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지의 전사] 정형근의 폭탄증언(하)박노해, 스스로 貴族으로 변모한 이중적 인간 남한내 친북세력(3) "對共 수사관들, 온통 빨갱이 세상이 되어간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趙甲濟
"해외 친북단체는 94개국에 2000여 개. 그 중 80여 개의 교포단체가 親北·反韓 활동을 주도" "사노맹(社勞盟) 지도자 박노해 검거 위해 '잠실 부근 스페인식 집' 찾으려 요원들이 2만여 가구 뒤져" "어떤 점에서는 NL보다 PD계열이 국가 안위에 훨씬 더 위험한 존재" <金洛中 아들 유인에 실패한 이유> ―1992년 8월에 귀순한 북한여자 공작원이 안기부의 수사관에게 털어놓은 정보에 의하면, 金洛中씨 아들이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유학중이었는데 그가 북한 첩보원과 접촉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데려와 잡을 수는 없었습니까. 『제가 당시 공작원 「은하수」로부터 그 첩보를 받으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한국으로 유인, 입국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金洛中이란 이름으로 전문을 보내 바로 입국하도록 했습니다만, 이미 북한의 제보를 받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국내에서 金洛中 구속 관련 기사가 신문에 실린 뒤겠지요. 『그 전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게 문젭니다. 우리나라에서 金洛中을 검거하는 순간 그의 주변에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고정간첩들이 깔려 있었다는 겁니다. 金洛中의 신변에 조그마한 이상이라도 있으면 즉시 북한으로 연락이 가능한 체제를 구축해 놓은 겁니다』 ―작년에 청와대로부터 金洛中씨의 아들에게 장학금을 계속 지급하라고 모 장학재단에 압력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것을 지시한 수석비서관의 이름도 거론되곤 했습니다. 안기부에서도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저도 그 재단에서 누구로부터 연락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제가 담당자를 만나 절대 주어서는 안된다면서 수사 결과 나타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납득시키려 애를 썼지요. 그래서 지금도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지 않은 줄 압니다』 <『엄청난 工作金이 정치권 등으로 유입된다고 봐야 한다』> ―金泳三 정권 하에서 청와대의 태도를 보면 국사범, 反국가사범, 옛날 식으로 보면 대역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온정적으로 나가거나 굴욕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봐줘버리는 것이지요. 그 반면에 李東馥·鄭 차장 등 對北戰線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게 대응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金泳三 정부 내의 재야인사들 중 과거의 사상적인 문제가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런 점에서 여쭤보고 싶은 것은 안기부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우리 보수층에서 굉장히 우려했던 정부 내의 재야출신, 사회주의 성향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 등을 전혀 해오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林秀卿, 文奎鉉 수사 과정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확인되더군요. 조총련이 일본에서 급조한 「재일교포학생연합」이란 조직이 88년 8월 초에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학 학생 崔모를 국내에 침투시켜 당시 全大協 의장이던 오영식을 통해 남북한 학생회담 추진자금으로 2천만 원을 제공했다는겁니다. 이것이 확실한 겁니까. 『확실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말로만 있었고, 설로만 있던, 북한의 공작금이 조총련을 통해 전대협 학생 특히 주사파 학생과 친북 학생조직에 유입되고 있다는 「자금 유입설」을 실증적으로 입증시켰던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알지만 워낙 교묘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밝히기가 몹시 어렵지요』 ―북한의 공작금이 해외를 통해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들어가고 학생과 종교단체, 민중당 등에 들어갔습니다. 수사에서 밝혀지는 범죄사실은 존재하는 범죄의 10% 이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만, 이 밖에도 훨씬 더 많은 북한의 자금이 우리 정치권 주변으로 들어온다고 봐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저희들도 놀랐습니다만, 북한은 對南공작을 위해서는 체제를 걸고 金日成·金正日이 직접 주관해 독려하니까 자금이나 조직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놀라운 건 金洛中 한 개인에게도 여러 번에 걸쳐 美貨 210만 달러가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자금이 유입되고 있어요』 ―간첩 金洛中의 공범이었던 심금섭이 강화도의 드보크를 발굴했는데 1백만 달러가 든 돈뭉치는 金洛中에게 주고, 그보다 더 큰 300만 달러가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돈뭉치는 北韓공작원이 다른 용도가 있다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수사가 됐습니까. 『당시 제가 직접 신문을 했습니다. 그때 沈은 직파 간첩들을 따라 강화도로 가서 팠는데 세 개의 뭉치가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백만불 뭉치는 金洛中, 또 작은 뭉치는 沈에게 전달됐고 그보다 훨씬 더 큰 200∼3000만 달러의 뭉치는 다른 조직으로 가져간다고 당시 직파간첩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맹렬히 추적했습니다만 아직도 거액의 달러가 건너간 별도 조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독일 커넥션이 문제> ―그 드보크에서 400만 달러가 나왔다고 봤을 때, 북한에서의 400만 달러는 북한의 경제규모에 비추어, 남한 기준으로는 거의 1억 달러에 달하는 돈입니다. 약 800억 원을 공작금으로 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혹시 그 돈이 위조는 아니었습니까. 『위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金洛中의 앞마당 장독대에서 발견한 백만 달러가 혹시 위조가 아니냐는 의심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美 재무성의 달러 감정 전문가가 직접 내한해 감정했습니다만 전부 진폐로 확인됐습니다. 공작원 「은하수」의 진술에 따르면, 북한은 오스트리아에서 달러를 위조해 공작금으로 사용하고 마르크화나 엔화로 바꾼 뒤 다시 달러로 교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저희들이 긴장해서 조사한 것이지요. 북한은 해외에 식별 불가능한 위조지폐를 유통시키는 중입니다』 ―林秀卿은 독일을 통해 밀입북했고, 그 밖에도 많은 학생들이 독일을 통해 밀입북했습니다. 在北 공작거점이 독일에 많은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우선 독일의 보쿰 지역을 중심으로 예전부터 광부와 간호원들이 자리를 잡았고 한때 독일에 유학간 사람들과 교포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북한이 구라파의 해외공작 거점으로 삼은 곳이 동독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동서독은 냉전시대에도 왕래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이런 점을 틈타서 북한은 초창기에 동서독으로 건너간 우리나라의 소외된 사람들을 표적으로 對南공작을 진행했던 겁니다. 그 중 하나가 동백림 사건이 아닙니까. 북한의 서독을 통한 대남공작은 뿌리가 깊습니다. 그 이후 북한의 공작은 구라파에서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을 중심으로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동남아에서는 마카오와 홍콩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중요 거점을 미국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은 해외 친북세력을 총결집해서 남한 정부의 와해를 기도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해외 친북단체는 94개국에 2000여 개나 됩니다. 대부분 50여 명 정도의 소규모 조직입니다만, 그 중 80여 개의 교포단체가 親北·反韓 활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규모에 비해 사람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사건이 朴노해, 백태웅(白泰雄)이 지도자로 있었던 사노맹(社勞盟) 사건입니다. 용의자 120명 중 107명이 구속된 큰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그들은 재야세력 중 주사파가 아닌 PD계열이어서 주로 학원쪽보다는 노동계로 들어가 「南韓 社會主義 勞動者 黨」을 건설할 목표로, 남로당의 맥을 잇는 큰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안기부에서는 이들을 거의 일망타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까. 『지금 잔존세력들이 출옥해서 재결집하며 조직을 재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아마 다시 방대해질 겁니다. 그 조직들의 인원, 자금 동원력 등은 한국의 좌익들 중 어느 조직보다 강한 조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PD계열입니다. 전대협이라든지 한총련 계열의 주사파와는 약간 다르다고 봅니다. PD계열이기 때문에 反 金日成 노선이고 북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비판적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주사파보다는 국가에 대해 덜 위해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수사해 보니 어떻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안기부가 이 社勞盟 조직을 소탕하지 못했다면 산업계, 특히 제조업은 마비되었을 겁니다. 이들은 정통 마르크시즘을 신봉하고 자신들의 주된 활동무대를 노동계로 생각합니다. 조직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펴고 있습니다.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朴노해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었던 白泰雄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론으로 무장되어 조직적으로 이끌어 나갔던 겁니다. 그래서 제2의 남로당을 표방하고 노동자들의 혁명을 통해 사회를 뒤엎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임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들은 연락 장비도 최첨단 전자장비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자수첩의 암호를 푸는 데는 국내 해커들을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三星전자에 근무하며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컴퓨터 암호해독 전문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2만 가구 뒤져 스페인式 집발견』> ―어떻게 검거했습니까. 『우리의 정예 수사관들이 총력을 경주했지만 몇 개월 동안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朴노해의 본명인 박기평의 얼굴 사진 한 장을 입수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 구하는 데 안기부 수사관들이 몇 달을 뛰어다녔다면 믿겠습니까. 그렇게 용의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고, 詩人이며 버스 운전기사를 했다는 것, 그리고 全南 함평 출신에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으며, 그의 부인이 梨大 약대를 졸업한 김진주라는 부잣집 외동딸이라는 것을 알고 그 김진주를 역으로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김진주도 노동운동을 한다고 집에 자주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우리가 찾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런 딸을 아버지는 아예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어머니와는 가끔 밖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김진주의 어머니가 잠실 롯데수영장에 다닌다는 것을 파악하고, 어머니를 미행했습니다. 어머니와 딸 사이도 간첩 만나는 것처럼 돼 버렸더군요. 쪽지를 통해서 「청량리 맘모스 시장 이층 옷가게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어머니에게 전해질 때 우리가 가로챘던 겁니다. 그리고는 男女 수사관들이 옷가게 점원으로 위장하고서야 비로소 김진주를 검거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추궁해도 박기평의 소재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진주도 자기 남편의 소재를 모르고, 간첩들이 접선하듯 가끔 만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김진주의 이야기 속에 아주 작은 실마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잠실인가 어디 스페인식 집이 있는데 그 집의 지하실에 책을 저장해 두고는 가끔 나타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진술 하나만 듣고 우리 수사관들이 잠실 일대 2만여 가구를 두 달 동안 뒤졌습니다.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날도 한 수사관이 스스로 찾아나선 겁니다. 어느 지역의 고층 건물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둘러보던 중에 우연히 스페인식 집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친구는 망원경으로 일주일 동안을 계속 지켜보았지요. 그러다가 일주일 만에 사진으로만 보던 그 얼굴이 망원경 속에서 나타난 겁니다. 제가 직접 박노해를 심문을 했는데, 한 시간의 검증 끝에 朴노해라는 것을 확인했었지요』 <『노동운동을 통해 자란 勞動貴族』> ―朴노해와 일문일답해 보니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굉장히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옷은 거의 외제였고 많은 돈을 갖고 있었습니다. 朴노해는 노동자를 생각하고 노동자를 위한 詩를 쓰고 버스 운전도 하며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 사람인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 貴族으로 변모한 이중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박노해 즉 본명 박기평을 잡은 한참 뒤인 92년 봄 총선 직후 양평 플라자에서 白泰雄 등 8명을 추가로 검거했는데, 그 과정도 설명해 주시죠. 『그 이전까지 사노맹은 박기평과 白泰雄의 공동지도하에 움직였는데 박기평이 잡힌 이후에 社勞盟은 白泰雄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白泰雄은 부산 동성고등학교와 서울 법대를 나왔고 아버지가 순경이었습니다. 학창시절 수배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자수를 하면 불구속으로 해준다고 경찰과 거래를 했는데, 그 약속이 경찰측으로부터 지켜지지 않고 구속이 되어버린 겁니다. 白泰雄의 아버지는 이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白泰雄은 한(恨)을 품게 되었지요. 미남형 얼굴의 그는 소신이 확고했습니다. 이 白泰雄이가 사노맹을 재건해서 공산주의 활동을, 그들의 말로는 「더욱 가열차게」해 갔습니다. 백태웅 밑에 7명의 최고위원들이 있었는데 거의가 서울대 출신으로 유능한 두뇌의 소유자들이었지요. 그들의 집단지도체제하에서 사노맹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안기부에서는 1년 동안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그의 그림자도 못 찾았습니다. 그러던 끝에 우연히 이들이 양평 플라자 콘도에 모여 정기 대의원대회를 개최한다는 중요한 첩보를 입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작전을 하려고 하니, 양평 플라자라는 곳은 매우 험한 지형이었어요. 자칫 잘못해서 건물 뒷편의 절벽으로 투신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뒤집어 쓸 수도 있었지요. 그 때문에 작전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회의를 했지만 우리 자체의 의견도 엇갈렸습니다. 그때 저는 곡 잡아야겠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수사관이 400여 명, 무술수사관 2개 중대, 경찰 10개 중대, 그리고 병원 구급자와 소방차가 동원되어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습니다. 새벽 3시에 출동해서 2중 3중으로 병력들을 은밀하게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양평 플라자의 종업원들과 협조하에 소변 보러 나오는 이들을 하나씩 잡아 그 자리에서 8명을 검거했습니다. 이후 관련자 57명을 일망타진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법정(法庭)에 섰을 때 주사파나 金日成주의자들과는 인간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까. 『국내에서 자생된 엘리트 학생들이 오히려 더 강인하고 더 투쟁적이고 더 비협조적이고 더 반성하지 않아서 수사나 법정에서 굉장히 애를 먹었습니다. 간첩은 일단 심적인 변화를 일으키면 모든 것을 털어놓습니다. 북한의 말이 모두 거짓인 것을 알면 다 털어놓습니다. 하지만 사노맹 이 친구들은 소신이 있는 겁니다』 <『PD는 NL보다 국가적으로 더 위험한 존재』> ―남한에서는 PD와 NL이 상극이니까 NL계열은 단속하더라도 PD계열은 적당히 지켜보면서 주사파(NL)를 견제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朴弘 四江大 총장 같은 분은 「사노맹이나 주사파나 위로 올라가면 모두 金正日과 만난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朴弘 총장의 말이 맞다고 봅니다. PD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이고, 주사파는 그 변종이라고 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특수성이 있지 않습니까. 올라가면 결국 北韓과 만나게 됩니다. 朴노해도 金日成을 찬양하고, 金日成과 교감으로 만납니다.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혁명으로 자본가 계급을 벌벌 떨게 하라」는 그들의 경력을 읽어보면, 어떤 점에서는 NL보다 PD계열이 국가 안위에 훨씬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큰 수사를 할 때는 수사관들에게 어떤 금기(禁忌) 같은 것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좀 어색합니다만, 저희 수사관들이 큰 수사를 할 때는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십사 하는 祭祀를 지냅니다. 국장이 祭主가 되지요. 그리고 수사 도중에는 수사관들이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심지어 범인이 잡히지 않을 때는 용하다고 알려진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기도 합니다』 ―살인범을 잡는 수사관들은 살인자에 대한 인간적인 고민이 별로 있을 수 없겠지만, 간첩을 잡는 對共수사관들은 좀 다를 것 같습니다. 간첩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사상(思想)과 그가 발표한 글 등은 구체적인 위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피의자들은 일반 잡범이 아니기에 수사를 하고 구속하는 과정에서 對共 수사과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양심과 對面하다가 갈등에 빠질 경우도 있을 겁니다만….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요원은 상당히 열심히 수사를 해 왔던 사람입니다. 멀찍이서 보아도 對共수사관으로 대성할 사람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은 도저히 對共 수사관을 못하겠다면서 다른 부서로 보내주거나 아니면 사직을 하겠다고 호소를 해 온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對共 수사관들은 처음 몇 건의 對共 사건을 접해보고는 「이거 우리나라가 큰일 나겠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온통 빨갱이 세상이 되어간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러면서 철저한 사명감과 자긍심을 느끼면서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북한은 그들의 對南工作 요원들에게 어떤 대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우선 對南간첩을 한다면 일급 국기훈장을 줍니다. 게다가 완벽한 노후생활을 보장합니다. 심지어 정경희는 벤츠 300을 타고 李善實은 정치국 후보위원에 권력서열 21위입니다. 對南工作員이 북한으로 올라가면 金日成이 親見을 합니다. 돈도 주고 평생을 보장해주니 온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그 일을 하게 되지요』(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