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시/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詩 해설, 정끝별 시인
기형도 시인의 마지막 시다. 1989년 봄호 문예지에서 이
시를 읽었는데 그리고 일주일 후 그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이제 막 개화하려는 스물아흡의 나이에, 삼류 심야극장의 후
미진 객석에서 홀로 맞아야 했던 그의 죽음은 이 시가 없었다
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초라했을 것인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에서 이사를 계획하고 썼다는 후일담
도 있지만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새 밤은 짧았고, 짧았던 밤 내낸 겨울 안개처럼 창밖을 떠
돌기도 하고 촛불 아래 흰 종이를 펼쳐 놓은 채 망설이고 망
설였으리라.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 이 되었으리라. 실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 몸이고
빈 마음이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문을 잠근
다’ 는 것은 ‘내 사랑’ 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 사
랑의 열망이 떠나 버린 ‘나’는 ‘빈집’에 다름 아니고 그 빈집
이 관(棺)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나직이 되뇌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하나씩 불러낸 후 그것들을 떠나 보낼
때, 부름의 언어로 발설되었던 그 실연(失戀)의 언어는 시인
의 너무 이른 즉음으로 실연(失戀)되었던가. 죽기 일주일 전
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 라고 말했다던 그의 사
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되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
이지가 대부분”(‘오래된 서적’)이라 했던 그가, 애써 “미안하
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라고 스스로을 다독이기도 했건만,
그가 소설가 성석제와 듀엣오로 불렀던 팝송“Perhaps
Love“를 들은 적이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맑은 고음이 그
의 몫이었다.”Perhaps Love Iike a resting pIace......“로 시
작하던 화려하면서 청량했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해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
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라는 그의 독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