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 순례길 1코스 말씀의 길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어땠을까요? 한국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김범우의 집터와 천주교 세례식이 처음으로 거행된 이벽의 집터를 둘러보며 시작하는 길입니다.
탐방코스 : [명동주교좌 성지성당~(도보 8분)~장악원 터(김범우의 집터)~(도보 10분)~한국천주교회 창립터(이벽의 집터)~(도보 10분)~좌포도청 터~(도보 10분)~종로성지성당~(도보 30분)~광희문 성지~(도보 50분)~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도보 45분)~석정보름 우물~(도보 10분)~가회동 성당]
거리 : 8.7km
소요시간 : 3시간40분
한국 천주교의 시작은 어땠을까?
‘말씀의 길’을 따르다 보면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한국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김범우의 집터와 천주교 세례식이 처음으로 거행된 이벽의 집터를 둘러보며 시작하는 길입니다. ‘말씀의 길’은 한국 천주교회가 이처럼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발적으로 복음 말씀을 받아들인 평신도 신앙 공동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또한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성수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석정보름우물과 그의 활동지로 알려진 계동 일대의 가회동성당을 둘러보며, 타지에서 순교를 택한 그의 희생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명동대성당
소재지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최초의 본당으로 한국 교회 신앙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 이승훈, 정약전·약종·약용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과 교리 강좌를 열었는데 이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으며 1898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하면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믿음을 지킨 순교자의 유해를 받아 지하 성당에 모셨다.
현재 지하 묘역에는 앵베르 범 주교와 샤스탕 정 신부,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 김성우 안토니오,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기해박해의 이 에메렌시아와 무명 순교자 한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서울대교구 역사관
운영시간 : 화요일~일요일 09:00~17:00
위치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사도회관(서울대교구청 본관 건물 앞 벽돌건물)
2. 김범우의 집터(장악원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66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당시 이곳에 모인 신자들은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일신, 정약용, 최인길, 지황 등이었다. 또 김범우는 집주인으로서 신자들에게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교회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가 빌려주면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1785년 봄 명례방 집회에 모인 이승훈, 이벽, 정약용, 권일신, 권철신 등이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을 ‘명례방 사건’, 또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라 한다.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지방으로 도배(徒配:‘도형정배’의 준말로 일정한 장소에 보내어 노역을 시킴)되어 그곳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1786년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석은 없지만, 중구 을지로 66 KEB 하나은행 본점 앞 장악원 터 표석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3.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105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요한 세례자)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요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벽은 다시 최창현(요한), 최인길(마티아), 김종교(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어 신자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2011년 8월 28일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기념 표석을 세우고, 이어 9월 26일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재 기념 표석이 있는 자리에서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이곳에 설치하였다. 2016년 10월 서울시가 고시한 도시 환경 정비 계획에 따라 앞으로 수표교 남쪽 이벽의 집터는 역사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4. 좌포도청 터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 28 종로 3가 치안센터 앞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103위 성인 가운데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5. 종로성지성당
서울시 종로구 동순라길 8
종로성당은 서울의 중요한 순교 터이자 최대의 신앙 증언 터였던 좌·우 포도청과 의금부, 형조, 전옥서 등의 관아들이 있던 곳을 관할하기 때문에 2013년 2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하였다.
좌·우포도청에서 103위 성인 가운데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를 포함한 22명의 성인이, 전옥서에서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 등 2명의 성인이 순교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124위 복자 가운데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를 포함한 5명의 복자가 순교하였다. 또한 포도청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언하고 밤을 보낸 곳이기도 하였다. 성당 내에는 좌·우포도청(옥 터)에서 일어난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고 선조들의 신앙 모범을 따르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현양관에서는 포도청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물들과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언하다가 다른 처형지에서 순교한 증거자들에 관한 정보를 전시하고, 포도청(옥 터) 순례 길을 안내하고 있다.
6. 광희문 성지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四小門: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디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1396년에 지어진 광희문은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가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7.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96-12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토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다.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과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하였다. 그 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 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엶으로써 최초로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 함벽정(현 원효로 4가)으로 이전하였다.
1942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가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 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8. 석정보름우물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110
북촌에 있는 오래된 우물은 물맛이 좋아 궁궐에서도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로 만들어진 이 특이한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했기 때문에 보름우물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 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할 당시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 가회동성당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다. 1955년 8월 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 1주일 전에 세례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다.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족이 세례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순교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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