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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맞은편 어디에선가 또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아악. 으아악.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숨 넘어가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
그 비명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어김없이 터져나오는 욕설과 둔탁한 타격음......
조금 전 또 한 무리의 시민들이 끌려오는 발소리가 들렸었다.
칠수가 있는 강의 실 문 앞을 지나, 안쪽의 여러 강의실 중 어느 하나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지금 저 소리는 필시 거기에서 터져나오고 있을 것이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칠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끔찍한 비명 소리조차 무감각해져버린 게 이미 오래 전이다.
공포도 면역이 되는 것인가. 마치 흐릿한 꿈 속에서처럼 전혀 현실감이 없다.
어젯밤 칠수가 이곳에 들어온 이후에도 시민들은 끊임없이 끌려들어왔다.
새벽 무렵, 이 강의실엔 더 이상 수용할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몇 놈이야?"
"108명입니다."
이 강의실에 수용된 인원을 중사 하나가 대위에게 그렇게 보고하는 소리를 칠수도 들었다.
한참 뒤에 알게 된 것인데, 일층 복도의 또 다른 강의실에는 칠수보다도 먼저 이미 꽤 많은 시민들이 끌려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하루 전인 20일 낮부터 끌려들어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늘 아침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잡혀왔는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강의실 두세 칸은 가득 차 있는 듯 싶다.
비명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미루어, 칠수는 그렇게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다.
의식이 자꾸만 가물가물해진다.
마치 모래밭에 파묻힌 것처럼 전신의 모든 신경과 관절과 세포들이 한꺼번에 해체되며 까무룩하게 가라않는 듯한 느낌.
진압봉으로 맞은 뒷머리에선 이젠 더 이상 피는 흘러내리지 않는 것 같다.
뭔가 커다란 돌덩이를 눌러 놓은 듯 무겁고 멍멍할 뿐.
그러다가도 엄청난 통증이 이따금씩 되살아나곤 했다.
그때마다 눈앞이 핑그르르 돌며 머리가 통째로 부서질 듯 욱씬거렸다.
앵 애앵. 또 쉬파리들이 머리 위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손톱만큼이나 큰 쉬파리떼가 어디선가 피냄새를 맡고 몰려와 사람들의 상처부위에 끈덕지게 들러붙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칠수는 고개를 흔들어 쫓아버릴 기력조차 없다.
바로 앞줄에 앉은 청년의 뒷머리에 핏물이 갱엿처럼 두텁게 응고되어 있는것이 눈에 들어온다.
토마토 빛깔로 부어오른 상처 주변엔 피딱지가 엉겨붙어 있고, 그 피딱지 위에 검은 쉬파리가 붙어 구물거리고 있다.
그런데도 청년은 탈진 상태에 빠진 채 졸고 있는 참이다.
흐릿하니 풀린 시선으로 칠수는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꿇어앉은 백여 명의 시민들. 대부분 웃통을 벗었거나 러닝 셔츠 차림이다.
둘 혹은 서너 명씩 한데 손목을 결박당한 사람들이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머리 위에 두 손을 깍지껴 붙인 채 콘크리트 바닥에 맨발로 꿇어앉아 있다.
한바탕 통닭구이 기합이 실시된 뒤 지금은 잠시 공수들도 잠잠해 있는 참이다.
도살장. 칠수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도살장의 풍경만 같다.
죽음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아니 그들 모두는 죽음, 그 한가운데에 갇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끌려온 뒤로 몇 시간이 흘렀는지 칠수는 가늠할 수가 없다.
새벽이 오는가 싶더니 아침, 그리고 지금은 오후인 듯싶다.
간밤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잠시도 그치지 않고 끔찍한 구타와 기합이 계속되었다.
작전이 끝났거나 혹은 경계 근무 교대를 하고 돌아올 때마다, 공수들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와 저마다 분풀이를 하고 돌아가곤 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아 돌리는 '원산폭격'
여러 명이 팔목을 줄줄이 묶인 채로 앞으로, 뒤로, 옆으로 정신없이 굴려다는 '통닭구이' '눈동자 고정하기' 등등.
그것이 끝나면, 이번엔 느닷없이 들이닥친 또 다른 공수들의 무자비한 구타가 자행되었다.
머리 뒤로 손을 올리지 않는다고, 팔이 부러진 사람까지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후려패기도 했다.
진압봉이나 소총 개머리판으로 닥치는 대로 두들겨패고, 의자를 집어던지고, 군홧발로 걷어차거나 짓밟아 뭉겟다.
철모를 벗어 머리통을 내려찍고, 참다못해 반항하는 사람들을 끌고 나가 벽 앞에 세운 뒤,
서너걸음 달려가 몸을 날려 이단옆차기로 가슴이며 복부를 가격하기도 했다.
그것은 이미 구타가 아니었다. 완전한 살인행위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짚단처럼 풀썩풀썩 허물어졌다.
의식을 잃었거나, 이미 반송장이 된 몸뚱이들을 공수들은 팔이나 다리를 잡아
강의실 바깥으로 개처럼 질질 끌고 나가곤 했다.
잠은커녕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칠수 역시 간밤에 끌려온 이후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셔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갈증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피를 많이 흘린 데다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합으로 땀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지만, 그들은 지금껏 꼭 두차례,
그것도 입에 대재마자 '하나, 둘, 셋'을 세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주전자 주둥이를 치워버렸다.
부상이 심해 피를 많이 흘린 경우 갈증 때문에 실신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기절한 사람은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가, 의식이 돌아오면 다시 끌려들어왔다.
갈증 때문에 소변기에 머리를 처박은 사내도 있었다. 한시간 전 쯤이었다.
처음엔 아예 화장실에 다녀오게 해주지도 않았다.
더러는 앉은 채 강의실 바닥에다가 똥오줌을 싸야 했다.
옷을 입은 채로 똥을 눈 사람은 그 때문에 또 한바탕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를 당했다.
그제서야 공수들은 한 시간 간격으로 열 명씩 끌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칠수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복도를 나서서 화장실까지의 짧은 거리를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칠수가 속한 조는 십여명이 가느다란 밧줄로 손목을 한데 묶인 채 절뚝걸이며 걸어가 용변을 보았다.
칠수의 조는 '폭도'들 중에서도 '차량 운전'을 하다 붙잡힌 극렬분자로 분류되어 따로 '특별 관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줌 줄기에 새빨갛게 피가 섞여 나오는 걸 보고도, 칠수는 놀랍다는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아예 오줌을 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이 대변을 보는 동안 그들은 화장실 바닥에 꿇어앉아 기다렸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소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관이 막혀 소변기 안에 고여 있는 오줌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그 사십대 사내는
공수부대원의 몽둥이에 초주검이 되더록 얻어맞았다. 그래도 사내는 용케 강의실로 돌아왔다.
"어쭈, 이 쌔끼덜 봐라! 조는 놈들이 있어?"
의자에 앉아 대검으로 손톱을 긁고 있던 하사가 고개를 비틀어 꼬며 말했다.
일순 모두가 바짝 긴장한다.
예외 없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앉아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은 금세 퍼뜩 몸을 사리며 목을 세웠다.
"이 썅놈의 빨갱이새끼들. 여가 호텔방인 줄 알어? 또 한번 정신차리게 해주까! 눈깔 고정시켯!"
하사가 빽 고함을 쳤다. 강의실 내, 백여개의 몸뚱이가 나무토막처럼 빳빳해진다.
칠수는 필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쳐들었다. 잠시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구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간신이 치켜뜬 채 칠수는 시선을 허공의 한 지점에 고정시키려고 애쓴다.
눈알이 금방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뒷목이 뻣뻣하게 경직되어온다.
"이제부터 눈깔이 옆으로 일 밀리라도 돌아가는 새끼는, 이 대검으로 머리가죽을 벗겨버릴 거야!
자 지금부터 눈동자 고정시킨다! 실시!"
어금니를 악문 채, 하사가 명령했다.
눈동자 고정시키기. 이미 수없이 반복되어온, 온갖 고통스런 기합 가운데 하나.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양쪽 엄지 발가락은 붙인 채 허리와 목을 바로 세울 것.
두 눈동자를 절대로 움직여선 안 된다. 몸을 꿈틀거려도 안 되고 고개를 숙이거나 신음 소리를 내어도 안 된다.
그렇게 통나무처럼 굳어 있노라면 이내 전신이 거의 자동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칠수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뜬다. 목이 마르다. 미치도록 목이 마르다.
벌써 몇 시간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입 안이 완전히 말라붙어서 나무토막으로 변한 혓바닥은 아예 움직일 수 조차 없다.
앞니가 부러져나간 자리는 통증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잇몸이며 입술이 퉁퉁 부어올라 마치 두툼한 헝겊 뭉치를 입에 물고 있는 것만 같다.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안 된다. 끌려나가면 안 된다. 살아야 해! 어떻게든. 여기서 이렇게 저놈들 손에 개죽음당할 수는 없어.'
칠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버틴다.
그 순간 하사의 손끝에서 대검이 뚝. 정지했다.
"너! 눈깔 돌렸어!"
"아, 아니요! 아니란께요오!"
칠수의 바로 앞 사내가 공포에 질려 와쳤다.
허리 뒤로 묶여진 두 팔을 마구 와들와들 떨어대는 삼심대 사내.
국민학생인 아들을 찾으려고 길에 나왔다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노라고 애원을 하던 사내다.
러닝 셔츠 등에 붉은 매직펜으로 '운전'이라는 글자가 휘갈겨져 있었다.
"이 새꺄! 아니기는!"
하사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사내의 허벅지에 대검을 푹, 쑤셔 박았다.
흡사 아궁이 속의 군고구마를 젓가락으로 쑤셔 보듯이 그렇게 태연하고도 무심한 동작.
으악, 악. 사내의 몸뚱이가 모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쭈? 이게! 죽을라고 쌕 쓰고 있어!"
"아, 아닙니다!"
하사가 또 한번 대검을 홱 쳐들자마자 사내는 거짓말처럼, 벌떡 상체를 세운다.
하사가 천천히 돌아서더니 의자에 가서 다시 앉았다. 사내의 등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음을 칠수는 보았다.
사내는 아까보다 더욱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끄윽-끅, 통증과 울음을 참느래 애쓰고 있다.
사내의 바지 허벅지께가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다. 한 순간 강의실 안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사가 하사에게 다가가더니, 하사를 밀어내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중사가 뭔가를 달라는 눈치를 하자, 하사가 제 허리에 찬 수통을 중사에게 건넨다.
중사가 수통을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이 술이라는 걸 칠수는 이미 알고 있다.
간밤부터 그들은 이따금 번갈아가며 그것을 홀짝였고, 그 중 몇은 얼굴과 눈에 역력히 취기가 올라 있다.
"쌔끼들아! 여기 주목! 이게 보이지?"
중사가 하사의 손에서 대검을 빼앗더니, 눈앞에 치켜들고 말했다.
중사의 충혈된 두 눈가에 야릇한 장난기가 떠오르는 걸 칠수는 얼핏 보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눈썹이 거의 없어 뵈는 사내.
"이게 그냥 보통 대검으로 보이냐? 웃기지 마.
이게 이래뵈도 월남에서 배트콩 수십 명의 내장을 긁어낸 대검이란 말이다.
콩까이 유방도 최소한 사십 개는 도려냈단 말씀야. 알간?
날마다 숯돌아 갈고 또 갈았기 땜에, 면도날보다 더 잘 든다 이 말씀야. 흐흐."
중사는 대검을 눈앞에서 장난스레 흔들며 문득 히죽이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험악한 표정을 하더니, 맨 앞줄의 청년 하나를 푹 찌를 듯, 칼끝으로 얼굴을 가리킨다.
"새까! 웃어? 너, 웃긴다 이거지?"
"아, 아닙니다. 주, 중사님 저는..."
청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중사는 다시 히죽이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하, 괜찮아 짜샤. 얼마나 잘 드는지 한번 시험해볼까?"
중사의 대검이 청년의 머리 위를 홱 스쳐 지나갔다.
순간 머리털이 붙은 채로 윗부분 살가죽이 벗겨졌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질렀을 뿐 청년은 놀랍게도 재빨리 상체를 수습해 앉는다.
칠수는 청년의 머리, 그 허연 속살이 이내 피로 흥건이 젖어 흐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아, 하느님. 저것도, 저놈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까'
칠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경련은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자리의 사내들 역시 고개를 처박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시 중심가 방향에서 다시금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내 건물 바깥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여러 대의 차량이 움직이는 소리, 병사들이 외치는 소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군화 소리......
잠시 후, 앞쪽 출입문이 덜커덩 열리며 서너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야, 여기 있는 인원 전부 차에 실어! 이 앞쪽 놈들은 따로 분류시키고 나머지도 전원 빠짐없이 포박해!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십분 내에 완료해!"
병사들이 사람들의 손목을 밧줄로 포박하기시작한다. 두명 혹은 세명씩 한데 묶였다.
공수들이 좌우에서 에워싸고 진압봉을 마구 휘두르며 사람들을 복도로 몰아내기 시작한다.
굴비 두름을 엮듯 한데 묶인 사람들. 앞사람들의 등에 이마를 붙인 채 허둥지둥 끌려나간다.
건물을 벗어나 화단 사이로 난 비탈길을 내려갔다. 아스팔트 차도에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다.
사방이 밀폐된 트럭 두 대와 덮개를 씌운 군용수송트럭 대여섯 대.
그리고 천여명이 넘는 공수부대 병력이 집결하느라 법석이다.
"이 새끼들부터 탑차에 태워! 특별 관리 대상자로 분류된 독종들이라구."
칠수 일행을 손가락질하며, 인솔해온 중사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칠수는다른 칠팔 명과 함께 맨 앞쪽 차량까지 끌려갔다.
사방이 철판으로 완전 밀폐된 트럭. 얼핏 보기엔 냉동 트럭과 흡사하다.
칠수는 그것이 군부대에서 병기 수송용 아니면 부식 수송용으로 쓰이는 차량일 거라고 짐작한다.
병사 하나가 탑차의 뒷문을 덜커덩, 열었다.
"올라타, 빨랑! 쌔끼들아!"
"꾸물대다간 골통 빠개질 줄 알아! 앞으로 나왓!"
병사들이 진압봉으로 등이며 어깨를 닥치는 대로 후려패며 고함을 질러댄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허둥지둥 기어오르려 애쓴다.
그러나 트럭 바닥이 가슴 높이에 닿을 정도로 지나치게 높았다.
병사들이 사방에서 진압봉으로 퍽퍽 등짝을 내갈기며 정신없이 몰아대기 시작한다.
굴러떨어진 사람의 목덜미를 걷어차고, 다리를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는다.
겁에 질려 목부터 집어넣고 버둥거리다가, 더러는 용케 기어오른다.
칠수는 뒷사람이 어깨를 받쳐주어서 겨우 올라탈 수 있었다.
이내 차 안이 가득 찼다. 발 디딜 틈도 없는데, 공수들은 계속 밀어넣는다.
"야, 안 들어가? 안쪽으로 더 들어가란 말야!"
"이 폭도새끼들아! 이래도 버티고 서있을래?"
병사 하나가 대검이 꽂힌 총을 움켜잡고는 차 안을 향해 마구 푹푹 찔러대기 시작했다.
맨 앞쪽에 서 있던 몇이 무릎과 종아리를 찔렸다.
으아, 아이고메, 그들은 서로 찔리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치며, 필사적으로 몸을 안으로 밀어붙인다.
그 바람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공수들은 다시 십여명이나 더 올려보냈다.
이윽고 좁은 트럭 안엔 무려 오륙십면이 빽빽히 들어찼다.
발디딜 틈은 커녕 발바단 한쪽만이라도 바닥에 붙이기 어려웠다. 목을 바로 세울 수도 없다.
마침내 쾅 하고 철문이 닫혔다. 순간 차 안은 캄캄한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양쪽 벽면 위쪽에 뚫린 손바닥만한 유리창에서 한줌 빛이 흘러들 뿐이다.
갑자기 덮쳐든 암흑 속에서 사람들은 일순 조용해졌다. 무덤 속에 갇혀버린 것만 같은 느낌.
불현듯 감당키 어려운 공포와 불안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신음소리, 숨소리, 고약한 악취, 피비린내...... 점점 숨이 막혀오기 시작한다.
금방이라도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열기 속에서, 누군가 겁먹은 소리로 헐떡거렸다.
"처,철수한다고 하든디, 어째서, 이렇게, 가만히 서 있다냐?"
"저놈들이 시방 어디로 우를 끌고 간다요?"
"아이고오, 우리는 이제 마지막인갑소. 저놈들이 우리를, 끌고 가서, 죽일 모양이여!"
"예? 누, 누가 그럽디까? 우리를 쥑인다고 그래라우?"
"서,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멋대로 쥑일 수가 있을랍디여?"
"시끄럽소! 니기미, 재숫대가리 없이 누가 그런 소리를 씨부렁대는 거여? 가뜩이나 조마조마해 죽겄는디!"
'그래, 그렇구나. 저놈들이 지금 우리들을 어디론가 끌고 가서 한꺼번에 총살을 시키려는게 틀림없어.'
그들은 눈앞이 캄캄해온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할까. 우리가 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아무려면......'
그렇게 자위하다가도, 그들은 아무래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돌아간다.
그놈들이 어디 인간이던가. 사람의 목숨을 파리만치도 여기지 않는 놈들.
아무도 보지 않는 으슥한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워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아, 이젠 정말 끝장이로구나. 이제야말로 죽게 되었구나......'
그러자 사람들은 더더욱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참을 수가 없다. 숨을쉴 수가 없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다. 돌연, 저마다 전신을 비틀며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으아아, 아이고, 사람죽네!"
"사람 살려! 문, 문좀 열어! 어무니이, 나 죽소!"
"야, 이 개새끼들아! 사람 숨맥혀 죽는다아!"
"문 열어! 문 좀 열어주란 말여!"
마친 듯 터져나오는 비명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칠수는 이를 악문다.
그러나 칠수 역시 벌써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칠수는 요행히도 차체 벽에 달린 손바닥만한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댄 채 처박혀 있었다.
칠수는 유리창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을 버틴다.
유리 저편으로 연못이 보인다. 물, 아아, 목이 말라 미칠 것만 같다.
죽을 때 죽더라도 물이라도 실컷 마시게 해준다면......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차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유리에 얼굴을 악착같이 갖다 붙인 채 필사적으로 버틴다.
트럭이 움직이자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은 그나마 비로소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기색이다.
한동안 그들은 차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차가 출발한 지 십여 분 쯤 되었을까.
적재칸의 앞쪽, 운전석 바로 뒷면과 붙어 있는 벽, 거기에 작은 문 같은게 달려 있다.
문이라기보다는 손수건 크기의, 아주 작은 쪽문.
아마 운전석에서 적재칸 내부를 들여다볼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어느 순간엔가 그 작은 철판 문짝이 슬그머니 열렸다.
"새끼들. 어디 맛 좀 봐라. 고소할 끼다. 히히히."
운전석 쪽에 병사들의 목소리와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갈쭉한 깡통 같은 것이 안으로 쑥 들어오더니,
깡통 안에 든 무엇인가를 탕탕 털어놓자마자 문짝이 재빨리 닫혔다.
"컥, 이,이게 뭐여!"
"와이고오, 나, 나죽네에!"
순간, 처절한 비명이 일제히 터져나왔다.
무심코 숨을 들이쉬다가 칠수는 컥컥거렸다.
목구멍이 찢어질 듯, 눈알이 튀어나올 듯, 눈앞이 캄캄해진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칠수는 퍼뜩 깨닫는다.
'아, 이건 최루탄이다. 페퍼 포그. 아니 생물학전에 사용하는 화학가스일지도 모른다.
놈들이 그걸 쏟아넣었구나. 이, 이럴수가. 이 밀폐된 공간에다가......
아악, 숨을, 숨을 쉴 수가 없다. 폐가, 심장이, 눈알이 터질 것만 같다.'
차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캑캑, 끄윽, 꺼어억, 큭, 으으, 어무니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람들은 미친 듯 사지를 바둥거린다.
개구리들. 사지를 뒤틀며 죽어가는 개구락지들.
쾅쾅쾅. 철판벽을 두들겨패고, 머리를 짓짷고, 펄쩍펄쩍 튀어오른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몸부림을 치다가 기절하기도 한다.
왝왝, 구토를 하는 사람. 선 채로 똥오줌을 죽죽 내갈기는 사람.
악귀처럼 몸부림을 치다가 옆사람의 얼굴이며 머리털을 손톱으로 마구 할퀴고 쥐어뜯는다.
코피가 터진다. 벌거지떼처럼 한데 뒤엉킨 채 너도나도 달아나려고 필사적으로 버둥거린다.
그러나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캄캄한 어둠 뿐.
사방은 철판으로 완벽하게 가로막힌 밀폐된 감옥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칠수의 발에 무엇인가 물크덩한 살덩이가 밟혔다.
누군가 쓰러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아, 사람이 죽어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퍼뜩 스친다.
그러나 칠수는 발을 뺄 수가 없다. 오히려 아차하면 자신까지 쓰러질 판이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한번 쓰러지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발에 짓밟히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칠수는 벽 쪽으로 몸을 붙혔다.
칠수는 창유리에 이마를 세차게 짓빻았다. 한번, 두번, 쨍.
유리가 깨어져나가며 이마에 유리 조각이 박했다.
칠수는 깨진 구멍에 허겁지겁 얼굴을 처박고 미친 듯 숨을 들이쉬었다.
이내 덜커덩 하고 트럭이 멎었다.
그 바람에 갸우뚱 흔들리며 칠수가 얼굴을 떼어내었다.
그 틈에 곁의 사내가 재빨리 얼굴을 구멍에 처박더니, 으억, 비명을 지르며 푹 주저앉는다.
그와 동시에 또 한번 무엇인가 창틀 안으로 쑥 들어온다. 대검이었다!
바깥에서 착검한 소총으로 마구 찍어대고 있는 것이다.
칼 끝은 아슬아슬하게 칠수의 뺨을 비켜가더니, 연신 푹푹 찌르며 들어온다.
칠수는 이젠 오히려 창틀 쪽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그 때 갑자기 눈앞에서 창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참 후에야 칠수는 밖에서 차량 덮개를 통째로 뒤집어씌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검에 얼굴이 찍힌 사내는 벽 쪽에 기댄 채 주저 앉아 있는 것 같다.
그 사내를 짓밟지 않으려고 칠수는 두 팔로 벽을 받치고 안간힘을 쓴다.
그 쪽창마저 닫혀버리자, 이제 차안은 완전한 암흑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암흑 속에서 이젠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사람들은 버둥거리고만 있을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문이 콰당탕 열리고, 지옥의 암흑 속으로 찬란한 빛이, 기적처럼, 한꺼번에 쏟아져들어왔다.
차 안에 두겹 세겹 덩어리로 뒤엉킨 사람들. 그 찬란한 세상 앞에서, 그들은 한 순간 미라처럼 일제히 눈이 멀어버렸다.
아, 지금까지 내가 악몽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더러는 얼핏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 찬란한 빛의 세계 저편으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 새끼들아!"
병사들이 착검한 소총을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댄다.
대검에 찔리지 않으려고 우왕좌왕하다가 사람들은 허둥지둥 차에서 뛰어내린다.
그들의 몰골은 하나같이 무덤 속에서 기어나오는 유령들 같다.
가스탄 때문에 대부분 코피가 터지고, 얼굴이며 목의 살갗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허물이 벗겨져나갔다.
칠수는 맨 마지막으로 절뚝이며 내려왔다. 그러나 차 안엔 아직 누군가 더 남아 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개의 몸뚱이. 그러나 이미 숨은 끊어진 듯 하다.
밀폐된 차 안에 질식했거나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었으리라.
아까 칠수 곁에서 대검에 얼굴을 찔린 바로 그 사내도 끼여 있다.
병사들이 시체를 질질 끌어내렸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차량에서도 두어 구의 시체들이 끌려 나오고 있었다.
"고개 들어!"
"새꺄! 빨랑빨랑 일어나란 말야!"
모두들 무릎을 꿇은 채 허둥거리며 간신히 몸을 곧추세웠다. 순간 그들은 경악했다.
바로 눈앞에 장갑차 한 대가 서있고, 주위엔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일제히 총구를 들이댄 채 에워싸고 있다.
장갑차 위에도 병사 하나가 기관총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다.
철컥철컥.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며 병사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친다.
"이 새끼덜.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죽여뻐렷!"
"야, 이 빨갱이새끼들아. 우리 대원들의 원수를 갚아야겠다.
여기서 총으로 갈기면 뒈질 놈들은 뒈지고, 살아 남는 놈만 살려주겠어."
모두의 낯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다.
아아, 이제야말로 죽는구나. 갑자기 여기저기서 통곡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아이고오. 어흐흐흐. 공포에 질린 채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벌써부터 머리를 땅바닥에 쳐박고 몸을 번데기처럼 웅크린 사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
"여보시요. 혹시 살아남거든 우리집에대가 연락 조까 해주시요. 양동교회 옆 골목 두번째 슬래브집이 우리집이요."
"아저씨, 나는 OO고등학교 일학년 김용구여라우. 내 이름 잊어불지 말고 우리 엄니한테 꼭 연락해주시요이."
"여보시게 젊은이. 나는 산수2동 사는 오일춘이라는 사람이오. 호,혹시 내가 어찌 되거든, 기억해뒀다가......"
칠수 앞에 있던, 이마가 반쯤 벗겨진 사십대 사내가 칠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말을 맺지 못하고 쳐다보는 사내의 두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코피가 엉겨붙어 있는 사내의 시체 같은 얼굴을 향해 칠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바로 그 순간 총송이 터져나왔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
고막을 발기발기 찢어내는 듯한, 어마어마한 총성.
으아아아아아! 사람들은 비명을 터뜨리며 두더쥐처럼 일제히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다.
그들은 저마다의 몸뚱이 어딘가에, 수십 수백 발의 총알이 날아와 푹,푹,푹 박히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공포였다.
요란한 총성이 멎었다.
그러고나자 소리가 들려왔다.
키득키득 웃어대는 병사들의 웃음소리.
"앞에총!"
장교의 구령이 들렸을 때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꿈. 반쯤 얼이 나가버린 사람들의 눈빛은 한동안 그렇게 꿈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그들을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네 줄로 세운 다음 다시 무릎을 꿇리고 원산 폭격 자세를 요구했다.
칠수는 머리를 거꾸로 쳐박은 채 재빨리 주변을 훔쳐본다.
저만치 땅바닥에 무언가가 거적때기에 덮인 채 길다랗게 눕혀져 있는 게 보인다.
병사 하나가 거적을 들치자 시체들이 드러났다. 칠팔 명쯤?
어쩌면 그 시체들 일부는 칠수네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 물 좀 주씨요!" 군인 아저씨, 제발!"
"야, 이 쌔끼들아! 조금 있으면 뒈질 놈들이 물은 마셔서 뭣해!"
그 때였다. 칠수 바로 앞에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발적적으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 전 칠수에게 자기 이름을 가르쳐주던, 반쯤 이마가 벗겨진 사십대 후반의 바로 그 사내다.
"이놈들아아아! 네놈들도 대한민국 군인이여어? 나도 너희같은 자식이 있고,
해병대 대위로 제대한 사람이여! 네놈들도 인간이냐아아!"
사내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고래고래 악을 쓴다.
공수들이 우르르 달겨들어 사내를 질질 끌어낸다.
사내는 끌려나가면서도 몸부림을 친다.
"이새끼! 죽을라고 환장했구먼!"
"그래! 죽을란다! 죽을라고 환장을 했다! 이 짐슴같은 놈들아! 쥑여라! 차라리 죽어불란다아!"
"오냐! 죽여주마! 이 개새끼야!"
병사 들이 사내의 양팔을 잡아 벌려주자, 또 다른 병사가 개머리판으로 사내의 머리를 퍽퍽퍽 내리갈겼다.
사내가 머리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축 늘어졌다.
"이새끼! 간다! 금방간다!"
"이씨팔놈들아!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공수부대가 뭔지 똑똑히 봐둬라!"
양쪽 팔을 붙잡고 있는 병사들이 소리를 질러댄다.
미친 듯 퍼붓던 발길질과 개머리판이 멎었다.
사내는 땅바닥에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사내의 두 다리만 무섭게 푸들푸들 떨고 있다.
그 기이한 경련은 이윽고 잦아들더니, 이따금씩 꿈틀꿈틀 움질일 뿐이다.
잠시 후 하내의 몸뚱이는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나가,
한 줄로 눕혀 놓은 시체들 곁에 버려졌다.
사내의 가슴패기에 번호판이 놓여지고, 사진병이 플래시를 한 번 터뜨리고 나자마자
거적때기가 사내의 모습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칠수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열을 지어 무릎꿇려 앉혀졌다.
창고 안엔 퀴퀴한 냄새기 가득 배어 있다.
잠시 후 십여 명의 병사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왓다.
저녁 식사를 하고 온 눈치다. 병사 몇이 종이 상자에 건빵을 담아 들고 오더니, 그것들을 나눠주기 시작한다.
"자, 이제부터 배식이다! 네놈들한테 줄 밥 같은 건 없다! 이 건빵도 감지덕지해라 짜식들아!"
병사가 건빵 봉지를 휙휙 던져주기 시작한다. 두 사람당 한봉지씩. 칠수도 봉지를 받아 옆의 사내와 나누었다.
벌써 하루를 꼬박 굶은 터라 허겁지겁 움켜집었지만, 칠수는 단 한개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개머리판으로 맞아 부러진 앞니 때문에 입 안이 잔뜩 부어올라 아예 입을 벌리기조차 어렵다.
무엇보다 갈증 때문에 이미 입 안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버린 상태다.
칠수는 끝내 먹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 마찬가지다.
"이봐, 학생. 여,여그다가 말여. 자네 오줌 조까 싸서 주,줄턴가?"
"오줌을 마실라고라우?"
"이래죽든 저래죽든 마, 마찬가지여. 얼릉 부탁하네이. 응?"
앞쪽에 앉은 중년 사내 하나가 옆의 고등학생에게 우는 시늉을 한다.
사내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다.
머리를 얻어맞아 출혈이 심한 눈치다. 사내는 신고 있던 제 구두 한짝을 벗어 들고 있다.
고등학생은 잠시 공수들의 동태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주저앉아 구두에 오줌을 눈다.
중년 사내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입 안에 털어넣는다.
그 모습에 칠수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목안이 컥 잠기며 눈물이 쏟아졌다.
다시 얼마쯤 지났을까. 병사들이 시체들을 창고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아까 바깥에 있던 시체들이다. 병사들은 창고 한쪽에 그것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다음 가마니로 덮어 놓았다.
아느 틈에 파리떼가 따라 들어와, 시체들의 콧구멍과 입, 상처 부위에 맹렬하게 들러붙고 있었다.
잠시 잠잠하다 싶더니, 병사들이 또다시 체벌을 시작했다.
"고개들어! 지금부터, 눈동자를 고정시킨다! 눈깔이 일 밀리라도 돌아가면,
그 즉시 여기 있는 놈들처럼 시체를 만들어뻐릴꺼야! 실시!"
눈동자 고정시키기. 일순간 창고 안 수백 개의 몸뚱아리가 통나무처럼 경직된다.
칠수는 눈앞이 자꾸만 흐려왔다. 몽롱해지려는 의식을 한사코 붙잡으려 애쓴다.
엄지발가락을 붙인 채 몸을 꼿꼿이 지탱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어보지만,
금방이라도 앞으로 쓰려질 것만 같다. 애앵, 어느새 쉬파리떼가 몰려와 아무데나 들러붙기 시작한다.
머리의 상처부위에 떼거리로 들러붙은 듯하다. 칠수는 무심코 머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았다.
"야! 너 이새꺄! 눈깔 돌아갔어!"
병사 하나가 눈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쥐고 있던 대검 끝을 턱 밑으로 쑥 들이밀며 소리쳤다.
"아, 아니어라우!"
칠수는 다급하게 외쳤다. 병사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기묘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병사는 칠수의 등 뒤로 돌아가더니, 손에 쥔 대검으로 칠수의 발가락을 세차게 내려쳤다.
아악. 칠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발가락이 한꺼번에 끊어져나가는 듯한 고통.
"새꺄, 어때. 이래도 사기칠래!"
병사가 또 한번 칼로 발가락을 탁, 내리친다.
칠수는 몸을 뒤틀면서도 입을 악물고 소리를 참는다.
"호, 이놈봐라. 독종이구만."
병사는 다시, 이번엔 칼날을 세워 발바닥을 탁,탁,탁 내리쳤다.
칠수의 발은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얌마, 이게 뭔 줄 아니? 이걸 보고 닭발 요리라고 하는거다. 알간? 흐흐."
사내가 웃음을 흘리며 칠수의 표정을 살핀다.
그 순간, 칠수는 심장이 펑, 하고 터지는 것만 같았다.
눈 앞에서 무엇인게 번적 파열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야아아! 이 개같은 놈들아! 차라리, 죽여! 죽여뿌러!"
칠수는 벌떡 일어나 미친 듯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엔 캄캄한 어둠뿐.
칠수는 죽고 싶었다.
오직 한가지, 죽고 싶을 뿐이었다.
"어! 이 썅노무시키가!"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이마에 거대한 바윗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칠수의 몸뚱이가 털썩 허물어졌다.
두 다리를 푸들푸들 떨어대고 있는 그 살덩이를 병사들이 질질 끌고 나갔다.
그들은 창고 한쪽에 눕혀놓은 시체들의 대열 맨 끝에,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병사 하나가 거적때기를 훌렁 뒤집어씌웠다. 칠수의 모습이 간단히 지워졌다.
임철우 [봄날]中 "5월 21일 16:40, 전남대학교, 광주교도소"
80년 5월, 광주의 그날을 다뤘던 문학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소름끼치게 읽었던 소설이예요. 임철우의 [봄날]
영화요. 만화요. 다큐멘터리요.
실제의 반에 반도 표현하지 못해낸거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정말 뛰어났다고 느꼈던 부분은
윗 내용같은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인 묘사도 그렇지만
대학생, 광주시민, 의사, 공수부대원, 경찰, 장교, 군의관, 기자 등등의
거의 모든 인물들의 시점에서 당시 5.18에 대해 풀어냈다는 점이 아닌가 싶어요.
책 읽으면서 눈물 같은건 안흘리는데
정말.. 이 작품은 펑펑 울어버렸어요
병동내에 있던 사람들 피가 부족해서
헌혈하러 온 여고생이 병원에서 헌혈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공수부대의 총에 맞아서 눈썹 위부터 머리가 다 날아가 버렸다는 고3 여고생..
20대 청년을 태웠다가 검문에 걸려서
차에서 끌려 내려와 시내 한복판에서
다신 이 개같은 손가락 못쓰게 해준다면서
공수부대에 의해 손가락이 으스러져버린 27살 택시기사..
금방 돌아온다던 남편을 마중나갔다가
저격수가 저격한 총에 맞고 머리가 날아가서
처참하게 숨을 거둔 만삭의 임산부..
꼭 한번 읽어보세요.
채 30년도 안된 근현대사.
그 속에 묻혀졌던 수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알아야 하는......
미친놈들....
ㅅㅂ새끼들...
왜 이런놈들이 아직도 살아있는지.. 니들끼리 싸움이나 하지말고 제발 국민들좀 생각해라
퍼가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