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안전교육이 있었다. 비디오에 나오는 동작을 승무원들이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이런 게 호주식인가보다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20분 정도 지나자 다과 서빙이 시작됐다. 승무원이 배급하는 식이었는데 나에게는 머핀을 주었다. 다과를 대충 먹고 나니 벌써 캔버라가 가까운 듯 했다. 국제선에 비하면 그냥 한번 떴다 내리는 분위기였다.
비행기에서 내릴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지만 상하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자 승객 몇 명은 비명을 질렀다. 승무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지? 사고라도 났나?
따지고 보면 비행기 여행만큼 위험한 것도 드물다. <길쭉한 금속통> 하나에 의지해서 까마득한 하늘 위에 떠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기체는 안정을 찾았지만 상황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다. 기장의 긴급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태풍 때문에 캔버라 공항에 착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한동안 캔버라 상공을 맴돌며 착륙을 시도하던 기장은 결국 시드니 회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시드니로????
황당했다. 캔버라가 바로 아래인데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다니? 어떻게 잡아탄 비행기인데 이렇게 허무한 꼴이라니?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하루종일 전전긍긍했는데.. 허나 어찌하랴? 난데없이 길을 막아선 태풍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시드니로 돌아가는 비행기 분위기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얌전했던 승객들은 너도나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다들 캔버라로 가야 할 절박한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짧지만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처지라 동지감 같은 것이 있었다. 사교적인 스타일은 반쯤 일어서서 앞뒤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 역시 옆에 앉은 아줌마와 노신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아공 출신인 아줌마는 절친한 친구 생일파티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고 노신사는 캔버라가 집이라고 했다. 둘 다 캔버라를 자주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재미있는 성격이라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출발지였던 시드니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시드니를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기장은 계속 캔버라 기상변화를 점검하고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답답했다. 차세대 세미나 참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막연히 기다릴 수 없다며 비행기에서 내리겠다는 성질 급한 승객도 있었다. 승무원은 내리는 건 자유지만 일단 내리면 규정상 재탑승은 불가하다고 했다. 이럴 때는 그냥 대세를 따른 것이 상책이다.
한 40~50분 정도 기다렸나? 다시 캔버라를 향해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기상상태가 호전된 듯 했다. 이미 바깥은 깜깜한 밤이었다. 이륙하기 전 아까 봤던 승무원 안전시범을 다시 한번 <복습>해야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즐길 시간에 다시 캔버라를 향해 출발한 것이다. 또 다시 회항하면 정말 큰 일인데..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아직도 태풍의 영향권 안에 있는지 비행기는 정상항로를 우회해서 캔버라 진입을 시도했다. 진입 도중에 다시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하는데..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이 별 일 없이 비행기는 캔버라 공항에 착륙했다. 승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울렸다. 8시 30분 경이라 장장 4시간이 넘는 기나긴 여행 끝에 <캔버라>에 도착한 것이다.
사선을 함께 넘은 동지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마중 나온 대사관 직원의 차를 타고 세미나 장소로 향했다. 호주에서 와서 처음 국내선 여행을 한 것인데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지금도 캔버라 하면 굉장히 먼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