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본성: 족첸 수행의 핵심은 인간 존재의 본래적이고 순수한 상태인 "자연 본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가능성이나, 모든 존재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을 의미합니다.
세 가지 단계: 족첸 수행은 대개 세 가지 주요 단계로 나뉩니다:
기본 단계(궤도, Trekchö): 자연 본성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얻는 단계입니다. "수행자"는 인위적 생각이나 집착을 넘어서 본래의 순수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접근하려 합니다.
완성 단계(Tögal): 이 단계에서는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특정한 시각적, 내적인 실천을 통해 더 깊은 경험을 얻습니다. 이 과정에서 '빛'이나 '광명'의 비전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 두 단계를 통과하면 궁극적으로 "본래의 자아"나 "자유로움"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직접적 경험: 족첸의 핵심은 이론이나 철학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수행자는 "자연 본성"이나 "원초적 마음"을 직접 경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비이론적 성격: 족첸은 이론이나 개념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감각을 초월하는 직관적인 체험을 중시합니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이 본래부터 완전하며, 수행자는 그 완전성을 깨닫고 내면의 고요와 평화에 도달한다고 봅니다.
족첸과 다른 불교 수행법의 차이점:
선불교나 위빠사나와 같은 수행법은 주로 "명상"을 통한 내면의 정화와 집중을 강조하는 반면, 족첸은 "자연 상태"를 인식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즉, 불교의 다른 수행법은 '수행'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반면, 족첸은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수행을 지향합니다.
족첸의 실천적 의미
족첸은 단순히 교리나 철학을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수행을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족첸의 수행자는 자신이 본래 지닌 깨달음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경험하는 데 집중합니다.
자연 본성을 인식하는 데 있어 족첸은 "무위"(non-action)와 **"자연스럽고 비억지적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수행자는 아무 것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을 그냥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깨닫습니다.
-----------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족첸에 대한 설명입니다.
현대인의 복잡한 마음작용들(불안, 긴장, 들러붙고 밀어내고..)을 고려할 때, 좋은 방편으로 보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유용해서 그런지.. 서구권을 포함한 요즘 '영성(정신의 탐구)'분야에서 일반적으로 공유되는 접근입니다.
# "이게 대체 뭐냐"는 질문에는..저도 할 말이 없다는..
제가 봐도.. '일상의 평명에서의 살림살이'에는 유용성이 있으나..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슴미다..
첫댓글자연 본성 , 원초적 본성, 원래의 상태, 등등의 용어는 생노병사와 동어의 같은데요. 그건 곧 생노병사가 진리 또는 실상이므로 더 의심 또는 묻지 말고 편안히 수용하면 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생노병사를 잘 살펴보면 본래 생노병사가 없다는 뜻입니까? 헷갈립니다 .
물론 생로병사라는 이름 자체론 생노병사랄 거도 없지요.. 왜냐? 생은 생의 이름이요 그와 같이 노병사도 이름일 뿐이니 그와 같이 근래 화엄에서 유식의 이바구에서 봐도 식의 대상은 펑등하다..즉 식이란 코끼리 보면 코끼리요, 돼지를 보면 돼지니..그건 식이란 그 본성이 없는 까닭이니 ..생노병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 미친년 널 뛰듯 보는 것이 자연본성, 원초적 본성, 원래의 상태냔 말인지요?
좋은 지적입니다. 본글과 같은 종지?를 따르는 이 사대의 소위 (대중화된/타락한)스쿨의 가르침은 피할 수 없는 모순과 함께하는데요, '조작하지 마라'는 언명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구의 업력의 작동, 그리고 외부환경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들의 흐름에 거부하지 말라>가 됩니다. 이거는 동물처럼 살라는 얘기거든여. 맘 편하고 자유로운 동물이죠..ㄷㄷ 이런 귀결은 이 스쿨의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해로운 마음은 적당히 컨트롤하기', '어떤 외부환경에 대해서는 개선하기' 등 상식적인 가이드도 함께 제시됩니다. 이러면 또 이게 이미 '조작하라'가 되지 않습니까? ㅎㅎㅎ 결론은.. 결국 행자가 자기 마음대로 그 기준을 정하게 되는 거죠. 그 기준이 행자에게 내면화되면.. 순응과 통제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편안함에 이르게 됩니다. 이거는 괜찮은 모델로 보이는데.. 문제는... 결국 이 모델은 <받아들일 것과 바꿔나갈 것을 잘 구분하고, 각각 이행하라>는 전형적인 컨트롤러로 수렴하기 때문에.. 이 스쿨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ㄷㄷ
그리고.. 스스로 이 스쿨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컨트롤러 모델>로 살아갑니다. ㅎㅎㅎ 자각과 이성, 윤리가 함께하는 인간에게 <조작하지 않음>이란게 애당초 가능하지 않잖아요 ㅎㅎ 아무튼 이 스쿨의 '고수'들은 스스로가 '무위' '조작하지 않음'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새로 투입된 뉴비들은 진짜 그런 간지나는 게 있나보다.. 하고 끌려들어가고.. 초반엔 이게 좀 아구가 안 맞는 갑다 싶다가.. 여차여차 갈등속에 헤매다가 결국 선배들의 유산을 이어받고(=스스로를 세뇌해서) .. 이런 흐름들이 있죠..
아, 적고보니.. 혼자 딴소리를 했네여.. 이 스쿨의 가르침은.. 대개, 생노병사가 본래 없다 / 생노병사를 갖고 지지고볶고 하는 것은 생노병사를 실재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 생노병사를 수용한다....는 언명을 포함합니다.(말인지 방구인지는 저도 모르겠음다...) 하지만.. 이들 역시 아프면 병원에가고..트럭이 돌진하면 피하고.. 하니깐.. 병과 죽음을 피하려는 마음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슴다..ㅡ..ㅡ;;
요즘 이쪽 주제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법무아님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분들이 우리 까페에 많으신 거 같구요. 까페가 활성화되어 좋은 거겠죠? 네...
===
추상적으로 언급만 하고 지나가던 이야기를 조금만 적어봅시다. 이런 이야기는... 글쎄요... 제약이 좀 있어서요. 어쨌든 아는게 한계가 있고, 말을 많이 하니까요. 군데 군데 흘리고 다니긴 했어요. 흘린 거를 보고, 스스로 아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죠?
(특히 유목민에게) '신'은 황야에서 발견되거든요. 시련 즉 열기 속에서 발견되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전 언급했듯, 부처님 당대의 수행자들 절대 다수가 '열'을 탐닉합니다. 열과 시련인 무병에 착안해, 자연적 샤만이 되려고... (자연적) 브라흐만 계급이 되려고 말이죠. 바라문이 되려고 한 거지... 과학을 떠나서, 고대인에게 '열'은요. '빛'과 다른게 아닙니다. 빛나는 것은 열기가 있기 마련이고, 열기가 있는 것은 빛이 나기 마련이니까...
또한 최근에, 특히 삼매기법은 지혜이자 사실의 체계이며 하나의 스쿨을 상징한다는 취지도 적구요, 불교는 '스쿨들의 스쿨' 즉 '메타스쿨'이라고 언급한 바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대에, 쿤달리니 스쿨들 중 하나가 있었어요. 쿤달리니는 빛과 열인데, 그쪽에서는 필요성에 의해 '열'에 아주 강력하게 초점을 맞춰요. 그런데 그 쿤달리니 스쿨의 스승이 "나 함 다녀온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갑자기 부처님 제자가 되서 돌아왔어...
스승이 부처님 제자가 되셨다... 이러면 자동적으로다가 그 제자들도 거의 다 부처님 제자가 되요. 스승 없이 스쿨이 없거든... 부처님 제자가 안되려면, 스쿨을 떠나야데...그럼 뭐 먹고 사냐고... 이처럼 어떤 스쿨에 스승이었는데, 부처님 제자가 됐다... 그래서 제자도 자연뽕으로 부처님 제자가 됐다. 그런데 그 스승이 삼매로 빵구 좀 끼고 그런 분이면, 저절로 '장로'입니다. 초기불교의 장로 중 그런 분들이 제법 많아요.
삼매로 한가닥 하는데, 그냥 승복했겠어요. 자기 체험에 비춰,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했겠지...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냐... "너 나에게 승복했어? 그러면 기존에 하던 거 다 버리고, 내가 가르쳐 주는 거만 해!"라고 말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법의 유용성을 긍정해주시는 분이거든요.
"너거 기법으로 삼매에 들수 있고, 삼매에 드는데 그 기법 대로 가르쳐주는 거는 유용해. 단지 그거를 추종하지 말고, 속박되지 말고, 니가 내 가르침을 이해한 바 대로 바르게 알면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위와 같이, 불교는 태생이 메타스쿨이예요... 부처님이 설법하신 '극히 초창기의 빼어난 제자'들은 사실상 거의 예외 없이 '스쿨의 스승'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설마 아무런 토대도 없이, 근본도 없이, 극초창기 불자들이 부처님 말 몇마디 듣고 곧바로 뭔가 성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콩을 심어야 콩이 나지, 심지도 않았는데 콩이 나는 일은 없으니까요.
어쨌든 그래서 스승님이 스쿨로 돌아와서요. 기법을 변경하는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재정립합니다. 위에서 기법이 지혜고 사실의 체계라고 했잖아요? 그런 경우,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재정립된 지혜이자 사실의 체계... 이걸 뭐라고 부르죠? 그래요. [경]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그 기법을 직접 가르치지 않으셨어도 상관 없어요. 그런 거는, 위에 언급된 부처님 말씀처럼, 중요한게 아니예요. 기법의 세부사항을 다 긍정하셨잖아...부처님께서 인가하셨잖요.
그렇게 해서 특정 삼매 전승 스쿨마다 [경]이 성립합니다. 이게 대승비불설과 관련 있는 논점인데, 여기서는 생략하구요. 사실 이 정도면 이미 다 말한 거지 뭐... 과거 언급한 바도 있고, 아는 것도 별로 엄는데 너무 긴 세월 넷에서 노니까 말 안한게 없어요.
그 스쿨의 쿤달리니 기법이 뭐였나... 이 쿤달리니 류는요. 기본적으로 라마누자의 베단따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마누자 베단따는 한발 더 나아가 신앙을 요소로 긍정하여 대중성을 확보한 거구요. 그래서 샹카라의 베단따도 고대 인도에서 밀려버리죠... 대중성, 이게 생명력에서는 참 중요하거든... 스쿨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래에서는 이야기에 등장시킨 스쿨 기법으로 한정해 적습다.
(빛이자) 열인 쿤달리니는,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즉 쿤달리니가 지혜입니다. 행자가 기법의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복종시켜서 쿤달리니가 알려진다면, 비로소 지혜가 직접 알려진 겁니다. 그 전에 공부해서 이해하고 그랬던 거는 지혜가 아니거든요. 오직 쿤달리니만 지혜입니다. 지혜는 스스로의 길을 알아요.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듯이, 지혜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갑니다. 즉 작위적인 무언가를 하면 안됩니다.
그 어떤 작위적인 것도 장애일 뿐입니다. 지혜가 스르로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태어난 곳에 도달해요.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것이 이미 자연, 거대한 쿤달리니, 마하 쿤달리니였단 말입니다. 그러한 지혜가 뭡니까? 실재이자, 마음이며, 지극한 행복입니다. 익숙한 말이죠?
우리가 기법들은 암시를 많이 사용해요. 실제로는 행자의 편의를 위해, 기법에는 각종 암시가 들어있어요. 애초에 기법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그래서 기법은 의도 즉 행위의 체계이기도 해요. 기법이, '쿤달리니의 길' 즉 지혜 곧 쿤달리니고... 여기서 제가 과거에 자주 했던 다음의 말이 생각나는 분도 있을지 몰라요. [경]이 부처님이다...
자기의 스쿨로 돌아간 스승들이, 부처님의 협찬을 받아 자기 스쿨의 이론 구성을 재정립함에 그 이론 구성이 다 같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부처님께서 협찬하셨기에, 당연히 모양은 달라보여도 같은 맛일 겁니다. 쿤달리니조차 공이라 했을 수도 있고, 쿤달리니가 깨달음의 본성이라 했을 수도 있고, 쿤달리니는 그릇된 최초의 인식이라고 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부터는 그들이 빚어낸 전설입니다.
스쿨에서 뛰쳐나와서요, 대중적으로다가 한번 성공시켜볼라고, 뭐 나쁜 뜻만은 아니겠지만, 여하간 그래가지고서는 준비도 안된 사람들에게 준비된 지식을 전하고... 그렇게 세월이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누더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말이 말을 만드는 상황... 자기도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뜻을 전하고, 그렇게 모호한 뜻이 더욱 섞이고 섞여서 이제 더이상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지경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요. 중심을 세워야 하는데요. 중심이라는게, 샤만들이 섬기는 신이 있고 부리는 신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신의 위계가 만들어진 건데요. 샤만이 섬기는 신은, 샤만의 중심이고 샤만의 보호자입니다. 무언가를 할 때에는요. 그 무언가에서 끝장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삼매 전승쪽에서는 그래요. 그쪽에서 끝장을 몬볼 것 같으면, 그쪽은 때려치우고 새로 배워야 합니다. 다른 쪽도 정 알고 싶으면, 그쪽에서 끝장을 보고 다른 쪽도 해보던가... 부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중심과 보호자가 없다... 이거는요. 삼매쪽에서는요. 딴에는 수행한답시고 수행을 하는게 오히려 해롭습니다.
어쨌든 기법에서는 입문과정, 쿤달리니를 심상화하는 과정이 있구요. 계행부터 시작해서, 지식 그리고 필요한 조형물의 관상 등등요... 그런 거를 '년' 단위로 합니다. 통제된 생활에서요. 그렇게 해서 쿤달리니가 심상화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지혜의 길 그러니까 삼매수행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지혜와 늘 함께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거를 저는 의지처라고 곧잘 말하구요, 중심이라고 말할 때도 있구요.
위와 같은 과정을 수행한 이들에게는요. 그게 아주 구체적 현상이고, 아주 구체적 뜻을 가집니다. 여기서 뜻이란 쿤달리니지, 언어적 지식이나 관상으로 발생하는 것은 뜻으로 이끄는 것이구요. 행위가 쌓였기에 그 뜻은 힘을 갖추고 있구요. 그런데 위와 같은 과정을 모두 생략하면요. 그야말로 허무한 거 아니겠습니까? 공염불이죠... 그것을 쿤달리니라 이름하든, 본성이라 이름하든...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어요?
좋은 말이기도 하니까, 나름의 유용성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거는 이미 해당 기법에서 말한 쿤달리니나 본성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그거 말고도 좋은 말은 찾으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사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뜻을 모르는 그거를 가져다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홍보? 자본주의에서는 마케팅이 중요하니까, 좀 슬로건이 되고 뭐 여하간 떠다니게 만들고 그러는데요. 모르겠어요... 뭐... 세상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작위를 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길을 가게 한다"는 거는, 쿤달리니가 '뜻'일 때에나 가능한 말이구요. 본성이라고 말하든, 마음의 빛이라 말하든, 뭐라고 말하든 간에요. 그런데 팩트는요. 행자가 알든 모르든, 암시로 다 안배했습니다. 중심이 선 사람은 그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겁니다. 지나치게 중심을 의식하면 오히려 삑살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흔들리면 중심이 굳건하지 몬하다고 알고, 더 굳건한 중심을 세워야 하는 겁니다.
위에 아주 상식적인 내용을 적었지만, 법무아님이 개념적 공? 그 본글에서 인용한 두개의 글에서 다룬 취지 정도는 다 나오는 것 같은데요.
첫댓글 자연 본성 , 원초적 본성, 원래의 상태, 등등의 용어는 생노병사와 동어의 같은데요. 그건 곧 생노병사가 진리 또는 실상이므로 더 의심 또는 묻지 말고 편안히 수용하면 된다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생노병사를 잘 살펴보면 본래 생노병사가 없다는 뜻입니까? 헷갈립니다 .
물론 생로병사라는 이름 자체론 생노병사랄 거도 없지요.. 왜냐? 생은 생의
이름이요 그와 같이 노병사도 이름일 뿐이니 그와 같이 근래 화엄에서 유식의 이바구에서 봐도 식의 대상은 펑등하다..즉 식이란 코끼리 보면 코끼리요, 돼지를 보면 돼지니..그건 식이란 그 본성이 없는 까닭이니 ..생노병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니 미친년 널 뛰듯 보는 것이 자연본성, 원초적 본성, 원래의 상태냔 말인지요?
좋은 지적입니다. 본글과 같은 종지?를 따르는 이 사대의 소위 (대중화된/타락한)스쿨의 가르침은 피할 수 없는 모순과 함께하는데요, '조작하지 마라'는 언명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구의 업력의 작동, 그리고 외부환경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벤트들의 흐름에 거부하지 말라>가 됩니다. 이거는 동물처럼 살라는 얘기거든여. 맘 편하고 자유로운 동물이죠..ㄷㄷ 이런 귀결은 이 스쿨의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해로운 마음은 적당히 컨트롤하기', '어떤 외부환경에 대해서는 개선하기' 등 상식적인 가이드도 함께 제시됩니다. 이러면 또 이게 이미 '조작하라'가 되지 않습니까? ㅎㅎㅎ 결론은.. 결국 행자가 자기 마음대로 그 기준을 정하게 되는 거죠. 그 기준이 행자에게 내면화되면.. 순응과 통제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고.. 편안함에 이르게 됩니다. 이거는 괜찮은 모델로 보이는데.. 문제는... 결국 이 모델은 <받아들일 것과 바꿔나갈 것을 잘 구분하고, 각각 이행하라>는 전형적인 컨트롤러로 수렴하기 때문에.. 이 스쿨의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입니다. ㄷㄷ
그리고.. 스스로 이 스쿨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컨트롤러 모델>로 살아갑니다. ㅎㅎㅎ 자각과 이성, 윤리가 함께하는 인간에게 <조작하지 않음>이란게 애당초 가능하지 않잖아요 ㅎㅎ
아무튼 이 스쿨의 '고수'들은 스스로가 '무위' '조작하지 않음'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새로 투입된 뉴비들은 진짜 그런 간지나는 게 있나보다.. 하고 끌려들어가고.. 초반엔 이게 좀 아구가 안 맞는 갑다 싶다가.. 여차여차 갈등속에 헤매다가 결국 선배들의 유산을 이어받고(=스스로를 세뇌해서) .. 이런 흐름들이 있죠..
아, 적고보니.. 혼자 딴소리를 했네여.. 이 스쿨의 가르침은.. 대개, 생노병사가 본래 없다 / 생노병사를 갖고 지지고볶고 하는 것은 생노병사를 실재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 생노병사를 수용한다....는 언명을 포함합니다.(말인지 방구인지는 저도 모르겠음다...) 하지만.. 이들 역시 아프면 병원에가고..트럭이 돌진하면 피하고.. 하니깐.. 병과 죽음을 피하려는 마음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슴다..ㅡ..ㅡ;;
요즘 이쪽 주제가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어떤 의미에서 법무아님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 분들이 우리 까페에 많으신 거 같구요. 까페가 활성화되어 좋은 거겠죠? 네...
===
추상적으로 언급만 하고 지나가던 이야기를 조금만 적어봅시다. 이런 이야기는... 글쎄요... 제약이 좀 있어서요.
어쨌든 아는게 한계가 있고, 말을 많이 하니까요. 군데 군데 흘리고 다니긴 했어요. 흘린 거를 보고, 스스로 아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죠?
(특히 유목민에게) '신'은 황야에서 발견되거든요. 시련 즉 열기 속에서 발견되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전 언급했듯, 부처님 당대의 수행자들 절대 다수가 '열'을 탐닉합니다. 열과 시련인 무병에 착안해, 자연적 샤만이 되려고... (자연적) 브라흐만 계급이 되려고 말이죠. 바라문이 되려고 한 거지...
과학을 떠나서, 고대인에게 '열'은요. '빛'과 다른게 아닙니다. 빛나는 것은 열기가 있기 마련이고, 열기가 있는 것은 빛이 나기 마련이니까...
또한 최근에, 특히 삼매기법은 지혜이자 사실의 체계이며 하나의 스쿨을 상징한다는 취지도 적구요, 불교는 '스쿨들의 스쿨' 즉 '메타스쿨'이라고 언급한 바도 있습니다.
===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적습니다.
부처님 당대에, 쿤달리니 스쿨들 중 하나가 있었어요. 쿤달리니는 빛과 열인데, 그쪽에서는 필요성에 의해 '열'에 아주 강력하게 초점을 맞춰요.
그런데 그 쿤달리니 스쿨의 스승이 "나 함 다녀온다"고 말하고 나갔다가, 갑자기 부처님 제자가 되서 돌아왔어...
스승이 부처님 제자가 되셨다... 이러면 자동적으로다가 그 제자들도 거의 다 부처님 제자가 되요. 스승 없이 스쿨이 없거든... 부처님 제자가 안되려면, 스쿨을 떠나야데...그럼 뭐 먹고 사냐고...
이처럼 어떤 스쿨에 스승이었는데, 부처님 제자가 됐다... 그래서 제자도 자연뽕으로 부처님 제자가 됐다. 그런데 그 스승이 삼매로 빵구 좀 끼고 그런 분이면, 저절로 '장로'입니다. 초기불교의 장로 중 그런 분들이 제법 많아요.
삼매로 한가닥 하는데, 그냥 승복했겠어요. 자기 체험에 비춰,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했겠지...
그런데 부처님은 어떤 분이시냐... "너 나에게 승복했어? 그러면 기존에 하던 거 다 버리고, 내가 가르쳐 주는 거만 해!"라고 말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법의 유용성을 긍정해주시는 분이거든요.
"너거 기법으로 삼매에 들수 있고, 삼매에 드는데 그 기법 대로 가르쳐주는 거는 유용해. 단지 그거를 추종하지 말고, 속박되지 말고, 니가 내 가르침을 이해한 바 대로 바르게 알면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위와 같이, 불교는 태생이 메타스쿨이예요... 부처님이 설법하신 '극히 초창기의 빼어난 제자'들은 사실상 거의 예외 없이 '스쿨의 스승'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설마 아무런 토대도 없이, 근본도 없이, 극초창기 불자들이 부처님 말 몇마디 듣고 곧바로 뭔가 성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죠? 콩을 심어야 콩이 나지, 심지도 않았는데 콩이 나는 일은 없으니까요.
어쨌든 그래서 스승님이 스쿨로 돌아와서요. 기법을 변경하는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재정립합니다.
위에서 기법이 지혜고 사실의 체계라고 했잖아요? 그런 경우,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재정립된 지혜이자 사실의 체계... 이걸 뭐라고 부르죠? 그래요. [경]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그 기법을 직접 가르치지 않으셨어도 상관 없어요. 그런 거는, 위에 언급된 부처님 말씀처럼, 중요한게 아니예요. 기법의 세부사항을 다 긍정하셨잖아...부처님께서 인가하셨잖요.
그렇게 해서 특정 삼매 전승 스쿨마다 [경]이 성립합니다. 이게 대승비불설과 관련 있는 논점인데, 여기서는 생략하구요. 사실 이 정도면 이미 다 말한 거지 뭐... 과거 언급한 바도 있고, 아는 것도 별로 엄는데 너무 긴 세월 넷에서 노니까 말 안한게 없어요.
그 스쿨의 쿤달리니 기법이 뭐였나... 이 쿤달리니 류는요. 기본적으로 라마누자의 베단따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마누자 베단따는 한발 더 나아가 신앙을 요소로 긍정하여 대중성을 확보한 거구요. 그래서 샹카라의 베단따도 고대 인도에서 밀려버리죠... 대중성, 이게 생명력에서는 참 중요하거든...
스쿨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아래에서는 이야기에 등장시킨 스쿨 기법으로 한정해 적습다.
(빛이자) 열인 쿤달리니는,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즉 쿤달리니가 지혜입니다. 행자가 기법의 의도에 따라 스스로를 복종시켜서 쿤달리니가 알려진다면, 비로소 지혜가 직접 알려진 겁니다. 그 전에 공부해서 이해하고 그랬던 거는 지혜가 아니거든요. 오직 쿤달리니만 지혜입니다.
지혜는 스스로의 길을 알아요.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가듯이, 지혜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갑니다. 즉 작위적인 무언가를 하면 안됩니다.
그 어떤 작위적인 것도 장애일 뿐입니다. 지혜가 스르로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태어난 곳에 도달해요.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것이 이미 자연, 거대한 쿤달리니, 마하 쿤달리니였단 말입니다.
그러한 지혜가 뭡니까? 실재이자, 마음이며, 지극한 행복입니다. 익숙한 말이죠?
우리가 기법들은 암시를 많이 사용해요. 실제로는 행자의 편의를 위해, 기법에는 각종 암시가 들어있어요. 애초에 기법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거든요. 그래서 기법은 의도 즉 행위의 체계이기도 해요. 기법이, '쿤달리니의 길' 즉 지혜 곧 쿤달리니고...
여기서 제가 과거에 자주 했던 다음의 말이 생각나는 분도 있을지 몰라요. [경]이 부처님이다...
자기의 스쿨로 돌아간 스승들이, 부처님의 협찬을 받아 자기 스쿨의 이론 구성을 재정립함에 그 이론 구성이 다 같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부처님께서 협찬하셨기에, 당연히 모양은 달라보여도 같은 맛일 겁니다.
쿤달리니조차 공이라 했을 수도 있고, 쿤달리니가 깨달음의 본성이라 했을 수도 있고, 쿤달리니는 그릇된 최초의 인식이라고 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부터는 그들이 빚어낸 전설입니다.
===
전설의 타락, 전승의 몰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스쿨에서 뛰쳐나와서요, 대중적으로다가 한번 성공시켜볼라고, 뭐 나쁜 뜻만은 아니겠지만, 여하간 그래가지고서는 준비도 안된 사람들에게 준비된 지식을 전하고... 그렇게 세월이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누더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말이 말을 만드는 상황... 자기도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는 이들이 뜻을 전하고, 그렇게 모호한 뜻이 더욱 섞이고 섞여서 이제 더이상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기 어려운 지경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요. 중심을 세워야 하는데요. 중심이라는게, 샤만들이 섬기는 신이 있고 부리는 신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신의 위계가 만들어진 건데요. 샤만이 섬기는 신은, 샤만의 중심이고 샤만의 보호자입니다.
무언가를 할 때에는요. 그 무언가에서 끝장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삼매 전승쪽에서는 그래요. 그쪽에서 끝장을 몬볼 것 같으면, 그쪽은 때려치우고 새로 배워야 합니다. 다른 쪽도 정 알고 싶으면, 그쪽에서 끝장을 보고 다른 쪽도 해보던가... 부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중심과 보호자가 없다... 이거는요. 삼매쪽에서는요. 딴에는 수행한답시고 수행을 하는게 오히려 해롭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점을 구체적으로 풀어주시니깐 확 와닿습니다. 복잡다단한 컨텍스트와 함께하던 텍스트가, 텍스트 홀로 존재하게 될 때 이미 도마위의 생선 신세가 된 거네요..ㄷㄷ
===
위에 언급한 쿤달리니가 위 본글의 내용과 부합하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불교에서는 쿤달리니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론 구성을 다르게 할 수도 있고 그래요.
어쨌든 기법에서는 입문과정, 쿤달리니를 심상화하는 과정이 있구요. 계행부터 시작해서, 지식 그리고 필요한 조형물의 관상 등등요... 그런 거를 '년' 단위로 합니다. 통제된 생활에서요.
그렇게 해서 쿤달리니가 심상화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지혜의 길 그러니까 삼매수행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지혜와 늘 함께 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런 거를 저는 의지처라고 곧잘 말하구요, 중심이라고 말할 때도 있구요.
위와 같은 과정을 수행한 이들에게는요. 그게 아주 구체적 현상이고, 아주 구체적 뜻을 가집니다. 여기서 뜻이란 쿤달리니지, 언어적 지식이나 관상으로 발생하는 것은 뜻으로 이끄는 것이구요. 행위가 쌓였기에 그 뜻은 힘을 갖추고 있구요.
그런데 위와 같은 과정을 모두 생략하면요. 그야말로 허무한 거 아니겠습니까? 공염불이죠... 그것을 쿤달리니라 이름하든, 본성이라 이름하든...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어요?
한술 더 떠서요. 공염불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시킨다... 뭐...
좋은 말이기도 하니까, 나름의 유용성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거는 이미 해당 기법에서 말한 쿤달리니나 본성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잖아요. 게다가 그거 말고도 좋은 말은 찾으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사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뜻을 모르는 그거를 가져다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홍보? 자본주의에서는 마케팅이 중요하니까, 좀 슬로건이 되고 뭐 여하간 떠다니게 만들고 그러는데요. 모르겠어요... 뭐... 세상이 그런데 어쩌겠어요.
"작위를 가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길을 가게 한다"는 거는, 쿤달리니가 '뜻'일 때에나 가능한 말이구요. 본성이라고 말하든, 마음의 빛이라 말하든, 뭐라고 말하든 간에요. 그런데 팩트는요. 행자가 알든 모르든, 암시로 다 안배했습니다.
중심이 선 사람은 그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겁니다. 지나치게 중심을 의식하면 오히려 삑살이가 나지 않겠습니까? 흔들리면 중심이 굳건하지 몬하다고 알고, 더 굳건한 중심을 세워야 하는 겁니다.
위에 아주 상식적인 내용을 적었지만, 법무아님이 개념적 공? 그 본글에서 인용한 두개의 글에서 다룬 취지 정도는 다 나오는 것 같은데요.
(제 이해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말씀을 듣고 보니 정리가 되는 부분이 있네요..ㄷㄷ
티벳 수행 전승에서 족첸과 마하무드라가 최종차제인 이유.. 그 전에 수십년 씩 수행(신심배양/교학/삼매)을 하는 이유가 그거였군요..
쿤달리니를 예로 드신 <의지처/중심>를 확보를 위한 작업..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