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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베소서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서신에서 보여주는 복음의 핵심은 간단하게 정리하면 은혜의 필연성, 왜 은혜인가,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입니다. 이 둘 다 요약하면 일단 인간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은혜와 믿음은 발음은 달라고 같은 뜻이에요. 우리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 오늘 본문 9절에도 나오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그럼, 사도는 왜 이렇게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일까요? 인간이 실수도 많고 부족하기도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나요?
놀라운 인류 문명과 문화,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업적,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회 질서를 위해서 여러 가지 법률도 만들고 또 그렇게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려는 도덕성을 갖춘 이성적 존재가 인간인데 성경은 왜 이렇게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인가?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복음과 도덕률은 상반되지 않는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우러나는 존경과 감사는 수많은 별이 있는 밤하늘과 내 마음을 채우는 도덕률이다.’라고 했어요. 이게 인간의 자존심이에요. 인간을 짐승과 구별하는 큰 차이가 바로 도덕 윤리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윤리 도덕을 실천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성경의 진술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도덕 행위는 결국 자기 정당성으로 되먹임 됩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에요.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의 실패였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셨더니 이스라엘은 그 율법 행위를 자기 의로 삼더라는 말이에요.
(롬 10장)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말해요. 그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이 몰랐고 또 배척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두 존재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상태가 하나님의 의예요. 에베소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창조하셨단 말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예요.
그럼 우리의 의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그 의를 면목 없고 자격 없지만 그냥 덥석 받는 것을 말해요. 그것을 다른 말로 믿음으로 주어진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행위로 율법의 모든 항목을 다 지켰다고 해도(물론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에요. 그것을 성경은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가 있어야 할 처음 자리, 하나님이 지으신 처음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처음 자리를 벗어난 상태에서는 어떤 종교적 열심 어떤 율법 행위를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게 율법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지 못할 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착각했어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안식일을 지켰고, 십일조를 하라면 십일조를 했고, 금식하라면 금식하고 다 했어요. 정말 목숨 걸고 했어요. 전쟁이 나도 안식일에는 도망도 안 가고 뛰지도 않았어요. 그 정도로 율법에 충실했음에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위로 자기 구원에 협조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게 힘써 하나님에게 복종치 않은 이스라엘의 자기 의요 자기 영광입니다.
원래 없음인 우리를 하나님적인 존재, 즉 있음이 되게 하신 그 모든 것은(본래 있음은 하나님만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됐어요. 우리는 그것을 담아내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죠. 그런데 그 존재의 목적인 처음 자리를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해요. 왜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해? 너희들도 있음이잖아.. 그러니까 그 있음에서 시작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열심을 다해 할 수 있어야 해.. 아담의 자기 가능성 자기 계발. 이것을 유혹한 게 사탄이에요. 에덴에 출현한 뱀입니다. 이것 따먹어.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심어놓으셨을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왜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아니?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그것을 덥석 먹어버렸어요.
그런데 금지한 그것을 먹는 순간 하나님과 단절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있음이라고 하지만 선악과 먹은 아담은 이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력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게 피조물이니까요. 선악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그 순간부터 아담은 뱀하고 친해요. 하나님의 말을 들은 게 아니라 뱀의 말을 듣고 뱀과 결합해 버렸어요. 하나님의 저주대로 흙으로 돌아간 것입니다.(창3:19) 그렇게 뱀의 밥이 된 상태가 오늘의 인간입니다 (창3:14)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상이 아니다 보니 이 율법까지도 오해했어요. 율법의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긴 거지요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실 분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사도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주신 율법(열 말씀과 수많은 규례)은 그야말로 최고의 도덕률을 가진 계명이었어요. 그래서 지키면 영생을 얻지만, 하나라도 어기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법이에요. 지키려면 다 지켜 (약2:10)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지키지 못할 법을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야말로 목숨 바쳐서 지키려고 했어요. 끊임없이 기어올라가면 미끄러지고... 그렇게 시편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미끄러운데 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 행위 안에는 자기 의를 챙기려는 탐심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고 그 의에 복종하지 않는 완악함이 그들에게 있었어요.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자존심이에요. 그 완악함과 불순종이 모든 인류를 대표한 이스라엘의 실패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실패를 보여주기 위해서 시범 케이스로 불려 나온 자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행위의 불가능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이 살해해 버렸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합니다. 율법행위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음이란 말에요. 그런데 사실 가장 어려운 게 믿음입니다. 오히려 법을 지키는 행위가 훨씬 쉬울 수 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법 주시기를 원합니다. 법을 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지켜드릴게요.. 하나님의 율법을 만만하게 본 거지요
그런데 이 법이라는 게 참 재미있어요. 역사를 보면 인류 문명이 시작된 수메르부터 해서 앗수르, 바벨론, 마케도니아,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의 법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법은 인간들의 자기 정당성과 안전을 위해서 만들어낸 법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들이 만들고 집행한 그 법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버렸어요. 모든 인간이 합심해서 말입니다. 죄목도 참 재미있습니다. 신성모독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는 거예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해서 참람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지킬 법이 없다는 거예요.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케 했다고 합니다 (마5:17)
(롬 8장)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법이 없으면 정죄가 없어요.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빨간 불일 때 지나가면 스티커를 끊지만,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는 그냥 지나가도 되는 것과 같아요. 그렇다고 막 산다는 게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성령의 법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율법을 지킨 자로 하나님이 여겨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의 어떤 행위도 정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게 로마서의 대주제인 이신칭의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것이 성도에게 열려진 믿음의 세계 은혜의 왕노릇이에요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가치가 부정되는 말이에요. 세상사람들이 들으면 교회를 향해 돌 던질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 교회들이 복음을 정직하게 전하지 않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과 친해보려고...그러나 사도는 그 세상에 대해 십자가로 못 박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날 대한 유대교는 믿음이 없으니까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 자유가 오히려 더 없어요. 짐만 잔뜩 지워놓은 게 대한 유대교란 말입니다.
저수지가 오염되어 있으면 정수기로 아무리 정수해도 소용없죠. 마찬가지로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선악 열매의 죄성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게 죄예요. 우리는 죄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나쁜 짓 안 하고 착하게 살겠다고 아무리 애써도 안 돼요. 원천 저수지 자체가 오염되어 그렇습니다. 그런 오염된 것들 윤리 도덕이나 종교행위로 잠깐씩 정수를 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담을 고쳐 쓰시는 게 아니라,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천국 백성을 만드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씨 심는 죽음 안에 집어넣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기로 하셨어요.
이 새 창조에는 옛사람의 무너짐, 그러니까 역 창조가 반드시 동반됩니다 육적 자아의 죽음입니다.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불가능한 죄인의 실체가 역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낱낱이 폭로되면서 새 창조가 일어나요. 그래야 예수님의 피 그 은혜만 오롯이 남아요. 하나님은 아들의 언약의 피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창세전에 작정하신 거예요. 이것이 영원 전 실행된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게 바로 복음이에요.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이렇게 처음부터 믿음의 의로 복음을 정의한 이유는 우리 율법의 몸, 선악의 몸은 자꾸 무언가 행위를 내어놓아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는 원천적 죄성이 들어있음을 사도가 알기에 믿음의 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건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자면 믿음이 등장한다는 건 우리의 행위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왜 이렇게 거듭해서 믿음을 이야기하고 행위를 부정하는가? 먼저 믿음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믿음이란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에요. 믿음은 우리의 결심과 결단이나 의지가 아니에요. 믿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 주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분에 의해 찾아짐의 관계를 가지게 된 상태, 그리스도 안이라는 영적 영역 그리고 그분의 믿음과 사랑으로 우리가 띠 띠어져서 하나님의 목적지까지 데리고 가는 모든 과정으로서의 믿음이에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악 열매의 죄성이 발동해서 생명 열매에 손을 뻗는 탐심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로마서에서는 그 탐심을 죄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정욕, 두 마음이 짝을 이루어서 낳게 되는 죄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하는 그 죄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까지 사용하셔서 마침내 진리의 죽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약1:15)
그러니까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의 행함은 궁극적으로 자기라는 우상 숭배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그런 죄인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도 다 죄예요. 동의하십니까? 이것부터 동의가 되어야 복음이 설명이 돼요. 혹시 ‘나는 그래도 평생 살면서 착한 일 좀 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그 착한 일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한번 보세요. 거기에는 ‘나를 위하여’가 있고 ‘좀 더 괜찮은 나를 위하여’가 들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나입니다. 좀 더 나아가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해지고 싶은 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을 다시 설명하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은 시내산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도 산에서 주셨습니다. ‘산에 올라 입을 열어 가라사대..’ 구약의 율법 수여와 같은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율법은 이런 거란다.. 라고 다시 해석하신 게 산상수훈이에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의 몸은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다 정욕이 작동한다고 하십니다. 그런 너희의 눈이 문제요 귀가 문제라는 겁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가 문제예요. 그런데도 행위의 가능성을 고집하는 이스라엘에게 왜 너희들의 그 몸으론 천국 못 가는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마5:1-12은 이렇게 하면 천국 갈 수 있다는 방법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서 난 인간 누구도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말씀하신 거란 말입니다.
(마 5장)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이 말은 너희의 몸 자체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모두 죄라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의 눈을 빼고 손을 찍어내 버리고 지옥 안 가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너희의 그 몸이 있는 이상 모두 지옥 가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지옥에 안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몸이 바뀌는 겁니다. 흙에 속한 아담의 이 몸 말고 하늘에 속한 몸이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땅에 속한 이 몸을 가지고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고 애써봤자 나오는 건 죄뿐이니까. 다른 건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사람 미워하지 않는 거 마음대로 됩니까? 싫은 건 그냥 싫은 거죠. 우리 말에도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남을 미워하는 자를 살인자라고 하셨어요.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이라고 하셨다니까요. 그러니까 몸이 바뀌면 율법 해석이나 관점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그들이 새피조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아담에게서 태어난 첫 자식부터 살인죄를 저질렀어요. 내 제사를 안 받아준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데 하나님을 죽일 수 없으니 제사 받아준 동생을 죽인 거예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서 DNA로 계속 내려오고 있어요. 그게 결국은 이 땅에 오실 예수님 살해를 가리키고 또 실행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산상수훈 강론대로 십계명의 제 육 계명을 정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살인자예요. 그것도 연쇄살인범입니다. 제 칠 계명 역시 마찬가지예요. 간음 불륜 안한 사람이 없죠 마음으로 간음해도 간음이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진짜 불륜은 하나님이 하신 거에요 사랑해선 안 되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자기 몸을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모세에게 말씀하신 열 말씀 중 한 가지도 지킬 수 없음을 아는 사람들만 십자가 그 은혜의 필연성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욥처럼 입을 가리게 돼요. 오늘 본문처럼 왜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우리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베풀기 위함인 것을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온몸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도를 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가끔 합니다. 주님, 저는 왜 이렇게 안 되는 죄인입니까? 양파처럼 까고 까도 죄밖에 안 나옵니다. 언감생심 구원은 꿈도 꾸지 못하는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입니다 지금 당장 지옥 보내셔도 할말 없는 죄인 맞습니다 .. 그럴 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피를 흘렸단다. 그 십자가의 피가 네가 말하는 그런 죄 정도도 깨끗이 못할 피로 여기느냐? .. 그럼, 정신이 번쩍 들죠.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꾸 파헤치는 자기 성찰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게 믿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네가 네 자신의 불가능만 보고 주저앉는 건 내 피를 모독하는 거야..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의 모든 죄를 내 피로 덮었다.. 그래서 내가 죄 없음이라고 하면 죄가 없는 거야.. 여러분 이런 은혜를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갚습니까?
(사 1장)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은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원래 죄는 우리 행위로 인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가 되신 한 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게 죄예요. 쉽게 말하면 예수를 안 믿는 게 용서받지 못할 죄예요. 다른 모든 죄는 용서되지만, 예수 안 믿는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피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음을 모르는 게 진짜 죄인 겁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 은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없으면 우린 안 돼요. 그 끝까지의 사랑을 평생 온몸으로 체휼하고 고백하고 찬송하는 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제 이 말씀이 이해되시죠?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런데도 세상 교회들이 강요하는 게 있지요.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해요. 어떻게 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온갖 방법론을 개발해서 가르쳐요. 그런데 이게 은혜 모독이란 말입니다. 목사부터 입으로만 떠들지 그 아픈 은혜를 살아내지 못해서 그래요. 우리의 모든 행위의 가치, 가능성이 부정당하는 은혜를 살아내지 못해서 이스라엘이 실패한 율법 행위에 다시 매달리는 자들이 오늘날 대한 유대교예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종교인이라고 하지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 자들을 대놓고 ‘개’라고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을 오직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크신 사랑으로 구원하셨는데, 여전히 자기 육체를 신뢰하고 행위의 가능성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자들을 개라고, 아니 개보다 못한 자라고 합니다.
(빌 3장)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육체를 자랑할 게 많은 사람이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 그런 자랑거리를 다 똥으로 여겼어요. 오직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말은 그를 믿음으로, 그와의 사귐(연합)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예요. 그래서 바울이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고 합니다.
(갈 6장)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종교의 세상입니다.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다 종교인입니다. 무교자는 없어요. 하다못해 자기라는 우상이라도 섬겨요. 그래서 이 세상은 종교의 세상이에요. 바울은 그 종교의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로 못 박혔다고 하는 거예요.
이들이 본문 10절 기록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로 못 박힌 자들이에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피라는 하나님의 창세전 약속이 작동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선은 창세기 1장 기록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처음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에요. 우리 인간의 처음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그 아들들이란 말에요.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거예요. 그렇게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면서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하나님의 그 선하심이 온전히 들어있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아는 것, 그 하나님을 담아서 우리에게 오신 성령에 의해서 그 선물의 내용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 우리의 선한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이란 말이에요. 그것을 아직 실감하지 못하니까 사는 게 맨날 우울증 걸린 것처럼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선물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잠도 안 올 거예요. 복권 1등 열 장 당첨보다 더 큰 선물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미친놈처럼 매일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게 정상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구원에 어떤 도움이나 협조가 불가능하다는 게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이 영원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 선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하고 찬송하면 되는 거야.. 뭘 네가 할 게 있다고 한다고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세상 종교인들이 더들고 나대는 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이 뭔지를 모르니까 지들끼리 해보겠다고 그런거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 없는 거야 이런 얘기를 듣고 자유하시란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런 걱정하지 마시고...
자 그런데도 우리의 처음 자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선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의 본분을 우리 인간은 너무 자주 잊어버려요.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니까요. 우리에게 현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만이잖아요. 이게 육의 한계예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선악과의 DNA때문에 우리는 자꾸 나 있음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요. 그런데 지금의 이 나는 있음이 아니에요. 이미 묵시 안에 완성된 아들들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진짜 있음인데, 지금의 이 나는 그 있음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잠시 허용된 몸이에요. 그러니까 이 육체로 사는 나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몸이 전부인 줄 알고 모든 것을 이 몸에서부터 시작하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다 가짜요 엉터리란 겁니다. 하나님 흉내 내기에 다름 아닌 거에요.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가 말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이것보다 더 큰 현실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세상현실이에요. 그런데 그게 다 아니거든요. 그런 데카르트 죽었죠? 니체가 그랬습니까? 신은 죽었다고.. 그런데 니체도 죽었어요. 그들에게 진자 현실은 죽음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는 하나님의 사람들만 아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음을 감사합니다. 사망의 문을 열고 한 발짝 나갈 그때부터가 진짜 사는 것이니까.
성경은 그렇게 잘못된 인간들의 생각과 판단과 감정 등의 모든 것을 부패한 것, 거짓이라고 정의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이사야는 너희들의 의는 똥걸레라고...
그래서 윤리 도덕을 중시하고 착하게 살았다는 사람일수록 복음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집니다. 예수 믿기가 힘들다는 말이에요. 십자가 복음이 귀에 들리지 않아요. 자기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복음전하기가 가장 어려운 직업이 뭔지 아세요? 목사예요. 그들 머리는 신학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복음이 안 들어갑니다. 차라리 절의 중한테 복음을 전하는 게 쉽지요. 종교인들 교회 선생들은 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생각 한번 해보세요. 평생 강도짓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었던 우편 강도가 천국에 갔는데, 평생 착하게 살았다는 사람을 지옥 보내는 그런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이 수긍하겠습니까? 제가 전에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커피숍에 앉아 있다가 한쪽에서 아줌마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야야, 교회에서는 착한 사람도 천국 못 간다고 하더라.”.. 누가 복음을 얘기해준 모양이에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아줌마가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노? 나는 그런 천국 안 간다.”.. 이게 인간의 자존심이에요. 착하게 산 사람을 천국 안 보내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인과응보의 하나님 상선벌악의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우리 행위 하나 하나 따져서 천국 보낸다면 천국 갈 사람 하나도 없을 겁니다 천국은 그래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란 말입니다.
착하게 살아야 천국 간다는 거 이게 일반적 세상 사람들 생각이에요. 그런데 천국은 착하게 살아서 가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 곧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이 예수 피로 빤 세마포 옷,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신 자들이 가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도 종교인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봐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은 목적이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잖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착하게 살아야 해.”.. 이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모든 성경 말씀은 세상 교회 종교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더럽혀지고 있어요
그들이 결정적으로 모르는 게 있어요. 본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모르는 거예요.
그럼, 그리스도 예수 밖은 뭐예요?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만들기를 위해서 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질러도 지옥 가는 게 그리스도 밖의 세상이예요.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가 언제부턴가 광장으로 나가는 기독교가 돼버렸어요. 정치라는 게임에 빠져서. 그런데 정치는 게임입니다. 그 게임에 판돈을 걸면 안 돼요. 그냥 게임으로 보면 됩니다. 게임에 다가 왜 말씀을 들먹이고 예수 이름을 파냐고요... 좌우로 갈라져서 게임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사기 치는 놈들 그들 다 사단의 종들이에요 게임은 게임으로 끝내야 하는 겁니다. 천국 가서도 좌우로 나눠서 쌈박질 한 건가요? 천국은 만인이 나를 섬기고 내가 만인을 섬기는 곳으로 천국이에요 성도는 이땅에서부터 그 천국을 살고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세상에서 천국을 못 살면 죽어서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선한 일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럼 막 살라는 말이냐는 분도 있는데, 어차피 육체로 사는 인간은 막 살게 되어 있어요.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게 막 사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에서 자유롭지를 못해요. 선악 판단도 자기중심이고, 행위 선택도 자기를 위한 것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막 사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가 세상과 치이점은 그런 인생에 대한 애통이에요 그 애통이 없으면 십자가마을 되는 거에요 성도의 불가능은 오직 예수 이름앞에 무릎꿇기 위한 불가능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은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 중에 주가 계심을 아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그리고 무엇을 해도 주를 위한 삶이 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오늘 본문은 그들을 가리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무엇을 해도 전부 주를 위한 일이 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롬 14장)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여러분은 주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나밖에 모르고 내 새끼밖에 모르고 사는데 바울이 말하길 하나님의 시각으로 너희 가운데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한다니까요.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게 주되심을 아는 거예요. 확정된 묵시의 현실,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새창조의 현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 믿음의 세계 안에서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걸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들은 다 자기 주체,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선악과의 주체성,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이름을 그리스도 예수에게 빼앗긴 자들이에요. 차압당해 버렸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자기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교회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자들로 교회라고요. 그래서 교회는 자기 이름이 빼앗긴 자들의 모임이에요.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 14장)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우리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요. 이 말은 니들은 다 내 것이라는 거예요. 니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필름처럼 정리해서 보면 어떤 것은 정말 쳐다보기도 싫은 게 많을 텐데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것으로 봐주신단 말이에요.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것으로 봐주세요.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 것이라 하고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골 2장)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믿음에 굳게 서는 게 주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이게 여러분들의 구원의 현실이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행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이 넘치는 것이에요. 이게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너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그래서 예수 믿음은 우리의 어떤 의도 어떤 행위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것으로서의 예수 믿음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한마디로 예수만 믿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고 세상도 믿지 않고 예수만 믿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그분 안에서 예수 믿는 자로 지금도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그렇게 복음의 중심에는 ‘나는 아니오’가 들어있어요. 끊임없는 자기 부정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과 우리 인간의 선은 언제나 충돌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정상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의 선한 것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출 33장)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선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불만 있습니까? 당연히 불만이 나와야 해요. 우리 몸에서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이 다 감추어져 있다니까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단 말입니다. 이게 로마서 9장 13절이잖아요. 그들의 어떤 행위가 있기도 전에, 착한 행위 나쁜 행위가 있기도 전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세상 인간들은 수긍하지 못해요. 내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벌을 받는다는 게 일반적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에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9장)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라는 건 인간들의 선에 대한 의지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인간의 어떤 선택이나 열심으로도 하나님의 의 선에 이룰 수가 없다.. 그럼 뭐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이게 하나님의 선이고 의로우심이에요.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예 맞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이 맞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죄입니다. 죄의 기능이에요. ‘맞습니다. 저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네요. 더럽고 추하고 거짓된 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밖에 나올 게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에게는 어떤 가망성도 없습니다.’.. 이런 자에겐 죄가 그 역할을 다 한 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이에요.
(롬 11장)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9장)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런 하나님의 주권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에요. 그러나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의 죄성을 가진 인간은 이런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이 합심해서 살해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 필요 없어.. 하나님이 없이도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만들 수 있고 또 우리의 의로 착함으로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우리 인간 세상에 나타날 생각 하지 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렇게해서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악한 본성을 숨긴 자들이 지금도 목에 십자가를 걸고 예배당 지붕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하나님 이름을 모독하고 있어요. 사도는 그런 현실을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때부터 이 악한 세상은 심판 아래 있어요. 다른 말로 종말입니다. 악한 세대. 이천 년 전에 사도가 선포한 악한 세대는 지금도 그 본성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을 심판 아래 가두셨어요. 이 저주의 현실을 볼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성령 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세상을 심판 아래 가두셨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모든 인간을 불순종 안에 가두셨어요.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자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죄 아래, 심판 아래 가두었어요.
(갈 3장)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종교생활을 하면 그 자체가 심판이에요. 하나님의 뜻인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기 위해서는 성경의 약속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해요. 그런데 세상 교회들이 그 약속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늘날 기독교는 그냥 문화가 되어버렸어요. 종교 문화로서 기독교예요. 예수와 십자가라는 약속에는 관심이 없어요. 내 구원 내 교회에만 관심 있어요. 내가 투사되고 확장된 교회에만 관심 있지 왜 피인지 몰라요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눈에 안 보이게 치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빌리보서의 말씀처럼 첫날부터 은혜의 복음에 참여된 것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안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며 우리의 선한 일입니다. 복음에 관심 있는가,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관심 있는가, 아니면 예수 믿는 나(교회)에게 관심 있는가.. 대부분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나간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다시 예수 믿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나만 믿었지 한번도 예수 믿은 적이 없는 거에요
십자가 복음 안에서 살고, 피에 잠겨서 사는 게 하나님의 선한 일이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일에 대해서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선한 일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선한 분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라고 하십니다. 네가 그분을 아는 게 너희 선한 일이라는 거예요.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 게 아니고 한 분 선한 하나님을 아는 게 영생입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언약의 피를 남기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 그분의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드는 것 그게 선한 일이에요. 그게 성도의 본분인 것을 잊으면 안 돼요.
끝으로 로마서를 읽고 오늘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롬 3장)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에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그 은혜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송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오늘 2장 본문은 앞으로도 계속 나눌 예정이니까 집에 가서도 2장을 여러 번 읽고 같이 나눌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흠도 티도 없이 거룩한 아들들이 되게 하신 우리 주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를 피로사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웠습니다. 이 모든 은혜의 영광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찬송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 세워주며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