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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한 몸을 이루시고 거하실 성전이 됨(4)
엡 2:11-2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설 교 >
그리스도 밖의 삶
엡 2:11-18 / 박조준 목사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그 리스도 밖에 있을 때에는 어떤 삶이 되는가 하는 데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 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생활,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밖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신 말씀 11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라고 했는데, 여기 그때 라는 말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 태를 의미합니다. 육체로 이방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한 말씀은 우리가 지금은 하 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순전히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라 는 말씀이 처음에 나온 것을 보면 이 말씀이 매우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생각 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특권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 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더욱 신중히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지음 받게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전혀 하나님의 은혜로 공로 없이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이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에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죄에 시달리던 우리가, 세상에 붙들려서 옴짝달싹할 수 없던 우리 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을 때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과거의 일을 생각하면 현재 내가 누리는 평안과 기쁨을 더욱 감격스럽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처럼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17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 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 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 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아니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 기 전에 살던 생활은 생각해 보기만 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던 때 의 일을 생각하면 전율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러므로 생각하라 는 말로 과거의 삶,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 어두웠던 삶, 죄의 종노릇하던 때의 삶을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는 불행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행복합니다. 과거는 어둡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는 밝게 삽니다. 과거는 불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 안에서 평안하게 삽니다. 과 거는 원망 속에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감사와 찬송 중에 삽니다. 과거에는 미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며 삽니다. 과거는 의미 없이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의미를 찾으며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보람을 모르고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하루 사 사건건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허전하게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흐뭇하 게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종으로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생각하 면 생각할 수록 감사와 감격뿐입니다. 전에 제 2차 세계대전 때 미국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진주만을 생각하라 는 슬로건을 내걸고 싸웠다고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생각 없이 지내던 때 일본 군대가 갑자기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바람에 미국이 당한 피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전국민 에게 뿐만 아니라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를 생각해서 언제나 준비하 고 싸워야 한다는 뜻에서 진주만을 생각하라 고 한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40여 년 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내던 주일 아침에 북한의 인 민군이 급습하므로 남한은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게 되어 얼마나 많은 피해를 냈었습니까? 그 러므로 우리가 6.25를 생각하라 고 강조하는 것은 그때에 당한 울분과 억울함을 생각해서 다시 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무엇을 생 각하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었음 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문자 적으로 다시 말해서 육신적으로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으로 말해서 이방인에게 없는 것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1. 이방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 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았었습니다. 이것이 이방 사람에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에게는 할례가 없었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그 자손 에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남자 아이가 세상에 난 지 8일만에 그 양피를 자르는 의식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 9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 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 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할례는 하나 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특권이 되었고, 할례받은 사람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할례받지 못한 사람은 선민에서 제외된 것으로 짐승과 같이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었지만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받지 못한 사람 이란 말은 멸시의 대명사로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도전할 때 저 할례받지 못한 것 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골리앗을 멸시하 는 말이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 당시 그를 사도가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자신 을 변호하면서 맨 처음으로 한 말이 할례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주신 말씀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 이란 말을 쓴 데는 의미가 있습 니다. 육체에 행한 할례당 이란 말은 이렇게 이방인들을 할례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유 대 사람들에 대한 반격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육체에 할례만 받았으면 다 된 것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점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마음으로 받는 것이 중 요한 것이지 육체에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령,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사실을 말하면서 아브 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된 사실이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도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육체적 할례는 받았지만 예레 미야서 6장 10절에 보면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9장 26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 고 지적했습니다. 형식적인 할례, 육체적 인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바울이 육체 로 이방인이요 육체에 행한 할례당 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일 뿐만 아 니라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사실 육체적인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 이방 사람의 첫째 비극이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 밖에 란 말은 그리스도를 떠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생 명적인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약속 밖에 있는 것입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를 떠난 생명은 어두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고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 어진 생활은 그 자체가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환경적인 면에서 볼 때 어 두움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유다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억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들에게는 메시아 왕국에 대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쩌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 고 있지만 장래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이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모든 저희의 꿈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적극적이고 전진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희가 기다리는 메시아 안에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힘찬 전진이 있었기 때문입이다. 반면에 이방 사람들의 역사는 소극적이었고, 정체적이었고 비관적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잠언에도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 람도 그러하고 했는데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 안에서 생각하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도 소극적이었고, 퇴보적이었고, 부정적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생각이 달 라져야 합니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가능성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데는 의미가 있습니다. 소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안 된다, 못한다, 망한다 하면 아닌게 아니라 안되고 못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는 신념과 확신 그리고 의욕을 가지고 나서면 할 수 있고 잘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무슨 일에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믿 음으로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장점을 보려고 힘씁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좋은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적극적이고 긍정적 으로 봅니다. 긍정적으로 본다는 말은 부정적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비판적인 것과 낙관적인 것 사이에서 최선의 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두운 면만을 보려고 합니다. 사람을 보아도 그 사람의 단점만 보려 하고 잘못하는 것만 눈에 띕니다. 자신을 생각할 때도 불행한 것만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과 감격과 행복과 감사가 아니고 슬픔과 불평과 불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가령, 우리가 교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가능성에 대한 생각, 긍정적인 생각이 꼭 필요합니 다. 교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이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보 이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교회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늘에 있는 교회입니다. 세상에 있는 보이는 교회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여 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잘 되려면 교회의 장점을 잘 살려서 약점을 점점 없애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은 교회의 약점만을 들추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럽니다.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이것도 잘못이고 저것도 틀렸고 그저 문제만 있 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문제까지도 합력해서 선으 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믿기 때문 에 여유를 가지고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살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면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가능성을 생 각하면서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3.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이란 이름은 야곱 이후에 불 리운 이름입니다. 아브라함 이후에는 히브리 사람이라 불렀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는 유대 사 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 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이 지배하시는 개인,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와 국민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혼란과 무 질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적으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 나라 안에 들어오게 되 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지 혈통이나 육정이 그렇게 중요하 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 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신령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된 것을 믿습니다. 4. 이방 사람들은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었습 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귀한 언약을 받 은 백성에게는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특권이 있고 영광이 있음과 동시에 택함을 입은 사람으 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 된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 중에 서 우리를 특별히 택해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이와 같은 특권이 있음과 동시에 우리가 마땅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교회의 직분을 맡은 것도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이것은 맡은 자 편에서 그렇습니 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세상의 어떤 명예직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따릅니다. 그리고 이 직분을 잘 감당할 때는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 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는 이 직분을 잘 감당하면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 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서는 많이 거두고 적게 준 자에게서는 적게 거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일을 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맡은 일에 얼마 나 충성해서 이를 남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 이방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언약이 없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비 전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뜻이 없는 백성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개인이나 단체 나 국민이나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하루, 한 달, 일 년을 그럭저럭 살지 아니 합니다. 그 꿈을 바라보며 지금의 어려움을 잘 참고 이겨 나아갑니다. 비가 내리고 번개치는 험 한 날에도 구름 위로만 올라가면 맑은 하늘이 언제나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행기는 구름을 뚫고 힘차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행하게 삽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다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밖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리스도 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 려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약속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 그리고 피
엡 2:11-18 / 김삼환 목사
이번 한 주간은 기독교가 왜 있느 냐? 또 교회가 오늘까지 어떻게 내 려 왔느냐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 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다 대답해 주는 것이 바로 이 한 주간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일생에 있 어서 가장 클라이맥스입니다. 오페 라에서처럼 하나를 위해서 다른 모 든 무대장치가 있듯이 말입니다.
신, 구약 성경 모두가 다 이번 한 주간을 대답해 주고, 유효하게 하고, 가치 있게 하고, 신. 구약에 있는 하 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모든 것과 다르며, 그 능력의 비밀이 어디에 있느냐?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이번 한 주간의 사건에 있습니다. 한 주간 가운데도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금요일과 부활하신 주일 아침은 오늘 기독교 의 다이아몬드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교인이 왜 능력이 있고, 기독교 가 왜 능력이 있고, 모든 힘이 어디 에서 나왔느냐. 권력의 보호를 받아 교회가 왔습니까? 그 많은 산맥을, 시험을, 환란을, 누가 이겼느냐? 바 로 이번 한 주간의 사건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해수욕장 에 가면 그런 말을 하지요. 한달 벌 어 일년 먹고 산다.전체 기독교를 먹이는, 살리는, 전체 기독교의 빛을 비추는 능력이 바로 이 한 주간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을 잘 알아야 말씀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기독 교를 알고, 아니 우주를 알고, 나를 알고, 구원을 알고, 세계를 알고, 우 리의 미래를, 천국을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 복음을 증거 하시다가 마지 막 한 주간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당나귀를 타 시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 산나 환영하지요. 유대의 메시야인 줄 알고 환영 하지만은 예수님은 유 대인을 건지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를 구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백마를 타고 왕으로 군림 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 를 저주와 멸망에서 구원하여 인류 전체를 축복하고 다스리는 왕의 왕 으로 이렇게 오신 것입니다. 유명한 요세비우스라고 하는 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백만명 정도의 군중들이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아름 답고 거룩한 예식을 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주님께서 뒤엎으시고 내어 쫓으시고 청소를 하셨어요. 장사꾼 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이기 때문이예 요. 공장이예요. 시장이예요. 내용은 다 썩었어요. 형식적인 종교의식만 있었지 하나님앞에 아무 의로움도, 진실함도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뒤 엎으셨어요.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주의 종이 잘못하면 비즈니 스가 되기 쉽습니다 장사꾼의 소굴 이 되기 쉽습니다. 거룩한 처소가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 가 되어서 끊임없이 교회는 깨어있 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요일날 주님은 많 은 유대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함 께 부활문제, 천국문제, 납세문제 등 을 가지고 질문하신 것이 성경에 나 오지요. 수요일은 죄많은 여인이 와 서 눈물로 발을 씻겨주는 옥합을 깨 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오늘 베푸셨던 성찬예식 을 행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 도하시다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따라온 모든 제사장의 군 인들과 함께 붙들려서 제사장 가야 바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곳에서 심문을 받고 마지막 밤에 빌라도에 게 재판을 받고, 금요일 아침 십자 가를 향해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 시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십자가 위에서 3일 정도를 버틴다고 합니다. 그러 나 예수님은 많이 굶으셨는지, 약하 셨는지 몰라도 예수님은 일찍이 운 명하셨기 때문에 다른 옆의 강도들 은 다리를 꺾어 버립니다. 부러뜨렸 습니다. 어떤 로마 군인들은 무릎 아래를 다 부셔서 죽이는 일도 있는 데 예수님은 군인들이 와서 다리를 꺾으려 하니까 이미 운명하셨기 때 문에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 리를 찌르니 남은 몸안의 물이 나오 더라 하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무덤에 계셨다가 주일 아 침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시고, 40일 동안 땅에 계시다가 마 지막 감람산에서 수많은 제자들과 군중과 성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시 고 이제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 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처형한 로마가, 그 예수를 그 나라 에 왕으로 맞이하면서 기독교는 세 계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이 우리나라의 천한 사람을 처형해 놓고 죄인을 처형해 놓고, 일본의 왕으로 모시겠어요? 일본의 왕이 그 앞에 엎드리겠어요?
로마의 총독이 허락하고, 모든 유 대인들과 왕과 제사장이 다 법적 절 차를 밟아서 죽였던 예수를 로마의 그 십자가를 자기들의 국기로 만들 고 온 유럽이 그 예수를 그 나라의 구주로 받아 들여서 모든 왕과 방백 과 모든 지도자와 권력자들이 그 앞 에 무릎을 꿇면서 기독교를 이천년 동안 온 세계로 복음을 증거하는 나 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 가를 지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이 놀 라운 사건, 왜 예수님이 오시고 왜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셔야 하고, 십 자가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피를 흘려 주셨는가 하는 이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 다. 우리 인간은 왜 예수님이 죽으 셨는지 왜 나 위해 피 흘리시고, 십 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의 저주요, 불행인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저주는 하나님 앞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 다.
제가 장례식을 할때 제일 안타까 운 것은 젊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아이들은 거의 모릅니다. 밥 달라고 투정하고, 어머니의 관 앞에 서 장난감 갖고 놀고, 어머니가 돌 아가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머니 의 죽음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모릅 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한 것은 하 나님의 아들의 죽음, 왜 죽으셔야 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 인인데도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하 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그래 서 이사야 1장 3절에는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구유를 알것만은 내 백성 인간은 창조자를 아버지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게 가서도 아버지라 고 하고, 돌에게도 아버지라고 하고, 다 가서 빌고 하면서 참 아버지를 모르고 못 찾는 것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고통이 인 간의 불행이 하나님을 떠났는데도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죽었는데도 그것을 모른다라는 것입 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 라고 하면 구원이 뭐냐. 십원 주면 교회 나간다고 하는 말도 듣게 됩니 다. 아주 웃습니다. 천국이 뭐냐. 예 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는다는, 지성인들도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 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서울에 몇째 가는 큰 병원의 외과 과장이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 어라 그랬어요. 그분이 난데없이 중 풍에 걸렸어요. 40대의 젊은 분이 쓰러졌어요. 미국을 가도, 독일을 가 도, 안되는 거예요. 침을 질질 흘리 고 피를 계속 수혈하고 저에게 와달 라고 간절히 부탁을 해서 가니 얼마 나 울면서 회개를 하는지. 자기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그 랬다고 하며 우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다 그런 말 들을 하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 니다. 인간의 귀한 것이 곳 무엇이 라고 생각합니까? 술 한잔은 귀한 줄 알면서 빠져 죽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술을 구세주로 알면서, 하늘 에 계신 하나님, 창조자를 모르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길 잃어 버 렸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서 하 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무지 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하여 미련 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 으로 우리가 살고 그가 피흘려 죽으 심으로 이 모든 일에 눈을 뜨고 내 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된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피, 이 것이 보배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 다. 무한한 능력입니다. 은혜입니다. 측량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십 자가 보혈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말로 다 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전 1 : 22에 보면 너희는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 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 입니다. 많은 사람이 표적을 찾고, 지혜를 찾고, 지식을 찾고, 학문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찾 습니다. 이 보다 놀라운 지혜도 없 고, 능력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이 보다 더 귀한 보배는 이 세상에 없 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우리를 모든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생은 죽은 것입니다. 태어난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으면 죽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살 려줄 자가 누구입니까? 사망 권세에 서 우리를 건져낼 자가 누구입니까? 소련 우주선이 고장으로 인해 지구 로 귀환을 못할 때 소련 수상이 전 화를 했습니다. 동무의 죽음은 우리 소비에트의 영원한 영광이니 장렬하 게 소비에트를 위해 순교하시오. 그 럴 때 우주인이 지구를 향해, 수상 에게 매어 달렸습니다. 포기하지 마 세요.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 주세 요.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하 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미국의 인공 위성 첩보에 이 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람은 살기를 원합니다. 살고 싶 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겠 습니까? 우리 인간의 영원한 죽음에 서 건져낼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이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 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 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라."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지 않 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살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하나 염려없이 항상 생명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사는 줄 믿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사망 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님 은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셔서 나 위 하여 죽으심으로 죽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것과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인데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제는 죽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내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다른 동물의 죽음과 다릅니 다. 죄로 인한 죽음인 것입니다. 주 님이 내 죄를 사함으로 우리는 영원 히 살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는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불의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영적인 문제들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혼수 감에 있는 줄 알고 싸우고 이혼한다 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격 차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성격 차이도 아니 요, 혼수감도 아닙니다. 성격은 원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격이 어떻 게 같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 드신 것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 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과 저 주와 어려운 환란은 전부 영적인 문 제입니다. 죄로 인하여 오는 것이고 사탄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고, 하나 님을 떠나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에서, 죄 에서, 사망에서 하나님을 떠난데서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것 이것이 인 간의 문제를 풀어주신 주님의 십자 가요 보혈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에 빠진 인 간입니다. 죄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 고 죄로 인해 죽은 것이 우리 인간 입니다. 시 51 : 5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요, 모친이 죄중 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태어날 때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중 에 나를 낳았어요. 그래서 사람은 날때부터 곁길로 가는 거예요. 여러 분 자녀들 길러 보십시오. 걷기만 하면 엉뚱한 길로 갑니다. 저도 외 손자가 요사이 와 있는데 보니까요 그 전에 안고 다니던 아이가 걸어 다니는데 한 순간도 가만히 두면 안 돼요. 곁길로 갑니다. 그래서 남자는 직장생활 하는 것이 낫지요. 집에서 아이를 보면 사람이 환장하고 미치 는 거예요. 인간은 곁길로 가는 것 입니다. 죄악중에 태어 났습니다. 그 래도 죄를 모르고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죄인을 비웃고, 욕하고, 죄인 과 싸우면서 의인인척 하는 것이 인 간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모스 1장, 2장을 보면 모든 인류 는, 모든 국가는 다 죄인이에요. 다 메섹, 가사, 에돔, 암몬, 이스라엘, 유다, 아모리, 다 죄값으로 벌받은 거예요. 스바냐 3장 1절에 모든 인 간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예요. 방백은 사자요, 재판장은 이리와 같 고 선지자와 제사장도 다 간사하고 더럽고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 도 없습니다. 롬 3장 9절에 보면 유 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예 요. 의인은 없어요. 의인인척 하는 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교도소에 가면 먼저 온 죄수들이 늦게 온 죄 수들의 신고를 받는데요. 얼마나 힘 들게 하는지요, 뺑뺑이를 돌리구요, 어디서 어떻게 범죄를 했는지 그 이 야기를 듣고, 웃고, 때리고 하면서...
오늘 누가 누구를 정죄하는 것입 니까? 선진국과 미개한 국가의 차이 는요 선거를 치르면 선진국은 상처 가 없어요. 공격을 서로 하지 않아 요. 우리나라는 선거가 한 번 치러 지면 온 나라가 상처 투성이예요. 다 긁어내리는 거예요. 죄인이 누구 를 향해 긁어내는 것입니까? 선진국 은 자기가 앞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 할 일들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지만 이렇게 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그것을 보고 국민 이 지지하고 밀어줍니다. 우리는 뜯 어내려야 하는 거예요. 진돗개 같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거예요.
죄인입니다. 다 죄인입니다. 이 죄 에서 우리를 건져낼 이가 누구입니 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제가 불효하 고 어머니를 떠나 왔을 때 언제나 어머니는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죄 인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 들로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삼환아 부르셔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 리 하나님의 사랑도 여러분을 죄인 이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오늘도 찾아 주시 는 줄 믿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 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 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 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예수 앞에 오라"
죄인이 죄짐을 벗을 수 있는 것 은, 죄의 능력이 전혀 역사하지 않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그 그늘 아래서 오는 것입니다. 교 회는 죄인이 와서 의인이 되고, 저 주받을 죄에서 오히려 복을 받는 기 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곳. 죄인을 환영하는 곳. 죄인이어야 예수님이 사랑스럽고, 죄인이어야 은혜 받는 자리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서울 에 어느 정치인이 서울에서 교회 안 나가고 시골 교회에 나갔어요. 왜 서울에서 다니지 않느냐고 하니까 가는 곳곳마다 자기를 보고 유식한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예수 그리 스도의 구원을 들으려고 복음을 들 으려고,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는,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가는데 서울 교회들은 전부 다 나를 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 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주 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마 귀에게서 우리를 해방 시키셨어요. 우리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이 하나 있는데 마귀입니다. 배후에 있 어요. 여기에서 온갖 오물들을 뿜어 내고, 온갖 악한 일을 생산해내고, 만들어 내는 악한자의 어미예요. 모 든 더러운 것의 어미가 사탄인 것입 니다. 사탄을 누가 멸하셨습니까? 창 3 :15에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 손의 싸움에 대하여 뱀을, 사탄을 멸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여인의 후 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 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 살냈습니다.
사탄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사탄 은 오직 이 세상에 지는 것 예수의 십자가, 두려울 것은 예수의 십자가 이외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함을 얻고, 사탄이 두려워하는 자가 되려면 십 자가 그늘아래 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배 후에 있는 사탄인데 주님은 사탄에 게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 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 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무 너뜨렸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장벽 도 있습니다. 미운 것 이것도 못 고 칩니다. 누구 미운 것, 원수 되는 것 하나 있어 보세요. 이걸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 원수가 되었어요. 죄로 말미 암아 큰 장벽이 놓였어요. 이것을 누가 무너뜨렸느냐. 오늘 본문에 예 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 아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 야!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유대나라의 유대인의 절기 로 일년 가운데 제일 큰 절기는 7월 10일의 대속죄일입니다. 대속죄일에 는 무엇을 합니까. 이스라엘 대 제 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곳은 일년에 단 한 번 밖에 들어갈수 없 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모든 전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함을 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 이라고 말합니다. 물어봅니다. 몇일 이라고 요? 7월 10일. 그 날이 무슨날? 대 속죄일. 누가? 대제사장이. 어디에 들어가요? 지성소. 왜 들어가요? 온 유대 민족. 일년동안 지은죄. 오천만 개도 넘는, 오억도 넘는 죄의 모두 를 용서함 받는 날이 그날 이예요. 시루떡을 갖고 들어가느냐? 소고기 를 갖고 가느냐? 과일을 갖고 가느 냐? 돈을 갖고 가느냐? 아니예요. 양을 잡아서 뻘건피, 그 묵직한 피 를 가지고 가서 안 지성소에 들어가 일곱 번 뿌리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스라엘 전체 죄를 사하는 의식이에 요. 이것을 몇 천년 동안 행하여 내 려 온거예요.
이것을 잘 알아야 되요. 죄는 피 가 아니면 용서가 안돼요. 이스라엘 은 몇천년 동안 어떻게 용서를 받았 습니까? 짐승의 피로 용서를 받은 거예요.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이 된거예요. 그날이 지나가야 하나 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여 하나님이 그 땅 에 복을 주시고 전쟁에 이기게 하시 고, 그 민족에게 필요한 것을 그 하 루가 지나야 채워주시는 거예요. 바 로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앞으로 오셔서 양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 들의 피로, 하나님의 죄없으신 그 아들이 직접 피를 흘려 짐승을 잡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서 자기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 에 나아가서 온 인류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함 받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무서운 죄 때문에 원수 된 것을 아들이 죽으면서 그 피를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이 장벽이 그 냥 그대로 벽처럼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 자가로 말미암아 길이 열려 진줄로 믿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 결하게 하소서"
큰 문이 열렸습니 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저주되는 미워하는, 모든 심판받고 싫어하는 요소를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제거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하나님 앞에 마음껏 드나들면서 살 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손자가 나를 좋아하듯이 두려운것도 모르고 '할 배'하며 마음대로 내게 올라오듯이.그래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모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이루어진줄 믿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14) "화해와 통일을 이루며“
엡 2:11-18, 1:10 / 김명혁 목사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아침 14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화해와 통일을 이루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문제는 화해와 통일이 아닌 불신과 불화입니다. 불신과 불화는 우리 한국 사람들 사이에도 존재하고 남북한 간에도 존재하고 외국인들과의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1. 우리 안에 가득한 불신과 불화
지난 월요일 성남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1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주일 날에는 4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곳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들 중 상당 수가 산업 재해로 몸이 불구가 된 사람들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몽고 여자 하나는 몸이 마비되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사람 하나는 손이 잘려 있었습니다. 조선족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어서 왼 손으로 악수를 했습니다.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지하실 창고 같은 좁은 방에 20명씩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짐승처럼 이란 말은 그곳을 방문한 강원용 목사님이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강원용 목사는 한국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분개했습니다. 한 방에 들어가 보니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유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인권 침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원한이 심각했습니다. 그곳에 방글라데시 말로 되어 있는 달력과 몽고말로 되어 있는 달력이 있었는데, 달력에 실려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몽고 사람들의 사진은 한국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손과 팔과 다리가 잘려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의 징그러운 모습의 사진들이었습니다. 그 달력이 방글라데시와 몽고에서 각각 인쇄되었고 그 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조선족 한 사람은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한을 내 뱉었다고 합니다. 남북이 전쟁을 하면 자기는 북한 편을 들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최근에 어느 한국 사업가는 필리핀 공항에 내리자 마자 필리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때린 사람들과 맞은 사람이 모두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몰매를 때린 사람들이 한국에서 억울하게 인권의 유린을 당했기 때문에 분풀이로 한국사람 하나를 때렸다고 설명하자 화가 난 경찰이 가세하여 그 한국사람을 또 때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억울하게 피해를 입힌 조선족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비난과 원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동남아 여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남에 저와 같이 갔던 이용환 집사는 한국 사람들이 너무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기가 막혀 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도에 지나친 탐욕이 이와 같은 불신과 불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신과 불화가 지금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고 있습니다.
저는 억울한 피해를 입고 비참하게 살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지난 월요일 수박과 오렌지와 튀김과 격려금 165만원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전달하고 왔습니다. 얼마나 고마워 하는지 모릅니다. 김해성 목사님도 고마워 했고 특히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희망이 엄마가 얼마나 고마워 했는지 모릅니다. 165만원을 저에게 전해 주신 김무영 할머니와 다섯분 강변교회 성도들에게 중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신 것입니다. 지금 6개월 된 희망이 아빠는 감옥에 있습니다. 안산 동산교회의 이선희 전도사는 전도 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선교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다가 성남 노동자의 집을 와서 보고는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지금 그곳에서 전도사로 그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전도사는 선교의 황금 어장은 지금 한국에 와서 일을 하고 있는 40만명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문제는 불신과 불화입니다. 불신과 불화는 우리 가정 안에도 존재하고 우리 사회 안에도 존재하고 우리의 동서간에도 존재하고 우리의 남북한간에도 존재하고 우리와 외국인들과의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탐욕적 이기주의와 배타적 종족주의가 이와 같은 불신과 불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던 불신과 불화, 옛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불신과 불화가 지금 우리 나라의 동서간에도 존재하고 남북간에도 존재하고 이웃나라 간에도 존재합니다.
2. 화해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불신과 불화와 원수 맺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He is our peace, he is our reconciliation.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해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마리아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시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과 화평을 이루시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 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이 세상에 화평과 화해를 이루실 뿐 아니라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Making two into one. 그는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통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엡1:10을 읽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통일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통일을 이루는 방편이 되시는 분이시고 통일을 이루는 내용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여기 통일은 획일주의적인 기계적 통일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의 통일을 말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본받아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이 땅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분단 55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한 자리에 앉아서 회담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남북 정상 회담이 불신과 불화와 대결로 치달은 우리 나라에 화해와 통일을 가져 오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류와 협력의 길이 점차 넓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머지 않아 평화통일의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3. 오직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러면 어떻게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편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룬다고 했습니다. "자기 육체로" 원수 된 것을 폐하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둘이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를 통해서만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의 모든 불신과 불화와 분열과 대결이 무너지고 화해와 통일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만 동서의 화해와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기주의와 탐욕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때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아직까지 북한에 남아 있는 땅과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제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북한교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교회나 교단이 있다면 그런 교회는 이제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둘째는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온 세상을 품는 정신입니다. 탕자도 받아 드리고 세리도 받아 드리고 창기도 받아 드리는 것을 발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서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욕하던 것을 이제는 그만두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북한 주민들을 찬양 고무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 7조는 폐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앙계 잡지 이번 6월 호 권두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남북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지난날의 적대적인 감정을 삭이고 녹여야 한다. 때가 되면 피차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사과와 용서가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서로 포용하며 화해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보안법이 폐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법이나 북한이나 그 구성원인 북한 주민들을 찬양 고무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국보법 7조는 폐지 되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그대로 끓어 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서로 만나는 정신입니다. 가로 세로로 되어 있는 십자가는 만남의 상징입니다. 강도도 만나고 로마의 백부장도 만나고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원수까지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만날 때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품게 됩니다. 일본 사람을 자주 만나면 일본 사람을 이해하고 품게 되며 북한 사람을 자주 만나면 북한 사람을 이해하고 품게 됩니다. 그러므로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을 금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8조도 폐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앙계 잡지 이번 6월 호 권두언에 이런 글도 썼습니다. "우리는 남북의 교류를 넓히고 증진하기 위해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이나 교류를 금지해 온 국보법 8조를 폐지해야 할 것이다. 즉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는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서신 또는 인적 교류를 실행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다. 만남과 교류가 화해를 증진하고 통일을 앞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정신은 만남의 정신입니다. 화해와 통일은 만남에서 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의 정신을 얼마나 체 받아 몸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 입니다. 십자가 장식품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과 십자가의 정신을 몸으로 실현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를 입으로 노래하는 것과 십자가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십자가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사람,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권리를 포기하면서라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 아니 아시아의 화해와 통일을 도모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람입니다.
영남과 호남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남한과 북한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서 저들을 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은 화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의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기질도 화해를 가로 막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화해도 통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들을 사로 잡을 때, 우리들을 깨트려 부셔 버릴 때 가능합니다.
"오, 십자가의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남을 짓밟아 죽이고서라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마귀적인 악한 생각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민족주의적인 기질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우리 안에 가득한 불신과 불화를 깨트려 부셔 버리고 우리 안에 화해와 통일을 가져 다 주시옵소서! 오,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주시옵소서! 동서의 화해와 통일을 주시옵소서! 이웃 나라들과의 화해와 통일을 주시옵소서! 오, 남북의 두 정상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이제 복음찬송 "화해하세요"를 다 일어나서 손을 잡고 부르겠습니다.
"화해와 통일을 이루며"
기독교신문 "정론"(00.6.11)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담임, 합동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지금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심각한 문제는 불신과 불화이다. 불신과 불화는 우리들 사이에도 존재하고 남북한 간에도 존재하고 외국인들과의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성남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방문했다. 1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곳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 수가 산업 재해로 몸이 불구가 된 사람들이었다. 몽고 여자 하나는 몸이 마비되어 말도 못하고 있었고, 방글라데시 사람 하나는 손이 잘려 있었으며, 조선족 한 사람은 오른 손이 없어서 왼 손으로 악수를 했다. 한 방에는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들의 유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인권 침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원한이 심각했다. 그곳에 방글라데시 말로 되어 있는 달력과 몽고말로 되어 있는 달력이 있었는데, 달력에 실려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몽고 사람들의 사진은 한국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손과 팔과 다리가 잘려서 불구자가 된 사람들의 징그러운 모습의 사진들이었다. 어느 조선족 한 사람은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한을 내 뱉었다고 한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조선족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비난과 원한을 당하고 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탐욕이 이와 같은 불신과 불화를 조성했다. 나는 고통 중에 살고 있는 성남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수박과 오렌지와 튀김과 격려금 165만원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전달하고 왔다. 얼마나 고마워 하는지 모른다.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조선족 "희망"이 엄마가 얼마나 고마워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우리 사회 안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일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이 세상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고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고 화해이시고 통일이시다. 분단 55년 만에 남북의 정상이 한 자리에 앉아서 회담을 한다. 우리는 이번 회담이 불신과 불화와 대결로 치달은 우리 나라에 화해와 통일을 가져 오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어떻게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 오직 한 길이 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는 길이다(엡2:13-18). 십자가를 통해서만 불신과 불화와 분열과 대결이 무너지고 화해와 통일을 이루게 된다. 십자가의 정신은 첫째로 자기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이다. 이기주의와 탐욕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아직까지 북한에 남아 있는 땅과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이제 그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은 둘째로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품는 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서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욕하던 것을 이제는 그만두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칭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북한 주민들을 찬양 고무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 7조는 폐지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정신은 셋째로 서로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는 만남의 상징이다. 강도도 만나고 백부장도 만나고 원수까지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북한 주민들과의 접촉을 금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8조도 폐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의 정신을 얼마나 몸으로 실현할 수 있는가 이다. 십자가 장식품을 목에 걸고 다니는 것과 십자가의 정신을 몸으로 실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십자가를 입으로 노래하는 것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사람,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십자가의 사람이다. 영호남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하고 남북한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하며 외국인들을 만나서 저들을 품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서 서로를 품어야 한다.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은 화해를 가로 막고 있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들을 사로 잡을 때, 우리들을 깨트려 부셔 버릴 때 가능하다. "오, 십자가의 주님이시여! 우리들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남을 짓밟아 죽이고서라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악한 생각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족주의와 민족주의적인 기질도 깨트려 부셔 버리시옵소서! 동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그리고 이웃 나라들과의 화해와 통일을 주시옵소서! 남북의 두 정상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화해와 통일의 방법
엡 2:11-18 / 임덕순 목사
오늘은 광복 58주년 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오늘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신 은혜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라 안에 가득한 불신과 대립
58주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따로 진행했고 경찰은 그 사이에서 벽을 쌓고 충돌을 예방해야 하는 실정이 광복 58주년을 맞는 오늘의 상황입니다. 요즈음에는 사법부 파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임기 만료된 대법관 한명을 추가로 임명해야 하는데, 전에는 대법원장이 한명을 추천해서 국회에 보내면 국회가 인준을 하고 대통령이 임명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으니 대법원장이 하던 추천도 이제 민주적으로 하자 해서, 몇 명의 추천위원을 세우고 그분들이 세 명을 추천하면 그 중에서 한명을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제도를 만들었는데, 밖에서 이것을 지켜보는 법원의 젊은 판사들이 이번에는 진보적인 사람을 대법관에 추천하라면서 150여명의 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자기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원 사표를 내겠다고 하는 일대 소동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이라고 보아야 할 법원에까지 보수와 혁신의 갈등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장면입니다. 이렇게 우리사회는 찢겨 있습니다. 영남과 호남이 찢기고, 남과 북이 찢기고, 보수와 진보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이판사판의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노사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고 외국인 노동자 문제도 심각합니다. 한국에는 이미 수 십 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살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이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권 침해를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원한이 심각합니다. 성남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는 주일날 4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그들이 방글라데시와 몽고말로 된 달력을 만들어 걸었고 자기 나라에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달력에는 한국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손과 팔과 다리가 잘려서 불구자가 된 징그러운 사진들이 실려 있답니다. 어느 조선족 은 한국을 떠나면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다고 한을 내 뱉으면서 남북이 전쟁을 하면 자기는 북한 편을 들겠다고 하면서 이 땅을 떠났답니다.
얼마 전에 어느 한국 사업가는 필리핀 공항에 내리자마자 필리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때린 사람들과 맞은 사람이 모두 경찰서에 붙잡혀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때린 사람들이 한국에서 억울하게 인권의 유린을 당했기 때문에 분풀이로 한국사람 하나를 때렸다고 설명하자 화가 난 경찰이 가세하여 그 한국 사람을 또 때렸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은 억울하게 피해를 입힌 조선족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비난과 원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도에 지나친 탐욕 때문에 이같이 불신과 불화가 지금 우리 사회 안에 만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라질 대로 갈라진 오늘의 우리 사회를 치료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화해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불신과 불화와 원수 맺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요 우리의 화해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경원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과 화평을 이루시고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이 세상에 화해를 이루실 뿐 아니라 통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라는 말씀처럼 그는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엡1:10을 읽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통일을 이루는 방편이 되시고 통일을 이루는 내용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여기 통일은 획일주의적인 기계적 통일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의 통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불신과 불화가 가득한 이 땅에 화해와 통일을 이루는 밀알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러면 어떻게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편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로"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만 화해와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로" 원수 된 것을 폐하신다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고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신다고 했습니다. "저로 말미암아" 둘이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의 모든 불신과 분열과 대결이 무너지고 화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서로 만나는 정신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서로 만나는 정신입니다. 가로 세로로 되어 있는 십자가는 만남의 상징입니다. 두개의 막대기가 서로 만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만나셨습니다. 강도도 만나고 로마의 백부장도 만나고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원수까지도 만나셨습니다. 사람은 만날 때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품게 됩니다. 일본 사람을 자주 만나면 일본 사람을 이해하고 품게 되며, 북한 사람을 자주 만나면 북한 사람을 이해하고 품게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십자가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 상대방을 품을 수 있는 사람,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권리를 포기하면서라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도모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정신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온 세상을 품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탕자도 받아 드리고 세리도 받아 드리고 창기도 받아 드리셨습니다. 그들이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만나셨고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끝까지 물고 늘어서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욕하던 것을 이제 그만두고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 그것을 인정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그대로 끌어안는 정신입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정신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기주의와 탐욕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면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이나 자기 의견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 것은 포기 못한다, 네가 포기해라, 나는 접을 수가 없다, 네가 접고 들어오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입장을 견고하게 붙들고 있을 뿐이지 포기할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버리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우리는 실천해 봐야합니다.
한 예를 들어 생각합시다. 정 몽헌씨의 자살문제입니다.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은 대략 두 가지로 갈려 있습니다. 하나는 정권에 뇌물주면서 북한에 퍼주기를 대행하다가 기업이 망했고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반대편의 의견인데, 누군가는 해야 할 북한 껴안기에 앞장서다가 희생된 사람이라는 평가입니다.
현대아산의 정몽헌씨는 정치적인 문제를 혼자 떠안고 희생된 사람이다? 맞는 평가입니다.
그에게 짐을 떠맡긴 사람은 김 대중 대통령이다? 틀린 답입니다. 그럼 정답은 무엇입니까?
김 대중 대통령 정부가 그에게 그 짐을 지게 한 것이 틀림없지만, 사실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에게 그 짐을 떠맡긴 것입니다.
북한 문제가 현대만의 문제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북한정권은 틀림없이 나쁜 정권이요 그들의 행위는 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상문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핍박하고 인권을 유린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현대가 갖다 준 돈을 굶주린 자기 백성들 먹여 살리는데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정권을 지키려고 세상을 협박할 핵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가 북한에 돈을 준 것은 잘못이고, 현대에게 그 일을 떠맡기고 조종한 정부도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만 한다고 우리의 현실문제인 북한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비도덕적이고 상식이하의 방법으로 우리를 협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위협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그 위협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자본은 한국을 위험국가로 보고 투자를 꺼리며, 한국의 기업은 형편없이 저평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 기업이라면 5만원을 호가할 주가가 한국기업이라는 것 때문에 3만원도 못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코리아디스카운트 현상을 언제까지 놔둬야 합니까?
미국 보수파의 논리대로 군사적 선제공격을 하면 북한정권은 쉽게 붕괴될 것입니다. 이라크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북한도 가진 포탄 얼마를 쏘고 나면 전쟁을 지속할 돈이 없으니 금세 붕괴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북한이 지난 정권 때 우리 대표에게 협박하기를, “우리는 미군과 싸울 힘은 없다.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장거리포와 미사일이 있다. 미국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그동안 만들어 놓은 포탄과 미사일을 남한에 날릴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남한의 1 평방킬로미터 마다 평균 세발의 미사일이나 대포가 떨어진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하겠지만, 폐허더미가 된 한국도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냐?” 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도 문제입니다. 잠시 전쟁을 치르고 나면 북한정권이 무너질 것이고 그 다음에는 평화가 올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정부상태가 된 북한의 굶주린 천 수 백 만 명의 주민들이 살겠다고 밀려 내려오면 우리는 경제만 아니라 사회의 기본질서마저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정부와 대통령이 자기만의 생각으로 국민 몰래 일개 기업에 특권을 주면서 돈을 보낼것이 아니라, 시간이 좀 걸릴 것을 각오하고 국민들이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했어야 하는데, 국민 전체가 대화에 참여할 수는 없으니 국회의원들이 자기 당략을 버리고 진지하게 토론했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방과 주변 국가들과도 충분하게 협의하면서 했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집권자 한 사람이 국민 몰래 쉬쉬하면서 진행했고, 일개 기업에게 특권을 주면서 짐을 지우니, 북한은 더더욱 기고만장해졌고, 전 세계를 협박할 무기를 만들 기회와 돈을 주었으며, 그런 짐을 떠맡은 기업은 거달 났고, 그 총수는 자살까지 하게 되었고, 그것을 진행시킨 대통령은 욕을 먹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는 정권도 바뀌었으니 북한에 상관하지 말고 망하던 살던 그냥 놔둬야 합니까?
여기까지 진행시킨 일을 우리는 되돌릴 수가 없고 되돌려서도 안 됩니다. 한 기업이 망하고 한 기업주의 자살까지 이르렀으니, 우리는 이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셈입니다. 사실은 그 일로 인해서 그동안 북한과 많은 대화를 할 수가 있었고, 남북이 전보다는 훨씬 신뢰도가 쌓인 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돈을 대주어서 개발한 것이긴 하지만, 그들이 핵을 개발했고 우리는 핵을 개발했다고 공포한 것이 도리어 그들이 써먹을 카드를 다 내놓았다는 점도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핵 카드로도 세상이 겁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달 말에, 협상 테이블에 앉기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꽤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추진한 대통령이 욕을 먹었고, 그 일을 맡았던 기업이 거달 나 버린 상황에서 그 일을 없던 일로 한다면 누가 손해입니까? 우리는 이미 치룬 값을 보상받아야 합니다. 그 보상이란, 평화통일을 위해서 몇 걸음 더 나아가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이 돌이킬 수 없는 통일의 길로 가게 하는 일입니다.
이 문제는 국민모두가 책임져야 합니다. 7천만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자기의 입장을 버리는 것입니다. 보수, 혁신의 사고를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입장을 멀리 놓고 객관적으로 다시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만나고 그 의견을 들어주고, 내 의견은 이런데 이건 어떠냐는 정말 기본적인 논의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의논마저 안 되고 무조건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하는 상황이 현재상황입니다. 이렇게만 나가면 북한이 스스로 무너진다 해도 우리 안에서는 전쟁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적으로 만들고 무슨 평화가 있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화해와 통일을 이루자는 말씀을 우리는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정신이 무엇이라고요?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린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네 기반, 네 사고방식, 네가 지니고 살았던 이념과 사상 등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도 성공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떠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을 말하고 죽는 것을 말하는데,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떠나는 종교요 죽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향을 떠나는 종교요 고향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호남인도 영남인도 아닌 하나님나라의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떠나는 종교요 세상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몸을 떠나는 종교요 몸에 대해서 죽는 종교입니다. 자기주장에서 떠나는 종교요 자기주장에 대하여 죽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논리를 뛰어 넘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쫓겨나고 밀려서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쫓겨나고 밀려나서 황무지에서 방황했지만, 어느덧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밀려 먼 나라로 팔려갔지만,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이스라엘을 조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과 세상을 떠나 주변으로 맴도는 것 같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버리고 떠난 그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떠나라 하신 하나님께서 바르게 산 그들을 위해 성공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생명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버리고 떠나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복 58주년 기념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서럽게 살던 불쌍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출해 주셔서, 자유로운 나라가 되게 해 주시고, 세계 10국가 주변에 끼게 해주신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남북이 이만큼이라도 왕래를 시작하게 하시고, 두 달 전만 해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는데 내일 모레는 중국에서 6자회담이 열리게 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이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이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이기적이 되었고 배타적이 되었고 탐욕적이 되었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물질 중심적이 되었고 너무 세상 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관에서 떠나야 합니다. 돈 욕심에서 떠나라 하시면 떠나야 하고, 자기 고향인심에서 떠나라 하시면 그것을 떠나야 합니다. 그동안에 지니고 살았던 생각, 이념을 떠나라 하시면 그것을 떠나야합니다. 보수도 진보도 떠나야만 합니다. 그것들을 왜 버리고 떠나야 합니까? 보수나 진보의 사상은 환상이요 우상일 뿐이지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이루어주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것을 주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순수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부추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친척과 삶의 기반을 떠나서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삶입니다.
진정한 떠남의 중심에는 죽음에 대한 각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 부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는 죽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고 포기하고 떠나면, 자기 입장을 버리고 십자가의 사상을 가지고 상대를 만나고,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순종한 사람에게 평화와 통일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버리고 떠나라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포기하고 양보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고향의 정서입니까? 이념과 사상입니까?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를 본받아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고 용납하는 사회를 이루게 하는 밀알들이 됩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엡 2:11-18 / 최건호 목사
오늘 우리사회는 인종과 인종, 국가와 국가, 계급과 계급 사이에 한없는 차별과 대립과 투쟁으로 곳곳에서 평화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대립은 서로가 막힌 장벽을 만들기 때문에 생기게 되는데 평화가 깨어질 때 우리는 발전과 번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 흘림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는 평화의 왕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과 화평한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2:13).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낙원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했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배반하고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악과 심판과 정죄의 담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축복은 저주로 바뀌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나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저주와 죽음을 당하신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의 다리가 놓여지고 화목과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의 화해의 공로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엡2:14).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가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축복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번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모든 제물을 불태웠습니다. 그래야 죄가 불타서 없어지고 기도가 응답되고 은혜와 축복과 모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고 평화를 얻고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 가운데 산다고 믿었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깨뜨리시고 피를 흘려 모든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에게 내리시는 저주를 막으셨습니다. 누구든지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가지고 가면 원수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이웃과 하나가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이웃과 화목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2:17,18).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사상이 다르고 문화와 언어 그리고 국가와 가치관 등이 다를지라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원수 관계, 긴장관계, 적대관계 등이 해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인종 차별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사이에도 이러한 차별과 대립과 대결의 담이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그 담을 허시려고 십자가에 화목제물이 되신 것을 기억하시면서 형제와 화목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류를 화목하게 하기위하여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고 죽으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시고 모두가 화목케 하는 복있는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엡 2:11-18 / 성흥모 목사
오늘은 광복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로 해방59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난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고, 외세로부터의 해방을 얻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미완의 해방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여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직 약하고 사상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세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의 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대동 단결하여 스스로 무장하고 독립을 쟁취하였다고 하면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통일 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소규모라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세력이라도 있었더라면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해방이니, 통일이니, 분단이니 하는 말들이 어려운 말이요, 꺼내기가 참으로 힘든 말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면 이 민족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우리의 나아갈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해방 후 59년에 이르도록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현실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세계의 정상권에 진입하기 위하여 우리는 통일을 이뤄야 하고, 통일 한국만이 환태평양 시대의 중심국가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통일을 이루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기 때문에 또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북한이 가지고 있는 체제나 사상이 우리와 어느 정도 비슷해야 조금씩 양보하고 하나로 가자고 할 터인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든 분야에서 우리와는 너무도 다르니 어디서부터 하나가 되자고 말을 꺼낼 수가 없습니다. 통일을 위한 비용보다 분단을 유지하는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분단으로 인한 고통은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지만, 통일을 얻기 위하여 지금까지 누리고 가꿔온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면 그러한 통일은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이 힘든 것이요, 섣불리 통일하자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적인 통일을 위하여 더 준비하고 신중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혼란을 막고 양측의 부담이 적어진다는 말입니다.
제28회 하계올림픽이 그리스 아테네에서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그 막을 올렸습니다. 그리스 올림픽이 어제 새벽 8. 14일 오전2시45분에 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 아테네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서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16일 간의 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국경, 종교, 인종을 초월한 세계202개국 IOC 회원국 모두다 참가하였고 선수들만 1만500여명으로 올림픽 역사상에 가장 성대한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호주시드니 올림픽에 이어 이번에도 북한과 함께 공동 입장을 하였습니다. 남북선수단은 그리스 알파벳 순서에 따라 84번째로 입장하였습니다. 공동 입장이라는 것도 한 두 번으로 족하지 자주하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민족의 역량이 얼마나 모자라면 지금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나뉘어져 있으면서 언제까지나 공동 입장 할 것이냐고 비웃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 번 베이징대회는 단일 팀으로 출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통일된 국가가 가면 세계 열강 중에 어느 정도와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가동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일 팀으로 한 댓 번 참전하다가 드디어 한 국가의 대표단으로 당당하게 출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쉬운 것부터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다보면 통일로 가는 길은 좀 더 단축될 것입니다. 북한이 올림픽 무대에 DPRK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호칭으로 참가한 것은 1972년 제20회 독일의 뮌헨 올림픽이었습니다. 이때 처음 출전한 북한은 금1, 은1, 동3개를 얻었는데 사격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이호준이란 선수가 있었습니다. 여러 기자들이 몰려가 축하를 하면서 어떻게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면서 총을 잘 쏘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수령님의 교시대로 적의 가슴을 쏘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을 뿐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올림픽 정신과는 너무나 벗어난 것이지만,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경기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고, 물의가 일어나니 할 수 없이 공개사과하고 돌아 왔습니다. 우리와 상대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에 대한 비전과 전망을 주제로하는 많은 책들을 읽어보고, 남북관계에 대한 세미나가 강연이 있으면 참석해봅니다. 21세기에는 공산주의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해보니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이들만 양산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성실성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이 없다보면 부실하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성이 결여되어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가 되다보니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어느 때에 통일이 주어질 것입니까? 이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통일을 맞이한다면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는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편가르기를 잘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가문과 가문 사이, 마을과 마을, 국가와 국가 간에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담을 헐고 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운동하며 하나를 다지자고 올림픽을 치르고, 국제기구를 결성하기도 하고, 국제연합을 구성하여 한 자리에 모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이 지구상에는 종족간의 전쟁, 종교간의 분쟁, 나라와 나라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총성이 멈춘 날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국경 분쟁과 해묵은 감정 싸움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계속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전쟁 중에 종교간의 전쟁이 가장 무서운 전쟁입니다. 동양에는 종교로 인한 전쟁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 종교간의 갈등은 발생하고 있지만, 한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이 종교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은 십자군 전쟁을 비롯하여 수 없는 전쟁이 종교전쟁이 있었습니다. 서양에서는 같은 기독교이면서 구교인 카톨릭 교도와 신교도 사이에 30년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독일을 무대로 하여 일어났는데, 당시에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유럽이 30년 동안 종교전쟁을 치렀습니다. 독일의 보헤미야 지방에서 구교를 믿는 제후가 개신교를 믿는 백성들을 탄압하고 구교를 믿으라고 강요하다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전 유럽이 뒤엉켜 30년 동안 싸웠습니다. 이 전쟁은 개신교회를 받아들인 나라들이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구교의 나라인 프랑스는 독일이 싫어서 개신교 편을 들어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 독일의 인구 1/3이 사라질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때에 개신교회를 받아들인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고, 벨기에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것도 종교 차이에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전쟁을 원하시는 분입니까? 전쟁을 원치 아니하시는 분입니까? 성경은 전쟁을 하라고 하였습니까? 어떠한 전쟁이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 문제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는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때로는 전쟁이 불가피한 경우에 인정하는 정당전쟁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과 전쟁은 기독교의 복음과 조화를 이룩할 수 없다는 평화주의의 두 흐름이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 있다면 정당전쟁론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정당전쟁론이라고 해도 엄격한 기준과 절차를 따르고 있는데, 정의와 함께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중에 나온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웃을 위하여 사랑하는 동기와 평화를 회복하고 유지하려면 때로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입장입니다. 사회의 질서와 공공선을 이루기 위하여 정의의 관점에 전쟁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입니다. 정당한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 파괴된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합법적인 정부만이, 승리의 가능성, 민간인을 배제하는 전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에 따라서 악용될 소지도 아주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자기들 편에서는 언제나 정당한 것이요, 상대는 언제나 응징을 받아야 하는 악의 세력으로 몰아버리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교 전쟁에 악용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현재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상태에도 양쪽이 다 정당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어떠한 전쟁도 거부하는 기독교 평화주의가 있습니다. 어떠한 폭력이나 전쟁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주장하는 정도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용주의적 평화주의도 있고, 인간애적 평화주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개심이나, 보복이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사랑과 용서, 평화와 섬김을 위하여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어떤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았고,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폭력 앞에 아무런 힘이 없이 쓰러지는 것 같았지만 부활의 사건을 생각하면 사랑과 평화, 용서와 섬김만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정부, 악한 정권, 악한 사람 앞에 사랑과 용서, 섬김, 평화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인으로 독일에서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깊이 관여한 학자인데, 글렌 스타슨(Glen Stassen) 박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정의로운 평화조성론"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극단의 이론을 종합하면서 적극적으로 평화를 위하여 협상하고 군비를 축소하고 대화를 강조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정의로운 평화조성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정당전쟁론으로 가던지, 평화주의로 가든지 할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단점과, 약점이 있지만, 우리는 전쟁을 억제하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평화를 조성하려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상이나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당전쟁론은 강대국의 이기심을 조장하고 군사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단점이 있고, 평화주의는 상대도 받아들일 때에는 참으로 이상적이지만 한 편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백기를 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정의로운 평화조성론을 가지고 상대국과 대화를 가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불안하기 그지없는 주장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정당전쟁론이 정답인 것 같았는데, 지금은 평화주의가 정답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는 약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상대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호시탐탐 쳐들어오려고 하는데 나 혼자 평화를 말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는 이상적인 사상이나 주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주의를 가지고 군비를 축소하다가는 앉아서 나라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당전쟁론을 채택하여 군비를 강화하므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었고, 지금도 많은 나라들이 군비를 강화하므로 전쟁을 막아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평화주의로 가야만 정답인데, '정의로운 평화조성론' 마저도 허약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답이 무엇입니까? 정답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야만 전쟁은 그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쟁의 소문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하여 할례받은 사람으로, 이방인들을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였고,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였으며, 구원에 대한 소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는 자처럼 보였습니다. 구원의 자리에서 멀리 있었던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나뉘어져 있던 사람들, 원수와 같이 지내던 사람들, 중간에 막힌 담을 쌓고, 왕래하지 않던 사람들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형제가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5절에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옛사람의 모습은 불화요, 분열이었지만 새 사람의 관계는 평화요, 화해요, 화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이유 없이 미워하고 경계하고 있다면, 아직도 내가 거듭나지 아니한 옛 사람이지 않은가를 따져 보아야만 합니다. 과거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정한 소망이 없을 때에는 오직 잘 사는 것만이 소망이고, 구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반갑고 내게 해를 끼칠 사람 같아 보이면 무조건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들, 한 가문과 다른 가문 사이에 막힌 담, 우리 사회의 계층과 또 다른 계층 사이에 막힌 담, 나라와 나라 사이에 막힌 담은 오직 십자가로만 헐어버릴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야 사람들과 화목하게 되고, 나 자신과도 화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화평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지 않으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날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이 들어 올 수 없는 성전의 담이 있습니다. 유대인 여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성전 뜰이 있습니다. 구별과 차별이 심하였습니다. 유대인 남자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성전 마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매일 한번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속죄일이 되면 일년에 단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큰 휘장으로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와 고통을 받으시고 운명하시는 그 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지성소와 성소를 막아 놓았던 것이 열린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이 사라졌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일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원수 된 것을 화목케 하시는 일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멀리 계시던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갈 수 없던 천국을 예수님을 통하여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평화이십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도들이 마음은 평화로운 천국입니다. 참된 평화가 주님입니다.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살면서 이웃과 담을 쌓고, 원수처럼 지낼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고 찾아가 화해를 위하여 악수를 청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내가 구원받았기에 이 세상에는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들만 있지, 내가 미워하거나 저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 애리조자주의 피닉스에 사는 한 청년이 실수하여 범죄하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내가 나가면 나를 체포한 형사들, 가만두나 보라. 나가면 죽이고 말겠다" 이를 갈았습니다. 드디어 출소하고 집에 가보니 아내는 도망가버렸고, 어린 자식 둘만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형사를 죽이고 감옥에 들어가야 하지만 두 아이만은 믿음 안에서 깨끗하게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 둘을 데리고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마침 교회에서는 성서신학자인 톰슨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예배만 끝나면 이 교회 담임 목사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형사를 찾아가려고 하여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톰슨 목사님은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여러 사람 앞에 나아가 간증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밤 사람을 죽이려고 권총을 품고 나온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듣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 사람으로 살아가렵니다. 권총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랑의 복음을 가지고 다니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사랑하며 용서하며 섬기며,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다스릴 때에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평화롭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어야 됩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의 곡 중에 1970년대에 발표한 '이메진'(Imagine)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봐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게 사는 것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모두 나를 꿈만 꾸는 몽상가라고 하겠지요. 그렇지만 나만 이런 꿈을 꾸는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품기를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모두 하나가 되어 살게 될 거예요"라는 가사입니다. 평화롭게 사는 것을 상상하고 평화의 나라를 이룩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생전에 한 말이 있는데, "All we are saying is give peace a chance" "우리가 주장하는 바는 평화에게 기회를 주자"는 말입니다. 평화에게 기회가 돌아가기도 전에 평화의 가치를 말살해버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평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평화를 창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工事中
엡 2:11-13, 4:25-32 / 성흥모 목사
교회의 풍성과 충만이라는 주제로 시작했던 에베소서 1장은 「두 날개로 나는 독수리」 그것은 주님 올 때에 능력있는 미래를 힘있게 추수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두 번째 장에 넘어오면 하나님의 몸된 교회 위에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때로는 갈등을 느껴야 되며 때로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 할 때에 이 교회는 아직도 공사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메시지의 제목이 「공사중」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전 저는 신도시 개척교회에 대한 꿈을 안고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분당엘 갔더니 일부 공사가 끝나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이곳 저곳에서 아파트가 힘있게 올라가는 골조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또 한켠에서는 땅을 반듯하게 일구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부천에 있는 중동엘 갔더니 땅을 반듯하게 닦아놓고 이제 막 건축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마지막에 일산엘 와 봤습니다. 아직도 산을 깎고 개울과 논을 메꾸고 있었습니다. 멋모르고 차를 몰고 왔다가 진흙탕에 빠져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일산 땅이 내 모습과도 같고 아직 시작 준비도 하지 못한 우리교회 모습과도 흡사하여 개척지를 일산으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이런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공사중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건축중」「공사중」- 이 말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공사중입니다. 거기 있는 모든 성도들도 완성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건축중이요, 모두가 치료중이요, 모두가 공사중입니다.
II.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던 아무개 씨는 서울에서 전통적인 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조금 생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하여 교회 임원의 역할도 해보고 싶은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힘이 들고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니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안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안에서도 투닥 투닥 싸움하는 소리가 가끔은 들려 옵니다.
아예 발을 쑥 빼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던 차에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마침 크지 않은 교회가 있어 등록을 하게 되었고 등록을 하자 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 줍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이냐? 목사님과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목사님을 도와 내가 바라던 그 아름다운 교회를 이제 만들어 봐야지. 그런데 웬걸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사님도 이 사람이 내 목회에 걸림돌이구나 실망을 합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크게 환멸을 느낄 수 밖에 없지요.
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 실망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 일로 부부 싸움이 잦아 졌고 부부가 합의하여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도 몇 주 드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래도 교회를 버리기엔 신앙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좋은 교회가 있겠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 용서가 있는 교회, 은혜와 감동이 있는 교회 - 그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오늘도 헤매어 봅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나를 반겨주는 교인들의 목사님의 환대마져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교인으로 잡아 두려는 위선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는 냉소주의, 무관심 주의가 되었다가 또 하루는 불평분자, 비판주의자가 되어 불행한 성도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III. 자기 중심의 교회관
이 아무개 집사처럼, 초대교회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천국이 건설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 옵니다. 그러다가 정작 쓰러지고 넘어지는 사람은 비판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교회에 일원이 되면서 나름대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저래야 한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던 자들이었다. 아직도 시각이나 가치관이 세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왜 이래? 너무 쉽게 하나님의 교회를 평하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종종 느끼는 아픔이 이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언론들이 교회를 난도질하는 것까지는 이해함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교인들 함부로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내는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떠듭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하나씩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어 주어야 할 만큼 친절해야 한다.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돕고 선교를 많이 해야 된다. 교회는 크게 성장해야 한다. 또 반대편에서는 교회는 작아야 교회답다. 교회에 모일 때 큰 소리로 기도해야 교회가 뜨거운 교회요 좋은 교회다. 또 한켠에서는 교회는 신사적이어야 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야단스러우면 안된다. 자기 나름대로 교회에 교회관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의 무차별 사격에 가까운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교회생활과 신앙이 위험 상태에 빠져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들이 살아온 삶이나 지금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헌신등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 왜 교회안에 연약성이 있는지, 왜 교회가 내 생각과 다른지 배워야 할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가 하나님,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제 갓 결혼식장에서 걸어나오는 신부를 대하듯이, 지금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를 대하듯이, 경외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그 고결함을 손상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이고 바른 시각입니다.
신학생 때는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때묻어 보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속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를 평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목회현장에 나와 목회를 해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이 더 웃기는 목회를 하고 있음을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교인 10명만 모이면 거기 교회관 10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교회요 목회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에 이유가 있구나. 겸손해 집니다. 이쯤은 양호한 목회자입니다. 정말 구제불능인 목회자는 나하고 다른 행태들을 마구 비난합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그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박수도 보내줍니다. 그러는 중에 자신이 섬기는 교회는 황폐되어져 가고 메말라 갑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혼란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상의 교회, 지역교회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부족한 죄인들이 초청받아 몰려온 곳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에 허물이 있다고 연약성이 있다고 내 맘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화를 쏘아대서는 안됩니다. 그 연약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이상향이 무엇인가를 의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의 허물을 마구 비난하면 가정의 행복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의 교육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내 자녀는 내 격려의 대상일 뿐입니다.
IV. 교회는 병원이다
어떤 교회가 과연 이상적인 교회일까요?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교회론을 다룬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교회를 몹시도 사랑했던 칼빈은 66권 가운데 에베소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 창시자 죤 낙스는 말년에 칼빈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고 또 읽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콜릿지 같은 분은 “인간이 쓴 서신 가운데 가장 신성한 작품이 에베소서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경가 스코트는 “헨델이 영감을 받아 무릎꿇고 할렐루야를 작곡했다면 바울은 영감을 받아 무릎을 꿇고 교회가 무엇인가?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격찬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여러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그래서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장 많이 갖춘 교회였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고 하면 창립자가 좋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창립자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교회를 창립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세우고 다시 다른 교회를 향하여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에베소 교회만큼은 교회를 창립한 이후 3년동안 목회를 했고 또 처음 멤버들에게 소중한 제자훈련을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위치적으로 교회가 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통중심지였습니다. 당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다이아나 신전이 세워질 만큼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고 당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론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했습니다. 위치적으로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전혀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녀들과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밥 잘 먹어라” 한다면 그 아이는 밥을 잘 안먹는 아이일 겝니다. “밤에 일찍 들어오너라” 라고 말한다면 아마 귀가 시간이 좀 늦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전화를 하다가 “오늘은 싸우지 말고 들어 오너라” 그렇게 얘기한다면 이 아이는 싸움쟁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보면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에베소 교회안에 거짓, 진실하지 못함, 위선이 가득했다는 얘기입니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안에 혈기 부리는 사람들, 걸핏하면 화를 버럭내는 사람들,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가득했던 모양입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 다시 교회안에 심지어 옆에 앉아있는 사람 가방 뒤지고 도벽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29절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교회안에 상소리, 음담을 좋아하는 사람, 이간질하고 흉보고 헐뜯고 입술로 범죄하는 사람이 수두룩 했다는 거지요.
그 이전 2장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지 못하여 갈등을 겪고 싸움박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이 이상적인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여서 천국을 건설해 놓고 살아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병원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혈기 많은 사람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입이 가벼워서 걸핏하면 다른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안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내가 바로 그중 한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할 겨를이 없습니다. 교회에 흠이 있다고 마치 전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매도하거나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생각, 개념을 바꿉시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만약 이 땅에 살아가다가 한 완전한 교회를 만나시거든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거나 그 교회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교회 한 멤버가 되는 순간 그 교회는 흠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등이 있는 교회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V. 치료중·공사중
좋은 병원은 언제나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서 치료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환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딱히 돈을 많이 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원만 차지하고 있다든지 오히려 병원에 갈때마다 병을 키워가지고 온다고 하면 그 병원은 문을 닫아야 할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와서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다고 하면, 영혼이 아픔을 치료받지 못한다고 하면, 오히려 상처를 키운다고 하면, 죄의 덩어리를 더 키워서 가는 곳이 교회라고 하면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치료를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토막으로 짤라 놓고 보면 제대로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 투성이 입니다.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아직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흠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왜요? 이 교회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지상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파가 달라도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게 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연약하게 보여도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왜요? 그 교회안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너도 환자요 나도 환자입니다. 병원에서 안대하고 나오는 사람이 다리 부러진 사람보고 비웃지 않습니다. 팔 부러진 사람이 맹장 수술하고 나온 사람 비난하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이 병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장 32절 마지막절에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폐증 딸을 둔 가정이 있습니다. 그 부모는 맞벌이 가정이었습니다. 제게 상담하기를 “이 아이를 어디에 좀 맡겨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물었습니다. 제가 정색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안에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 땅에 태어날 때에 가족공동체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제 충고를 받아 들여 그 어머니가 직장을 휴직했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는가 하면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치료받는 분위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안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경험함과 동시에 가족적인 소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가족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날개의 교회입니다. 내 아픔을 자연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실수해도 용납이 되는 자리 말입니다.
VI. 우리는 한가족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영원한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도 한 집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의 몸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의 신부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습니다. 신부의 옷을 찢고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못나 보여도 소중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고 교회에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2장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사람들입니다. 혼자 발버둥쳐도 나 혼자만 완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겸손히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서로 세워주고 붙들어 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목장입니다. 사랑방입니다. 소그룹입니다. 남의 탓, 교회 탓하지 말고 자기를 성숙시켜 나가면 자신도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를 극장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옆사람에게 신경쓸 필요없이 공연내용에만 집중하면 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나혼자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을 받으면 됩니다. 교회안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은혜와 감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 감동은 무책임한 감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학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여러 강좌를 개설해 놓고 내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백화점과도 같습니다. 좋은 물건 쌓아 놓고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사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본래의 모습, 본질은 아닙니다. 필요를 채워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 가족입니다(엡2:19).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한가족입니다. 가족은 위기 때에 서로 의지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연약한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해 주는 것입니다.
VII. 치료의 현장 = 소그룹(목장)
이제 교회에 대한 이상이 분명해 졌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가족이다. 치료중인 병원이다. 서로 치료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돌봐주며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공사중입니다.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치료중, 공사중입니다.
거기엔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땐 땅만 고르고 골조 공사만 계속되는 것 같지만 아파트가 완성되어 입주하는 날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1년, 5년, 10년을 교회 다녀도 생활이 변화되지 않고 습관, 사고방식 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면 교회생활 잘못한 것이지요. 교회는 치료가 있는 병원입니다. 치료가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를 치료하고 나면 손을 치료해야 되고 손을 치료하고 나면 다시 발을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안에는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 되어지는 것을 원치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태도가 못됩니다. 성장을 원한다고 모두 성장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치않는다고 성장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체가 건강하면 성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속에 교회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그 마음만큼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마음이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교회는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커져야 하고 또 한편 계속 작아져야 한다고 외쳤던 릭 워렌의 말은 진리입니다. 교회의 공동체성, 가족경험, 심령의 치유등은 작은 모임에서만 이루어 집니다.
여러분 이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신다면 3명에서 11명 정도의 교우들이 모이는 목장의 일원이 반드시 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12명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 모임은 소그룹에서 실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12명 중에 한명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12명이 되면 6명씩 나누어서 양육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 성도들이 주로 지역마을에서 낮에 모이는 마을 목장이 있습니다. 직장인들이 밤이나 주말에 모이는 목장도 있습니다. 원거리에서 출석하시는 분들은 이제 3부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우리교회 구석구석에서 소그룹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일 오후 목장입니다. 남성들이 모이는 목장이 있습니다. 부부들이 모이는 목장이 있습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 직업이 같은 사람들,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만들기 나름입니다. 거기 목자는 평신도 목사입니다. 앞으로 목장은 온전한 작은 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 예배와 훈련, 교제와 친교, 새가족 양육과 전도, 지도자 양육, 온전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소망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이해하지는 맙시다. 아직도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치유가 활발히 일어나는 병원으로 만들어 가면 거기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도 치유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치유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는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십시다.
이 자리에 모이는 큰 한소망교회는 작은 목장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런 예배와 찬양, 큰 힘이 필요한 선교, 성도들 훈련등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제 목장들이 저마다 흩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하십시다. 연약하고 모자라는 모습 그대로 신비한 교회입니다. 치료중, 공사중 그 모습은 지상교회의 이상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성도가 있습니다. 새벽에 아파트에 나가 세차를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40대 정도 세차하던 차량이 한대 두대 줄기 시작하더니 10대 이하로 줄어 들었습니다. 그걸 가지고는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 뒷바라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목장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후에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오전내내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도와 주어야만이 겨우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되었습니다. 믿음이 들어간 이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싶지만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목장예배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장 식구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십시다. 목장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일제히 가서 함께 세차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 교회 오기 전에 모두 가서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세차를 거들어 주고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사람 두사람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저 사람을 붙여 주기도 하고 그래서 어렵던 그 이전 수준으로, 세차를 새벽에만 하고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리에 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로 함께 나누어지는 공동체, 이 교회에 올 때마다 영광스러운 예배를 체험할 수 있는 교회, 예배의 날개가 힘있게 뻗어 나갈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소그룹이 힘차게 살아서 움직이는, 죽었던 소그룹의 날개가 힘있게 창공을 향하여 치솟아 오르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그 모습은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지상에 있는 이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세속주의 물결이 힘차게 밀려오는 미래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폭발적으로 증가되는 인구를 전부다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정복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려 그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공사중 너도 공사중입니다. 나에게는 너가 필요하고 너에게는 내가 필요합니다. 나도 치료중 너도 치료중입니다. 나는 너를 어루만지고 너는 나를 어루만질 때에 주님이 기뻐하는 복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교회 공동체 공사중
엡 2:11-13 / 류영모 목사
. 공사중
교회의 풍성과 충만이라는 주제로 시작했던 에베소서 1장은 「두 날개로 나는 독수리」 그것은 주님 올 때에 능력있는 미래를 힘있게 추수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두 번째 장에 넘어오면 하나님의 몸된 교회 위에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때로는 갈등을 느껴야 되며 때로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 할 때에 이 교회는 아직도 공사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메시지의 제목이 「공사중」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전 저는 신도시 개척교회에 대한 꿈을 안고 수도권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먼저 분당엘 갔더니 일부 공사가 끝나고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이곳 저곳에서 아파트가 힘있게 올라가는 골조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또 한켠에서는 땅을 반듯하게 일구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부천에 있는 중동엘 갔더니 땅을 반듯하게 닦아놓고 이제 막 건축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마지막에 일산엘 와 봤습니다. 아직도 산을 깎고 개울과 논을 메꾸고 있었습니다. 멋모르고 차를 몰고 왔다가 진흙탕에 빠져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일산 땅이 내 모습과도 같고 아직 시작 준비도 하지 못한 우리교회 모습과도 흡사하여 개척지를 일산으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가끔 길을 가다보면 이런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공사중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건축중」「공사중」- 이 말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공사중입니다. 거기 있는 모든 성도들도 완성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건축중이요, 모두가 치료중이요, 모두가 공사중입니다.
II. 문제없는 교회가 어디 있을까?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하던 아무개 씨는 서울에서 전통적인 한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조금 생활이 깊어지면서 교회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오면 사랑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하여 교회 임원의 역할도 해보고 싶은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안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도 그렇게 살기가 힘이 들고 또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니 예수믿는 사람들 가운데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안믿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교회안에서도 투닥 투닥 싸움하는 소리가 가끔은 들려 옵니다.
아예 발을 쑥 빼고 냉소주의자가 되어 구경꾼처럼 신앙생활을 하던 차에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집 앞에 마침 크지 않은 교회가 있어 등록을 하게 되었고 등록을 하자 마자 교회의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 줍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일이냐? 목사님과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목사님을 도와 내가 바라던 그 아름다운 교회를 이제 만들어 봐야지. 그런데 웬걸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상처를 받기 시작합니다. 목사님도 이 사람이 내 목회에 걸림돌이구나 실망을 합니다. 서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크게 환멸을 느낄 수 밖에 없지요.
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마찬가지 실망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이 일로 부부 싸움이 잦아 졌고 부부가 합의하여 당분간 교회에 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예배도 몇 주 드리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래도 교회를 버리기엔 신앙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딘가에 좋은 교회가 있겠지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 용서가 있는 교회, 은혜와 감동이 있는 교회 - 그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오늘도 헤매어 봅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나를 반겨주는 교인들의 목사님의 환대마져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고 교인으로 잡아 두려는 위선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는 냉소주의, 무관심 주의가 되었다가 또 하루는 불평분자, 비판주의자가 되어 불행한 성도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에 행복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III. 자기 중심의 교회관
이 아무개 집사처럼, 초대교회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천국이 건설될 줄 알았는데 거기서 아픔과 상처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려 옵니다. 그러다가 정작 쓰러지고 넘어지는 사람은 비판하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교회에 일원이 되면서 나름대로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교회는 저래야 한다” 마음대로 평가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은 이방인이요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던 자들이었다. 아직도 시각이나 가치관이 세상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너무 쉽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가 왜 이래? 너무 쉽게 하나님의 교회를 평하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교회를 섬기면서 종종 느끼는 아픔이 이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고 언론들이 교회를 난도질하는 것까지는 이해함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교인들 함부로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상처를 내는 말들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 대로 떠듭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하나씩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어 주어야 할 만큼 친절해야 한다. 교회는 구제를 많이 해야 한다.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돕고 선교를 많이 해야 된다. 교회는 크게 성장해야 한다. 또 반대편에서는 교회는 작아야 교회답다. 교회에 모일 때 큰 소리로 기도해야 교회가 뜨거운 교회요 좋은 교회다. 또 한켠에서는 교회는 신사적이어야 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야단스러우면 안된다. 자기 나름대로 교회에 교회관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의 무차별 사격에 가까운 비판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교회생활과 신앙이 위험 상태에 빠져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너희들이 살아온 삶이나 지금 살아가는 가치관이나 헌신등이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곳인지, 왜 교회안에 연약성이 있는지, 왜 교회가 내 생각과 다른지 배워야 할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가 하나님,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제 갓 결혼식장에서 걸어나오는 신부를 대하듯이, 지금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아기를 대하듯이, 경외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그 고결함을 손상시킬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생각이고 바른 시각입니다.
신학생 때는 세상 모든 교회들이 다 때묻어 보입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속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를 평가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목회현장에 나와 목회를 해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이 더 웃기는 목회를 하고 있음을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교인 10명만 모이면 거기 교회관 10개가 있습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교회요 목회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는 교회에 이유가 있구나. 겸손해 집니다. 이쯤은 양호한 목회자입니다. 정말 구제불능인 목회자는 나하고 다른 행태들을 마구 비난합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그 비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박수도 보내줍니다. 그러는 중에 자신이 섬기는 교회는 황폐되어져 가고 메말라 갑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혼란을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상의 교회, 지역교회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끊임없이 죄와 싸우는 부족한 죄인들이 초청받아 몰려온 곳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에 허물이 있다고 연약성이 있다고 내 맘과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너무 쉽게 화를 쏘아대서는 안됩니다. 그 연약성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간의 이상향이 무엇인가를 의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의 허물을 마구 비난하면 가정의 행복은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의 교육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내 자녀는 내 격려의 대상일 뿐입니다.
IV. 교회는 병원이다
어떤 교회가 과연 이상적인 교회일까요?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교회론을 다룬 책이 에베소서입니다.
교회를 몹시도 사랑했던 칼빈은 66권 가운데 에베소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장로교회 창시자 죤 낙스는 말년에 칼빈의 에베소서 강해를 읽고 또 읽으며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콜릿지 같은 분은 “인간이 쓴 서신 가운데 가장 신성한 작품이 에베소서다” 라고 말했습니다. 주경가 스코트는 “헨델이 영감을 받아 무릎꿇고 할렐루야를 작곡했다면 바울은 영감을 받아 무릎을 꿇고 교회가 무엇인가?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격찬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여러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는 그래서 이상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장 많이 갖춘 교회였습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고 하면 창립자가 좋아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 창립자는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였기 때문에 교회를 창립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세우고 다시 다른 교회를 향하여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에베소 교회만큼은 교회를 창립한 이후 3년동안 목회를 했고 또 처음 멤버들에게 소중한 제자훈련을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위치적으로 교회가 서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통중심지였습니다. 당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다이아나 신전이 세워질 만큼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고 당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였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훌륭한 교회론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목회자가 훌륭했습니다. 위치적으로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에베소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전혀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크게 실망을 주는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자녀들과 핸드폰 통화를 하면서 “밥 잘 먹어라” 한다면 그 아이는 밥을 잘 안먹는 아이일 겝니다. “밤에 일찍 들어오너라” 라고 말한다면 아마 귀가 시간이 좀 늦은 아이라는 뜻입니다. 전화를 하다가 “오늘은 싸우지 말고 들어 오너라” 그렇게 얘기한다면 이 아이는 싸움쟁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보면 바울은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에베소 교회안에 거짓, 진실하지 못함, 위선이 가득했다는 얘기입니다.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안에 혈기 부리는 사람들, 걸핏하면 화를 버럭내는 사람들, 성질 더러운 사람들이 가득했던 모양입니다.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 다시 교회안에 심지어 옆에 앉아있는 사람 가방 뒤지고 도벽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29절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교회안에 상소리, 음담을 좋아하는 사람, 이간질하고 흉보고 헐뜯고 입술로 범죄하는 사람이 수두룩 했다는 거지요.
그 이전 2장에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지 못하여 갈등을 겪고 싸움박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모습이 이상적인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회는 성인들이 모여서 천국을 건설해 놓고 살아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말하는 이상적인 교회는 병원이었습니다. 교회안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혈기 많은 사람들, 거짓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입이 가벼워서 걸핏하면 다른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교회안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내가 바로 그중 한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누구를 비판할 겨를이 없습니다. 교회에 흠이 있다고 마치 전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매도하거나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에 대한 생각, 개념을 바꿉시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병원입니다. 만약 이 땅에 살아가다가 한 완전한 교회를 만나시거든 여러분들은 절대로 그 교회에 등록하거나 그 교회 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교회 한 멤버가 되는 순간 그 교회는 흠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등이 있는 교회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V. 치료중·공사중
좋은 병원은 언제나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서 치료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병원은 환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합니다. 딱히 돈을 많이 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병원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병원만 차지하고 있다든지 오히려 병원에 갈때마다 병을 키워가지고 온다고 하면 그 병원은 문을 닫아야 할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와서 상처를 치료받지 못한다고 하면, 영혼이 아픔을 치료받지 못한다고 하면, 오히려 상처를 키운다고 하면, 죄의 덩어리를 더 키워서 가는 곳이 교회라고 하면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치료를 경험하고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토막으로 짤라 놓고 보면 제대로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 투성이 입니다.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이 이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아직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흠이 있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왜요? 이 교회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갈기갈기 찢겨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지상교회는 하나입니다. 교파가 달라도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게 하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연약하게 보여도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왜요? 그 교회안에는 영광스러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너도 환자요 나도 환자입니다. 병원에서 안대하고 나오는 사람이 다리 부러진 사람보고 비웃지 않습니다. 팔 부러진 사람이 맹장 수술하고 나온 사람 비난하지 않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이 병원입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장 32절 마지막절에 보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자폐증 딸을 둔 가정이 있습니다. 그 부모는 맞벌이 가정이었습니다. 제게 상담하기를 “이 아이를 어디에 좀 맡겨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물었습니다. 제가 정색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의 사랑안에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이 땅에 태어날 때에 가족공동체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제 충고를 받아 들여 그 어머니가 직장을 휴직했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는가 하면 지금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치료받는 분위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큰 교회안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경험함과 동시에 가족적인 소공동체 안에서 신령한 가족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날개의 교회입니다. 내 아픔을 자연스럽게 내어놓을 수 있는 자리 말입니다. 실수해도 용납이 되는 자리 말입니다.
VI. 우리는 한가족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고 영원한 가족이 되어 천국에서도 한 집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의 몸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 거룩하신 분의 신부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는 없습니다. 신부의 옷을 찢고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못나 보여도 소중한 주님의 신부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기고 교회에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2장 13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사람들입니다. 혼자 발버둥쳐도 나 혼자만 완전해 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겸손히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서로 세워주고 붙들어 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목장입니다. 사랑방입니다. 소그룹입니다. 남의 탓, 교회 탓하지 말고 자기를 성숙시켜 나가면 자신도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를 극장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옆사람에게 신경쓸 필요없이 공연내용에만 집중하면 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나 설교를 통해 나혼자 은혜를 체험하고 감동을 받으면 됩니다. 교회안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 은혜를 체험한다는 것, 느낀다는 것,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의 은혜와 감동으로 끝난다고 하면 그 감동은 무책임한 감동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학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여러 강좌를 개설해 놓고 내가 필요한 부분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백화점과도 같습니다. 좋은 물건 쌓아 놓고 손님이 필요한 물건을 사가도록 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것은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본래의 모습, 본질은 아닙니다. 필요를 채워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치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 가족입니다(엡2:19).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한가족입니다. 가족은 위기 때에 서로 의지합니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연약한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해 주는 것입니다.
VII. 치료의 현장 = 소그룹(목장)
이제 교회에 대한 이상이 분명해 졌습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가족이다. 치료중인 병원이다. 서로 치료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돌봐주며 만들어 가는 곳이다. 그래서 공사중입니다. 아직도 공사중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치료중, 공사중입니다.
거기엔 반드시 변화가 있습니다. 어떤땐 땅만 고르고 골조 공사만 계속되는 것 같지만 아파트가 완성되어 입주하는 날이 있게 마련입니다. 만일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1년, 5년, 10년을 교회 다녀도 생활이 변화되지 않고 습관, 사고방식 가치관의 변화가 없다면 교회생활 잘못한 것이지요. 교회는 치료가 있는 병원입니다. 치료가 완성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를 치료하고 나면 손을 치료해야 되고 손을 치료하고 나면 다시 발을 치료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안에는 교회가 성장하고 대형화 되어지는 것을 원치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태도가 못됩니다. 성장을 원한다고 모두 성장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치않는다고 성장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체가 건강하면 성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속에 교회의 가족적인 분위기를 원하는 그 마음만큼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마음이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교회는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커져야 하고 또 한편 계속 작아져야 한다고 외쳤던 릭 워렌의 말은 진리입니다. 교회의 공동체성, 가족경험, 심령의 치유등은 작은 모임에서만 이루어 집니다.
여러분 이 치유와 성숙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신다면 3명에서 11명 정도의 교우들이 모이는 목장의 일원이 반드시 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12명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 모임은 소그룹에서 실패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12명 중에 한명은 실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12명이 되면 6명씩 나누어서 양육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 성도들이 주로 지역마을에서 낮에 모이는 마을 목장이 있습니다. 직장인들이 밤이나 주말에 모이는 목장도 있습니다. 원거리에서 출석하시는 분들은 이제 3부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우리교회 구석구석에서 소그룹으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일 오후 목장입니다. 남성들이 모이는 목장이 있습니다. 부부들이 모이는 목장이 있습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 직업이 같은 사람들,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만들기 나름입니다. 거기 목자는 평신도 목사입니다. 앞으로 목장은 온전한 작은 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섬김, 예배와 훈련, 교제와 친교, 새가족 양육과 전도, 지도자 양육, 온전한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소망 교회를 온전한 교회로 이해하지는 맙시다. 아직도 공사중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치유가 활발히 일어나는 병원으로 만들어 가면 거기 아름다운 교회, 이상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도 치유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치유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는 가족공동체를 만들어 가십시다.
이 자리에 모이는 큰 한소망교회는 작은 목장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스런 예배와 찬양, 큰 힘이 필요한 선교, 성도들 훈련등을 담당할 것입니다. 이제 목장들이 저마다 흩어진 자리에서 온전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하십시다. 연약하고 모자라는 모습 그대로 신비한 교회입니다. 치료중, 공사중 그 모습은 지상교회의 이상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한 한 성도가 있습니다. 새벽에 아파트에 나가 세차를 하는 것이 자기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40대 정도 세차하던 차량이 한대 두대 줄기 시작하더니 10대 이하로 줄어 들었습니다. 그걸 가지고는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병석에 누워있는 남편 뒷바라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목장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후에도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오전내내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도와 주어야만이 겨우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되었습니다. 믿음이 들어간 이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싶지만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목장예배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장 식구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십시다. 목장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일제히 가서 함께 세차를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 교회 오기 전에 모두 가서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세차를 거들어 주고 함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한사람 두사람 기도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저 사람을 붙여 주기도 하고 그래서 어렵던 그 이전 수준으로, 세차를 새벽에만 하고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자리에 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나의 문제가 너의 문제로 함께 나누어지는 공동체, 이 교회에 올 때마다 영광스러운 예배를 체험할 수 있는 교회, 예배의 날개가 힘있게 뻗어 나갈 수 있는 교회, 그리고 소그룹이 힘차게 살아서 움직이는, 죽었던 소그룹의 날개가 힘있게 창공을 향하여 치솟아 오르는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 그 모습은 주님이 그토록 세우기를 원했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지상에 있는 이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세속주의 물결이 힘차게 밀려오는 미래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폭발적으로 증가되는 인구를 전부다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한다면 우리는 미래를 정복할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려 그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공사중 너도 공사중입니다. 나에게는 너가 필요하고 너에게는 내가 필요합니다. 나도 치료중 너도 치료중입니다. 나는 너를 어루만지고 너는 나를 어루만질 때에 주님이 기뻐하는 복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새 사람
에베소서 2:11-22 / 이수영 목사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비롯한 주변 여러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써 보낸 편지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는 이방의 도시였기에 당연히 그곳 교회에서는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이지만 그곳에 살던 유대인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도 섞여있었을 것입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지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불일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는 한 교회 안의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과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하나 됨을 말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할례를 언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표지로 보았고 그것을 자랑하는가 하면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을 성결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할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 이방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보다 본질적으로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합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당연히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고 따라서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알고 그를 기다리는 신앙을 가졌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이삭, 야곱에게 복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반복하셨으며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언약들에 친숙해진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민족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낯선 민족들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알지 못하는 백성은 소망이 없을 수밖에 없는 백성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자"라는 말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믿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이런 저런 우상을 섬기며 사는 자들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없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신 속에 사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이 없는 자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14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합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라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이를 말하는 추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로 헤롯 1세가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는 세 개의 뜰이 있었는데 제일 외곽에 있는 뜰이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개방된 넓은 마당입니다. 그러나 더 안쪽에 있는 여인들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에는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들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더 안쪽의 뜰을 둘러싸고 있는 담이 이방인의 뜰과의 경계 역할을 했습니다. "중간의 막힌 담"이라 한 것은 그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담에는 열세 개의 돌판이 간격을 두고 부착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외국인은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두 개의 돌판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실제로 거기에 외국인은 들어갔다가 잡히면 죽는다는 경고문이 씌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있을 때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는 많은 사람들을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소리지르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행21:27-28)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온 성에 난리가 나고 사람들이 달려와 모여들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이려 한 것입니다(행21:31). 그 소동이 벌어진 것은 그 전에 사도 바울이 드로비모라 하는 에베소 사람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는 바울이 그를 성전에도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행21:29). 그만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성전에 접근할 수 없는 자들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기 육체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쓸 때 그는 실제로 이 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담을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차별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들,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참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보게 하는 상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중간의 막힌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린 당신의 몸으로 무용지물화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함께 무용지물화 되었으면서도 주후 70년까지도 남아있던 그 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함께 실제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 담 때문에 가까워질 수 없고 화평할 수 없었던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가까워지고 화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5절에서는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은 피의 제사라든가 정결예식이라든가 할례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모든 율법을 폐기시켰습니다. 그것들이 더 이상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요인도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들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모두 한 새 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으면 원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으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원수관계를 소멸시킨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그 원수관계를 소멸시켜주십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차별 없이 평안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 16-17절에서 쓰기를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하는데 "먼 데 있는 너희"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말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사57:19) 하신 예언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누구에게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믿게 하시는 이는 오직 성령이십니다.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 18-19절을 봅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성령의 역사 안에, 그가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나라의 "동일한 시민"이고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시민이고 한 가족이라 한 사도 바울은 또한 그들이 함께 한 성전이 됨을 말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교회는 예수님의 직제자들인 열한 명의 사도와 뒤늦게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전수한 신앙과 그 외의 선지자들의 가르침 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고 사도들 이후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교회를 격려하며 이끈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는 것은 그들이 가졌던 근본신앙입니다. 그 근본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이에게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이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터 위에 교회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친히 그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에 있어서 큰 건물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무게 중 가장 중한 무게를 지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퉁잇돌이 튼튼해야 건물이 튼튼해집니다. 모퉁잇돌이 없으면 건물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석으로 사용된 거대한 돌 다섯 개를 발견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돌의 가로가 16.5미터, 세로가 4.2미터, 높이가 3.3미터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이 돌의 무게는 무려 570톤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큰 돌이 든든히 떠받들고 있던 그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친히 우리의 믿음과 구원과 영생의 모퉁잇돌이 되어주셨습니다. 그가 아니면 우리의 믿음도 구원의 확신과 영생의 소망도 다 헛된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가 아니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도 우리 인간들 사이의 화해도 다 불가능한 일이며 하나 됨과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할 것 없이 한 몸으로 연결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백성이 곧 교회이고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본문 21-22절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어진 모든 이들은 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런 차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새 성전입니다. 무릇 성전을 짓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히 복된 삶의 소망입니다. 그것 없이 짓는 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드러나는 성전이 좋은 성전입니다. 그 신앙고백이 날마다 행해지는 성전이 참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앙고백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새 성전을 짓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인 우리들 자신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 가운데 기쁨으로 함께하시도록 우리의 믿음을 더욱 튼튼히 하고 우리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하며 우리의 소망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우리의 삶이 더욱 진실해지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의 뜰과 속죄의 제사가 행해지던 안쪽 뜰 중간의 막힌 담을 헐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찢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그를 믿기만 하면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영원히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과의 차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새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모든 이들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성전이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그리고 피
엡 2:11-18 / 김삼환 목사
이번 한 주간은 기독교가 왜 있느냐? 또 교회가 오늘까지 어떻게 내려 왔느냐 교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다 대답해주는 것이 바로 이 한 주간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클라이맥스입니다. 오페라에서처럼 하나를 위해서 다른 모든 무대장치가 있듯이 말입니다.
신, 구약 성경 모두가 다 이번 한 주간을 대답해 주고, 유효하게 하고, 가치 있게 하고, 신.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모든 것과 다르며, 그 능력의 비밀이 어디에 있느냐?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이번 한 주간의 사건에 있습니다. 한 주간 가운데도 마지막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금요일과 부활하신 주일 아침은 오늘 기독교의 다이아몬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 왜 능력이 있고, 기독교가 왜 능력이 있고, 모든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권력의 보호를 받아 교회가 왔습니까? 그 많은 산맥을, 시험을, 환란을, 누가 이겼느냐? 바로 이번 한 주간의 사건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해수욕장에 가면 그런 말을 하지요. 한달 벌어 일년 먹고 산다.전체 기독교를 먹이는, 살리는, 전체 기독교의 빛을 비추는 능력이 바로 이 한 주간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한 주간을 잘 알아야 말씀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기독교를 알고, 아니 우주를 알고, 나를 알고, 구원을 알고, 세계를 알고, 우리의 미래를, 천국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 복음을 증거 하시다가 마지막한 주간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하십니다. 당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환영하지요. 유대의 메시야인줄 알고 환영 하지만은 예수님은 유대인을 건지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를 구하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백마를 타고 왕으로 군림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저주와 멸망에서 구원하여 인류 전체를 축복하고 다스리는 왕의 왕으로 이렇게 오신 것입니다.
유명한 요세비우스라고 하는 학자에 의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백만명 정도의 군중들이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아름답고 거룩한 예식을 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주님께서 뒤엎으시고 내어 쫓으시고 청소를 하셨어요. 장사꾼이 되어버린 예루살렘이기 때문이예요. 공장 이예요. 시장이예요. 내용은 다 썩었어요. 형식적인 종교의식만 있었지 하나님앞에 아무 의로움도, 진실함도 없는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으셨어요.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주의 종이 잘못하면 비즈니스가 되기 쉽습니다 장사꾼의 소굴이 되기 쉽습니다. 거룩한 처소가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가 되어서 끊임없이 교회는 깨어있어야 되고, 기도해야 되고, 근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요일날 주님은 많은 유대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함께 부활문제, 천국문제, 납세문제 등을 가지고 질문하신 것이 성경에 나오지요. 수요일은 죄많은 여인이 와서 눈물로 발을 씻겨주는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오늘 베푸셨던 성찬예식을 행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따라온 모든 제사장의 군인들과 함께 붙들려서 제사장 가야바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곳에서 심문을 받고 마지막 밤에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금요일 아침 십자가를 향해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금요일 오후 3시에 운명하 시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대체로 십자가 위에서 3일 정도를 버틴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많이 굶으셨는지, 약하셨는지 몰라도 예수님은 일찍이 운명하셨기 때문에 다른 옆의 강도들은 다리를 꺾어 버립니다. 부러뜨렸습니다. 어떤 로마 군인들은 무릎 아래를 다 부셔서 죽이는 일도 있는데 예수님은 군인들이 와서 다리를 꺾으려 하니까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남은 몸안의 물이 나오더라 하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리고 무덤에 계셨다가 주일 아침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40일 동안 땅에 계시다가 마지막 감람산에서 수많은 제자들과 군중과 성도들이 보는데서 승천하시고 이제 이 땅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처형한 로마가, 그 예수를 그 나라에 왕으로 맞이하면서 기독교는 세계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이 우리나라의 천한 사람을 처형해 놓고 죄인을 처형해 놓고, 일본의 왕으로 모시겠어요? 일본의 왕이 그 앞에 엎드리겠어요?
로마의 총독이 허락하고, 모든 유대인들과 왕과 제사장이 다 법적 절차를 밟아서 죽였던 예수를 로마의 그 십자가를 자기들의 국기로 만들고 온 유럽이 그 예수를 그 나라의 구주로 받아 들여서 모든 왕과 방백과 모든 지도자와 권력자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면서 기독교를 이천년 동안 온 세계로 복음을 증거하는 나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이 놀라운 사건, 왜 예수님이 오시고 왜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셔야 하고, 십자가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피를 흘려 주셨는가 하는 이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왜 나 위해 피 흘리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저주요, 불행인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저주는 하나님 앞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장례식을 할때 제일 안타까운 것은 젊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아이들은 거의 모릅니다. 밥달라고 투정하고, 어머니의 관 앞에서 장난감 갖고 놀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모릅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왜 죽으셔야 했는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데도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1장 3절에는 소도 임자를 알고, 나귀도 구유를 알것만은 내 백성 인간은 창조자를 아버지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게 가서도 아버지라고 하고, 돌에게도 아버지라고 하고, 다 가서 빌고 하면서 참 아버지를 모르고 못 찾는 것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고통이 인간의 불행이 하나님을 떠났는데도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죽었는데도 그것을 모른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구원이 뭐냐. 십원 주면 교회 나간다고 하는 말도 듣게 됩니다. 아주 웃습니다. 천국이 뭐냐.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는다는, 지성인들도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저는 들었습니다.
서울에 몇째 가는 큰 병원의 외과 과장이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그랬어요. 그분이 난데없이 중풍에 걸렸어요. 40대의 젊은 분이 쓰러졌어요. 미국을 가도, 독일을 가도, 안되는 거예요. 침을 질질 흘리고 피를 계속 수혈하고 저에게 와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해서 가니 얼마나 울면서 회개를 하는지. 자기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 그랬다고 하며 우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다 그런 말들을 하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귀한 것이 곳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술 한 잔은 귀한 줄 알면서 빠져 죽는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술을 구세주로 알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창조자를 모르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길 잃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하여 미련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고 그가 피흘려 죽으심으로 이 모든 일에 눈을 뜨고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 신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피, 이것이 보배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무한한 능력입니다. 은혜입니다. 측량할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 보혈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말로 다 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전 1 : 22에 보면 너희는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사람이 표적을 찾고, 지혜를 찾고, 지식을 찾고, 학문을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찾습니다. 이 보다 놀라운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이 보다 더 귀한 보배는 이 세 상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우리를 모든 죽음에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생은 죽은 것입니다. 태어난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으면 죽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줄 자가 누구입니까?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낼 자가 누구입니까? 소련 우주선이 고장으로 인해 지구로 귀환을 못할 때 소련 수상이 전화를 했습니다. 동무의 죽음은 우리 소비에트의 영원한 영광이니 장렬하게 소비에트를 위해 순교하시오. 그럴 때 우주인이 지구를 향해, 수상에게 매어 달렸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나를 살려 주세요. 살고 싶습니다. 살려주세요.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미국의 인공위성 첩보에 이 소리가 들려왔어요.
사람은 살기를 원합니다. 살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낼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을 살고,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하나 염려없이 항상 생명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사는 줄 믿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셔서 나 위하여 죽으심으로 죽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는 것과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인데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이제는 죽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내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다른 동물의 죽음과 다릅니다. 죄로 인한 죽음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사함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불의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영적인 문제들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혼수감에 있는 줄 알고 싸우고 이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격 차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성격 차이도 아니요, 혼수감도 아닙니다. 성격은 원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격이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과 저주와 어려운 환란은 전부 영적인 문제입니다. 죄로 인하여 오는 것이고 사탄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귀에서, 죄에서, 사망에서 하나님을 떠난데서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것 이것이 인간의 문제를 풀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요 보혈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입니다. 죄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고 죄로 인해 죽은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시 51 : 5에 보면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요,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태어날 때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중에 나를 낳았어요. 그래서 사람은 날때부터 곁길로 가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 길러 보십시오. 걷기만 하면 엉뚱한 길로 갑니다. 저도 외손자가 요사이 와 있는데 보니까요 그 전에 안고 다니던 아이가 걸어 다니는데 한 순간도 가만히 두면 안돼요. 곁길로 갑니다. 그래서 남자는 직장생활 하는 것이 낫지요. 집에서 아이를 보면 사람이 환장하고 미치는 거예요. 인간은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죄악중에 태어 났습니다. 그래도 죄를 모르고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죄인을 비웃고, 욕하고, 죄인과 싸우면서 의인인척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모스 1장, 2장을 보면 모든 인류는, 모든 국가는 다 죄인이에요. 다메섹, 가사, 에돔, 암몬, 이스라엘, 유다, 아모리, 다 죄값으로 벌받은 거예요. 스바냐 3장 1절에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예요. 방백은 사자요, 재판장은 이리와 같고 선지자와 제사장도 다 간사하고 더럽고 하나님 앞에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롬 3장 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예요. 의인은 없어요. 의인인척 하는 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교도소에 가면 먼저 온 죄수들이 늦게 온 죄수들의 신고를 받는데요.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요, 뺑뺑이를 돌리구요, 어디서 어떻게 범죄를 했는지 그 이야기를 듣고, 웃고, 때리고 하면서...
오늘 누가 누구를 정죄하는 것입니까? 선진국과 미개한 국가의 차이는요 선거를 치르면 선진국은 상처가 없어요. 공격을 서로 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선거가 한 번 치러지면 온 나라가 상처 투성이예요. 다 긁어내리는 거예요. 죄인이 누구를 향해 긁어내는 것입니까? 선진국은 자기가 앞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일들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지만 이렇게 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그것을 보고 국민이 지지하고 밀어줍니다. 우리는 뜯어내려야 하는 거예요. 진돗개 같이 물고 늘어져야 하는 거예요.
죄인입니다. 다 죄인입니다. 이 죄에서 우리를 건져낼 이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제가 불효하고 어머니를 떠나 왔을 때 언제나 어머니는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죄인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들로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삼환아 부르셔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도 여러분을 죄 인이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오늘도 찾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예수 앞에 오라“
죄인이 죄짐을 벗을 수 있는 것은, 죄의 능력이 전혀 역사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그 그늘 아래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와서 의인이 되고, 저주받을 죄에서 오히려 복을 받는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는 곳. 죄인을 환영하는 곳.
죄인이어야 예수님이 사랑스럽고, 죄인이어야 은혜 받는 자리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서울에 어느 정치인이 서울에서 교회 안 나가고 시골 교회에 나갔어요. 왜 서울에서 다니지 않느냐고 하니까 가는 곳곳마다 자기를 보고 유식한 이야기하고 정치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들으려고 복음을 들으려고, 보혈의 피로 구속함을 받는,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가는데 서울 교회들은 전부 다 나를 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교회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마귀에게서 우리를 해방 시키셨어요. 우리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이 하나 있는데 마귀입니다. 배후에 있어요. 여기에서 온갖 오물들을 뿜어내고, 온갖 악한 일을 생산해내고, 만들어 내는 악한자의 어미예요. 모든 더러운 것의 어미가 사탄인 것입니다. 사탄을 누가 멸하셨습니까? 창 3 :15에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 대하여 뱀을, 사탄을 멸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박살냈습니다.
사탄은 망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오직 이 세상에 지는 것 예수의 십자가, 두려울 것은 예수의 십자가 이외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함을 얻고, 사탄이 두려워하는 자가 되려면 십자가 그늘아래 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배후에 있는 사탄인데 주님은 사탄에게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장벽도 있습니다. 미운 것 이것도 못 고칩니다. 누구 미운 것, 원수 되는 것 하나 있어 보세요. 이걸 무너뜨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 원수가 되었어요. 죄로 말미암아 큰 장벽이 놓였어요. 이것을 누가 무너뜨렸느냐.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게 된 것 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나라의 유대인의 절기로 일년 가운데 제일 큰 절기는 7월 10일의 대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에는 무엇을 합니까. 이스라엘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곳은 일년에 단 한 번 밖에 들어갈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모든 전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함을 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 이라고 말합니다. 물어봅니다. 몇일이라고요? 7월 10일. 그 날이 무슨 날? 대속죄일. 누가? 대제사장이. 어디에 들어가요? 지성소. 왜 들어가요? 온 유대 민족. 일년동안 지은죄. 오천만개도 넘는, 오억도 넘는 죄의 모두를 용서함 받는 날이 그날 이예요. 시루떡을 갖고 들어가느냐? 소고기를 갖고 가느냐? 과일을 갖고 가느냐? 돈을 갖고 가느냐? 아니예요. 양을 잡아서 뻘 건피, 그 묵직한 피를 가지고 가서 안 지성소에 들어가 일곱 번 뿌리는 것,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 죄를 사하는 의식이에요. 이것을 몇 천년 동안 행하여 내려 온거예요.
이것을 잘 알아야 되요. 죄는 피가 아니면 용서가 안돼요. 이스라엘은 몇천년 동안 어떻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짐승의 피로 용서를 받은 거예요.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이 된거예요. 그날이 지나가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여 하나님이 그 땅에 복을 주시고 전쟁에 이기게 하시고, 그 민족에게 필요한 것을 그 하루가 지나야 채워주시는 거예요. 바로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앞으로 오셔서 양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하나님의 죄없으신 그 아들이 직접 피를 흘려 짐승을 잡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죽어서 자기의 피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온 인류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함 받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무서운 죄 때문에 원수 된 것을 아들이 죽으면서 그 피를 하나님 앞에 드림으로 이 장벽이 그냥 그대로 벽처럼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길이 열려진 줄로 믿습니다.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큰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저주되는 미워하는, 모든 심판받고 싫어하는 요소를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제거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하나님 앞에 마음껏 드나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손자가 나를 좋아하듯이 두려운것도 모르고 '할배'하며 마음대로 내게 올라오듯이.. 그래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 모든 축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이루어진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
에배소서 2:11-19 / 성흥모 목사
지난주간에는 ‘홀리 스피치’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11년 동안 KBS 뉴스 여성앵커였던 신은경씨가 지은 책이었습니다. 1981년에 KBS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첫 방송하는 날부터 9시 뉴스 진행자로 무려 11년 동안 일하신 분인데, 기독교인이요, 권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강의를 DVD로 들어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발음에 공감할 수 있는 전문적인 내용에, 시종일관 웃음을 유지하는 명강의였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말을 잘하려면 칭찬하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인용합니다. 아이들은 칭찬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칭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작게는 무엇 잘한 일을 놓고 잘했어요 라는 칭찬이 있고, 찾아서 ‘훌륭하다’는 칭찬이 있다고 합니다. 작게는 ‘잘 했어요’, 크게는 ‘훌륭해요’라는 칭찬이 있다고 합니다. ‘잘 했어요’라는 칭찬은 그 때 그 때 칭찬하면 되지만, ‘훌륭해요’라는 칭찬을 하려면 잘 찾아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강의하다가 옛날 대중가요지만, 건전 가요를 불렀습니다. 우리 젊었을 때에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잘 했군, 잘 했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신은경씨는 이 노래가 신기하고도 재미도 있어 불러보자고 합니다. 하춘화씨가 불러서 국민가요가 되었던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는 칭찬하는 긍정적인 노랫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 노래 첫 부분을 불렀습니다.
“영감~ 왜 불러 /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 보았지. / 어쨌소? /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병아리 한 쌍을 보았냐고 물었는데, 이미 먹었다는 거예요. 상황 끝. 병아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잘 했군, 잘 했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칭찬하고 격려해주어야 이 험한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홀리 스피치라는 책은 40일 간의 언어생활을 훈련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과 인간관계를 훈련하기 위하여 읽어볼 책입니다.
우리 사람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산다고 하여 인간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기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공동체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족과 관련된 어휘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보혜사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형제요 자매요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가족이 되었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버클리 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혼자서 먹이를 먹으면 얼마를 사느냐를 봤더니 600일을 살더랍니다. 다섯 마리를 함께 먹도록 했더니 700일을 살더랍니다. 세 번째 실험은 사람이 돌보면서 키웠답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끔 쓰다듬어 주면서 더 먹고 싶어 할 때는 더 주고, 먹기 싫어할 때는 다른 것을 주면서 지켜보았더니 무려 950일을 살았답니다. 미물도 더불어 살면서 사랑의 힘을 느낄 때는 행복한 마음으로 오래 산다는 사실입니다. 쥐도 사랑 안에서 오래 삽니다.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통해 동물도 이렇게 더불어 살면서 사랑을 주고받고 하면 그 결과로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수명이 연장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창세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일같이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를 연발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처음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자 거하는 것 좋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십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룬 후에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십니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화목의 제물이십니다.
먼저 예수 믿기 전의 우리는 이방인이요, 할례받지 않은 무할례자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11-12절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를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하나님과는 분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13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와 반역을 용서해주실만큼 사람을 넘치게 사랑해주신다고 하면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하시고 저주를 받게 하시고, 대신 우리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고 자녀로 받아주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표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보니,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덮고, 다시 심판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도 않으시고, 잊어버리기로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시기에 당신이 들어가는 곳마다 막혀진 담이 무너지고, 원수도 사랑하게 하시고, 화평 그 자체입니다.
14-16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란 헬라어로 ‘에이레네’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샬롬이라는 말은 적대감정이 없는 행복과 평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적대감정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장벽도 무너지고,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주셨고, 이방인 로마 사람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없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리를 놓은 사람이 되어야지, 담을 쌓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장벽을 무너졌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과 조금 배운 사람, 지배하려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 장벽이 높아만 가고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시 동서의 장벽과 남북 간의 불신과 멸시하려는 장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면 동서의 갈등과 편견이라는 장벽에 막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장벽, 경제 번영을 이룬 세대와 경제 번영을 누리는 세대 간에 장벽이 있습니다. 이념의 장벽을 넘어온 세대와 이념을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세대와 또 하나의 장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와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멸종시켜야 하는 족속으로 보면서 유럽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도 이젠 끝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멸종시킬 수 있습니까?
이러한 장벽에 또 다시 장벽을 쌓고 있을 때에 그 모든 장벽을 비웃듯이 무너뜨리고 하나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예수 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와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질시하고 원수 맺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되지 못하던 모든 것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원수되었던 모든 관계를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17-19절입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태백시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일으키신 르우벤 아처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Ⅲ) 성공회 신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영국성공회 신부가 되었고, 1957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된 미가엘 신학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재건을 위해 내한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다시 정비하면서, 태백시 황지에 예수원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영성운동을 하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교회(敎會)라는 말을 할 때에 한문자로 가르칠 교(敎), 모을 회(會)라고 표기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사상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모임이 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한다는 했습니다. 그래서 교라는 말은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서 교회(交會)라고 해야, 교회의 본래적인 의미를 준다고 했습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기는 합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있고, 천국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만남이요, 사귐이요, 교제요, 관계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르칠 교, 모을 회를 썼으니 말이 없었지, 만일에 사귈 교를 썼다고 하면 교회는 먹고 노는 곳인 줄 알았을 것이고, 교인들 자기들끼리만 모여 노는 곳이라고 사회적인 비난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속(眷屬)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정말 쉽게 번역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한 집안 식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식구라고 하면 되지, 어렵게 권속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원문에 따르면 ‘오이케이오스’라고 하여 그 말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세 번 나오는데, 한번은 ‘가족’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가정’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는 ‘권속’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했으면 같은 단어이니 그 다음에도 가족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교회가 결코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의 공동체요,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가족, 가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가족은 혈육관계의 가족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적인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수도 있습니다. 이혼으로 헤어지기도 하고 소중했던 사람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늙고 죽으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족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값진 일은 육적인 가족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영원한 가족입니다.
롬12: 5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고, 한 가족,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그 날로 우리 신앙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닥불을 하나 둘 열 스물 모아 놓을 때 서로 불을 나눠주고 점점 크게 잘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타던 모닥불에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둘씩 셋씩 떼어놓으면 너도 꺼지고 나도 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씩 둘씩 모여서 서로가 격려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붙들어 줄 때에 큰 신앙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에 내 신앙의 불은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양반과 평민, 그리고 상놈, 천민 간의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선교사들이 와서 운동장에서 테니스를 하였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이 운동하는 것을 양반들이 나와서 구경합니다.
라켓으로 공을 치고, 받아 넘기는데 아주 땀을 흘리면서 운동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니 그렇게 힘든 일인데, 종놈들에게 시키지 않고, 선교사님이 하시느라고 고생하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반들은 운동하면 큰 일이 납니다. 점잖게 앉아 ‘에헴’ 해야지, 운동장을 뛰어다닌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양반 상놈이 무너진 것 정말 잘 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 중에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목사님이 계십니다. 무어목사님은 1892년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반 평민들을 모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어는 1893년에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던 곤당골이란 동리에 교회를 열고 ‘곤당골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교회는 장로교회로서는 새문안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후에 인사동으로 옮기면서 승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 안동교회는 양반들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곤당골교회에 양반들이 나오고 보니, 백정들과 함께 앉아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양반들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양반이 믿는 하나님과 백정이 믿는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따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상민의 교회요, 안동교회는 양반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새뮤얼 무어 목사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분이 1895-1896년에 걸쳐 3차례나 고종황제에게 백정차별철폐를 진정하므로 받아들여, 백정도 호적할 수 있게 하였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들어오므로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습니다.
소설가 이철환 씨가 이웃들의 실제 이야기를 단편으로 구성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연탄길”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한 가족이 차를 몰고 서울 근교에 유원지를 다녀오다가 어두운 골목길에 검은 물체가 길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차를 멈추고 내려 보니 한 남자청년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우리는 관여하지 말고 가자는 아내를 설득해서 골목에 애들과 함께 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 후 남편은 신음하는 사람을 태우고 인근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상인지라 작은 병원에서는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를 차에 태워서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일을 끝내고 아내와 아이들이 서있어야 할 그 골목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편으로 집에 갔나보다 생각을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자기 집 쪽으로 불자동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갑니다. 놀라서 빨리 가봤더니 자신의 집 조그만 빌라에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밖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윗집에 살고 있던 처제네 식구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골목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처제에게 전화를 했고 처제가 식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언니네 집 식구들을 태워서 가는 사이에 가스폭발로 불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모두가 무사했는데 102호에 사는 내외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뒤에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바로 102호에 사는 그 사람이 골목에서 청년을 치고 뺑소니를 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 남자는 자기 집안 식구를 다 살릴 수 있었고 그러나 사람을 치워 중태에 빠뜨리고 현장을 벗어나 뺑소니를 쳤던 사람은 죽었다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는 크게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우리는 화목의 제물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드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족
엡 2:11-22 / 이성우 목사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기의 인생을 전적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가 있고, 또 한 부류는 목회자를 도와서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평신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계급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어진 사명과 사역의 역할과 은사가 다른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와 평신도는 함께 힘을 모아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세우는 과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은 1979년 3월에 열린 감리교 총회 결의에 의하여 감리회 본부에 평신도국을 두고 7개 연회 산하 166개 지방에는 평신도 부를 두어 매년 5월 마지막 한 주간과 6월 첫째 주일을 온 교회가 지키게 되었습니다. 평신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청지기로서 선교와 봉사를 통하여 안으로는 개인과 교회 부흥에 이바지하고 밖으로는 사회구원의 밀알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게 하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특히 요한 웨슬리 목사님 개인의 경건과 절제를 통한 성화와 사회구원을 강조함으로써 매년 5월 24일을 전후로 지키는 웨슬리 회심 주간과 6월 첫 주일에 지키는 평신도주일을 연계시켜 회심의 체험을 통하여 사회 구원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계기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주일은 평신도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재인식하고 결단을 새롭게 하는 계기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평신도를 새롭게 정립하는 평신도의 생일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면서 평신도로 부름 받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 한 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이며,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깨닫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더 철저하게 헌신하고 봉사함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게 되며, 복음의 역사가 더욱 왕성하게 이루어져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면 자기가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더욱 분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세워진 주님의 몸인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고 복음 사역에 귀하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 내의 목회자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기며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지도력을 잘 발휘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평신도들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세워진 평신도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위치와 역할이 요구되지만 우선적으로 평신도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가족임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으로 감동하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셨으며, 그 믿음의 결국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선물,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성도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놀라운 신분과 지위를 얻게 되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은 본래는 사단의 종으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곧 양자로 삼아주심으로써 참된 자유 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특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역의 모습은 단연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한 화해하게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담을 헐어버리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화목제물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예수님의 그 다음 사역의 방향은 온 인류의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2장 11-22절 말씀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 모든 민족, 모든 계급들 간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심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능력이 됨을 본문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공동체와 관련된 용어들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들입니다. 이들 용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들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외가 극복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또 다른 소외가 해소되고 극복된 세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구원의 은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어서 교회를 이루게 된 성도들이 무엇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 위한 중요한 기관이므로 교회 내부의 모든 종류의 알력이나 어떤 종류의 차별이나 소외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사랑으로 섬김으로 하나의 커다란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가족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한 장의 벽돌처럼 서로가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가는 것임을 밝혀놓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독특한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인 이웃, 곧 부모를 포함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배울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가정의 울타리를 더 넓혀서 우주적인 가정의 개념으로 확대시켜 나가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범위를 그저 하나의 가정이라고 하는 울타리로 범위를 제한시켜서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가족이라고 하는 범위도 단순하게 피를 나누고 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제한된 사고를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제한된 사고를 깨뜨리고 가정과 가족의 범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 우주적인 가정의 개념과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를 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생각하고 계시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시면서 하나님이 가장의 자리,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그런 구조를 생각하고 계신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의도대로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이미 가정이라고 구조 속에서 자녀들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하신 것이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이 땅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이제 그 가정의 틀, 가족의 개념을 하나의 가정에만 제한시켜 생각하지 말고 그 담을 헐어서 하나님께서 다스려 가시는 온 세상을 가정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똑같은 사랑으로 돌보시는 모든 사람들을 가족으로 바라보는 확대된 시야를 갖게 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 어디에서든지 갈등구조로 노출된 문제였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풀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가며 모든 사람들이 서로 형제자매로 사랑의 돌봄 가운데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근심이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바로 앞서 말씀드린 가정과 가족의 범위를 확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형제자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하나의 가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그들을 형제자매로 인정하여 사랑하고 돌보게 됨으로써 갈등이 해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어떤 가장이든지 자기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본문 16-18절을 보면 우리들 안에 있는 갈등의 벽을 깨고 서로가 화목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평안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한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 당하심으로써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누구라도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 곧 형제자매로 바라보고 인정해야하는 분명한 이유와 그 근거를 우리는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선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만드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말씀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가정 공간으로 만드셨으며, 그 가정과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석구석에 배치해 놓으시고 마련해 놓으시고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의 가장이 되셔서 사랑으로 그 가정을 돌보시면서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갖게 되는 느낌은 하나님이 가장으로 돌보시는 그 가정 공간에는 모든 것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아주 풍성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공간에는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있어서 제 각각 자기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냄으로써 모든 것이 조화롭게 움직여져 가는 평화로운 공간, 질서가 있어 보이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 줄 뿐만이 아니라 한 가정의 공간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며 나누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보완해 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함께 공존 공생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의 가정이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소통을 이룸으로써 섬김과 경외, 사랑이 오고갈 뿐만 아니라 행복을 깨뜨리지 않고 지켜가기 위한 보이지 않는 하나의 거룩한 질서가 그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인정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그 하나님의 가정이 움직여져 감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서 행복에 겨워하시는 모습이 창세기 1장의 마지막 부분인 3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행복한 하나님의 가정이 완성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다시 한 번 성도로 부름 받은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는지, 더 나아가서 성도들이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교회가 무엇이며, 무엇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세상이 하나님의 가정이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돌보며 살아감으로써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행복한 웃음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 드려야 할 거룩한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셔서 이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며 살아갈 것을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물론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웃음을 회복시켜 드리기 위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삶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행복한 하나님의 가정의 회복과 하나님의 행복의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 모두의 행복의 회복을 위해서 손에 손을 잡고 새롭게 출발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
엡 2:11-22 / 김필곤 목사
요즈음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데 우리 성도님들 스마트폰에 몇 명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습니까? 제가 설교 준비하면서 제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보니까 1183명이었습니다. 아마 한 번쯤 전화했기 때문에 저장된 번호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 1년에 12번 이상 전화를 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진짜 도와줄 친구는 몇 명이나 될까요? 불길 속에서 가족 빼고 마지막 전화를 하고 싶은 친구는 몇이나 됩니까?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인류학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최대 150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던바 넘버(dunbar's number)라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 수렵·채집 공동체 인구수는 15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던바가 인구 기록을 구할 수 있는 20개 원주민 부족의 규모를 확인했더니 인구수가 평균 153명이었다고 합니다. 던바의 고향인 전통적 영국 시골 마을의 평균 인구수 역시 공교롭게도 150명이었답니다. 그에 의하면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의 수가 그 정도이고 그 중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진짜 친구’의 수는 5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친한 친구’ 15명 정도, ‘좋은 친구’ 35명 정도, ‘그냥 친구’는 150명 정도, ‘아는 사람’ 500명 정도, ‘알 수도 있는 사람’ 15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은 3500만 명의 60억 건의 전화 통화 기록을 분석해 본 결과 평균 4명이 매우 친한 친구였고, 11명이 친한 친구, 30명이 그럭저럭 친한 사람, 129명이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조사 결과도 비슷합니다. 한 가지 소개하면 'friday' 섹션이 20~60대 성인 남녀 1038명을 조사한 결과, 친한 친구는 5명 이하(69.4%)였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설령 내가 나쁜 짓을 했을 지라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어 나를 도와 줄 정말 친한 친구가 몇이나 됩니까?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좋은 친구를 가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돈독한 우정이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 경제적 풍요, 인생의 행복 그리고 생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미국 미시간대학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챱픽 (William Chopik)은 100개국 27만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결론은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좀 더 건강하고 높은 행복을 유지하더라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이 병에 덜 걸리고 잠도 더 잘 자고,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나 자녀교육을 잘시키는 것이나 사회적 성공도, 경제적인 부도 친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좋은 친구와 평생 같이 어울리며 사는 것 참 중요합니다.
1.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화평을 누리며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세워주는 친구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4가지 조건에 의해 친해지고 친구가 된다고 합니다.
첫째가 근접(proximity)입니다. 사람들은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나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사성(simlarity)입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한 방에 살게 하고 서로 친해지는 것을 조사해 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성격, 기질,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학교 동문, 같은 지역 출신 등이 더욱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보상(rewardingness)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살며 늘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항상 나에게 친절히 대해 준다든지 칭찬의 말을 던져 준다든지, 도와준다든지 또는 어떤 다른 모양으로 보상을 주면 우리는 그런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외모(physical attractivess)입니다. 성격이나 지능보다 상대의 용모에 따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남녀에게 댄스파티를 열게 하고 다시 데이트를 하는가를 조사해 보았답니다. 그런데 외모가 가장 많은 영향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후광 효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좋게 보는 것이 후광 효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화평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친한 친구도 한평생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고,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고 분열되어 원수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막힌 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는 막힌 담들이 있어 그것을 폭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서로 두 진영으로 나누어 상대를 죽이여 자신이 이익을 보고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된 당시 막힌 담은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의 담이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란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시기 전을 말합니다. 그 담은 무엇입니까? 할례라는 담입니다. 할례받은 무리는 유대인이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방인입니다. 삶 속에서 이 할례라는 담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고정관념, 신분, 사상, 태어난 나라, 남녀, 재산, 지식, 지역 등 다양한 형태의 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담(partition-wall)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구분하고 그 담벽에는 '이방인으로서 이 담을 넘어오면 죽임을 당한다'라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이 담을 헐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술 수 없었던 거대하고 견고한 담을 예수님이 헐러 버린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막힌 담, 인종과 인종의 막힌 담, 사람과 사람의 막힌 담, 지역과 지역의 막힌 담, 진보와 보수의 막힌 담, 이데올로기의 담, 신분의 담, 남녀의 막힌 담,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막힌 담, 자유인과 노예의 막힌 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님을 구제주로 믿으면 얼마든지 영남사람과 호남 사람이 5명 안에 드는 친구가 될 수 있고 진보와 보수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님이 무엇으로 막힌 담을 헐러 버렸습니까?
오늘 성경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육체로 헐어 버렸습니다(14).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 헐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담은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진노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르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욕심에 다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끼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둘째는 계명의 율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15上)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들은 헬라인대로 그들의 법조문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즉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화목제물이 됨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받는 제사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다시 죄의 댓가로 치르는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의식상의 법을 폐하였습니다. 정결 부정에 관한 규정들 구약 제사제도 등을 폐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한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것을 소멸해 버렸습니다(16)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갈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평등은 폐지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연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허물어 버린 담을 동종의식으로, 잘못되면 패거리 의식, 지역주의를 만들어 서로 싸웁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선민의식, 국수주의, 그릇된 민족주의, 혈통 우월주의, 인종주의를 만들어 담을 쌓고 갈등하고 분열하여 다툼과 전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패권주의 군국주의가 되어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피해를 줍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을 보면 코로나 19로 어려운 이때에서 정치인들은 하루도 정쟁을 그치는 날이 없습니다. 모장관의 아들 휴가를 놓고 끝없는 정쟁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조선시대의 정치는 의리와 명분, 이념에 목숨을 건 끝없은 정쟁이었고 결국 나라는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진영대결을 부추기고 신문 1면을 보면 날마다 싸우는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교회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로 진영이 갈라져 진정한 친구가 되어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봅니다. 언론은 계속 싸움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갈등관리 비용만 매년 240조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지금 4차 추경 7조 8천억 중 1조쯤 되는 돈으로 통신비를 지급할 것인가 무료 예방접종을 해 줄 것인가 싸우고 있는데 240조면 얼마나 갈등 비용이 얼마나 큰 비용입니까? 인류가 예수님이 이미 헐어버린 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담을 쌓으며 치루는 비용이 얼마나 큽니까? 1, 2차 대전으로 지불한 고비용말고도 지금 군비 경쟁을 하며 갈등과 불신으로 치루는 비용은 천문학적 비용입니다. 개인도 이미 주님이 헐어버린 담을 스스로 더 견고히 쌓으며 치루는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병들어가 고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까? 지난 주 신문을 보니까 어떤 주부가 분노로 차를 몰고 가계로 돌진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미 모든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화평이 된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헐어 버렸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용서해 주지 못하는 문건 폐지해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것을 소멸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미 끝내 버린 것을 가지고 계속 신앙인은 다시 담을 쌓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심으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결과를 말씀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던바가 말한 알 수도 있는 사람 1500명 정도가 아닙니다. 아는 사람 500명 정도가 아닙니다. 그냥 친구 150명 정도가 아닙니다. 좋은 친구 35명, 친한 친구 15명 정도가 아니라 가족처럼 가까이하는 진짜 친구 5명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18)
우리 사이의 모든 적대감을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심으로서 새롭게 연합된 인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고,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은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에게 국가가 아닌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민족이나, 피부나, 신분이나, 학력이나, 외모나, 경제의 정도에 관계 없이 함께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주 가까워지고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통해 화평케 된 교회 공동체에서 가까운 친구도 평생 살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4.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화평케 해 주었으니까 이런 형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담을 헐어버림으로 이제는 유대인, 헬라인이라고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친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살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친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런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냥 미국 사람, 한국 사람, 일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이방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것이 화목하게 되었고 인간까지 원수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다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외인, 손이었습니다. 외인이라는 말은 헬라어 크세노스는 12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본질이 어떤 것에 비교해서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되 본질이 전혀 다른 인간입니다. 살아 있는 것같지만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낮선 사람 외국인을 말합니다. 집안에 당당히 사는 사람이 아니고, 집 곁, 집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기는 살되 아무런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무만 있지 아무런 특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미국의 영주권 가진 사람처럼 정치적 참여권, 투표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17:7).
우리는 진리를 드러내 놓고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와 함께 살고 진리와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하여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로 교제하며 진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진리를 떠난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라고 말씀했는데 말라기서에 보면 진리를 떠나 하나님이 받을 만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 교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보다는 종교적 출세주의, 물량주의, 화려한 공연주의라는 담을 쌓고 있지 않았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가 그러다 무너졌습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말씀에서 이탈하는 곳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사람의 머리를 만족시켜 주는데도, 사람의 감정을 만족스럽게 하여 주는데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합치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가 된다고 해서 교회가 세속주의적 친교 단체기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친한 친구입니다. 배는 물 위에서 떠 가는 것입니다. 물을 떠나서는 배는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배 속에 침수하여 들어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지 세상의 세속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결국, 교회는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되고 침몰하고 맙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사는 친한 친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죽음도 죄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땅의 삶이란 가난도, 병도, 고통도 눈물도 죽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적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치유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림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배움으로 참 자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신 걱정이 물러갑니다. 증오와 미움이 변하여 용서와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 말씀을 배울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전도하며 친교할 때 삶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 이런 것을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시기 위애 화목제물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드림으로 탄생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가족으로 살아야 가야 합니다.(19下)
우리는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계급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익공동체도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참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끼리 형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는 가족보다는 구조, 제도, 조직으로 교회 생활을 하다 망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문에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오이케이오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관계, 생명, 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률적 관계를 넘어서서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롬9:26)" 이 사실을 믿습니까? 아들이란 대단한 특권이며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교회가 가족같아야 한다는 말은 가족같은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정같이 포근해야 합니다. 가족처럼, 한 식구처럼 한 시대를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통용합니다. 서로 필요를 나눕니다. 말씀을 통하여 교훈받고 그 교훈에 따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족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건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체는 다릅니다.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책임이 따르고 거래 관계가 아니라 생명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비록 성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재력도 다르지만, 교회의 영적 용광로에 들어와 영적 한 가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 교회의 대표적 특징 중의 하나가 책임감의 상실입니다. 수시로 교회를 옮깁니다. 조금만 감정적으로 충돌되면 바꾸어 버립니다. 문제가 있다고 가족을 버리는 것 아닙니다. 서로의 단점을 받아주고 세워주고 존경해주고 용서해주고 격려해 주면서 사는 것이 가족입니다.
천국같은 가정일 수도 있지만 지옥같은 가정일 수도 세상같은 가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든 분명한 것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입니다. 피의 관계를 그 무엇으로도 단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할 관계입니다. 연약한 교인들 보면서 실망하거나 비난할 필요없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교회 식구들을 보아야 합니다. 심한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과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아내 자랑을 해보자고 제안하였답니다. 이것은 정신병자 아내를 둔 친구를 놀리기 위한 것이었답니다. 사람들 농담을 섞어가면서 자신의 아내를 자랑하였답니다. "내 아내는 절세 미인이야." "내 아내가 우리 가정에 들어온 후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화기에애하게 되었어." "내 아내는 내 마음이 녹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각자 차례대로 이야기를 마치자 정신병자 아내를 둔 사람만 남게되었답니다. 모든 친구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저 사람은 과연 무슨 말로 아내 자랑을 할까?라고 궁금해 하면서 집중되었답니다. 그러나 정작 불행한 아내를 둔 그는 활기있는 얼굴로 대답하였답니다. "나는 감사가 넘친다네. 자네들이 아는 바대로 내 아내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지. 그러나 나의 큰 행복은 이런 아내로 인해 내가 기도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네. 만약 내 가정에 고통이 없고 화평하기만 했다면 기도와 신앙이 지금같이 뜨겁지 않았을 거라네. 그렇지만 나는 불행한 아내로 인해 항상 기도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막힌 담을 헐어 버리고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연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책임을 가진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교회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불완전하여도 서로 가족같이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야 합니다(20-22).
19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이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이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그 성도들이 모여 무엇을 이룹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성전을 만들어 갑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누구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도의 모임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이제 모리아 산이 아닙니다. 기초(20)는 사도들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들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훈을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모퉁이돌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통해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교회의 주인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건물이 되어 서로 연결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어져 간다(21)는 말은 한 번 짓고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어저 간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성도들 속에 역사하시므로, 성자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성부는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에 거하시는 분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어 가십니다.
혹시 물질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았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중세 교회는 성직자가 교회의 주인 행세를 했습니다. 다 흘러가는 나그네에 불과한데 주인 행세하다 교회가 어려워졌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주인의식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이익집단도 아니고 사기업도 아닙니다. 목사가 회장도 사장도 아니고 장로가 이사도 아니고 교인이 주주도 아닙니다.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1:17)"
교회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다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교회입니다. 그 성전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22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일치와 성장(21)이 이루어 집니다. 새성전의 목적(22)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교회처럼 만들어내야할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교인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살 하나님 나라 백성, 한 가족, 같이 성전을 지어가야 할 성도로 좋은 친구로 생각해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3)"
함석헌 선생님은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를 통해 친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리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고/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원수된 것을 다 소멸하시고 막힌 담을 헐어 버린 예수님께서 우리가 좋은 친구로 성도로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좋은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 부유한 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재산을 물려 줄 상속자가 없었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었답니다. 그는 죽기 전 변호사에게 자신이 죽으면 새벽 4시에 장례를 치러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리고 유서 한 통을 남기고는 장례식이 끝나면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뜯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새벽 4시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그 많은 사람 중에 불과 네 사람만 참석하였답니다.
고인에게는 많은 친구와 지인들이 있었지만 이미 죽은 친구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정말 귀찮고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에 달려와 준 네 사람은 진정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장례식을 경건하게 치렀답니다. 드디어 변호사는 유서를 뜯어 읽었답니다. "나의 전 재산 40만 달러를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유서의 내용이었답니다. 만약 나의 장례식이 새벽 4시에 치러진다면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 명단 중 과연 몇 명이나 올까요? 우리의 화평이 되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당신은 누구였는가?
엡 2:11-13 / 이종철 목사
그러므로 생각하라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 생각하라’로 시작합니다. remember입니다.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까? 너희 과거가 어땠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주요한 개념은 은혜와 평화입니다. 은혜는 자기 과거의 비참했던 처지를 생각하면 분명해집니다. 함께 하는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권리의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때 자기 과거가 어땠는지 돌아보는 것이 약이 됩니다.
기억하게 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실 때 먼저 기억할 것을 요규하십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신5:15)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16:12) 너희는 노예였다 그런데 내가 너희를 해방시켰다. 그러니 내 말을 들으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노예였으니 교만하지 말고 동일한 처지에 있는 가난한 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역사적인 민족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 중 유월절과 초막절은 그들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급하게 탈출하여 미처 발효시키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듯이 그들은 오늘도 무교병을 먹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먹습니다. 광야에서 초막에 살았던 것을 기억하여 지금도 유대인들은 초막절 기간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생활을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처럼 역사의식이 투철한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과거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합니다. 이방인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였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였다,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 2장 1절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19절에서는 외인이었다 나그네였다고 말합니다. 아플 정도로 과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한 푸념이나 상처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가 이랬으니 정신을 차려라,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조지 오웰이 쓴 『1984』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하는 일은 과거를 지우고 당의 강령에 맞춰 조작해내는 일입니다. 인간의 머리에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기억을 조작하면 미래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입니다. 식민지 시대나 산업화 시대나 민주화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논쟁입니다. 현재의 민주주의나 민권의식, 통일에 대한 비전 등을 두고 벌이는 역사전쟁입니다.
현재 여러 모로 살기가 어렵다고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세기 이전으로만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전쟁으로 수백만의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강제로 헤어진 이산가족이 1천만에 이릅니다.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독으로 광부나 간호사로 나갔습니다. 중동으로 나갔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OECD 가입국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민주화 과정도 겪었습니다. 4.19와 반유신 독재 투쟁도 겪었습니다. 수백 명이 학살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도 경험했고, 87년 6월 항쟁도 이루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화는 다 그 덕분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겸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복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이나 방향이 요행히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요행이라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70년대 이전 한국교회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옛날에는 신학교가 가장 인기가 없었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미함이라고 하여 교인들이 주는 쌀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백만의 성도들과 대형 건물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공한 목회자들은 중형차를 타고 사회의 인정을 받습니다. 신학교도 경쟁률이 높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이룬 것 마냥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셨던 하나님은 순식간에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도 과거와의 싸움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그에 대한 처벌이나 혁신이 가능합니다. 그래야 안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반대합니다. 법의 원칙 운운하지만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래서 단지 돈이나 혜택으로 적당히 넘어가려 합니다. 일부 국민들은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만 가지고 씨름할 수 없다고 하며 대충 덮고 넘어가자고 합니다. 과거를 쉽게 잊으면 이런 일이 또 반복됩니다. 아플 정도로 파헤쳐야 합니다.
제가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단기선교를 나갔다가 2명의 청년이 물에 빠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고사였습니다. 선교가 끝난 후 배를 타고 놀다가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단기선교 중에 일어난 사고이므로 순교로 미화하고 돈으로 적당히 마무리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자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사고 과정을 일일이 조사를 하였습니다. 인솔 목회자가 강제로 배를 태웠다는 것, 안전 조치를 태만히 했던 것, 태국 지역 선교사들의 이기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들, 담임 목사의 위선적인 모습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한 권의 책으로 내었습니다. 아픈 상처를 그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무슨 유익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 아버지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듣는 순간 그분이 옳았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이 땅에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인은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의 손길을 명백히 체험을 하였고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팠지만 사실은 치유의 과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또한 단기선교의 문제점을 명백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억울함도 풀리고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모든 것이 엉거주춤하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식민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이후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니 여전히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고, 언론이 정신을 못 차리며, 반민주적인 행태들이 반복됩니다.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는 것은 현재를 위해서도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우리는 누구였습니까?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기준이 있습니까? 힘들 때 술 말고 어떤 것으로 위로를 찾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 없이 이기적으로 살지는 않았겠습니까? 죽음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소망이 없다는 말이 참 와 닿습니다. 이 소망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일 것이지만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인생에 대해서, 성품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소망의 주님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인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이제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 없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현대인들 중에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도 많지만 고대인들 중에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버림받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거친 운명과 싸워야 했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여기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바꾼다, 팔자를 바꾼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운명과 팔자는 태어날 때 주어집니다. 결혼 하면서 한 번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팔자가 바뀐 사람들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우리의 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매여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방인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함께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풍성한 하나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버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미련이 있습니까? 과거나 현재나 별 차이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주어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안 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그동안 자기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니 자신의 과거가 추악해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라는 태양 빛을 보니 과거의 것들이, 그것이 촛불처럼 나름 유익했던 것도 어두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여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과거의 성품들을 바꾸어 갑니다. 변화와 성장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규정하는 단어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과거는 나를 진리로 이끄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가 그렇습니다. (이하는 한겨레신문 조현의 휴심정에서 인용) 교황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시절 침묵했다고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다른 사람 말을 잘 안 듣고 거친 권위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했습니다. 199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관구장이 되자마자 ‘독재자들에게 너무 너그러웠던 점’을 참회했습니다. 추기경이 되어서는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된 사제들의 성인 추대에 나섰습니다. 교황이 된 이제는 엘살바도르에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를 성인으로 추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주의적 태도 또한 반성하고 있습니다. 교황무오류설이란 갑옷을 벗어버리고 ‘이 세상에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고해사제 앞으로 걸어가 죄를 고백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거나 과거보다 더 좋지 않은 모습이 되어 있다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좋은 변화입니다. 어두운 과거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현재요 미래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말씀 안에서 우리를 빛의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과거가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현재에 주어진 은혜가 놀랍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더 어두워져 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빛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노예상으로 있다가 회심한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양은 그 극적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노래 가사마다 은혜라는 말이 빠지질 않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과 그 감사를 늘 간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엡 2:11-13 / 김용국 목사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을까요? 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좀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큰 숙제일 것입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시원한 얼음냉수가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잠언 25장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얼음냉수로만 시원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얼음냉수보다도 더 시원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소식을 듣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들으면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도 별로 피곤한 줄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림으로써 우리 마음도 시원케 되는 충성된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라는 정도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게 된 사실을 다시 태어난 사건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과거의 나는 죽고 예수님의 영으로 다시 살게 되는 정말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과거보다 좀 더 나아졌다. 라든지... 성경에 대해서 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라는 정도의 가벼운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24에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 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것이 곧 구원의 놀라운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의로워지려고 하는 마음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만 온전히 바라보고 살기로 마음속에 결단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겠다고 하는 분명한 결단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꼭 필요합니다.
더 이상 세상적인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에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기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도 항상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마음속에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충만해지는 그런 특별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엡 2:10에 보시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어떤 잡지사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 질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인생에 대한 목적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바울은 달리기 선수가 골인 지점을 향해서 한 눈을 팔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냥꾼이 목표물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격하는 것처럼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은 항상 애를 쓰면서 살아간다. 라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바울이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바울처럼 목적을 가진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루하루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냥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 대한 분명한 목표도 없이 그냥 그럭저럭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삶이 변해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향해서 전력질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에 인생의 꿈을 접어버리고 나이 80에 들에서 평범하게 양을 치면서 살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는 사명을 받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질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사명을 단순히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섬기라고 하는 명령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섬김의 삶은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의 삶은 시간이 남으면 살짝 스케줄에 끼워 넣는 선택사항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 우리를 심판하실까요? 롬 14:12에 보시면 “...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내가 했던 일을 직접 고백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한 것 밖에 없다면, 남을 위해서 내가 별로 한 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여러 가지로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돈을 열심히 벌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키우느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노후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손주들 돌봐주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복음서에 보면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35, 마 10:39; 16:29, 누가복음 9:24; 17:33에 보시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심각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 목숨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을 확실하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이 섬기는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세상에 단지 존재하고 있일 뿐입니다. 그것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사명을 부여받은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나는 아무 사역도 봉사도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떤 핑계를 이유로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늘 불안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가난했습니다. 삼손은 너무나도 의존적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부도덕했으며, 다윗은 간음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 온갖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는 마지못해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과부였고, 룻은 이방 여인이었고, 베드로는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는 의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다 이런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더 이상 핑계만 대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들어서 꼭 필요한 도구로 사용해주실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한 일, 즉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불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11절에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라는 내용으로 시작이 됩니다. 영어로는 remember라고 합니다. 기억하라. 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일까요?
너희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은혜와 평화입니다. 은혜는 자신의 과거의 비참했던 상황과 처지를 생각해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또 우리에게 평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권리의식이 절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는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억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항상 우선적으로 기억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5:15에 보시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6:12에도 보시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노예였던 너희를 내가 해방시켜주었으니 내 말을 잘 들어라. 하는 뜻입니다. 너희가 원래는 노예였기 때문에 절대로 교만하지 말고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역사적인 민족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 유월절과 초막절은 그들에게 주어진 출애굽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에서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미처 발효도 되지 않은 무교병을 먹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들은 절기가 되면 무교병을 먹고 있습니다. 그 때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서 그 때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또 광야에 있을 때 초막에 살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초막절 기간이 되면 아예 초막을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생활을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역사를 분명히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성경처럼 역사의식이 투철한 경우도 없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과거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너희들이 과거에는 육체적으로 이방인이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였다,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였다,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2장 1절에도 보면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19절에서도 [너희는 외인이었다... 나그네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정말로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과거에 대해서 계속 반복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단순한 푸념이나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닌 지금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가 그랬기 때문에 항상 정신을 차려라,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라. 라는 뜻입니다.
조지 오웰이 쓴 『1984』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라고 했습니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가 하는 일은 과거를 지워버리고 당의 강령에 맞춰서 조작하는 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 속에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행동은 기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런 기억을 조작해버리면 미래의 행동까지도 지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불만들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세기 이전으로 한 번 돌아가 보십시오. 우리는 당시에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강제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거의 천만에 이러렀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대명사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모두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서독에 광부로 간호사로 나갔습니다. 중동으로도 나갔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은 OECD 가입국이 되었습니다.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민주화의 과정들도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생각하고 그런 축복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나라가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당시에 우리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이나 방향이 딱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70년대 이전에는 교회도 하나같이 다 가난했습니다. 옛날에는 신학교가 가장 인기가 없었습니다. 목회자도 인기가 없는 직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형교회들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그리고 성공한 교회의 목회자들은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습니다. 신학교도 경쟁률이 아주 높아졌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하면 안됩니다. 잘못했다가는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다시 가져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다 지난 과거와의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새로운 혁신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더 믿고 살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면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를 제대로 직시하는 것은 현재를 위해서도 필요하고 미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 뭐겠습니까? 힘들 때 나는 어떤 방법으로 위로를 얻으려고 했겠습니까? 또 죽음의 문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전히 죽음 이후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12절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라는 이 말씀이 정말로 제 마음속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소망은 천국에 대한 소망이겠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자녀들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망이 없으면 우리는 일분일초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보면 굉장히 유명한 내용의 말이 나옵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희망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또 12절에 보면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도움도 없이 내 자신의 운명과 맞서서 싸워야 했던 그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에 보시면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이제는”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그 때에! 우리의 비참한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이제는! 하면서 우리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13절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가야 맞습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들입니다. 흔히 우리는 운명을 바꾼다, 팔자를 바꾼다. 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운명과 팔자는 태어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운명이 바꾸어지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팔자를 고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사탄 마귀에게 얽매여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본질상 하나님께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시고 살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거를 우리가 완전히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과거에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로 인해 과거의 내 모습하고 지금 현재의 내 모습하고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에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얻었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 동안 나에게 유익했던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자신의 과거를 보니까 너무 추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밝은 태양을 보고 나니까 과거의 것들이... 이제는 너무 어둡게 보이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 때는 그것이 나름대로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인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서 살면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다 바꾸어져야 합니다. 과거의 성품들도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변화와 성장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규정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과거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반성하면서 점점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과거의 모습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거나 과거보다 더 안 좋은 모습이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우리에게 다 좋은 것들입니다. 어두운 과거에서 새로운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아예 빛의 자녀들로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행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되는 분이십니다. 중세 시대에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가서 조용히 침묵하면서 곁에 앉아만 있습니다.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줍니다. 그러면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어떤 마을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마을 언덕 위에 올라가서 그 마을을 쳐다보면서 며칠이고 앉아만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을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그 분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퍼지게 되었고 그분의 그런 영성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가르침도 없고 그저 사람들과 함께 노동을 할 뿐입니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사람들이 그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진리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인생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다.” “방황하는 내 아이들을 어떻게 잘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다.” 이처럼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전하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가 어둡게 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노예상인으로 있다가 회심을 한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찬양은 그런 극적인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이 찬송을 보면 1-4절까지 가사마다 은혜라고 하는 말이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그 감격과 기쁨과 감사를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