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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흥안씨 찬성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정의사도
순흥초등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사건 전모
------------1944년 순흥초등학교 동맹휴학------------
......일본인 교장에게 참회의 눈물 머금은 항복 받아 ........
항의 및 목격자 김락순 (당시 4학년생)
과거 반세기전 일본제국이 우리 한반도를 약 반세기 가까이 악독한 식민지 수탈정책
으로 우리 한민족이 신음하고 질곡(桎梏)을 겪을때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초등학생들의 항일 독립운동사건을 기술하려니 지금도 분노가 용솟음 칩니다.
돌이켜보면 江山이 여섯번이나 바뀌고도 어제의 일인 듯 너무나도 똑똑히 기억되고,
그러나 또다시는 생각하기조차도 두렵고슬프고 또한 치가떨리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정책아래서 독립군과 의병들은 국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일제와
투쟁하였지만,초등학생들인 소년의 가슴으로는 끊어오르는 항일일념으로 당시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선생에게서는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6학년 전학년이 동맹휴학을 거행하였고 그 거사가 있은지 몇 개월이 지난후 4학년인
김락순(金洛淳: 이 기록 작성자,당시 창씨개명 金本敏夫)은 담임선생인 중신의웅
(中神義雄)일본인 교장에게 항의하여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니 앞으로는 학생들과
조선인들을 후하게 잘 대하고 각성하여 인간적인 양심으로 교육하여
교장선생님과 일본인들에게 후환이없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항의하여 처음에는 혼줄이 났으나 결국은 교장으로부터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은 사건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지정책 교육첨병인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배척과
또한 대오 각성하여 인간적 양심으로 돌아가 교육하라고 하였으나 실은 아래
사항등이 복합누적된울분이 도화선이 되어 폭발한 배일질타(排日叱打)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즉 그 원인은 이루 기술할 수 없으나 간추려보면 일본은
대한제국을 불법으로 강점한 후,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란 허울아래 조선의 말과 글을 빼앗고
학교나 가정에서도 일본어만 사용케하고, 어디서나 서로 감시케하여 조선말을 하면
밀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으며, 강제로 창씨개명(創氏改名)케하여 이름마저 빼앗고,
조상숭배제례도 못하게하였으며 전래의 미풍양속인 명절과 민속등을 폐지시키고,
겉으로는 조선인도 황국신민이라
하면서도 일본인과 달리 조선인은 필화로 다할 수 없는 차별로 짐승처럼 취급하고,
저들에게 거슬리는 조선의 각종서적류나 가문전래의 유물들을 모조리 빼앗아가고
농.축.수.임산물 등 모든 산물은 공출, 징발 등으로 수탈해가고 정작 조선인들은
비료로 쓰는 대두박(大豆粕)찌꺼기와 술막지, 초근목피(草根木皮)등으로 연명케하고
어린학생에게도 공부는 뒷전이고 근로봉사라는 미명아래 온갖 폐품수집,농사일,
심지어 쇠똥,개똥,말똥까지 주워오게 하면서 온갖 노역을 다 시키고, 학생 상호간이나
민간인들에게서 저들이 말하는 불온신민(不穩臣民)을 색출케하고, 매일 황국신민칙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고,모든물품의 배급때(당시는생필품의거의가 배급품이었음)
나 부자유스런 여행이지만 꼭 황국신민칙어와 황국신민서사를 일본어로 외워야
배급이나 차표를 사게하고, 지원병이란 미명아래 군대에 지원시키다가 종래에는
징병제도를 실시하여 2차대전의 총알받이로 내몰고, 초등학생에게도 혹독한
군사훈련을 시키고,징병대상자가 아닌 과령(過令)자는 징용으로 끌고 가 전선이나
군수공장에서 인간이하로 학대하며 노예처럼 부려먹고, 심지어는 어린처녀나
젊은 부녀자까지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처녀공출, 소위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로
전선으로 끌고 가는 등, 헤아릴 수 없는 극악무도한 모든방법을 동원하여 일제말기에
단말마적(斷末魔的) 폭악등으로 적체된 민족감정이 어린 학생들의 가슴에도 서럽고
저주가 맺히고 얽혀 민족 말살정책의 첨병으로 배치됐던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예비역 출신의 훈련교사를 축출하려는 육학년생 전원의 동맹휴학사건과 4학년생 일인
단독으로 교장에게 항의한 사건입니다.
이 동맹휴학건(육학년생 전원)과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은건
(4학년생 단독)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강토를 강점한 36년간에 있어서 유일무이
(唯一無二)하게있은 초등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이라고 사료되는데 광복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통탄스러우며 특히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분규의 이 때임에 더욱 한이 맺히는 바입니다.
광주제일고보(중학)학생사건은 그 동기가 통학열차 안에서 조선인 학생 대 일본
학생간의 개인 싸움이 발단이 되어 민족감정으로 비화하여 소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건으로 부각되고있는데,
순흥초등학교 학생들의 항일 운동사건은 그 목적을 달리한 일제식민정책에 항거한
초등학생들의 위대한 독립운동사건이라 아니 할 수 없는데, 그 사실이 아직도 빛을
못보고 있음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항일독립운동사에 기록되어
대한민국 국민들과 후학들에게 "본"(本)이 되어 민족정기를 되찾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순흥초등학교는 민족의 서기어린
백두대간 중의 령봉인小白山(표고 1439m)竹溪川(낙동강의 상류)변에위치해 있는데
특히 소백산은 그 산세가 수려웅장한 명산일 뿐만 아니라 경북,충복,강원의
삼도(三道)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장등심곡(長燈深谷)하여 당시 삼도의
애국독립운동지사와 선각자들이 이 산에 은둔하면서
하루 속히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 광복독립의 날을 기다리며 인근주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비밀리에 고취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순흥공립국민학교는 그 소재지가 고려의 거유 문성공 안향을 배출한 우리나라
유림의본향이며 소백문화권의 중심지인 고도(古都) 順興府(금성대군의 단종복위거사
실패후 한때 興州府로 개칭)에 위치하여 도덕,문화교육의 발상지인고로 경상북도애서
초등학교로서는 두,세번째의 조기 설립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깊은 학교입니다.
또한 우리나라 서원(書院)의 효시(嚆始)이며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유명한 소수서원
(일명 백운동서원)향교,금성단,고구려와 신라의 유물,유적 등이많이 있는지사(志士)와
선비의 고장으로 어릴 때부터 긍지를 갖고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순흥은 고구려와 신라의 쟁투장으로서 자연 충신열사들이 많이 배출됐으며
따라서 애국위민의 위인지사(偉人志士)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고 특히 세조조(世祖朝)
당시순흥부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세조의 제6제)이 단종 복위를 위하여 순흥부사
이보흠과 거사를 도모하다가 탄로나서 죽음을 당하였으며, 수많은 부민
(府民-주로 순흥안씨) 수천명이 살해당하고 부역중심권(府域中心圈)20여리가
불바다가 되어 살아남은 주민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폐허의 유적이 지금도 많이
산재하여 허무함을 영탄(詠嘆)케 합니다.
지정학적으로 이러한 애환을 품고있는 순흥의 주민들은 출생성장시부터 고사(古事)를
되새기며 부정불의에 항거하는 정의감이 자연히 뇌리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금성단 제실옆에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 압각수(鴨脚樹)가 있는데 금성대군이억울하게
죽은후 잎을 피우지 않고 살아있다가 숙종조에 와서 단(壇)과 제실을 설치한후로부터는
잎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하는 고사가 있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고장입니다.
1.제 1 사건(육학년생 전원 동맹 휴학)
당시 육학생의 부조(父祖) 거의가 소백산록 순흥땅에 사시면서 지정학적인 영향으로
지사형 의가문들이 모여 살면서 배일사상이 강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급장이었던
이석환(고인)을 위시 한 주동급 학생들은 가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제3반장이었던황제천(黃載天)의 가문은 칠백여년 순흥땅에 세거하면서 "전설의 고향"
에도 방영된 바 있는 순흥의 만석꾼 집안의 후손으로서, 부 황락구는 순흥지방의 거유로
소수서원 원장도 지냈으며 금강산, 오대산, 소백산, 석륜사 등에서 거처하시기도
하면서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들과 접촉 교류하여 그 영향을 지대히 받았던 것입니다.
2. 제 2 사건(일본인 교장으로부터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음 件)
4학년생 일인 단독으로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아 낸
김락순(金洛淳)의가문은 전통적으로 무인(武人)출신으로서 11대 조부
휘 김란서(諱 金蘭瑞)가 조선 선조 27년 갑오년(서기 1594년) 만력 22년 정월 25일
무과 급제출신자이고 그 이래 대대로 몇 분의무과 급제출신자를 배출하면서
8대 조부 휘 김의량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사과(司果,)7대 조부 휘 김취휘는
절충장군, 6대 조부 휘 김달삼은 군관, 5대 조부 휘 김경우는 무과급제출신자로 사과,
고조부 휘 김규철은 군관, 증조부 휘 김윤록은 군관으로 대대로 국가에 봉직하시면서
대구에 세거하시다가 고종황제 당시 국운은 쇠퇴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횡행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망국의 징조가 심해짐에 증조부 4형제분이
다 군관이셨는데 그 직을 버리고 후일을 기다리며 한양으로 지내시며 형제들이
사대(대구 광덕 정)를 만들고 말타고 활쏘며 세월을 보내셨고, 조부 휘 김수선께서는
왜정을 반대하여 감록을 보시고 선고가 5세시인 을사년(1905)한일강제합방되던 해에
명승지인 소백산록 풍기 금계동, 삼가동 등에서 은거하시면서 대구에서 독선생을
모셔다가 선고 휘 김성진에게 십여년간 한학을 이수케하여 거의 무불통지 경지까지
한학에 통달하셨으나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하여 망국이 되고 과거의 길도 막힘에
일제하의 신학문을 배척하시고 즉, 시대적인 양지를 버리시고 복고의 음지를 택하시어
경북 영주군 순흥면 배점리 전부동(앞가마골)에
정착 농부로 은거하시면서 소백산중에 숨어있는 독립운동자와 지사들과 교류하셨는데
특히 소백산 초암사 주지셨던 김상호스님(후에조계종 중앙 감찰위원장 역임),
흑석사 창건 스님과 속명 김부처(이름모름, 자 김동환, 현 경북 상주시 화북면
폐오동 거주) 분들과 담론하시는 것을 자주 보았고 여타 다른분들도 많았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서로 비림스럽게 오고 가고 하니 어린 나이에 잘 알 수 없었으나
천도교인지, 대종교인지, 때로는 이상한 차림의 사람들이 집에 오가고 선고께서도
가끔 며칠씩 출타하셨다가 오시고 하셨으나 물적 증거는 남기지 않으셨고 늘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라 말씀 하셨습니다.
1920년대 소백산을 근거로 경북, 충북, 강원도에 신출귀몰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든
김용재 열사등과도 관계가 있지 않았겠는가 짐작도 가는 바입니다. 또한 일제가
패망하기 1년쯤전에 이미 조만간 일본이 패망할 것을 선고께서 예지하시고 일본이
패망하면 국외에 흩어져있는 제씨 분들을 살아서는 만나지 못할 것이 일본 북해도, 일본
경도, 두만강변 아오지 등에 계시던 제씨분들을 모두 불러들이셨습니다.
이러한 가풍에다가 지리적 환경들과 그에 따른 향토의 역사가 풍부한 고장에서
출생성장하였기에 불의에는 근복적으로 타협치 못하고 정의심성의 어린 가슴에도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이 쌓여 거사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경위 및 과정, 결과
1. 제 1사건(항일동맹휴학 件)
-기록자:황재천
▣경위
당시 식민지 교육방법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례가 있으나 그 중 한 예를 들자면,
학생들 개인들의 사소한 행동에도 약점을 잡아서 마치 저들이 산자수려한 우리강산의
정기와 혈맥을 차단하기 위하여 쇠침(쇠말뚝)을 박았듯이 자라나는 초등학생의
두뇌말살을 위하여 한사람이라도 저들 눈에 거슬리면 전체책임을 물어 교실이나
교정에 전원집합 시켜놓고 목검(실물크기와 같음)으로 머리통을 두들겨 패서 정신을
흐리게 하였으나, 너나 할것없이 전급생의 머리통에 부어로흔 "혹을"을 달고 다니는
형편이었고(여학생도 같음)매일이다시피 그러니 그 "혹"이 사라질 날이 없었습니다.
또한 학교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인데 공부는 뒷전이고 일본제국주의사상 주입과
등교할때 온갖 폐품과 퇴비를 갖고 등교하면 정문에서 신사참배하고 공부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은 학교생활이였는데 가정에서 부조들이나 주위에서 항상
"일본놈들은 모두 나쁜놈들이며 일본은 하루빨리 망해야한다"라는 말이 어린가슴에도
울분이 터져 일어난 사건입니다.
▣과정
순흥초등학교 32회생 일동 86명(남67명,여19명) 전원은 1944년 초가을 어느날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학교 앞산(학교로부터 직선거리 약 350m, 순흥면 동호리 옆산)으로
오전 9시경에 집결하여"일본제국주의 식민지교육의 첨병인 교장 중신의웅과 담임
재전관은 악독한 식민지교육을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오전 11시 경까지
외쳐대니 담인 일본인 교사 재전관이 기를 쓰고 쫓아오기에 오전 11시경 이후에는
더 높고 먼 산 (순흥면 읍내리 사현정 뒷산~속칭 신당골)에서 오후 3시경까지
계속 구호를 외치다가 산회하고 개별행동으로 읍내로 내려가 살펴보니 안동주둔
일본헌병 약 1개분대 (약15명)이 군마를 타고 일본도 차고 소총메고 학교와
경찰주재소(파출소)를 살기등등하게 왔다갔다 하면서 참가한 학생주동자와
그 학부형들을 잡아다가 취조하였습니다.
▣결과
교장 중심의웅과 담임 재전관 양인은 상부로부터 종류를 알 수 없는 징계를
당하였고 학생들에 대해서는 전원퇴학처분이 논의되었으나 주동책임자인 이 석환만
퇴학처분 당하였고 주동급 간부 학생들은 부형들에게 자식 단속을 잘하여 앞으로는
이런 불상사가 없이 일본천황폐하에게 충성을 하라고 시말서를 강제로 작성케 하여
학교와 주재소에 제출케하였고 급우생 전원은 서기 1945년 3월 졸업성적표에 수신과목
(지금의 도덕 소양과목)에서 "병" 또는 "정" (갑을병정중에서)의 판정을 받는 등 보복성
성적을 받았습니다.
특히 황재천(당시명 황재동)은 반장 4명중에서 제3반장으로 있었기에 간부로서 여러번
조사받았으며 또한 부황락구는 순흥지방의 거유였으며 금강산, 오대한, 소백산 등에
거처하시면서 애국 사상가들과 접촉한 경력이 있어서 중점적으로 조사를 받았습니다.
순흥초등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사건 전모 (2)
(4학년생 一人단독으로 일본인 교장으로 부터 눈물의참회(懺悔)와항복(降伏)을
받아낸사건)
▣경위빛 과정, 결과
원인, 동기및 배경 ,지정학적배경,가문의전통적 배경등의 환경에서 출생성장 하였기에
불의에는 그원적으로 타협치 못하고 항거하는 저항의식이 당시 12세의어린 가슴에도
한이 맺혀 1945년 4월 초 어느날 학교 운동장을 파헤쳐서 만든 밭에서 중신의훙 교장과
당시 담임선생과 4학년생 급우들이 아주까리 (피마자)를 심다가 (김락순은 교장의
오른편 임경철 급우는 교장의 왼편) 김락순이 느닷없이 "선생님 이 아주까리를
따기전에 일본은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교장선생님께서는 학생들과 조선인들을 잘 대하여 주고 각성하여 인간적인
양심으로 교육하여 교장선생님과 일본인들에게 후환이 없도록 조심하고 잘못을
뉘우치십시오!" 하고 항의절규를 했더니, 교장선생은 날벼락을 맞은 듯 깜짝 놀라면서
들고 있던 농기구 호미로 김락순을 내리칠 듯 하더니 "너 도대체 어디서 그런 불칙한
말을 들었느냐?" 라면서 호통을 치기에 막상 뒷일을 생각하니 겁이 덜컥나기도 하였으나
기왕 하고 싶은 말을 작심하고 뱉은 바이고 큰 일은 벌어졌으니 큰 벌을 받을 터이고
문제가 확대되면 부형등 배후도 틀림없이 조사를 할 터이니 어떻게 하던지 교장으로부터
승복을 받아내야겠기에 즉흥적기지로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선생님 몇 년 전인
1, 2학년 때까지는 일본이 승승장구하여 남양군도와 만주는 물론 중국내륙까지도
점령한다는 승전보가 날아들었는 데 요즘은 매일이다시피 방공연습이 심하고
근로봉사도 많이 하고 군수풍조달이라하여 학교철봉도 빼가고 순흥유적의 철비도
뽑아가고 집집마다에 있는 녹그릇, 쇠붙이는 다 가져가고 심지어 솔광이 기름까지
짜 보내고 모든 산을 공출로 다 가져가고 우리집 얼룩쟁이 검은 소도 공출로 끌려가면서
뒤돌아보면서 음메~음메~하면서 소짐승도 눈물을 흘리면서 끌려갔어요. 선생님도
말씀하셨지요! 미영군은 강력한 무기와 전투력을 갖고있고 B29등 여러 종류의 비행기가
뜬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일본군들은 전선에서 밀리고 있어 적 항공모함에 1인 특공기로
산화한다고 하셨지요? 이러한 상황인데로 미영격멸하고 일본이 승전한다고 하는 데
제 생각에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일본이 패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저의 마음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교장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집어른들 한테서나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돌려가면서 강력히
항의하면서 주장하였더니 교장선생은 나를 뚫어져라 한참 노려보더니 들고있던
호미 연장을 내동댕이 치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면서 오히려 내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래! 너의 말이 맞을 것이다.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다.
그러면 조선은 해방이 될 것이고 그 해방된 나라에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될 지 모르지만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야겠지." 라면서 다시 내 손을 잡으면서
"그래 너에게 내가 졌다. 아니 어린 너에게 일본인 교장인 내가 항복한다!"라는
교장선생의 말을 들으니 한편 벌을 받아도 큰 벌을 각오했는데 어린 마음에 고맙기도
하고 오히려 교장선생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 그 교장의 탄식하던
모습이 육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의 일인 듯 생생히 기억됩니다.
과연 그 몇 개월 뒤인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연합군에 항복하고 조선은
해방광복이 되었으니 어린 마음에 내 듯이 이루어진 듯 감격하였습니다.
- 목격자 : 남경철(당시 4학년 : 동급생)외 수인
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중화1동 15-6 거주
가야약국 경영 전화 02-435-0519
목격자 남경철은 육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면서 공사석에서
가끔 이 사건을 말하면서 : 그 당시 소백산 속에는 과연 의인들이 있어서 김락순이란
친구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주위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같은 큰 사건을 겁없이 당차게
해내는 것을 옆에서 봤다" 면서 자랑삼아 말한다 합니다.
▣ 후 기
일본인 교장에서 항의하여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은 사건 몇 개월 후 과연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학 조선은 그 지긋지긋하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질곡에서
해방광복이 왔음에 선고께서 깊이깊이 감추어 두어왔던 태극기를 찾아내어 크레용으로
서툴게 여러 장의 태극기를 그려 동네 어귀 포플라나무(미류나무)에 달고 며칠 뒤 읍내로
내려가 "독립만세 군중집회"에서 내 손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는데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육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토통일과
완전독립이 되어있지 않고 더욱 아직 일제잔재를 다 쓸어내지 못하고 분열 조국은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으니 초등학교때의 희망차고 웅대하였던 꿈이 고희가 다 된
지금에 와서도 그 한이 덜 풀리고 있으니 이 또한 우리 민조그이 비극이 아닌가?
항차 지금 일본 중학생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국민의 열화같은 반일감정이 들끓고 있고
또한 서기 1980년대호에 일본역사교과서왜곡파동때에 김락순이 창설한
대구 공업고등학교 재경동문 산악회의 북한산 등반대회에서 많은 등산객이 운집한
자리에서 김락순이 작성한 "일본은 침략근성을 버리고 세계만방에 사죄하고 역사교과서
왜곡 시정하라!"는 규탄 항의문을 낭송한 바 있습니다.
첫댓글 저는 그 당시 태어나질 않아 겪지는 않았지만
친정 엄마께서는 일제 시대여서 일본글을 배워서
나중에 한글을 배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순흥초등학생들의 항일독립운동사건 전모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