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비밀(1)
엡 3:1-13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엡 3:1-13 / [이방인들을 위한 바울의 사도직]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울은 여러분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가르쳤다는 죄로 여기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2-3) 내가 전에 쓴 편지에서도 간단히 말한 일이 있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시려고 내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 속에 포함시키셨다고 하는 심오한 계획을 내게 알려 주셨습니다. 4) 내가 이런 말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은 이 심오한 계획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5)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이 계획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6)0 그 심오한 계획이란 이방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만 되면 유대 사람들처럼 모든 상속을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크나큰 복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 같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특권을 내게 주셨습니다. 또한 이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특별할 재능도 주셨습니다. 8) 생각해 보십시오. 나야말로 그런 일을 할만한 자격도 없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이방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9)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상을 세운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를 쓰신 것입니다. 10)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지배자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가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굳게 연합된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11)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려고 계획하신 일입니다. 12)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또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갑게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13)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분을 위한 것이니 여러분에게는 오히려 영광과 격려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일치’를 매우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하는 공동체야말로 바울이 꿈꾸던 교회의 참된 모습이었습니다.
비밀(1-6) 본문의 핵심단어는 ‘비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게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알게된 이방인의 구원이 현대에서는 당연한 사실일지몰라도 초기 기독교에서는 엄청난 비밀에 속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고, 한 몸의 지체가 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자기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한 몸이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상속할 사람들이라는 바울의 주장은 그 당시에는 아주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복음(7-11) 바울의 혁명적인 주장의 밑바탕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은 율법과 대척점에 놓인 개념입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지만, 복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에서 바리새인들이 매사에 예수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서로 적대적이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지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바울의 신앙 때문에 역사적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광(12-13) 영광은 곧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피부색, 성, 빈부의 차이가 없는 일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종교적, 도덕적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복음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 이 복음을 아는 사람, 그 영광에 참여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일치하기를 힘쓰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적용: 당신은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을 지향하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지양하는 사람인가요?
스펄전을 회심시킨 것은 콜로체스터의 예배당에서 있었던 어느 감리교의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바라라 그리하면 땅 끝까지라도 함께 하리라." 스펄전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 설교자는 그다지 많은 것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계속 그 말씀을 되풀이하게 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말씀 이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설 교 >
은혜의 선물
엡 3:1- / 이필재 목사
오늘 말씀 7절에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이런 말이 있고, 2절 말씀에는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에베소서 3:1~9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주어진 이유를 8절에서 말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렇게 이유를 말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란 비유대인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은혜의 선물인 사도로 택하셨다” 이렇게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정의를 자신이 내리는 것입니다. 아주 확실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는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유대인 우월성에 좀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라 선교 초기에는 베드로마저도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깨닫고 선교를 위해서 세계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2사도가 아닌 바울을 이방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다고 바울이 지금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없이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는 모든 분야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은 무엇인가? 나는 그 은혜의 선물을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바울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고 평생을 유대인이 아닌 비유대인 이방인 구원을 위해서 살다가 이방 세계에서 이방인에게 순교를 당해 죽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목적하신 대로 살았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은혜의 선물을 주님이 목적한 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제 친구는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그 분에 대한 한국 교회의 평가가 있었습니다. 손자이기 때문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데 ‘괴짜 목사’였습니다. 지금 연세가 80세 이상 되신 한국의 장로교 목사는 그분을 모르시는 분이 없습니다. 최봉성 목사님인데 대한민국에서 개척교회를 제일 많이 하신 분으로 70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노방전도를 제일 많이 하신 목사, 전도하다가 제일 많이 혼나신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손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어느 동네를 들어가든지 전도를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보고 “나는 도사다.” 하얀 두루마리를 입고 하얗게 수염을 기르고 얼굴을 근엄하게 하고 “오늘 저녁에 내가 오라는 곳으로 오면 내가 너에게 도사가 가지고 있는 약을 줄 것이다. 내가 주는 약을 먹는 사람은 평생 안 죽는다.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아라. 약은 공짜로 주겠다.” 이렇게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시골 사람들이 이상하기는 한데 꽤 점잖고 실없는 소리를 할 거 같이 보이지 않으니까 밑져야 본전으로 일 마친 다음에 동네 공회당으로 온 동네 사람이 하루 만에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 “오늘 저녁에 내 말이 끝나지 않았을 때 가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 그러니까 믿을 수도 없고 안 믿기도 겁나고 ‘이거, 잘못 걸렸나?’ 못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 하시는 말씀 중에는 거짓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약은 신약과 구약입니다. 그것으로 수천 명의 영혼을 구원했으니까 도사이시지 않습니까? 입장료 안 받고 주었으니까 공짜도 맞습니다. 이 약을 먹으면 영생하니까 안 죽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일찍 가는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구원 받지 못하고 영생 못해서 일찍 죽는 거니까 거짓말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나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야! 이 어른 정말 도사 전도사이다. 이렇게 전도하는 사람 처음 보았다.” 그래서 감복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기고, 또 하나는 “이거 순 사기다. 웬 미친놈의 영감에게 멀쩡하게 속아서 밤새도록 잠만 못 잤다.” 이 두 가지 반응이 항상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 시간에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좋은 선물이 없을 만큼 최고로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두 시간 잠자지 못한 게 억울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은혜”라는 단어인데 본래 이 단어의 뜻은 공짜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내게 공로가 있어서 받은 보상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반대로 큰 불행이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이 은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은 항상 좋은 것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나는 왜 저런 것을 안주시나 하는 자기 부족을 늘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지 않습니까? 나만 보면 이렇게 말하는 목사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이필재 목사같이 되었으면 당장 천국 가도 좋겠다.”라고 말을 합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나와 바꾸자. 뭐든지 바꾸자. 내가 목회하는 교회와 당신 교회와 건강, 나이, 재산 할 거 없이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꾸자. 양심 선언해 봐라. 바꾸겠냐? 당신이 먼저 말했으니까 말해 봐라.” 이렇게 다 바꾸자고 하면 저에게 또 묻습니다. “아내까지 포함하는 거냐?” “포함하는 거다. 다 포함해서 해보자.” 그러면 이것저것 따져보다가 안 되겠는가 봅니다. “그거 봐라. 당신이 더 좋은 은혜를 받은 것을 이제 깨닫겠지? 실제로 바꾸려고 생각하니까 아까운 게 많지?” 또 29살 된 젊은 목사가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저에게 와서 “저는 사역지도 없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시니 부럽습니다.” 하면서 사무실로 쫓아 들어와서 사역지 좀 달라고 해서 제가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너하고 나하고 바꾸자. 너는 몇 살이냐?” “네, 29살입니다.” “그러면 내가 29살 될 테니까 네가 69살 되어 여기 목회를 해라. 바꾸겠느냐?” “그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네가 더 좋은 줄 알아라.”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주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가장 귀하다. 이건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을 내게 주신 것이다.”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큰 은혜는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1절에서 9절까지 짧은 구절 속에 “비밀”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계시의 영을 내게 주셔서 하늘의 비밀을 나한테 알게 했다.” 보십시오. 비밀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뭐냐?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하셨다. 우리의 영의 뚜껑을 열어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보게 하셨다.” 바울은 지금 그런 하늘의 비밀의 계시를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이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보면 마태복음 13장 11절에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비밀을 열어준 자가 있고 감추어진 자가 있다. 받은 자는 감사하라.”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모두 비밀입니다.
‘푸에블로’라는 미국의 해군 정보함이 한국 동해안에서 북한에 납치된 적이 있습니다. 그 승무원들은 북한에서 오랫동안 풀어주지도 않고 죽이지도 아니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억류시켜 놓았느냐 하면 북한이 빼앗긴 빼앗았는데 이 푸에블로 정보함을 사용하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기술을 너희들이 가르쳐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비밀이 나가면 미국의 모든 비밀이 다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도 가르쳐줄 수 없다. 우리를 죽이라.” 그래서 오랜 기간 억류했다가 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승무원들이 미국에 와서 기자회견을 할 때 “우리는 다 죽기로 각오를 했습니다. 미국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우리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비밀은 그런 것입니다. 어떨 때는 생명보다 귀할 때가 얼마든지 있단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농부가 남의 집 밭을 갈러 갔다가 그 밭에 금덩어리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게 비밀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집에 들어와서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해서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가치관이 변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찬송 부르지 않습니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찬송을 작사한 것입니다.
제가 만난 대학 교수 한 사람은 고고학 박사입니다. 그래서 고고학을 연구해서 우리나라 여름방학 때 학생들과 골동품 수집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캐보고 아무리 찾아봐도 그게 어디 쉽게 나옵니까? 그래서 피곤해서 산골짜기 오막살이집에 여름이니까 잠깐 쉬었다 가자고 해서 들어갔는데 그 집 주인이 나무를 하러 가려고 숫돌에다가 낫을 막 가는데 물을 찍어서 그 숫돌에다 떨어뜨리는 옆에 있는 깨진 그릇을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잠깐 구경 좀 합시다.”하고 물에 씻어서 보니까 자기가 찾아 나선 고려자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집 주인 농부에게 “저는 대학교수인데 바로 이런 그릇을 찾아서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그릇을 저한테 파십시오.” 그랬더니 농부가 “그건 깨진 그릇인데 그냥 가져가시오.” “아닙니다. 돈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깨진 그릇을 가지고 뭘 야박하게 돈을 받습니까?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십시오. 나는 아무 짝에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주머니에서 있는 돈을 다 꺼내고 학생들에게 내가 돌아가서 줄 테니 있는 돈 다 꺼내라고 해서 돈을 모두 모아 그 농부에게 주었습니다. 농부는 ‘이게 무슨 미친 사람들인가? 깨진 그릇 하나 가지고 무슨 돈을 이렇게 많이 주나?’ 하면서 자기 평생에 그날이 제일 수지맞는 날로 생각하고 이 교수는 그 그릇을 사와서 그것을 닦고 깨어진 부분을 금으로 때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재산을 얼마를 주던지 나는 이것을 가보로 여길 것입니다. 내가 연구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교수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 교수는 만나기만 하면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수가 평가해도 나는 이것을 진품으로 평가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아무도 안준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천국의 비밀이 그렇습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 가치 하나를 붙들고 세상을 삽니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가져가시오.” 하나도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느니라.” 하나님이 아는 것을 다 알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내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내게 보이리라.” 하나님이 하늘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결과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국제 정치에서는 간첩으로 남의 나라 1급 비밀 하나를 캐내면 그 사람은 자기 조국의 영웅이 됩니다. 그 하나를 알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경비를 쓰고 얼마나 많은 과학 투자를 하고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 그러면서 그 비밀을 얻어내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자는 그 비밀 속에 감추어진 기쁨이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그것이 지금 내게 와있다.” 그래서 바울을 보십시오.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조건 속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 비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것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셨는가? “자기에게 주어진 이 비밀은 이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비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여러분! 세상적 비밀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비밀은 감추고, 감추고 또 감추어서 보안 장치를 철저하게 해서 아는 사람을 극소화 시켜서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데 하늘나라 비밀은 어떤지 아십니까? 오늘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빨리 알리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은 이렇습니다.”라고 빨리 이방인들에게 알려주어서 “다른 사람도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빨리 알게 하라.” 이것이 세상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내게 이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도 감사하고 최고의 가치관으로 정하고 내가 살아간다.” 자신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때로 일이 많아서 힘들어하는 교인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 가운데도 “일이 너무 많아서 골치 아프고 이제 그만 쉬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하시는데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말 안하지 않습니까? 일 많을수록 좋아합니다.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는 데가 있다는 것 같이 행복한 게 어디 있습니까? 오라는 곳이 많을수록 좋고 일이 많을수록 좋아하고 감사해야지 몸 바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나를 부르는 장소가 있고 몸 바칠 데가 있어야지 행복한 것이지 쉬어보십시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은퇴를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퇴는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서 별로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회적 심판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일이 없어지는 것이 상당히 슬프단 말입니다. 우리 목사들에게는 안식년 제도가 있습니다. 저는 평생 안식년을 한 번도 안했습니다. 안식년 하며 일 년 동안 쉬어서 뭐합니까? 그런데 안식년 한 목사들에게 물어보면 안식년을 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쉬는 동안 무엇을 얻었는가? ‘아! 내가 일할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가?’ 이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는 1년을 약속했는데 6개월 안되어서 “나는 안식년 그만 하겠다.” 말하게 되고 성도들은 “아닙니다. 더하십시오.” 이렇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 한 목사들은 돌아와서 언어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야! 일하는 것이 쉬는 것보다 얼마나 행복한지 내가 알았다.” 그리고 더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교회에서 정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 잘 못하는 목사 있으면 안식년을 주십시오. 그러면 깨닫고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교회 일이 너무 많다.’ 정말 싫어하시면 하나님이 거두어버리십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찍어 불에 던져버리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촛대를 옮겨버리겠다 하셨습니다. “일이 싫은 사람은 내가 옮겨 버리겠다. 할 테면 하고 말테면 말아라.” 하나님의 일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일 년 내내 병원 심방을 다닙니다. 거의 90퍼센트가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건강해지면 주님의 일 많이 하겠습니다.” 거의 똑같습니다. “내 평생 돌아보니까 주님을 위해서 일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58세 되어서 자동차 정비 공장하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얼마나 기운이 센지 그 무거운 엔진 쇳덩어리를 혼자 번쩍번쩍 들어서 옮기십니다. 28세 된 자기 아들과 58세 된 자기가 팔씨름을 해서 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천하장사이셨던 분이 병이 드셨습니다. 제가 심방 가니까 의사들의 진단은 “회복 못합니다. 이대로 가시게 됩니다.” 본인이 압니다. 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시며 “목사님! 나 이렇게 건강했는데 그 건강을 하루만 나에게 되돌려 주시면 할 일이 있습니다.” “뭐하고 싶습니까?” 그때 교회를 건축했었는데 “우리 교회 목사님 사무실부터 시작해서 화장실, 본당, 교육관 할 거 없이 내 손으로 교회 한번 깨끗하게 청소하고 그 이튿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 나 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 못한 것은 내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하루만 저에게 되돌려 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애원을 하십니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그럴 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Too late.” 늦었습니다.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58년이라는 기회가 있었는데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루가 아쉽게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많이 계십니다. “내가 주신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어떤 사람이 바이올린 하나에 2억을 주었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니, 무슨 그렇게 비싼 바이올린이 있나요?” 그분이 설명했습니다. “이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잘라서 눈이 오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들판에다 수십 년 말랐다 비가 젖었다 말랐다 젖었다 눈을 맞았다가 비를 맞았다가 바람을 맞았다가 시달릴 대로 다 시달리다 자연적으로 마른 그 나무를 가지고 이 바이올린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변하지 않고 계속 나는 겁니다.” 괴로움을 많이 경험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영적 아름다운 제 소리를 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화음이 되지 않고 음정이 맞지 않아서 날마다 그 틀리는 음정 때문에 전체를 망쳐버립니다. 하이든은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작곡한 것 하나는 우리가 압니다. “천지창조”입니다. 말년을 비엔나에서 보냈는데 말년에 그를 위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때는 그가 늙고 병들어서 자기 몸 하나도 움직이기 어려운 지경에 자기를 위해서 연주회를 한다니까 휠체어를 타고 그 연주회에 참석해서 자신이 작곡한 “천지창조”를 열심히 경청하고 연주가 다 끝난 다음에 청중들은 그날 연주한 사람들을 위해서 박수를 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나와 있는 작곡가 하이든을 위해서 모두다 기립 박수를 하는데 하이든은 힘겹게 자기 몸을 일으켜서 양팔을 들고 한 말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해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어찌나 그 말을 정신없이 휘저으면서 소리를 질렀는지 넘어져서 그 자리에서 1802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에게 계시해서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 다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내게 일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주의 일꾼된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드러난 비밀
엡 3:1-13 / 이규현 목사 / 수영로 교회
세상의 어떤 곳이든 탁월한 곳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신기술에 대한 비밀보안에 힘을 쏟고, 어떤 식당들은 사람들이 줄을 서게 만드는 맛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비밀의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일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 무엇은 비밀에 있는 것입니다. 비밀을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는 그 결과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밀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비밀’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바울이 어떤 비밀을 깨달아서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3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3~4)」 그가 알려주고자 하는 비밀은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것인데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비밀은 비밀인데 성도들에게 드러나 다 알려진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드러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감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기 원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를 합니다. 선생님들은 보물을 숨길 때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엉성하게 숨겨 놓습니다. 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비밀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지금 대단한 비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골로새서에서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 1:26)」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대단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은 강력했습니다. 이방인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만을 선택하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유대주의를 잘 보여주는 책이 요나서입니다. 요나는 선지자로 부름 받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라는 이방의 백부장을 만나는 것은 꺼렸습니다. 세 번이나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싫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의 깊은 편견과 문화인 것입니다. 바울도 역시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유대종교로만 묶여있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민족과 족속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된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바울의 이 깨달음이 열방으로 복음이 퍼져 나가게 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자는 사명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 거대한 비밀을 알고도 입을 닫고 있으면 그것은 책망받을 죄입니다.
이 비밀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발견하고 난 이후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엄청난 비밀을 깨달은 자의 무거운 사명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은 특정한 민족이나 몇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어야 할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좋은 것입니다. 불과 120년 전만 해도 한국 땅 안에 복음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통해 비밀이 개봉되면서 오늘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깨달음의 혜택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 있는 시대입니다. 8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드러나고 은혜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는 비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과 11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음에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 자기 동족이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예수님의 고향 땅 나사렛 사람들도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알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눈이 감겨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 은혜가 폭포수 같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이 밝히 드러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지난 여름 태풍이 왔을 때 비바람이 몰아치니까 평소에는 괜찮았던 창문 틈으로 빗물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틈새라도 태풍이 워낙 강력하니까 스며들어온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열리고 빛이 드러나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이라도 열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밀고 들어오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은혜 안 받기가 어려운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비밀을 ‘내’가 깨닫는 것입니다. 3장 1절부터 바울은 ‘나 바울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2절)’,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3절)’이라고 1인칭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직접 깨닫게 된 비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절에는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내가 깨달은 것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자신을 “모든 성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겸손하게 말한 것도 있지만, 나와 같이 이렇게 부족한 자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특별한 사람들만 깨닫도록 어렵고 까다롭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특별 새벽 기도에 참석한 어린아이들이 말씀을 받아쓰면서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더라고 부모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어른들보다 영이 맑은 아이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 복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깨달은 진리가 내 인생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워들은 정보와 직접적으로 아는 비밀은 다릅니다.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인생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 진리가 깨달아질 때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같은 신자라도 여기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신앙의 세계 속에는 나만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발견하고, 내가 깨닫고, 내가 경험한 신앙의 세계가 중요합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개인의 신앙 고백이 필요합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처럼 굉장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내가 만나고 경험한 하나님, 나의 간증이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나고,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가 직접 깨달은 진리가 내 안에서 녹아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영혼에서 녹아져 내리는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다녀도 그냥 머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만으로는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남들도 다 알고, 나도 꿰고 있는 이론이나 지식으로는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좋은 설교들이 방송이나 인터넷, 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지만 그런 것들을 듣는다고 해서 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돈 버는 비결, 성공하는 노하우, 행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에 대한 책을 읽고 강연을 듣는다고 다 돈을 벌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목사님들도 소위 성공했다는 목사님들의 목회 비밀을 듣고자 어디든 달려가지만, 아무리 세미나를 들어도 이상하게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밀을 알려 주어도 나와는 다른 세계가 되는 것은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과 그 비밀을 전달 받아 아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힘은 비밀을 발견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들어가 보면 전혀 다릅니다. 비밀을 깨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비밀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구름 위의 세계입니다. 나의 삶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힘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달은 것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갈망해야 하는 것은 말씀을 깨달아 아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순간이 올 때 그 인생이 바뀝니다. 진리가 내 심장을 관통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피가 솟구치고 심장이 뛰고 내 영혼에 빛이 임하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정적이고 역사적인 사건, 다시 태어나는 경험입니다.
다음 주일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을 읽다가 천기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인간적인 몸부림을 치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갇혀 살던 그 시대에는 굉음과도 같은 복음입니다. 이 거대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 한갓 젊은 사제에 불과한 마틴 루터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거대한 로마 가톨릭의 권력 앞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을 깨닫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면 충격 정도가 아니라 인생이 바뀝니다.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특히 하늘의 비밀을 깨달으면 내 인생의 가치를 그 비밀과 다 바꾸는 것입니다. 진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로 흥분에 빠졌던 것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흥분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개인의 신앙의 세계에는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남다르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비밀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좋은 가을에 즐기거나 쉬거나 다양한 사정과 일들이 있지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산의 손실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발견하고 만나고 경험하고 체득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지에 나가신 선교사님들이 학력이나 능력도 훌륭하지만, 그 땅에서 원주민들과 뒹굴고 사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모든 특권과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는 그들만의 신앙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똑같이 믿는 것 같은데 신앙 수준의 차이가 나는 것도 내가 깨닫고 내가 발견한 비밀의 차이입니다. 비밀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고,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만이 가진 영적인 비밀을 가진 신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복된 인생을 살려면 법칙 하나를 붙들어야 하는데 특히 발견의 법칙입니다. 인생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한민국의 지도를 만들어서 서울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힘이 들고 오래 걸리지만, 이미 만들어진 GPS를 하나 사면 한순간에 끝납니다. 내가 미국에 가려고 혼자 애를 쓰면 거의 불가능하지만,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간단해집니다. 죽도록 고생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는데 가게에 가보니 단돈 1,000원에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인생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법칙, 구원의 원리, 하늘의 비밀, 이것을 깨달으면 간단한데 이것을 모르니 중세 가톨릭이 변질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구원의 길, 승리의 길, 형통의 길, 문제 해결의 길들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믿는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지금 내가 깨닫고 믿어진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진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면 그 진리는 내 삶을 흔들어놓고도 남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가졌느냐,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 사느냐입니다. 비밀을 깨닫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에베소서는 로마의 네로 황제 치하의 감옥 안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를 읽어보면 감옥 안의 죄수가 기록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평온함이 넘칩니다. 다른 옥중 서신인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행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고, 고난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이 느껴집니다. 죄수인데 권위가 있고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자신이 감옥 안에 붙잡혀 있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잡혀 있는 것은 로마의 죄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후 3:13)」 자신의 신변에 닥친 어려움이 불행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깨닫고 붙잡고 있던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삶을 바꾸어 놓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과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바울은 우리 인생의 문제를 푸는 모든 해답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보화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삶에 절망적인 것들을 다 걷어낼 만큼 가치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평생 캐도 다 캘 수 없는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그런 보화를 캐내어 가는 기쁨을 맛보며 누리는 끝없는 여행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것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은 우리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기쁨과 즐거움을 잊고 있다면 우리 신앙의 관심과 초점이 다른 곳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신앙의 관심과 초점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안의 부요함”을 누린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진리의 힘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천기를 깨닫고 영적 득도의 경지에서 황홀함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를 푸는 이 비밀을 함께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의 깊이, 그 무게, 그 풍성함이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도 거대해서 감옥에 붙잡히든 죽든 상관없이 입을 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발견한 자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풍성함을 깨달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이 비밀의 광대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함들이 점점 더 여러분의 삶 가운데 드러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을 흔들어놓는 깨달음이 있을 때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사명자로 살게 하고, 가면 갈수록 더 풍성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매일 승리하며 사는 멋진 인생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미 충분히 드러난 비밀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비밀을 깨달은 자는 날마다 비밀의 오묘함과 경이로움에 경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도무지 혼자 감추고 있을 수 없는 격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로, 그것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누리며 알게 할 일
엡 3:1-1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2절에는 "은혜의 경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우리에게 어떻게 베푸시는 것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집행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본문 3절). 하나님께서는 그 비밀을 자기를 포함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와서야 성령의 계시를 통해 나타내셨고 그 이전 세대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본문 4-5절). 사도 바울은 그 비밀 곧 은혜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본문 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사도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상속자"는 "복"의 상속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같은 복을 누리는 상속자들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복도 받을 수 없는 우리가 복음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 "함께 지체가 된다"고 하는데 "지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드는 것은 그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곧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유일하신 참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모두 그의 형제가 되고 그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제자매로서 그가 누리는 모든 권리와 행복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그가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그와 함께 왕 노릇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에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아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가 된다는 말의 뜻입니다.
끝으로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는데 여기서 "약속"은 사도 바울이 엡1:13에서 언급한 "약속의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고, 성령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약속의 축소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를 알게 하시고 그를 믿게 하시며 그의 말씀과 가르침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의 뜻대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가 따르라 하시는 길을 가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영생의 길을 취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의로운 삶, 거룩한 삶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이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하는 말의 뜻입니다.
이렇게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 모두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데 우리는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한 것도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고 이루신 그 일을 "믿는 이만이"라는 뜻이고, 그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전파하는 사람이 있음으로써"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본문 7절에서 쓰기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8-9절에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일꾼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를 말하며 또한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은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임을 밝힙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그토록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던 비밀 즉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고 하나님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데 동원하시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지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 지혜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알게 하려 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영적 존재들인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특히 악한 세력들 즉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에 적대적인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신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의 권세는 이미 파괴되었고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음을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끝이 났음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완성되기 시작했고 그러기 위해서 복음이 온 세상의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일을 막을 힘이 사탄에게 없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교회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 도 안에서 만세 전부터 예정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본문 11-12절을 봅니다: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 안에서"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길게 말하자면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는 것은 오직 그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라는 것은 "두려움 없이", "복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며"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 위에서 확신을 가지고 기쁘게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은 마지막으로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 말 속에서 사도 바울은 환난은 복음을 명백하게 선포해야 하는 사도로서의 사역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그 일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도 아니고 자기를 사도로 부르신 주님으로부터 이미 예고를 받은 바(행9:16)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환난을 당한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합니다. 다소 수수께끼처럼 들리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의 영광"이란 사실은 교인들이 참여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시며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애초에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그 영광에 지금부터 참여하고 마지막 날에는 온전히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며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우리가(엡2:12) 누리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복의 상속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온 세상의 왕 되신 이의 영광을 함께 누리며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열매에 참여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차별 없이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고 한 새 사람 만드시며 의와 화평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사탄과 그의 세력의 책동은 이미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승리를 거두셨으며 이 세상에서 복음을 진전시키시고 교회를 확산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소망이, 우리의 삶이 당신의 사랑의 계획을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의 그 놀랍고 풍성한 지혜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기쁨과 충성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내게 주신 그 은혜의 경륜
엡 3:1-9 / 김서년 목사 / 벧엘교회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지금의 자기로 된 것에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에 따라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태어남도 하나님의 섭리이며, 오늘의 그와 같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그가 받은 모든 교육과, 또 지난 나날들의 모든 경험들이 종합해서 모두 있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이제까지 우리들이 살아온, 또한 현재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현재의 여러분의 모습, 여러분의 지금의 그 현실에 그대로 만족하십니까? 좀 이런 것들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되어졌으면 좋겠는데 하면서, 지금의 이것들보다도 다른 것을 바라며 동경하는 것은 없으십니까?
캐나다의 서쪽에 위치한 록키 산맥 중턱에 ‘벤푸’라고 하는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여름인데도 산에 눈이 덮여있고, 바위와 수목들, 그리고 호수가 어우러져서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제가 지금껏 다녀본 곳들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에,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 아니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곳을 방문하였을 때 이런 생각을 저는 해 보았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연도 없고 시끄러움도 없고, 그저 사방이 아름답기만 한 곳인데….
그래서 어떤 상점에 들렸다가 한가한 틈을 타서 그곳에서 일하시는 주인 되는 분에게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여기에서 늘 살고 있는 당신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꾸를 하시더군요. 자기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여서 이곳에 들어왔었고, 이제 이곳에서 산지도 6년이나 되었는데, 그런데 막상 살고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사람은 사람들하고 살게 되어있지 ‘자연’하고 살게 되어 있지 않다고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는 사람들 사는 곳으로 내려가서 살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대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동경하는데, 그곳에선 오히려 이곳을 동경합니다.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그래서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현실에서 만족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구나……!!
여러분! 왜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키엘케고르란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의미를 알고, 또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할 일’이 일치될 수만 있다면 그는 곧 행복한 사람이다!!” ― 참으로 우리 모두가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존재의 가치를 찾으며, 또한 나는 지금껏 마땅히 살아야 했을 그 삶을 살아왔으며, 나는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며, 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며 또한 효과적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껏 살아온 나의 지난날들은 지금의 입장에서 돌아다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나는 지금 내가 꼭 있어야 할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는 나는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불행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조 말기에 ‘이원범’이라고 하는 더벅머리 총각이 강화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와 형님들을 모두 여의고, 혼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 호구지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배운 바가 없었기에 글을 몰랐고, 그저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노닥거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에서 나무를 해서 지고 내려오는데, 자기 집에 웬 관군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자기 아버지와 형님들이 관군들에게 끌려가서는 죽임을 당했었는데, 그래서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지만 관군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벌벌 떨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원용이란 사람과 문부백관들이 헐레벌떡 뒤쫓아 와서는 모두가 다 자기 앞에 부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문도 모른 채 가마에 태워져 궁궐로 오게 되었는데, 이 총각이 바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당시 후사가 없이 요절한 헌종의 뒤를 이어 19세 때 왕이 된 철종이라는 분입니다.
그동안 이 ‘원범’이란 총각은 자신이 왕족이란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무식하고 가난한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면서, 그저 시골의 더벅머리 총각으로만 힘들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됨의 가치’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디서, 또 어떻게 자기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우리 인간의 ‘자기됨의 그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다’하고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뜻을 두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여기에서 우리 인생은 ‘자신의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없다고 하며, ‘하나님에게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이런 말을 우습게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가 아주 지혜 있는 양 하며, 그래서 하나님 없이 우리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껏 그들이 하고 있는 그 결국을 보십시오. 그들이 기껏 잘난 체 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우리 인간을 본다면, 우리 인간이란 결국 무엇입니까? 그저 기껏 잘 해보아야 한갓 원숭이의 후예밖에는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 귀하신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참으로 ‘자기됨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인간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내게 향한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 이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고민하게 되고, 또 피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은혜의 경륜에 따라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으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전 말씀드린 강화도령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그 총각처럼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게도 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하여 우리에게 자세히 말씀하여 주시는데, 그것은 첫째로,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경륜은 추상적이고 감정적이고 관념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한 것이거나 또는 우발적이고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섭리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조그만 어려움에서도 낙심하며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어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구약 성경에서 가장 큰 인물인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그의 나이 80이 되던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던 그때부터 그에게 섭리하신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모세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보다도 훨씬 전에서부터 섭리하신 것이었습니다.
나일 강변에서 갈대 상자에 실려 떠내러 가다가 바로의 공주의 손에 의하여 구출을 받아 그의 아들이 되고, 그래서 애굽의 왕자로 자라며 교육을 받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고, 또한 바로의 궁궐에서 내쫓겨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의 목동으로서 자기 장인의 양떼를 돌보며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았던 그 모든 세월들이 그저 우연한 일이거나, 운명이거나, 필요 없는 헛고생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 저런 여러 모양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하고 계셨고, 그런 후에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물론 모세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애굽 왕궁에서의 40년과,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이 있었음으로 인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간 광야에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와 같이 오묘한 섭리 중에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태어난 그때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형통하였고 어떤 때는 환란을 당하기도 하였고, 또 때로는 병들기도 하고 건강할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절망에 쌓일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을 통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의 문이 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문이 닫히기도 하고, 또는 다른 문이 열리기도 하는 이 모든 경로가 결코 우연히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것은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 은혜의 경륜을 우리가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 또한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제가 대학생시절, 당시 소위 히트곡이라고 유행하던 어느 외국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 오는 그 날에,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이 말, 여러분 어떻게 보세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생을 어떻게 보며, 내가 처한 현 시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이 큰 실수의 결과인지, 아니면 우연하게 되어진 일인지; 아니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이런 고난을 치러야 하는지…, 나는 지금 나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 시간, 이 시점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내게 향한 경륜을 따라 준비하신 그 뜻에 의하여, 이 시간 나에게 주어졌다는 이 귀중한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오늘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내가 선택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뜻대로 된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바로 이점에서부터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듣고 이해하며 순종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우리 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시는 사실은, 이 하나님의 경륜은 결코 우리 인간을 속박하거나 얽매는 기계론적인 것이거나 숙명론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가 ‘예정’이다-‘섭리’다고 말할 때, 그렇게 결정지어지는 운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정하심’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으로 인간 되게 하며, 우리의 삶을 보람되게 하며, 하나님의 크신 그 영광을 들어내게 하기 위하여,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나’이지만 선택해 주시고 훈련시키시고 귀하게 써 주신다는, 은총적인 것이며 은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님의 ‘경륜’을 말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말하며, 그래서 “은혜의 경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거저 주시는 것!!―그것이 은혜가 아닙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자기 자신을 이해할 때에 먼저 ‘은혜’라는 말을 통하여 항상 ‘무자격한 자기’를 생각합니다.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자기는 도저히 이만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에 의해 택함을 받게 됨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으니, 자기의 자기 됨에 비하여 받은 것이 너무나도 크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히 깨닫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세요.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너무나도 불평이 많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내게 주어진 건강이 부족하다고, 환경이 부족하고 여건이 부족하고, 그러니 무슨 은혜 될 것이 없다고 불평을 늘 하곤 하지는 아니하십니까?
그런데 우리가 불평하는 그것처럼 과연 없는 것입니까???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바울!! ― 그에게 주어진 여건들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그 바울에 비하여본다면, 내가 받은 것은 진실로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사는 처지를 생각해 보아도, ‘나의 나 됨’에 비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너무나도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 오늘이 있게 해 준 것에 대한 깊은 감사를 할 줄 아는 ‘그 마음’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나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 부족하고 연약한 자임을 알 때, 아는 그만큼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요, ‘만물의 때만도 못하다’고 했고, 또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자’라고 자기를 평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부족한 자기에게 생겨지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성공만이 은혜가 아니라 실패도 은혜였고, 건강한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치명적인 병을 가졌어도 은혜였습니다.
자유로이 전도한 것도 은혜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히고 핍박을 받고 어려운 역경 속에 처해있는 그것도, 그에게는 소중한 은혜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끌려가고, 그리고는 감옥에서 생활하게 된 그것도 은혜라고 말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까지도, 자기를 완전히 ‘은혜의 열매’로 생각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저 받은 선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선물!!” ― 어쩌면 ‘내게만 주신 선물’을 바울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주신 선물!!―내게만 주신 은혜의 선물!!―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핍박과 고난도 아랑곳없이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 해도 그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항상 찬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할만한 것은, 그가 원래 예수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던 완악한 사람으로서 벌을 받아서 마땅한 죄인인데, 이제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음으로, 이제 핍박을 받아 순교자가 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그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많은 매를 맞고도 오히려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기도와 찬송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삶 속에, 이 바울과 같은 기도와 찬송이 있으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이런 기도와 감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있어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느껴지신다면,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혜의 선물이 내게 있음을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정, 건강, 재물, 지혜, 지식, 재능, 직장……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생각하면 내게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게 됩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에 비추어 보고 나면 무엇 하나 내게 넘치지 않는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깊이 깨닫고,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우리도 또한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으로서 내게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꾼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목적이 있고, 또 나를 통해 나타내시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나의 나날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내게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하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의 선물을 봉사로서 직결시킵니다.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재물이 생기든지 지위가 높아지든지 출세를 하게 되면 축복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내가 꼭 해야 하는 일거리가 있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축복인 것임은 잘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병원에 입원해보면, 건강해서 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란 것! ― 그것도 다른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 일을 내게 맡기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 ― 이것이야말로 실로 우리 인생에게서 가장 중요하고도 귀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그 일들을 결단코 가볍게 보지 마세요. 여러분은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대가를 치러주신, 그만큼 값비싼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시는 그 은밀한 기도, 그 충성, 그 헌신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보고 계시고, 또 그 일에 더욱 충성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여러분에게 지금 하고 계시는 그 일을 맡기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의미와 보람을 느끼며, 더욱 충성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은혜와 경륜으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생각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을 은혜의 기회로 생각하고, 특권으로 생각하고,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 ― 이 사람이 바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할 기회를 주실 때 즐거움으로 합니다. 이 기회는 바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 말을 명심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의 경륜, 그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오늘 일꾼이 되었노라!!” ― 이것이 바로 나의 나 된 참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귀중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며, 늘 이렇게 고백하시며 찬송과 감사, 충성과 헌신이 끊이지 않아, 참된 삶의 의미 속에서 달려갈 길을 힘차게 달려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의 달인
엡 3:1-7 / 박용덕 목사 / 남가주교회
참된 인격은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쳐 주는 것입니다. 한국의 어린 여학생들이 女 U-17 월드컵 경기에서 우승을 하므로 세계를 제패했는데 이 역시 아낌없이 축하해 주고 박수를 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의 자녀들 역시 복음의 정상에 오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들은 어떻게 복음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복음의 달인으로 사는 비결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진정 여러분들이 복음의 정상에 올라가면 어느 순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영적 문제, 고질적인 정신의 문제, 그리고 육신의 문제까지 어느 날 사라지고 없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1. 복음의 달인이란 철저히 복음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복음이요 복음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1-2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의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허락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가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로 산다는 말이며, 복음의 달인이라는 말은 예수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로 충만하면 예수의 열매가 나타나듯이 복음의 달인은 삶 속에서 복음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6절에도 보면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떤 열매가 보여지고 있습니까?
2. 복음의 달인은 섬김과 나눔에 탁월합니다.
복음의 사람은 은혜의 감격으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을 보면 그는 언제나 은혜의 빚진 자로 생각하고 살았고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복음을 위해 더 많이 수고를 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5: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달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흔히 달인들을 보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정확하게 자기의 맡은 일들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수고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달인들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면 그들은 1)부지런하고 2)열정이 있고 3)성공의 의지가 있고 4)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복음의 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달인이 되면 신앙생활이 행복해 지고 신앙의 기본을 알기에 누가 강조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의 달인이 되려면 몇 가지 거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1)은혜가 깨달아져야 하고 2)예수 안에서 부지런해야 하며 3)열정이 있어야 하며 4)좋은 제자 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은혜의 감격으로 사는 복음의 달인은 섬김과 나눔에 탁월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받은바 은혜가 크기 때문에 섬김과 나눔도 풍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움이 잇을 때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들을 힘써 도왔음을 설명합니다. 그들은 주로 데살로니가, 빌립보, 뵈뢰아 교회 등이었는데 분에 넘치도록 헌금하여 주의 사랑을 나누었던 것을 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8:4-5)절에는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섬김과 나눔은 예수 정신이요,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달인이라면 섬김과 나눔에 탁월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섬김과 나눔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만큼 우리도 언제인가 도로 사랑을 받게 되고, 누군가를 칭찬해 주면 내가 도로 칭찬 받고, 누군가에게 나눠 주면 나도 결국엔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안타까운 것 예전의 권세자들의 묘를 파보면 금, 은, 각종 귀중품들이 무덤 속에서 함께 발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무척 어려운 자들이 많았건만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무덤에는 그냥 혼자만 들어갔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3. 복음의 달인은 초월의 삶에 뛰어납니다.
복음의 달인이란 프로 크리스천들을 말합니다. 프로는 사실 환난도, 부딪침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달인들 역시 세상의 환난에 그렇게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로 크리스천은 세상의 것이 우리의 기업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의 기업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달인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와 찬송이 충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에 대해 에베소서 3:6절에 말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특히 바울은 너희는 내가 복음의 비밀 깨달았음을 알라(엡3:4)고 말하며 그러기에 감옥에 갇혀도 감사하노라(엡3:1)고 말합니다. 바울은 진정 복음의 달인이 되니 맞아도 기쁘고 그것으로 인해 상처 받을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도 영광(축복)이기에 감옥에서도 감사 찬송, 매 맞아도 감사 찬송을 하였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자기 집을 짓고 있고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안 되니 힘들고, 또 무너지니 힘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들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이 땅에서 자기집 지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을 지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마6:33) 그러므로 행복하게 살려면 내 집을 짓지 말고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려야 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웅장한 성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영혼 살리는 일, 마음의 성전을 많이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영혼 구원, 전도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지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정 복음의 엘리트요 복음의 모델(Model)이입니다. 그는 오직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는 것을 감격스러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3:7절에도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씀합니다. 복음 안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초월의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진정 오직 복음, 오직 전도, 오직 선교, 오직 영혼 구원, 오직 하나님 나라 확장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써야 할 삶의 지세는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협력 사업입니다. 교회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섬김과 나눔에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복음 안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달인이 되면 우리도 바울처럼 정상에서 쓰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저는 여러분 모두가 복음의 달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복음의 달인이 됨은 물론 복음의 명가(名家)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복음의 달인, 복음의 명가를 이루면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꾸는 최고의 삶을 사는 복음의 달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
엡 3:1-6 / 이종철 목사 / 빛과생명의교회
비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비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3절, 4절, 9절에 세 번 등장하고, 에베소서에서 총 6번, 골로새서에서 총 6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경륜’, ‘계시’, ‘깨닫다’, ‘알다’는 단어도 모두 비밀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비밀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헬라어로 ‘뮈스테리온’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영어의 ‘미스테리’입니다. 비밀 또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또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불립니다. 비밀의 정체는 1장 10절 말씀에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입니다. ‘통일’이라는 단어는 ‘아나케팔라이오’인데, ‘아나(위)’와 ‘케팔레(머리)’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만물이 통일되고 질서를 잡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 곧, 계획이고 또 신약시대에 밝혀진 비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이 비밀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합니다. 6절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무너지고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며 ‘함께’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이고, 하나님의 경륜의 실현이고,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밝혀진 비밀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작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놀라운 하나됨의 역사를 보며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이, 그리스도의 비밀이 실현되고 있다며 흥분해서 비밀이라는 단어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역사 속을 흐르고 있는 비밀이 있음을 믿고, 이 비밀이 밝혀질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역사는 양육강식의 동물의 법칙이 지배하는 무정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연과 오류로 이루어지는 무질서한 역사가 아닙니다. 끝도, 목적도 없이 무한히 흘러가는 그런 무의미한 역사가 아닙니다. 무정의하고 무질서하고 무의미한 것 같은데 그 가운데 흘러가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비밀이 결정적으로 폭로되었듯이 이 역사의 비밀은 언제가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그때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의미도 없이 흘러가지 않습니다. 신의 계획이 성취되어가는 인생입니다.
바울은 계시로 말미암아 이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5절에서는 성령께서 알려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비밀을 알고자 하는 노력은 어리석은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은 올바른 앎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부단히 자기 인생의 비밀 곧 의미 찾기를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면 모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을 연극에 비유한다면 극본의 한 장면 한 장면은 다 계획된 것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심지어 무대 위에 배치된 작은 소품이나 떨어진 휴지일지라도 의미 없이 그곳에 던져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를 안다면 우리는 버틸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이라는 정신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유태인으로서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갔다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그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깨달았던 것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면 정신이 흐트러지고, 정신이 흐트러지면 몸이 허약해지고, 결국 독일군들은 쓸모없다 하여 가차없이 가스실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썼던 빅터 프랭클은 아침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빵 한조각보다 면도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미라고 할 때 무슨 대단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가족을 보아야 하고 그들을 내가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희망도 하나의 의미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경우에는 자기가 쓰다만 원고가 있는데 그것을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분이 이때의 경험을 근거로 ‘로고(의미) 쎄라피’라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삶의 의미와 존재 의미를 찾음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추어 있는 비밀과 같은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한 경륜과 같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로 우리 존재 의미를 찾도록 하는 자극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느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대는 종종 자기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게 만듭니다.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향해서 질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질문 앞에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왜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왜 내 인생은 이렇게 풀려가고 있는지.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응답하려 하고 그 답을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 자리에 보내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려서도 안 되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도 안 됩니다. 짧으면 짧은 이유가 있고 길면 길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 그대로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요한 비밀은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 비밀이 실현되어야 하는 실제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에베소와 같은 작은 공동체를 통해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시작되어 로마 제국을 점령하고 중세기를 거쳐 오늘날에는 전세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역사는 이 비밀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디까지입니까? 만물이 그리스도 아래 통일이 되기까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통일의 역사는 교회라는 틀을 넘어 온 인류와 세상을 향하여 나갈 것입니다. 구원사만이 아니라 세속사까지 포함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신앙인들이 세상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이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속 역사에 구속사가 필요한 이유는 그래야 세속사가 자신들이 달려가야 할 목표를 알고 또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사는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와 합류하여 거룩해짐으로 완성됩니다.
지난 주에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분인 독일의 판넨베르크가 86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신학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이 목표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이 세계와 관련시키는 것이었고, 그리스도 신앙을 보편사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가 보편사, 보편신학이라는 용어입니다. 신학을 세상 학문이나 과학과 관련시켜 해석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무대입니다. 그 역사의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이루는 통일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은 하나의 본보기일 뿐입니다. 온 인류는 민족과 종족과 국경을 넘어 하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하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차별과 분리를 넘어 하나됨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가족이라 부르고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에는 바로 이런 웅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하나됨은 자연세계를 포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계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런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3절입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계시란 단어는 ‘아포칼륍시스’입니다. 수건을 걷어낼 때 그 감추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동일한 말씀을 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어떤 스승이나 전통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도를 닦고 수양하고 지식을 연마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찾아오셔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은 부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시고 먼저 알려 준 만큼만 인간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이는 성경 구석구석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입니다. 역사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오심으로써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모세를 부르신 분도, 출애굽을 명령하신 분도, 숨죽여 사는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용사로 부르신 분도, 일개 농사꾼이었던 아모스를 선지자로 세운 분도,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분도, 그리스도의 출현을 결정하신 분도 항상 먼저 하나님이셨습니다. 인간의 주체적 각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수동적입니다.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끌어 가심을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판넨베르크 반대편에 서 있는 신학자 중 하나는 칼 바르트입니다. 그는 세상 역사나 이성에 대해서 파멸을 선포하고 오직 계시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으니 잠잠하라’였습니다.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 실증주의라고도 불립니다. 계시만이 실재이고 출발점이며, 다른 것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좁은 이성이나 적은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 앞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노력,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지속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계시의 은혜입니다. 에디슨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태어난다.” 우리는 이 말을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 해석합니다. 물론 노력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에디슨의 원래 의도가 노력의 중요성만 강조하려는 데 있었을까요? 『에디슨의 메모』란 책을 썼던 하마다 가즈유키라는 사람은 이 말이 오해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디슨의 원래 의도는 1%의 영감을 얻기 위해 99%의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노력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풀리지 않은 문제를 놓고 온 힘을 기울이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합니다. 그런 끝에 하늘로부터 한 영감이 주어지면서 문제가 풀립니다. 계시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인간의 부르짖음입니다. 목마름을 호소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생수를 들고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계시입니다.
깨달은 자들
계시가 바울에게 주어졌고, 바울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전파한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계시가 구약시대나 다른 시대에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약시대에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서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5절입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거룩한 사도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을 손에 쥐고 있고, 읽고 있는 우리 또한 이제 이 비밀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교회는 이런 비밀을 깨닫고 세상에 그 비밀을 전파하는 자들입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그 비유에서는 인간들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슬에 묶인 채 동굴에 갇혀서 벽면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들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사슬에서 풀려나 동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실재를 보았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동굴 벽면만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은 그림자일 뿐이라 말하며 실재를 보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이 철학자입니다. 신학으로 적용한다면 이들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이들이 감추었던 비밀을 깨달은 자들이요, 비밀을 간직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우주의 비밀을 깨달은 자들임을 소리 높여서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들을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라며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쁜 소식의 전달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에베소서를 쓰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그가 옥에 갇힌 이유에 대해서 사람들의 모함이나 실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1)이라 말합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이나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다는 사실보다 이를 계기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비밀을 깨닫고 전하는 자로서 기쁨이 충만합니다.
우리 모두는 비밀을 간직한 자들이며, 비밀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 자체로 영광스럽습니다. 마치 1급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은 자부심과 무게감입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감추어져야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파되고 널리 알려야 하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비밀을 알려야 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찬양한 말씀은 원래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이는 바벨론 포로 상황 가운데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있는 전령들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해방과 구원의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비밀을 깨닫고 전하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은혜의 비밀
엡 3:1-13 / 이윤재 목사
추석을 마치고 돌아온 여러분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비밀이 있나요? 비밀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은 “비밀은 좋은 것이 아니다”. “언젠가는 탄로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꼬리가 길면 밟힌다”. “벽에도 귀가 있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같은 것입니다. 존 드라이든이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하인에게 비밀을 얘기하는 사람은 그 하인을 자기의 상전으로 만드는 것이다”. 비밀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했습니다. 마10:26-27,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비밀은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자 폴 투르니에의 말입니다. “인간이 비밀을 갖는 것과 그 비밀을 간직하는 법을 아는 것 그리고 오직 자기 뜻에 의해서 그 비밀을 적절히 드러내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어차피 누구나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 비밀을 잘 간직하고 때가 되면 잘 드러낼 줄 아는 것이 인간의 삶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옛날 섬겼던 교회에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웃으며 삽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언제나 싱글벙글하시는 데 근심, 걱정이 없나봐요?”. 그랬더니 그 분이 말합니다. “왜요? 제게 근심, 걱정이 없다니요. 저에게도 많은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일 웃으며 살 수가 있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제게 나름대로 비밀이 있지요. 3일만 참자는 비밀이요”. “그 비밀이 무엇인데요?” “예, 간단해요. 예수님이 죽어서 3일만에 부활했잖아요? 제가 어떤 고난을 당하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3일만 참자. 예수님도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했지 않으냐?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3일만 참으면 되니까 대개 문제가 풀려요. 그게 제 비밀이예요”. 그때 그런 좋은 비밀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비밀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쁜 비밀은 잘 간직하다가 때가 되면 적절히 드러내고 좋은 비밀은 마음에 새겨 잘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만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한 말입니다. 1절부터 보시겠습니다. 엡3:1-4,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여기 “비밀”이라는 말을 두 번이 쓰고 있습니다. 3절,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4절, “그리스도의 비밀”,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보통 “비밀”하면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숨기고 있는 것 혹은 숨기고 싶은 것”. 이 경우의 비밀은 부정적인 의미의 비밀입니다. 외모에 대한 비밀, 출생에 대한 비밀, 과거에 대한 비밀, 남들이 알면 안되는 것, 조금 창피한 것, 이런 것들입니다. 또 하나는 애매한 것, 서술할 수 없는 것, 신비한 것을 비밀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신비로서의 비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비밀을 그런 비밀이 아닙니다. 다른 비밀을 말합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아니라 드러내고 싶은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비밀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진 비밀입니다. 5절을 볼까요? 엡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성경은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책입니다. 신약은 사도들을 통하여, 구약은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령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 전체가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비밀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에배소서와 쌍둥이라고 하는 골로새서에 보면 분명합니다. 골1: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가 비밀입니다. 성경은 그 비밀이신 예수님을 계시하신 책입니다. 신학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풀어 알리는 곳입니다. 선교는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 비밀을 드러냅니까? 오늘 말씀에 세 가지 “말미암아”가 나옵니다. 6절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10절, “교회로 밀미암아”, 12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 그림으로 보실까요?
복음으로 말미암아(6절)
그리스도의 비밀 교회로 말미암아(10절) 나
믿음으로 말미암아(12절)
이 세 가지 “말미암아”는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나타내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를 통해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알고 사랑하고 그 앞에 나가시겠습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먼저 비밀이신 그리스도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6절입니다.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다같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우리의 최고의 비밀은 그리스도라고 믿습니까? 바울이 쓴 서신을 보면 놀랄만한 것이 있습니다. 13권, 어느 서신도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특히 옥중서신을 보면 놀랍습니다. 옥중서신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기 전에 쓴 편지입니다.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 네 성경 1장에만 “그리스도”란 단어가 얼마나 나오는지 제가 세어 보았습니다. 에배소서 26번, 빌립보서 20번, 골로새서 30번입니다. 첫장에만 그렇습니다. 다른 책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쓴 책입니다. 그 옥중서신의 첫장에만 에배소, 빌립보, 골로새 합쳐서 76번입니다. 우리는 감옥에서 살고 죽는 것을 염려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를 묵상했습니다.
그 중 골1:14-18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이것을 한번 풀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며
성삼위 하나님의 충만 가운데 거하시며
삼위일체 가운데 거하시며
영원히 살고 호흡하고 존재하시며
시간 전에 계시며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를 망라하며 알파와 오메가며 처음과 나중이시며
피조물의 장자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서 다시 죽지 않는 분이며
사망과 죄와 무덤을 이긴 분이며
창조주며 구세주며 구속자며 용서자이며
자신 안에 모든 창조를 포함하시며
영광과 능력의 권능이시며
교회의 머리이고 권위이고 근원이시며
만물이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유지되고 통일되며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자신의 보혈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정죄하는
모든 법과 통치와 규례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모든 나라위에 계시는 성부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며
인간사에서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셨고
온 우주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신 분이고...
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의 비밀은 그리스도입니다. 골3:11에서 무엇이라고 요약합니까?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 혹시 우리의 신앙적 삶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다른 것에 주의를 더 기울이는 것은 아닙니까? 설교를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에 더 집중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삶이 예수님 아닌 다른 것에 더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년에 예수님 환상을 보고 남긴 글입니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본 것과 비교하면 내가 이제껏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 우리도 이와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말입니까? 다시 6절입니다.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세 가지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지체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약속에 참여했습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신분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함께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약속에 참여했다는 말은 우리가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달라진 전인적 변화를 말한 것입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고 신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지체가 되고 소속
함께 약속에 참여하고 특권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믿음으로 먼저 신분이 바뀐 것을 아십니까?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의 명분은 아들의 이름입니다. 왜 이름이 중요합니까? 이름은 신분이고 신분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이면 나는 대통령 아들이 되고 대통령 아들이면 대통령 아들에 걸맞는 특권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상속도 받고 아들이기 때문에 약속도 받습니다. 신분은 소속을 가져오고 소속은 특권을 가져옵니다.
미국의 척 스미스 목사님 간증을 읽고 은혜받았습니다. 척 스미스는 캘리포니아 갈보리 채플 담임목사인데 세계적인 교회입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과거에 척 스미스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사례비도 못받는 목회생활을 했답니다. 어떤 해에는 480달러의 빚까지 져서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목회를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한 친구가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척 스미스에게 500달러를 보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척 스미스는 “할렐루야”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스미스야,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냐?” “친구가 돈을 보내 주겠다고 해서 그랬습니다”. “그래? 그 친구가 너에게 돈을 보낼지 안 보낼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 그 친구는 아주 신실합니다.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그래? 넌 친구의 약속은 믿고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는 데 내가 너에게 한 수없는 약속에 대해서는 그렇게 기뻐한 적이 있느냐?” 척 스미스가 미쳐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성경을 통해서 이미 7,850번이나 약속했다. 그리고 아직 한번도 그 약속을 여겨본 적이 없다. 너는 적어도 친구의 약속보다는 내 약속을 믿어야 하지 않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수없이 약속했고 한번도 그 약속을 변개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아멘.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하려 나에게 이 축복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비밀이신 그리스도가 나에게 드러나는 두 번째 통로는 교회입니다. 10-11절입니다. 엡3:10-11,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다같이 “교회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비밀은 먼저 복음을 통하여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신분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존재는 죄속에 있습니다. 계속 배우고 자라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기관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의 비밀이 드러납니까? 10절,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다른 지혜가 아닙니다. 11절, 영원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고 한 하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지혜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고, 성령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교회가 알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많은 대답중 하나는 교회는 순례자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나 이 땅에 속한 것은 아니다. 하늘에 속한 자로 다만 이 땅을 지나갈 뿐이다”. 이를 “길위의 교회”, church on the way라고 부르고 “순례자의 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이 말은 교회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존재할 뿐 그 자체를 존재 목적으로 하거나 그 자신을 전파하기 위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유럽영성 투어에서 이태리를 다녀왔는 데 이때리 어떤 산에 가면 동상 넷이 있습니다. 산 입구에는 유명한 학자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위대한 군인이 나옵니다. 나라를 구한 장군입니다. 그도 역시 위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거의 다 올라가면 훌륭한 왕의 동상이 나옵니다. 나라를 통일한 왕입니다. 그런대 그도 역시 위를 가르킵니다. 도대체 누가 있는가 하고 정상에 올라가 보면 거기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 동상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모든 역사와 나라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예수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있습니다. 다시 10절을 보시겠습니까?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곳, 11절,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성령을 통해 선포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은 이러한 교회적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쳔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십자가앞에 짐이 풀리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들어간 집이 해석자의 집입니다. 그가 집에 들어가자 해석자가 나와 네 군데를 안내했습니다. 첫째는 먼지나는 방입니다. 그 방에 들어갔더니 구석에 먼지가 소복한 게 한 번도 청소를 안한 것 같았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나타나 비질을 시작했는 데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곧 어떤 여자가 물을 가지고 와서 물을 뿌렸더니 먼지가 말끔히 가시고 방이 깨끗해졌습니다. 두 번째 방으로 해석자가 안내했는데 난로가 있는 방이었습니다. 난로의 불이 뜨겁게 타올랐는 데 누가 끊임없이 물을 붓고 있었지만 불은 조금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다른 방으로 가보았더니 한 남자가 기름통을 붙잡고 난로에 기름을 붓고 있었습니다. 셋째 방으로 갔는 데 어떤 남자가 철창에 갇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물었더니 자기는 과거에 잘 믿은 사람인데 세상 쾌락과 죄악에 물들어 그만 이렇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넷째 방으로 갔는 데 한 남자가 심히 몸을 떨며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간밤에 잠을 자는 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면서 심판이 시작되었는 데 너무 무서워 떨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해석자는 그 네 군데를 다니면서 하나씩 그 의미를 해석해주었습니다. <천로역정>은 바로 이 네 가지를 해석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이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석자로서의 교회
1. 먼지 나는 방: 구원. 무엇으로 깨끗지는가? 먼지(죄)나는 인생, 율법의 빗자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고 구원받는다.
2. 난로가 있는 방: 성령. 무엇으로 승리하는가? 마귀는 우리 믿음의 불을 끄려고 갖은 방법으로 방해한다. 그러나 성령이 기름이 계속 부어지면 우리는 승리한다.
3. 철창에 갇힌 남자의 방: 거룩. 무엇으로 성화되는가? 한번 구원받았다고 방심하거나 게을러서는 안된다. 계속적인 기도와 영적 훈련을 통해 우리는 거룩에 이른다.
4. 떨고 있는 남자의 방: 종말. 하나님은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는가? 역사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고 종말에는 심판이 있다. 우리는 지혜로운 신부가 되어 심판을 예비해야 한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교회는 손가락입니다. 하나님을 가르키는 손가락, 예수님을 통하여 하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뜻을 성령님을 통하여 가르치는 지혜의 학교, 순례자의 학교, 우리는 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을 배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인 믿음입니다. 복음에서 교회가 나오고 교회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12-13절입니다. 엡3:12-13,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다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다면, 교회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한다면,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거절감정이 없다는 뜻입니다. 히10장에서 이 단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엡3:12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다음은 "나아감"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백성이 왕이 있는 왕궁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왕앞에 나갈 때 두렵습니다. 그러나 아무 두려움없이 왕앞에 나가는 이유는 믿음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왕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에게 대한 믿음을 신념이라 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뢰라 합니다. 다시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담대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를 믿음으로”, 그를 믿는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무서워 하는 것은 인간적 감정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영적 감정입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무서워 할 것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섭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워 하면 믿을 수 없고 믿으면 두려움 사라집니다.
담대함의 근거는 믿음이고 믿음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갑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아브라함레게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할 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홍해에 들어가라”했을 때 출렁거리는 파도속으로 저벅 저벅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여리고를 돌라” 했을 때 믿음으로 여리고를 돌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담대함은 믿음에서 오고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있는 사람들은 항상 앞으로 나아갑니다. 환란이 없거나 낙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13절입니다. 엡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란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있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감옥에 있어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10:12절을 아십니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침노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비아죠"입니다. 이 말은 "비아", "힘"과 "죠"는 "쳐들어 가다"는 말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힘으로 쳐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길을 깨는 자, 길을 부수는 자, 길을 여는 자"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을 여는 사람들입니다. 길이 없다고 안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길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거창고등학교 전영창교장이 말했습니다. “길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길이 없는 곳으로 가라”. 미국의 에머슨이 말했습니다. “길을 따라 가지 말고 네가 가는 곳이 길이 되게 하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담대함을 낳고 담대함의 본질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라는 글을 썻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된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 놓은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 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어떤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최고 비밀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의 변화를 위해 만세전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복음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소속과 특권을 갖게 했습니다. 그 비밀이 교회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합니다. 그 비밀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담대함으로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 저와 여러분을 위한 은혜의 축복입니다.
나는 긍휼을 입은 자인가
엡 3:1-4 / 김경진 목사
지난 주일 저는 ‘내가 긍휼을 입은 이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잘나서일까?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일까? 하나님께서 나를 훗날 사용하시기 위해서일까?’라고 그동안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그러한 신앙의 태도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 중심의 신앙생활과 기복주의적인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 나아가길 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부르셨다는 것, 나 같은 죄인도 사용하신다는 것, 주님의 복음에 방해꾼과 같은 나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전한 뒤에 몇몇 분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그중 이런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겠지요?” “저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싶습니다.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그와 같은 메시지를 받고 사실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내가 긍휼함을 입은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이유를 찾기 전에 ‘아직 나는 긍휼하심을 받지 못했어요. 저는 지금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해요.’라고 간절히 요청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분들의 절실함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몇 년째 자격 시험을 치르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시험을 보는데 몇 차례 떨어지면서 실망이 큽니다. 그분은 아마 늘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올해는 꼭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게 사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원하는 부모님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제가 원하는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마 이런 기도를 드리실 것입니다. 건강이 나빠져서 치료를 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실직해서 일자리를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어려움을 당해 극복하느라 애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한 가지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고 계실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하고 당연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긍휼을 구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특권이자 권리입니다. 그 자체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빈손으로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빈손에 무언가를 채워 주시길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모습입니다.
제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신학대학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신학 공부를 한 후, 로스쿨에도 들어가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목사이자 변호사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변호하며 목회의 길을 가겠다는 포부를 가진 가정입니다. 그 가정에 아이가 태어났고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갔는데, 검사를 해 보니 처음엔 뇌수막종이란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후 계속 검사를 하며 진단했는데, 종양이 머리뿐만 아니라 임파선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곳에서도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최종 진단은 ‘림프종’이었습니다. 바로 지난 주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참으로 힘들어하는 제자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어제가 그 제자의 생일이었습니다. 생일을 맞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아이를 바라보며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은율입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실 때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분들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이 아이보다 더 급하고 절실한 기도 제목도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제가 긍휼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보다 “하나님, 저는 지금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을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
저는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이유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는가?’ 지난 주일에 함께 읽은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디모데전서 1:14)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도록 풍성하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또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16)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셨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자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마땅히 여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의 문하의 사람이었으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장차 유대교를 이끌어 갈 미래의 인재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그의 인생이 뒤바뀝니다. 다메섹에 올라가 눈을 고친 후에는 다메섹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추격자가 도망자로 바뀌는 기점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 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인생입니다. 그의 인생은 그 이후로부터 달라졌습니다. 그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마지막에 목이 잘려 죽는 순교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일까요? 정말 그렇게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습니까? 그가 말하는 긍휼은 어떤 것입니까?
< 사도 바울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곤고한 삶을 살았습니다. >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삶을 회고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새번역)
이런 삶을 산 자가 과연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말합니다. 채찍과 돌로 맞았다고 합니다. 수없이 위협을 당했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다고 회상합니다.
이런 인생이 과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인생이냐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고난받았으나 정신적으로는 기쁘고 행복했다면 그래도 다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고를 확인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28~30, 새번역)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하더라고 정신적으로 괜찮았다면 그나마 견딜 만했겠지만, 바울은 정신적으로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처럼 그도 염려했고, 힘들어했으며,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이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나 인간적인 마음도 들지 않게 했습니까? 마치 성자처럼 날마다 기쁨으로 살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2~24)
그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음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함에도, 끊임없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세상적인 감정, 사탄의 유혹을 끊어 내야만 했습니다. 영적인 전투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를 사로잡으려는 사탄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곤고함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정리하면, 그는 육체적으로도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매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들어가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염려와 연약함에 싸여 있었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도 계속해서 죄의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누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무엇이며, 그가 누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 세 번 간구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세 번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 말씀이 이렇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7~9 중)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 제하여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기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토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정도쯤은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
도대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어떤 긍휼을 입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어떤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에베소서 3:1~4)
차분하게 써 내려 가는 바울의 글 속에서 그가 강력하게 누리고 있는 한 가지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는 서신서를 통해 끊임없이 그 비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사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가 훼파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 소망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비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비밀에 감격해 은혜가 충만함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또 다른 비밀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 뒷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에베소서 3:6~7, 새번역)
사도 바울이 유대인으로 살 때만 해도,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 안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안에 제한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굉장한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신다는 놀라운 구원의 경륜을 깨닫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3:8~9, 새번역)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비전’과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해 나아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어떤 자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직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역’을 맡겨 주셨습니다. 돈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권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 꿈과 비전, 사역과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사실을 노래합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비전을 주셨다니, 이렇게 위대한 꿈을 주셨다니! 내 평생의 동력이 될 만한 소명을 주셨다니!” 이렇게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로 우리 삶의 비전과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알게 하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여러분은 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내가 만든 꿈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 하나님께 받았다고 생각되는 비전이 있습니까?
바울에게는 그것이 은혜였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살만한 동기를 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사도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목회자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장로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권사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 일로, 어떤 사람은 선행을 베푸는 일로, 어떤 사람은 통역하는 일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유지하며, 어떤 사람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키우는 일로, 어떤 사람은 부모를 봉양하는 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받았는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비전으로 여기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삶의 은혜가 있습니까? 만약 그 은혜가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 때가 많고, 빈손으로 서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마땅한 길이자 삶의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모습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배우게 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의 이유를 찾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을 받아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이유를 주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살 이유를 주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요, 넘치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코로나19의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는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은 ‘맥추감사주일’로, 많은 교회가 이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제목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다시 돌아봅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 부활의 소망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내 은혜가 족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크십니다. 나에게 소명을 주시고, 나에게 할 일을 주시고,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큽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버지 앞에 비노니
엡 3:14-19 / 김광일 목사
헨리 포드(Henry Ford)는 미국 미시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드에게는 하나님 안에서 잘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마차를 보고 “말이 끌지 않고 갈 수 있는 차를 만들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자동차를 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포드는 27세때 에디슨 전등회사에 입사하여 성실성이 인정되어 기계 주임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포드는 가솔린 엔진 실험에 정열을 쏟기 시작하였습니다. 1896년 6월, 1호차를 가동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6년 후에는 시속 72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로 개량하였습니다.
투자자들이 몰려들었고 자동차 생산을 시작하였지만 일 년도 되지 못하여 도산하고 말았습니다. 다음 해 1903년 디트로이트에 포드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연구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1908년 한 해에 자동차 6,850대를 만들어 내는 데까지 성공하였습니다. 다음 해는 일만 대를 돌파하였습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포드사의 자동차 생산량은 미국 전체의 60%를 차지하게 되었고 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였습니다.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 기념박물관에 가면 포드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꾸던 사람이요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강철왕 데일 카네기가 헨리 포드를 방문하였는데 78세인데도 젊음과 활력이 왕성하였습니다. 데일 카네기가 물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고민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포드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시며 가장 좋은 결과를 맺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안 되는 일은 될 때까지 다시 하면 됩니다. 나는 고민과 염려를 항상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영적 강건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입니다.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기도의 효용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단이 결단코 막을 수 없는 성도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비록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핑계로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갇힌 몸이 된 자신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진지한 자세로 기도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부복하는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입니까? 모든 것이 막힌 상황입니까? 그렇다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첫째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시각장애자 양정신(楊貞信)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일곱 살 때 고열을 앓고 후유증으로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 후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수없이 원망하고 좌절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모두 다 저를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딸아, 네가 눈은 보이지 않으나 입으로 말은 할 수 있지 않느냐? 머리로 생각하고 귀로 듣고 손을 쓸 수 있지 않느냐?” 그녀는 믿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오, 하나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나이다.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나이다.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맹아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각장애인 최초로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시각장애인 최초로 여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을 바치리이다”라는 책을 출간하여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사형수가 두 눈을 그녀에게 기증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사양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증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은 두 눈을 잃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나 감사할 것밖에 없기에 굳이 눈을 뜨는데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 양정신 목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인도하는 빛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환하게 보았던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여기의 ‘강건하게 하시오며’는 원어로 ‘크라티이오데나이’인데 ‘힘을 얻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근육의 힘을 배양하는 육체적인 강건이 아니라 속사람인 영적 강건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속사람은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이며 인격의 변화를 주도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겉사람인 육신에 관심이 많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사회적 문제는 너무 건강해서 발생합니다. 성적 타락과 방종은 지나치게 건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범죄입니다. 강건하기를 힘써야 할 것은 바로 속사람입니다. 속에 있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났다해도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약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는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강건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지도록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견고하게 하시오며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Ralph W. Emerson)이 휴가를 얻어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주인을 도와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뒷발에 힘을 모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을 써도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에머슨이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농부의 딸이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암소의 콧잔등을 한참 쓰다듬더니 그곳에 얼굴을 비볐습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암소를 끌고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에머슨은 그때 사람이나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괴로울 때 어떻게 벗어나십니까? 다투고 상한 감정을 어떻게 치유 받습니까? 이런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면 잠도 안 옵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대화하여야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고백하고 힘든 문제를 아뢰고 도움을 요청하는 대화인 기도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들려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 마음에 평화가 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새 힘을 얻고 견고하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 기도로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여기의 ‘굳어져서’는 원어로 ‘테데멜리오메노이’인데 ‘확고하게 기초를 놓다’라는 의미입니다. 식물의 뿌리와 건물의 기초를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는 정도가 아니라 터가 굳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열심과 기도와 봉사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누가 봉사를 많이 합니까? 누가 열심을 냅니까? 누가 희생합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현재 받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사랑을 잊어버리면 형식적인 신앙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터가 굳어지고 견고해지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충만하게 하시오며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손자가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고 성령 충만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되었습니다. 며느리가 손자에게 말을 가르치는데 ‘예’부터 가르쳤습니다. 아이는 싫어서 고개를 흔들면서도 입으로는 ‘예’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번 되풀이한 말이라 싫어도 ‘예’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때 칼 바르트 교수의 머리 속에 성령 충만한 자의 대답이 연상되었습니다. 생각이 성령으로 차 있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싫어도 ‘예’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십자가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일어나는 예수의 모습에서 성령 충만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사람은 ‘아니요’라고 말해도 속사람이 ‘예’라고 말하는 하나님 사랑이 충만한 모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의 ‘충만하게 하다’는 원어로 ‘플레로데테’인데 ‘채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재해 있는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이 충만은 성도들이 이르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화를 기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만하심이요, 완전하심입니다. 당신이 충만하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 역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길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충만을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일본 최대의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 이시이 쥬지(石井十次)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 “어떻게 많은 고아들을 먹여 살렸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시이는 그를 고아원 본관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저기 있는 구멍을 통해서 하나님이 고아들을 먹일 돈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바닥에 깔아 놓은 돗자리가 무릎 모양만큼 깊이 파져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흔적입니다. 이시이 쥬지의 제자에 의하면 이시이는 곧잘 옛날 기도한 일을 읽어 주면서 몇 년 몇 월 며칠에 기도한 것이 응답되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 응답받은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쉬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할 일이 없어서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야말로 기장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고 성도들의 사정을 통달하여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시간이 짧아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겉만 맴돌다 나오는 기도가 아닙니까? 기도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겉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의 강건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지경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박히고 터가 견고해지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충만에 이르기 위하여 예수를 바라보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비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
엡 3:1-12 / 김태환 목사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절부터 6절까지 말씀인데, 바울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비밀(God’s mysterious plan)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5-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옛날에는 이 비밀스런 진리를 아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이 신비로운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비밀이란 바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들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7절부터 13절까지 말씀인데, 바울은 이 비밀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y God's grace and mighty power, I have been given the privilege of serving him by spreading this Good News.”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서 10절, 11절, 12절 말씀에 붙잡혀서 오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쉬운 성경을 좋아합니다만, 10절 말씀은 잘 번역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에게”이라는 말씀은 표준새번역성겨에 나와 있는대로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 NLT 성경에는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좋은 번역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것 없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이 풍조 속에, 사탄의 왕국을 향하여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들이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을 똑 바로 인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수많은 평신도들이 이 교회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함께 공유함으로써 교회의 존재 목적을 실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에서는 사랑의 교회 건축 문제 때문에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무려 2,100억을 들여서 교회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찬반 여론이 있습니다. 한 두 주 전에 사랑의 교회 공동회의가 있었는데, 거의 만장일치로 교회 건축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크게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단, 그 교회가 단지 크게 짓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 교회가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교회를 짓고, 엄청난 사람들이 모이고, 그래서 그 힘을 가지고 이 세상을 향하여 이 시대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전진 기지와 같은 교회가 된다면 말입니다.
2005년 4월에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주최로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세 분의 원로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잘못한 일을 참회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조용기 목사님과 김창인 목사님, 그리고 강원용 목사님이 참석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가 결코 값싼 것이 아닐진대 너무나 은혜 위주의 설교만 했다. 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리고, 말로만 사랑하고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다. 나는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 했으며, 난 너무 잘먹고 잘입고 잘 살았다. 가끔은 이웃의 고난에 참예하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나는 사회악에 대해 침묵했다. 부정과 부패에 고개를 돌릴 때도 있었고 옳은 것은 옳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한 비겁한 삶을 살았다. 이제와서 우리 교회의 사람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좁은 신앙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이라도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탈피하고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
그리고, 강원용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제일 먼저 시작하신 분은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창설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굵직굵직한 직함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한국 교계의 원로였습니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참회했습니다. “제가 평생 종교 간의 대화를 추진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종교 간의 대화보다 먼저 했어야 할 일은 기독교 안의 대화였습니다.” 참 의미심장한 말 아닙니까?
일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했고, 엄청난 교회 성장을 이루었고, 사회에서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던 원로들의 고백은 “우리가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는 크게 성장시켰지만, 교회의 본질을 잘못 알았고,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 아닙니까?
이와 비슷한 고백이 미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지금 미국의 교회들은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습니다. 기성 교회들이 거의 모두 쇠퇴하고 있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처치(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미국 교회 성장의 메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는 모든 목사들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이 교회를 방문하거나 윌로우크릭협회에 가입해서 목회 노하우를 배우려고 합니다. 2007년에 이 교회에서 지난 32년 간의 사역의 결과를 책으로 내 놓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Reveal: Where Are You?”입니다. 이 책은 이 교회의 핵심 사역자인 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이 집필했다. 윌로우크릭연합체에 속해 있는 여섯 교회와 함께 작업을 벌여,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 간 조사하고, 120명을 일대일로 면담한 후에 일종의 보고서 성격으로 이 책을 발간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자들의 결론에 빌 하이벨스 목사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동안 이 교회는 교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예배, 성경공부, 소그룹, 자원봉사, 전도 등 엄청나게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교인들은 열심히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교회는 날로 부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들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Bill Hybels 목사가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We made a mistake. What we should have done when people crossed the line of faith and become Christians, we should have started telling people and teaching people that they have to take responsibility to become 'self feeders.' We should have gotten people, taught people, how to read their Bible between services, how to do the spiritual practices much more aggressively on their own." 저는 처음 윌로우 크릭 교회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잘못했다(We made a mistake)”는 고백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용기가 참 부러웠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교회 공동회의 주일을 맞이하여 이 설교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에 눈에 보이는 열매에만 급급하여 교회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본질은, 복음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교회는 32주년을 맞이합니다. 이제는 혼자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교회의 미래를 설계하는 그런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목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목회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11-12절 말씀을 같이 보십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태초부터 이루려고 계획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을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알려지고, 그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은 신실한 그의 일꾼들을 부르시고, 이제 우리 시대에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에 선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은 처움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계획을 이루시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ecause of Christ and our faith in him, we can now come boldly and confidently into God's presence.”
저는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런 말들을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울이 가졌던 같은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용감하게”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이런 말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삶의 태도는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이런 삶에 대한 태도가 주어집니다.
다시,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질문은 크리스천의 존재 목적을 묻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의 구원의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는 왜 그런 고백을 했습니까? 그렇게 엄청난 교회 부흥을 이루었으면서, 그렇게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서, 그렇게 교회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잘못했다(We made a mistake)!”고 고백했습니까?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자신들의 과오를 덮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위대한 업적을 조금씩만 소개하고 자랑해도 보고서 몇 권은 쉽게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땅의 교회들이 “We agree with you”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도 그 교회가 유명하니까, 하도 그 교회의 영향력이 대단하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다. 앞으로 그 교회의 사역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들의 실패했다고 정직하게 말한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Bill Hybels 목사가 고백한대로 그들은 교인들을 “self feeders”로 만드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은 벌써 오래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크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갓난 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젖만 먹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12, 현대어 성경) 성숙한 크리스천은 스스로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누가 떠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먹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가 크리스천이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도구로 사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 시대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주석학자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에 따라 다니는 많은 타이틀 중에 복음의 일꾼이라는 칭호를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도 100%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 읽은 7-8절 말씀을 보시지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특별한 은혜로,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능력과 재능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누리게 될 부요함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복음의 부요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크고도 놀랍습니다.” NLT 성경에 보면 이 두 절 말씀 속에 “특권(privilege)”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 부름 받고 산다는 것은 우리들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는 것, 역시 우리들의 특권입니다.
특권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권리입니다. 더 알기 쉬운 말은 특혜(特惠)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특혜를 주시고,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특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요함 속에서 산 사람이었다고요. 그가 8절 끝에서 “이 복음의 부요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크고도 놀랍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이 이 복음의 부요함 속에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풍요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과 교회의 비밀을 알려면
엡 3:1-13 / 이재철 목사
얼마 전, 8명의 생명을 앗아간 고시원 화재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했습니다.
특히 화재의 원인이, 그 건물에 사는 내연女의 변심에 앙심을 품은 남자가, 술김에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은
충격이었습니다. 여자 때문에 술을 진탕 퍼마신 남자가 술김에, 홧김에, 불을 낸 것이
고귀한 8명의 생명은 물론 자신의 인생까지 망가뜨린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저는 '만약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았더라면...'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면 불륜이 아니라, 또 많은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180도로 달라진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믿는 이들을 잡아죽일까'하고 벼르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은 물론, 인생과 교회를 향한 비밀을 알게 되었고, 이 비밀은 바울을 딴사람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방황을 하는지 아십니까?
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쓸데없는데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세우신 비밀을 알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 인생과 교회를 향한 비밀을 알려면...
① 내 인생과 교회를 향한 큰 뜻을 알아야 합니다. (6절)
주님께서 '인생과 교회를 향해 세우신 큰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6절에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감춰져있던 비밀이, 예수님을 통해 다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 영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고, 형제끼리도 원수 되게 만드는게, 세상의 상속 문제입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인생의 큰 뜻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 함께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건, 금실 좋은 부부 사이에도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몸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유대인과 이방인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보혈이 막힌 담을 허물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되게 했습니다.
도저히 한 몸 될 수 없는 사람들을, 한 몸 되게 하신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비밀이자, 인생의 신비입니다.
㉢ 함께 약속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귀한 뜻,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갖게 되는 것이 인생의 비밀입니다.
그 약속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으로, 우리 모두가 한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상속자로 만드시고, 한 몸 되게 하며, 약속까지 주신 걸까요?
그것은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구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나를 통해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생과 교회를 세우신 첫째 목적이십니다.
성경에도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 (요6:40)' 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 안에 있습니다 (1절) 그러나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을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 (빌 3:14)'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방황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인생의 초점이 맞춰지면 방황 끝!입니다.
②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7~8절)
내 인생과 교회의 비밀을 알려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감옥 안이지만 바울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지으면 분명한 목적으로 알고 난 후,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고,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찬 바울에겐 감옥이나 궁궐이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신을 세워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신 은혜에, 바울은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8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라는 고백으로, 감사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구원도, 크신 사랑도, 건강도, 자녀도... 다 하나님께 받았지만 만족하고 있습니까?
받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 은혜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
ⓐ 갈수록 겸손해집니다.
왜냐면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 또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바울이야말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 옆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갈수록 외로워질 뿐입니다.
ⓑ 받은 은혜에 보답할 방법만 생각합니다.
진짜로 은혜 받은 성도들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만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또 교회를 향한, 보은(報恩)의 맘이 샘솟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입니다.
요즘이 여름휴가의 절정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휴가는, 떠나지 마십시오.
왜냐면 달콤한 죄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대신 올 여름 휴가는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를 변화시킨 주님을 자랑해 보십시오.
상대방의 믿고 안 믿고는, 성령님이 하실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름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휴가가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비밀
엡 3:1-13 / 김태복 목사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전체의 중심 사상으로, 바울이 전 생애를 바쳐서 전하려고 했던 위대한 진리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서신을 로마 감옥에서 쓰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된 과거를 숨기려고 합니다. 특히 자기가 옛날에 감옥에 갔던 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이요, 자기 신상명세서에 뻘건 줄이 그어 있으면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제 노인의 몸으로 지하 감옥의 추위와 재판의 결과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갇힌 죄수였다고 담대히 말할 뿐 아니라, 오늘 서신에서 낙심은커녕 아주 감격적인 어조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바울이 감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1. 바울의 감격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처음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대단히 낙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방팔방 전도할 곳, 교회를 세워야 할 곳이 많고, 또 이미 세운 교회를 열심히 돌보는 일이 많아 너무나 시간이 아까운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어 금쪽같은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따지는 기도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3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복음의 비밀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에게 계시되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주는 무한한 축복과 신비로운 진리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전 세대에서 선지자들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분명한 진리와 은혜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은 특별히 성령에 의하여 계시되어 졌습니다. 5절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라 했습니다.
이 복음이 구약 세대에는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인류의 소망과 구원이 되는 메시아에 관한 계시는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천사장들에게도 거의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 오심으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밀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6절에 나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복음의 특권들을 세 가지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함께 후사가 되는 특권입니다.
후사란 말은 상속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고 유대인과 똑같은 반열에 서서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만도 복중의 복인데, 하늘나라에서 많은 것을 상속받는 다니 너무나 큰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비밀입니다.
(2)함께 지체가 되는 특권입니다.
함께 지체가 되었다는 말은 같은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후사가 될 뿐 아니라 이제 한 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떨어질 수도 없고 떼어 낼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지체가 되었으니 예수님이 누리는 상급과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다 내 몸이 된 것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한 몸이 되었으니 영원히 사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비밀입니다.
(3)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특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사람들이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후사가 되고 한 지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 약속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이 땅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늘에서 주시는 약속이 32,000개나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구원, 영생이나 사후의 세계를 모르던 우리들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너무나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수감되어 금쪽같은 시간들을 죽이고 있을 때는 너무나 낙심이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었으나 어느 날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로 받으니 너무나 감격이 차오릅니다. 자기 같이 하나님의 일을 가장 방해하던 죄인이 구원받은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한데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천사장에게도 알려주지 않던 놀라운 비밀을 계시해 주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야 이 귀한 시간에 감옥에 무작정 가두어 주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90세 넘은 나이에 난데없이 외딴 섬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갔을 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생동안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이제는 편히 쉬어야 노년에 절해고도 죽음의 섬에 내던져지게 하시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하늘 문이 열리고 놀라운 마지막 때의 계시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때야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닫고 감사하면서 기록한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느 때는 주님을 위해 열심히 충성 봉사함에도 알 수 없는 고난이 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낙심하지 마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아시고 감사하면서 더욱 주님의 뜻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강한 힘과 능력을 주시면서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기룩부르네라는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뚜루락이라는 섬에 감금이 되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한 자매가 찾아와서 묻기를 “이 적적한 곳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잠들 수가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복음 때문에 갇힌 그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자매여, 나의 쇠고랑은 나를 두렵게 하지 않고 나의 잠을 깨우는 적이 없습니다.”
“황금과 보석의 팔찌보다도 이 쇠고랑을 더 귀하게 여기고 이 쇠고랑에 채워져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를 얽어맨 이 쇠고랑의 철거덩 거리는 소리는 나의 귀에 찬송소리입니다. 나는 단순히 쇠고랑에 채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쇠고랑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고난당할 때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 받고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아시고 때로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받은바 은혜 감사 하면서 갚기 위해 더욱더 충성 봉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바울의 감격은, 자기를 그 비밀을 전하는 사역자로 세우신 것 입니다.
바울이 처음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는 ‘왜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을 가둠으로 금쪽같은 시간들을 낭비하게 만듭니까?’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더욱 감격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같은 죄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셔서 강하게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얼마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자요, 수많은 교인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하던 자요, 교회를 훼방하던 자요, 더욱이나 초대교회 기둥 같은 인물이었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였습니까?
그러므로 바울 스스로 표현하기를 딤전1:15에서는 ‘죄인들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이 교회를 향해서 저지른 범죄로 따지면 벌써 벼락을 맞아 마땅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를 부르시고 복음의 일군이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결정적인 기회에 자기를 앞장세우시니 너무나 큰 은혜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은혜 너무나 감사하여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이 몸이 부서져라 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아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나누어 주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는 가히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우리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던 자들이요, 결국 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귀한 직분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 받기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그 집에 가셔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막1:31 “나아가사 그의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가 그 여자가 수종 하니라”고 했습니다.
고침 받은 베드로의 장모가 바로 제자들과 예수님께 수종을 들었다 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은혜 받고 나서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교회 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하더니 얼마 후에 보니까, 그 동안 몸이 아파서 못했던 관광을 하기 위해 주일날 빠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보니까 병이 재발합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중직자들이 임직하기 전에는 그렇게 기도도 많이 하고 충성도 많이 하더니 임직하고 나니까, 점점 기도생활도 등한히 하고 오히려 무슨 벼슬을 딴 것처럼 교회에서 주장질만 하려고 합니다. 은혜 받은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천국을 상속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므로 그 은혜, 만 분지 일이라도 갚기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해야 합니다. 7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 하여야만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믿을 수도 없지마는 일은 더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왜 교회의 많은 일꾼들이 열심히 교회를 위해 충성한다는 노릇이 오히려 교회의 가시노릇을 하게 됩니까? 내 주견, 내 능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왜 열심히 전도함에도 열매가 없습니까? 내 말, 내 능력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에 따라 복음을 전해야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바울이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력으로 자기의 학력으로 자기의 신념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 가서 전도할 때에는 자기의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오직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귀신이 방해하고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루디아의 가정이 믿고 귀신들린 여인이 믿고 감옥에 간수가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속적인 능력이 없이는 아무 일도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나 찬양대, 구역일이나 기관 일을 할 때 반드시 충분히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평택교회에서 일어난 간증입니다. 그 교회에 새 신자인 19세 된 조오남 양은 예수 믿기 전에 우연히 벙어리 마귀가 들려 여러 달 동안 무척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의 부모가 병을 고치려고 온갖 약과 무당을 불러 애를 썼으나 병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또한 밤에는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잠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못 먹었으며, 헛웃음을 웃기는 하지만 말을 못하는 아주 딱한 형편이었습니다.
마침 평택교회의 한 교우가 소녀가 고생하는 것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예배당으로 데리고 와서 병 고침 받게 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녀 전도사와 신자들이 합심하여 34일간 믿음으로 주께 기도한 결과 맑은 정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영혼과 육신이 기도의 권능으로 구원을 얻은 것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미하며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번 40일 동안 열심히 기도하심으로 우리의 각자 기도제목이 응답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하심으로 큰 능력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바울의 감격은, 교회를 통해서 그 비밀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비밀이 선포되게 할 때의 발판과 범위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온 것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한 10절에 보면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은 하나님 나라에 천사를 말합니다. 천사라 할지라도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들도 지상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교회라는 교두보를 통해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때로 교회 비판자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교회를 통해서만 자기 사역을 나타내신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독단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교회의 부패상을 공박하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가 대판 싸움을 벌임으로 사회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한국사회가 이처럼 도덕적으로 병든 책임이 우리 교인들이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 책임이 너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한반도는 세계의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이 벼랑 끝 전술로 난데없이 핵실험을 함으로 유엔이 대북제재를 가하는 결의를 할 정도로 온 세계가 북한을 향해 비난을 퍼 붇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반기문 장관이 세계 192개국 대표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의함으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계 이목을 한반도로 향하게 만드시는 것은 세계 선교에 대한 뜻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때일수록 더욱 바로 서서 기도하고 선교에 힘쓰며, 아울러 어두워만 가는 사회를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외로 떠나는 초중고생이 년 2만 명을 돌파함으로 7년 사이 13배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 반면에 고교생 6만 5천명이 수업료를 못 내고 있고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무려 2만 2천명이 된다는 소식입니다.
그 만큼 우리 사회가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간다는 말입니다. 이는 정치를 잘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있는 자들이 호화판으로 살면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나눔에는 너무나 인색함으로 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아마 그 중에 기독교인들이 엄청날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복을 받는 방법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받은 복을 바로 사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 목회자들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말씀을 보면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도 인간들이 모인 것이라 많은 부족함이 나타날지라도 이 교회를 통하여 위대한 사역을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시며, 하늘로 가는 문이요, 열쇠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른 신앙고백을 했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마16:18-19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게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천주교에서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교황을 만들었으나 사실은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고 능력을 나타내시고 우리 성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과 그의 남은 사역을 대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로마나 히틀러나 공산당 등, 과거 독재자들이 교회의 문을 닫으려고 갖은 박해를 다했으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20세기는 어느 의미에서 미국과 소련의 패권싸움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두 나라는 핵을 개발하고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전쟁 무기를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수많은 나라들은 침략하여 공산화 시켰습니다.
얼마나 그 세력이 막강했던지, 1955년 소련의 후루시쵸프가 모스코바를 방문한 그 당시의 닉슨 대통령에게 장담하기를 “앞으로 7년만 있으면 우리가 미국과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고 앞으로 당신네 손자들은 공산화된 미국에서 살게 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가 무너진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소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소련은 공산당 혁명이후에 예배드리는 교회를 폐쇄해 버렸습니다. 교회마다 공산당 집회소로 만들고 오락시설의 공간으로 사용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교회를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버린 것입니다. 그 때 미국을 방문한 소련의 공산당 간부가 말하기를 “우리가 교회 문을 닫았더니 모든 문이 닫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공산당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수 있다는 교만의 말인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40년이 지난 후 소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소련은 빚더미 위에 앉게 되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앞으로 미국이 공산화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후루시쵸프의 아들 세르게이와 며느리 발렌티나가 미국으로 귀화하여 미국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던 소련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문을 활짝 열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많은 교회들이 러시아 지역에 신학교들을 세우고 수 많은 곳에 개척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지금 북한도 모든 교회 문을 폐쇄하고 모든 성도들을 다 가두거나 처형함으로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아닙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강한 역사 가운데 교회가 회복되고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날이 반드시 올 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교회를 만드시고 친히 역사하시는 줄 믿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충성 봉사하며 전도와 양육에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복음의 일군
엡 3:1-7 / 박덕기 목사
우리는 에베소서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진 옥중 서신이라는 것을 이 시간 상기할 필요가 있고, 사도 바울이 갇혀 있는 상태에서 이 편지를 기록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이라고 한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히게 된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 곧 복음전도를 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대목에서 자기가 옥중에 갇힌 것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3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이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위대한 목회자적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자기가 로마에서 갇혀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일, 즉 그가 옥중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그들에게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알았습니다. “자 보세요. 바울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그가 우리에게 설교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축복에 대하여 말하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안전과,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리신바 되었다고 하셨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죄수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일일까요?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런 식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낙심에 빠질 위험이 있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을 크게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아무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축복에 대하여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문제만큼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시련과 환난을 겪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왜 사도 바울과 같은 충성된 하나님의 종을 감옥에 갇힌 자가 되도록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듯 경건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의 고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시련과 환난을 견디어내야만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번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간에,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이 문제를 대처해나가는 방법을 살펴보면, 한 마디의 불평도 말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섬겨왔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고, 그 일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데, 또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닥쳐와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불평이나 불만을 한 마디도 토로하지 않았으며, 그런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옥중서신인 빌 1: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갇히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반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저지른 어떤 잘못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여러분의 생애 중 최고의 영예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고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할 때조차도 감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여러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신 이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증거요, 그리스도인의 제자 된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로 인하여 낙심하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 대한 사도 바울의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듬뿍 묻어나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어떻게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하고 담대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그렇게 담담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까? 옥에 갇히고서도 무엇이 그토록 황송하고 감사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란 말씀을 주목해야 보아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하면서, 또한 바울에게 주신 사도의 직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에게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 계획을 완수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각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우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구원 계획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에 바울을 불러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어찌 사도 바울이 황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릴 것도 없습니다. 그 자신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렇습니다. 그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고, 죄인 가운데서도 괴수였습니다. 행 26: 10-11절에 보면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진술에 의하면 보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바울의 손에 죽음과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로 인해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세상 그 어떤 죄가 이보다 크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실만도 얼마나 황송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러한 그에게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온혜의 경륜 곧 사도의 직책을 그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 감옥에 영어의 몸이 되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담담하고 담대한, 아니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황송하고 감사해하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울을 이해할 때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위해 부르신 거룩한 도구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도구로 삼으신 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또 목회자들만도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성도를 통해 자신의 은혜의 경륜을 이루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러분을 통해 자신이 세우신 그 은혜의 경륜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륜에 따라 도구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그처럼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을 많이 그것도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가 원망합니까? 불평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가 사람을 향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원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선민의 조상인 야곱 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심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도구가 된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한 그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따라 부름 받은 도구라는 분명한 소명 의식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 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요셉이나 바울과 같이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도 3-4절에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을 읽을 때에 이 ‘비밀’이라는 단어를 자주 대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이라는 단어는 진리를 설명하는 특수한 용어인데, 복음진리는 그 성격상 인간 자신의 지성이나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고전 1:8-10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3절에서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이해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오히려 전에는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로 생각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연인으로서의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일 자기 자신의 이해력만으로 생각하기를 계속하였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발하고, 증오하며 방해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박식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합니다.
5절에 보면 바울은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른 세대’란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구원 계시를 전혀 나타내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에게 나타내신 것과 같이 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도 분명히 사람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구원 계시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 계시를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계시는 신약 시대의 사도들에게 보이신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구약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은 부분적이고 임시적이고 상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복음, 특히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 비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에게 보이신 계시는 어떻습니까? 부분적이 아니라 전체적이었습니다. 임시적이거나 상징적이 아니라 실제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신약 사도들에게 보이신 복음은 명확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의 구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로 초대 교회 사도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의 최절정이요 완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것은, 그 이전에 있던 어느 위대한 선지자들에게 보여주신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에게 보여 주시고자 한 계시의 최고봉을 사도들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에 새로운 복음은 없습니다. 신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 안에 있습니다. 신기한 것, 새로운 것, 충족한 것 등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안에서 찾고자 할진대 부족함이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분이 말씀에 바로 서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스스로 믿을지라도, 사도들이 전하여 준 복음 밖에서 진리를 찾거나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릇된 이단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깊이 명심하시고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의 기초 위에 자신의 신앙을 굳게 세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한 층 더 심오하고 감동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7절에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복음의 일군’이라고 한 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는 곧 복음의 전파자입니다. 목사는 단순히 시사적인 사건을 취급하는 자가 아닙니다. 세계정세와 긴박한 국제적 정치적, 산업적, 경제적 문제들을 논하는 자도 아닙니다. 애국심을 전파하는 것도 목사의 임무는 아닙니다. 일반적인 공중도덕이나 어떤 일반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가 아닙니다. 세상도 도덕과 윤리를 전파할 수 있으며, 또한 철학자들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은 신자들의 소원성취나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획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자도 아닙니다. 목사들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일군이라고 한 ‘디아코노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남을 섬기는 자란 의미를 지니는데 ‘하인’ ‘사환’ ‘일꾼’ ‘사자’ ‘사역자’ ‘집사’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장로나 집사 혹은 목사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 직분을 통해 자신이 높임을 받거나 섬김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의 자세로 그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생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사셨고, 이를 위해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셨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가는 시간부터 크게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교회당 뜰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배실에 이르기까지 요소요소에 안내 위원들이 서서 예배 시간 한 시간 전부터 교인들을 친절히 그리고 정중히 영접하고 안내하는데, 그들은 거의가 사회의 저명인사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저들은 사회에서는 국회, 대학, 병원, 회사, 연구소, 법원, 각 관공서 등지에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널리 활동하며 크게 봉사하는 명사들이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는 전혀 그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무명 인사처럼,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 간혹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활동한다는 핑계로 교회 안에서는 손끝도 까딱 아니하려는 이도 있고, 세상일은 중요시 하면서도, 교회일은 대단치 않은 일로 여기는 이도 있고, 저명한 인사라는 간판 때문에 교회 안에 들어 와서는 대접만 받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 바른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고난을 당하고 희생한 적이 있습니까? 핍박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분이 참 그리스도임을 확신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고 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직분들이 귀찮은 짐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군,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누구의 일군 노릇을 합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일군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보다 영예롭고 영광스런 직분이 없음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사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비록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목사직보다 더 귀한 직분이 없음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또한 이방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보다 귀한 인생이 없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일군보다 더 영예롭고 가치 있는 직책이 없음을 깨달아서, 많은 이방인 곧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
엡 3:1-7 / 박조준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의식을 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 1 절을 보세요.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이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법적으로 말하면 로마의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바 울 자신은 로마의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라고 밝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무엇입니까? 이방을 위하여 갇혔다고 합니다. 이방을 위한 일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 면 그리스도 예수를 이방 사람에게 전하려 했던 것 때문에 이렇게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 다. 사람은 보는 데 따라서, 생각하는 데 따라서 모두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도 바울의 경우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사기, 횡령, 절도, 살인, 강도, 간음 그밖에 더러운 죄 를 범해서 수감이 되었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에, 그리스도의 복 음을 온전히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려던 것 외에는 그가 갇히게 된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 므로 그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담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 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 였느니라 (마 5:10∼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2장 19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 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 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수감되어 있으면 서도 자기 자신이 로마 사람에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이방 사람의 심령을 구 원하는 일을 위해 감옥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 마음이 담대했습니다. 같은 일도 생각하기에 따라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고, 영광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욕 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 감옥 안에 서 고생하게 되었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복음이 빨리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자유롭게 지내야 되겠는데 이렇게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전도사업이 얼마나 지장이 있나 라고 하며 여러 가지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불평스러운 생각을 품은 적도 없 고, 원망스러운 말을 그 입 밖에 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도 보세요. 빌립보서 1장 17절 이하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 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 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고 했습니다. 또한 빌리보서 4장 4절 이하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 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복음을 위하 여 갇혀 있는 나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고 말합니다. 사 실 우리는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요?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왜 사람들이 복음을 미워하고 복음을 반대하 는지 아십니까?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되 그들의 선행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목적에 의해서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연인들은 인간이 이처럼 죄와 허물로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구나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 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도 미워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핍박합니다.사도 바울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무슨 잘못한 일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 을 받고 고난을 당합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에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럽니까? 어두운 데 거 하는 사람이 빛이 싫어서, 미워서 그럽니다. 그래서 핍박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갇히 게 된 것을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불평스럽게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영광으 로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 희가 들었을 터이라 했고, 7절에도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 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했습니다. 여기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 은혜는 내가 연구하여 개발한 것이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이 거저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뽐낼 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 오직 감사하고 감격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고 말합니다. 자기가 일꾼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스스로 사도 의 영광을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경륜의 은사를 따라 일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바울을 택하시고 사도의 자격, 일꾼의 책임을 주 셨습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선물과 은혜로써 도우셨 습니다. 때로는 평범하게, 때로는 비범하게 그 힘의 능력 있는 역사에 의해서 바울을 도와주셨습 니다. 이 은혜는 특별히 바울에게 역사했고, 또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에게 역사 했습니다.바로 이 은혜에 의해서 에베소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수고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그 일에 적절한 사람을 부르시며 또한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그를 도우셔서 그의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효율 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 다. 일꾼 이란 말인 didakonos 에는 봉사자 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서 일 꾼 혹은 관리인 이란 말의 뜻을 살펴보면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8장 3절에는 헤롯의 집에 있는 관리인이 나옵니다. 이것은 구약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궁내대신으로 집을 관리하고 물건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0장 8절에는 포도원 비유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관리인을 시켜서 품삯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완전히 주인을 대신해서 돈을 받아 일꾼들에게 나누어주는 대리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인의 문서까지도 고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밖에 관리인이나 일꾼은 대개 주인의 소유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보다 더 진보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4 장 1절에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 어다 했는데, 여기에서 비밀을 맡은 자 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비밀 이란 말이 나 오는데,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밀은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드러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비밀을 맡은,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는 하나님의 각양 은사를 맡은 자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를 잘 맡아 서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이런 간증을 합니다. 나 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 이니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게 여겨 주셔서 이 직분을 맡 겨 주셨다고 생각할 때 거기에 기쁨과 감격이, 감사와 충성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하게 보셔서 이런 직분을 맡기셨는가 하는 마 음이 있습니까? 자기가 맡은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더욱 축복하십니다. 그러 면 하나님의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됩니다. 그리스도가 속죄가 없었다면 우리 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속죄는 구약 시대로 말하면 시장에서 노예를 팔고 사고 할 때 내가 샀다 고 하는 문서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잘 생겼으면 값이 비싸고, 몸이 병들 었거나 늙었으면 싼값으로 사오는 문서입니다. 그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 되어서 주인이 시키는 일에 무엇이든지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꾼도 값을 주고 샀다는 뜻이 있 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대신 주님이 죽 으심으로 우리 죄가 속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의미 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의 기뻐하시 는 일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 옛사람이 예 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2∼ 13)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받은 바 은혜를 간 직하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이는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꾼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어 떤 사람을 기쁘게 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도와주시기를 원하실 때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일꾼 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일꾼을 찾 으십니다. 그래서 청년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고 자기의 부족 함과 더러움을 한탄할 때 스랍을 시켜 그의 입술을 지져 정하게 하신 다음 이사야에게 들린 음성 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원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진리를 맡아 일합니다. 일꾼은 구약 시대에는 돈을 맡아 가 지고 있었고 사람을 맡아 관리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꾼 된 우리가 맡은 일은 하나님의 진리 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 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말하자면 복음이 들어 있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하 면 복음은 교회 내용의 전부입니다. 서로 모여서 교제하고 찬송한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 다.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가 아닐 때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의 간판이 붙어 있다고 교회는 아닙니다. 사이비 종교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 이며,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행사가 있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런 집단은 물거 품처럼 일어났다가는 사라져 갔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3∼14절에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로부터 바른 말, 아름다운 것, 복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헬라어 paratheke 는 우리가 보물을 잘 간수 하듯이 잘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 지킨다는 동사 phulassein 은 군대에서 흔히 쓰는 낱말인 데, 성을 파괴하려는 원수들의 침입으로부터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유를 도둑질하려 는 데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성을 무너뜨리려는 사람으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복 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이 상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이 복음을 지키라고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 으로 불렀습니다. 이 복음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귀한 보배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가 이 보배를 가졌습니다. 이제는 이 보배를 잘 지켜야만 합니다.복음은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 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제공되었 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달해야만 하고, 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 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복음을 부패케 하려는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지켜야 합니 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영광스러운 사 명입니다. 이 놀라운 사명이 우리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우리 나라가 일본 사람들에게서 해방되 던 당시에 목사님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에 김화식 목사님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이시여, 우리 손 에 이 대한을 소유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사명입니까? 우리도 이 대한민국을 우리 하나님의 일꾼들 손에 맡겨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 랍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귀한 사명이 있을 때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이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이것처럼 초라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일 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갑니다. 히브리서 3장 5∼6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꾼입니다. 물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봉사적인 위치에 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주인의 명령과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지시가 없 을 때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고, 지시가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여야 합니다. 내가 얼마 의 재물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재능과 얼마의 지식을 가지고 있든지 우리는 주인의 것을 맡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충성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 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 은 충성이니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맡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충성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충성합니다. 처음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도 충성하는 것이 참된 충성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때가 되면 일년 동안 살아온 것을 되돌아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연말 결산을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날이 다가오는데, 하나님의 일꾼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이제 큰 것으로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예할 지어다 하는 칭찬을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경륜
엡 3:2-4 / 손영만 목사
이제 사도는 3장을 시작하면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하신 구원의 비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성경전체의 큰 그림에서 조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엡. 3장>말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 …” (v.1)라고. 여기서 사도가 자신이 ‘갇힌 자’ 곧 ‘죄수의 몸’이 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이유는 ‘이방인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v.13)고 주장합니다.
지금 ‘감옥에 갇힌 자신의 상황’을 분명히 밝히고 영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이것이 성도들이 자신으로 인해 낙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임을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가 갇히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자신에게 계시된 비밀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비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자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런 상황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의 비밀일까요?” 그것은
첫째,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심’ 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음’ (1:4)을 1장에서 선언한 바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도 전에, 아니 창조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할 계획의 비밀을 가져 계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하나됨’ 입니다: 초대교회때까지 이어져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율법의 담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허무시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2:14~16). 그로 말미암아 성령께서는 이 둘이 하나로 그리스도의 몸 (교회)이 되었음을 계시하셨습니다 (3:5)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게 하심’ 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 놀라운 것은 교회를 통하여 장차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곧 ‘영광스러운 천사들’까지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배우게 된다고 사도는 계시합니다 (3:10).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통일되는 놀라운 비밀의 성취인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된다면, 낙심할 것이 아니라 놀라운 그리스도의 비밀을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성취해 나감으로써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사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복음의 비밀에 관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설명하는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면서 ‘진리에 대해 우리가 눈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는 <고린도서>에서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인지를 선포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1)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때 이 사람은 육신의 나이가 장성한 사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압니다. 육신의 나이가 아무리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여전히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는 아직 어리다 할찌라도 영적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성숙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아 나감으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은혜의 직분을 어떻게 넘치도록 감당할 수 있었는지를 <에베소서 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에 더욱 눈을 뜨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벗어버리고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더욱 깨닫고, 그 뜻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살펴본 것처럼 사도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계획하신 <구원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에베소를 시작하면서 1~2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3장을 시작하면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정하신 구원의 비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성경전체의 큰 그림에서 조명하고,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1절>입니다. 사도는 <엡. 3장>말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 (v.1)라고. 사도는 <3장>을 시작하면서 편지를 받는 <에베소 성도들>과 같은 ‘이방민족을 위하여 자신이 갇힌 자’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영문성경으로는 “the prisoner of Christ Jesus for the sake of you Gentiles…” 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의 일로) 갇힌 자’ (=예수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이렇게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행. 21:27~36), 그가 이렇게 죄수의 몸이 된 것은 바로 ‘이방인들을 위하여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갇힌 자’나 ‘로마에 갇힌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갇힌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목회자적인 관점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심케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13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v.13)
그런데 <1절>을 유심히 보면 <2절>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된 나 바울은 …” 이라고 말하고 나서, <2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문장과 뒷문장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은 <2~13절>을 ‘삽입절’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주제에서 벗어나 잠시 삽입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흐름에서 본다면<1절>에서 “나 바울은”이라고 <주어>를 말하고 나서 사도는 중간에 길게 이어지는 삽입절 (2~13절)을 지나서, 실제적으로 <15절>에서 “무릎을 꿇고 비노니” 라는 <동사>로 이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와 같이 사도가 주제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삽입절 (2~13절) 사용하는 것을 두고 문법적으로 매끄럽지 못하고 거친 문장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는 하나의 신학적 논문을 쓰고자 하거나, 수려하고 완벽한 문학작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목회자의 심정>으로 언제나 글을 쓰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사도 바울의 글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가 언제나 목회자의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로마서> <빌립보서> <고린도서> <골로새서> 그리고 <에베소서>등과 같이 그 모든 서신서 속에 깊고 위대한 신학적 사상을 담고 있다 할찌라도, 그의 글의 중심되는 특징은 언제나 목회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입니다.
그럼으로 서도가 비록 파격적으로 보이는 삽입절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진정한 이유는 목회자의 관점에서 성도들에게 분명한 한가지 점을 일깨워 주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1절>에서 그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감옥에 갇히게 된 자신으로 인해 그들 중에 더러는 낙심하고 더러는 시험에 드는 자도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이유로 성도들이 낙심하거나, 믿음의 시험에 빠지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도는 에베소 성도가 자신의 환난을 통해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으로 인하여 힘을 얻고 영광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도들이 자신이 로마의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 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랑스러워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오늘 본문 <2절>에서 <13절>까지에 걸쳐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그들의 영성을 책임진 목회자로서 자신의 여러가지 환난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고 영광스러워 하라고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 (v.13) 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도리어 자신의 일로 영광스러워 하라’고 도전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2절>말씀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 (v.2) 때문입니다. 여기서 먼저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잡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라고 사도가 말했을 때 ‘경륜’ (the dispensation)이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경륜’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오이코노미안”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이나 경영> 또는 <관리하는 실제적 행위> (v.9)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 경륜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는 ‘집안 관리를 맡은 직분’ (집사/stewardship)을 의미한다고 여러 신학자들 (Lindemann, Lincoln, Wood)은 해석합니다. 이것은 곧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직’을 감당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은혜의 직분’일까요? 그 이유는 그는 과거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격 없는 자였지만, 이런 그를 통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를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행. 9:15). 또한 이 직분이 은혜인 것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지 않은 구원에서 제외된 소망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죄와 사망의 암흑 가운데 살아가던 이방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택하신 사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 앞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자신과 이방 민족 모두에게 있어서 그 직분이 은혜가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운 예정으로서 사도를 통해 행하시고자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것을 한마디로 <‘비밀’ (mystery/secret)을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에베소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함께 나누었듯이 사도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비밀’의 의미는 모호하거나 신비함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이 비밀은 ‘과거에는 감추어지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밝히 드러남으로 깨닫게 된 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저히 깨닫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으로 깨닫게 하심으로 드러난 진리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밀의 핵심을 사도는 ‘그리스도의 비밀’ (the mystery of Christ)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심’ 입니다. 사도는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그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v.3~4) 여기서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된 그 비밀에 대해서 “먼저 간단히 기록(하였다)”고 언급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도가 먼저 기록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의 골로새서 (1:26~28; 2:2)나 고린도전서 (2:1,12)에서 드러낸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도가 오늘 에베소서 본문 앞의 1~2장에서 먼저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대다수의 학자들은 주석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셨다” (1:4~5)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자들을 ‘예수의 피로써 죄사함 받게 하심으로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 우리에게 거져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 (1:6~7)하게 하시고자 함인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하나됨’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에베소서에서 밝혀 나감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를 ‘교회’로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 초대교회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던 대표적인 두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데로,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율법으로 말미암아 굳게 가로막힌 장벽이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음을 사도는 2장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가 깨닫은 그리스도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v.5)라고. 그런데 이 비밀은 놀랍게도 다른 세대, 즉 구약의 시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주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 비밀의 뜻이 밝히 드러나듯이 그렇게 과거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장에서 사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2:14,1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고 있던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지으셔서 하나님과 화목 시키셨습니다 (2:13~16). 구약의 성도들에게 조차 감추어져 있던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몸으로 새사람을 입는 이 놀라운 비밀이 성취된 것입니다. 바로 주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교회의 영광이요, 은혜인지요!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게 하심’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여기까지 확장해 나가면서 <10절>에서 이렇게 놀랍게 진술합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v.1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통일되는 것’ (1:10)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계획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밀인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과 능력인 몸된 교회를 통해 밝혀지는 비밀인 것입니다 (1:22~23). 이것은 앞서도 살펴본 데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곧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몸, 교회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욱 나아갑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는 지금 하늘에 있는 영광스럽고 선한 천사들까지도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지혜와 은혜로운 구원의 비밀을 배우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질 놀라운 영광과 그리스도의 비밀의 성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도가 된 바울이 그가 받은 충만한 계시된 말씀을 통해 에베소 성도들 뿐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우리가 더욱 온전하게 깨닫아 나가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영적 각성을 통해 더 이상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를 도전함이 아닐까요!? 성도 여러분은 ‘고난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옴’ (빌. 1:12)을 이해하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벧전. 1:6~7) 그는 더 이상 우리 앞에 찾아오는 ‘시련의 불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시련이 찾아 올 때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련을 우리를 넘어트리고 실패케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게 우리를 연단 시켜서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도록 지켜주고 장성하게 자라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과 저에게 도전하는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더욱 깨닫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써 더 확신과 기쁨 가운데 고난과 싸워 승리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충만하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더욱 깨닫아 나감으로 점점 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 승리하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꾼
엡 3:2, 7, 롬 15:16 / 김명혁 목사
제가 강변교회에서 2008년 1월 13일 주일 은퇴한 다음 지난 9년 동안 매 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2017년 1월 15일 주일 여기 안산 예수마을 선교교회에 다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오학봉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2015년 2월 22일 주일 여기 처음으로 와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7월 12일 주일 여기 두 번째로 와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4월 24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아가페의 사랑과 에로스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7년 1월 15일 주일 여기 네 번째로 와서 “하나님의 일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학봉 목사님이 오늘 “하나님의 일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2,7).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우리들도 꼭 같은 감사의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평생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악들을 몸에 지니고 사는 죄인중의 괴수이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그리고 신앙의 선배님들의 가르침과 기도로 버림을 받지 않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평생토록 쓰임을 받으면서 살게 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 드리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꼭 같은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일곱 귀신 들렸던 그리고 일곱 가지 죄악의 늪에 빠졌던 인간 쓰레기와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고 막달라 마리아를 귀중한 일꾼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마 어느 날 길거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7,38). 누가복음 7장은 그저 “죄인인 한 여자” 라고 기록했는데 그 여자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고 성경 학자들은 해석을 합니다. 눅 8:2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346장).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그 여인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행위를 아주 귀중하게 보시면서 칭찬과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눅 7:44-50).
막달라 마리아는 그 후부터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쏟아내는 눈물의 여인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눈물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아주 귀중한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6-18).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 쓰레기 같은 자기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한 평생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예수님께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쏟아내는 눈물의 여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꾼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꾼들의 모습을 본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기도”에 전념함이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친히 기도에 전념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 22:44-46).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 120여명은 한 곳에 모여서 10일 동한 기도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쓰임 받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로 만들어져 갔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행 1:12-15). 오순절이 되었을 때 저들 위에 성령이 강림했고 저들은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고 주님의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나서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저들은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도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저희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행 4:31). 열두 사도들은 나중에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 6:2-4). “기도”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이 되는 법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기도에 전념했는데 특히 새벽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충성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에 전념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의 모습이 그 다음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로, “말씀”에 전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말씀”에 전념함이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고 친히 “말씀”에 전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 5:1,2).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4-47). 120여명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10일 동안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예루살렘에서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이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15).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제일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바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7-49).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흘 동안 기도하는데 전력했고 성령 강림 후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이 “회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41). 사도 베드로가 말씀 순종과 말씀 전파에 전념했을 때 120여명의 제자들뿐 아니라 거기 함께 모였던 삼천여 명의 이방인들이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모두 순종하며 모두 회개하고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거기 모였던 삼천여 명의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어서 자기들 나라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은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데 전혀 힘을 썼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사도들은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쳤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 수가 남자만 오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행 4:1-4). 사도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사도들뿐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기도와 함께 말씀 전파에 전념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도록 다짐하고 각오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2,4,7). 예루살렘교회에는 전도 프로그램도 시끄러운 음악도 없었습니다. 기도와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에 전력을 다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이 되는 법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말씀”에 전념했는데 특히 말씀 암송에 전념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계시록을 만 독했고 계시록을 모두 암송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의 모습이 그 다음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셋째로, “섬김”과 “봉사”에 전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섬김”과 “봉사”에 전념함이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인 “섬김”에 있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병자들과 죄인들을 어루만지시며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은 예수님을 본 받아 “섬김”과 “봉사”에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저들은 말로만 설교로만 “섬김”과 “봉사”를 강조하지 않고 자기들의 물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자기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이와 같은 “섬김”과 “봉사”의 사역이 계속해서 이루어진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섬김”과 “봉사”에 전념할 사람들 일곱 사람을 택해서 집사로 안수하기도 했습니다. “집사”란 말의 뜻은 “섬기는” 사람 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3-7). 교회가 “섬김”과 “봉사”에 전념할 때 부흥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전도 프로그램이 필요 없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섬김”과 “봉사”에 전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은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에 가서 13년 동안 선교와 목회 사역을 하면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헸지만 무엇보다 “섬김”과 “봉사”에 전념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제일 힘써야 할 것은 “섬김”과 “봉사”에 전념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의 모습이 그 다음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넷째로, “전도”과 “선교”에 전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전도”과 “서교”에 전념함이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이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곳 저 곳으로 다니시면서 전도하셨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마 1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여러 회당에서 전도 하시더라"(눅 4:43,44). “전도”과 “선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에게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지장 명령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와 같은 “전도”과 “선교”에 대한 지상명령은 이미 오래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야에게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도”과 “선교”의 사명을 지니고 “전도”과 “선교”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처음부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분명하게 증거하면서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14,23,24,32,38,39). 사도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은 옥에 갇히며 환난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1,42).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행 7:55-58).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행 8:3,4).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행 8:5,6).
사도들과 집사들과 성도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마지 못해서 갔지만 가이사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행 10:44-48). 일반 평신도들은 안디옥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세계선교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식을 듣고 선교 사역자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세계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2-24). 착한 사람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동역 목회를 했는데 안디옥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위임령”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이 마지막에 최선을 다해서 전력하여야 할 일은 땅끝까지 이르러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선교 위임령을 다시 읽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이 “선교 위임령”에 순종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셀라 선교사가 이 “선교 위임령”에 순종했습니다. 목숨을 바쳐가면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꾼들”로 쓰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꾼들이 전념 하여야 할 일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말씀”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섬김”과 “봉사”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전도”과 “선교”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은혜와 축복이 오학봉 목사님과 예수마을 선교교회 위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만국의 보배를 간직한 교회
엡 3:5-12 / 윤삼중 목사
교회는 거룩한 의인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한때 타락되고 부패되고 손상되었던 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교회내부는 완전하고 거룩한 곳이 아니라 아직도 시기와 질투, 분쟁과 아픔이 일어나기도 하며, 원망과 불평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미성숙한 부분이 들어나기도 하며, 인간의 썩은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내주하시기 때문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랑과 소망이 넘치는 천국입니다. 교회는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외적인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죄인이며,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사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지혜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녹슨 종탑과 초라한 간판을 건 아주 작은 개척교회라도 청와대나 미국의 백악관보다 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서로가 하나의 지체가 되었으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함께 지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교회에게 무엇을 부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이 교회에 자신의 각종 지혜와 능력과 권세를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장 큰 자랑입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사실을 모르고 교회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교회를 대단히 사랑하시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바라보며 이렇게 감격하게 하고 흥분하게 한 것이 무엇일까요? 창세전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바울을 이렇게 흥분케 한 것이 무엇인지 아래의 구절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엡1:9절에 보면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 엡3:9절에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경륜”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경륜이라는 단어는 바울서신에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륜”은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 인데 ‘경영, 운영, 관리’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단어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 영어의 economy(경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쉽게 표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운영하는 계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놀랍게 흥분시키고 감격시킨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의 운영계획입니다. 즉 이 경륜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감추어졌던 신비한 비밀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것이 발견하고 감격하게 하고, 흥분케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비밀”을 함축하여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성령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비밀을 뜻하는 것이고, 이런 복음 위에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창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교회” 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보게 되었고, 그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들에게만 감추어졌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마귀도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거룩한 교회가 세워지자 하늘의 천사들과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의 놀라움에 압도되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한 후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 각종 지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내는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는 무엇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1.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비밀을 말합니다. 이 비밀은 창세전에 감추인 것으로 선지자와 율법을 통해 말씀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으로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마13:35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도 없고, 천국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깨달아야만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보이며 열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표면적이고 문자적으로만 읽고 이해하고 있으며, 영의 눈이 먼 상태의 영적 소경이 되어 영의 말씀인 성경내용이 결코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곧 성경의 비밀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입니다. 즉 예수님은 창조주 아버지께서 아들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몸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시인해야만 하나님의 비밀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에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고 나의 영안이 열리게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경륜은 세상의 것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에 관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놀라운 계획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 뜻은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영원토록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그 영원한 계획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자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인 교회를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을 만방에 들어내는 구원의 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경륜을 만방에 알려주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즉 교회의 비밀을 전하기 위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지만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였는지를 온 세상에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세워 나라를 이루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떠난 죄인들, 연약한 부족한 자들을 불러서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며,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는 갑자기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처음부터 이 세상을 다스려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하여 이 악한 세상을 복음화시키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온 땅에 가득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기가 환난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누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동참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까? 6절에 보면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신분과 역할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한 지체가 된 것 자체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복음을 교회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알려주셨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통로입니다. 지상 교회가 없다면 더 이상 복음을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셨고,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천국의 상속자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마치 우리를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 칼빈은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이 땅의 교회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없다면 복음을 전할 수도 없고, 이 땅에 또 다른 생명을 낳을 수도 없고, 체계적으로 양육할 수도 없습니다.
2. 교회는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각종 지혜와 능력과 권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교회입니다. 10-11절에 보면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교회는 참으로 신비로운 곳인데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도록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게 해 주는 것을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라는 것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명령을 실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천사들도 복음에 관한 주님의 계시를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벧전1:12절 하반절을 보면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처럼 주의 복음을 맡은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는 귀한 사명을 지닌 것입니다. 즉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알게 하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은 매우 막중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지상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일들을 펼쳐 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어야 할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다고 이미 은혜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예정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실현 된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확고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교회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받은 교회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교회, 천국 문을 열기도 하며, 닫기도 하는 권세와 능력을 맡은 교회는 생명을 받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이같은 놀라운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같이 교만해지거나 사회와 불신자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도덕이 부패할 때에는 그러한 잘못을 과감히 지적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재물이 없고 학식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소외당하는 자들을 돌보고 아껴 주는 사랑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따뜻하면서도 정의에 대하여 강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복음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 사명을 맡은 참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던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 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 양 떠들어댔다. 또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이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고 불의와 거짓과 폭력을 행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중요하고, 교인들의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고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통치자들이 교회를 거울 삼아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교회는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자유롭게 하나님 앞, 즉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소의 더욱 구체적인 장소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율법 아래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제사장을 통해서였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한차례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자신의 대제사장 복장의 양 어깨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붙이고(출28:12), 가슴에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을 각각 붙이고 들어감으로써 상징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인 행태로 들어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새번역 성경에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1:12)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말은 그의 피로 세운 교회를 의미하며,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담대함을 얻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그 안에서’ 우리들을 영원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 시간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보내주신 이를 믿는 자마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히11:19-20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새롭고 산 길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하는데 그 육체는 장차 나타나게 될 교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근심하며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절)” 사람들은 진리는 하나지만 길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들이 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요, 그 곳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길은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통로로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길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천국이라고 할지라도 길이 없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구원의 길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I am the way.” 예수님은 현재 有一無二한 길이 되십니다. 공자님이나 석가는 하나님께로 이를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이 분들은 모두 길을 찾고자 애쓴 위대한 구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들이 나아가야 할 그 길 자체가 되십니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의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악의 길입니다. 악의 길은 허무한 길입니다(욥6:18). 어둠의 길이요, 죄의 길이요, 황폐케 되는 길이요, 사망의 길입니다.(사59:7, 잠14:12) 그러나 의의 길은 진리의 길이요, 평탄한 길입니다.(시23:3, 27:11). 생명의 길이요, 평강의 길입니다(잠2:19) 이사야 35:8절을 보면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했습니다. 이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많은 갈등하는데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냐? 라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진리의 길인가? 가다가 진리의 길이 아니면 어떡하지, 누가 내 청춘을 보상해 주지? 우리는 조금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생명의 길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믿고 따라가면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