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이 지상에 고금의 역병 펜더믹 공포에도 人間愛와 사랑은 피고진다>-
현실은 항상 우리를 앞서가고 있다. 안개 낀 절망적 열대 우림에서 어디로 살아서 돌아갈 것이란 약속이 없는–길 잃은 인간들의 가난한 방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코로나」-의 공포가 깔린 거리나, 사무실, 빌딩 등에 한 발짝 이동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불안한 생존 상황에서 정서활동 의욕이 발동하겠는가?-위축과 생존! 그러나 살아 움직인다는 자각 활동은 어디에선가 꼬물락 거려야 하지 않겠나?
인생의 베일(painted veil)이 주는 그 영상과
“죽은 것은 개였다”라는 치명적인 짧은 멘트가 주는 의미에 천착한다.
–서머싯 몸(W.Somerset Maugham) -
『살아있는 자들은 인생이라 부르는‘채색된 베일’을 걷어 내지 마라』
이것은 사실 인생을 바라보는 토로이거나 진정한 메시지로 소설이란 장르에서 인간 내면의 깊숙한 속성을 해석해 귀속되어 오고 있다.
-4대 불륜 소설로 자리매김한 「안나 카레니나, 마담 보봐리, 주홍글씨, 인생의 베일」이 모두 본능에 충실한 집착과 방어로 영혼의 고통을 마취시키는 곳으로부터의 탈출에서-진정한 이해를 찾아가는 ‘채색된 베일’을 들여다보고 노출 시키는 과정이 여기에 심도있게 그자취를 들여다 볼수 있다.
그래서 ‘관계의 백신은 진정한 이해로부터’란 방어 논리에 동정과 연민과 비난을 그리고 인간 내면의 정화, 치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인가이다. 장구한 세월을 두고서-
영화, 스포일러
1920년대- 100여년 전의 몸이 쓴 소설- 현대로 소환 각색- 2006년 영화화된 것
원작소설과 영화 환경설정은 다르지만 주인공 부부의 이성과 본능을 조심스럽게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놀라운 담담함의 의식으로 올려놓았다.
학문에 몰두하던 세균의학자「월터」, 사교계에서 감수성 강한 젊은 날을 보냈던 영국 여성「키티」-부부 사이는 이미 부조화가 내재 된 출발이었다.
한낮의 열기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키티의 침실에서 총독부 고위직의 ‘찰스 타운센드’와 밀애를 즐기던 순간 – 출입문 도어 손잡이의 움직임을 포착하게 된다.
손잡이가 움직이는 포스의 영상포인터는 기막힌 암시다.
현장은 적막으로 패스, 부부의 시공간 뇌피는 다른 세계로 추락-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월터의 침묵은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중국 오지 마을로의 동행 강요의 밀도 높은 긴장감으로 이끌어 간다. 동행을 거부한다면 그 이혼을 묻겠다고 한다. 키티는 찰스에게 달려갔지만 그는 비열한 자세로 거부하고, 한순간의 이탈로 치부하고 덮여지길 바랬다. 월터는 찰스의 인성을 꿰뚫고 있었다.
매우 의지적인 월터의 고뇌는 남성이라면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여진다. 사랑에 깊이 피폭된 내면의식을 콜레라의 수인성 전염원과의 사투로 그 인간애에 헌신하고자 하는 행동에 키티는 새로운 각도에서 그를 인식한다.
그리고 키티는 사랑의 상처와 상실감에 나포되어 혼란을 되씹는 가운데, 죽음이 사방에 깔린 중국 오지 메이탄푸는 인간과 삶의 문제가 완전히 뒤바뀐 동양이란 지역의 새로운 세상이 현실로 다가왔다.
초기 사랑의 감정으로 소환되어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돌아보며 소중하며 신성한 사랑을 부활시키는 순간도 만들어 가려 노력한다.
키티는, 인생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한다.
세관원 워딩턴, 프랑스 수녀들과의 현장교감을 통하여 어리고 편협하던 옛 모습을 차차 벗어던지고 광막한 인간존재의 실존 차원에서 자각을 얻게 된다.
-새로이 부닥치는 낯선 풍광과 풍물의 신비로운 세계관이 진솔하게 다가온다. 사랑의 혼성으로서 누구와 불륜을 맺고 파기하는 문제들이 인생이라는 구비치는 강물 위에 시시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찰스’라는 인간 또한 스쳐 지나가는 강물의 한 파장의 집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콜레라 퇴치에 헌신하는 월터는 키티에 대한 깊은 배신감에 그의 마음과 영혼의 문을 닫아버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에 침몰해 간다. ‘키티’ 자신이 임신 도래의 판단에서-아이 아버지가 ‘월터’인지 ‘찰스’인지 확신이 안된다.
월터는 초월적 반응을 보이는 것의 체념인지 패배감인지, 원초적 내면 구도의 자세인지 먹먹한 물음에 직면하리라!
-어느 날,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키티는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죽은 건 개였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는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반어 시에서 –물린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개가 죽었다는 유래라고 전환된다.
월터는 콜레라 환자로부터의 감염이었는지, 세균 실험 중의 감염이었는지 모호하다는 사실 앞에 충격을 받는다. 셀프 다이였는지?도. -월터가 부정한 아내를 심연 같은 배반으로 몰아갔지만, 그 안의 감정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선다.
그후 영국으로 돌아간 키티 자신이 낳은 아이와 우연히 찰스를 만났을 때, 찰스가 어린아이의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 뭐죠?
월터-입니다.
굿 바이 타운샌드씨! 키티는 멘트를 남기고 아이와 함께 신속하게 사라진다!
-전반적 영상 분위기는 형이상학적 思惟의 영역으로 몰아가는대 딸려간다!
End
첫댓글 다른 환경에서 또 개인의 개성이 뚜렷할 수록 더욱 조화로움이란 어렵겠지요.^^
어차피 내가 택한 길이라면 장점을 바라봐야 할 것 같아요.
주인공의 위치가 아니라서 어떻게 얘기할 수 없지만,
<당신은 하늘, 난 땅>하면서 살아 온 바람새에겐 난해.ㅋㅋ
그런데
'죽은 건 개였다' 뭔소리??
그리고
<셀프 다이였는지?>아니길 바래요. 너무 불쌍하잖아요.쩝
5월입니다!
"죽은 건 개였다'는 이따금 쓰여지는 워딩이 아닌가요?
저도 딱 그거다, 라고 엉거주춤허고 도망~!
~ 마~변신과 Zero가치의 남루함과 절망의 망토를 뒤짚어 쓴 꼴 아니겠어요?
감사!
어이구!
딱 부러지게 갈쳐주지.
답답혀 ^^