그 건물의 기초석이 되고 연결 돌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 분을 통해 연결된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어갑니다. 거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더 이상 없습니다. 혈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언약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조건과 자격이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을 따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적, 지리적, 율법적 차원에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곧 교회이며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와 백성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었고 중간에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전에는 절대로 합할 수 없었던 둘이었지만 이제는 십자가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것이 성도의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에베소서 4장1절-6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이고 바른 모습입니다. 비록 교회들이 지역을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파로 구분이 되었을지라도 그 교회들의 머리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심과 그분만 홀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 한 몸이며 한 가족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심은 바로 이 하나됨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무교병으로 성찬식을 하면서 저 나름대로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동안 떡이나 빵을 사용하다가 이번에는 크랙커처럼 바싹 구워진 무교병을 사용하였는데 그 조각을 나눌 때마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그냥 크랙커가 잘라지는 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몸이 부서지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괴롭고 듣기 싫었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 이처럼 부서졌기에 우리가 그 은혜로 하나가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와의 하나 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스런 독자를 우리 대신 형벌 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고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갈라진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죄 때문에 이리저리 갈라진 가정들과 교회들과 세상을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할 사명이 있는 오늘날 교회는 교파와 지역과 교리로 갈리고 나뉘어 서로 오가지 못할 사람들처럼 흩어진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고 좌파와 우파로 갈리며, 빈부의 차이로 사람을 차별하는 무지몽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고 서열을 매기지 않는 곳이 얼마나 될까요? 어딜 가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등급들, 눈에 확실하게 뜨이는 등급들이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등급이 교회 안까지 밀고 들어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다시 서로를 찢고 나눔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가족 관계가 계급사회처럼 서열이 정해지고 생활수준과 학력과 지역 등으로 등급을 매겨 끼리끼리 모이면서 그것도 교회라고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구분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그분의 창조주 되심과 구원주 되심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다스림을 따라 그의 백성으로 사는가 아닌가? 믿음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왔는가 아닌가 여기에 서로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주 안에서 높고 낮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가 된 공동체 속에 기꺼이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성전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결된 그의 몸, 그의 집, 곧 교회입니다.
자고 나면 사고 소식과 재해 소식들,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이웃의 기쁨을 나의 기쁨처럼 함께 나누는 넉넉한 사랑이 아쉽고 그립습니다. 이웃의 재난을 보고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비정하고 냉혹한 사람들도 있고, 이웃의 고난을 정죄하고 그럼으로써 은근히 자신의 의를 드러내며 자랑거리로 삼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웃의 약점이 나의 이익을 배가시키는 기회가 되고 이웃의 불행이 오직 나만의 행복을 배가하는 기회가 되고 만다면 그것만큼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의 마음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머물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더 이상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새로운 사회는 아닙니다. 더구나 교회는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자유경쟁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워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재물과 더 많이 배운 지식과 더 많이 가진 정보를 이용하여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쌓아두면서 나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주의가 세상을 갈수록 거칠게 만듭니다. 이웃이 협력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내 것을 빼앗아 가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쟁과 미움의 대상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삭막한 세상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와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주께서 마지막 밤에 떡과 잔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합시다. 서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과 나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삽시다. 자신을 나누어주시면서 생명을 살리고자 하셨던 그 은혜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신 그 사랑을 닮아갑시다.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
엡 2:11-22 / 김상복 목사
길을 가다 보면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공사든지 끝내기 전에는 불편하고 귀찮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공사 중’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성전이요, 전 세계에 있는 우주적 교회도 하나님의 성전인데, 모든 교회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이 성전을 지을 때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아름다운 건물이 없었고 시멘트, 모래, 물, 벽돌, 나무, 유리, 못, 쇳덩어리 등 건축자재만 있었습니다. 그것도 원래는 어느 공장이나 강가나 산에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자재들이 교회에 하나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한동안 바닥에 방치됩니다. 그 상황만 보고는 ‘저게 뭐가 되겠나?’ 싶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지나자 그 자재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허름하게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일하는 작업자들의 얼굴을 보면 ‘저 분들이 뭘 하겠나?’싶지요. 그런데 그 분들이 뚝딱뚝딱하니까 점점 건물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제가 1차 공사 때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2차 공사 때는 거의 매일 건물 꼭대기부터 아래층까지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손 댈 곳을 일일이 살피고 기록을 했습니다. 공사과정은 불편했지만 흩어져있던 자재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결국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곳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전으로, 경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건축대상을 두개나 받았습니다. 시작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재료들이 하나씩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결국 이와 같이 아름다운 교회가 완성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술한 상태였고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도 않고 ‘저게 뭐가 되겠나?’ 싶을 만큼 연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말, 태도와 행동, 습관과 인격 속에서 움직이면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한 명, 두 명 모이면서 지역 교회가 형성되고 한국 교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신분이었습니다. 본문은 우리의 예전 모습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11절). 내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재목이었는지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요, 하나님나라 백성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고 사는 외국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천국도, 영생도, 부활도 몰랐으니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한 생애를 살다가 늙어서 죽는 것 밖에 다른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조롱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옛날에 우리가 어떤 신분이었는지를 기억해야 오늘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하나님과 전혀 관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가까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던 자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각자 배경을 봐서는 같이 모여 예배하고 같은 하나님을 찬양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있었고 우리 사이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서로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나라들을 싫어하거나 무시하고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식민지 생활을 했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독립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독립한 이후부터 끊임없이 부족 간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동네 싸움이 많았습니다. 저는 서평양에서 자랐는데 우리 동네와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둔 뒷동네가 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나가면 뒷동네 아이들이 때리기 때문에 아예 그리로 지나가지도 못했어요. 고작 10살 내외의 아이들이 패싸움을 했으니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우산의 살을 잘라 소총을 만들고 납총알을 끼워 총을 쐈습니다. 눈에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어린아이들이 무엇을 안다고 동네 패싸움을 했는지….
그런 것을 보면 우리는 서로 간에 멉니다. 하나님과 머니까 사람과도 멉니다. 왜? 죄성이 있어 서로를 싫어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므로 각자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세계를 그려감으로써 주위에 배제되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옆집 사람도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 신분을 설명을 하기에 너무 충분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와 같은 인간세계에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졌고 인간관계가 조각난 이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죄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 되게 하시고 사람들 사이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출발하고 그 분의 성전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셨습니다. 죄의 담을, 율법의 담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목제물이 되어 우리를 위해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14절), 즉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공동체, 새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가 이 땅에 시작된 것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제는 율법이 우리를 고소할 수 없고 파괴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고 그 피로 우리를 사셨고 새 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새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기 시작하고, 각자 자기 자리와 위치를 차지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지고 있고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와 우리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든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남편의 삶은 힘든 삶이었습니다. 가족들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힘들었던 남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고 과거를 회개하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그 아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가족은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남편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요즘은 딸의 말을 듣고 성경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어요. 정말 놀랍습니다.” 평생 힘들게 살았던 그 가정에 이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고 새 사람이 됐기 때문입니다. 연세가 많은 그 부인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귀하긴 귀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사람들을 예수님이 중간에 매개체가 되셔서 하나로 만들어 주시고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새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인간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6절). “십자가를 통해서 이 둘을 한 몸으로”란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원수 관계를 십자가로 소멸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 사람들, 여러분과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들 사이도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도 더욱더 완성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분은 어떤가? 이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 우리 삶의 토대는 사도와 선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선지자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들 토대위에 굳건히 서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쓴 구약성경과 사도들이 쓴 신약성경 위에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과 이 두 그룹의 성경이 우리 신앙의 절대적인 토대인데 그 둘을 잇는 모퉁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서로 하나가 되고 구약과 신약이 하나가 되고 이 하나 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즉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1절).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 교회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는 그냥 어딘가에 던져져 있는 건축자재들에 불과했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모래 자체로서는 성전에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모래와 시멘트와 물과 만나 교회의 벽이 되고 빌딩에 쓰이기 시작할 때 가치가 생깁니다. 그것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이 교회가 완성된 것처럼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부분이요 지체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나라 시민이 될 때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가 있고 저는 제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은사를 따라 자기 자리에 확실하게 설 때, 하나님이 지으시는 아름다운 성전이 완성될 것입니다.
“서로 연결하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개인이나 교회, 교계, 세계적으로도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지금 완성되고 성화되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면서도 종종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공사 중이어서 그렇습니다. 서로 간에 완전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둥근 버튼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 PBP BGHNFWM이라고 씌어있어요. 궁금해서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Please be patient"(제발 참아주세요). "Because God has not finished with me"(하나님이 아직 저를 완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아직 미완성품이니 조금만 참아달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교회는 완성되어 가는 중이지만 아직도 미완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도 성령께서 계속 변화시키고 계시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좀 참아주면서 여러분의 가족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4, 7). 사랑에 있어서 인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미완성 작품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완성되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교회는 완성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깨졌던 우리가 회복되면서 완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누군가가 제자리에 없으면 그저 야단치지 말고 제자리에 앉혀 주세요. 좀 튀어나왔으면 조금 밀어주세요. 데려다가 격려해 주세요. 우리 모두가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의 미완성 성전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수고하는 가운데 마지막 못이 박히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우리 모두가 완성되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계속 아름답고 깨끗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읽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셔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재목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전의 마지막 못이 박힐 때 저 하늘에서는 천군천사의 나팔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도 끝날 것입니다. 아픔과 슬픔과 눈물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완성되는 그날, 주님께서 마련한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완성된 교회와 개인으로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릴 때까지 인내로 우리 자신을 잘 다듬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지체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새 생명 새 교회
엡 2:11-22 / 이중표 목사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도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과거에 우리에게 베푼 은혜, 현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셨고, 미래에 성령을 통하여 어떻게 역사해 나갈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창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았고, 미래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영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11절), “그 때에 너희는”(12절)
여기에서 말하는 그때는 과거를 말합니다. “이제”(13절)는 현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19절)는 미래를 말합니다. 그때는 너희가 어떤 존재였고,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너희는 어떤 존재로 살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구약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신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성령이 오신 이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예의주시해보면 어쩌면 그렇게 오묘하게도 한 마디 한 마디가 꼭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씌여져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7절까지는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고, 8-10절까지는 구원의 근거, 구원의 방법, 구원의 목적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과거에 어떤 존재였느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없는 자들은 불쌍합니다. 돈 없고, 집 없고, 빽 없고, 학벌 없고, 아버지 없고, 남편 없고, 없다는 말은 불행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없는 것도 불행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자, 예수가 없는 자는 더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11절)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구별인데 유대인은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당이요,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못한 무할례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삼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징표로 남자의 양피를 잘라 흔적을 남기도록 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2절)
과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을 했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또 다윗에게 언약을 했습니다. “네 후손 가운데 영원히 왕권을 지키는 자가 나올 것이다.”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은총을 입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하셨는데 이방인들은 이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13절) 전에는 이방인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서 구원해 주시므로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받는 축복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성경을 가까이 합니다. 제단을 가까이 합니다. 주의 종을 가까이 합니다. 성경에서 병 고침 받고 은혜받은 사람들은 예수를 가까이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어떻게 가까워집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내 속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육신의 피를 나눈 한 형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집니다. 그런데 육신의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는 사람들은 한 형제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4-15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담으로 막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는 저주받은 백성들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축복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냉정히 생각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입니다. 율법을 줄 때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율법을 받았지만 율법을 범하므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영혼이 떠났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쫙 찢어졌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것이 휘장입니다. 이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처소입니다. 이곳은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곳입니다. 죄인이 그곳에 들어가면 죄 때문에 바로 즉사합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죄사함 의식은 속죄의 모형일 뿐이지 참 속죄는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 피를 흘리시므로 휘장이 찢어지면서 누구든지 예수의 피가 있는 자는 하나님 면전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15절)
율법을 폐했다는 말은 율법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나오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율법을 다 완성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모든 법이 다 끝났습니다. 세상의 법도 죄인이 살아있을 때 법이 적용되는 것이지 죄인이 죽어버리면 법이 끝나버립니다.
여기 ‘의문’이라는 말은 ‘조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 된 모든 조문을 말합니다. 이 의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었는데 구별되는 새 사람이 아니라 이전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새 사람이 되니까 저절로 화평하게 됩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17절)
먼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운데 있는 이방인이나 모두 다 죄로부터 오는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죄책으로부터, 저주로부터 평안을 주었습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절)
우리는 아버지가 있는 자요, 예수가 있는 자요, 천국이 있는 자요, 구원이 있는 자요, 죄사함이 있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불행한 자에서 이제는 있는 자로 바꾸어졌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없는 것을 보기 때문에 불평하고 불만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자기 자녀에게서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은 “공부도 못하는 멍청한 자식, 꼭 생긴 것도 돼지같이 생겼네” 하면서 부정적인 것만 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너는 건강이 있구나, 웃음이 있구나, 노는 재주가 있구나” 하면서 긍정적인 것만 봅니다.
오늘 분당에서 오전 예배를 드리고 당회실에 앉아 있는데 에스더 선교회 자매 여섯 명이 기도해 달라고 저를 찾아왔어요. “목사님을 멀리에서만 뵈었는데 오늘은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뵈려고 결심하고 왔습니다.” 나를 가까이서 보려고 왔다니 반가워서 1시간 가까이 이런 저런 대화를 했습니다. 제가 한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나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별로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저에 대해서 안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나요?” “목사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슨 일로 자매님을 섭섭하게 했나요?” “제가 목사님에게 인사를 했는데 인사도 안받고 본체만체 하고 그냥 지나가서 섭섭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이 자매님과 같이 저를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나를 무시했다, 가난하니까 안쳐다봤다, 우리 목사님은 나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단언하건대 저는 절대로 여러분들을 싫어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인들을 많아서 일일이 다 상대할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혹시 저에 대한 오해로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마음을 푸시기 바랍니다.
이 자매님이 저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서 섭섭한 마음이 풀리고 섭섭한 마음이 풀리면서 제가 귀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섭섭한 마음이 귀한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구나! 진실한 분이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목사님에 대해 귀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부터 제 삶이 바뀌었습니다.”
이분의 말을 빌리자면 시어머니가 얼마나 사나운 분인지 며느리에게 욕을 한다고 그래요. 옛날에는 시어머니 욕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빠서 소화도 잘 안되었는데 저에게 은혜를 받고 제가 귀하게 느껴지면서부터는 시어머니가 욕을 하면서 구박해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시어머니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별세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할 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서 그 아버지가 내 속에 들어옵니다. 눈에 보이는 목자를 사랑할 때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면 약속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내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절)
외인이 아니라는 말은 이방인이 아니라는 말이요, 손이 아니라는 말은 나그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과 동일한 천국 시민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20절)
모퉁이 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머릿돌’ 의미합니다. 건물을 지을 때 한 가운데 연결시키는 돌이 머릿돌입니다. 머릿돌이신 그리스도를 주축으로 해서 양쪽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21절)
건물마다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돌이 하나만 빠져나와도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내립니다. 성도들이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아프면 전체가 다 아픕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목사나, 장로나, 교인 하나가 잘못되면 한국교회 전체가 잘못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성도 전체가 함께 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대 잘됨이 나의 잘됨이요, 그대 실패가 나의 실패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의 실수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감싸고, 격려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우리가 그때는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과거는 떠나고, 현재는 예수 생명을 가지고, 미래는 역사를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와 나(3) 우리의 화평
엡 2:11-19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십자가와 나"라는 주제로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와 나"라는 말을 들을 때 무슨 느낌과 무슨 감동을 받습니까? 황관창씨는 "십자가와 나"라는 설교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주희씨는 십자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에 흠뻑 빠져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했습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라고 울면서 십자가 찬송시를 썼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은 십자가 성화 아래 무릎을 꿇고 한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십자가와 나" 십자가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1. 인류: 불화와 원수 됨
인류의 역사는 불화와 원수 됨의 역사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부터 세상에는 화평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고 부부와 멀어졌고 형제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고 자기 자신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가인은 정신이 나가서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는 것,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떠났고 사마리아인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했습니다. 바벨론도 앗수르도 애굽도 유대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서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화목과 화평대신 떠남과 불화와 원수 됨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로마시대가 되었을 때는 로마도 이스라엘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했습니다. 이 떠남과 불화와 저주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자기들의 미움과 원수 됨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민족과 국가간의 불화와 갈등뿐 아니라 부부간의 불화와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불화와 갈등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와 갈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불화와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한 인류의 역사입니다.
2. 십자가: 화목과 화평의 다리
하나님의 마음에는 서로 원수 된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화목 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 된 인간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 시키고 어떻게 하면 인간들과 서로 화목 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져서 원수 된 인간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라 오라" 라고 애타게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리라"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으라고 초청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마지막 방법이 십자가로 화평의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7월 7석 날 까치들이 오작교를 놓아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했고 사람들이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히10: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는데 그 길은 자기의 육체로 만든 십자가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사실 아담 이후 아무도, 대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십자가의 다리를 밟고서 누구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만나서 화목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십자가의 다리를 밟고서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만남의 장소에서 자기 자신과도 만나서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점입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이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말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피로 서로 화목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개인개인이 십자가의 만남의 장소에서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과 인간들과의 화평과 자기 자신과 화평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십자가의 수직의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십자가의 수평의 나무는 인간과 인간을 화목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십자가의 중심은 나를 나 자신과 화목시키는 화평의 중심나무가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인종의 차별이나 갈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그리고 흑인까지도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도 귀족도 가난한자도 부자도 모두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강변교회에는 경상도 사람들도 있고 전라도 사람들도 있고 충청도 사람들도 있고 북한 사람들도 있고 강원도 사람들도 있고 경기도와 서울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류층도 있고 하류층도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화목과 화평이 이루어 집니다.
3. 십자가: 버림 받음과 저주의 장소
어떻게 십자가가 화목과 화평의 다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본래 화목의 상징이기 보다는 원수 됨의 상징이었고 화평의 상징이기 보다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멸시와 끊어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도 십자가는 본래는 끊어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 이니라"(신21:23).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 십자가는 버림 받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십자가는 멀리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십자가는 멸시와 조소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7). 십자가는 버림받음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위에서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멸시와 조소와 끊어짐과 버림 받음과 저주를 받으므로 우리들이 그분 대신 화목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며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십자가의 끊어짐이 우리의 연결이 되었고 십자가의 저주가 우리의 화평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교환의 신비요 놀라운 교환의 은혜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버림을 받으므로 내가 찾은 바가 되었고 누군가가 대신 저주를 받으므로 내가 화목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로 오는 길에 방송 뉴스를 들으니까 40대의 아버지가 불이 난 집에서 6살 난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안고 아파트 위에서 30미터 아래로 뛰어 내려 자기는 죽고 딸은 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교환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 자기가 저주를 받고 다름 사람을 복 받게 하는 것, 이것이 교환의 신비요 은혜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나 대신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나 대신 저주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도 가까이 가서 그들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 대신 몸과 영혼이 파손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지며 우리는 우리가 처한 정신분열과 우울증과 절망의 질병에서 치료를 받아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붙잡을 때 이와 같은 화평의 일이 일어납니다. 자유와 평안이 주어집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하나님과 멀어졌던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이웃과 멀어졌던 사람이 이웃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자신과 분리되었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복음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화해하세요 인사를 하세요 십자가 바라보세요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손을 붙잡고 인사를 하세요 화해를 하세요” 이 찬송을 함께 부르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면서 그 다음 이웃과 화해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면서 이 찬송을 함께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마음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살펴 보십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습니까?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자간에, 성도들간에, 서로 멀어져 있습니까? 자기 자신과 멀어져 있습니까? 십자가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 “화해하세요" 찬송을 함께 부르십시다.
십자가와 나(14) 존스토트 4 무엇을 이루었는가?
엡 2:11-19 / 김명혁 목사
"십자가와 나" 이 말은 세상에서 가장 감격스럽고 가장 축복스러운 말입니다. "십자가와 나" 란 주제로 오늘 열 네 번째 설교를 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의 십자가 설교로는 네 번째 설교가 됩니다. 스토트 박사님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7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설교는 존 스토트 박사님의 설교의 내용을 아주 많이 수정을 하고 아주 많이 보충을 했습니다. 좀더 쉽고 분명하게 설교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입니다. 십자가가 성취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라는 말입니다. 마귀를 만족시키면서까지 율법을 만족시키면서까지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만족시키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성육신과 아들의 죽음으로 이루신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십자가가 이룬 것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입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가 이룬 구원의 내용 세 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을 구속했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값을 치루고 사 드린다는 말입니다. 노예 시장에서 노예들이 상품으로 팔려 갑니다. "자 이 노예는 아주 건강하고 힘도 세고 머리도 좋습니다. 자 이 노예를 사 가십시오." "자 이 노예는 마음이 온순하고 얼굴이 예쁘고 손 재주가 많습니다. 자 이 노예를 사 가십시오." 이렇게 노예 상인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군중들이 여기 저기서 소리를 지릅니다. 백 만원에 파시오. 이 백만원에 파시오. 오 백만원에 파시오. 값을 제일 비싸게 부른 사람이 그 노예를 사 가지고 갑니다. 구속이란 말은 노예 시장에서 값을 치루고 노예를 사 가듯이 하나님께서 비싼 값을 치루시고 죄인들을 마귀 시장에서 사 가지고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 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이란 말을 영어로는 redeemed 라고도 하고 delivered 라고도 하고 ransomed 라고도 합니다. Ransomed 라는 말은 속전을 지불하고 즉 값을 지불하고 무엇을 산다는 말입니다. 무슨 값을 지불했다는 말입니까? 마귀 시장에서 우리를 사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지불한 값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 값을 치루시고 우리 죄인들을 마귀의 노예 시장에서 우리를 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딤전2:5,6). 결국 구속이란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마귀의 노예 시장에서 사셨다는 말입니다.
구속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주인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마귀가 우리의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비싼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어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귀로부터 피로 산 바 되었고 하나님께 드린 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주님께서 우리들을 사셨으므로 우리는 이제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값으로 산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이것이 구원의 첫째 의미입니다.
2 둘째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을 의롭게 했습니다.
본래 마귀 시장에 속했던 죄인들은 그 존재가 천하고 더럽고 포악합니다. 포로 수용소의 분위기는 천하고 더럽고 포악합니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는 지위의 고상함도 없고 인격의 고상함도 없습니다. 모두 짐승 같은 천하고 더럽고 포악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 시장에 속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주인인 마귀를 닮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모두 마귀적이었습니다. 망령된 행실이 바로 그들의 행실이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그들은 값을 치루고 사 오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지위와 인격과 행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신분을 의인들의 신분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즉 의롭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때문에 우리 죄인들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눅18:14). 이것은 법정에서의 선언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 그 존재가 천하고 더럽고 포악하지만 십자가 사건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보아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 교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로마서의 중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1-24).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 칭의의 교리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의 중심 조항"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일은 굉장한 일입니다. 물론 아직 완전히 의롭게 된 것은 아니지만 성화의 삶이 막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된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것은 심판을 이기고 마귀의 정죄를 이기는 굉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칭의의 축복은 강하게 진술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대신 죄인으로 정죄하시고 그 대신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이룬 구원의 두 번째 내용입니다. .
3 셋째 십자가는 우리 죄인들을 화해시켰습니다.
구원은 우리 죄인들을 비싼 값을 치루고 노예 시장에서 사 온 것이고 그리고 더럽고 불의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와 사랑의 비싼 값을 치루고 감옥과 형장에서 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의 죄를 용서한다고 본인에게 와 그의 부모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의 구원의 사랑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 살인범을 자기 집에서 같이 살게 했습니다. 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의 딸 동희양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반대했지만 그를 설득해서 그 살인범을 자기의 양자로 삼고 자기 집에서 같이 먹고 같이 살게 했습니다. 원수를 구원하되 자기의 가정과 화해를 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노예 시장에서 사 온 죄인들을 자기와 화해시키고 그리고 자기의 가족과 화해를 시킨 것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를 아버지는 그저 용서했을 뿐 아니라 자기 품으로 그리고 가정의 품으로 받아드리며 화해를 시켰습니다. 맏아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고하고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으로 받아드리고 화해를 시켰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5:31,32).
현대인의 삶의 처지는 화해가 아닌 소외입니다. 가정에서 소외를 당하고 학교에서 소외를 당하고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고 자연에게서 소외를 당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를 당하고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소외를 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결국 현대인들은 관계의 자유와 기쁨을 상실한 채 외롭고 슬프게 공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소외당한 자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해시키는 데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은 소외된 우리 죄인들을 노예 시장에서 건지시고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화해를 시키셨습니다. 우리들을 자기 품에 안으시고 우리들을 아들과 딸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바 아바지라고 부르라고 성령으로 속삭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바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16)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피로 이룬 화해의 축복을 엡2:11-19에서 가장 분명하게 기술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과의 화해이고 둘째 사람들과의 화해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3,14).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4,15).
구원은 화해입니다. 화해하며 서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제하며 서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15:22,23). 구원은 화해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바 아바지여" 하며 즐거워하고 "형제 자매여" 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께 당당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8). 이제는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화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9).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은 화해입니다. 그런데 이 화해는 사람들과의 화해에 그치지 않고 우주 만물과의 화해에까지 미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공1:20).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의 세 가지 내용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값을 치루시고 우리 죄인들을 마귀 시장에서 사 오셨습니다. 즉 우리들을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즉 칭의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들과 화해시켜주셨습니다. 즉 화해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귀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의 은혜를 영원토록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구속의 복음 칭의의 복음 그리고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화평인 십자가
엡 2:11-19 / 임덕순 목사
그동안 주일 낮에는 요한복음 강해를 하면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과 행동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한 회의를 통하여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더욱 부패해가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 하나님을 대신 희생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말씀드렸고, 그 사실을 오랜 세월을 두고 선지자들을 선발하여 예언하게 하셨으며, 때가 되자 아들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마치 뱀에 물린 사람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쳐다보면 산 것처럼, 죄로 망하는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말로다 할 수 없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짊어지신 십자가는 인류에게 주어진 복음의 핵심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성도들의 찬송의 제목이고, 우리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이고,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버나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라고 울면서 십자가 찬송시를 썼습니다. “십자가와 나” 십자가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성례주일을 통해서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 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십자가가 왜 필요했을까요?
인류는 하나님과 불화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원수가 되자 세상은 온통 원수 맺는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불화와 원수 됨의 역사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부터 세상에는 화평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고 부부와 멀어졌고 형제와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고, 결국 자기 자신과도 원수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가인은 정신이 나가서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서 사람들을 미워하고 싸우다 죽이는 것,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떠났고 사마리아인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했습니다. 바벨론도 앗수르도 애굽도 유대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서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화목과 화평대신에 떠남과 불화와 원수 삼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떠남과 불화와 저주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자기들의 미움과 원수 됨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정치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미워하지만, 정말 이념 때문이라면 같은 당 안에서는 왜 서로 미워하겠습니까? 지방이 달라서 서로 싫어한다면 같은 지방 사람들끼리는 왜 싫어합니까? 내 가족이 아니고 남이라고 멀리한다지만, 그렇다면 왜 부부끼리는 왜 등 돌리고 살아야 하고, 왜 부모와 자식이 갈등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떠난 것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 민족과 국가 간의 불화와 갈등뿐 아니라 부부간의 불화와 갈등 부모와 자식 간의 불화와 갈등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와 갈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불화와 이혼이 흔해빠지고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불행한 인류의 역사입니다.
누가 부인할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다른 이유를 댈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아닌 것들, 돈과 우상과 자기를 섬긴 결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화목과 화평의 다리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원수 된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자신과 화목 시키고, 인간들이 서로 화목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갈라져서 원수 된 인간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라. 돌아오라"고 애타게 부르시기도 했고,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으라고 초청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고, 화목도 화평도 평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마지막 방법이 십자가로 화평의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칠월칠석 날 까치들이 오작교를 놓아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한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라는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올수 있게 만드셨고, 사람들끼리도 서로 만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히10: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면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라고 하시어, 예수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서로 원수가 되어 망하는 인간들을 화평과 평안의 자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십자가가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되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사실 아담 이후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신다는 증거로 구약시대에 형벌 받아 죽은 죄인을 대신하여 짐승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다가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제물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하실 그리스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되어 죽으신 후에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십자가 라는 다리를 밟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도 서로 만날 수가 없었고 화목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십자가라는 다리를 밟고서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죽이는 전쟁터에서도 빨간 십자가 깃발을 단 적십자사는 상대방 부상병을 치료해줍니다.
십자가는 확실히 화목의 다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과도 만나서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점입니다. 그리스도가 짊어지신 십자가는 화목과 화평의 다리입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이 말씀들은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피로 서로 화목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화평이 이루어졌고, 자기 자신과도 화평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십자가는 수직으로 선 막대기와 수평으로 선 막대기가 만나서 되는데, 수직의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 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수평의 나무는 인간과 인간을 화목 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그 결과 밉고 저주스럽던 자신과도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인종의 차별이나 갈등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그리고 흑인까지도 함께 있었고, 노예도 귀족도 가난한자도 부자도 모두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들 모두는 출신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한 가족이고 한 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만드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어머니 같은 교회의 보호를 받는 회복된 가정의 자녀들입니다.
셋째,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에 버림과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우리의 화목과 평화가 될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본래 화목의 상징이기 보다는 원수 됨의 상징이었고, 화평의 상징이기 보다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사회에서 영영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사형시키는 도구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십자가는 끊어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신21:23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 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버림의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은 시22:1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상황을 미리 보고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마27:47에 보면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시22편의 같은 구절에서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이같이 멀리함의 상징이었고, 또한 멸시와 조소의 상징이었습니다. 시22편6절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버림받음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존귀하신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인간이 받아야할 멸시와 조소와 끊어짐과 버림과 저주를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그분 덕분에 화목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갈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며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밝히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끊어지심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근거가 되었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저주가 우리의 화평이 되었습니다. 위대하신 그분이 우리들 대신 버림을 받으시므로 내가 사랑을 받게 되었고, 고마우신 주님이 대신 저주를 받으므로 내가 하나님과 부자관계의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저주와 버림과 슬픔을 당하셔야할 때가 가까워 졌다는 것을 아시고 마지막으로 제자와 저녁을 잡수는 자리에서 큰 떡 하나를 떼어 조금씩 나누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내 몸이 이 떡처럼 떼어지고 찢어져서 죽게 될 것인데, 바로 너희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고, 또 떡을 주신 후에 포도주를 부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 곧 내 희생이 너희의 구원이 될 것을 보증하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 하시면서, 앞으로 너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고, 성찬식을 마치신 다음에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를 지시려고 밤중에 감람산으로 나가셨고, 다음 날 아침이 밝기 전에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으신 그 사실,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다시 기억하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성찬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모든 사람과도 원수 맺으며 살다가 저주의 죽음을 죽고 말 인간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나대신 몸과 영혼이 파손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고, 거기서 찢기신 주님의 몸을 만지고 먹고 마시며,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원수 됨과 우울증과 절망에서 치료를 받아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저주받을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이웃과 멀어졌던 사람이 이웃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자신을 저주하며 절망하던 사람이 자신과 화목하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지금 자신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살펴보십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지 않습니까?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자간에, 성도들 간에, 서로 멀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비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께 구원을 얻고 이웃과 화평을 이루고 자신을 긍정하는 소망의 삶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화해
엡 2:11-18 / 김태복 목사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화해를 이루고 또한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또 화해된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게 됐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과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본래 이방인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이방인들을 다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무할례당이라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는 출생 후 8일 만에 할례들 받았습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의 양피를 끊는 예식인데 이 예식은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언약의 표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선민된 표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무할례당이라고 부르면서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쓴 탈무드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같은 모양으로 지은 이유는 유대 사람들이 장차 이방 사람들을 종으로 부려먹으려는데 그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요, 또한 이방 사람들을 많이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이 지옥 불쏘시게 감으로 이방 사람들을 태우시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한심한 생각입니다.
(2)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떠나 있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말이요, 그리스도의 약속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3)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을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 등 세 가지 명칭으로 부르는데 구약에 보면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엄청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누릴 그런 하나님의 축복에서 이방인들은 제외되었다는 뜻입니다.
(4)이방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의 소망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나 천국의 소망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소망을 잃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암에 걸린 사람이라도 살 수 있다는 소망만 있으면 얼굴에 생기가 납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은 사람들을 보면 눈동자 속이 무덤 속 같습니다. 파리의 한 교도소에는 들어가는 큰 철문위에 이런 글씨가 새겨 있답니다.
“이리로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소망을 버리라.” 그 교도소는 사형수가 들어가는 곳으로,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옥에 가면 안 됩니까?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한 고통만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유명한 작품, 신곡(神曲)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 큰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그렇습니다.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일체의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그처럼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5)이방인들은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온갖 잡신들은 많이 섬겼으나 참 하나님은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영적 이방인 되었을 때는 구원의 은혜도, 축복의 약속도, 소망도, 하나님도 없이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육신이 죽은 후에는 영원히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3절에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가깝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했던 모든 축복의 약속과 특권들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서로 가까워 질 수 있는 조건은 지연과 국적이 같을 때, 언어가 같을 때, 피부 색깔과 생긴 모양이 같을 때, 생활문화권이 같을 때, 혈연이 같을 때인데 그 중에 특히, 피가 같을 때 제일 가까워집니다.
어렸을 때 헤어졌던 어떤 자매는 방송을 통해서 만난 후에 처음에는 서먹하더니, 과학연구소에서 DNA 검사로 같은 피로 확정되고 나니까, 오랫동안 붙들고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세계에 산재해 있는 모든 사람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서 가까워 질 수 있는 사건은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를 믿음으로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철폐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순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을 초월하여 다 하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육의 혈연이 가까운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신령한 혈연도 가까워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 이방인들로는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이라고 천대를 받아보지 않은 우리 입장에서는 그 감격을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 말씀 드린 대로, 유교 문화권에서 쌍놈이나 백정 취급 받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 함을 얻은 감격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과거 이조 시대에는 쌍놈이나 천인, 또는 첩의 자식들은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과거도 못 보는 등, 출세의 문이 막히어 있었습니다. 또한 유교문화권에서는 여성들도 거의 자유 함이 없었습니다. 이조시대에서는 여성들에게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이라는 족쇄로 채웠습니다.
그러면 삼종지도란 무엇입니까? “친가에 있을 때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서 감히 스스로의 뜻대로 이루어서는 안 된다.”라는 법도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들에게 무조건 남자에게 복종만 강요한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남자는 유교적 도덕관에 의하여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는데 그 기준을 칠거지악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7가지 사유가 있을 때 여자를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①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去) ②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去) ③행실이 음탕한 것(淫行去) ④질투가 심한 것(嫉妬去) ⑤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去) ⑥말이 많은 것(口舌去) ⑦도둑질하는 것(竊盜去) 등입니다. 현대 여성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법도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남성위주의 법을 비웃기나 하듯이 현대 여성들이 ‘신 칠거지악’을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을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사유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5가지만 소개하는데, 다만 우수개 소리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①명절 때 시부모는 30만원, 친정부모는 10만원 줄 때 ②딸을 낳았는데 남편이 아들 타령할 때 ③섹시한 아내의 눈빛을 외면할 때 ④아내가 직장동료와 회식하는 걸 알고도 자꾸 전화할 때 ⑤의처증, 아내구타, 알코올 중독 등에 걸렸을 때는 남편을 버려도 좋다는 식입니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은 정도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남편들이 아내의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여성들이 국무총리를 할 뿐 아니라 대통령도 꿈꾸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대 받던 여성들의 지위가 이렇게 좋아진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남자나 여자, 주인이나 노예,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벽이 무너지고 평등하게 되었습니다.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랍사회는 아직도 여성들이 형편없이 짓밟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여성들은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되시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참으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 사람이 찾아가서 조용히 침묵한 채 곁에 앉아 있다 옵니다. 그러면 병이 났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어느 가정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같이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어느 마을이 문제가 있다고 하면 언덕위에 올라가서 그 마을을 바라보고 며칠이고 앉아 있다 옵니다. 그러면 그 마을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소문이 각지에 퍼지고 영성을 배우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가르침이 없고 사람들과 함께 노동할 뿐입니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 사람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시다.” “선생님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다.” “성경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다.” “방황하는 내 아이들을 어떻게 잘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다.” 사람들이 무엇을 묻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가 대답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모든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높이고 그만 전하고 그만 자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화평을 이루었습니다.
14-15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화평을 이루셨습니까?
(1)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오신 후에는 예수 안에 들어 온 유대인이나 이방인 사이에 담을 쌓을 필요성이 없게 됐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과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져 버리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담이 필요가 없으나 있으면 다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해야 됩니다.
(2)원수 된 율법을 페하셨습니다.
15절에 보면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했습니다. ‘원수’는 율법을 가리키고, ‘의문’은 계명의 성격인 명령, 교리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모세의 율법 전체를 말하며 ‘계명’은 율법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의 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원수로 표현했습니까?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율법은 축복과 저주의 선언으로 되었습니다.
이 율법을 준수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의 선언이 되는 동시에 율법을 알지 못하고 사는 이방인에게는 저주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원수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율법이란 것이 있어서 화평할 수 없는 원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의 피를 흘려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여 율법을 온전히 이룸으로 구약의 율법이 필요 없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새 법이 올 때는 구법은 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화평을 이루어 살게 됐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화평의 사람이 됩니다. 마치 철물공장에서 온갖 고철들을 용광로에 넣으면 하나의 철물이 되는 것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 주인이나 노예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라는 용광로에 들어가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왜 적지 않은 교회들이 서로 다투고 싸움합니까? 완전한 피조물들이 못 됨으로 아직도 옛사람의 쓴 뿌리들이 나타나 다투고, 싸우고,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못 박고 녹아지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더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원수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고 남의 허물을 짐을 대신 질 수 있는 화평의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그마한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요, 자매끼리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불화하면, 나 하나 때문에 교회가 시험에 들고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것입니다. 클레이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습니다. “몇 년 전 남부지방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었습니다. 그 때 나는 나의 온 힘을 쏟아 부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8일 간의 부흥회를 마쳤지만, 그 교회가 부흥회를 통해 받은 영향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나 허탈했습니다. 왜 부흥회가 실패했는지 몰라서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실패의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중추적인 두 가정이 서로 불화하고 있었는데, 담임목사로서도 아무리 화해시키려고 해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가정이 여러 해 동안 함께 교회에 출석하고는 있지만 말 한 번 나누는 법이 없었답니다. 그러므로 부흥회도 실패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고난을 받았다면 우리 사이에 화해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성도 간에 풀지 못한 감정이 있습니까? 또한 집안 식구들이나 친척 간에 불화한 분들이 있습니까? 이번 추석 연휴기간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무거운 마음의 십자가 지시고 용서의 손길을 내미심으로 화해하는 시간을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16-17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로써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첫째 아담이 범죄 함으로 죄가 들어오자, 평화의 동산 에덴은 파괴되고 깨어집니다.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깨집니다.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어요. (2)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집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처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시작이 됩니다. 죄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기와 증오, 갈등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 지배자와 피지배자 끊임없는 투쟁이 계속되고 역사를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우리가 이룰 수 있습니까? 유엔을 중심으로 온 나라 지도자들이 평화회담을 자주 개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평화회담이 약 9,000번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오고 난 다음에 2,000년 동안에 크고 작은 평화회담이 거의 10,000번이나 열렸다고 합니다.
도합 20,000번의 평화회담에도 벌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인류는 아직도 진정한 평화는커녕 얼마나 많은 분쟁과 전쟁으로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진정한 평화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담으로 시작된 불화를 해결하고자 둘째 아담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인간과 인간과의 화평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성령이 오셔서 전도자들을 통하여 ‘먼데 있는 너희에게’ 이것은 이방인들을 가르치며 ‘가까운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면 이들에게 전하여 평안을 가지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I7절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3중적 평화를 가지는 의미가 있습니다. (1)인간과 인간과의 평화 (2)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 (3)십자가의 복음을 전달 받은 자의 마음의 평안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3중적 평화를 가지고 사는 참 행복 된 존재입니다. 왜 행복합니까? 십자가 앞에 하나님과 우리와 화목을 맺었으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면하고 두려움 없이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십자가 앞에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서 인간과 인간들이 화평을 이루었으니 해 받을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더 나가서는 18절에 보면 또 한 가지 행복을 말해 줍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로 말미암아’라 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말함이요, ‘우리 둘이’란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말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십자가를 붙드는 모든 성도들은 누구든지 한 성령 안에서 새로워져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서 예배드릴 때 너무나 감격했답니다. 왜냐하면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 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피부 색깔과 문화, 계급을 초월하여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하고 손에 손을 잡고 교제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름다운 화원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모든 인종들이 함께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과거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복이요, 영광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복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의 피를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나가면 언제라도 만나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소원도 들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은혜와 모든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에베소서 강해 초두에도 말씀 드린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써 하늘과 땅을 연결 화합시키는 중보의 역할을 하심으로 통일되게 하는 뜻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고, 만물의 중심이며, 우주의 중심이며, 영계와 물질계, 하늘과 땅, 천국과 지상세계의 중심이 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만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해결, 자녀 교육 문제, 건강 문제, 심지어 사업문제도 전부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스탠리 탐이라는 사람은 모든 식구와 친구들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네 사람이나 망한 플라스틱회사를 인수해서 5번 타자로 사업을 경영했으나 역시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워서 엎드려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해 봐라. 이번에는 주님을 사장으로 모시고 해 봐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변호사를 찾아가서 법적으로 예수님께 51%의 주(株)를 드리기로 계약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므로 거의 바닥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투자할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나 사사건건 사장되시는 주님께 물어 경영한 결과, 지금은 매년 순 이익이 200만 불(우리나라 돈으로 약20억 원)이 된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왜 가정이나 교회가 문제가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가정일이나 교회 일이나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운영함으로 하나님의 많은 은혜와 복을 받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회의 통일
엡 2:11-18 / 박덕기 목사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은 1:10의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대한 목표입니다.
이 세상은 온갖 분쟁과 쟁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의 분쟁이 그칠 사이가 없고, 그래서 유사 이래 전쟁이 없는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분쟁은 국가와 민족간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간의 갈등, 계층간의 갈등이 아주 심각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온통 분열과 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 안에도 그러한 일이 있습니다. 죄가 가장 비참하고 가장 파괴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죄는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대감정을 유발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분열들과 분쟁들은 모두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의 우리의 신분과 상태에 대하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요’ ‘죄악 된 세상 풍속을 좇아 살던 자들’ ‘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의 종노릇 하던 자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11절 이하에서도 예수 믿기 전의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를 깨우쳐 줍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옛 시대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그룹 사이의 화목은 거의 불가능 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정말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해했습니다. 유대인은 그 차이점을 하나의 장벽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했습니다. 자랑과 이기주의! 궁극적으로 그것이 모든 분쟁의 원인이요, 모든 장벽과 장애물의 근본 원인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맙니다. 다른 사람의 견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선입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뿐이고,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눈이 멀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태도였습니다. 유대인은 단순히 자기들이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유대인 6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살육한 것도, 그 원인은 민족주의의 마찰에 의해 생겨난 비극입니다. 즉 아리안주의와 유대이즘이 서로의 우위를 자랑한 결과입니다. 일본의 한국 침략도 민족우월주의에서 비롯된 만행이었습니다. 일본 민족은 1등 민족이고, 조선은 미개하다고 생각하여 개화를 표방하고, 한국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월한 민족성과 문화를 전수한다는 미명하에, 우리의 말과 조상 대대로 전해온 성과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고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할 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해동포주의자여야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든 에베소 교인들처럼,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고 지옥불의 땔감으로 생각할 만큼, 미천한 이방인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본문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 ‘약속의 언약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셨던 소망’ ‘그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등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있던 특별한 조건이었습니다. 모든 다른 나라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은, 장차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한 일들이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자기의 위치가 어떠하였던가를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결코 맛볼 수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들이 죄 가운데서 어떠한 존재이었던가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든지, 그리스도를 떠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보다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모스 3:2 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매우 특별한 인격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범주 밖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2)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계시를 주셨고,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그것들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 모든 하나님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들이었습니다.
이 같은 일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도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들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그들은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 해당되는 것인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알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외인들이요 마치 다른 나라로부터 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한낱 황당무계한 소리로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 모든 약속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소망도 없고’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참으로 가장 절망적인 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망도 없고’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소망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떠난 모든 종교들은 근본적으로 비관적입니다. 그들은 참다운 소망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육체와 몸이라는 것입니다. 힌두교나 불교 또는 다른 모든 종교들은 철저하게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과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인간 자신도 더 좋아질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늙고 후패되어 갑니다. 죽음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생은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저 세상에서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순례의 마지막 그가 도달하는 지점은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무덤에서 일어날 소망이 없이 어둠 가운데 죽어갑니다.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하나님도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오는 모든 축복과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실 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는 것과, 하나님이 없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행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때, 그가 말할 것은 한 가지 뿐일 것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였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으며, 하나님께서는 화염검과 그룹들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이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문이 열려지게 되었고, 인간은 타락과 죄와 수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메시지와 신앙의 핵심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신의 선행과 공로나 도덕성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복음을 부정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있어야만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는 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흠 없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보배로운 피를 흘려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신 주님은 그래서 화평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오,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고 찬송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화해케 하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사람들 사이에 있는 적대감을 어떻게 없애버리십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이에 있는 중간에 있는 담을 허셨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함께 들어오게 했습니까? 대답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담을 허셨다는 데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떠나서는, 어떠한 화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지역이나 계층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민족이라든지, 출생 지역 등은 항상 분쟁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있었던 일을 보십시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대” 그토록 아름다웠던 초대교회 안에서 헬라인들과 히브리인들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러할 때 화평은 사라지고 불화가 싹트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역시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하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누가 가장 훌륭한 설교자냐? 누가 가장 웅변적인 사람인가? 누가 고린도 교회에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앞에 먼저 사람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옛것에 속한 것이고, 육신적인 것이고, 전적으로 불신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16-17절에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요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 최고의 욕구는,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죄에 빠진 인간은 안식이 없고 곤고하고 불행합니다. 사 57:20에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과 설명이 있습니다. 어째서 바다는 언제나 안정치 못하고 요동하는가? 어째서 늘 파도가 있으며 늘 출렁거리는가?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대답하기를, 바다는 두 반대되는 세력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달이 있으며, 그 달이 부분적으로 바다의 움직임과 동작을 조종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 지구의 중심부에 거대한 끄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달의 끄는 힘과 영향력이 작용하고, 한편에서는 지구의 중심에서 엄청난 힘의 영향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마음이 요동하는 바다와 같아서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바다의 상태에 대한 설명과 정확히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어떠한 불화도 불안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서로 교통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불행이 없었습니다. 문제도 없었습니다. 걱정도 없었습니다. 고통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히 평안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다른 세력, 또 다른 힘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의 세력, 악의 세력, 지옥의 세력이 거기에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안식이 없고, 고통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마치 바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지성적이고, 높은 도덕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자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안식이 없고 불안합니다. 자기들이 서있는 위치를 모르고, 자기들의 죄를 용서받는 길도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지 못하고, 내세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 결과 참된 만족을 모르고, 안식도, 쉼도, 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료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불화, 국가와 민족, 지역과 계층간의 분쟁,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 그로인해서 오는 모든 불안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선한 양심이나 친절이나 우정이나 형제애에 호소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서게 될 때에 만이, 우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무가치함과 곤고함과 비참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랑할 것이 없게 되고, 과장했던 모든 것, 의뢰하였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게 됩니다. 형편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없이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 연합하고 하나 될 수 있는 유일한 초석입니다. 어떤 조직이나 인위적인 수단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의 겸손, 그리스도께서 지배하고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시는 새 사람의 겸손이, 바로 교회의 통일과 연합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한없는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인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통일이 되는 뜻이 이루어져, 우리들 사이에 막힌 모든 담이 다 허물어지고, 온전히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화해
엡 2:11-18 / 이종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 ‘샬롬’입니다. 오늘 14절 말씀에서 ‘화평’으로 번역한 단어의 히브리식 의미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한글 성경에서 평화, 화평, 평안, 평강으로 번역됩니다. 다양한 번역만큼 샬롬의 뜻도 다의적입니다. 전쟁 없는 평화가 샬롬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도 샬롬이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또한 육신의 샬롬이고,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의 상태가 곧 정신적 샬롬이고 이것을 평강이나 평안으로 번역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샬롬이라는 인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만큼 힘들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사는 “진지 자셨습니까?” 였습니다. 그 만큼 먹고 사는 게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남쪽은 애굽을 중심한 나일 문명이, 북쪽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충돌하는 지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애굽에 붙을까 바벨론에 붙을까가 이들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기에 이스라엘이 그리는 이상 세계는 소박합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편안히 거하며 자기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왕상5:25, 미4:4).
1. 평화! 이 시대 최고의 가치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반도적 위치 때문에 총 930여 회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거의 1-2년에 한번 꼴로 크고 작은 전쟁을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6.25 민족화해 주일’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어언 55년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공식,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남북한 군인들, UN군과 중공군 그리고 민간인 희생자(사망, 부상, 실종)가 약 470만에 이릅니다.
전쟁의 상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 55년,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산 가족의 수가 1천만에 달하고 그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저는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그 잔인함에 화가 치밀어서 입니다. 잠깐 만나게 하는게 무어가 그리 어렵습니까? 이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 한 맺힌 노인네들의 소박한 소망마저 철저히 외면해야 한단 말입니까?
갈등하고 분열하는 모습은 단지 휴전선을 경계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국사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무슨 갈등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영호남의 지역 갈등, 노동자와 사용자의 노사 갈등, 젊은 세대와 어른 세대의 세대 갈등,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의 정치적 갈등, 이제는 지방과 수도권, 강남과 비강남의 갈등으로 정말 불안하고 불편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신문을 보기가 두렵습니다. 아예 정치면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은 갈등의 조정자가 아니라 갈등을 더 증폭시킵니다. 쓰레기장 하나만 움직이는데도 지역간에 난리가 납니다. 가장 고상한 것과 삶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소위 고등 종교간의 갈등은 또 어떻습니까? 한중일 동북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족간의 갈등은 또 어떤 무서운 결과를 빚어낼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조금도 양보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나 있고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가치는 평화입니다. 어떤 신념이나 주장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이 평화입니다. 6,70년대의 주요가치가 ‘경제성장’이고 7,80년대가 ‘민주화’였다면 2천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절대가치는 ‘평화’입니다. 평화가 정의요, 어떤 명분이나 정당성이 있다할지라도 분열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라는 말은 영어로 ‘피스메이커’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 사회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는 민족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평화를 이루는 것이 현시대 교회의 최대 사명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자가 아니라 갈등을 오히려 야기하고 증폭시키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명백히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갈등의 축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양쪽 주장에 다 타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인들 내부에서도 정치성향에 따라 양분되기 때문에 교회가 한쪽 편만 지지하거나 손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들을 화해시키는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평화입니다. 세대간, 지역간, 이념 간 골을 메우고 그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2. 평화의 사람, 예수
1) 우리 주님은 평화를 만드는 자로 오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다주신 분이십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화해할 수 없는 원수 관계였습니다. 바로 죄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 관계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던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까지 인류는 하나님 앞에 가면 무서워 벌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였고, 그 분의 심판 앞에 두려워하던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우리 눈에는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도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2) 주님은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오늘날의 남북간의 갈등이나 우리 민족과 일본과의 갈등보다 더 심한 갈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죄가운데 있다하여 식사마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 죽어가도 못본 척합니다. 오히려 율법 없이 죄 짓고 사느니 죽는 게 났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로 율법을 철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15절, 16절 말씀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는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민족의 경계, 가족의 경계, 빈부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며 한 새 사람입니다.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 콜라가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는 자들의 몸속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사랑해야 될 민족은 있지만 국경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입니다.
3.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여러 성품 중 우리가 닮아야 할 최고의 성품은 평화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셨듯이 이제 우리도 또한 교회와 사회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 무엇보다 교회 성도들 간에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영광스러운 곳이지만 여전히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갈등과 허물도 많습니다. 대부분 말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말, 격려의 말 한마디는 얼마나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죄의 말이나 남의 흉을 들추어내는 말은 송곳보다 예리하게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사실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이 말이 많으면 “설교하지마!” 하고 부정적인 어투로 말하겠습니까?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정말 말을 잘해야 합니다. 이 말이 진실인가, 이 말이 꼭 필요한 말인가, 이 말이 친절한 말인가, 이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인가, 곰곰히 생각한 연후에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상처를 주는 말이라면 절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황희 정승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 길을 가다가 잠깐 쉬는데 들판에서 한 농부가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황희는 농부에게 소 두 마리 가운데 어느 소의 힘이 더 강한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쟁기질을 하던 농부가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다 대고 "이쪽 소가 훨씬 더 힘이 셉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황희가 "그곳에서 직접 말을 하지 왜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조용히 말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농부는 "짐승의 마음도 사람과 똑같습니다. 이 소가 더 힘세고 저 소가 힘이 없다고 하면 힘이 약한 소가 듣고 서운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농부에게서 큰 감동을 받은 황희는 정승(政丞)에 오른 뒤에도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단점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화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평화의 관계를 이루는 것은 예배보다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가끔 한 교회가 분열되어 우층가 아래층 또는 안과 밖에서 서로 따로따로 예배를 드리는 경우를 봅니다. 그렇게 불화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차라리 양보할지언정 화목하는 것이 낫습니다.
2)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평화의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평화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갈등이 생기고 불만이 생깁니다.
①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본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하고 소망 없던 사람이었는지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11,12절에서 그들의 과거를 회상시킵니다. “너희는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무할례당이었다”,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너희는 약속의 언약을 받지 못한 외인들이요, 소망없던 자들이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과거를 들추는 이유는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생각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②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내 맨눈으로 보면 정죄하거나 이용하려는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공동체를 이루기 어려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배우거나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하니 판단하게 되고 그것이 공동체에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상대방을 본다는 것은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용서하셨고 의롭게 받아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옳다 인정하셨으니 우리는 정죄할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한 사람을 우리가 실족케 할 수 없습니다.
③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모든 심판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드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하려 하니 힘든 것입니다. 심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셨다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에는 실패로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를 살리시고 높이셨습니다. 악인의 형통과 잘나가는 것을 부러워 하지 마십시오. 바람앞에 날리는 겨처럼 저들이 주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가 승리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4. 평화의 공동체 만들기
1)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린 것처럼 취급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르다’는 다양성의 문제라면 ‘틀리다’는 진리의 문제입니다. 오른 손과 왼손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마치 오른 손잡이만 옳고 왼손은 틀리고 비정상으로 생각합니다. 통계적으로 10-20%가 왼손잡이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왼손잡이는 4%에 불과합니다. 외국은 15%가 왼손잡이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이나 빌게이츠, 아인슈타인이 모두 왼손잡이였습니다.
요즘 진보와 보수 이념 갈등을 보면서 느끼는 생각이 그렇습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틀렸다고 하니 대화가 되지 않고 갈등만 양산합니다. 처칠은 “젊어서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나이 들어서도 보수주의자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성격과 나이 환경에 따라 정치적 성향이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진보적으로 사고하고, 장년층이 보수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젊은 열정과 노년의 지혜가 합하여 사회는 발전하고, 모자란 부분을 서로 보충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또한 평화는 희생이 없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16절 말씀 보십시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만이 벽을 허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이 민족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2) 자기 십자가라고 할 때 어떤 거창한 것보다 단순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들과 갈등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 기준과 식으로 모든 문제를 판단합니다. 한국사회의 여러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발생합니다. 그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단순히 자기 이익을 좇아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이익이라는 것은 집값이 올라 갈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의 문제겠지요. 단순히 옛날 하던 방식대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 경험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념이나 경험보다 앞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려면 자기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사람은 자기 것을 먼저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것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형제의 화목을 위한 일이이라면 나의 기득권, 나의 이익을 포기하겠다 그러할 때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나 한국 교회에서는 이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평화는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부터 자기 생각을 비우고, 자기를 희생하는 그곳에평화가 이루어집니다. 내 자신으로부터 또 우리 교회로부터 이런 평화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한국사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과연 하나님의 자녀들이구나 하고 칭찬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평화의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6.25 민족 화해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55년전 이 민족이 큰 아픔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 갈등과 분열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먼저 나 한사람부터 평화의 사람으로 살게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교회되게 하시고, 이를 통해 이 민족 위에 주님의 평화가 온전히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의 삶
엡 2:11-18 / 박조준 목사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살던 삶이 어떠했으며,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경 강해자인 존 R. 스토트(John R. W. Stott)란 분 은「하나님의 새 사회」(God's New Society)라는 그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에베소서를 네 부분으 로 구분하면서 1장 1절∼2장 10절을 새로운 삶 (new life), 2장 11절∼3장 21절을 새로운 사회 ( new society), 4장 1절∼5장 21절을 새로운 표준 (new standard), 그리고 5장 21절∼6장 24절을 새로운 관계 (new relationship)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분류대로 하면 이제부 터 생각하게 되는 말씀은 새로운 사회,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어떠했고 오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어떤 사회가 형성되어지나 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본문 11절을 말씀을 보세요. 그 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 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여기 그때 는 물론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육체로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므로 생각하라 고 한 것은 우리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 사실에 비추어 생각 하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하라 는 말이 처음에 나온 것을 보면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 더욱 감사하게 되고, 한 걸음 더 나아 가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비하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더욱 신중히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신 바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잊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 은 것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이 감격으로 감사해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것은 형편이 과거에는 좋았으나 지금은 나쁘니까 과거에 좋던 일을 생각함으로 더 연약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시달리던 우리가, 세상에 붙들려서 옴 짝할 수 없던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을 때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게 되었으 므로, 과거의 일을 생각하여 현재 내가 누리는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더욱 감격스럽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과거와 같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힘쓰 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17절 이하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 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 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17 ∼21).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기 전에 살던 생활은 생각해 보기만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전율 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고 강조합 니다. 과거의 어둡던 생활과 지금의 밝은 생활을 비교해서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불안 하던 생활과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미움의 생활과 지금의 사 랑의 생활을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과거의 불평과 불만의 생활과 지금 감격과 감사의 생활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종 되었던 생활과 이제 자유인이 된 사실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 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두가 감사와 감격뿐입니다. 제 2차 대전 때 미국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진주만을 생각하라 는 슬로건을 내걸고 싸웠다고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일본 군대가 진주만을 기습하는 바람에 당한 피 해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생각해서 언제나 준비 하고 싸워야 한다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남한의 국민들도 6.25를 통해서 같은 경험을 했습 니다. 아무 준비 없이 지내던 주일 아침에 북한의 괴뢰군이 급습했으므로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게 되어 상당히 많은 희생자가 났고 재산의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6.25를 회상 하라 고 강조하는 것은 그때 당한 울분과 억울함을 생각해야 다시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는 무엇을 생각하라고 합니까?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했습니다. 우 리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유대 인이 아니고 이방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말할 때 이방인에게 없는 것을 몇 가지로 언급했습니다. 첫째로, 이방인에게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방 사람에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할례당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방 사람에게는 할 례가 없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으로, 그 자손에게 세상에 난 지 8일 만에 시행하는, 남자의 양피를 자르는 의식입니다. 창세기 17장 9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 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 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다시 말하면 할례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의 표시요, 특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사람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할례 받지 못한 무할례인을 경멸하였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 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도 아니, 저 할례도 받지 못한 것들이 그런다 고 멸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소위 이 선민의식이 얼마나 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 이라고 말한 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체 에 행한 할례당 이라는 말은 이렇게 이방 사람들을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는 유대 사람들에 대한 반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육체에 할례만 받았으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하는 잘못 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마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육체에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사실을 말하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것이 할례시냐 무할 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 심이라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도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했습니다. 사실 유대 사람들은 육체의 할례를 받았지만 예레미야서 6장 10절에 보면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9장 26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 하였다 고 지적하였습니다(비교. 레 26:41).형식적인 할례, 육체적인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 에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이 육체로 이방인이요… 육체에 행한 할 례당 이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육적으로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사실 할례 받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이방 사람의 첫째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란 말은 그리스도를 떠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관계가 없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약속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를 떠난 생명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수밖에 없고, 생명이신 주가 끊어진 생활은 참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 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환경적인 면에서 볼 때 어두운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억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쩌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래에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고 이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저희의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전진적이고 적극적이고 가능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저희가 기다리는 메 시야 안에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힘찬 전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에 이방 사람들의 역사는 정체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고 라는 잠언 말씀대로 그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 안에서 생각하고 주 안에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도 소 극적이고 퇴보적이고 부정적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생각이 완전히 달라져야 합 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가능성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신 데는 의미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된다, 안 된다. 못한다, 못한다 라고 하면 안되고, 못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능력을 주시면 내가 모든 것 을 할 수 있다 는 신념을 가지고 할 수 있다. 잘 된다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세상은 어디 나 무엇이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장점을 보려고 힘씁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좋은 것 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기쁨과 평화와 감사가 있고 승리가 있 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은 어두운 면만을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봐도 그 사람의 단점만 보려 하고 잘못하는 것만 눈에 띕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불행한 것만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자연히 얼굴이 찌푸려지고, 마음에 평화가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 고, 자연히 원망과 시비와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잘 되는 것보다 안 되는 면만을 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봐도 그렇습니다.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꼭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사고가 있어야 합니 다. 교회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이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보이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요,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늘에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있는 보이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의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바로 잘 되게 하려면 교회의 장점 을 자꾸 살려서 약점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교회의 약점만을 자꾸 들추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럽니다. 믿음 없는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이것도 잘못 되었 고, 저것도 틀렸고, 문제만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 든 문제까지도 합력해서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믿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 고 감사하면서 삽니다. 행복하게 삽니다. 이제 그리스도 밖에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 로 살면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가능을 가진 생각으로 행복하게 감사하며 사시 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이방인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이란 이름 은 야곱 이후에 불리운 이름입니다. 아브라함 이후에는 히브리 사람이라 불렀고, 포로 귀환 후에 는 유대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의 이상은 귀족 정치, 민주주의 정치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상 은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나라 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는데,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구약 사사기 8장에 보면 기드온이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들을 다 물리치고 나서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였습니다. 그때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 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개인,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나라와 국민은 복이 있습니다. 세상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행되는 정치 제도는 완전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통치는 완전합니다. 하나 님은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므 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적으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 나라 안에 들 어오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9장 6∼8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 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리라.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보아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 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지, 혈통이나 육정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 누구입니까? 참 아 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혈통에 의해서입니까? 육정에 의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에 의 해서입니다.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신령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된 것을 믿습 니다. 넷째로, 이방인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하자면 언약 의 백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하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언약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언약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그런데 이와 같이 귀한 언약을 받은 백성에 게는 택함받은 백성으로서의 특권이 있고 영광이 있음과 동시에, 택함을 입은 사람으로서의 의무 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선택받은 자의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 람 중에서 우리를 특별히 택해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여 기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대신 우리가 그리 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로 택함을 받고 권사로 부름받고 목사로 세우심을 입은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사람들인데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성직을 맡는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영광 이요, 특권입니다. 이것은 맡은 자 편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무슨 명예 직분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의무와 책임이 따릅니다. 권찰보다는 집사의 직분이 중합니다. 집사보다는 권사의 직분이 더 무겁습니다. 목사의 책임은 교회의 감독으로서 얼마나 중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이 직분을 잘 감당할 때 큰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13절에 보면 집사의 직분을 잘 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 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 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 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 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 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벧전 5:1∼4).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서는 많이 거두고 적게 준 자에게서는 적게 거두십니다. 다섯 달란트 를 맡긴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거두고, 두 달란트를 맡긴 사람에게서는 두 달란트를 거두셨 습니다. 많이 맡았으면 많이 남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이 두 달란트 맡 은 사람만큼 밖에 일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일, 중요한 일을 맡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맡은 일에 얼마나 충성해서 이를 남기느 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때에 회계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을 위해 마련해 두신 상급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맡기는 맡았는데 남긴 것이 없으면 악하고 게으 른 종을 위해 마련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방인에게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언약이 없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 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뜻이 없는 백성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보아도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나 교인을 보면 다른 데가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에 만족 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꿈이 있습니다. 비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동적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하는 일은 이렇게, 교육하는 일은 이렇게, 봉사하는 일은 이렇게 한다 는 비전을 가지고 있 습니다. 그저 하루, 한 달, 일 년을 그럭저럭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 꿈을 바라보며 지금의 어려 움을 잘 참고 이겨 나갑니다.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비행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이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맑은 하늘이 언제나 펼쳐져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힘차게 올라가는 것 입니다. 그러나 비행장에 짙은 안개가 껴서 착륙할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이륙할 비행장의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비행기가 뜨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그러 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소망이 아 니라 하늘의 소망,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축 복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